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만의 이야기를 곱씹는 듯하던 르네는 이내 정신을 차린 듯 초점이 돌아온 눈을 하고 입을 열었다.
“하긴, 나도 조금 전에 이야기하다가 깨달은 게 있긴 하니까.”
르네는 조금 전 횡설수설하던 제 이야기의 끝을 떠올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요. 스스로 정리가 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관점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다른 관점…….”
잠시 고개를 끄덕인 르네는 조금 전 로만이 그랬듯 주변을 둘러봤다.
“실은 말이야…….”
아주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던 르네와 로만의 눈이 마주쳤다.
로만의 눈에 가득한 의욕을 눈치챈 르네는 재빨리 손으로 입을 막았다.
너무 상냥했다는 게 실수였다는 걸 로만은 알아차렸지만 이미 늦었다. 하지만 그대로 물러날 수 없었던 그는 르네를 다시 한번 설득했다.
“어찌 됐건 대책이 필요한 일일지도 모르니 저도 알고 있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물론 르네 님도 말씀을 하시면 속이 후련해지실 거고요.”
로만의 말에 르네는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꽤 고민스러운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건 분명 레이넌 때문이라는 걸 로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아아, 진짜 모르겠다.”
르네는 한참 혼자 안절부절못하더니 결국은 머리를 헝클이며 작게 한탄했다.
그러고는 곧 로만을 빤히 바라봤다.
“그래. 속이라도 편해지는 게 낫겠지?”
“그럼요.”
어지간히 답답하긴 했던 모양이었다. 로만이 영 못 미덥다는 얼굴을 하고서도 결국 그에게 속내를 털어놓기로 한 걸 보면.
“계약이 언제 끝나는지는 사실 크게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어. 그보다 신경 쓰이는 게…….”
망설임은 길었지만 결정을 내린 르네는 거침없었다. 차라리 말할 상대를 찾아 다행이라는 듯이 르네는 술술 말을 꺼냈다.
들을 사람이라고는 없다는 걸 확인했으면서도 걱정스러운지 르네는 목소리를 낮췄다.
그런 그녀의 말을 조금 더 잘 듣기 위해 로만은 몸을 기울여 르네에게 찰싹 붙었다.
“공작님이 말이야.”
“네.”
르네는 레이넌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 놓고는 결국 다시금 망설였다. 이럴 때는 그녀를 재촉할 수 없었다. 기다릴 수밖에.
다행히 르네의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숨을 깊이 들이쉬고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르네의 목소리보다 먼저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여기서 뭐 하는 거지?”
‘이렇게 중요한 때에 누구야?’
로만은 짜증을 숨기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고, 공작님?”
레이넌이 무시무시한 눈으로 로만과 르네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살벌한 시선은 오직 로만을 향한 것이었다.
“두 사람이 이렇게 가까운지 미처 몰랐군. 마치 비밀이라도 나누는 것처럼 보일 정도라니.”
사나운 시선을 금세 감춘 레이넌은 슬쩍 웃으며 천천히 걸어왔다. 분명 르네가 겁먹을까 봐 표정 관리를 하는 것이었다.
르네는 레이넌의 얼굴을 보고 당황은 했지만 겁먹지 않은 듯 보였다.
하지만 로만은 진심으로 무서웠다. 저 웃음 뒤에 있을 서늘한 그의 감정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로만이 본능적으로 르네에게서 훌쩍 떨어졌을 때였다.
“비, 비밀이라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르네는 레이넌을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하고 말을 더듬고는 자리를 떴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모습에 레이넌의 입꼬리는 아주 미세하게 굳었고, 로만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꼭 비밀 이야기를 한 것 같지 않습니까. 왜 이렇게 수상하게 자리를 떠나시는 겁니까.’
르네를 붙들고 그렇게 말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이미 르네는 다급히 자리를 떠난 뒤였다.
로만은 레이넌과 르네를 잠시 번갈아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비밀도 없고, 수상하지도 않습니다.”
로만의 변명과 같은 말에 레이넌의 입꼬리는 아래로 내려왔다. 그의 무표정은 미소보다 나았지만 그렇다고 두렵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렇게 혼자 다니지 마시라 말씀을 드렸는데……. 일단 르네 님을 모셔다드리고 오겠습니다.”
