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1. Broken the womb (3/5)

Chapter 1. Broken the womb

비커에 먼지가 쌓여있다니. 그러고보니 샘플추출용 스포이트에도 손길이 닿은 흔적은 없었다. 종합1실험실을 한번 둘러본 길호문은 무리도 아닌 일이라고 생각해 한숨을 쉬었다. 

EEC는 현재 센터의 반만 활동하고 있었고 나머지 반은 비밀리에 문을 닫은 상태였다. 사원수는 그대로였지만 센터의 규모가 무색하리만치 실상 실험은 중단되었다. 샘플이 보관된 냉장기만 가동 중이었다. 인공자궁 완전체를 포함한 자본을 쏟아 부었던 미국의 PTA사가 갑작스런 난국으로 자본을 분할하여, EEC의 권한이 국내의 연합후원회에게 넘어 온지 상당일이 지났다. 허나 실험이 중단된 것은 그런 외부사정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언론의 공격으로 흔들거리던 PTA사의 위태위태한 자본줄보다는 백람기업이 정식합류한 후원회의 서포터가 영향력이 더 컸다. 이렇듯 물자는 확보가 되어 탄탄해지는데 정작 중요한 모체가 사라진지 오래였다. 이것이 실험중단의 진짜 이유였다.

조물의 핵을 근간으로 만들어진 인공자궁과 순수한 인간의 정자를 수정하여 인공배아를 착상하는 과정. 그러나 마지막 관문을 넘겨받아 진행 중이었던 EEC가 모체 홍선담의 행방을 찾지 못하고 연합후원회에 연이은 거짓보고를 한지 한 달이 다 되어갔다.

온갖 곳을 이 잡듯이 뒤졌다. 언론사은 물론이고 백람의 눈을 피하기 위해 정식수배나 신고는 포기했지만 최은협의 발자취를 밟아가며 홍선담이 도움을 구할만한 지인들을 훑었다. 뻔뻔스럽게 자택에 방문해 손님대접을 받으며 내부를 살피기까지 했다. 이 모든 게 최은협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집안을 들여다본다고 없는 홍선담이 나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들여다보지 못해 미련을 남기며 돌아선 적은 거의 없었다. 처음엔 5명이었던 지인의 머릿수도 점점 기억해내는 숫자가 늘어 홍선담과 관련지었던 사람들을 좀 더 만나볼 수 있었다. 물론 홍선담이 최은협에게 소개해주었던 지인에 한정되어있었지만 최은협은 ‘내게 소개시켜줄 정도면 급할 때 도움을 요청할만한 인물이기도 하다’며 쐐기를 박았다.

한 다리 건너 아는 사이임에도 그들은 최은협을 아주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고 굉장히 호의적이었다. 첫인상이나 겉모습이 살아가는데 플러스 요인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야 유명하지만 저렇게 영향을 끼치는 놈도 드물 거라며 길호문은 내심 감탄했다. 

지인들의 거주지를 찾고 방문하는 건 임직원의 일이었지만 결국 최종적인 확인은 최은협이 하는 바람에 그의 몸은 휴식이란 것을 잃었다. 하루하루가 미치도록 고되었다. 참다못한 임직원은 기어이 홍선담의 험담을 입버릇처럼 했다. 물론 최은협을 의식해 그가 없을 때에만 말이다. 쓸데없는 짜증인 걸 알지만 이렇게라도 속을 풀어야 할 만큼 그들은 급박했다. 이미 국내로 귀착하여 충실한 자본을 공급받는 저희들에겐 일초라도 빨리 홍선담을 찾는 일밖에 불을 켤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

‘서, 선배님.’

낡은 벽돌건물 후문에서 소위 미취학아동 예닐곱살 녀석들이 생라면 두개를 부셔 나눠먹고 있기에 한주먹 뺏어먹고 동나무 벤치 그늘에 누워있었다. 헌데 그중 한 마리가 빼죽빼죽 주변을 맴돌더니 뽀르르 쫓아와 한다는 소리가 더듬더듬 ‘선배님’ 그리고 ‘감자합니다.’였다. 

‘감자? 감사겠지. 너 혀 짧냐?’

펼친 책을 얼굴에 덮었던 은협이 모서리를 들고 힐끔 쳐다보았다. 얼굴이 발그레해진 자그마한 꼬마가 땀을 뻘뻘 흘리며 음료수를 들고 서 있었다. 아무래도 주 선생이 홍선담이란 이 꼬마에게 ‘선배님’이라고 부르며 가져다주라고 시킨 것 같았다. 입도 겨우 뗀 이 꼬마놈이 선배란 호칭을 알았을 리는 없었다. 보육원 규율대로 호칭을 부르게끔 선생이 조언을 해준 게 틀림없었다.

속어로 ‘할례’라 통하는 전통적인 방식을 따라ㅡ이틀 전에 이곳 파주보육원으로 들어온ㅡ6살짜리 제물과 재미 좀 보려던 고학년무리를 보았었다. 자신보다 2, 3살 많은 무리였고 늘 사이는 좋지 않았다. 무시하려다가 바짝 쫄아서 한마디도 못하는 보통 애들과 다르게 이 꼬마는 너무 크게 울길래 하도 불쌍해서 빼내주었더니 소문을 들은 주 선생이 옳커니하고 쫓아와서는 아직 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어린아이들을 좀 챙겨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그거 누가 가져다주라고 했어. 주가연 선생님이지?’

황순원의 소나기를 펴놓고 건성건성 묻자 꼬마는 제대로 이해를 못했는지 헤헤 웃기만 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땐 어디 귀한 집에서 자란 녀석같이 뽀얀하게 생겨가지고는 깨끗했는데 이틀 만에 아주 거지꼴을 다 하고 있었다. 아이들의 수에 비해 손이 턱없이 모자란 파주보육원에서는 언제고 당연한 일이었다. 스스로를 관리 못하는 어린아이들은 늘 꾀죄죄했다. 때문에 착실한 고학년들은 어린아이들을 곧잘 맡아서 보조선생노릇을 하기도 했다. 물론 자신처럼 딴 길로 새서 싸움질이나 하고 깐죽대는 놈들이 더 많았지만 말이다. 

‘감자해요.’

아까부터 자동인형처럼 서서 의미도 모르는 말이나 지껄이는 녀석을 물끄러미 보다가 은협이 음료수를 낚아챘다. 아이는 그래도 저를 도와준 은협을 기억하고 있는지 빨간 입술을 달싹이며 감자하다고 연신 되풀이했다. ‘여기 앉아.’라고 권하며 옆자리를 비켜주었지만 아이는 우물쭈물 거리기만 했다. 

‘너 여섯살이지. 이름 뭐야.’

‘호, 홍선당.’

‘……. 홍선담 아니야?’

‘홍, 선닷.’

혀가 짧구만, 하고 은협이 중얼거렸다. 

새로 들어온 아이를 하나둘 맡는 게 딱히 힘든 일은 아니었지만 은협이 꺼리는 것은 따로 있었다. 착실히 아이들을 돌보는 고학년들은 대게 철이 일찍 든 중학생, 혹은 보육원을 탈출하지 않은 성실한 고등학생 정도였다. 이들은 나라에서 지원하는 정규교육만 겨우겨우 받는 처지였지만 소위 ‘될성부른 아이’란 소리를 들었다. 자신이 어울리기는 어려운 무리였다. 게다가 자신은 아직 제 몸 챙기기도 빠듯한 중학생이었다. 

은협은 주 선생이 고작 음료수 하나가지고 사람 너무 싼가격에 사주하려 든다고 중얼거리며 털털하게 웃었다. 그는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선담의 주둥이에 음료수를 대주었다. 그리고는 어린아이의 풍성하고 기다란 속눈썹에 조금 놀랐다.

‘야, 홍선담이라고 발음해봐. 홍, 선, 담.’

‘호, 홍선달.’

‘됐다. 말아라. 홍선당아.’

등나무에는 꽃이 활짝 열려있었다. 주 선생이 선담에게 건네준 오래된 음료수 맛보다도 더 달콤한 냄새를 내던 봄의 어느 날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이 홍선담이란 꼬마에게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게 될지도 몰랐고 그토록 여러 번 선담을 도와주게 될 줄도 몰랐다. 

많은 것을 예견하고 행동하기에 자신은 너무도 어렸고, 세상은 참 퍽퍽하기만 했다.

“…ㅡ빠, 오빠.”

꿈에서 헤어 나온 은협은 한동안 이곳이 어딘지 몰라 죽은 사람처럼 눈만 뜨고 누워서 천장의 무늬를 셌다. 순간 1104호의 야광별이 보인 것 같았지만 착각이었다. 시간은 한낮이었고 그의 몸은 많이 지친 상태였다. 시계를 보니 오후 4시였다. 들어와서 2시간 좀 잤나.

“……. 깨우지 말라고 했잖아.”

“요즘엔 일도 안하면서 피곤한 척 하네? 맨날 출장이라고 싸돌아다니기만 하지 오빠는.”

“비꼬려면 나가. 피곤하다.”

옆자리엔 토스트 끝을 입에 물고 란제리 차림으로 침대에 누운 연지애가 있었다. 그녀는 킹사이즈 침대를 한 바퀴 굴러 은협에게 다가오더니 타이도 풀지 않고 잠들었던 그의 배 위에 홀랑 올라탔다. 자고 일어난 은협의 몸은 겨울임에도 땀에 흠뻑 젖어있었다.

“오빠 악몽 꿨어?”

“좀 자자.”

“남자가 땀을 뻘뻘 흘리고 자는 건 바람피우는 꿈꾸거나 첫사랑 나오는 꿈이거나 둘 중 하나라던데?”

“좀 자게 내버려두라니까.”

“요즘엔 맨날 자자는 소리밖에 없잖아. 왜? 연구가 좀 미진해?”

“모른다.”

은협이 엎드리려고 상체를 비틀자 올라타 있던 지애가 꺅 하고 귀여운 목소리로 툭 떨어졌다. 평소 같으면 되는대로 머리라도 쓰다듬어 주겠지만 도저히 기력이 없었다. 은협은 쿠션에 얼굴을 묻고 다시 눈을 감았다. 

아마도 중학교부터 절친했을 김강혁, 박원종, 이윤희, 박화윤, 그리고 그 뒤로 몇 사람이 더 떠올랐다. 선담이 햄버거 아르바이트를 했던 벨루모치의 젊은 점주와 알바생 몇 명, 오랜만에 연락이 닿았다고 좋아했던 보육원 동기까지. 길호문은 사비를 들여 사립탐정을 셋 고용했고, 팀장과 연구원들로 이루어진 팀은 뿔뿔이 흩어져 지시받는 대로 그들을 찾아 나섰다. 만나면 단지 할 말이 ‘홍선담이 여기로 오지 않았냐’라는 생뚱맞은 질문 하나였지만 절실함은 점점 거대해져갔다. 그러나 별다른 소득이 없어 다른 방안을 모색해야한다는 이야기가 나올 즈음. 그러니까 어제, 은협은 정석재를 만났다. 

정석재는 영국에 가기 바로 전에 송별회를 해주겠답시고 선담을 불러들였던 친구라 인상에 남았다. 같은 학교 출신이었기 때문에 더욱 기억에 남았을지도 모르겠다. 학적에 남아있을 사람이니 가장 뒤에나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하고 미뤄두다가 어제 점심에 잠깐 시간을 냈다. 4년 전 정석재는 송별회에서 샴페인에 취해 헤롱거리는 선담을 들쳐 매고 있을 때 다가와 선담이에게 잘해달라고 부탁을 했었다. 오지랖이 넓다고 대꾸했더니 이 넓은 오지랖을 나눠줄 데가 없어서 한곳에 쏠렸다고 했었다. 

서울의 꽤 큰 종합병원의 정신과에서 레지던트를 하고 있다는 그를 찾는 과정은 쉬웠고 만남도 즉석에서 이루어졌다. 지금까지는 대부분이 거의 사전예고도 없이 방문했기 때문에 기다리는 시간이 길었으나 정석재 같은 경우는 이름을 대자 본인이 바로 튀어나왔다.

‘최은협 씨?!’

발소리도 미처 쫓아오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달려온 석재에게 악수를 청하며 은협은 빙긋 웃었다. 예전에 봤을 때는 살집이 꽤 두둑해서 선담이 무슨 곰이라고 불렀던 것 같은데 지금은 좀 빠져있었다. 부리나케 달려온 듯한 정석재는 얼굴이 매우 상기되어있었다. 그는 은협과 마주치자마자 은근슬쩍 그의 온몸을 훑어보았다. 제 딴에는 몰래 하는 행동이었지만 기민한 은협이 느끼지 못할 리 없었다. 못 볼 것이라도 본 듯한 눈빛 같아서 은협이 고개를 갸웃하자 석재가 묻기도 전에 헛기침을 했다.

‘왜 선담이에게 먼저 연락하시지 않고 저한테 오셨습니까?’

무슨 소리 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알아서 술술 불어줄 것 같은 기미가 보여 가만히 있었더니 석재는 조금 못마땅한 시선으로 은협을 바라보았다. 

‘한 열흘 전에 애가 반은 죽어서 저희 집에 기어왔습니다. 지금 저랑 제 친구가 보호하고 있는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려서 고생이고요. 말할만한 상태가 아니라서 아무것도 묻지 못하고 있었는데 최은협 씨가 이제야 나타나다뇨. 도대체 뭡니까, 그 배하고 상ㅡ’

‘댁이 어디십니까.’

은협은 말을 확 자르고 냉연해진 얼굴로 물었다. 굉장히 강압적이고 돌발적인 음성이었다. 지금 고생하는 사람은 따로 있는데 한발 늦게 나타나가지고서는 갑자기 태도가 돌변한 최은협 때문에 석재는 불편한 심정이 되었다.

‘저희 집은… 알아서 뭐하시려고요?’

똑같이 눈초리를 차게 하고 묻자 은협이 슬쩍 웃었다. 소극적인 놈으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하긴, 원래 조용하던 놈들이 화가 쌓이면 더 무섭다. 선담의 소재가 확인되자마자 지금까지 정석재만 미뤄두고 다른 곳 가서 개고생 했던 자신의 며칠이 빤히 돌이켜졌다. 처음부터 여기를 찌를걸, 그러고보면 선담이 특히나 좋아했던 게 이 자식 같다, 등의 생각이 들면서 이제 선담을 잡겠거니 하는 마음에 안도가 되었다.

‘MIU에서 알아내는 방법도 있으니 피차 얼굴 붉히지 말고 여기서 말해주십시오.’

‘학교에 남아있는 건 어차피 구(舊)주소입니다.’

툭 튀어나온 임기응변에 저가 더 놀라 석재는 부르르 떨리는 손끝을 숨기려고 가운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그러나 허술한 임기응변이 최은협에게 먹혀들 리가 없었다. 그가 픽 웃더니 ‘그럴 리가 없을 텐데.’라고 속삭였다.

‘영국에 있을 때 그 녀석이 당신과 연락하도록 허락한 적 없어. 댁이 주소를 바꿨다면 홍선담이 당신을 무사히 찾아갔을 리가 만무해.’

목소리가 엄청 낮고 묘하게 흥분해 있었다. 굶주린 산짐승과 맞닥트린 기분이었다. 석재의 심경을 꿰뚫었는지 은협의 눈초리가 칼날같이 가늘어졌다.

