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란한데. 계속 이대로 지낼 수도 없고……. 무엇보다 그가 왔는데 문도 열어 주지 않고 밖에 세워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시 용기를 내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손잡이를 바로 앞에 두고 멈췄다.
“르네.”
“네.”
“문은 열지 않아도 괜찮아.”
망설이는 내 손이 보이기라도 하듯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요즘의 그대라면 얼굴을 마주하지 않는 편이 대화하기 편할 것 같으니.”
“……죄송해요.”
“미안하라고 한 말은 아니지만 궁금하긴 하군.”
“뭐가 궁금하세요?”
“그대가 왜 나만 피하는 것 같지?”
“아, 그게…….”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사실을 말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딱히 그럴듯한 변명도 떠오르지 않았다.
“나만 피하는 건 맞나 보군.”
“아.”
그것부터 부정해야 했구나.
낮은 탄식에 속마음이 그대로 드러났는지 그는 웃음을 터트렸다.
“왜 보지 않아도 그대가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지?”
“……그러게요. 저도 공작님이 지금 저를 보고 계신 것 같네요.”
한탄하듯 말하자 그는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말했다.
“말하기 어려운 문제라면 조금은 더 기다려 주지.”
“조금은요?”
“지금까지도 그대에게 꽤 큰 인내심을 할애했다는 이야기야.”
……협박인가?
얼핏 다정한 말투였지만 내 머릿속은 바삐 움직였다.
“계속 이런 상태로 지낼 수도 없지 않겠나. 명색이 그대가 내 약혼녀인데.”
협박이다, 협박이 틀림없어.
나를 대신할 사람은 많다. 번거롭게 구는 걸 지켜봐 주는 건 여기까지다.
이런 뜻인가?
“또 그대가 생각을 말도 안 되는 방향으로 펼쳐 갈 것 같아서 말해 두는 건데, 다른 의미는 없어.”
“네?”
보지 않아도 속마음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인가.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듯한 레이넌의 말에 순간 움찔했다.
“말한 그대로 받아들이란 말이야.”
“말한 그대로요? 조금은 기다려 주시겠다는 말씀인가요?”
“그래. 이대로 계속 지내긴 곤란하다는 것도 잊지 말고.”
“네.”
협박은 아닌 모양이었다. 나를 배려해 주는 말을 단단히 오해한 것 같아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협박이라니. 왜 또 생각이 그렇게 튀었을까.
이제는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안다. 그럼에도 예전처럼 협박부터 떠올린 상황이 조금은 답답했다.
그를 몰랐을 때 레이넌에 대해 생각했던 건 대부분 오해였다. 그는 무섭거나 매정한 사람은 아니었다.
표현이 딱딱해서 그렇지 배려도 잘하고, 세심하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여전히 그가 협박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구나.
좋아하는 마음과는 별개로 그와의 관계에선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무의식적으로 여기고 있었던 듯했다.
나는 순간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그리고 동시에 레이넌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너무 어려우면 다른 사람에게라도 털어놓도록 해. 아멜리아나 로만만큼은 믿을 만한 사람이니.”
“네.”
“그래도…….”
“네?”
뭔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운을 뗀 레이넌은 잠시 말이 없었다.
“공작님?”
“내가 아닌 그들에게만 이야기하면 조금 서운할 것 같기도 하군.”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평소와 달리 뾰족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꼭 에드윈이 투정을 부리는 것 같기도 했다.
에드윈을 떠올려서일까. 마음이 가벼워져서 작게 웃으며 그에게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내 웃음을 들은 레이넌 역시 마음이 조금은 풀린 것 같았다. 그에게서도 한결 가벼운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러게 말이군.”
그리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가 떠난 것 같지는 않았다. 문 너머로 레이넌의 숨소리가 작게나마 들려왔다.
뭐라 할 말이 없어 손가락만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레이넌이 물었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지?”
“비슷하죠. 수업도 아직 조금 남았고, 에드윈과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요. 공작님은요?”
내 물음에 레이넌은 맥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바로 옆방에서 지내고 있는데 문을 사이에 두고 근황을 묻게 될 줄은 몰랐군.”
