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화 (53/145)

사슬이 끊어지기가 무섭게 리온의 몸이 발작하듯 크게 뒤틀렸다.

그리고 제 목을 잡고 컥컥대며 당황스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은근히 눈빛이 흉흉해서 기분이 조금 그랬다.

“아…….”

사슬이 끊어지기가 무섭게 머리가 핑 돌았다.

“제길, 채유라, 왜 그래!”

나는 몸의 중심을 잃고 최지혁 쪽으로 풀썩 쓰러졌고, 최지혁은 가볍게 나를 받아내며 열심히 흔들었다.

“채유라, 정신 차려, 정신 차리라고!”

나는 열심히 이리저리로 흔들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너 때문에 진짜로 기절할 것 같다고 말해주고 싶은데 이상하게 온몸에 힘이 쭉 빠져서 말할 기운도 없었다.

“형형형, 그만 흔들어요!”

다행히 옆에 있던 준우가 최지혁을 저지해 주어 흔들림이 멎었다.

나는 신음을 흘리며 리온을 살펴보았다.

리온은 여전히 넋이 나간 듯한 표정으로 나만 빤히 쳐다보았다.

“채유라. 뭐야. 뭐가 문젠데!”

최지혁은 그러거나 말거나 내게 제 온 신경을 쏟았다. 이제는 내 양 뺨까지 붙잡고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말 좀 해보라고!”

그에 나는 겨우겨우 손을 움직여 최지혁의 한쪽 뺨을 쥐었다.

“……!”

그리고 치워버렸다.

최지혁의 고개가 힘없이 돌아갔고, 드디어 주변이 조용해졌다.

“작작 해, 최지혀억…….”

***

나는 겨우 기력을 되찾고, 한참 동안 이 커다란 공간을 살펴보았다.

세상의 멸망을 목격했다는 게 무슨 얘기일까?

우선 우리는 자리에 엉덩이를 깔고 빙 둘러앉아 고민이라는 걸 해 보기 시작했다.

“뭘 또 고민하고 앉아 있어? 갇혔다니까?”

최지혁의 간단명료한 현재 상황 서술에 나는 감탄했다.

거 이미 알고 있는 상황을 부정적으로 잘도 다시 짚어준다.

“……왜 째려보는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리온에게 물었다.

“리온. 차분하게 설명해 봐. 아까 도대체 무슨 일인데? 왜 그런 거야? 네 목에 채워져 있던 사슬은 또 뭐고?”

내 물음에 리온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평소처럼 장난스러운 분위기가 아니었다.

“마스터.”

리온이 한껏 진지해진 분위기로 나를 불렀다.

그리고 한참 뜸을 들이더니 겨우 한마디를 내뱉었다.

“마스터, 도대체 정체가 뭐야?”

“뭐?”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리온을 쳐다보았다. 리온은 등 뒤의 날개를 활짝 펼친 채로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물론 최지혁이 나를 제 뒤로 보내며 리온에게 대답했다.

“그걸 네가 왜 궁금해하는데.”

“안 궁금해하는 게 더 이상하지 않아?”

리온이 제 목을 가리키며 말했다.

“상식적으로 평범한 인간이 이걸 어떻게 끊는데?”

솔직히 말해서 리온이 지금 무슨 얘기를 하고자 하는지 잘 모르겠다.

준우도 마찬가지였는지 혼란스러운 눈으로 나와 리온을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방금 진짜 뒈질 뻔했다고! 아니지? 곧 뒈지겠지?”

리온은 소리를 빽 지르더니 곧 제 머리를 감싸 쥐고는 바닥에 쪼그려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끝이야……. 완전히 끝이라고…….”

최지혁은 그런 리온의 태도가 승질이 나는지 팔을 쓱 걷어붙였다.

“알아듣게 설명해.”

그리고는 그대로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았다.

‘저저저, 폭력적인 문제 해결방식!’

