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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리타가 당황하여 포크를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델라는 아이의 말을 중간에 끊고 사과했다. 그 바람에 되레 난처해진 건 플리타였다.
솔직히 아이는 푸딩을 테이블 위에 떨어뜨린 게 이렇듯 사과를 할 정도로 큰일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저도 모르게 로제를 찾아 뒤편으로 고개를 돌리려 했다.
바로 그때, 백작 부인이 혀를 가볍게 차고는 아델라에게 타박을 했다.
“어쩌자고 이렇게 칠칠하지 못하게 구는 거니? 이래서 숙녀가 되겠어?”
“치이……. 저는 아직 어리잖아요, 엄마.”
“어리긴. 이제 조금 있으면 사교계에 데뷔도 해야 할 텐데.”
타박하듯 하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백작 부인의 목소리에는 다정한 웃음이 묻어났다. 로제조차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그러니 플리타가 그것을 느낀 건 너무나 당연했다. 아이는 포크를 집으려다가 눈을 크게 뜨더니 그들 모녀를 쳐다보았다. 뒤이어 플리타의 어깨에서 힘이 쭉 빠졌다.
처음 보는 애정 어린 눈으로 딸을 살피는 엄마의 모습이었다.
‘……엄마.’
문득 부러움이 강하게 밀려들었다. 하지만 플리타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금 포크를 들었다. 아이의 연녹색 눈이 테이블 위로 향했다.
달콤한 디저트가 테이블 가득 차려져 있었지만, 더 이상 맛있지 않았다. 좋아하는 살구잼이 들어간 케이크도, 바삭바삭한 쿠키도, 딸기 과육이 씹히는 주스도.
탁.
플리타는 재차 포크를 내려놓았다.
‘……나도, 엄마가 있었으면.’
항상 그런 바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겉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엄마가 없어도 아빠가 있으니까 괜찮았다. 아니, 괜찮지 않았지만 그래도 꾹 참았다. 게다가 지금은 로제도 있어서, 그래서 정말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부러웠다.
엄마가 있는 저 언니가. 엄마, 하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있는 저 언니가.
“입맛에 안 맞으세요, 공녀님? 그럼 이걸 드셔 보시면 어떨까요?”
그 순간, 뒤편에 서 있던 로제가 곁으로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플리타가 고개를 돌려 로제를 보자 부드러운 시선 속에 저를 향한 염려가 담겨 있었다.
“……흐잉.”
그 다정함에 꾹꾹 눌러 참았던 감정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참을 새도 없이 새어 나온 울음에 스스로 더욱 서러워져 눈물까지 방울방울 떨어졌다.
“공녀님?”
느닷없이 울먹이는 아이의 모습에 당황한 로제가 냉큼 아이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백작 부인과 그 딸 역시 당황한 건 마찬가지인 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공녀님, 왜 그러세요?”
“…….”
플리타는 로제의 물음에 눈물을 대롱대롱 매단 채 고개를 흔들었다.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입을 꾹 다문 모습이었다.
“공녀님, 혹시 불편하신 점이 있으셨나요? 그러시다면 말씀을 하셔야…….”
백작 부인이 끼어들더니 철없는 아이를 대하듯 작게 혀를 찼다. 플리타가 억지로 울음을 참으려고 양손으로 제 눈가를 문지르던 그때, 저벅저벅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어머나! 대공 전하.”
백작 부인과 그녀의 딸이 당황하여 냉큼 자리에서 일어섰다. 헤이번은 그들이 저를 향해 예를 표하는 것을 힐끗 보고는 플리타에게 시선을 던졌다. 울먹이는 딸을 본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아이에게 왜 우는지 묻는 대신, 아이를 달래느라 여전히 쪼그려 앉아 있던 로제에게 무언의 질문을 던졌다.
그 시선에 답할 길이 없던 로제가 느릿하게 고개를 저은 뒤에야 헤이번의 입이 열렸다.
“플리타, 왜 우는 거지?”
“…….”
플리타는 제 아비를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죄송……. 흡, 죄송해요.”
뭐가 그렇게 서러운 건지, 아이는 울음을 쉽게 멈추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억지로 꾹꾹 울음을 참으려 하는 모습이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후우…….”
헤이번이 그 모습을 보다가 백작 부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백작 부인이 새파랗게 질린 채 어쩔 줄 몰라 하며 드레스 자락을 움켜잡았다가 놓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공녀를 초대하여 티타임을 갖던 중에 벌어진 일이니, 제 탓이라 여긴 모양이었다. 더구나 일을 수습하기도 전에 그 광경을 대공에게 들킨 셈이니 말이다.
“백작 부인께 양해를 구해야겠습니다.”
“……예?”
“플리타를 먼저 데리고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아, 아아! 예! 물론이지요, 대공 전하!”
백작 부인은 무슨 말인가 싶어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뒤늦게 헤이번의 말을 이해하고는 서둘러 대답했다. 헤이번이 그런 그녀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한 뒤, 플리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들어가자, 플리타.”
“우웅……. 그, 그래도 돼요?”
플리타가 가까스로 울먹임을 멈추고 헤이번을 쳐다보다가 백작 부인이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백작 부인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요, 공녀님. 바라시는 대로 하셔도 된답니다.”
플리타는 백작 부인의 말을 듣고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하지만 아이의 표정은 여전히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헤이번이 그런 아이를 내려다보다가 로제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이를 데리고 따라오도록.”
“예, 전하.”