‘좋게 말로 할 때 말해주십시오. 녀석이 아마 저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

기세로는 역부족이라 석재는 입을 열려다 말아버렸다. 이미 관자놀이에서 땀이 비질비질 흘러나왔다. 은협이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정석재는 속이 훤히 보였다. 조금 더 몰아붙이면 끝날 것 같았다. 그 얼음 같은 미소를 보던 석재의 가슴 한쪽이 쭈뼛 서늘해졌다. 

병원이니까 무슨 짓은 못하겠지만 선담에게 쫑알쫑알 들어온 최은협은 대단한 인간이었고 직접 보기에도 충분히 그래보였다. 지금 자신은 선담의 상태를 알고 있다고 고백한 것이나 진배없었다. 허나 이쪽이 미끼를 가진 입장이라 훨씬 유리함에도 저쪽은 별로 개의치 않아하는 것 같았다. 주소까지 넘어가기 일보직전이니 조급한 기미가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다. 아직 선담에게 어떠한 이야기도 듣지 못했다. 이렇게 별안간에 누군가 닥쳐 들어와 행방을 물을 거란 이야기는커녕 뱃속 핏덩이의 출처가 어디인지도 당최 물을 기회가 없었다. 어찌되었든 간에 이 자와 맞서야한다는 자각이 들자마자 손바닥이 흠뻑 젖었다. 

‘선담이한테 먼저 전화해서 최은협 씨가 찾아가도 괜찮으냐고 물어봐야겠습니다.’

‘물어볼 필요 없을 겁니다.’

‘그래도 물어봐야겠습니다. 누군가가 널 찾는데 알려주어도 괜찮겠느냐고요.’

최은협이 어금니를 꽉 무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소름이 오싹 돋았다. 아무도 없는 휴게실은 꺼림칙해서 서둘러 나가려는 찰나, 냉랭하게 푹 꺼진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정석재 씨, 어디까지 알고 계십니까.’

그리고 묻는 그에게 답하기 전에 석재는 번뜩 떠올리고야 말았다. 

백진이 추측했던 가정 하나. 애인 연구팀의 실험군이었던 것이 아니냐고. 털어놓을 여유가 없어서 차일피일하고 기다리고 있지만 결국 홍선담이 ‘임신’을 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의학의 힘이었을 것이다. 인공자궁이란 개념은 일반적이지도 않을뿐더러 절대 개인 혼자서 진행할 수 없는 분야였다. 거대규모의 원조는 필수였고 공인받은 연구팀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 백진의 말이 맞는 것이다. 홍선담은 저 자가 몸담고 있는 어떤 실험연구팀의 실험군이었던 게 맞는 것이다. 설마설마 했지만 최은협이 여기까지 당도하여 홍선담을 찾는다니, 저희들이 정확히 짚은 것이 맞았다. 

‘……. 선담이가 당신네 연구팀의 실험체였을 거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선담이가 배가 불러있더군요. 최은협 씨가 4년 전에 따라갔던 길호문 사단의 연구팀. 그 연구팀에서 인공수정란 따위를 연구 중인가 보지요?’

은협은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비공개로 진행한 일이긴 하나 절대비밀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성공하기 전엔 언론에 노출을 꺼려한 것뿐이다. 어차피 저놈에게 뱃가죽을 다 보여줬다면 얘긴 끝났다. 누군가 그 사실을 안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다. 은협은 냉랭하게 대꾸했다.

‘그럼 이야기가 더 쉽겠군요. 시간 끌지 마시죠. 그 녀석 없어서 중요한 임상실험에 차질을 받고 있습니다. 일단 만나게 해주시면 제가 설명드릴 테니 녀석이 어디 있는 지나 알려주십시오. 제가 한번 봐야합니다.’

‘어째서 봐야한다고 확신하십니까? 애가 곤죽이 되어 돌아왔을 때에도 당신을 찾진 않던데요.’

‘그 앤 저 아닌 다른 사람한테 속내 드러내지 않습니다. 모르는 소리 말고 주소나 주시죠.’

‘……선담이한테 먼저 물어보고 대답 드리겠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벌써 천정에 매달아 놓았다. 불신으로 가득 찬 석재의 눈길을 마지막으로 문이 닫히자 은협은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맹렬히 문밖을 쏘아보는 것도 잠시, 은협은 선담이 정석재에게 어떤 대답을 들려줄지가 잠시 궁금해졌다. 절대 가르쳐주지 말라고 부탁할 거란 사실을 어렴풋이 인지하면서도 설마 홍선담이 나한테 그럴까 싶기도 했다. 정석재에게서 알아내긴 어렵겠다란 포기감이 슬쩍 올라오면서도 의외로 순순히 주소를 불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정석재가 다시 들어왔을 때엔 이미 표정에서부터 선담에게 어떤 답응을 받았는지 잘 알 수 있었고, 묘하게 승리감을 지어내는 정석재를 보며 은협은 그대로 MIU 의대로 향했다. 대답이고 기다림이고 필요 없다. 일단 주소부터 확보하고 이후에 습격하자. 지금 가봤자 이미 정석재가 연락을 돌려놨을 것이다. 홍선담이라면 무서워서 잠금쇠란 잠금쇠는 다 걸어놓고 이불에 숨어들어갈 테고 말이다. 차라리 곧장 집으로 들이닥쳤음 저렇게 대처하게 내버려두지도 않았을 텐데. 어딘가 엉성하게 접근했다는 생각이 들어 은협은 소태 같은 입맛을 다셨다.

-

“뭐라고? 이 새끼 뭐라는 거야? 흥분하지 좀 말고 제대로 말해봐.”

백진은 아까부터 핸드폰에 대고 석재ㅡ로 추정되는 인물ㅡ과 시비였다. 무언가 급한 소식을 전하려고 전화를 건 것 같지만 백진의 귀에는 잘 들어오지 않는지 정확히 말해보라는 소리가 여기까지 몇 번이나 들렸다. 선담은 침대 위에 펼쳐져있는 부루마블판을 빤히 바라보며 백진의 잔고에서 100만원 정도 슬쩍 빼와도 모르지 않을까란 꿍꿍이를 품고 있었다. 왜 내가 사놓은 땅에는 걸려들지 않느냔 말이다. 가뜩이나 날씨도 꿉꿉해 심란한데 부루마블을 하다가 우울증을 얻어가는 게 아닐까 싶었다. 흐름을 돌릴 방법이 없을까 싶어 황금열쇠를 몇 장 뒤져보고 있는데 “임마, 뭘 까보고 있냐?”라며 백진이 들어왔다. 선담이 손을 슬쩍 거두고 올려보자 그가 인상을 찡그리며 자리에 앉았다.

“돈 빼간 건 아니지? 페어플레이 해야지.”

“……. 불곰 전화에요?”

“그래, 정신 반쯤 놓은 불곰이지.”

백진이 주사위를 들었다. 손바닥에서 바닥으로 도르르 구른 주사위가 6을 가리켰다. 칸을 넘어 말을 이동시키던 도중 백진이 입을 열었다.

“누가 너 찾는다더라.”

순간 혀가 튀어나올 뻔했다. 선담이 불안심에 가득 찬 눈으로 보드판를 내려다보았다. 앙다문 앞니가 아랫입술을 표독스럽게 물어뜯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백진이 손에 주사위를 쥐어주었다.

“짐작 가는 사람 있어?”

“……….”

선담은 대답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여전했다. 

한 달이 넘어갔다. 이제는 얼굴도 깨끗해졌고 전체적으로 다 나았대도 무방했다. 2주전을 끝으로ㅡ은근히 섭섭하게도ㅡ녀석의 아랫도리를 괴롭힐 일도 없어졌다. 속살은 정하게 아물었고 새살이 피어 하얀 피부가 다시 영글었다. 웃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곧잘 말도 했고 밥도 잘 받아먹었다. 동거인으로 익숙해진 탓에 백진의 말도 그럭저럭 잘 따랐다. 한 마리 귀여운 강아지를 키우는 것도 같아서 두 남자의 퍽퍽한 하루하루도 선담으로 하여금 흐물흐물 녹았다. 

그런데도 조금만 뭔가를 물어보려고 하면 선담은 조개처럼 입을 다물어버렸다. 석재만 없었어도 거꾸로 매달아 실토하게 만들거나 말 안할 거면 당장 짐 싸서 나가라고 호통치고 싶을 만큼 그 속이 궁금했던 백진은, 석재와 합심해서 적극적으로 찌르면 될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석재는 그럴 생각까진 없어보였다. 늘상 ‘선담이가 말하고 싶을 때 들으면 그걸로 좋지 않겠냐’고 태평한 소릴 하는 것이었다. 언제는 알아볼 게 많다고 저도 열 냈으면서 이제와 꼬맹이가 기운 차렸으니 그걸로 됐다고 도인 같은 발언을 했다. ‘넌 단순한 지적 호기심도 없냐, 정신과 놈들은 다 그렇냐’라고 따져도 저는 아무 탈 없이 이대로 선담이랑 함께 살았음 좋겠다며 영감탱이 같은 소리만 했다. 그러면서 ‘넌 왜 그리 또 관심이 많냐’고 눈치 없이 물었다. 덕분에 속이 부글거리는 건 백진이었다. 

석재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굳이 벌집을 쑤셔서 뭐해먹느냔 말이다. 선담이 밝혀야겠다 싶으면 밝히겠거니 하고 일상을 즐기려는데 솔직히 사내몸으로 임신했다 떼어내며 고생한 이 고운 녀석을 지켜보고 있으면 가슴속에 뭉글뭉글해지는 게 많았다. 궁금증을 참지 못하는 제 쪽이 지극히 정상이라고 위로하는 게 전부였다. 물론 정석재도 이만큼이나 궁금하면서 괜히 점잔 떤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허벅지를 꼬집어보아도 궁금한 것을 더는 못 참겠어서 켜켜이 쌓인 호기심을 급급하게 억누르는 사이, 백진은 깨달았다. 관심이 없으면 궁금할 것도 없다는 사실을. 궁금한 게 늘어가는 동시에 호감도 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어느결에 가슴속에서 선담을 향한 호감이 은근슬쩍 싹튼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아니, 길게 뿌리내리는 것 같았다. 석재에게 기우 어쩌구 한 주제에 말이다.

그러나 일전에 내 가슴이 쿵덕거린다는 농담반 진담반인 소릴 해서 그런지 선담은 묘하게 자신을 어려워했고, 말을 하면 잘 따라오긴 했지만 몰래몰래 선을 그어놓는 게 눈에 다 보였다. 적극적인 어택을 받았으면 받았지 선 밖으로 밀려나 본적이 없는 백진은 그게 또 퍽이나 신선했다. 동시에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지 쓴 한숨이 끊이지 않았다. 

자신이 돈이라도 받으면서 이 고생이면 말을 안 한다. 그놈의 의리가 뭔지 소원을 들어줄 테니 너도 내 소원 좀 들어달라는 둥의 계집애 같은 약속만 안했어도 벌써 잠적했을 것이다. 집에서는 언제 들어올 것이냐는 소리부터 시작해 결국엔 언제 자식을 좀 보여 줄 거냐는 소리로 전화질을 해댔다. 위의 형님들이 모두 자식을 놓으니까 넷째에까지 욕심이 일었는지 애부터 보자는 것이었다. 1월 1일에 잠깐 찾아뵈었을 때도 꾸지람에 깔려 무릎이 저릴 지경이었다. 

그렇게 답답한 한 달을 지내고 새해를 맞았는데도 선담에 대해 알 수 있는 건더기가 없다고 거의 체념할 무렵, 그러니까 오늘, 누군가가 선담을 수소문했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처음엔 알아듣기 어려웠던 석재의 이야기를 듣고 백진은 이제 선담에게 자연스럽게 물어볼 구실이 생겼다고 생각했다. ‘너를 찾는 사람이 누구냐’고. 

잠시 주사위를 만지작거리던 선담이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모른다고?”

선담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백진이 심드렁한 척 대꾸했다.

“그러냐? 석재가 누가 여기로 찾아올지 모르니까 문 열어주지 말라던데 정말 모르겠어? 내가 문 열어줘도 넌 별로 상관없다 이거군. 맞아?”

“?!”

그제야 놀랐는지 선담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백진은 녀석의 손바닥에 덩그러니 놓인 주사위를 꼬옥 쥐어주더니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어쩐지 소름이 쭉 끼치는 불안한 웃음이었다. 석재에게 자주 지으며 약 올리는 것을 몇 번이나 보아왔는데 이제 그 궤도에 저까지 포함되었나 싶어 적잖게 불안해졌다. 선담이 흔들거리는 눈으로 지켜보자 그가 다시 물었다.

“꼬맹이. 홀수 좋아해, 짝수 좋아해?”

“……짝수….”

“그럼 주사위 던져서 짝수 나오면 패스하고 홀수 나오면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하기로 할까? 물론 도박 안 하고 지금 바로 대답하는 속편한 방법도 있지만.”

선담이 고민한 끝에 “싫어요.”하고 대답했더니 “그럼 나도 싫어.”하고 백진이 응수했다. 무슨 의미인지 몰라 불만스럽게 바라보던 선담은 그것이 곧 타인의 방문을 제지해주지 않겠다는 의미란 것을 눈치 챘다. 선담의 뾰족해진 얼굴 앞에서 백진은 큭큭 웃었다.

“그런 얼굴 지어봐야 우습다. 누가 널 찾는지 모르겠지만 기꺼이 두 팔 벌려 환영해주고 안내해주지. 석재는 사람이 좋으니까 저러지만 난 궁금한 거 못 참아.”

“……….”

“너도 양심이 좀 있어봐라. 보기보다 낯짝이 두꺼워요. 너 하나 보살피겠다고 난 하루좽일 부엌데기처럼 집에만 박혀있는데 고맙지도 않냐?”

어서 주사위 돌리라는 듯이 백진이 여유롭게 고개를 까닥이자 선담은 배알이 꼴려 주사위를 집어던지고 이불을 덮어버렸다. 침대위에 깔려있던 보드게임이 마구 흐트러졌지만 개의치 않고 이불 속으로 숨어들어갔다. 

“야, 자꾸 이러면 진짜 문 열어줄 거다. 너 확 잡아가라고.”

그러거나 말거나 맘대로 하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역량부족이었다. 

연백진은 오랜 친구인 석재와는 다른 인간이었다. 낯선 인간이었고ㅡ내과의라는 이유로 석재와 친분을 빌미 잡혀 자신을 돌봐주고 있었지만ㅡ너무 강한 사람이라 일상에서 대적하기도 힘들었다. 적당히 상대하기도 힘들었다. 나이차도 상당하니 두말할 게 없었다. 

그가 궁금해 하는 게 어떤 종류인지는 짐작하고 있었다. 어떻게 남자가 임신을 했을지, 자궁의 출처가 어디인지, 어느 연구팀의 성과인지 그런 게 궁금할 것이다. 지식인들은 뿌리에서부터 본능적으로 더 많은 지식을 축적하고 싶어 안달인 심리가 있다고 들었다. 하긴 굳이 배운 사람이 아니라도 이 상황에선 누구나 호기심으로 눈을 빛낼 것이다. 백진 또한 그 기본적인 욕망에 충실할 뿐이었지만 아직 입을 열 용기가 나지 않았다.

