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그럼 과일 꼬치요?”
“아니.”
“길가에서 샀던 털실 인형인가요?”
“그것도 아니야.”
플리타는 생글생글 웃으며 고개를 계속 저었다. 그 바람에 로제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뭘까.’
그녀는 축제 구경을 나갔던 일을 되짚어 보았다. 아이가 신기해하고 재미있다고 했던 것들을 전부 기억해냈다. 또한 아이가 맛있다고 한 길거리 간식도 떠올리고, 사 달라고 조른 장난감과 인형도 떠올렸다.
“아니야.”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정답이 아니었다. 결국 로제가 두 손을 들어 보이며 포기 선언을 했다.
“죄송해요. 모르겠네요.”
“치……. 그걸 왜 몰라?”
플리타가 입을 삐죽였다. 그러더니 로제의 목을 끌어당기고는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까, 로제가 내 ‘엄마’가 되었던 거! 그거란 말이야.”
“……!”
로제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강아지를 팔던 상인이 자신과 헤이번, 그리고 플리타를 한 가족으로 착각하여 벌어진 일이었다. 그저 한번 웃고 넘어갔을, 그런 사소한 일에 불과했다.
“로제는 안 좋았어?”
그런데 플리타에게는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었나 보다. 축제 구경을 나가서 제일 좋았던 일이 그것이라니. 로제는 저를 빤히 쳐다보며 질문을 던진 플리타를 향해 입꼬리를 올렸다.
“왜 안 좋았겠어요. ……너무 좋았죠.”
“싫은 거 아니지?”
“예.”
“휴우, 다행이다. 음……. 근데 이거, 진짜 엄마한테는 비밀로 해줄래?”
플리타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로제를 향해 말했다. 로제가 흔들리는 눈으로 아이를 보며 물었다.
“비밀로 하자고요?”
“응. 뭐……. 솔직히 난 괜찮은데, 오히려 좋은데……. 로제 말대로 진짜 엄마는 슬퍼할지도 모르니까.”
플리타가 입을 꾹 다물었다. 엄마라 부르며 좋아하던 아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라 부를 사람이 없는 아이. 그 아이가 너무나 안쓰러웠다.
로제는 플리타를 가만히 안아주었다. 그러자 플리타가 졸음이 오는지 하품을 했다.
“이제 정말 주무셔야겠어요.”
“으응. 그럴래. 내일 하양이랑 로제랑, 그리고 아빠랑 같이 놀려면…….”
플리타는 로제의 말에 대답하다가 금세 잠들었다. 하루 종일 축제 구경을 한다고 이리저리 돌아다녔으니 피곤한 게 당연했다.
로제는 아이를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힌 뒤, 몸을 일으켰다. 새근새근 자는 아이의 숨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발소리조차 나지 않도록 조심히 침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숙소로 돌아가려는데, 맞은편에서 불빛이 보였다. 혹시 백작 저의 고용인 중 누가 다가오는 건가 싶어 로제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때, 불빛 쪽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로제?”
“……아, 대공 전하.”
목소리의 주인은 헤이번이었다. 아마도 플리타를 보러 온 모양이었다. 로제는 서둘러 그를 향해 다가갔다. 하인 없이 홀로 나온 건지, 그의 손에 작은 램프가 들려 있었다.
“어쩌지요? 공녀님은 지금 막 잠드셨는데…….”
“내가 늦었군. 살펴봐야 할 서류가 남아 있어서 그걸 마저 보고 나왔더니.”
헤이번이 피식 웃으며 그녀의 말에 대꾸했다. 로제는 그의 눈이 살짝 충혈되어 있는 걸 보았다. 오늘 축제 구경을 한다고 밖에 다녀오는 바람에 미처 처리하지 못한 일을 끝내느라 무리한 것 같았다. 본래 그가 이곳을 방문한 목적은 축제 구경이 아닌 시찰이니 말이다.
“차라도 한 잔 타 드릴까요?”
그래서였다. 피곤해 보이는 그가 안쓰럽고, 한편으로는 그만큼 고마워서 저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말을 꺼낸 것은.
“……차?”
헤이번이 뻑뻑한 눈 위쪽을 손으로 누르다가 뜻밖의 말을 들었다는 듯 로제를 쳐다보았다. 그 시선에 로제가 괜한 말을 꺼냈나 싶어 얼굴을 붉혔다.
“어, 조금 피곤해 보이셔서…….”
“…….”
헤이번은 로제가 허둥대며 꺼낸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로제가 그의 진득한 시선에 얼굴이 새빨개져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제가 괜한 말씀을 드렸어요. 이만 가 보겠…….”
“준다고 했다가 안 주면 더 서운한 법인데.”
“……예?”
“내 방으로 가지. 그렇지 않아도 차 생각이 간절하던 참이었어.”
헤이번은 마치 농담처럼 말을 내뱉고는 몸을 돌렸다.
로제가 그 뒷모습을 보다가 허둥지둥 그의 뒤를 따라갔다.
* * *
백작 저에도 피로에 도움이 된다고 알려진 찻잎이 마침 준비되어 있었다. 로제는 다행이다 싶어 차를 내려 헤이번에게 건넸다.
“여기 있습니다, 전하.”
“고마워.”
헤이번이 로제가 따라준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입가가 느슨하게 풀어지는 걸 본 로제가 조금 안심이 된 듯 미소를 지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그녀는 두 손을 모으고 그를 향해 예를 취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기 위해 몸을 돌리려는 순간, 헤이번이 찻잔을 내려놓더니 손을 들어 그녀를 막았다.
“같이 마시지.”
“……예?”
“로제, 너도 피곤해 보이는데 차 한 잔 마시고 가는 게 낫지 않겠어?”
