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기억하지 마세요-9화 (9/134)

9

“우웅…….”

플리타가 손가락을 꼬물꼬물 움직이며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그러다가 멀리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리자 냉큼 옆에 있던 기둥 뒤에 몸을 숨겼다.

아이의 새하얀 얼굴이 기둥 뒤에 가려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공관의 고용인들이 그 앞을 지나갔다.

“……에휴.”

플리타는 다시 혼자가 되고 나서야 슬그머니 기둥 뒤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고는 재빨리 고개를 좌우로 돌려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무서워.”

무섭고, 낯설고, 어색하다.

어린아이가 할 수 있는 표현은 많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 해서 느끼는 감정까지 단순한 건 아니지만. 플리타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무섭다는 것 하나로 몰아넣은 뒤, 입을 삐죽였다.

심심했다. 검은색 옷을 입고 온 이곳은 집보다 더 심심하고, 무서웠다.

“……아빠.”

그나마 아빠가 곁에 있으면 좋을 텐데.

플리타에게 있어서 ‘아빠’는 무섭지만 좋은 사람이었다. 저와 놀아주지는 않지만. 무뚝뚝하기는 하지만.

“……엄, 마.”

플리타는 기둥에 등을 기댄 채 쪼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가만히 낯선 단어 하나를 입 속에서 굴리다가 덜컥 소리 내어 말해 보았다.

‘……엄마.’

‘엄마……. 다른 사람들은 다 있는데, 왜 나는 엄마가 없을까.’

플리타가 요즘 가장 궁금해하고 고민하는 게 그것이다.

‘엄마는 어떤 사람일까.’

‘엄마는 왜 나를 두고 떠났을까.’

‘나를 버린 걸까. 내가 미워서 가버린 걸까.’

엄마에 대한 기억은 하나도 없다. 그리고 아무도 엄마에 대해 얘기해 주지 않는다.

언젠가 유모한테 엄마에 대해 물어봤다가 야단을 들었다.

「천한 평민 여자입니다! 어찌 그런 여자를 보고 싶다고 하시는 거예요! 공녀님께서는 괸터스의 귀한 핏줄이십니다. 대공 전하의 따님이세요. 그것만이 중요할 뿐입니다. 아시겠어요?」

유모는 플리타의 양어깨를 잡고 다그치듯 말했다. 그런 그녀의 태도가 무서워서, 플리타는 유모의 말을 전부 이해한 것도 아니면서 무작정 알았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뒤에도 유모는 플리타가 뭔가 잘못을 저지르면 전부 ‘천한’ 피가 섞여서 그렇다고 엄마의 탓으로 돌리고는 했다.

그래서 플리타는 더 이상 엄마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았다. 저 때문에 엄마가 괜히 야단을 맞는 게 싫어서. 미안해서.

“……우웅.”

플리타의 연녹색 눈에 눈물이 고였다. 아이는 주눅 들어 움츠러들어 있다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고는 괜히 씩씩한 척 입 밖으로 소리를 냈다.

“심심하면 혼자서라도 놀면 되지. 나는 아기가 아닌걸. 혼자서도 잘 놀아. 응. 맞아.”

플리타는 손등으로 눈을 비빈 뒤, 양쪽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섰다. 그리고 일부러 더 힘을 내서 우다다다, 복도 건너편으로 달려가 창틀에 손을 얹고 밖을 보았다.

“우와아…….”

마침 창밖으로 펼쳐진 하늘을 가로지르며 새들이 줄지어 날아가고 있었다. 플리타는 언제 움츠러들었나 싶을 정도로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이의 작은 몸이 새들이 날갯짓을 할 때마다 덩달아 움찔거렸다.

“새랑 같이 놀아야지!”

심심하던 와중에 새의 존재가 너무나 반가웠다. 아이는 신이 나서 공관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하늘 위로 날아가는 새들의 무리를 따라 묘역 외곽으로 향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플리타가 왕실 묘역 외곽으로 가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선왕의 추모식을 위해 모인 왕족과 귀족들을 접대하고 추모식을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었기에.

그러니 설령 플리타를 봤다고 할지라도 귀찮음을 무릅쓰고 아이에게 다가갈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플리타는 어느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고 묘역 외곽에 있는 호수까지 홀로 가게 되었다.

* * *

“……저곳에 있겠구나.”

로제는 멀리 보이는 건물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다행히 왕실 묘역을 찾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선왕을 추모하기 위하여 모여든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모두가 묘역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곳은 오로지 왕족과 귀족들을 위한 공간이었다. 일반 평민들은 그저 묘역 외곽에 모여 젊은 나이에 죽은 비운의 왕을 추모하며 기도할 수 있을 뿐이었다.

로제는 여기저기서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을 피해 외부 사람들의 접근을 막는 울타리 근처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울타리를 따라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저 너머에 아이가 있다. 그리고 사랑했던 남자가 있다.

그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로제는 대공 저 앞에서 보았던 아이, 플리타를 떠올렸다.

가까이에서 볼 수만 있다면.

한 번만이라도 그 작은 몸을 품에 안아 볼 수 있다면.

로제는 과한 욕심이라는 걸 알면서도 저도 모르게 치밀고 올라오는 간절한 바람에 옷 앞섶을 꽉 움켜잡았다.

“어? 저기, 애가 위험하겠는데?”

그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로제가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플리타.’