EEC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면 모든 걸 기억해내야 했다. 실험체로써 얼마나 많은 시술을 받아왔는지,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이 아파왔는지를 말해야했다. 자신이 태아를 얻고 얼마나 기뻐했는지도 정확히 짚어야 했다. EEC에서 태아가 죽기만을 기도했던 일도, 고집을 부리고 부리다 결국 흠씬 두들겨 맞고 제 발로 도망쳐 나왔던 기억까지, 모조리 훑어 내야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만도 두려운데 입을 통해 남에게 전하려면 정말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할 것 같았다. 그러니까 잠시라도 좋으니 자신을 그만 내버려두었음 했다.

어느덧 석재의 집에 들어 온지 한 달이 지났다. EEC에서 벌써 자신의 소재를 찾아냈어야 했다. 대책을 생각해 둔 것은 아니지만 막연하게 언젠가는 들이닥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이 무서워 뉴스는 켜보지도 않았고 석재와 백진이 나누는 이야기 중에서도 사회, 이슈 이런 건 무시하고 필요한 말만 걸러들었다. 혹여 EEC에서 모체를 찾느라 안달이라고 하면 병신같이 어쩔 줄 몰라 할 게 뻔하니까. 선담은 이불안에서도 자신을 보호하듯 더욱 몸을 말아 안았다.

백진은 주섬주섬 보드게임을 챙기고 방 한쪽에 가지런히 정리를 한 후에 침대에 올라앉았다. 그리고는 부드럽게, 머리맡에 조금 삐져나온 선담의 머리칼을 쭉쭉 잡아당겼다.

“꼬맹이, 또 울어? 눈물 마르는 날이 없네.”

선담은 이를 악물었다. 분하지만 사실이었다. 정말로 또 눈물이 났다. 눈가를 받치고 있는 손등이 축축했다. 평생 울어야 할 눈물을 한달 만에 다 쏟아냈으면서 저런 놀림질 한번에 또 울어버린다. 이런 게 바보병신 같은 꼴이란 걸 알면서도, 그런데도 지난 일을 생각하면…… 너무도 지독했다.

‘이제는 옛날로 돌아갈 수 없다고 했잖아! 그래도 난 네가 좋다는데 왜 이렇게 치졸하게 굴어! 네가 이딴 데 신경을 쏟으니까 자궁도 낡아버렸다고!’

‘배 갈라야 낳을 수 있는 주제에 너 혼자 뭘 낳겠다고? 다신 애가지고 이 지랄하게 만들지 마! 애는 물론이고 너까지 싸잡아서 묻어버리기 전에!’

왜 그렇게까지 말했어야 했냐고 묻고 싶었다. 왜 그렇게까지 해서 아이를 지워야했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왜 나를 그렇게까지 때렸어야 했는지도……. 기형아가 안 되는 거면, 그럼 내가 실험대에 다시 올라설 수도 있는데 왜 낳는 건 죽어도 안 된다고 한 걸까. EEC가 안된다고 할 때 단 한번만이라도 내 편을 들어줬더라면 이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씨앗이라서 모든 걸 행복하게 받아들였던 것처럼 기형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것뿐인데 틀렸던 걸까. 언제부터 나보다 인공자궁이 더 중해졌느냐고, 설사 아이가 털 달린 짐승이라고 한들 무슨 상관이겠냐고ㅡ… 묻고 싶었다.

백진의 조롱보다는 그로인해 연상되는 상처가 너무 쓰려서 선담은 방어하듯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이불 틈서리에서 떨리는 울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자꾸 벽 쪽으로 기어들어가는 이불보따리를 보다가 백진이 슬쩍 이불을 들추었다. 선담은 고개를 더욱 처박고 얼굴을 숨겼다.

“어이구, 울어요.”

애 취급하는 말투에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지금은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어 이만 벅벅 갈았다. 선담이 짜증부리며 이불을 덮으면 다시 걷고 또 덮으면 또 걷었다. 나중엔 성질이 나서 이불을 걷는 손을 기다렸다가 손바닥으로 소리 나게 때렸다. 찰싹! 꽤 세게 내리치자 백진의 눈이 번뜩 빛났다.

“이놈 새끼가.”

그러나 으르렁 거리는 것도 찰나, 백진은 이불째 그대로 선담을 끌어안았다. 선담이 힉, 하고 숨을 멎었다. 탄탄한 가슴이 자신을 뒤에서 꾸욱 끌어안은 것이다.

“장난이니까, 울지 마.”

선담의 몸이 뻣뻣하게 경직된 것을 느낀 백진은 열상을 치료하던 날들 중 어느샌가 살내도 풍기지 않고 점잖을 떨며 꼿꼿하게 굴던 선담을 기억해냈다. 아마도 저에게 호감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해서 그러지 싶었다. 누군가 좋아하는 티를 내니까 긴장한 것이다. 그러니 지금 이 포옹으로 더욱 바짝 놀라 더욱 단단한 선을 그어놓고ㅡ누군가들에게 그랬던 것처럼ㅡ자신에게서도 몰래 도망칠지 모르는 일이었다. 허나 백진은 나중이 어찌되든 그래도 지금만큼은 선담에게서 다시 향기가 풍기기에 기뻤다.

“네가 낑낑대는 걸 보고 있으면 사람 맘이 아프다.”

속눈썹 끝에 맺혀있던 눈물이 눈알에 툭 떨어져 선담은 눈을 비볐다. 그러자 백진이 품을 더욱 조이며 귓가를 찾아 나직하게 속삭였다.

“잘은 모르겠지만 네가 울면 속상하다고.”

이 남자가 자신에게 진정 마음이 있다는 사실이 와 닿았다. 동정이든 연정이든 호기심이든, 어쨌든 호감정에 가까운 기호임은 맞았다. 선담은 눈물로 물러진 눈을 크게 껌벅였다. 백진이 제 뒤통수에 코를 묻었기 때문이다. 그는 팔에 힘을 주어 이불째로 선담을 벽에서 떼어냈다. 그는 “추우니까 벽에 붙지도 말고.”하고 다정한 목소리를 했다. 

선담은 혹시 내가 무언가 잘못 흘리고 다녔나…? 그랬을 리는 없는데…라며 당황스런 속을 들키지 않으려고 노력하다 더욱 굳어버렸다. 어딘지 제멋대로인 이 사람이 언제 이런 감정을 싹틔웠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백진은 선담의 궁금증에 답할 생각이 없는지 그저 연거푸 끌어안았다. 갑작스럽고 어안이 벙벙했지만 차마 고개를 돌릴 수 없어 선담은 저항도 못한 채 안겨있어야 했다.

- - - -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회장님.”

강남에 땅 가진 모든 늙으신네들이 굳이 들려 주기적으로 약을 지어먹는다는 한의원답게 나무소재로 지어진 오래된 단층건물은 약재 다리는 냄새가 쓰게 퍼지고 있었다. 새벽부터 귀빈이 내방한다는 소리에 서둘러 문을 연 한의원은 그 이상 손님은 받지 않고 어느 젊은 여성환자를 진찰했다. 

그 후, 진료를 마친 여든 족히 먹은 노의원이 차트와 엑스레이 등을 연의범 앞에 내려놓았다. 알 수 없는 그림이 그려져 있는 사진을 몇 장 들춰보고는 연의범이 깊게 패인 눈가를 문질렀다.

“이렇게만 봐서는 잘 모르겠소만.”

“예, 이제부터 제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좋은 소식이면 좋겠구먼.”하고 털털 웃으며 연의범이 보이차를 한 모금 삼켰다. 같은 연갑으로 보이는 두 노인은 한쪽의 기가 워낙에 세서 마치 엄격한 연대의 선후배지간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는 하나의 왕국으로 인정해주어도 무방하다는 ‘백람’의 초대회장이 단출한 의원집에 들어와 대뜸 눈앞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지애 몸은 좀 어떻습니까, 선생님.”

TV에서 보던 불굴의 지도자 이미지를 온몸으로 내뿜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연의범의 말씨는 매우 느긋하고 공손했다. 아무리 큰 기업의 회장이라도 자식을 맡긴 의원에게는 자상한 아버지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공석에서의 모든 지위를 털어낸 순수한 얼굴이었다. 새삼스럽게 환자에 대한 의무감을 느끼며 노의원은 잠시 설명을 준비했다. 그 시간 동안 연의범은 조금은 초조하게 차를 홀짝거렸다.

“가족분 중에 혹여 이 같은 증상을 보였던 분이 계십니까? 사모님이나 그 윗대도 상관없고요.”

“저희 셋째 딸아이가 그랬습니다. 그 때문에 첫애를 실패하고 많이 힘들어했지요. 그러다 6년 전에 불임으로 판명 났습니다.”

“……….”

“어떻습니까. 우리 지애는…”

잠시 경화되었던 입가에 힘을 주어 대답을 참은 노의원은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까스로 불안감을 감추던 연의범의 얼굴이 흐트러졌다. 그는 컵을 쥔 손을 부드드 떨더니 “그렇군요…”하고 단념하듯 중얼거렸다. 상황이 비슷하진 않지만 그래도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딸아이의 불임소식을 두 번째 듣는 늙은이가 안 되어 보여 노의원은 그를 위로했다

“허지만 회장님, 여기서 포기하실 게 아닙니다. 셋째 따님은 어떠실지 몰라도 막내 따님은 아직 어리지 않습니까? 꾸준히 약을 먹고 노력하다보면ㅡ”

“아닙니다. 약을 먹는다고 성장이 멈춘 수란관이 다시 자랄 리 만무합니다. 바보라도 알 겁니다.”

“회장님. 다른 곳도 아니고 백람의 회장께서 어째 그렇게 약한 말씀이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수란관도 몸의 일부입니다. 충분히 자랄 수 있습니다. 오히려 늦어졌던 만큼 더 건강하게 자라서 또 금방 좋은 소식이 들을지 누가 압니까?”

노의원이 거의 역정을 내듯 힘을 북돋아주자 연의범이 고개를 들었다.

“그렇습니까?”

“그럼요, 그렇고말고요.”

“셋째애가 그러고서는 병원에선 막내애도 한번 검진을 받아보는 게 좋다고 하더군요. 유전적인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요. 애들 어미도 멀쩡했는데 갑자기 이러더니… 그 이후로는 명의란 명의는 물론이고 해외까지 몇 번이나 나섰습니다. 여기는 좀 늦게 발견한 것뿐입니다. 그래서 이번에야말로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망연자실에 홀로 중얼거리는 연의범을 안쓰럽게 바라보던 노의원은 문밖에서 인기척을 들었다. 아무래도 이 사람의 막내딸아이가 검사실에서 나온 듯싶었다. 연지애라고 했던가. 참 고운 처녀인데 딱하게 됐다. 날 적부터 수란관과 자궁이 자라지 않는다니. 간신히 달거리하는 게 고작인 수란관은 수정까지만 가능하고 자궁은 태아를 기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아들이 많은 집안이라고는 알고 있었지만 고작 있는 딸 둘이 다 이러면 정말 난감하겠지 싶었다. 연의범도 딸의 발자국소리를 들었는지 차를 훌쩍 털어 넣더니 의사에게 골드카드를 넘겼다. 

“아이 몸도 챙겨주고 ……그것에도 좋을 그런 것 좀 부탁드립시다.”

“아, 예, 그럼요.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지금 주문하셔도 약을 짓는데 보통 일주일은 걸립니다. 괜찮으십니까?”

당연하다는 듯이 연의범은 고개를 끄덕인 후에 “아, 그리고ㅡ”하고 말을 덧붙였다.

“고작 이런 일을 가지고 이슈를 떠올릴 생심일랑 애초에 접어두십시오. 철저히 비밀에 부쳐주셨음 합니다. 사위될 청년에게도 겨우 알린 가족사니 주의해 주십시오.”

노의원은 거기까지 눈코 없이 끼어들을 정도로 담력이 좋진 않았다. 백람을 건드려봐야 좋은 고물이 떨어질리 없었다. 자신은 지금까지 그랬듯이 이 작은 마을 한구석에서 소소히 밥벌이만 하면 되었다. 

물론 이런 생각은 들었다. 같은 땅에 살아도 사는 세계가 아예 다른 사람들이 있다는 생각. 과연 백람의 연고에 소속이 될 그 청년이 결코 단순하지 않은 이 비밀을 어떻게 여길지가 흥미로웠다. ‘고작 이런 일’이라고 치부하면서도 노출되기는 극도로 꺼리는 문제를 말이다. 허나 그런 생각도 잠시고 노의원은 약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금은 백람의 막내딸에게 지어줄 당약에 대해서만 생각하는 게 옳았다. 

다만 그는 약재를 하나둘 꺼내놓으며 습관처럼 홀로 중절거렸다. 

“하긴 진실 따위 부질없는 삶이 있기도 하겠다. 더 큰 표적이 존재하는 삶이라면.”

-

조수석 뒤에 앉은 연지애는 뒤늦게 따라 들어온 아버지에게 투덜거리느라 바빴다.

“이런 시골 촌구석에 무슨 명의가 있다고 저까지 끌고 오세요?”

“그러지 말아라, 애비라고 예까지 오기가 쉬운 줄 아느냐.”

“아빠 때문에 오늘 오빠랑 보기로 한 것도 취소했단 말이에요.”

연지애가 부루퉁하게 대답하자 연의범이 미안한 기색을 보였다. 여섯 자식 중 총 넷이 아들놈들이다보니 투정부릴 딸이 참 부족하기도 했다. 지애는 딸인데다 막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여자로서 구실을 반쪽만 할 수 있는 아이라 더욱 가여운 탓도 있어서 연의범은 막내딸의 말이라면 죽는 시늉도 곧잘 지어보였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딸애의 까랑까랑한 목소리는 한쪽 귀로만 흘려들으며 연의범은 생각에 잠겼다. 첫째와 둘째아들놈은 제 장가 잘 들어서 자식도 보고 백람의 사업장을 이어받아 꾸리는 위치였고 셋째딸은 저가 하고 싶어도 아이를 못 갖는 것뿐이었지만 넷째 연백진 녀석은 이제 색시 좀 데리고 오라고해도 당최 말을 들어먹질 않았다. 고분고분하던 위의 세 자식들과 다르게 네번째 아이부터 삐딱선을 타더니 갑자기 소아과 의사를 하겠다고 튀어나가질 않나, 다섯째는 경호원을 하겠다고 나가버리고, 마지막 딸애는 길호문이네 연구팀의 젊은 애송이랑 결혼을 할 거라고 방방 뛰었다.

사실 최은협과 딸애가 만날 원인을 제공한 건 자신과 길호문이었다. 오랜 동무였던 길호문이 ‘인공자궁’이라는ㅡ무척이나 흥미로운ㅡ소재를 가지고 PTA사의 후원을 받으며 연구에 착수했다기에 관심에 두고 있었는데, 갑자기 한국으로 귀환해서는 EEC를 지원할 후원회를 소집하는 것이었다. 처음엔 인공자궁이란 개념이 긴가민가하여 투자에 한참을 망설였지만 수정기능이 전무한 남성 실험체에 태아를 앉혔다는 이야기에 온몸이 덜컹거렸다. 결국 주가가 불안정하던 PTA가 자본을 분할하는 시점에 EEC후원회의 대표를 맡아버린 연의범이었다. 그리고 두 늙은이는 상의했다. 두 사람 모두의 이득을 취하자고. 따라서 연의범은 연지애를 최은협에게 붙임으로서 EEC의 내부사정을 보다 긴밀히 파악할 수 있었고, 길호문은 최은협에게 연지애를 맡김으로서 자금조달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두 남녀가 그들에겐 중요한 고리였다. 다만 연의범은 막내딸이 결혼얘기까지 들먹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한참 쫑알거리던 연지애는 우울한 목소리로 물었다.

