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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하지 마세요-53화 (53/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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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양각색의 불꽃들이 다양한 모양을 뽐내며 하늘 위를 수놓았다가 반짝이는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그것을 물끄러미 보고 있으려니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아, 나도 불꽃놀이 한번 보고 싶다.」

「그럼 언제 축제 기간 맞춰서 도시에 가 볼까? 이왕이면 수도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수도의 축제가 가장 규모도 크고 화려하니까 볼 것도 많거든.」

언젠가 어린아이처럼 그에게 투정을 부린 적이 있었다. 집 앞 마당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나란히 앉아 그 불꽃을 보고 있다가 충동적으로 꺼낸 말이었다.

그런 자신에게…… 그가 한 약속이었다.

「당신은 수도에 가 봤어요?」

「하하, 물론이지.」

「정말 수도에 같이 갈 거예요? 불꽃놀이 보러?」

「그래, 약속할게. 지금은 당신 몸이 무거우니까, 우리 아이 태어나고 난 뒤에 셋이 같이 가자. 당신이랑 나랑, 우리 아이랑.」

로제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이고는 제 새끼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그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새끼손가락을 걸고 장난처럼 했던 약속이었다. 그날 이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결국 약속을 지켰네요, 당신.’

헤이번과 저, 그리고 플리타. 이렇게 셋이 함께 불꽃놀이를 보러 가자던.

비록 수도가 아닌, 미들피온에서 보게 된 불꽃놀이지만. 장소가 뭐 그리 중요할까. 중요한 건 우리 세 사람이 함께라는 건데.

로제가 울음 같은 미소를 지으며 거듭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저를 보는 시선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그 약속을 했던 장본인이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녀를 살피는 것을 알지 못하고.

“…….”

헤이번의 푸른 눈이 집요하게 로제를 살폈다.

불꽃놀이를 보는 것 같던 그녀가 달라진 건 조금 전이었다. 뭔가를, 아니,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듯한 시선으로 하늘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이더니 제 새끼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그는 시선을 옮겨 그녀의 손을 보았다. 가느다란 손가락에는 아무것도 끼워져 있지 않았다. 실반지 하나조차도 말이다.

‘그러고 보니 결혼반지도 없군.’

남편과 아이가 ‘있었다’고 했던 게 문득 생각났다. 비록 과거형으로 한 말이지만, 어찌 되었든 혼인을 하여 아이까지 낳았단 이야기였다. 그럼 싸구려 결혼반지라도 손가락에 끼고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헤이번은 그저 하녀일 뿐인 여자의 과거사에 대하여 궁금해하는 본인의 모습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채, 불쑥 충동적으로 질문했다.

“혹시, 가족을 생각하는 건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남편을 생각하느냐고 묻고 싶었다. 그와 동시에 뒤늦게 제 상태를 알아차린 헤이번은 자신의 혀끝을 씹고 싶었다. 어이없는 질문을 던진 제 모습에 민망해진 헤이번이 말을 번복하려는 순간, 로제가 눈을 크게 뜬 채 그를 보더니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같이 불꽃놀이를 보러 가자고…… 약속한 기억이 났거든요.”

오래된 이야기였다. 정작 본인은 기억도 하지 못하는. 지금 이 자리에서 한낱 하녀가 꺼낼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밤하늘에 펼쳐진 아름다운 불꽃 때문일까. 로제는 충동적으로 말을 꺼냈다.

그렇게라도 그에게 말하고 싶었다. 당신이 했던 약속을 지켜주어 고맙단 말을 건네고 싶었다.

“그렇게…… 기억이 드문드문 떠오를 때가 있어요. 이미 그 사람은, 제 곁에 없는데. ……그와 함께했던 날의 기억이 떠올라서.”

로제의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번졌다. 헤이번이 그런 그녀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어째서일까.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니, 좋았던 기분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마치 자신이 온전히 누리던 시간에 다른 누군가가 끼어들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와 저, 단둘이 보내던 시간에 낯선 타인이…….

“……미쳤군.”

헤이번이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리 내어 혼잣말을 내뱉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기가 막혔다. 단둘이 보내던 시간이라니. 다른 누군가가 그 시간에 끼어들다니.

이건 흡사, 그녀의 ‘죽은, 혹은 죽었으리라 추측되는’ 남편에게 질투라도 하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그가 재차 기가 막혀 고개를 젓는데, 로제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전하, 방금 뭐라고 하셨는지요? 제가 미처 듣지 못해서.”

“아, 아니다. 그냥…….”

다행이었다. 그녀가 제 미친 소리를 듣지 못했다니. 헤이번은 얼굴이 뜨끈해지는 느낌에 손바닥으로 마른세수를 하듯 제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린 뒤, 한숨처럼 피식 웃고는 입을 열었다.

“부럽군.”

“……?”

로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헤이번은 재차 피식 웃은 뒤, 창밖을 보았다. 불꽃놀이가 끝나가는 것인지 조금 전보다 하늘로 쏘아 올린 폭죽의 수가 적어진 듯했다.

띄엄띄엄 하늘을 가로지르며 수를 놓았다가 흩어지는 불꽃 무리를 보던 헤이번이 잠시 침묵 끝에 다시금 입을 열었다.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서.”

“…….”

“나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최근 몇 년 동안의 기억이 통째로 사라졌지.”

놀란 것일까. 로제가 급히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들렸다. 하기야 당연히 놀랐을 것이다. 대공이 기억을 잃었다는 건 커다란 약점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했으니, 듣는 입장에서는 기겁할 일일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이번은 본인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불꽃놀이가 펼쳐지는 축제의 밤에 취한 탓이라 해도 좋았다. 어릴 때도 그런 분위기에 취해 본 적 없지만, 아무러면 어떻겠는가.