그의 목소리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아마 문에 기대앉은 모양이었다.
“……그러네요.”
나도 그를 따라 문에 기대앉은 후 대답했다.
“나도 비슷하지. 특별할 일이랄 것이 있겠나. 그나마 그대와 함께하던 식사와 티타임이 특별한 일이었는데 그게 사라졌으니…….”
“……죄송해요.”
레이넌은 이번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괜찮다는 말도, 사과할 일이 아니라는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다른 것보다 티타임만이라도 빨리 다시 시작하면 좋겠는데……. 욕심인가?”
“욕심……. 왜 그렇게 말씀하세요? 저를 탓하셔도…….”
“그대를 탓할 수 있나. 다만 조금씩 버티기가 힘들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
버티기 힘들다니. 레이넌에게서 약한 소리가 나오리라고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죄송해요.”
이번에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사과밖에 없었다.
“그대에게 사과를 듣고 싶었던 건 아니야. 하지만 내가 듣고 싶었던 이야기를 해 줄 것 같지도 않군. 일단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지.”
습관처럼 죄송하다는 말이 나오려고 했지만 애써 막았다.
“그래서 아까 로만과는 무슨 이야기 중이었지?”
“로만이요? 아, 응접실 앞에서요?”
“그래.”
“혼자 다니지 말라고 하던데요.”
“그것만은 아닐 텐데.”
정확하게는 로만에게 말하려고 했지만 하지 못했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괜히 들킨 기분이 들어 입술을 깨물었다.
“기분이 꽤 묘하더군. 나는 그렇게 피하면서 로만과는 그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친밀히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가까운 거리도 아니었고, 친밀하지도 않았는데요?”
그야말로 펄쩍 뛸 만한 소리였다. 애초에 로만과 그 정도로 가까운 사이냐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
물론 다른 사람들에 비해 가깝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그보다는 아멜리아나 레이넌이 더 가깝지 않을까.
“꽤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던데.”
“아니, 중요한 이야기…….”
“했나 보군.”
로만에게 역시 말 안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아주 짧은 순간 들었다. 그래서 말을 흐린 사이 레이넌이 내가 멈춘 말을 끝맺었다.
“아니에요. 그냥 답답해서 상담을 할까 잠깐 고민했어요.”
“르네.”
“네.”
“로만에게는 답답한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데 나한테는 그게 안 되는 건가.”
서운함이 느껴지는 레이넌의 목소리에 나는 당황해서 눈만 굴렸다.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가 그런 감정을 느낄 리가 없는데. 그러니 그를 다독일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그냥 딱 잘라 말하면 어쩐지 상처를 입을 것 같았다.
“공작님께선 늘 바쁘시고, 그런 사소한 일에…….”
“사소하지 않아.”
“네?”
“그대와 관련된 일은 사소하지 않으니 당연하게 나를 제외하지 말아 주겠나.”
레이넌의 말에 바로 대답하지 못한 건 내 귀를 의심했기 때문이었다.
왜 자꾸 레이넌은 이렇게 다정해서, 아니 점점 더 다정해져서 나를 착각하게 만드는 걸까.
레이넌과 함께 있다 보면 계약 같은 건 없고 정말 그의 약혼녀가 된 것 같은 기분이 종종 들었다.
“르네?”
“아, 그, 그럴게요.”
“답이 어쩐지 미덥지 못한데?”
“쉽진 않겠지만…… 기억할게요.”
“정말이야. 어쨌거나 그대는 내 약혼녀라는 사실을 잊지 마. 그대는 당연히 그래도 되는 사람이라 말하는 거야.”
“그래도…….”
“계약 같은 건 걱정하지 마. 그대가 내 약혼녀로 있는 동안은 당당히 누려도 되는 자리야. 내 것이 아니라 생각하니 혼란스러운 거지. 그대의 것이야. 그걸 절대 잊지 마.”
계약 같은 건 잊어버리고 정말 그의 약혼녀로 지내라는 이야기였다.
