소설리스트

나를 기억하지 마세요-125화 (125/134)

125

“그보다 어떻게 이곳에 편지를 둔 거지?”

로제는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러자 플리타가 다른 책을 구경하다가 귀를 쫑긋하고는 그녀에게 매달렸다.

“응? 뭐가? 뭐가아, 엄마?”

“아니야.”

“근데 그 편지 안 봐?”

플리타는 로제의 드레스 자락을 잠시 잡고 흔들다가 이내 심심한지 편지 봉투에 호기심을 보였다. 로제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잠시 주저하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남의 편지를 함부로 열어보면 안 돼.”

“히잉. 심심한데……. 숨바꼭질 재미없어.”

아이는 입을 쑥 내밀고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로제가 한 손에 편지 봉투를 들고 플리타의 옆에 무릎을 접고 앉았다.

“재미없니?”

“아빠 언제 와?”

“글쎄…….”

“아빠 보고 싶어.”

플리타는 무릎을 세우고는 그 위에 턱을 괴고 중얼거렸다. 로제는 아이의 투정에 난감한 기분이 들어 뭐라 대꾸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가만히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훌쩍.

그 순간, 플리타가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아이는 무릎 사이에 고개를 묻어버렸다. 우는 얼굴을 들키지 않겠다는 듯.

그런 아이를 본 로제의 표정이 흐려졌다. 그녀는 플리타를 끌어안았다.

어리다고 해서 모르는 게 아니다. 자세히 알지는 못해도 대충 분위기를 파악할 줄은 안다. 플리타는 저와 헤이번의 대화 속에서 불안과 두려움을 읽어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숨바꼭질을 하자던 아빠의 말을 믿고, 아니, 믿으려고 했던 것이리라.

애써 괜찮은 척. 신나는 척.

“엄마아…….”

“괜찮아, 플리타. 우리 숨바꼭질 조금만 더 하고 있으면 아빠 올 거야.”

“……진짜?”

“응. ……심심하면 아빠한테 온 편지 읽어줄까?”

로제는 아이를 달래려고 제 손에 있던 편지 봉투를 흔들어 보였다. 그러자 그녀의 품에서 눈물을 닦던 아이가 슬그머니 호기심을 드러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빠 몰래 편지 훔쳐보자.”

로제가 장난스럽게 말하고는 봉투를 열었다. 실제로 편지를 읽어주려는 건 아니었다. 아이가 두려움을 떨쳐내고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적당한 이야기를 지어낼 생각이었다.

다른 사람의 편지를, 그가 설령 제 남편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편지를 보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니…….

그러나 편지를 펼치고 읽는 척만 하려던 로제의 눈이 흔들렸다. 저도 모르게 편지의 제일 아래쪽, 그 편지를 쓴 사람의 이름을 보고 만 것이다.

[너의 형, 리비어스]

스르륵.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편지가 그대로 떨어졌다. 동시에 로제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엄마?”

플리타가 로제의 얼굴이 창백해진 것을 보고 깜짝 놀라 그녀의 팔을 잡았다. 로제는 제 뺨을 가볍게 두드리며 정신을 차리려 했다.

“엄마, 어디 아파? 얼굴이 하얗게 됐어.”

아이의 연녹색 눈동자에 걱정이 가득했다. 로제는 애써 입꼬리를 올리고는 말을 돌렸다.

“아…… 우리, 편지는 읽지 말자. 아무래도 남의 편지를 보는 건 나쁜 행동인 것 같아. 그렇지?”

“으응. 알았어! 나 저쪽 가서 책 구경해도 돼?”

플리타가 눈을 데구루루 굴리더니 조금 전까지 책을 구경했던 책장을 가리켰다. 로제가 그러라며 허락을 하자 쪼르르 책장으로 달려갔다.