하지만 최지혁의 해결방식은 나름대로 효과가 좋은 편이긴 했다.

리온은 머리 한 대 맞고 정신을 차린 건지 어쩐 건지 울상을 지으며 내게 무릎걸음으로 달려와 납작 엎드렸다.

“마스터. 나 버리지 마.”

리온의 말에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해졌다. 저건 또 무슨 대사냐.

준우는 경악한 듯 입을 쩍 벌렸고, 최지혁은 당황해서 눈썹을 마구 꿈틀거렸다.

“마스터, 이제 진심을 다해서 마스터를 위해 살게. 시키는 대로 다 할 수 있어, 마스터.”

리온이 내 바짓가랑이를 덥석 붙잡고 애원하듯 매달리기 시작했다.

“마스터 옆에 있으면 살 수 있는 거지? 그렇지?”

앞뒤 다 잘라먹고 보면 꼭 애인에게 매달리는 사람처럼 절절해 보였기 때문에 기분이 매우 이상해졌다.

대사가 이상한 것과 별개로 리온은 절박해 보였다.

“내가 처음에 마스터를 죽이려고 했던 건 정말 실수야. 나도 몰랐다고! 정말이야, 마스터. 그러니까…….”

최지혁은 결국 못 참겠는지 리온의 뒷덜미를 덜렁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저를 마주 보게 만든 후 살벌한 표정으로 경고하듯 말했다.

“헛소리 작작 하고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나 설명하라고 몇 번 말해.”

“…….”

리온은 우스꽝스러운 모양새로 최지혁에게 뒷덜미를 잡힌 채 매달려 있다가 곧 울 것 같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완전히 멸망했어. 그러니까 나도 소멸시키려고 든 거겠지.”

리온이 멍하니 제 목을 마구 더듬었다. 그리고는 미친 사람처럼 하하하하 웃었다.

“내 세계가 멸망했다고. 보여? 완전히, 신이고 뭐고, 천계고, 마계고, 그냥 없어졌어. 이제 아무것도 안 남았다고!”

리온의 말에 준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리온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이해하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하기야, 멸망이니 뭐니, 아직은 조금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이긴 하다.

“저기…… 유라야.”

준우는 한참을 생각하는 듯싶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멸망……이라니? 리온이 말하는 거 나 하나도 못 알아듣겠는데 혹시 설명해줄 수 있을까?”

준우의 말에 리온이 최지혁을 밀쳤다.

그리고 준우에게 다가가 제 얼굴을 들이밀며 기괴하게 웃었다.

“못 알아들었어, 인간? 거짓말. 알아들었잖아. 너희 세상도 곧 멸, 으윽!”

그때였다. 다시 리온의 목에 붉은색의 문자가 올라오기 시작했고, 나는 황급히 리온의 입을 막았다.

뭐야, 내가 방금 끊은 사슬이랑 저 말 못 하는 ‘금제’라는 건 별개인가?

“…….”

비록 ‘금제’라는 것에 막히긴 했지만 리온이 말하려던 게 무엇인지는 유추할 수 있었다.

‘너희 세상도 곧 멸망할 거야.’

나와 최지혁은 놀라지 않았다. 이미 멸망하고 있던 세상을 보았으니까.

하지만 준우는 아니었다. 준우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보며 물었다.

“멸망이라니? 진짜……야?”

나는 그에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음, 정확히 말하면 멸망 위기지 멸망은 아니지. 아직 안 망했으니까. 그거 막으려고 우리가 여기 들어온 거고, 그거 막으려고 전 세계가 떠들썩한 거고.”

리온이 횡설수설 흘린 말들을 내 수준에서 조합해 보자면 이랬다.

우리가 있는 곳은 리온이 살던 세계다. 그리고 이 세계는 이미 멸망했다.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클리어 조건이 없는 거겠지? 해치울 몬스터 같은 것도 없으니까?

그렇다면 ‘정리 완료된 차원’의 뜻은 뭘까?