“근데 아빠, 언제까지 은협오빠한테 비밀로 해요?”

“……. 그보다 지애야, 그녀석이 정말로 너랑 결혼 한다더냐?”

“당연하죠.”

딸애는 그리 대답했지만 연의범이 볼 때엔 아직 확답은 없었다. 당연했다. 그 야망에 가득 찬 젊은 것도 고작 서른에 데릴사위 오긴 싫을 것이다. 팔자개편에 눈먼 망둥이들이나 옳타쿠나 좋아할 일이지 진국인 놈들은 좋아하지도 않는다. 특히나 최은협같이 그런 눈을 가진 놈들 말이다. 

일전에 연구소를 방문했다가 잠깐 보았을 뿐이지만 참 남다른 구석을 가진 놈이라고 생각했다. 보통사람들은 느끼지 못할 숨겨진 패기가, 닳고 닳은 연의범의 눈에는 너무도 뚜렷하게 보여 놀랄 정도였다. 스물여섯에 길호문이 연구실로 챙겨올 정도면 어지간히도 우수하다는 소리였다. 게다가 최종 정자착상시술도 그가 집도했다 들었다. 앞날 창창한 녀석이 과연 한창일 나이에 발목 잡히고 싶어 하겠느냔 말이다. 

“요즘 것들은 좀만 좋으면 결혼한다고 설치더라.”하고 연의범이 웃어넘기자 지애가 가시눈을 했다. 

“아빤 무슨 말을 그렇게 하세요? 진짜라구요.”

“글쎄다, 애비는 잘 모르겠구나. 넌 아직 졸업도 하지 않았고…. 대학원도 다니고 싶다지 않았냐. 공부가 더 하고 싶다면서. 교대인 네가 그러는데 의대인 그놈이 덜하겠느냐.”

“그건 괜찮아요. 학생부부하면 돼요. 난 그게 꿈이었는데, 학생부부. 근데 그러려면 빨리 EEC 연구가 끝나야 하는데 걱정이에요. 요즘 오빠 말도 잘 안하고 바쁘기만 엄청 바쁜가 봐요.”

“애같이 조르지 말고 조신하게 지내라. 내가 지금 EEC의 후원위원장까지 해가며 인공자궁 실험을 지원하는 까닭이 다 너나 네 언니한테 있으니까. 중요한 실험이다.”

중도만 걷는 아버지의 충고가 질렸는지 연지애는 창밖을 보았다.

“아빠는 왜 그리 자식 욕심이 많아요? 저도 연구가 성공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긴 하지만 기필코 자식을 낳겠다고 하루하루 다짐하면서 사는 건 아니에요. 큰오빠하고 둘째오빠네 애들만으로는 충분치 않아요? 요즘 백진오빠가 아빠 때문에 스트레스 받아 죽겠댔어요.”

“그놈 그건 쯧…. 올해로 서른둘이나 먹었음 구실을 할 줄 알아야지. 애들이 그렇게 좋아서 소아과를 지원할거면 오기부리지 말고 제대로 해냈어야지. 그게 아니면 제가 빨리 낳던가. 여자에 통 관심이 없는 건지 도대체가 사고만 치고 말이야.”

“아빠, 그렇게 말씀하시지 마세요. 오빠라고 ‘그때’ 그러고 싶었겠어요?”

연의범은 혀를 끌끌 내둘렀다. 부녀를 실은 승용차는 미끄러지듯 신속하고 안전하게 비포장도로를 빠져나와 서울행 고속도로로 들어갔다.

- - - -

주말이어선지 대형 할인마트는 인파로 북적였다. 우두커니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어깨곤장 세례를 받고 있는데 석재가 “선담아.”하고 손을 확 잡아끌었다.

“멀뚱히 서서 뭐해? 먹고 싶은 거 아무거나 골라잡으래도? 오늘 백진이가 쏠 거야.”

“야야, 없는 말 지어내지 좀 마! 네놈이 집은 것만도 벌써 20만원은 나오겠다!”

백진은 온갖 먹거리가 산처럼 쌓인 카트를 힘겹게 밀며 외쳤다. 웬만큼이 아니면 마트의 거대카트는 꽉꽉 채우기가 어려운데 이 세 사람의 카트는 1단, 2단, 3단 형식으로 태산을 이루고 있었다. 1단은 가장 급한 생필품, 2단은 주식거리, 3단이 바로 군것질거리였다. 

백진의 훈계에도 아랑곳 않고 석재가 골라잡으라고 닦달하자 마지못해 선담이 마른치즈를 하나를 슬쩍 집었다. 그러자 백진이 선담의 손등을 때렸다. 찰싹.

“꼬맹이가 안주는 무슨.”

“쫀쫀하게 굴지 말고 선담이가 먹고 싶은 거 고르게 해.”

“어째 이제 막 민증 받은 꼬마가 고르는 게 하나같이 술안주야? 임마, 칼슘 든 걸로 골라.”

주민등록증은 18살에 나온다고 대꾸하는 대신 선담은 꿋꿋하게 고른 것을 올려놓았다. 그러자 석재가 마른 무화과도 하나 더 올려놓았다. 백진이 더더욱 싸하게 노려보는 눈길이 느껴져서 순간 저도 모르게 풀이 죽었지만 요플레가 보이자 선담은 하나 또 덥썩 넣어놓았다. 백진이 웃음 섞인 한숨을 쉬었다.

“간식거리는 그만 사라. 밥 안 먹을 거야? 또 요플레 같은 거 주워 먹고 밥상 앞에선 끼적거리려고.”

“무슨 파파노인같이 말한다. 그치, 선담아?”

“넌 또 왜 껴들어? 언제는 정크푸드 먹이지 말라고 해 싸더니.”

“오늘은 외출이니까 특식인거지.”

석재가 저렇게 활발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처음 봤다. 영국으로 떠나기 전보다 그는 훨씬 밝아진 것 같았다. 지나치게 숙맥 같았던 사람이 이렇게 변해있으니 괜스레 보기 좋아서 선담은 “애 취급 하지 마.”라고만 푸근하게 대답했다. 

내부를 다 돌고 계산 안 된 카트를 잠시 세워둔 뒤 매장 내 패스트푸드점으로 들어갔다. 사람은 밥힘으로 산다던 백진도 덩달아 햄버거를 골랐다. 세 사람은 햄버거를 받아들고 자리에 앉아 포장을 뜯었다(문제는 백진의 햄버거가 가장 크다는 사실이었다).

“선담아, 먹고 싶으면 말해. 또 먹어도 돼.”

“정석재, 꼴깝을 떨어라. 애들은 이런 거 먹으면 살만 찌고 키 안 큰다. 지금은 살이 좀 쪄야겠지만.”

백진이 여상한 목소리로 툭 뱉자 석재가 먹던 빵가루를 튀겨가며 “선담이 키가 뭐가 어때서?”라고 반박했다. 그러자 백진이ㅡ마치 기다렸다는 듯이ㅡ물었다.

“너 키가 몇이냐? 80 좀 안되지?” 

“……. 178이요.”

“거봐라, 키 안 컸지.”

다른 놈이면 몰라도 거의 190cm 가까이 되는 백진이 하는 소리라 할 말이 없었다. 분해서 입을 꾹 다물자 옆에서 석재가 "네놈이 지나치게 큰 거야."라고 면박 주었다. 선담은 불곰이나 저 인간이나 죄 똑같아 보인다고 말하려다가 말았다. 원래는 내 키가 더 정상인데, 라는 생각이 들자 속이 보글보글 끓어올라 백진을 몰래 흘겨보았지만 그게 다였다. 백진은 매우 즐기는 웃음으로 “뭐냐, 꼬맹이?”하고 턱짓을 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 노털.”

백진의 눈가가 확 붉어졌다. 

“노털?”

선담은 히끅 놀랐지만 중얼중얼 하고 싶은 말을 뱉었다.

“네, 구렁이에 늙다리 같으세요…”

“와. 이 녀석 봐라.”

옆에선 석재가 배꼽이 떨어져라 웃고 있었다. 그렇게 웃을만한 모욕도 아니었는데 석재는 마냥 즐거워보였다. 당연한 것이, 석재는 일 때문에 일행에 합류해 맘 편이 쉬어본 날이 거의 없었다. 말년으로 갈수록 바빠지는 게 바로 레지던트였다. 그나마도 장을 본 후에는 같이 들어가지 못하고 헤어져야 했다.

“야, 정석재. 웃지만 말고 혼내야지. 네 의형제님께서 나더러 구렁이란다.”

그러자 석재가ㅡ진짜 의형제인ㅡ백진을 향해 “구렁이도 그냥 구렁이가 아니라 능구렁이지.”라고 대꾸하며 또 한번 폭소했다. 타격이 큰 말도 아닌 것 같은데 석재가 너무 좋아해주니까 괜히 쑥스러워져서는 선담은 햄버거만 입에 물었다. 그러자 백진이 선담의 햄버거를 툭툭 건드렸다.

“우물거리지 말고 꼭꼭 삼켜서 먹어. 체했다고 또 울지 말고.”

“……남 이사.”

석재가 보기에 백진은 일부러 선담에게만 시비를 걸고 있었다. 관심 있는 아이한테 차마 솔직할 수가 없어 자꾸 딴죽을 거는 남학생처럼,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일일이 참견 중이었다. 비꼬는 것 같아도 사실은 푸짐한 마음 씀씀이를 모두 갖다 바치는데, 중요한 건 그 마음이 과연 선담에게 전해지겠느냐는 것이다. 고작해야 돌아오는 소리가 구렁이에 늙다리인데 말이다.

“아, 정말 일어나 봐야겠다.”

햄버거를 해치우고 감자튀김을 집던 석재가 시계를 보며 일어났다. 그러자 선담이 아쉬운 얼굴을 했다. “이번엔 언제 들어와?”라고 묻는 말에 곧장 들어오겠다고 대답해주고 싶었지만 자기 맘대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글쎄… 요즘 임용이 있어서 레지들이 더 바쁘거든.”

“다녀와라, 걱정 말고.”

석재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방을 챙겼다. 선담은 못내 아쉬워서 몇 번이나 손을 흔들었다. 사실 석재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시간이 약이라고, 슬슬 회복할 기미가 보이는 선담 때문에 지금까지 극진히 모셔놓은 보람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소중한 사람이 나아지는 모습을 보면서 쾌감을 느끼는 것은 의사를 천직으로 삼은 자들의 공통된 고질병이자 직업병이었다. 백진이 저렇게 사사로이 장난을 거는 것도 다 그 때문일 것이다. 몸의 상처보다 딱 10배 느리게 낫는 것이 바로 마음의 상처라고 했다. 많이 다쳤던 녀석이니까 아직은 무리더라도 회복의 실마리가 보인다는 건 큰 행복이었다.

크게 우려했던 최은협에게서도 연락이 없었고 서른둘의 새해는 평온했다. 무한정 애정을 퍼다 부울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즐거웠다. 창백한 얼굴로 입김을 풀풀 내뿜으며 금방이라도 쓰러질듯 덜덜 떨던 열네살의 MIU의대 주차안내 보조. 어딘가 막연하게 홀로 서 있는 듯한 모습이 아직도 선명했다. 작은 눈사람 같다고도 생각했었다. 작고 동그랗고 예뻐서 냉동고에라도 집어넣어 도와주고 싶었다. 

사실은 그 작고 어린 눈사람 뒤에 두터운 버팀목이 하나 우뚝 지키고 서 있었다는 걸 이제는 알면서도. 그러면서도 쉽게 선담에게서 정이 사그라지지 않는 까닭은, 눈이 펑펑 쏟아지던 그날 오후 금방이라도 녹아버릴 것 같은 어린 눈사람을 보았기 때문은 아닐까.

-

“무겁지? 이리 좀 줘.”

“들어줄 손도 없으시잖아요.”

양손에 든 것이 버거워 보여 도와주려고 하는데 선담은 끝까지 제몫을 놓지 않았다. 첫인상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백진은 선담이 어딘지 한없이 여리고 나약해보였다. 그러나 의외로 선담은 이런 문제에서 기백이 좋아 좀체 수그러들지 않았다. 눈물이 나고 몸이 아픈 것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해도 힘쓰는 일만큼은 자신의 의지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선담의 거절을 끝으로 잠시 두 남자는 눈 쌓인 인도를 말없이 걸었다. 계산에 오류가 있었다. 석재가 출근하는 김에 겸사겸사 마트에 들리자고 나온 것이 이렇게 짐이 많아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미리 알았다면 석재한테 타고 왔던 차를 놓고 가라고 했을 것이다. 헌데 석재도 시간이 촉박해 정신이 없었는지 이들이 부담할 짐의 크기를 생각 못하고 그대로 차를 몰고 가버렸다. 계산을 마치고나서야 이동수단이 없다는 것이 상기되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무리해서는 안 될 것 같아 걸어서 15분 거리를 택시로 가로지르려고 했지만 선담 쪽에서 걷자고 했다. 처음엔 어떻게 이 짐을 이고 걸어 가냐고 툴툴댔던 백진도 생각보다 빨리 도착해버려 놀랐다. 묵묵히 걷기만 했는데도 시간은 쏜살같았다. 

이번 겨울은 유난히 눈이 많아 아파트단지로 들어가는 길이 새하얬다. 적당히 대지를 덮은 눈을 밟다가 선담은 문득 백진을 불렀다.

“저기요.”

“……….”

“저기요.”

“내가 저기야? 저기 뭐.”

백진의 눈가가 차가워진 것을 보고 무심결에 ‘저기’라고 불렀던 선담은 조금 무안해졌다. 그러나 곧 아닌척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어르신이라고 불러드릴게요.”

“차라리 노털이가 낫겠다.”

“싫으면 저도 꼬맹이라고 부르지 마세요.”

“알았다, 꼬꼬마.”

꼬꼬마란 말에 경악한 선담이 발치에 쌓인 눈을 탁 차서 날렸다. 발끝에 채여 날아온 눈가루가 백진의 바지 아랫단에 묻었다. 그러자 백진도 선담을 조준해서 발을 툭 찼다. 요령이 좋아서 날아온 양이 더 많았다. 스니커즈 안으로 눈가루가 들어왔다. 차가웠다. 이에 맞서 선담이 아주 작정하고 발차기를 하려는데 백진이 후다닥 도망치기 시작했다. 어이가 없어서. 그 뒷모습을 노려보던 선담은 두 팔에 짐을 가득 든 채로 뒤뚱뒤뚱 쫓아가기 시작했다. 양손이 묶인 채 오리처럼 뛰는 폼이 이상하리란 것은ㅡ똑같은 처지인ㅡ백진의 뒷모습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백진의 짐은 정말 커서 달리는 게 힘들어보였고 또 우스워보였다. 선담은 더욱 힘껏 달렸다. 이제는 은협에게 맞아 멍울졌던 상처도 사라졌고 허락 없이 범해져 찢어졌던 그곳도 더는 아프지 않았다. 아픈 곳이 있다면 그것은 가슴이었지만 살아남은 이상 언제고 꽁꽁 싸맬 순 없었다. 