로만은 어색하게 웃으며 뒷걸음질 쳤다. 그러고는 곧 르네가 사라진 쪽으로 얼른 뛰어갔다.
***
에라, 모르겠다. 그런 마음으로 답답한 속내를 모두 털어놓으려는 때, 레이넌이 나타났다.
그를 보고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얼른 자리를 피했지만 로만은 급히 나를 뒤따라왔다.
내가 뭔가 말을 하려고 했던 걸 잘 아는 그는 포기하지 않고 은근슬쩍 계속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하고 싶으셨던 말씀은요?”
“…….”
“저한테라도 털어놓으시면 한결 마음이 가벼우실 텐데요.”
부드럽게 꼬드기는 목소리를 애써 무시했다. 무슨 대답이든 일단 하면 그에게 말릴 것이 뻔해서 차라리 입을 닫았다.
로만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지만 방에 도착한 이상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는 아쉬운 얼굴을 숨기지 못했지만 그래도 제가 해야 할 말은 남겼다.
“몇 번을 강조해도 부족합니다. 제발 혼자 다니지 마세요.”
“알았어. 오늘은 왜 일이 이렇게 된 건지 나도 모르겠어.”
“알겠습니다. 그리고 하실 말씀이 있으면 언제든…….”
나는 로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방으로 들어왔다. 저렇게 집요한 성격은 아닌데 오늘따라 왜 저러는지 알 수 없었다.
문을 닫고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하마터면 로만에게 레이넌에 대한 마음을 말할 뻔했다.
레이넌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기도 하니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몰랐지만, 동시에 그에게 알려질 가능성이 컸다.
“큰일 날 뻔했어, 정말.”
“르네 님, 어디 다녀오셨어요? 한참 찾았다고요.”
안도는 잠시였다. 아멜리아는 급히 다가와 이리저리 나를 살피기 시작했다.
“응? 응접실에 갔다 왔어.”
“응접실?”
“손님이 오셨다고 해서.”
“르네 님께요? 손님이 누구셨는데요?”
“벨라 크라우스?”
내 대답에 순간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나는 묘한 시선을 주고받는 아멜리아와 세실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왜 저희는 몰랐죠? 누가 르네 님을 모시고 갔나요?”
“몰랐어? 하긴. 나도 정신없이 나갔네. 갈 때도, 올 때도 로만이 같이 있었어.”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르네 님 혼자 다니시면 안 돼요.”
아멜리아는 로만과 같은 당부를 했다. 혼자 다니지 않는 것이 꽤 중요한 일인 건 알지만 이렇게 둘 다 놀랄 만큼인 줄은 미처 몰랐다.
“로만도 이미 여러 번 이야기했어. 혼자 안 다닐게.”
“네. 하여간 어느 틈에 르네 님을 모셔 간 건지.”
아멜리아는 갑자기 내가 없어져 놀랐던지 로만을 향한 불만을 슬쩍 털어놓았다.
갑자기 나타난 로만에 놀란 건 누구보다 나였다. 레이넌이 부른다는 소리에 얼마나 심란했던지…….
어떤 얼굴로 그를 봐야 할지 몰라 최대한 자연스러운 표정을 연습하려고 얼굴 근육을 얼마나 움직였는지 모른다.
하지만 정작 갔더니 레이넌만 있는 게 아니라 벨라도 있고, 그녀는 대놓고 싸움을 걸지 않나.
그런 와중에 레이넌은…….
“나의 르네를 염려해서 일부러 그대를 보냈다고?”
‘나의 르네’라니…….
다시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화끈거리는 얼굴을 조금이라도 식혀 보려고 두 손으로 양 볼을 감쌌다.
“르네 님?”
세실의 의아한 물음에 재빨리 볼에서 손을 뗐다. 세실이 부르지 않아도 어차피 계속 그렇게 얼굴을 감싸고 있을 수는 없었다.
볼에 닿은 내 손이 꼭 레이넌의 손과 겹쳐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얼굴에 남은 온기는 그의 것인지, 나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르네 님?”
