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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하지 마세요-46화 (46/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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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야…… 너는 내가 기억이 없다는 걸 모르니까.’

아이는 아비의 기억이 없다는 걸 알지 못한다. 어린아이가 알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그에 대하여 듣는다고 해도 다섯 살에 불과한 아이가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저 스스로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일을, 어린아이가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그래서 막연히 미뤄두었다.

플리타 역시 지금껏 저를 낳은 어미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물어본 적이 없었다. 어쩌면 제게 물어볼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렇게 따지면, 아이에게 자신의 존재가 이제는 그만큼 편해진 것이라 봐도 되겠지만……. 그렇다고 하여 마냥 기뻐하기에는 너무나 난감한 상황이었다. 기억이 없으니 아이에게 해 줄 수 있는 말도 없고.

헤이번이 한참을 망설인 끝에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은…… 사람이었다.”

“……!”

로제가 눈을 내리깐 채 입술을 깨물고 있다가 그 말에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헤이번은 그녀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채 난감한 표정으로 계속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다정하고, 밝은 사람이었지.”

헤이번은 가끔 환청처럼 들렸던 목소리를 떠올리며 가까스로 대답했다. 그 흐릿한 잔상 속 존재가 아마도 아이의 엄마, 제 아내였으리라는 생각과 함께.

그렇지만 그것을 알 리 없는 로제는 흔들리는 눈으로 그를 보았다.

‘기억하지도 못하면서.’

그녀는 그를 붙들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기억하지도 못하면서, 그러면서 그렇게 말하는 건…… 반칙이잖아요. 당신의 기억을 지워버린 사람이 바로 난데. 기억을 없애는 차를 준 게 나였는데. 당신은 의심 한 번 하지 않고 그 차를 마셨고, 우리가 함께한 시간을 내 마음대로 지워버렸는데……. 그런데 왜 그렇게, 나를 좋은 사람인 것처럼 말해요.’

로제의 눈이 뿌옇게 흐려졌다. 두 손을 꽉 오므려 쥔 채 울음을 참기 위해 입 안쪽 살을 깨물었다.

그가 그저, 아이를 위하여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이번의 말은 로제의 가슴속을 울렸다.

좋은 사람.

다정하고 밝은 사람.

헤이번이 여전히 저를 그렇게 봐 주는 것만 같아서, 제게 해 주는 말 같아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런데 왜…….”

바로 그때, 플리타의 목소리가 들렸다. 로제는 가슴속에서 퍼져 나가는 무지근한 통증을 애써 참으며 다시 아이를 보았다. 아이가 그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는 것 같더니 고개를 기울였다.

“왜 난 지금…… 엄마가 없어요? 엄마가 나 싫어서, 아니, 로제가 그런 건 아닐 거라고 하기는 했지만.”

플리타는 언제나 가장 궁금했던 것을 용기 내어 질문했다. 물론 중간에 로제를 힐끗 돌아보고는 말끝을 흐리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 말에 로제의 눈물이 쏙 들어갔다.

아이의 마음속 깊숙한 곳에 난 상처까지 깨끗이 지우기에는 자신이 역부족이었나 보다. 아직도 그런 생각을 하는 걸 보면 말이다. 하기야 어미에게 버려졌다는 상처가 그렇듯 쉽게 아물 수 있는 것은 아닐 테지만.

‘……하지만,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아가.’

로제는 절박한 마음으로 소리 없이 중얼거렸다. 그와 동시에 헤이번이 고개를 저었다.

“너를 싫어하지 않았다, 플리타.”

“……그럼요?”

플리타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헤이번이 입을 굳게 다물었다가 재차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를 위해서, 너와 나를 위해서 잠시 떠나 있을 뿐이야. 언젠가는……. 그래, 언젠가는 돌아올 거다.”

로제는 헤이번의 말에 저도 모르게 옷 앞섶을 꽉 움켜잡았다. 그저 아이를 달래기 위해 건넨 말이라는 걸 아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이 그녀의 시린 가슴속을 따스하게 어루만져 주었다.

바로 그 순간, 아이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말이 나왔다.

“난 로제가 엄마였으면 좋겠어요.”

“……!”

“……!”

헤이번과 로제가 동시에 눈이 휘둥그레져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서로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얼굴이 붉어졌다.

사실, 별것 아닌 말이었다. 어린아이라서 할 수 있는 말이었다. 플리타는 그저 아이다운 바람을 표현한 것일 테니까.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이가 로제이니 그런 말을 했을 터였다.

하지만 머리로는 그것을 이해했음에도 불구하고 둘 다 당혹감을 털어내지 못하고 허둥댔다. 그러다가 먼저 얼굴을 쓸어내리며 헛기침과 함께 말을 꺼낸 건 헤이번이었다.

“흠흠, 플리타. 그건…….”

“로제가 엄마 하면 안 돼요?”

플리타는 얌전하고 소심하던 평상시 모습과 달리 적극적으로 질문했다. 헤이번이 그 질문에 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달싹이자 로제가 끼어들었다.

“공녀님, ……그건 안 돼요.”

로제는 가슴이 미어졌다. 왜 하고 싶지 않겠나. ‘엄마’라는 그 이름을 왜 갖고 싶지 않겠나. 기꺼이 되고 싶었다. 아이에게 엄마 노릇을 하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가혹한 운명이 딱 한 번 제게 허락해 준다면.

“왜 안 돼?”

