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6
손이 아파 오기도 했고.
“됐어. 더 때리고 싶지도 않아.”
혐오스러운 존재에게 손을 대는 건 한 번이면 되었다.
“그렇군.”
헤이른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똑바로 섰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태연해서 방금 뺨을 맞은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럼 굳이 무릎 꿇을 필요도 없지.”
그래, 아델은 헤이른의 저런 점이 싫었다. 진심이 담기지 않은 행동을 서슴없이 하니 믿을 수 없는 거다.
‘나를 아내로 맞이하겠단 말도 거짓이었겠지.’
기억을 잃은 자신을 편하게 이용해 먹으려고 한 말일 터였다.
“론슈카는 내가 데려가겠어.”
“싫다면?”
“소송도 불사해야지요.”
뒤에 서 있던 카이가 말을 덧붙였다.
“사실 그동안 론슈카를 돌봐 온 사람은 저희 아델 님 아닙니까. 헤이른 님이 이제야 양육권을 주장하는 이유를 알 수 없군요. 만약에 론슈카 님을 돌려보내지 않으시겠다면, 도미니크가는 무엇이든 감수할 것입니다.”
이건 고마웠다. 자신을 버렸던 아버지라도 이럴 땐 도움이 되는구나.
‘그놈의 작위.’
평민일 때와 귀족일 때의 차이가 이렇게 크다. 내내 숙이고 다녔던 평민일 때와는 다르게 지금은 뺨을 때릴 수도 있지 않은가.
아델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어, 일단 조금 진정하시는 게 어떨까요?”
카이가 끼어들었듯이, 아이카도 이 싸움에 참전했다.
“저희 웨더필드가는 론슈카 님을 훌륭하게 가르칠 자신이 있습니다. 정령사는 웨더필드가로 보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다른 곳에서는 배울 수 없는 많은 지식이 살아 숨 쉬는 곳이 바로 웨더필드가입니다.”
아이카는 입에 발린 말을 늘어놓으며 아델을 설득하려 애썼다.
“그러니 론슈카 님이 웨더필드가에 있다고 해서 불행해질 일은 없으세요. 오히려 만족도는 높으실 거랍니다.”
아델의 사나운 시선이 이번에는 아이카를 향했다.
“그래도 싫습니다. 웨더필드가에 론슈카를 맡기고 싶지 않아요.”
너무 단호해서 바늘 끝도 들어가지 않을 것 같았다. 아이카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모처럼 훌륭한 후계자가 생겼는데, 이대로 빼앗겨야 하나.
아이카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머리 굴리지 말고요.”
아델은 언제 화를 냈냐는 듯이 사근사근하게 말했다.
“애초에 결투에서 지고 저에게 접근하지 않겠단 사람이 누구였죠?”
“ⵈ헤이른 님이시죠?”
“맞아요. 맹세를 어기면 어떻게 해야 하죠?”
“많은 벌금을 내야 하죠?”
더불어 사교계의 망신이 되기도 한다. 그걸 벗어나려면 재결투를 해서 루카스를 이겨야 하는데, 과연 그게 가능할지는 요원하다.
“맹세를 어기는 대가가 벌금뿐이에요?”
아델은 루카스에게 작게 물어보았다.
“예전에는 신체 일부를 자르기도 했는데, 너무 잔인하다고 해서 규칙이 바뀌었다. 그래도 내야 하는 벌금이 어마어마하다.”
“칫.”
아델은 혀를 찼다. 웨더필드가의 부유함을 알고 있는데 벌금이 어마어마하면 뭘 하나. 이왕이면 감옥에라도 감금되면 좋을 텐데.
“어, 음. 그보다 제 말을 조금 더 들어 보시는 건 어떨까요? 아이에겐 어머니가 필요하듯이 아버지가 필요합니다. 그러니 론슈카는 웨더필드가에서 교육을 받으며 자라고 주기적으로 만나시는 건 어떤가요?”
“자꾸 헛소리하실래요?”
아이카는 다시 입을 다물고 뒤로 물러났다. 헤이른이 도움이라도 되었으면 했는데, 그는 아델을 빤히 바라볼 뿐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 론슈카를 당장 데리러 갈 테니, 그렇게 알아요.”
아델은 그 말만을 남기고, 여관을 나섰다. 안 그래도 좋지 않은 몸 상태로 헤이른의 따귀까지 갈기고 나니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그 탓에 쓰러질 뻔하긴 했으나, 이번에도 루카스가 잡아 주었다.
그 상태로 아델은 마차에 실려 별장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푹 자고 일어나니 아침이었다.
“제국으로 돌아가겠어요.”
아침 식사 시간, 아델은 일방적으로 통보를 했다.
“좀 더 쉬는 게 좋지 않겠니.”
“론슈카가 그런 곳에 있는데 제가 어떻게 쉬겠어요.”