대답 없이 멍하니 있자 세실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나를 다시 한번 불렀다.
“아, 좀 쉬고 싶어.”
“네. 그럼 저희는 밖에 있겠습니다.”
“고마워.”
다행히 아멜리아도, 세실도 더는 말을 얹지 않고 조용히 자리를 비켜 줬다.
혼자 남은 나는 비틀거리며 침대로 걸어갔다. 눈앞에 침대가 보이자 힘이 빠졌다. 그대로 침대에 털썩 엎드렸다.
포근한 침구가 몸을 감싸자 피곤함이 몰려왔다.
그런 와중에도 레이넌의 얼굴이 아른거려 더 피곤해졌다. 볼을 감싸고 나를 빤히 바라보던 그의 눈이 유독 그윽하게 보였던 건 착각일까.
“나의…… 르네.”
입 밖으로 내뱉고 나니 가슴 속 어딘가가 간질거려서 참기 힘들었다.
이불에 고개를 묻은 채로 몇 번이고 도리질했다.
“착각하지 마. 벨라의 앞이니 당연한 행동이잖아. 일일이 흔들리면 나만 힘들다고.”
나를 다잡고자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고개를 다시 이불에 묻었다. 깊은 한숨은 그 속에 깊이 파묻혔다.
“차라리 로만에게 말이나 할 걸 그랬나?”
혼자서 이렇게 끙끙 앓는 것도 못 할 짓인데…….
아멜리아라면 짐작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말하면 분명 이리저리 놀릴 게 분명하고, 그리고…….
“말할 사람이 없잖아.”
차라리 로만이 나을지도 몰랐다. 그는 내 감정엔 관심이 없을 테니까. 오히려 객관적으로 조언을 해 줬을 가능성이 컸다.
“하아……. 그것도 그렇지만 너무 어색하게 대했나?”
사실 레이넌을 어떤 얼굴로 봤는지, 어떻게 대했는지 기억에 남지 않았다.
제대로 바라보기는 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어색했겠지?”
기억에 남은 건 그의 목소리, 손길, 그리고 눈빛뿐이었다. 아마 멍하니 그를 바라봤을 것이 뻔했다.
그 정도면 다행일 텐데……. 분명 어색하게 피하기도 했을 터였다.
뭐가 어찌 되었건 자연스러웠을 리가 없었다.
“벨라한테는 그렇게까지 이야기해도 됐던 걸까…….”
일부러 시비를 걸어 오는 것 같아 웃으며 돌려주긴 했다. 하지만 그게 레이넌을 곤란하게 만드는 일이 아니었을까, 하는 뒤늦은 걱정이 들었다.
걱정은 걱정을 부르고, 끝없이 이어졌다.
“역시…… 로만에게 말할걸. 좋은 기회였는데.”
로만에게 말했다면 이 모든 걱정에 대한 답도 얻을 수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혼자서 답도 안 나오는 걸 끌어안고 끙끙대는 건 성미에 맞지 않았다.
“내일이라도 로만을 찾아갈까. 아니야. 굳이 찾아가서까지 이야기할 건 아니지.”
이런저런 고민은 돌고 돌았고, 그 와중에 로만에게 진심으로 상담할까, 하는 마음마저 들었다.
얼마나 그렇게 혼자 끙끙댔을까.
조용히 들려온 노크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샌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쓸데없는 생각만 하느라 시간을 이렇게나 보냈다고?”
나 자신이 황당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다시금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누구지?
사용인들이라면 보통 제 이름을 함께 말했다. 이렇게 누군지 밝히지도 않고 노크만 하니 경계심부터 일었다.
천천히 문을 향해 걸어가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
“나야.”
문 너머에서 들려온 낮은 목소리에 나는 그대로 걸음을 멈췄다.
오늘 내내, 아니 요즘 내내 나를 심란하게 만든 당사자가 이 밤에 나를 찾아온 것이었다.
“공작님?”
“그래.”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입을 다물었다. 문을 열어야 하는데 쉽게 손이 나아가지 않았다.
천천히 손잡이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공중에 멈춘 손은 차마 내려앉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