아파트단지 정문에 들어서며 선담은 한달 전에 비가 내리던 날 혼자 이 바닥을 기었던 자신을 돌이켰다. 거름밭을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이 있단다. 살아있으니까 꼭 죽으란 법도 없었다. 그렇게도 죽을 것 같더니 지금은 또 살아있기 때문에 이런 소소한 장보기도 즐거운 것 아닐까. 세상에 간사한 게 인간이라는 말처럼이나 퍽 우스웠다. 그리고 웃어버리니까 정말 별일 아니었다는 듯이 웃음이 났다. 하얗게 눈이 덮인 세상처럼 지금까지의 모든 게 없었던 일처럼 느껴져서 갑자기 기분이 몹시 좋아졌다.

“하하하하.”

꺄르르 터지는 웃음소리에 백진이 뒤를 돌아보았다. 선담은 의식도 못한 듯 했다. 들고 있던 짐을 바닥에 잠시 내려놓고는 잘도 웃었다. 백진은 땀이 조금 맺힌 이마를 한번 쓸어 올리고는 그런 선담을 비죽 놀렸다. 

“길바닥에서 그러고 웃으면 미친 줄 알아.”

그러나 완완한 웃음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웬일로 저리 기분이 좋을까. 새의 노랫소리 같은 웃음에 백진은 눈도 못 떼고 그를 지켜보았다. 그러다 시선이 마주치자 얼굴을 확 돌렸다.

“어서 가자, 춥다.”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 선담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짐을 들었다. 중심을 잘못 잡아 조금 휘청이는 통에 백진이 화들짝 놀라 다가오려 했지만 선담은 자세를 다시 잡았다. 백진은 혀를 찼다. 저 짐 좀 맡겼으면 좋겠는데. 허나 저놈의 황소고집은 끝끝내 저가 다 옮기고 뿌듯해할 위인이라 내버려두기로 했다. 뒤를 밟는 사박사박 눈소리를 의식하며 백진이 성큼성큼 돌담길을 올라갔다.

그러던 중 쫓아오던 선담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백진은 뒤를 돌아보았다. 선담이 놀란 토끼마냥 눈을 뜬 채 돌계단 중간에 장승처럼 서 있었다. “뭐해, 임마.”라고 불러보았지만 못 들은 듯했다.

선담은 순간 시야가 흐려질 것 같아 입술을 사리물었다. 손발이 식은땀에 푹 젖고 등골을 타고 짜르르, 아픈 전류가 흘렀다.

최은협의 그림자가 보였다.

아주 순간이었지만 시야에 와 박혔다. 정확히 최은협이었다. 석재의 아파트를 돌아 들어간 것을, 지금 분명히 봤다. 선담은 쓰러져버릴 것 같은 어지러움을 느꼈다. 심장이 미친 것이 아니라면 이렇게 뛰어댈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터질 것같이 고동쳐서 아플 지경이었다. 

“왜 그래?”

백진이 선담의 손에서 짐 하나를 뺏어 제 손에 겹쳐 쥐었다. 선담은 어디에 홀린 것처럼 서 있다가 백진이 주변에서 서성이자 그제야 자신이 지금 뭘 하고 있었는지 퍼득 자각했다. 이런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최은협이 기어코 석재의 집까지 찾아낸 것이다. 

이 사실을 지금 말해야 하나? 은협을 쫓아내 달라고 해아하나? 아니다, 그러다가 문제라도 커지게 되면……. 최은협이 먼저 들어갔으니 집에 사람이 없다는 걸 곧 확인할 것이다. 아무도 없는 집에다 저도 어쩌진 못할 것이니 자신들은 그 후에 천천히 들어가면 된다. 선담은 다만 백진이 눈치 채지 못하게 둘러대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웠다. 안절부절 못하고 서 있는 선담을 지켜보며 백진이 미심쩍은 표정을 지어보일 즈음, 선담의 머릿속에 지하주차장이 지상과 연결되어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제야 선담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지, 지하 주차장으로 해서 들어가면, 안 될까요…?”

-

최은협은 도로에 잠시 차를 대놓고 쪽지를 확인했다. 구주소는 무슨. 애당초 거짓일거란 가정은 당연히 깔아두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MIU의대까지 쫓아가 다짜고짜 정석재의 주소를 따지도 않았을 테다. EEC에 단기 고용된 정탐원이 확인해준 주소와 자신이 알아본 주소는 동일했다.

“망할 새끼. 어디다대고 통하지도 않을 작당을 쳐….” 

동문출신에 1년차 선후배지간이라 해도 은협은 정석재란 이름을 처음 들어보았다. 영국발 편도티켓을 끊은 날 선담이 신이 나서 떠들어댈 때도 막연히 ‘그런 놈이 있는가보다, 그래, 술이나 한잔 하는 것도 좋지.’라고만 생각했다. 선담을 그렇게나 아끼는ㅡ그리고 선담도 그만큼 잘 따르는ㅡ절친한 형이라 하니 조금 탐탁찮기도 했지만 결국 허심탄회하게 잘 놀았다. 아마도 정석재가 위협도 안 되는 인상이라 그랬지 싶었다. 처음엔 말끝마다 서로에게 존칭을 붙였지만 막판에 가서는 분위기에 취해 그랬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 후로는 선담이 한국의 지인들과는 대부분 연락을 끊어 그나마의 소식도 몰랐다. 아니, 관심을 둘 필요가 없었다.

단지 내로 들어가는 도로에 은협이 떡하니 주차를 해놓자 경비가 빗자루질을 멈추고 "총각! 여기다 주차하면 안 되는데!"하고 외쳤다. 그는 잠깐이라고 대꾸하고는 뒤에서 경비가 뭐라던 신경 쓰지 않고 목적지로 향했다. 생각보다 보안이 잘 되어있어서 방문객은 해당 층 번호를 누르고 신원확인을 거쳐야했다. 은협은 거침없이 606호를 눌렀다. 그리고 반응을 기다리는 정적 동안 저도 모르게 입을 굳게 다물었다. 정석재 새끼가 있으면 문을 부셔서라도 들어간다. 기껏 찾아갔더니 되도 않는 거짓말로 홍선담을 숨기려는 꼬라지가 시원찮았다. 이 보안문만 열리면 녀석이 있는 곳까지 단숨에 올라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본인도 단정 짓기 어려운 묘한 긴장감이 서렸다.

"………."

인터폰기는 반응이 없었다. 카메라에 얼굴을 비치지 않았으니 누군가 화면을 봤다면 물음이라도 날아올 법한데 조용했다. 잠시 자동문 앞을 서성이던 은협은 굳이 선담을 찾지 못해도 이젠 서두를 필요도 없으니 기왕 여기까지 온 거 이곳의 보완수준을 시험하기로 했다. 신축식이라고해도 대통령이라도 살지 않는 이상 경비엔 구멍이 뚫리기 마련이다. 아파트 출입증카드고 보안문이고 다 형식이다. 하다못해 이곳 주민을 기다렸다가 따라 들어갈 수 있는 게 바로 이런 불필요한 보안문이었다. 그리고 최은협에겐 이 거추장스러운 보안문만 열리면 안에 있는 현관문들은 문제되지 않았다. 어쩌면 이 자동문도 별 문제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관리실이라고 찍힌 버튼을 꾸욱 눌렀다. 그러자 금세 누군가가 [무슨 일이십니까?]하고 심드렁하게 물었다.

"606호 사는 사람인데 카드를 두고 왔습니다."

드르륵ㅡ 역시 별 대답도 없이 문이 열렸다. 허술하긴. 

은협은 이를 보이며 웃었다.

-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눈밭에서 탈 없이 잘 웃기에 덩달아 행복해져서는 이제 한숨 덜어도 되겠구나 생각했던 백진은 체온계를 들고 가볍게 탄식했다. 

38.2°. 

선담은 또 아팠다. 

어제 마트에서 돌아온 뒤로 한끼 밥을 안 먹는다 싶더니 아침부터 열이 펄펄 끓기 시작했다. 덕분에 소식을 받은 석재는 병원에서 발만 동동 굴렸고 백진은 새벽부터 잠을 설쳤다. 해열제를 먹이기 위해 흰죽을 쑤었지만 도통 입에 대질 않았다. 잠깐 잠이 든다 싶으면 악몽을 꾸는지 신통찮게 자꾸 낑낑대었고 가끔씩 헛소리도 했다. 차라리 예전엔 이유라도 알았지 이번엔 또 왜 이러는지 싶어 속이 답답했다.

“어디가 아픈 거냐…. 왜 또 아파, 응?”

백진은 선담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구역질이 올라온다기에 거의 안아들다시피 해서 욕실로 끌고 온 참이었다. 그나마 먹지도 못해 위액을 다 쏟아내고는 선담이 빨개진 눈코입을 하고 백진을 돌아보았다. 무언가 대답이 나올 것 같아서 기다렸지만 선담은 콜록콜록 굵은 기침만 하더니 입을 헹궜다. 비척비척 걸어가는 폼이 영락없는 병든 닭이었다. 

차갑게 식어버린 죽을 냄비에 대충 쏟아 넣고 백진도 방에 들어왔다. 이불이 동그랗게 말려있었다. 머리맡에는 선담의 까만 머리가 조금 삐져나와 있었다. 백진이 한숨을 푹 쉬었다. 꿩이 따로 없었다. 제 얼굴만 숨기면 안전한 줄 아는. 허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선담은 온몸을 꽁꽁 감춰도 그만의 냄새가 났다. 코가 조금만 예민한 놈이라면 단번에 찾아낼 수 있는 그런 입맛 돋우는 살내가 났다. 백진이 이불 안에 팔을 쑥 뻗어 넣자 선담이 꾸물꾸물 그 손을 피하려고 애썼다. 백진은 그가 반응한다는 게 재밌어ㅡ이 와중에도ㅡ장난기가 발동했다. 

“이리 나와 봐. 어디가 아픈지 선생님이 좀 봐야지.”

이불 안은 열이 차서 뜨거웠다. 몇 차례 실랑이를 벌이던 백진은 선담의 얼굴을 이불 밖으로 끌어내는데 성공했다. 선담은 열에 지쳐서 울 기운도 없는 듯했다. 이미 취할 수 있는 조치는 다 취했으니 열이 식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부슬부슬 젖은 이마에 앞머리가 찰싹 붙어있었다. 백진은 그것을 세심하게 쓸어 넘겨주다가 이마에 쭉, 입을 맞추고 말았다. 선담이 흐린 눈을 껌벅껌벅 하자 그가 히죽 웃었다.

“열 내렸나 재본 거야. 민간요법이지.”

ㅡ딩동

멍하니 벌어진 도톰한 입술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차에 벨소리가 울렸다. 석재면 초인종을 누를 리가 없어서 백진은 아쉬운 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선담이 그의 손목을 콱 붙들었다.

“왜 그래?”

“아무도…… 아무도 열어주지 마세요.”

싱겁기는. 백진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터폰에 비친 공간은 중앙현관이 아닌 복도였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중앙도어를 뚫고 들어와 현관 앞에서 초인종을 누른 모양이었다. 이런 경우도 간혹 있다. 세탁소나 잡상인들이 무늬만 관리감독인 경비실의 허락을 맡고 들어오는 경우 말이다. 백진은 괘념치 않고 현관으로 다가갔다.

"누구세요."

밖이 조용했다. 누구세요, 하고 다시 묻자 잠시 후에 상대가 "정석재 씨 댁이 아닙니까?"라고 되물어왔다. 그저 음성으로 집주인을 구분한 건너편에게, 순간 백진은 어딘가 꺼림칙한 느낌을 받았다. 

"……아닙니다."

대답을 하고 뒤를 돌아보는데 선담이 문지방을 밟고 서 있었다. 선담은 백진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입을 꾹 다물고 도개를 도리 저었다. 그제야 백진은 문 밖의 자가 음색만으로도 선담의 손끝이 저리도 덜덜 떨리게 만든 인물임을 알았다. 사람얼굴이 저 지경으로 창백해질 수가 있는가 싶을 정도로, 그 정도로 선담은 허옇게 질려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설명은 필요 없었다. 문 너머의 저놈이 선담을 벼랑 끝까지 몰았던 놈일 테다. 설마 여기까지 찾아올까하고 생각했던 시간이 현실에 놓였다. 다시 한번 아니라고 대답하려던 백진은, 그러나 문 너머의 목소리에 소름이 끼쳤다.

"아닐 리가 없어. 문 열어주시죠."

문손잡이가 덜컹! 하고 흔들렸다. 백진은 당황한 기색을 완연하게 감추고 대꾸했다.

“잘못 찾아오신 것 같습니다.”

“홍선담 거기 있는 거 알고 있습니다. 말로 할 때 문 열어주십시오.”

지독하게 율렬한 목소리였다. 등 뒤로 한기가 돋았다. 백진은 “미친놈.”하고 중얼인 뒤 보조 록을 잠갔다. 영장을 소지한 형사도 아니고 여기서 문을 안 열어주겠다는데 저가 어쩌겠는가. 뚫고 들어오겠는가? 통쾌한 소리와 함께 철컥, 하고 현관문이 더욱 굳건해졌다. 밖은 다시 조용해졌다. 돌아보니 선담은 없었다. 백진은 미심쩍은 눈으로 현관문을 노려보다 얼른 안방으로 향했다.

“꼬맹이, 저놈이 널 찾으면 그 다음엔 어떻게 되는 거냐.”

질문이 질문인지라 이불속에 파묻혀있던 선담이 기어 나와 백진을 정면으로 마주보았다. 부질없는 짓이라 여겼는지 요즘엔 통 저런 질문은 하지 않더니 실제로 누군가가 찾아오자 다시 궁금해졌나보았다. 선담은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어떻게 될지는 몰라요. 사실은…… 아무것도 아는 게 없어요. 단지 지금은 아무 생각도 하기 싫어서, 그래서……”

선담은 말끝을 흐렸다. 맺음말이 떠오르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문득 다른 생각이 번뜩 뇌리를 스쳤다. 여기까지 찾아온 최은협이 그냥 돌아갔을 리 만무하다는 사실이. 자신이 아는 그라면 저깟 현관문은 작대기 하나로도 충분히 딸 수 있다는 생각도 함께!

“무, 문단속 잘 하셨어요?” 

어린 시절에 그것이 잘못이란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보육원 형들의 빈집털이에 동참한 적이 있었다. 거기서 굳게 잠긴 쇠문을 순식간에 열어젖혔던 최은협의 수완이 떠올랐다. 기겁하여 헐레벌떡 일어나려는 선담을 감싸며 영문을 알 리 없는 백진이 누워있으라고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묘하게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선담이 기절초풍하며 백진의 가슴팍을 잡았다.

“아저씨……! 들어왔어요……!”

뚜벅 뚜벅ㅡ

희미한 인기척은 정확히 안방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선담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 인기척이란 게 진짜 발자국 소리라 백진도 당혹함이 올라왔다. 뒤늦게 백진이 자리를 박치고 일어났을 때, 선담은 이미 안방까지 들어온 검은 그림자에 삼켰던 숨을 내뱉고야 말았다.

-

설마 문을 따고 들어올 줄은 몰랐다. 비번식 도어락이 허술하다고는 들었지만 분명 보조락까지 걸었는데 그걸 처리하고 들어올 줄이야.

“역시 여기였어.”

