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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아, 그때라면…….”
포어킨 후작이 헤이번의 말을 이해하고는 얼굴을 찡그렸다. 헤이번이 말한 ‘그때’가 과거의 어느 날을 말하는 건지 바로 알아차린 탓이었다.
「대답하게, 후작! 이 아이가 내 아이라면, 그럼 이 아이의 엄마는 어디에 있지? 내 아내 되는 여인은 어디에 있나?」
「천한 여인입니다. 전하께서 신경 쓰실 필요가 없습니다. 사사로운 감정으로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수도로 돌아가는 길에 마차 안에서 깨어난 헤이번이 제게 화를 냈던 순간을. 그리고 그런 그에게 자신이 했던 말을.
대공이 느꼈을 분노를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눈을 뜨고 나니 기억 중 일부가 사라졌고, 제 핏줄이라는 갓난아기가 눈앞에 나타났으니 말이다. 게다가 선왕비와 더클렌 가의 사람들이 함께 있었으니 대공으로서는 그들에게 농락당했다고 여겼을 터.
잠시 과거를 회상하던 후작이 쓴웃음을 지은 뒤,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기억하고 있습니다. 제가…… 전하께, 그리 말씀을 드렸었지요.”
아주 잠시, 후작의 가슴속에서 죄책감이 고개를 들었다. 갓난아기를 품에서 떠나보내며 눈물짓던 평민 여자의 모습이 떠오른 탓이다. 또한 차를 마시고 정신을 잃은 대공을 차마 건드리지 못한 채 울먹이던 그 여자의 모습도 생생히 기억났다.
감히 고귀한 괸터스의 핏줄을 탐하였느냐, 그리 노할 수조차 없을 만큼 애처로운 모습이었다.
그래서 나름대로 그 여자를 보호하고자 했다. 선왕비와 그녀의 사람들이 그 여자를 처리할 수 없도록. 이미 남편과 아이를 빼앗겨 삶의 의미를 잃은 여인의 목숨까지 거두는 건 너무나 가혹한 일이었기에.
그게 과연 좋은 선택이었는지 알 길은 없지만.
사랑하는 가족을 전부 떠나보낸 뒤의 삶이 행복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지금은 다른 남자를 만나 새롭게 가정을 꾸리며 살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 천한 평민이니 그럴 법도 하겠다.
후작은 문득 가슴속을 두드린 죄책감을 그런 변명으로 다시금 깊숙이 묻어버렸다.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서 ‘괸터스’는 제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이었다.
왕족의 핏줄을 보호하는 일이라면, 그 핏줄의 순수함을 지킬 수 있는 일이라면 그보다 더한 일이라도 할 수 있었다. 또한 앞으로도 그리할 터였다.
후작은 마음을 다잡고 재차 헤이번을 설득하고자 입을 열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헤이번의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문이 열리고, 교태 어린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헤이번, 일찍 왔네요.”
생글생글 웃으며 들어온 여인은 선왕비, 이자벨라였다. 후작이 냉큼 옆으로 비켜선 뒤, 그녀를 향해 예를 갖추었다. 이자벨라가 그를 보고는 가볍게 답례를 하고 다시 시선을 돌려 헤이번을 쳐다보았다.
“오셨습니까.”
이자벨라를 쳐다보는 헤이번의 시선은 차디찼다. 아니, 그저 차갑다고 하기에는 그의 시선 깊숙이 담긴 혐오가 짙었다.
저 모습 어디에서 죽은 남편에 대한 애도가 느껴지는가.
단순히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 있다고 해서 죽은 이를 추모하는 게 아니다. 옷은 평상시대로 입었어도 진심을 담아 그를 추모한다면, 차라리 그게 나을 것이다.
그러나 이자벨라의 경우는 정반대였다.
그녀의 드레스는 색깔만 검은색일 뿐,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죽은 선왕을 추모하기 위함이 아닌, 본인의 아름다움을 뽐내기 위해 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지 않으려 해도 저절로 환멸이 느껴질 정도였다.