그러나 아이는 그런 사정을 모르기에 맑은 눈으로 로제를 보며 물었다. 로제는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꾹 한 번 깨물었다가 놓은 뒤, 천천히 대답했다.

“……그럼 공녀님의 진짜, 모친께서 슬퍼하실 테니까요.”

투정 부리는 아이를 달래는 로제의 목소리가 살짝 떨려 나왔다.

“전하께서 좀 전에 말씀하셨잖아요? 언젠가는…… 그분이 돌아오실 거라고요. 그런데 그분이 돌아오셨을 때, 당신의 자리에…… 다른 누가 있는 걸 보게 되시면 얼마나 슬프시겠어요.”

사랑하는 아이의 옆에.

그리고 사랑하는 남자의 옆에.

일부러 생각하지 않았던 미래가 선연히 그려졌다. 누군가가 이들의 곁에 있는 미래. 저처럼 천한 신분도 아니고, 병이 든 것도 아닌.

고귀하고 우아한, 그리고 아프지 않고 건강한.

그런 여인이 엄마가 되고, 아내가 되어 이들과 함께할 미래.

아마…… 그때쯤 되면 자신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터.

그것을 생각해서일까. 말을 하던 로제의 목소리가 잠겼다. 헤이번이 미간을 모은 채 그런 로제를 바라보았다.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뭔가를 놓치고 있는 것처럼…….

‘쓸데없는 생각이지.’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이와의 대화 중에 느닷없이 무슨 잡다한 생각인가 싶었다. 그 와중에도 로제는 아이에게 집중한 채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그 자리는, 그분을 위해서 남겨주세요.”

영원히 남겨두라는 게 아니다. 그렇게 과한 욕심을 부릴 정도로 염치가 없지는 않았다. 더구나 주변에서 그렇게 놔두지도 않을 것이다.

그녀는 대공 저의 하녀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었다.

그중에는 대공의 혼사와 관련된 이야기도 있었다. ‘왕위 계승’이란 큰 문제가 얽혀 있는.

선왕비와 혼인하는 왕실 혈족이 왕위에 오른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선왕비가 자신과 살고 있던 헤이번을 찾아온 까닭은. 그와 혼인하기 위하여. 그를 왕위에 올리기 위하여.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형과 결혼했던 이가 그 동생 되는 사내와 다시금 혼인을 한다는 것은. 그러나 왕관의 주인을 결정하는 일이 그 혼사에 달려 있으니 그럴 수도 있는 건가 보다.

그런데…… 제가 직접 내어준 차를 마신 남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선왕비와 혼인하지 않았다. 마치 자신과 했던 맹세를 지키겠다는 듯.

단둘이 달빛 아래에 서서 서로에게 유일한 사람이 되겠다며 맹세했던 그날을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물론 그것은 제 착각일 뿐이다. 기억에도 없는 여자, 그리고 기억에 남아 있지 않은 맹세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 형체조차 찾아볼 수 없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선왕비와의 혼인을 꺼려서, 저처럼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감히 이해할 수 없는 어떤 모종의 이유로, 그렇게 혼인하지 않는 것일 터였다. 헤이번이 선왕비를 냉랭하게 대하는 것만 봐도 그 점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누군가와 혼인할 것이다. 언제까지 이렇듯 홀로 살아갈 수는 없을 테니.

“……엄마를 위해서?”

“예, 공녀님.”

그래서 로제는 기꺼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가슴속은 떨쳐내지 못한 미련이 들러붙어 누더기가 되었을지언정, 마땅히 각오하고 감수해야 할 일이기에.

“으응…….”

그 대답에 플리타가 아쉬운 듯 입을 뾰족하게 내밀고 있더니 이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던 헤이번이 입을 연 건 그 직후였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한 거지?”

“예?”

“……그, 로제가 엄마였으면 좋겠다는 것 말이다.”

헤이번이 아이를 쳐다보다가 힐끗 시선을 돌려 로제를 보았다. 로제가 흠칫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서글픔에 가라앉았던 마음이 제멋대로 술렁였다. 그녀는 그런 제 속내를 들킬까 싶어 황급히 고개를 돌려 그의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헤이번의 푸른 눈은 그런 로제를 따라 움직였다. 본인이 의식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무심코 나온 행동이었다.

“으음, 그게요.”

그때, 아이가 고민 끝에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제야 헤이번은 제 행동을 깨닫고 서둘러 시선을 거두었다. 그의 얼굴이 살짝 붉어진 채 달아올랐다.

그런 두 사람의 상태를 알 리 없는 아이는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백작 부인이랑 그 언니를 보니까 부러웠어요.”

“……아.”

로제는 자신도 모르게 탄식하다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아이를 향한 안쓰러운 시선은 감추지 못했다. 이제야 이해가 됐다. 플리타가 왜 갑자기 울먹였는지, 뭐가 그렇게 서러워 울음을 그치지 못했는지.

다정한 모녀의 모습에 아이가 제 곁의 빈자리를 생생히 느꼈으리라. 어미의 부재에 익숙해졌다고 하여 그것이 아무렇지 않을 리 없었다. 이제 겨우 다섯 살의 아이에게는 ‘엄마’가 필요했다.

“그랬구나.”

헤이번 역시 그 마음을 짐작하고는 무거운 투로 대답했다. 플리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애써 괜찮은 척 웃었다.

“그냥, 잠깐 부러웠던 거예요. 이제 괜찮아요. 저한테는 아빠도 있고, 로제도 있으니까. 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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