“……플리타를 낳은, 그래, 한때 내 아내였을 여인에 대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해.”

“…….”

“분명 함께한 시간이 있을 텐데. 이 자리를 버리고 평범한 사내가 되기를 꿈꾸었을 정도로 그 시간이 소중했을 텐데 말이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모른다. 왜 기억을 잃었는지. 아이를 놔두고 여인은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혹여 선왕비가 그녀를 해친 건 아닌지. 모든 건 그저 의문으로만 남았다.

그래서…….

“그래서 아이가 제 어미에 대해 물었을 때 곤란했어. 기억나는 것도 없고 아는 바가 하나도 없는데, 아이에게 도대체 무엇을 말해 줘야 하는 건가 해서.”

헤이번이 자조 섞인 투로 말을 하자, 그때까지 조용히 듣고 있기만 하던 로제가 머뭇거리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그래도 공녀님께 잘 말씀해 주셨잖아요. 좋은 사람이었다고, 다정하고…… 밝은 사람이었다고.”

“그거야…….”

헤이번은 푸훗,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이마 위로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올린 뒤, 잠시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툭 털어놓듯 말했다.

“그래, 그러고 보니 약간의 기억은 있군.”

“……!”

그의 말에 로제의 눈이 크게 일렁였다. 하지만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는 그로서는 그녀의 경악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피식거리며 말을 이었을 뿐.

“가끔 환청을 들을 때가 있어. 그녀의 목소리인 것 같은데…….”

“그, 그게 정말인…….”

“그래 봤자 환청일 뿐이지. 어쨌든 내가 플리타에게 한 말은 그걸 토대로 적당히 지어낸 말이었어.”

헤이번은 제 자신을 비웃으며 다시금 고개를 똑바로 했다. 그와 동시에 로제가 흔들리는 시선을 감추며 고개를 숙였다.

기억, 그리고 환청.

그녀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그가 자신을, 제 목소리를 기억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나는 무엇을 바라는 거지? 그가 나를 기억하기를? 아니면, 기억하지 않기를?’

펑, 펑펑.

혼란스러운 마음을 미처 추스르지도 못했는데, 또다시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불꽃놀이의 마지막을 장식하듯 한꺼번에 터진 폭죽에 하늘이 대낮처럼 환해졌다.

* * *

쏴아아.

아침부터 내리던 빗줄기가 정오가 지나자 더욱 굵어졌다. 헤이번은 검토하던 서류의 마지막 줄을 확인한 뒤, 펜을 들었다.

“뷔렐 백작이 이제야 다리 뻗고 자겠군요.”

페드윈이 책상 앞에 서서 서류를 힐끗 보다가 웃음기 섞인 투로 말했다. 헤이번도 그의 말에 입꼬리를 슬쩍 올리고는 서류 끝에 서명을 했다.

“저지른 잘못이 없다면 애당초 다리를 펴지 못할 일도 없었겠지.”

“그래도 사람 마음이 그렇지 않다는 걸 아시잖습니까. 더구나 대공 전하께서 직접 시찰을 오셨으니, 괜한 것 하나라도 꼬투리를 잡힐까 겁이 났겠지요.”

“…….”

헤이번은 페드윈의 말을 듣다가 피식 웃었다. 그렇지 않아도 백작 저에 머무르는 내내 안절부절못하던 백작의 모습이 떠오른 탓이었다.

“어쨌든 다행입니다. 별다른 문제 없이 시찰을 마무리할 수 있어서 말입니다.”

“그건 그렇지.”

헤이번이 페드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때면 몰라도 제 아이까지 함께 데려온 여정이었다. 부패한 가신을 처벌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짓고 싶지는 않았으니 다행인 일이었다.

그가 흡족한 듯 미소를 짓고는 페드윈에게 서류를 건넸다. 페드윈이 그 서류를 받아 챙기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참, 그나저나 오늘 저녁에 백작이 인근 영지의 귀족들을 초청하여 만찬회를 연다고 합니다.”

“백작에게 조금 전에 들었다. 하루라도 빨리 나를 보내고 싶은 모양이야. 송별회까지 열려고 하는 걸 보면.”

“하하, 흡!”

페드윈이 헤이번의 말에 저도 모르게 크게 웃다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헤이번은 그 모습을 보고는 피식 웃은 뒤, 손을 내저었다.

“편히 웃어도 되네, 페드윈 경. 웃으라 한 얘기였으니까.”

“웃으라, 하신 얘기라고요? 오호…….”

헤이번이 건넨 말에 페드윈이 눈을 크게 뜨고는 신기한 듯 그를 쳐다보았다. 그 시선에 헤이번이 미간을 모으고 물었다.

“왜 그렇게 쳐다보지?”

“전하께서 이번 시찰 기간에 많이 변하신 것 같아서요.”

“변하다니?”

그게 무슨 헛소리인가 싶어 헤이번의 얼굴이 살짝 구겨졌다. 하지만 페드윈은 제 말이 옳다는 듯 자신의 손을 쫙 펴더니 엄지를 접었다.

“더 부드러워지셨고.”

그 말에 헤이번의 얼굴이 더욱 찌푸려졌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은 페드윈이 검지 손가락까지 접으며 덧붙여 말했다.

“농담도 하시고. 아, 물론 재미는 없지만요.”

“그럼 앞으로는 농담을 하지 말아야겠군.”

헤이번이 투덜대며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을 보며 싱글벙글 웃던 페드윈이 계속 말을 이었다.

“공녀님과도 더욱 가까워지셨지요. 게다가…….”

중지에 이어 약지까지 접은 뒤, 페드윈이 짓궂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며칠 전에는 거리에서 로제 양과 부부로 오인도 받을 만큼 가깝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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