묘역 안쪽에서 아장아장 걸어 나오는 아이가 보였다. 플리타였다. 아이는 정면을 보지 않고 하늘을 바라보며 호수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 안 돼! 안 돼, 아가야!’

로제의 얼굴이 금세 하얗게 질렸다. 로제는 아이가 호수에 빠질까 봐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나 플리타는 그런 로제의 염려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채 새를 구경하느라 앞을 보지 않고 계속 호수로 걸어갔다.

“안 돼!”

그리고 플리타가 젖은 땅을 밟고 미끄러져 호수에 빠진 것과 로제가 울타리를 뛰어넘어 아이를 향해 달려간 건 거의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 * *

하녀의 비명 속에서 제 딸의 이름을 듣자마자 헤이번은 공관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리고 마주한 건 땅바닥에 축 늘어져 누워 있는 플리타였다.

아이는 물에 빠진 것인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은 상태로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헤이번은 그런 플리타를 보고 눈을 크게 뜬 채 한 걸음, 발을 내디뎠다.

딸에게 다정한 말 한마디 건넨 적 없지만, 그래도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갑자기 기억에도 없던 아이의 존재에 당황했던 적은 있었어도, 아이가 싫었던 적은 없었다.

헤이번은 가슴속을 찢는 듯한 통증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플리타에게 다가가다가 그제야 누군가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숙인 채 플리타에게 끊임없이 숨을 불어넣고 있는 여인이 보였다. 흠뻑 젖은 다갈색 머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와중에 그 여인의 피부가 새파랗게 질려 있는 것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여인은 본인의 상태를 인식하지 못한 듯 계속 플리타에게 숨을 불어넣기만 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그 모습을 본 순간, 가슴속의 통증이 먹먹함으로 바뀌었다. 아이가 무사한지 확인하는 것보다 저 여인의 고개를 들게 하여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다.

“대, 대공 전…… 맙소사. 고, 공녀님께 저 계집이 지금…….”

갑작스러운 상황에 모두가 넋이 나간 상태였다가 뒤늦게 헤이번을 보고 정신이 들었는지 누군가가 눈을 부릅뜨고 말을 꺼냈다. 그러자 또 다른 누군가가 황급히 여인에게 다가가더니 거칠게 그녀를 밀쳐냈다.

“어찌 천한 계집이 공녀님께 손을 대느냐!”

헤이번의 눈치를 살피던 고용인들 중 하나가 냉큼 나서서 밀쳐진 여인에게 다가가 그녀를 발로 걷어찼다. 그 바람에 여인, 아니, 로제의 몸이 더 멀리 나가떨어졌다.

대공의 등장으로 정신이 번쩍 들고 보니, 지금 상황이 아찔했다.

대공의 딸이 호수에 빠졌다. 공관의 고용인들이 그렇게 많은데, 어느 누구도 공녀를 지키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 그 책임을 조금이나마 무마하려면 누군가를 하나 희생양으로 삼아야 할 터였다.

그리고 희생양으로 적격인 사람이 바로 저기에 있었다. 옷차림만 봐도 비천한 평민일 게 분명한. 게다가 공녀에게 숨을 불어 넣는답시고 직접 손까지 댔으니…….

“감히!”

로제가 플리타를 구하였다는 건 안중에 없었다. 플리타를 살리기 위해 부득이하게 손을 댔다는 것조차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지금 이 순간을 모면하려는 마음이 컸다.

그래서 다시 한번 로제를 걷어차려는데, 플리타에게서 작게나마 기침 소리가 들렸다.

“콜록!”

“고, 공녀님!”

“플리타 공녀님! 괜찮으세요?”

고용인들의 호들갑 속에서 플리타가 콜록거리며 기침을 하더니 물을 뱉어냈다. 동시에 아이의 숨소리가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로제에 대한 관심이 사라졌다.

헤이번 또한 그녀를 바라보던 시선을 거둔 뒤, 명을 내렸다.

“당장 아이를 데려가 주치의에게 보이도록 해라. 몸 상태가 어떤지, 꼼꼼히 살펴야 할 것이다.”

“예, 대공 전하!”

그의 명령에 고용인들이 플리타를 데리고 쏜살같이 사라졌다. 아이가 하인의 등에 업혀 멀어져 가는 걸 보던 헤이번의 눈길이 다시금 로제에게 향했다.

물이 뚝뚝 떨어지면서도, 오한이 일어 몸을 벌벌 떨면서도, 조금 전 배를 걷어차여 그 충격으로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도. 그러면서도 그녀의 시선은 아이에게서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그 여자였다.

헤이번은 확신했다. 지난번에 거리에서 보았던 그 여자라고. 그 여자가 왜 이곳, 왕실 묘역에 와 있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틀림없이 그때 보았던 그 여자였다.

“전하.”

그 순간, 페드윈이 헤이번에게 다가왔다. 헤이번은 로제를 보던 시선을 돌렸다.

일단 아이의 상태부터 확인해야 할 터였다. 그는 다시금 그녀에게 향하려는 시선을 정면에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플리타에게 가겠다. 내가 직접 아이의 상태를 확인하도록 하지.”

“예, 전하!”

페드윈이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 뒤, 플리타의 숙소가 있는 건물 쪽으로 앞장섰다. 주치의도 부름을 받고 올 테니 그쪽으로 가면 될 터였다. 헤이번은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로제의 곁을 무심히 지나쳤다.

숨을 헐떡이던 그녀가 문득 고개를 들어 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미처 눈치채지 못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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