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85 (85/132)

#085

“그쪽에서 오지 못한다면 내가 가면 되지.”

아델은 자리에서 일어나 잠옷을 벗고 외출복을 입었다. 때는 늦은 시각, 사용인들은 대부분 자고 있을 터였다. 별장을 지키는 기사가 몇 있긴 했지만.

‘그게 문제네.’

별장을 나서는 것까진 성공했지만, 외부를 도는 기사들을 피할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바보 같은 행동이었나.’

아델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바로 앞의 수풀이 작게 흔들렸다. 경비를 서는 기사에게 들킨 건가!

당황하여 재빠르게 일어서려는데 거기서 튀어나온 건 기사가 아니었다.

‘당신이 왜 여기 있어요?’

은발의 남자가 바로 앞에 서 있었다.

“아델?”

그는 몰래 찾아왔으면서 본인이 더 놀랐다.

“왜 여기에.”

“그쪽이야말로 왜 여기,”

놀라서 손가락을 들어 올리던 아델은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외부가 아닌 아델의 머릿속에서 들려온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그동안 잊고 있던 기억들이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으윽.”

아델은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비틀거렸다. 그런 그녀를 남자, 루카스가 부축하였다.

“의원!”

루카스는 침입자면서 서슴없이 아델을 안아 들고 의원을 찾았다. 경비를 서던 기사들이 몰려들고 별장에 불이 밝혀졌다.

“이게 무슨 일인가!”

잠에서 깨어난 레이긴이 노한 표정으로 달려왔다. 하지만 그가 뭐라 더 하기 전에 아델이 그에게 손바닥을 펴서 내밀었다.

“더 다가오지 마세요.”

식은땀 범벅이 된 아델의 눈은 사납게 빛나고 있었다.

‘아버지?’

알 게 뭐냐. 어린 시절에 어머니와 자신을 버리고 떠난 사람 따위. 아델에게 있어선 헤이른과 다르지 않았다. 이유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게 뭐? 그동안 힘들었던 삶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 놓고 인제 와서 이렇게 통제하면서 잘해 주려고 하면 넘어갈 줄 알았는가? 아델은 신음을 흘리면서도 레이긴의 접근을 거부했다.

“의원, 의원부터 불러 주십시오.”

그 말에 빠르게 반응한 사람은 카이였다. 곧바로 의원이 불려 오고, 그는 아델이 모든 기억을 되찾았음을 알렸다.

루카스는 어느 정도 안정된 아델을 편하게 앉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하지만 그런 그조차도 아델의 속마음을 전부 알 수는 없었다.

“론슈카는요.”

아델이 가장 먼저 안부를 물어본 이는 자신의 아이였다.

“웨더필드가에 머무르고 있다.”

“왜요?”

“론슈카가 원했던 일이다.”

“론슈카는 아직 어려요. 원했다 하더라도 보내면 안 되죠!”

아델은 소리를 높이다 머리를 움켜쥐고 몸을 움츠렸다. 아직도 머리가 징징 울리고 있었다.

“데려오지.”

루카스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마침 헤이른도 근처에 머물고 있으니 그와 이야기해 보면 될 것이다.

헤이른은 쉽게 아이를 놓아주려 하지 않겠지만, 그건 어떻게든 론슈카를 한 번이라도 만나면 해결된다.

“레온은 어디 있나요?”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

“데리고 들어오세요.”

루카스는 얌전히 일어서서 레온을 데리러 나갔다.

“아델.”

아까부터 아델의 눈치를 보던 레이긴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아델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생각을 좀 더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잠시 혼자 있게 해 주세요.”

“아델, 몸도 안 좋은데.”

레이긴이 안절부절못했으나, 카이가 그를 밖으로 밀어냈다. 그러고는 아델에게 말했다.

“스승님이 과거에 피치 못할 사정으로 아델 님을 버렸던 것은 맞으나, 지금은 많이 후회하고 있습니다. 너무 미워하지 마십시오.”

안다, 알고 있다.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루카스의 어머니 같은 사람이면 가능한 이야기라는 걸 안다.

‘그렇지만.’

비참하던 어린 시절, 연약한 몸으로 일하다 쓰러진 어머니, 의지할 사람 없이 외로움에 떨다 헤이른에게 넘어갔던 일까지 생각하니 쉽게 마음이 열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론슈카에 대한 이야기를 감추고 있던 게 용서되지 않았다.

‘론슈카!’

간신히 이야기를 틀었는데, 론슈카는 웨더필드가에 들어가 버렸다. 이건 어떻게 해도 원작을 바꿀 수 없다는 소리일까? 아델은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었다.

“ⵈ델. 아델!”

갑자기 누군가가 손을 잡아당겨 고개를 들어 보니 루카스가 아델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뭐 하는 거지?”

“뭐 하냐니.”

아델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톱을 너무 물어뜯은 나머지 피가 맺혀 있었다.