그녀는 아이가 다시 쪼그려 앉아 오래된 책들의 표지를 구경하는 걸 가만히 지켜보다가 자신이 떨어뜨렸던 편지를 집어 들었다. 그녀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선왕이 헤이번에게 남긴 편지가 왜 이곳에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헤이번은 이 편지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게 분명했다. 만약 알았더라면 이 편지가 이렇듯 책과 책 사이에 끼워진 채 오랜 시간 방치되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냥 봉투에 다시 넣어 헤이번에게 돌려주는 게 옳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편지의 윗부분을 읽었다.

[헤이번, 네가 만약 이 편지를 읽게 된다면 아마도 나는 이미 죽은 이후겠지.]

“흡…….”

로제는 한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조금 전 역류했던 피 맛이 다시금 느껴졌다. 아니, 억울하게 죽은 이가 남긴 짙은 혈향 때문인지도 몰랐다.

……선왕은 본인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다.

그 사실이 말하는 게 무엇일까. 그는 제 아내, 선왕비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는 게 아니겠는가.

그녀는 다시 편지를 접어 봉투에 집어넣었다. 그러나 손이 바들바들 떨리는 바람에 편지를 봉투에 넣는, 그 단순한 일이 너무나 어려웠다.

몇 번을 시도한 끝에 간신히 편지를 봉투에 넣은 로제가 그것을 꽉 움켜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빠랑 큰아빠가 어릴 때 여기 와서 가끔 놀았다고 했어.」

선왕은 제 아우에게 자신의 의문스러운 죽음에 대하여 알리고자 했다. 하지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말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자신을 죽이려 하는 이가 아내인 이상, 그러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 숨겨놓은 거야.’

헤이번이 이 비밀 공간의 존재를 알았던 것처럼, 선왕 역시 알고 있었을 것이다. 모친이 두 아들 모두에게 알려주었을 테니까. 하지만 이곳에 들어올 일은 없으리라 여겼을 것이다.

……본인의 죽음, 그리고 그 이후에 벌어질 일을 예견하기 전까지는.

‘만약’이라는 이름으로 이곳에 몰래 들어왔을 선왕이 애처로웠다. 자신이 죽지 않는다면, 헤이번이 이곳을 찾을 까닭이 없을 것이라 여겼으리라.

그렇지만 혹시, 본인이 생각하는 게 맞다면 동생에게 그 억울함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달라는 게 아니라 제 아내가 동생까지 해칠까 염려해서.

그녀를 경계하라, 말하고 싶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서신을 보낼 수는 없으니, 혹여 무슨 일이 벌어져 헤이번이 이곳을 찾는다면 제 편지를 볼 수 있도록.

로제는 선왕의 얼굴 한 번 본 적 없었다. 당연했다. 시골 마을을 떠돌던 고아가 어떻게 이 나라에서 가장 존귀한 이를 볼 수 있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제는 지금 이 순간, 그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다.

소중한 동생에게 편지를 남겨야 했던 그 마음을.

사랑하는 이가 꾸미는 음모를 믿고 싶지 않지만 믿을 수밖에 없었을 그 참담한 마음을.

‘……그래도 폐하께서 남겨주신 이 편지 덕분에 헤이번이 누명을 벗을 수 있을 거예요.’

그 사실이 젊은 나이에 억울하게 죽은 남자의 마음을 위로해 줄 수 있을까. 로제는 편지가 담긴 봉투를 꽉 움켜잡았다.

그 순간이었다. 방 너머에서 발소리가 들린 건.

“……!”

아이가 동그래진 눈으로 로제를 보았다. 로제 역시 편지에 대한 생각을 잠시 접고는 서둘러 아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플리타를 제 뒤로 숨긴 채 바짝 경계하려는데,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로제, 거기 있어? 괜찮아? 플리타도 무사해?”

“아, 아빠! 아빠야, 엄마!”

플리타가 그 목소리를 알아듣고는 로제를 보았다. 로제 역시 그의 목소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하다가 가까스로 버티고 서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빠구나. ……우리를 찾아냈네.”

“아빠가 이겼어! 헤헤! 아빠아아!”

플리타는 숨바꼭질에서 졌다는 사실에도 마냥 기쁜 듯 배시시 웃더니 발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아이가 방 밖으로 나가기 직전, 헤이번이 아이를 안아 들었다.