백진이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는 순간 눈가가 새카매진 은협이 주먹을 들어올렸다. 엄청난 속도였다. 백진은 찰나의 간격으로 겨우 그것을 피했지만 이미 꼭지까지 돌아버린 최은협이었다. 그는 칼 같은 움직임으로 위기를 모면한 백진의 오른팔을 붙들어 가차 없이 등 뒤로 꺾었다. 팔꿈치가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백진이 남은 손으로 은협의 어깻죽지에 주먹을 꽂은 순간 그보다 먼저 와드드득 소리가 나도록 잡힌 팔이 눌렸다. 

우당탕!

“아저씨!”

두 남자가 큰 소리를 내며 바닥에 엎어졌다. 은협은 팔이 꺾였음에도 상대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거칠게 대서자 그의 멱살을 잡아 무릎 아래로 깔아뭉갰다. 그의 고개를 바닥에 처박게 만든 뒤 자신의 벨트를 가차 없이 풀었다. 갑작스런 공격에 등을 내주게 된 백진이 몸을 뒤집으려고 난동 부리자 은협의 손놀림이 빨라졌다. 혁대로 사람을 봉하는 것쯤이야 그에겐 일도 아니었다. 허나 격하게 움직이는 성인남자를 봉하는 게 쉽지 않자 은협은 번해진 눈으로 크게 고함쳤다.

“어디 사는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상관하지 마라!”

“선배! 그러지 마!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은협은 “홍선담, 네 입장도 편한 건 아니야.”라며 씨익 웃었다. 그 목소리가 얼마나 끔찍한지 백진이 길길이 날뛰며 소리쳤다.

“선담아! 내 걱정 말고 어서 나가!”

“홍선담, 움직였다가 잡히면 정말 죽어!”

최은협의 한마디에 도망치려던 선담이 부동자세로 굳어버렸다. 아무리 이성을 잃었대도 무구한 사람은 패지 않을 작정인지 은협은 다른 공격 없이 백진의 두 팔을 뒤로 묶어버렸다. 팔이 거의 부러질 위기에 놓인 백진은 욱신거리는 뼈마디 때문에 길게 신음했다. 이렇게 당할 수는 없어서 기를 써보았지만 그것은 상대의 신경만 긁는 일이었다. 결국 은협은 가까이 놓인 인터넷 랜선을 뽑아들어 아예 백진의 팔과 장롱다리를 꽉 연결시켜버렸다. 그 와중에 백진의 무릎이 은협의 옆통수를 찍었으나 그는 거리낄게 없는 듯 했다. 백진은 순식간에 온몸을 제압당했다. 징그럽도록 신속하고 정확한 움직임에 지켜보던 선담의 얼굴빛이 해쓱해졌다. 

은협은 침이라도 뱉을 서슬로 백진을 노려보다가 등을 돌렸다. 차가운 시선이 곧바로 선담에게 꽂혔다. 백진은 그 모습에 할 말을 잃었다. 선담이 온몸으로 흠칫 놀라더니 이내 벌벌 떨기 시작했던 것이다. 주인에게 두들겨 맞은 강아지가 회초리만 보고도 경기를 일으키는 꼴이었다. 

장애물을 먼저 공격해 움직임을 봉하고 드디어 표적을 바꾼 놈을 저주하며 백진은 미친 듯이 팔을 뒤흔들었다. 허나 매듭은 헐거워질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홍선담, 사람 이렇게 고생 시키니까 재밌냐?”

선담은 듣고 있지 않았다. 입을 틀어막고는 줄줄 새나오는 눈물을 들이마시며 이불로 몸 아래를 숨기고 있었다. 은협은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을 무서워해 대답도 제대로 못하고 떠는 모습이 생소했다. 저런 행동은 난생 처음 보았다. 자신을 못 볼 것 보듯 하는 모습에 창자가 꼬일 것 같았다. 가뜩이나 정석재 뒤에 숨어서 자신을 밀어낸 것도 열불이 터지는데 이제는 아주 괴물취급을 한다. 눈에 뵈는 게 없어질 정도로 화가 치솟았다. 은협은 힘 조절 없이 팔을 쭉 뻗었다. 우악스러운 손아귀가 자신을 격타하듯 잡아채자 선담이 비명 쳤다. 

“흑……!”

선담의 몸은 엄청 뜨겁고 묵직했다. 열이 오른 듯했다. 이렇게 무거워진 몸으로는 뜻대로 움직이기 벅찰 테다. 마침 잘됐다 싶어서 팔을 끌어내자 선담이 거의 발길질을 하는 기세로 버둥거렸다.

“왜, 왜…! 싫어…! 놔, 싫…!”

터억! 살점이 떨어져나갈 만큼 큰 소리와 함께 선담이 침대에 고꾸라졌다. 은협이 선담의 주둥이를 막으며 쓰러트린 것이다. 악에 박친 백진이 몸을 덜컹덜컹 흔들었다.

“개새끼야! 건드리지 마라! 죽여 버린다!!!”

“실험도중에 도망친 주제에 지금 뭐가 잘났다고,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

순간 쥐죽은 듯한 정적이 찾아왔다. 

삽시에 부어오른 입주변을 감싸고 선담이 헐떡거리는 사이, 은협은 무언가 위화감을 느꼈다. 있어야 할 것이 빠진 느낌, 혹은 무언가를 크게 놓친 느낌. 그는 엎어진 선담 위의 이불을 천천히 걷어내었다.

“ㅡㅡㅡㅡ!”

배가 없었다.

홍선담의 배가ㅡ… 없었다.

온데간데없었다.

은협의 얼굴에 비로소 당혹감이 서렸다. 잠시의 시간이었지만 선담에게는 끝 모르게 긴 시간이었다. 은협의 눈동자는 이윽고 무시무시한 분노와 끝 모를 낭패감 등의 복합적인 감정을 한꺼번에 쏟아냈다. 이런 눈은 처음이었다. 당혹한 선담의 본의 아닌 무언(無言)이 은협의 성난 분노를 더욱 부채질했다.

“어떻게 된 거야……!”

“……….”

“홍선담! 어떻게 된 거냐고!!!”

은협이 짐승처럼 포효하며 선담의 옷을 헐벗기기 시작했다. 백진은 손목이 문드러지리만치 날뛰었고 선담도 죽을힘을 다해 반항했지만 무지막지한 힘 앞에는 결국 굴복밖에 없었다. 은협은 선담을 아예 깔아뭉개고 거추장스런 윗도리를 찢어버렸다. 백진도 당해내기 벅찼던 그이니 가뜩이나 쇠잔한 선담은 속수무책이었다. 부욱ㅡ 헝겊이 찢어지면서 선담의 맨살이 다시 드러났다.

“선배…!”

“……….”

은협은 스스로도 처음 지어보았을 창망한 얼굴을 했다. 볼록해야 할 자리는 편편했고 뱃가죽을 찢은 상흔이 남아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커다란 칼자국이 마침 잘 왔다는 듯 자신을 기다리며 허황하게 웃는 것 같았다. 배꼽 아래로 길게 찢어진 상흔이 흥겹게, 몹시도 흥겹게 자신을 비웃고 있었다. 

마침내 은협의 몸에 힘이 풀렸다. 그러나 선담은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가, 최은협이, 정말 사람이라도 잡아 죽일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누가 맘대로 없앴어…….”

은협은 묶여있는 백진을 한번 확인하고는 살얼음 돋은 냉한 목소리로 똑같은 말을 되물었다.

“누가 맘대로 없앴어.”

“서, 선…”

“누가 맘대로 없앴냐고!”

선담은 물기어린 목소리를 쥐어짰다.

“…ㅡ! 도대체 왜 이러는 건데! 어차피 없앨 애라고, 기형아라고 했던 게, 헉……!”

“홍선담. 내가 지우는 거하고 다른 놈이 지우는 거하고 너한텐 의미가 같아?”

목줄이 덥썩 잡힌 선담이 흐윽, 하고 미쳐 숨을 내뱉지 못하고 침을 흘렸다. 은협은 수악에 힘을 주며 새파래진 목소리로 온 집안이 떠나가도록 소리를 질렀다.

“누가 떼어냈냐고! 나도 아니고 누가! 나 아닌 누가, 누가 여길 이따위로 만들었냐고 지금 묻잖아! 네 뱃속에 든 내 새끼를 허락도 없이 뜯어낸 놈이 누구냐고! 대답 해, 홍선담! 대답 해!!!”

“내가 그랬으니까 그 녀석부터 놔, 미친 새끼야!”

뻑ㅡㅡㅡ!!

은협이 백진의 면상에 주먹칼을 꽂아 올렸다. 손이 묶인 그가 강제로 진동하자 장롱이 격하게 삐거덕거렸다. 바로 옆 장식장에서 장식구들이 와장창 떨어져 다 깨지고 난리가 났다.

“아저씨, 아저씨!”

백진이 퉤, 하고 피 섞인 구액을 뱉어내자 어금니가 함께 딸려 나왔다. 코뼈가 주저앉았는지 코피까지 바닥에 흥건하게 떨어졌다. 은협은 피가 옮은 손마디를 으득 꺾으며 싸늘하게 그를 노려보았다.

“다 보이는 거짓말 하려거든 맞을 각오부터 하는 게 좋을 거다. 웬만해서 주먹 들게 하지 마라.”

“서, 선배. 하, 하지… 하지 마…….”

백진은 정신을 잃진 않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더 불운했다. 엄청난 고통이 머리주변을 윙윙 떠돌았다. 시위 중 전경들에게 맞아본 적도 있고 몸싸움에도 능한 편이었지만 뒤에서 면상부터 후리고 보는 상대는 처음이었다. 아니, 뒤에서 선방을 날려서 이렇게까지 당했다는 핑계는 필요 없었다. 상대는 압도적이었다. 누구에게도 이렇게 당해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대처가 더욱 늦어졌다. 목구멍에서 구역질이 돌았다. 

주먹 한방에 사람얼굴이 피바다로 흥건해지자 선담은 벌벌 기기 시작했다. 다 찢어진 옷을 하고 정신없이 눈물을 닦으면서 공포에 질을 얼굴로 비 맞은 개처럼 떨었다. 자신을 도와주려는 사람이 자기 때문에 진창이 되었으니 그 공포가 수십 배에 달했다. 그 모습에 백진은 복장이 터져 이를 갈았다. 손발이 묶인 이 판국에 선담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예상을 할 수 없어 그 공포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반면에 은협은 스스로 진정하자고 되뇌었지만 도저히 통제가 안 되어서 얼굴에 격분한 감정을 고스란히 담은 채 선담을 다그쳤다.

“말해. 네가 결정한 일이야?”

“눈, 눈 뜨니까…… 이렇게 되어있었어. 그러니까, 저 사람은 아무 상관도……”

“그 중하다던 실험배아를 기절한 새에 떼어놓고 한달 넘도록 정석재랑 오순도순 사니까 속이 다 후련하냐?”

“선배…… 왜…… 그런 건 아무 상관없는 거 알잖,”

“이리와, 홍선담.”

스스로도 미쳐간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은협은 끓어오르는 화를 도저히 제어하지 못했다.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자신은 이성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인간이라고 자부해왔던 지난 30년이 허송세월처럼, 아무런 쓸모가 없다고 느껴졌다. 그 정도로 앞이 보이질 않았다. 홍선담이 내가 아닌 다른 놈의 손에 맡겨져 배를 가르고 아이를 들어냈다고 생각하자 피가 거꾸로 올라왔다. 그것은 자신의 핏줄이었고, 그러니까 자신이 마무리 지어야 했다. 그런데 그런 가장 기본적인 순리가 완전히 무너진 것이다.

은협은 선담을 구석에 몰아넣고는 못 움직이게 막고 파자마 바지를 뜯어버릴 듯 내려 속옷까지 훌렁 다 벗겨버렸다. 선담이 고함을 지르며 진저리 쳤지만 그는 끝끝내 무릎 뒤를 잡아 다리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속삭였다.

“여기서 다시 만든다. 주사 없이 만들어 주마.”

어딘가 실성한 것 같은 은협 때문에 선담은 감히 맞서지 못하고 몸을 움츠렸다. 침대 구석에 몰려 다리를 이렇게 잡혔으니 무슨 짓을 하려는지 짐작할 수 있었지만 주사 없이 만든다니 무엇을? 설마 수정을 시키겠다는 소린가 싶어 정신없는 와중에도 이 사람이 정말 미친 게 아닐까 되레 걱정되었다. 더는 두들겨 맞기 싫었지만 이 상황에서 벗어날 능력도 되지 않았다. 바라는 건 그저 은협이 조금이라도 일을 빨리 끝내주었으면 하는 것과 백진이 되도록 이쪽을 보지 않았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선담이 눈을 질끈 감는 순간 잡힌 다리가 확 찢어졌다. 그리고 동시에 백진이 결박을 풀고야 말았다.

“그거 안 놔!”

머리를 다친 사람답지 않게 백진도 대단히 빨랐다. 번개같이 침대 위로 올라온 그가 은협을 거칠게 걷어차 버렸다. 이번엔 은협이 침대 바닥을 뒹굴었다. 백진은 선담을 챙겨주기 전에 저놈부터 포박해야한다는 일념으로 뛰어내렸다. 그러나 벌써 몸을 일으킨 은협이 그의 발목을 잡아 쳤다. 와당탕 무거운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백진이 은협에게 다시 잡혔다. 팽팽해 보였지만 사실은 은협이 절대적으로 우위였다. 그나마 이것도 많이 무뎌진 것이었다. 은협이 맘을 달리 먹겠다고 작정한 이후로는 이런 육탄전이 처음이라 많이 무뎌진 것이었다. 

선담은 과거의 그가 어떤 인간이었는지 다시 한번 깨닫고서 이번엔 재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아무리 못해도 112에는 신고를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필사를 다해 움직이는 순간이었다. 다시 은협이 선담의 시야를 막았다. 한 대 심하게 까였는지 저쪽에선 백진이 복부를 감싸 쥐고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갈력을 쥐어짜고 있었다. 온 얼굴이 피투성이었다. 선담이 “아저씨!”하고 외쳤으나 그는 후들거리는 팔을 짚고 있는 게 전부였다. 백진의 운동신경이 어찌됐든 은협은 어린 시절부터 몸싸움을 밥 먹듯 한 놈이었다. 도저히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은협은 저놈도 꽤 징한 놈이라고 욕설하며 백진에게 달려가는 선담을 침대위로 힘껏 내던졌다. 알몸인 채로 침대위에서 허우적거리는 선담을 보자 가뜩이나 동물적으로 흥분해 있던 은협의 이성이 폭발했다. 은협의 수악이 몸을 덮치자 선담이 울고 불며 발악했다.

“그만! 그마안! 선배!!!”

유두가 피가 나도록 깨물렸다. 숨넘어가는 비명을 지르며 밀어냈지만 그는 몸을 단단히 잡고 절대 비켜서지 않았다.

“소중한 태아라면서 도망치기까지 했으면 그대로 지키고라도 있어야지 그걸 그새 떼어놓고 홀가분한 몸으로 놀고 있어! 이 흉터가, 이게 뭐냐고! 멍청아!”

“아냐, 아냐! 죽어 있다고, 했어!”

“죽었어도 데리고 있었어야지! 그리고 날 찾았어야지! 나한테서 네가 도망을 쳐? 지금 다른 놈한테 그 귀한 걸 맡기고도 네가 태평했다는 소리냐!”

“으윽…!!”