꼭 원래부터 정리할 예정이었고, 결국 이 세상이 멸망했으니 정리가 완료되었다는 뜻 같았다.

“리온, 내가 아까 자른 건 뭐야?”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리온에게 물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야겠다.

이런 던전이 열린 게 단순한 우연인지, 아니면 나 혹은 리온의 존재로 인해 열린 것인지 말이다.

“나와 이 세계를 잇고 있는 끈.”

“…….”

리온은 내 쪽으로 제 고개를 쓱 돌리고 무서우리만치 무표정한 얼굴로 이야기했다.

“난 이 세계가 멸망함과 동시에 사라져야 했어. 나는 이 세계에 종속된 존재니까. 나까지 사라져야 완벽한 멸망이니까.”

리온이 내게로 순식간에 다가와 손가락으로 내 턱선을 쓱 훑으며 유혹하듯 웃었다.

“그걸 자를 수 있는 인간은 없어. 애초에 그 끈을 자를 수 있었다면 내 세계의 신도 소멸당하지 않았겠지.”

내 눈앞에 있는 리온은 정말 악마 같았다. 리온의 안광은 시뻘겋게 빛나고 있었고, 이제는 처음 보는 꼬리도 튀어나와 나를 휘감으려 하고 있었다.

“근데 마스터는 그걸 잘랐네?”

“정확히는 채유라가 아니라 내가 잘랐는데, 악마 새끼야.”

그때였다. 최지혁이 도저히 못 봐주겠다는 듯 리온의 얼굴을 잡고 뒤로 쭈우우욱 밀어냈다.

“살려 달라는 놈 태도가 아주 가관이야.”

최지혁은 뒤로 밀려난 리온을 대놓고 비웃어 주었다.

“네가 뭔 생각인지는 모르겠는데, 멸망한 건 네 세계야. 내 세계가 아니라.”

그리고는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고 리온에게로 다가가 경고하듯 말했다.

“그런데 어디다 대고 경고질이야?”

“…….”

“채유라는 네 하찮은 목숨 살리겠다고 기절까지 했어. 그런데 협박을 해?”

나는 그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실 리온이 왜 저러는지 공감은 안 가지만 이해했다.

제가 살던 세상이 멸망했음을 직접 두 눈으로 보고, 또 조금 전에는 죽을 뻔했다.

아무리 리온이 악마라고 해도 혼란스러울 게 뻔했다.

나는 리온에게 다가가 살며시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리온, 괜찮은 거 맞아? 좀 쉴래?”

내 말에 리온이 흠칫 놀라며 나를 쳐다보았다.

“우리 좀 쉬다 가요. 던전에 제한 시간이 걸린 것도 아니고. 리온도 좀, 충격을 많이 받은 것 같으니까. 혼자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 보여서요.”

나는 리온을 잡고 있던 손을 놓고 최지혁의 손목을 잡아 내 쪽으로 끌고 왔다.

“준우야. 그래도 괜찮지?”

“어? 그럼! 그럼. 난 괜찮아.”

리온은 그 자리에 서서 나를 물끄러미 쳐다만 보았다.

그러다가 시선을 땅으로 떨어트렸다.

“……마스터.”

리온이 나지막이 나를 불렀다. 나는 최대한 다정하게 대답해주었다.

“응?”

“마스터가 무슨 인간 교황이냐? 왜 자비로운 척해?”

아니 근데 저게 기껏 배려해줬더니 지금 장난하나!

리온은 내가 성질 낼 걸 알기라도 하는지 조신하게 내 옆으로 슬금슬금 다가와 말했다.

“아, 천계는 너무 오랜만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그리고는 씩 웃었다.

“어차피 마스터한테 종속되어 버린 거. 내 세계가 멸망하든 말든, 나만 살면 되는 거지, 뭐. 다들 안 따라오고 뭐 해? 여기서 나가야 하는 거 아니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