“찾았다, 내 딸. ……그리고 내 아내.”

헤이번의 푸른 눈이 로제에게 향했다. 혹여 어디 다친 데는 없는지 그녀를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살피는 시선이 세심했다. 로제는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삼키며 그를 향해 다가갔다.

당신이야말로 괜찮은지. 다친 곳은 없는지.

묻고 싶은 건 많았지만,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다. 플리타를 안고 있는 팔에 핏자국이 묻어 있는 것으로 짐작할 뿐이었다.

“……당신, 팔은.”

그러다가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입을 열었다. 그러자 헤이번이 제 팔을 힐끗 내려다보는 시늉을 하더니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다.

“살짝 긁혔어.”

“…….”

“정말이야. 안 그러면 내가 어떻게 플리타를 안고 있겠어.”

로제가 그 말이 진짜인지 확인하려는 듯 헤이번을 살펴보았다. 헤이번은 그런 로제를 보며 그저 웃기만 했다. 어쨌든 그의 말대로 아이를 안고 있으니 크게 다친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바깥 상황은 어떻게 됐어요? 잘 해결됐나요?”

“해결이라……. 뭐, 어느 정도는.”

그걸 해결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헤이번은 굳이 뒷말을 하지 않았다. 이쪽의 큰 피해 없이 왕실 기사단을 모조리 제압하였으니 잘 해결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왕실 기사단을 무력으로 제압하였으니 이는 곧 왕실에 대한 반역이라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제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기는 했지만 말이다.

선왕의 죽음을 자신이 저지른 짓이라, 그렇게 선왕비와 더클렌 공작 쪽에서 주장한 이상.

‘……어쨌든 로제와 플리타만 무사히 지킬 수 있으면 돼.’

왕실에서는 이를 기회로 여겨 또 다른 기사단을 보낼 것이다. 어쩌면 더클렌 공작가에서 반역자를 처단하겠노라 핑계를 대며 그에 합류할 수도 있다. 아니, 그럴 가능성이 매우 컸다. 명분을 가졌으니까. 동시에 자신들이 저지른 죄를 남에게 뒤집어씌웠고.

지저분한 싸움이 될 터였다. 그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될 수도 있을 것이다.

헤이번은 앞으로 벌어질 일을 생각하다가 한숨을 삼켰다. 일단 로제와 플리타, 이들이 무사한 것만 생각하자. 그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복잡한 머릿속을 애써 털어내고는 다시금 미소를 지으려 했다.

그 순간, 로제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참, 당신이 봐야 할 게 있어요.”

“뭐?”

“여기……. 플리타가 찾아낸 거예요.”

로제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편지 봉투를 헤이번에게 건넸다. 헤이번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가 내민 봉투를 보았다. 그러다가 봉투에 쓰여 있는 제 이름을 보고는 두 눈을 부릅떴다.

“이건, 이 편지는…….”

“선왕 폐하께서 당신한테 남기신 건가 봐요.”

로제가 그의 손에 편지를 쥐여 준 뒤, 한 걸음 물러섰다. 헤이번의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너무나 그리운 형의 글씨였다.

왕이니 대공이니 그런 걸 떠나서 제게는 하나뿐인 형이었다. 언제나 바르고 온화했던. 그래서 이 나라의 왕으로서 부족함이 없었던.

헤이번은 편지를 열어보지도 못한 채 다른 손으로 제 목 아래를 꾹 눌렀다.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헤이번.”

그때, 로제가 다시금 그에게 다가와 그의 등을 쓸어주었다. 그 손길에 막혔던 숨통이 트이는 듯했다. 헤이번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내뱉은 뒤, 그녀를 돌아보았다. 눈물 글썽이며 그를 보던 로제가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힘을 받은 헤이번이 입꼬리를 올린 뒤,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열었다. 오랫동안 묵어 있었던 종이 냄새가 코끝에 닿았다.

예전에 모친께서 살아 계시던 시절, 저와 리비어스가 이곳의 고서들을 뒤적이며 놀았던 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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