가슴께로 피가 흘렀다. 갈랐던 배의 상처가 아팠다. 선담은 미친 듯이 울었다.

언제는 애기를 죽이겠다고 달려들었으면서. 그래서 뜻대로 다 죽여 놓았으면서. 나는 단지 견딜 수 없이 무섭고 아파서 계산 따위 없이 도망친 것뿐인데. 이미 죽어버린 애기를 하늘나라로 완전히 보내버린 게 뭐가 그렇게 분하다고. 고작 자기 손으로 유산을 못시켰다고 애꿎은 사람까지 패가며 이러는 걸까. 저가 시술해준다고 흉이 안 남는 것도 아닌데ㅡ….

선담은 정신 나간 사람처럼 울어댔다. 흐아아, 아아아악, 하고 은협이 끌어안는 품에 갇혀 미친것처럼 울었다. 아직 몸 안으로 뭔가 들어올 조짐은 없었지만 예견된 고통에 질력 나서 차라리 기절해버렸으면 좋겠다고 간절하게 바랐다. 그리고 문득 선담의 처절한 비명이 시끄럽다고 생각하던 찰나, 주먹을 올리는 대신 은협은 정신이 번뜩 들었다. 주변이 묘한 정적으로 감돌 때 선담의 흐느낌이 새어나왔다.

“하지 마……. 서, 선배, 흑…… 하, 하지…”

“……….”

낯선 놈을 때려눕히고 홍선담을 끌어안은 것까지 기억나는데 지금 홍선담이 제 밑에서 마구 우는 것만 꼭 현실같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자신을 원망하는 애처로운 울음소리에 갑자기 정신이 확 들었다.

…ㅡ여기서 홍선담을 또 겁간할 순 없다. 안 된다.

한번 전류가 통하자 몸 곳곳에 열이 도는 것처럼, 이성의 씨앗이 그의 뇌리에 뿌리를 내렸다. 최종목표였던 홍선담을 찾았으니 하달된 임무는 끝났다. 어떻게 해서든 이 녀석을 끌고 가 다시 내 옆에 두기만 하면 되는 일에 왜 이렇게 기운 빼고 있나? 정신 빠지게 울게 만들 필요도 없었다. 미움 받을 만한 짓은 이전에 충분히 했으니 여기서 더 나빠지게 만들 필요도 없었다. 어르고 달래줘야 할 차례 아니었던가?

최은협은 입술에 피가 나도록 꽉 다물었다가 후ㅡ하고 숨을 내쉬었다. 순간이지만 정말로 눈에 뵈는 게 없었다. 홍선담이 눈앞에서 멀쩡하게 살아있으니까 쌓였던 긴장이 풀림과 동시에 참고 참았던 화가 올라온 탓이었다. 이제는 기력이 빠져서 소리도 못 지르고 울기만 하는 녀석의 어깨를 꽉 잡고 은협이 눈을 마주쳤다.

“홍선담, 내일 데리러 온다.”

대답은 없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는 더욱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얼마나 화가 났었을지 생각해봐. 내 새끼 품고 있던 네가 나한테서 도망쳤을 때 내가 느꼈을 기분을 생각해보라고. 기형아를 떼겠다고 한 게 잘못이냐? 네 모든 일거수일투족은 그래도 내가 가장 잘 알아야한다고 생각한 게 내 잘못이야?”

선담이 얼굴을 감싸고 아까전과는 다른 눈물을 흘렸다. 정말 눈물이 끝나질 않았다. 흘리고 흘려도 자꾸 흘렀다. 가슴까지 발딱거리며 우는 선담을 조용히 감싸 안으며 은협은 시선을 연백진에게 두었다. 거의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지켜보는 남자를. 처음엔 악을 썼지만 그래도 결국에 선담을 안을 수 있는 건 자신이었다. 

같은 수컷끼리는 저런 눈을 잘 안다. 홍선담에게 애정으로 차 있는 저 눈깔을 뽑아버리고 싶을 정도라서 은협은 더욱 자세히 백진의 황망한 눈을 지켜보았다.

“다치기 싫으면, 그리고 다치게 하고 싶지 않으면 내 말 들어. 또 여기까지 들어오게 하지 말고.”

“……우ㅡ…욱…….”

선담이 자꾸 우는 통에 머리채 뒤흔들던 화가 사그라졌다. 오히려 오랜만에 간신히 보게 된 선담에게 미운정 고운정이 몽땅 솟아서 언제 다시 움직일지 모르는 백진을 견제하면서도 은협은 부드럽게 속삭였다. 

벼르고 별러왔던 한마디를. 간결하고 단호하게.

“돌아와라. 다시 하자. 난 너한테서 내 새끼를 보고 싶어.”

홍선담의 것인지 연백진의 것인지 모를 심장소리가 쿵, 하고 멎었다.

-

석재가 돌아왔을 무렵 집안은 텅은 비어있었다. 들어오는 길에 분해된 비번식 도어락과 댕강 잘린 보조락을 보고 그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선담에게서 지금까지 고마웠다고 전화를 받자마자 가운도 제대로 벗지 못하고 무단으로 외출해 집까지 사정없이 밟은 석재였다. 그런데도 돌아오니 녀석은 자취를 감춘 뒤였다. 석재는 부엌의 다용도실과 안방, 서재, 발코니까지 싹싹 뒤졌다. 의미 없는 짓이라도 희망을 품은 탓에 석재가 자꾸 설레발치고 돌아다니자 소파에 몸을 기대고 있던 백진이 조용히 그를 불렀다.

“석재야, 녀석 갔다.”

백진은 입술이 터지고 이마는 찢기고 눈가는 퉁퉁 부어있었다. 코는 다행히 부러지진 않았지만 이미 얼굴은 상할 대로 상했고 멍자국을 수도 없이 달고 있었다. 이미 대강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석재가 옆에 앉아 사과했다.

“미안해 백진아. 내가, 내가 너무 경솔했어. 설마 그 최은협이란 사람이…… 정말 미안해, 백진아.”

“괜찮다.”

웬만한 일을 당해도 늘 괜찮다고 말하는 넉살좋은 놈이라서 석재는 맘이 편치 못했다. 도대체 오늘 오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도 가지 않는데 선담의 반응으로 봐서는 어쨌든 큰 봉변을 당한 것 같아서 정말 난감했다. 석재가 연신 미안하다고 되풀이했지만 백진은 고개를 저었다. 이마를 짚은 백진을 보다가 석재는 움찔 놀랐다. 손까지 결박당했었는지 이물질과 마찰한 흔적이 피범벅 되어 말라붙어 있었다. 

“EEC라는 연구팀 들어봤냐.”

뜬금없는 질문에 석재는 구급상자를 챙기며 묵묵부답했다. 백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한숨을 푹 내쉬며 주먹을 몇 번 쥐었다 폈다.

“우리나라에서 인공자궁을 실험하는 연구사단인 것 같다. 혹은 인공난소나 그런 거겠지. 그리고 최은협이라는 놈이 찾아와서는……”

“차, 찾아와서는? 뭐?”

“그놈도 알아. 녀석이 자연임신이 가능하다는 걸.”

기가 막혀 석재가 “뭐라고ㅡ?”되물었다. 백진은 이를 꽉 물었다. 

정말 강한 놈이었다. 육체적으로도 그러하거니와 정신적으로도 대단한 놈이었다. 완벽한 외골수에 사방에 적을 두고도 제 뜻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지키고 건사할, 그런 놈이었다. 움직임에는 군더더기가 없었고 사람에게 폭력을 휘두르는데 망설임이란 게 없었다. 선담이 끝까지 고집 부렸더라면 자신을 죽여서라도 선담을 끌고 갔을 놈이었다. 그러나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는 중간에 변덕을 부렸다. 결국 자신에게 더는 손대지 않고 선담에게도 끔찍한 짓도 저지르지 않은 채 유유히 떠났다. 다시 데리러 오겠다는 말만 남기고.

백진의 눈치를 보던 석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선담이는…?”

“갔다니까. EEC로. 내일 데리러 온다고 했는데 제 발로 가더라.”

“그, 그런…”

왜 잡지 않았느냐고, 왜 이렇게 됐느냐고 따지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났지만 석재는 엉뚱한 곳에 화를 내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던 자신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최은협을 보자마자 안도해서 경솔하게 선담의 행적을 불어버린 멍청이가 누군데. 그 때문에 누구는 멀쩡한 얼굴이 괴귀가 되도록 얻어터졌는데. 석재는 답답한 마음에 그저 발코니 밖을 바라보았다. 같이 달빛을 맞던 백진은 잠시 후 힘없이 읊조렸다.

“녀석과 수정한 정자가 아무래도 놈의 것 같았다. 기형인 걸 알고 있었고 선담이가 중절수술을 거부한 것 같았어. 그놈도 태아가 죽을 운명이었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 같고. 연구팀 일원이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잠시 쉬던 연백진이 담배를 한 개피 꺼내들어 입에 물었다.

“……원래도 순한 놈이었지만 그놈 앞에서는 쪽도 못쓰더라. 정말 애처럼 벌벌 떨면서 끽소리도 못하고 남 앞에서 지 다리 찢는 놈 때리지도 못하더라.”

백진은 손바닥으로 눈가를 가렸다. 

아저씨라고 불러주었다. 서로 이름 한번 제대로 부르지 못하고 한달 반 가까이를 버티다가 결국엔 꼬꼬마와 아저씨가 되어버렸다. 사실 녀석은 꼬맹이 소리를 들을 나이가 아니었고 자신도 굳이 아저씨 나이는 아니었지만 묘하게도 그것이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아저씨, 아저씨……!’

병신같이 맞기만 하더라. 사지 멀쩡하면서 도망치지도 못하고 남이 보는 앞에서 옷을 찢고 젖꼭지에 피를 내는대도 한 대 때리지도 못하더라. 바보 같은 놈…….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도 남을 걱정하고 숱하게 부르고…… 결국은 욕실까지 따라 들어와선 씻어내는 상처 주변을 맴돌다가 스스로 전화를 걸어 도망치듯 나가더라. 미안하다는 소리만 천 번은 들은 것 같았다. 지켜주지 못한 게 누군데……. 눈가가 따끔따끔해졌다.

그깟 꼬맹이 하나 떨어져나갔다고 뭐가 아쉽나. 내일부터는 자유다. 한달 반이란 짧은 기간이었지만 어쨌든 고생깨나 하면서 겨우겨우 보살폈던 병신 같은 환자 한 마리였다. 어차피 계약한 실험체면 핑계가 많아도 돌아가야 할 몸이었다. 내일부터는 내키는 대로 나다닐 수 있고 아침점심저녁 세끼 꼬박 챙길 필요도 없고 신경 쓸 거리도 없어지는데. 그러니 이제는 홀가분해야 하는데.

‘선배! 그러지 마!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

백진이 침묵하는 사이, 석재는 죄 없는 소파 가죽을 손톱으로 뜯으며 초조하게 창밖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EEC란 기관이 어디 있는 무엇이며 어느 단체의 후원을 받는지 감 잡을 수 없었다. 인공자궁을 연구하는 그런 기관이 존재하는지조차 드러나지 않았다면 비공식적으로도 꽤나 막강한 단체일 것이었다. 온라인으로 검색하면 실마리라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하고 생각하는 순간 백진이 굳게 닫혀있던 입을 열었다.

“아버지께 돌아가야겠다.”

“아저씨한테?”

“그래.”

그러더니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작스럽고 엉뚱한 말이라고 생각해 석재는 따라 일어나면서도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백진은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연기를 빨아들이고 뱉었다.

“어디 누가 더 윗물에서 노는지, 한번 겨뤄봐야 속이 풀리겠다고.”

백진은 표정 없는 얼굴로 담배를 태우고 재떨이에 대충 비벼 껐다. 그리고 “그럼 가본다.”하고 중절대고는 현관으로 향했다. 뒤도 안 돌아보는 그의 그림자가 왠지 낯설었다. 

“백진아, 어쩔 건데 그래…….”

석재가 재차 물었지만 가볍게 손을 흔들며 미리 싸두었던 짐을 들고 백진이 계단을 내려갔다. 무거운 발자귀가 점차 멀어졌다. 가까스로 “연락할게.”라고 말하며 석재는 현관문을 차마 닫지 못했다.

홍선담이 떠나고 연백진도 떠나고 모두가 떠난 밤. 

하늘이 온통 자줏빛인 밤이었다.

- - - - 

7층은 관계자 외 출입금지 딱지가 입구에서부터 크게 붙어있었다. 아니, 엘리베이터에 오른 순간부터 특정열쇠가 없는 자들은 7층 버튼을 누르지도 못했다. 7층과 6층을 잇는 계단은 폐쇄되어있었고 7층의 가장 안쪽 방은 감시가 삼엄했다. 도너의 방을 중심으로 주변 다섯개의 방은 모두 연구센터에 둥지를 튼 간부들의 방이었다. 말이 직원사택이지 실상은 순전히 감시를 위한 곳이었다.

선담이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EEC로 복귀한지 열흘. 실험체의 방에서는 앓는 소리가 밤낮으로 새어나왔다.

“선담아, 조금만 참자. 울지 마라.”

방금 감은 것처럼 축축이 젖은 머리를 쓸어넘겨주며 은협이 미간을 찌푸렸다. 진정제도 소용없었다. 수란관과 자궁양면 그리고 난소 내벽에 주사가 들어간 오늘, 선담은 배 안에 열이 고여 몇 시간 내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원래는 7층을 맡은ㅡ전상목 팀장도 포함한ㅡ5명의 간부가 돌아가며 선담을 돌보기로 했지만 최은협은 그 의견을 차치했다. 저 혼자 돌봐도 충분하다는 뜻이었다. 지금은 누구의 손길도 홍선담이 편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고.

모체가 귀환하여 걱정을 덜은 것은 사실이었으나 임직원의 시선이 고울 수만은 없었다. 속사정을 전혀 모르는 자들이라 실험이 무슨 장난인 줄 아냐느니, 믿고 가족처럼 대해주었더니 애가 영 되먹었다는 소리가 오갔다. 늙어서 맘고생이 심했던 길호문은 피골이 상접한 게 말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마저도 수더분하게 선담을 반겨주지 못했다. 등을 토닥이며 환영해주었지만 묘하게 싸한 노인네의 분위기를 숨기려야 숨길 수 없었다. 오감이 예민하게 일어난 선담에게 그런 미묘한 반응이 얼마나 해일같이 거대했을지는 더할 말도 없었다.

절차에 따라 선담은 계약서를 다시 확인하고 4년 전에 서명한 자신의 필체를 확인했다. 선담은 그제야 깨달았다. 정말이지 우스운 제약이 아닐 수 없었다. 수정에 성공해 태아가 만 18살이 된 후에야 보상금이 지급되다니. 그 전에 실패하면 자신은 버려진 쓰레기 신세가 될 수도 있는 무시무시한 조항이었던 것이다. 물론 당시에는 이런 조약 따위 눈에 들어오지 않았으니 모두 제 탓이었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많이 침체되어 있어서 그도 덩달아 소극적이 되었다. 덕분에 아침부터 밤까지, 밤부터 새벽까지 은협은 얌전한 선담과 내내 같이 있을 수 있었다. 실험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선담에게서 볼 수 있는 모습이란 아파서 끙끙거리는 모습뿐이었지만, 그래도 은협은 군소리 없이 옆에 꼭 붙어있었다. 가끔씩 시끄럽게 울리는 핸드폰을 조심스레 받을지언정 자리에서 쉬 떠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선담에게 가해지는 고통이 덜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세세한 고통까지 모두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시금 찾아오는 고통은 오차 없이 선담의 몸을 찢어놓았다. 고통은 두려워 피하려고 하면할수록 더욱 노골적이고 황해졌다. 