“그러다 정말 약혼녀라도 된 것처럼 굴면 어쩌시려고요?”
농담처럼 웃으며 말했지만 뜻밖에도 레이넌은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런 걸 바라는 거야. 아까 벨라한테도 잘했어.”
“아, 안 그래도 조금 제가 심했나 걱정했는데……. 괜찮나요?”
“괜찮은 정도가 아니었어. 잘했어. 누구든 그렇게 대하면 돼. 그대가 어떤 태도를 보이든 누구도 뭐라 하지 못할 테니까.”
참으로 든든한 말이었다. 뭘 하든 괜찮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심지어 레이넌 자신에게도 뭘 하든 괜찮다고 다독이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조금 슬퍼졌다. 계약 같은 건 생각하지 말고 진짜 약혼녀라고 생각하라는 그의 말이 지금의 나에겐 얼마나 잔인한 말인지 그는 모를 터였다.
나를 편하게 해 주려는 말이겠지만 그게 나를 슬프게 하리라고는 레이넌은 전혀 짐작하지 못하겠지.
그의 상냥한 배려가 나에겐 잔인한 희망 고문이 되었다.
“이러니…….”
“응?”
“아니에요.”
“뭔가 말하려던 게 아니었나?”
이러니 좋아하지 않을 수 있나. 언제 깨닫느냐의 차이가 있었을 뿐이었다.
착각하지 않을 수가 있나. 바라지 말아야지, 했던 마음이 무색하게 기대가 생겨나는 건 또 어떻게 해야 할까.
“엄청 든든해서요. 뭘 하든 공작님께서 편들어 주겠다는 말처럼 들리네요.”
“제대로 이해했군.”
“잘 기억해 둘게요. 꼭 써먹어야지.”
“그래. 꼭 그러도록 해.”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다짐했다. 레이넌은 내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흔쾌히 그런 날을 기다리겠노라 답했다.
그러고는 각자의 일상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나는 주로 에드윈이나 아멜리아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레이넌은 대부분 듣기만 했다.
다행히 에드윈과 따로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그 이야기를 간간이 할 뿐이었다.
레이넌은 내 말에 조용히 맞장구치기도 하고, 질문도 던지고, 작게 웃기도 했다.
어두운 밤과 잘 어우러지는 묵직한 목소리는 조금씩 내 마음을 편하게 가라앉혀 주었다.
“갑자기 그때가 떠오르는군.”
“그때요?”
“휴가 갔을 때 말이야.”
“아, 그러고 보니 비슷하네요.”
그와 마주 보고 있었던 밤이 떠올랐다. 지금은 등을 맞대고 있으니 조금은 다를까.
“그간 괜히 이상하게 행동해서 죄송해요. 일부러 피하려고 한 건 아닌데……. 좀 심란했어요. 제가 가진 것들이 정말 제 것이 아닌데 쥐고 있는 것 같아 그랬나 봐요.”
“심란하면 이야기를 해서 풀어야지.”
“그렇게 할게요. 그래도 오늘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마음이 좀 후련해졌어요. 내일은…… 예전처럼 뵐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강요하는 건 아닌데…….”
“네.”
레이넌은 그답지 않게 조금 머뭇거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피해 다녔는지 말해 줄 생각은 없나?”
“그건…….”
“그건?”
그는 꽤 긴장된 목소리로 다음을 재촉했다.
“언젠가 말할 날이 올까요?”
내 물음에 레이넌은 힘이 빠진 목소리로 웃었다. 뭔가 들을 수 있으리라 꽤 기대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직은 말할 자신이 없어서요.”
과연 말할 수 있는 날이 올지 알 수 없어서요.
그렇게 말할 수는 없어 대충 비슷한 답변을 돌려줬다.
“그것도 조금은 기다려 주지. 하지만 내 호기심을 너무 자극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가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라, 내가.”
“가끔이요?”
“그대에게까지 그러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야.”
“알겠어요.”
얼굴을 보지 않은 덕분일까. 근래에 가져 보지 못한 편안한 시간을 레이넌과 보냈다. 소소한 이야기를 하느라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모를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