“음…… 그나저나 포어킨 후작이 함께 있었네요. 두 분이 무슨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이자벨라의 시선이 다시금 움직였다. 그러고는 워런과 헤이번을 번갈아 보며 눈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하지만 굳이 궁금해서 던진 물음은 아니었다. 후작이 자신과 헤이번의 결혼을 얼마나 간절히 바라고 있는지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아마도 헤이번에게 결혼하라며 권하고 있었던 것이리라. 그러니 그녀로서는 잘됐다 싶어 ‘혼인’을 주제 삼아 대화에 끼고 싶을 뿐이었다.
“선왕비께서 아실 필요 없는 대화였습니다. 딱히 중요한 것도 아니었고요.”
하지만 헤이번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거절했다. 이자벨라의 눈꺼풀이 순간적으로 떨렸다. 그러나 그녀는 가까스로 화를 누그러뜨린 뒤, 사르르 웃으며 재차 말을 이었다.
“우리 사이에 중요한 대화만 나누라는 법이 있나요. 오히려 가벼운 대화가 더 좋지요.”
“글쎄요. 선왕비께서 말씀하신 ‘우리’가 저와 선왕비를 뜻하는 건지는 모르지만……. 굳이 이 자리에서 입 밖으로 꺼내고 싶은 화제는 아니라서 말입니다.”
“에이, 헤이번이 자꾸 말을 돌리니까 더 궁금해지잖아요. 뭔데요. 응?”
이자벨라는 오기가 생겨 거듭 질문했다. 헤이번의 입에서 저와의 ‘결혼’에 대해 논의했다는 말을 들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그런 이자벨라의 모습에 헤이번의 시선이 더욱 싸늘해졌다.
그리고 그것을 감지한 후작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그들 사이에 개입하려는 순간, 헤이번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입에 담기에 역겨운 주제였습니다.”
“……!”
“돌아가신 선왕 폐하를 추모하는 자리에서는 더더욱.”
헤이번은 그 말을 덧붙인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새파랗게 질려 저를 보는 이자벨라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후작을 쳐다보았다. 명백히 경고하는 의미가 담긴 차가운 눈빛이었다.
후작이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떤 순간, 헤이번이 몸을 돌려 방 밖으로 나갔다.
“전하.”
방을 나서자마자 복도에 있던 호위 기사, 페드윈이 다가왔다. 그리고 그 뒤로 하인들 몇 명이 헤이번의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조아렸다. 헤이번은 냉랭한 목소리로 하인들에게 명을 내렸다.
“내가 돌아오기 전까지 저들을 모두 내보내고, 방을 싹 치워놓도록.”
저들과 잠시나마 같은 곳에서 숨을 쉬고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욕지기가 치밀었다. 게다가 선왕비가 들어온 뒤에는 그녀가 뿌린 향수 냄새가 지독해서 더욱 속이 메스꺼웠다. 그는 하인들에게 명령한 뒤, 공관 밖으로 나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페드윈이 재빨리 그의 뒤를 따랐다.
가련했다.
계단을 내려가던 헤이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죽은 제 형이 너무나 가련했다.
아무도 그를 진심으로 추모하지 않는다.
그 누구도 그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는다.
매년 이렇게 성대하게 추모식을 열지만 정작 그를 그리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헤이번은 강인하면서도 다정했던 형을 떠올렸다. 자유분방하던 저와는 달리, 타고난 군주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완벽했던 그였다.
그랬던 그가 그렇게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할 줄 누가 알았을까.
‘과연…… 사고사가 맞을까.’
헤이번은 오랜 시간 내내 묻어두었던 의문을 끄집어냈다.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그 말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어느 누구보다도 말을 잘 타던 사람이 자신의 형이었다.