로제는 먼저 발길을 돌린 헤이번을 뒤따라 플리타와 함께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머무르는 객실로 가는 내내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았다. 헤이번도, 플리타도, 하물며 로제마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마다 복잡한 심경을 추스를 수 없었던 탓이다.
‘대체 왜 갑자기 울음을 터뜨린 걸까.’
로제는 제 손을 잡고 타박타박 걸어가는 플리타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다가 미간을 좁혔다. 아이와 가까워졌다고 느꼈는데, 이번만큼은 아이의 마음을 도무지 헤아릴 수가 없었다.
‘백작 영애가 같이 놀아주지 않는다고 울지는 않았을 텐데…….’
다섯 살에 불과하지만, 훨씬 더 일찍 철이 든 아이였다. 차라리 그런 이유로 울었던 거라면 나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리란 걸 알기에 더욱 걱정이 되었다.
그렇게 침묵 속에 걷던 세 사람이 헤이번의 객실 앞에 도착했다. 헤이번이 먼저 문을 열고 들어가고, 그 뒤를 따라 로제가 플리타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방 안의 풍경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헤이번을 따라 함께 이곳까지 온 행정관들이 방 이곳저곳에 앉아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다가 거의 동시에 고개를 든 탓이었다.
“헉!”
플리타 역시 그들의 퀭한 눈을 보고 깜짝 놀랐는지 로제의 손을 꽉 잡았다. 헤이번이 그런 아이를 돌아보더니 쯧, 하고 혀를 차고는 그들에게 입을 열었다.
“잠시 쉬도록 하지.”
“……예?”
“예?”
여기저기서 그의 말에 고개를 쑥 내밀며 큰소리로 물었다. 헤이번이 다시 말하는 대신, 밖으로 나가라는 고갯짓을 했다. 그러자 퀭한 눈만 끔뻑이던 사내들이 후다닥 빠져나갔다. 자칫 게으름을 부렸다가는 붙잡히기라도 할 것처럼 말이다.
썰물처럼 빠져나간 사람들을 뒤로한 채 로제가 잠시 멍해 있는데, 헤이번의 목소리가 들렸다.
“……좀 치워가면서 일을 했어야 하는데.”
“아! 제가 치우겠습…….”
로제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온갖 서류로 뒤덮인 객실 안을 치우려 했다. 그러나 헤이번이 손사래를 치며 그녀를 막은 뒤, 소파를 가리켰다.
“나중에 사람을 불러 치우라고 하면 돼.”
“하지만…….”
“플리타, 너도 이리 와서 앉아라. 네가 앉아야 네 하녀도 내 말을 들을 것 같구나.”
헤이번은 머뭇거리는 로제 대신 플리타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플리타가 주춤거리며 다가와 그가 가리킨 소파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그제야 로제도 어쩔 수 없이 플리타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면서도 아이의 주변에 흩날려 있던 서류를 챙겨서 테이블 위에 놓는 건 잊지 않았다.
헤이번이 그 모습에 슬쩍 입꼬리를 올리고는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덤덤히 차를 따라 플리타의 앞에 놓아주었다.
“차를 마시면 마음이 진정되겠지. 마시거라.”
“전하, 어린아이에게 차를…….”
로제가 그 광경에 기겁하여 말리려 했다. 티타임을 가질 때도 나이 어린 숙녀에게는 차가 아닌 우유나 코코아를 주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 겨우 다섯 살 어린아이에게 어른들이 마시는 차를 주다니.
그러나 그녀가 막을 새도 없이 플리타가 냉큼 두 손으로 찻잔을 들었다. 처음 마시는 차에 대한 호기심, 거기에 더하여 제 아비가 직접 따라준 차라는 것에 호감이 앞선 탓이었다.
“으으, 써어…….”
하지만 호기심의 대가는 컸다. 플리타는 차를 한 모금 마시자마자 인상을 쓰며 푸푸, 하고 소리를 냈다. 차의 쓴맛에 놀라 저도 모르게 나온 행동이었다.
“아차.”
플리타가 쓴맛을 없애려고 혀를 내밀다가 뒤늦게 제 행동을 깨닫고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여전히 입 안이 얼얼한지 아이의 얼굴은 울상이었다.
“아……. 내가 실수를 했군.”
헤이번이 그런 플리타를 보고서야 제 실수를 깨닫고는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잠시 기다려라. 네가 먹을 만한 간식을 가져오라 할 테니.”
“아니에요. 간식 안 먹어도 돼요, 아빠.”
하지만 플리타는 헤이번이 하녀를 부르려는 걸 막은 뒤, 입을 달싹였다. 이제 말할 준비가 된 것 같은 아이의 모습에 헤이번이 다시금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까 왜 울었지?”
“……으응.”
플리타가 막상 말을 하려니 용기가 나지 않는 듯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곧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조금 전 아이가 마신 찻물처럼 연한 녹색의 눈동자 안에 그가 담겼다.
“……엄마는.”
그리고 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 밖의 것이었다. 로제가 플리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저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그러나 그런 로제의 반응을 알 리 없는 플리타는 거듭 심호흡을 한 뒤, 그를 향해 또박또박 질문을 던졌다.
“엄마는 어떤 사람이었어요?”
“…….”
그리고 헤이번 역시 당황하고 말았다. 플리타가 제 어미에 대하여 물어볼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아니, 아이가 저를 낳은 존재에 대해 궁금해할 것이라고는 예상했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그녀에 대하여 물어볼 줄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