“아, 아닙니다. 전하. 제가 어떻게 감히…….”
로제가 그의 제안에 기겁하여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헤이번은 아랑곳하지 않고 새로운 찻잔 하나를 그의 맞은편에 놓은 뒤, 직접 찻주전자를 들어 차를 따랐다.
“‘감히’가 아니라 ‘고작’ 차 한 잔일 뿐이야. 부담 가질 것 없어.”
헤이번은 찻잔을 눈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 모습에 어쩔 줄 몰라 하던 로제가 별다른 방법이 없다는 듯 어색하게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두 손으로 찻잔을 들고 소리 없이 차를 마셨다.
차의 향기가 은은했다. 향기만으로도 피로가 풀리는 효과가 있는 것일까. 처음에는 바짝 긴장했는데, 향긋한 차를 마시다 보니 긴장이 풀린 건지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
로제는 저도 모르게 표정을 풀고 방 안을 둘러보았다.
헤이번이 머무르는 객실은 고풍스럽기 그지없었다. 백작이 특별히 신경을 썼다는 걸 누구든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대공’의 방문이니 당연했다.
하지만…….
방 이곳저곳에 널려 있는 서류 더미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헤이번이 얼마나 일에 파묻혀 있는지, 하다못해 이곳에 와서까지 얼마나 일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나마 오늘 하루는 밖에 나가 쉬었다고 생각했는데, 밀린 일을 하느라 되레 밤늦게까지 쉬지 못하는 걸 보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바로 그때였다.
창밖에서 펑펑, 뭔가가 연이어 터지는 소리가 난 것은.
“……!”
그 소리에 깜짝 놀란 로제가 찻잔을 내려놓고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헤이번이 그녀를 보고는 손을 내저으며 입을 열었다.
“별것 아닐 거다. 아마도 불꽃…….”
하지만 로제는 그의 말을 듣기도 전에 홀린 듯이 창가로 향했다. 그리고 심각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
하늘 위를 곱게 수놓은 불꽃이 화사하게 폈다가 서서히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 또 다른 모양의 불꽃이 피어났다.
“아, 불꽃놀이!”
헤이번이 말하려던 게 이것이었음을 깨달았다. 동시에 로제는 잠들어 있을 플리타를 떠올리고는 황급히 돌아섰다. 그런데 바로 눈앞에 남자의 가슴팍이 보였다. 어느새 그가 그녀의 등 뒤에 다가와 있던 터였다.
그와 부딪칠 뻔한 그녀가 깜짝 놀라 비틀거렸다.
“괜찮나? 놀라게 하려던 건 아닌데.”
헤이번이 비틀거리는 로제의 팔을 잡아주었다. 로제가 제 팔을 잡은 그의 손을 저도 모르게 내려다보았다.
“아, 실례했군.”
헤이번이 그 시선을 깨달은 듯 그녀를 잡았던 손을 놓아주었지만, 그의 손에 잡혔던 느낌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단단히 저를 붙잡아주던 그 안정감은. 그 다정함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전하.”
로제는 가슴속이 술렁이는 걸 애써 다잡고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얼굴이 새빨개진 건 미처 감추지 못했다. 헤이번이 홍조를 머금은 로제의 얼굴을 보다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차를 아직 다 마시지 않았잖아.”
“어……. 공녀님께 가 봐야 할 것 같아서요. 불꽃놀이를 보고 싶어 하셨던 터라.”
로제는 치맛자락을 쥐었다가 놓으며 대답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제 말이 변명처럼 들렸다.
지금 이 자리를 벗어나려는.
왜 벗어나고 싶은 건지도 모르면서.
헤이번이 그녀의 말을 듣고는 손으로 턱을 쓸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글쎄, 아이가 곤히 잠들었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아이를 일부러 깨우려고?”
“한번 가 보고요. 저 폭죽 소리에 놀라서 깨셨을 수도 있으니까요.”
로제가 다시금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나가려 하자 헤이번이 손을 뻗어 그녀를 막았다.
“됐어. 그냥 자게 내버려 둬. 하루 종일 노느라고 피곤했을 테니 웬만한 소리로는 깰 것 같지 않은데.”
“하지만…….”
로제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헤이번이 그런 그녀를 힐끗 보더니 소파로 걸음을 옮기며 별것 아니란 듯 말을 이었다.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사람을 시켜 폭죽 몇 개를 사다 놓으라 하지.”
“……예?”
이게 갑자기 무슨 말인가 싶어 로제의 눈이 동그래졌다. 헤이번이 소파 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묻고는 제 맞은편 소파를 가리키며 그녀의 의문을 풀어 주었다.
“듣자 하니 저택 내에서 할 수 있는 불꽃놀이용 폭죽을 판다더군. 아이들을 위해서 말이야. 그걸 몇 개 사다가 늦은 저녁에 플리타와 함께 폭죽을 터뜨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안 그런가?”
“음, 물론 그렇죠.”
결코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오히려 그것이 플리타에게는 더 잊지 못할 추억이 될지도 모른다. 넓은 하늘에 펼쳐지는 화려한 불꽃놀이만큼은 아닐지라도, 아니, 제 손으로 아빠와 함께 폭죽을 터뜨리고 자신이 하늘로 쏘아 올린 불꽃을 구경하는 편이 더 인상 깊을 테니까.
“그러니 차나 다 마시고 가지. 이왕 이렇게 된 거, 불꽃놀이도 구경하고. 여기서 보는 게 더 잘 보일 거야.”
헤이번이 재차 자리에 앉을 것을 권하니 로제도 더 이상 사양하지 못하고 소파로 다가가 앉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