물론 사람이기에 실수를 할 수도 있는 것 아니냐는 반박이 있을 수 있다. 헤이번 역시 그 점을 외면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죽음의 원인을 알아내고자 사고가 벌어졌던 왕실 소유의 사냥터에 홀로 가서 그 주변을 샅샅이 살피기까지 했다.
그 결과 그가 알아낸 건 ‘사고’가 아니었다. 어지럽게 찍힌 발자국. 짓눌린 풀. 그런 것들은 또렷하게 뭔가를 말하지는 못했지만, 반대로 한 가지는 말해 주었다.
단순히 말을 타다가 떨어져 죽은 것은 결코 아니라고.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혼란스러웠다. 뭔가 자신이 건드려서는 안 될 것 앞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모두의 애도 속에 국장이 치러진 뒤, 헤이번은 도망치다시피 훌쩍 떠날 수밖에 없었…….
‘……그런데 나는 어디로 떠났던 거지?’
헤이번이 계단 중간쯤에 멈춰 서서 난간을 꽉 움켜잡았다. 날카로운 창날이 후비고 들어오는 것처럼 끔찍한 두통이 일었다. 그는 본인도 모르게 비틀거리며 몸을 숙였다.
“전하? 왜 그러십니까!”
충직한 호위 기사 페드윈이 다급히 그를 부축하며 물었다. 그러나 헤이번은 페드윈의 물음에 대답할 수 없었다.
머릿속이 구름이라도 낀 것처럼 혼탁해졌다. 그리고 그 속에서 뭔가가 흐릿하게 떠올랐다.
그날의 기억이었다. 자신이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난 날의 기억.
마차를 타고 있었다. 국경 지대에서 수도로 향하는 마차였다. 그리고 그 마차 안에 갓난아기였던 제 딸, 플리타가 함께 있었다.
“전하!”
“……그녀는.”
그녀는 어디에 있지? 헤이번은 무심코 질문을 하려다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녀’라니. 대체 누구를 말한 건가. 그는 지끈거리는 옆머리를 손으로 누르고 있다가 헛웃음을 삼켰다.
아마도 자신은 플리타를 낳은 여인을 찾은 모양이었다. 우스운 일이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떠올린 적 없던 여인의 존재를, 왜 갑자기 찾는단 말인가.
그는 난간을 잡았던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리고 심호흡을 했다. 두통이 서서히 잦아들자 정신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페드윈이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대공 전…….”
“그렇게 불러대지 않아도 되네, 페드윈 경. 귀가 먹은 건 아니니까.”
헤이번이 다시 허리를 펴며 차분한 어조로 대꾸했다. 마치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그의 표정은 덤덤하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페드윈은 안심이 되지 않는다는 듯 말을 이었다.
“몸이 좋지 않으신 듯합니다, 전하. 주치의를 당장 불러올 터이니…….”
“괜한 짓 하지 말게.”
그는 손을 들어 페드윈을 저지시켰다. 혹시 하는 마음에 추모식에 주치의와 동반하기는 했지만, 그건 전적으로 플리타가 아픈 경우를 대비한 것이었다. 제 두통 따위는 무시해버려도 좋았다.
“하지만, 전하.”
“소란스럽게 굴지 말게, 페드윈 경. 이곳은 대공 저가 아닐세. 보는 눈도, 듣는 귀도 많아.”
헤이번은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뒤, 다시 계단을 내려가며 페드윈에게 주의를 주듯 말했다. 그러자 페드윈이 본인의 실수를 깨달은 건지 흠칫하더니 입을 다물고 그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보는 눈도. 듣는 귀도.’
헤이번이 조금 전 자신이 했던 말을 다시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쩐지 피곤해졌다. 그의 입가에 쓴웃음이 스쳤다가 이내 사라졌다.
바로 그때였다.
공관 밖에서 하녀의 비명 소리가 들린 것은.
“꺄악! 공녀님!”
그와 동시에 헤이번이 계단을 빠르게 내려가더니 이내 공관 밖으로 달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