아델은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레이긴은 기가 죽은 표정이었다. 아델을 위해서라고는 하나 론슈카의 상황을 감춘 건 잘못이었으니까.
안 그래도 어색하던 사이는, 더욱더 어색해져 버렸다. 그런 둘의 중간에서 카이는 잘도 움직였다.
제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깔끔하게 마친 카이는 의원까지 돈으로 매수했다. 웨더필드가보다 큰돈을 제시하고, 안전을 보장하는 대가로 여행 동안 아델의 상태를 봐 주기로 약속받은 것이다.
레이긴은 못마땅해했지만, 루카스도 레온과 함께 여행에 합류했다. 제일 좋은 마차를 수배했기에 거친 길을 지나가면서도 마차는 덜컹이지도 않았다.
아델은 푹신한 의자에 몸을 기대고 쿠션을 끌어안았다. 살짝 열린 창문으로는 선선한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하루아침에 인생이 바뀌었다. 이제 아델은 평민이 아니고 귀족이 되었다. 덕분에 론슈카도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게 되었다.
루카스와는 파혼을 했다. 이제 둘은 아무런 관계도 아니란 소리였다. 비록 그가 아델을 찾아 나섰지만, 그건 그가 선량하기 때문이리라.
‘이제 정말 모든 게 끝인가.’
한 발자국만 물러나 눈을 감으면 된다. 그러면 아델은 론슈카와 함께 평생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일단 론슈카가 루카스를 죽일 일은 없을 테고.’
레온은 복수를 위해 앞으로도 험난한 길을 넘어야 하겠지만, 결국엔 잘되니까. 몇 가지만 살짝 알려 주면 될 것 같았다.
그래, 이제 끝이다. 아델은 그렇게 생각했다.
* * *
제국에 도착하자마자 아델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론슈카를 찾는 일이 아니었다.
“먼저 부녀 관계임을 신전에 등록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편이 론슈카 님을 찾는 데도 나을 겁니다.”
그 말에 따라 아델은 레이긴과 함께 신전으로 향했다. 그리고 간단한 인증 절차를 걸친 뒤에 딸로서 도미니크가에 몸을 담게 되었다.
그리고 그걸 목격한 사람이 있었다.
“어머나? 저분은 그분 아닌가요?”
몽펠 백작가에서 본 에라스 자작 부인과 치라 남작 부인이었다.
“그러게요. 아무리 봐도 아델 님 같은데. 행방불명되지 않으셨던가요?”
“어디 그게 행방불명이겠어요? 파혼하고 나서 평민으로서 여기서 버티기 무서우니 도망쳤던 거겠지요.”
에라스 자작 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실제로 사교계에서는 그녀처럼 생각하는 이들이 제법 있었다. 행방불명은 꾸며 낸 것이고, 실제로는 도망친 거라고.
“그렇긴 하지만. 그런데 옆의 분은 레이긴 경이 아니신가요?”
“그러게요? 이 시간에 저 여자와 함께 신전이라니.”
치라 남작 부인의 눈이 반짝였다.
“이거 어쩌면 재밌어질지도 모르겠는데요?”
“평민이 새로 잡은 사람이 레이긴 경이란 소릴까요?”
“그게 아니면 뭐겠어요?”
“음, 하지만 그것치고는 조금 분위기가 다른데요. 게다가 여긴 신전이고요. 그동안 레이긴 경이 바쁘게 움직인단 소리는 들었지만, 목적이 뭔지는 알지 못했잖아요?”
“그도 그렇죠?”
에라스 자작 부인과 치라 남작 부인은 시선을 마주했다.
“그럼 록텐 경에게 찾아가 볼까요?”
“마침 오늘 젊은 사람들을 모아 티타임을 연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록텐 경은 오는 사람은 막지 않으니까 한번 가 볼까요?”
“그래요!”
둘은 신나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놀라운 사실이 사교계를 휩쓸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 음.”
록텐의 티타임에 참여한 에라스 자작 부인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찻잔을 든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델 님이 레이긴 경의 잃어버린 딸이란 말이죠?”
“제가 아는 정보통에 의하면 그렇다고 합니다.”
신전에 정보통은 왜 심어 둔 건데?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지만, 록텐이니까 이해했다. 그는 기사임에도 검술보다 가십에 목매는 남자였으니까.
“세상에.”
이제 함부로 대하지도 못하겠네. 에라스 자작 부인은 자신이 예전에 했던 말을 되새겨 보았다.
‘큰일 났네.’
에라스 자작 부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물론 그렇게 된 사람이 그녀뿐만인 건 아니었다. 평민이라는 이유로 괴롭힌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아만다 님이 싫어하셨으니 괜찮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해 보다 고개를 내저었다. 아만다가 괜찮았던 이유는 그녀가 황녀이기 때문이었다. 그에 비해 자신들은 작은 영지를 가진 귀족에 불과했고.
에라스 자작 부인은 아델을 다시 보면 잘해 줘야겠다고, 다짐하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