“론슈카는 잘 지내고 있을 거다. 내가 어떻게든 데려올 테니까.”

루카스의 말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론슈카, 론슈카는 거기 있으면 안 돼요.”

“알고 있다.”

“내가 어떻게 지켜 왔는데!”

“그도 알고 있다.”

“론슈카는 불행해져서는 안 돼요.”

아델은 어깨를 떨며 흐느꼈다.

“불행해지지 않아. 네가 행복해지는 법을 가르치지 않았나.”

루카스는 조심스럽게 아델의 등을 토닥였다. 덕분에 날뛰던 감정이 조금은 가라앉는 것 같았다.

“아델 님.”

그리고 그제야 아델은 레온을 발견했다.

“레온, 넌 괜찮아?”

울먹이며 묻는 말에 레온은 씩씩하게 대답했다.

“네, 전 괜찮아요!”

“그래, 다행이다.”

레온이라도 괜찮아서 다행이었다. 아델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장 헤이른을 만나야겠어요.”

그동안은 그의 직위를 생각해서 존칭을 써 왔으나, 급하니까 그런 걸 붙일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 근처 도시의 여관에 머무르고 있죠?”

“그래.”

“나가야겠으니 좀 도와줘요.”

“얼마든지 돕도록 하지.”

아델은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루카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방을 나섰다.

“아델 님.”

방 밖에서는 카이가 아델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시간에 어디 가시는 겁니까.”

“헤이른을 만나러 갑니다.”

“밤이 너무 늦었으니 낮에 만나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아니요, 지금 당장 만나야 해요.”

“그렇다면 마차를 준비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카이는 빠르게 움직여 마차를 준비해 주었다. 말을 타는 법을 모르니 다행이었다. 아델이 마차에 올라타자 이어 루카스와 레온도 같이 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카이도 거기에 합류했다.

“아델 님을 혼자 보낼 수는 없습니다.”

“마음대로 해요.”

곧바로 마차가 출발했다. 마차가 굴러가는 내내 아델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죽지 않으면 됐어요.”

카이가 아버지의 제자인 걸 알기에 자연 말이 싸늘하게 나갔다. 그러자 카이는 더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 * *

도시의 여관에 도착하자마자 아델은 앞서서 문을 열었다.

“헤이른은 어디 있죠?”

“내가 불러오도록 하지.”

루카스가 계단 위로 올라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로브를 걸친 헤이른이 나타났다.

“이 밤중에 무슨 일이지.”

“무슨 일이냐고요?”

아델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알면서 묻는 건가요, 모르면서 묻는 건가요?”

“모르는 쪽으로 해 두지.”

“론슈카, 당장 돌려보내요.”

“론슈카는 자신이 원해서 온 거다. 아무리 어머니라 해도 자식의 자유의사를 무시하는 건 좀 그렇지 않나?”

“후우.”

깊게 숨을 내쉰 아델이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장갑을 끼면서 물었다.

“카이 님, 제가 지금 저 사람의 뺨을 치면 문제가 생길까요?”

당황스러운 질문이었으나 카이는 냉큼 대답했다.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아델 님은 도미니크가의 유일한 후계자이십니다. 웨더필드가가 대단한 건 맞지만, 도미니크가 역시 그에 뒤지지 않습니다.”

“좋아요.”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델은 헤이른에게 다가가 뺨을 올려붙였다.

찰싹!

찰진 소리가 울려 퍼졌다.

“넌 양심이 있니, 없니? 나와 론슈카를 버린 건 너야. 그런데 인제 와서 아이가 뛰어나니까 도로 데려가겠다고? 내가 용납할 것 같아?”

어찌나 세게 때렸는지 손바닥이 아파 왔다. 그만큼 헤이른의 뺨도 붉게 물들어 있었다.

“용납 못 하면?”

“개싸움하는 거지.”

아델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헤이른은 느릿하게 뺨을 어루만지더니 물었다.

“원래 이런 성격이었던가?”

“그래, 그렇다면 어쩔래?”

“나쁘지 않군.”

“뭐?”

“아이에게 필요한 건 다정하기만 한 어머니가 아니지. 강단도 있어야 하니까.”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네.”

“아델.”

헤이른이 그 자리에서 몸을 천천히 굽혔다. 그러고는 마침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아, 아아?”

뒤늦게 잠에서 깨 뛰쳐나온 아이카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세상에, 저 자존심 덩어리 가주님이 무릎을 꿇다니. 그녀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내가 어떻게 빌면 만족할까.”

“어떻게 빌어도 안 돼.”

“나는 많은 것을 각오하고 무릎을 꿇었다만.”

“그게 내가 당신을 용서해야 한단 소린 아니잖아?”

아델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렇다면 다른 뺨도 마저 때리면 어떻겠나?”

그건 조금 끌릴지도. 하지만 손을 더 댔다가는 그걸 핑계로 뭐라 할지 모르는 사람이다. 아델은 참기로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