예전에는 그나마 너그럽게 걱정해주던 모두의 시선이 지금은 몹시도 차가워서 선담은 실험 내내 찍소리도 내지 못했다. 이해는 했다. 자기 때문에 귀한 시간을 날려가며 거짓으로 후원회에 보고를 하고, 여기저기 찾으러 돌아다니고, 텅 빈 연구실을 떠돌았을 죄 없는 그들을 생각하면 도망친 자신을 미워하는 건 당연했다. 당연하고, 당연했다. 그러나 이해와는 별개로 입안의 비명을 꿀꺽꿀꺽 삼키면서 눈치를 보아야 하는 여정은 선담을 진저리치게 만들었다. 예전에는 주사바늘 하나에도 세세히 신경써주며 이렇고 저렇고 말을 건네주던 사람들이 지금은 소독약을 발라주다가 돌연 바늘을 푹 꽂기도 했다. 바늘을 통해 약이 들어오는 순간 심장이 오그라들면서 선담은 고통에 입을 벌렸다. 고의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실험자 대 피실험자 간의 배려란 게 없었다. 신체검사를 할 때는 천조각 하나도 걸쳐주지 않고 다 큰 성인을 알몸으로 철판에 올려놓았다. 실습용 개구리가 따로 없었다.

도망친 게 내 잘못만은 아니었지만 고자질하고 싶지는 않았다. 여기서 상황이 더 나빠져서는 안됐다. 그러니 말할 수 없는 설움까지 사무쳐 모든 것이 더욱 원망스러웠다. 나를 아프게 만드는 뱃속도, 무턱대고 나를 미워하는 EEC 사람들도, 그리고 나를 여기까지 끌고 온 최은협도……. 허나 자신은 어디에서 숨을 곳이 없었다. 최은협은 우주 끝까지라도 쫓아와 자신을 찾아낼 사람이었고, 그렇게 되면 제 주변에 있는 사람이 상처 입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랬다면 실험군 지원 같은 건 하지 않았을 텐데. 그저 최은협과 함께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을 텐데. 아저씨 같은 좋은 사람에게 상처 줄 일도 없었을 텐데. 연백진이 핏물 흥건한 얼굴이 떠오르면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시술을 참으며 입술을 물다 피가 터진 적이 있었다. 그들은 당혹스러워하다가 서로 눈치를 질금질금 보더니 선담에게 재갈을 물렸다. 그 비인간적인 처사가 잘못된 건지도 모르고 이상한 분위기에 선담이 몹시 당황했을 때, 뒤늦게 그 사실을 안 전상목이 주사실로 쳐들어와 재갈을 빼버렸었다. 일전에 반복된 길호문과 최은협과의 마찰로 은협의 성질머리가 연구소 내에 파다해진 상태라 그들은 최은협에게는 말하지 말라고 전상목에게 눈치를 주었다. 내부에서 감정문제가 생기는 것도 피곤한 일이라 전상목도 어쩔 수 없이 입을 잠갔다.

연구실은 어딘지 많이 변해있었다. 후원의 선두가 기업 ‘백람’으로 정해지고, 잇따라 변화되는 후원회 체계 때문에 소장의 신경이 곤두섰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멋대로 탈출했다가 잡혀 들어온 선담에 대한 흉흉한 소문도 따라 붙었다. 신뢰에 금이 간 것이다.

아프고 아파서 딱 죽겠다싶은 고문의 나날 속에서 자비가 사라진 일원들 때문에 선담은 내내 곤혹스러웠다. 은협이 24시간 붙어있겠다고 해도 시술엔 빠져야하는 경우도 있었고, 여러모로 허점이 많아서 선담은 종종 홀로 일원들에게 노출되었다. 그렇게 혼자서 압박을 견디다 돌아온 밤이면 어쩔 수 없이 은협의 손길이 절실해졌다. 실험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은협에게 어떤 악감정이 남았다하더라도 매달릴 수 있는 사람이 그쪽밖에는 없었다. 

너무너무 괴로웠다. 애기가 다시 생겨 돌이킬 수 없게 되기 전에…… 그 전에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매 실험 때마다 간절하게 바랐다.

자궁 안팎에서 일어나는 작용은 진통제 말고 어떻게 손쓸 방법이 없었다. 고통은 온통 선담이 혼자 부담해야 하는 부분이었다. 예전에는 이 지경까진 아니었는데, 그렇게 말해봐야 도움될 건 하나도 없고 그저 혹독한 고통에 날뛰었다. 배변도 제대로 가리지 못했고 약물실험이 있는 날이면 먹은 걸 다 게워내고서도 뭐가 남았는지 자꾸 토악질을 했다. 손발이 바짝 마르고 식욕은 바닥을 보이며 떨어졌다. 실험 5일째 되는 날에는 아예 영양공급 링거를 쫓고서 이동해야 했다. 눈밑이 새카매지고 뱃가죽이 거무튀튀해졌다. 어쩔 땐 목소리도 못 낼 정도로 힘이 딸려서 선담은 물도 삼키지 못했다. EEC는 필터에 영양분을 담아 선담의 몸에 주입해야 했다. 전례에는 없던 반응이었다. …ㅡ아무도 말로 꺼내진 않았지만, 실험은 보란 듯이 실패였다.

그리고 새벽 4시. 눈도 못 뜨고 낑낑대던 선담의 입에서 가냘픈 울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선배….”

“그래.”

크고 서늘한 손이 불덩이 같은 이마를 은비해주자 숨이 조금 골라졌다. 

한번 수정을 했던 모체라 두 번째는 더 수월할 것이라는 게 대세의 의견이었다. 아직 열흘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러나 이미 첫 번째 시도는 끝이 보였다. 완벽한 실패로. 

모체가 오기만을 기다렸던 수백 개의 샘플 중 가장 기초적인 샘플이 모두 모체에게 거절당했다. 4년 전에 첫 등판을 했을 때에도 3기까지는 갔었는데 갑자기 1기에서 무너진다는 게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저희들이 이해를 하든 말든 이론은 이론일 뿐, 선담만 죽어라 고생하고 2주 뒤부터는 다시 1기부터 시작해야했다. 스스로 걸을 힘이라도 있으면 소장실에 숨어들어가 ‘피험자에게 가해지는 시술 중 일정부분의 고통을 감수한다’라는 항목을 불태워버렸을 것이다.

가뜩이나 연구실 사기가 바닥인데다 뒤숭숭한 분위기도 마음에 안 드는데, 꼬리를 잡으려고 해도 일원들이 죄다 숨어서 쑥덕거리는 터라 최은협도 무언가 크게 따지거나 난리를 부리지 못했다. 선담까지 유래 없이 많이 아파서 그의 신경도 극도로 날카로워져있었다.

며칠 내 잠을 이루지 못한 선담의 눈가에 눈물이 맺혀있었다.

“뚝 그쳐. 뚝…”

은협이 귓가에 속닥이자 선담이 습관처럼 입꼬리만 슬쩍 올려 웃었다. 당장에 그만두고 싶었다. 제발 살려달라고 매달리고 싶었지만 최소한의 자존심은 남아있었다. 그마저도 알량한 자존심이겠지만. 선담은 눈을 감은 채로 가만가만 속삭였다. 

“……이번에 실패지……?”

“……그래.”

눈물이 툭, 떨어졌다. 은협에게 이런 말 따위 하기 싫었다. 동정을 얻으려고 애쓰는 모습 같지 않은가. 그러나 선담에겐 희망이 없었다. 실험은 계속될 것이고 진짜로 죽지는 않겠지마는 어쨌든 은협의 껍데기라도 옆자리를 지켜주어야 그마나 버틸 자신이 있었다. 선담은 바짝 말라 부르튼 입술을 달싹였다.

“있잖아……. 나, 어쩌면 자신이 없는지도 모르겠어. 몸에 힘도 없고, 아프기만 해. 옛날에도 아프긴 아팠는데…… 그것보다 더 아파. 죽을 것처럼 아파……. 옛날에도 이랬는데 내가 잘못 기억하는 걸까…….”

은협은 “그렇겠지.”하고 대답했지만 사실은 거짓말을 했다. 

옛날과는 다른 게 확실히 맞았다. 그때는 이렇게까지 앓진 않았으니까. 이렇게까지 작아지고, 이렇게까지 새카매지진 않았으니까. 은협은 선담의 메마른 손을 꽈악 쥐었다. 입으로는 이럴 때도 있는 거라고 달랬지만 어쩌면 거짓말이 들통 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선담은 링거 꽂은 손을 납작한 배 위에 올려놓았다. 텅텅 비어버린 속.

“다시는 애기 같은 거 안 생길지도 몰라. 여기는 아픈 곳이라, 그 애들도 겁날 테니까…….”

왜냐면, 솜이불처럼 눈이 쌓인 공원에 서서 다시는 자궁 안에 무엇도 들이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자신의 표독스런 각오를 아기들이 읽어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건 진심이었다. 은협이 의미 없는 폭행을 저지르면서 백진을 때리고 날뛰지만 않았어도 끝까지 EEC에는 돌아오지 않았을지도 모를 만큼, 진심이었다. 그러나 결국 돌아갈 수 있는 곳은 최은협의 품밖에 없었나 보다. 백진이 아픈 게 두려웠고 더는 은협에게서 도망칠 자신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토록 아프게 다짐했던 일인데도 순식간에 무너져버렸다. 자신은 그토록 나약한 인간이었다. 눈물이 났다.

“애기는, 애기는…… 이제 안 생길 거야. 내가 자격이 없는데, 이렇게 모두가 시간 낭비 돈 낭비 하고 있으니까…… 요즘엔 계속 죄송스러워…….”

은협은 그저 웃었다. 가슴 한쪽이 저미는 이야기지만 선담에게는 “그럴 일 없으니까 괜한 소리 마라.”하고 조용히 대꾸했다. 사실은 대체 왜 이렇게 아픈 거냐고 묻고 싶었다. 왜 샘플을 받아들이지 못하느냐고. 애가 타다 못해 재만 남았다. 자신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홍선담에게서 결실을 보겠다는 전심 하에 여기까지 왔다. EEC의 성공도 바라마지않는 부분이었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ㅡ… 따로 있었으니까. 

은협의 눈동자가 미묘한 광기로 흔들리는 동안 그것을 보지 못한 선담은 물기를 닦으며 물었다.

“선배, 아직도…… 그 사람 만나……?”

“……….”

은협이 무겁게 한숨을 쉴 뿐 대답이 없어서 선담은 속으로 낙심하며 다시 말을 고쳤다.

“……있잖아, 언제쯤 되야, 안 아플 수 있을까…?”

“많이 아프냐. ……어디ㅡ?”

호 해줄게, 하고 은협이 목 주변을 간질였다. 선담은 힘들게 배를 문질렀다. 굳이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가 아무리 다정하게 대해주어도 이제는 정말 남이 된 것 같았다.

“배가 아파? 보자.” 

이불을 걷어낼 줄 알았는데 은협은 이불 안으로 머리를 넣고 들어왔다. 조금 놀라서 그를 잡았지만 배꼽에 키스를 받는 바람에 몸이 싹 경직되었다. 순간 고통을 잊을 정도로 당황했다. 선담이 무릎을 세우고 밀어냈지만 은협은 멈추지 않고 배에 입술자국을 새겼다. 부드러운 살갗은 입술의 열기를 따라 곧장 자국을 만들었다. 황홀한 세례였지만 선담은 마음만 더 아파져서 흑, 울고 말았다. 선담이 흐느끼자 은협이 고개를 들었다. 선담이 왜 우는지 알면서도, 그는 야속하게도 대답은 들려주지 않고 손을 잡을 뿐이었다.

“울지 마라. ……난 네 옆에 있을 거니까.”

선담은 고개를 도리 저었다. 그러니까, 그런 걸 원하는 게 아니다. 그저 옆에 있어준다고 치유나 보상을 받는 게 아니다. 정신이 다른 곳에 팔린 사람은 아무리 옆을 지키고 있어도 그저 인형일 뿐이다. 그걸 몰라주는 그에게 서운하고, 그 서운한 마음이 이미 치닫는 데까지 치닫아서 이젠 감각도 없었다. 선담은 다 포기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ㅡ내 옆엔 진작 아무도 없었다.

“계속 아프냐.”

조금 흔들리는 음색으로 되묻는 말에 선담이 속눈썹을 떨었다.

무서운 얼굴로 때리고 괴롭히고 상처를 주었으면서, 화를 내면서도 내가 소중하다고 말하는 그의 본심을 이해할 수 없었다. 졸음이 쏟아지는 새벽녘에 고통으로 깰 때면, 다정하게 어루만져주는 그를 어떻게 여겨야 할지 아직 정하지 못했다. 이미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그에게서 무엇을 얻어야 할지도…… 아직 계산하지 못했다. 누군가 여기서 탈출시켜준다면, 그렇게만 해준다면 무엇이든 할 텐데. 

참 바보 같다. 나는 참 바보다.

순진하게 그의 말을 믿고 타국까지 쫓아가 멋도 모른 채 실험군이 되어 파기할 수 없는 실험조약에 서명했다. 현실에 맞춰가는 그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면서도 애기에게 미련을 못 버려 강음당하고 유산당하고 도망가고. 도망갔으면 차라리 다신 이들이 찾지 못하도록 멀리 떠나거나 사라져 버릴 것이지 다시 이곳에 돌아와서 두 번째 수태를 시도하는 나는, 나는……

참 바보다.

- - - -

‘아저씨, 죄송해요.’

백진은 고개를 저었지만 선담은 자꾸 울었다. 그치라고 하면 더 울고, 내버려두면 자꾸 눈물을 훔쳐내서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맞은 곳도 욱신욱신 쓰리고 쉼 없이 달래는 것도 지쳐서 백진이 한숨을 쉬었더니 선담은 ‘아저씨, 죄송해요.’라고 한번 더 입술을 사리물었다. 허연 얼굴이 축축이 젖어서는 차마 백진의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주변을 바장였다.

‘난 괜찮아.’

괜찮다고 수 없이 말했지만 선담의 눈에 비치는 상처들이 온전해 보일 리는 없을 테니까. 백진은 자꾸 우는 선담을 안아주려고 했지만 그는 미꾸라지처럼 요리조리 품안을 빠져나갔다. 백진은 애가 탔다. 그런 아쉬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선담은 한참동안 초조하게 뱅뱅 돌다가 전화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뭐하려고 그래!’

백진은 쏜살같이 막아섰다. 그러나 선담은 외워둔 번호를 망설임 없이 눌렀다.

‘돌아가야 될 것 같아요.’

‘어디로?’

‘……. 원래 있던 곳으로요.’

‘원래 있었던 곳이 어딘데!’

‘E, EEC요. 이젠…… 가야 돼요.’

그 새끼가 선담을 억지로 끌고 가지 않고 간단히 협박만 남긴 이유를 알만했다. 겁에 질린 선담이 제 발로 걸어 들어올 것을 자신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도장은 선담 스스로 찍고 들어오게끔, 스스로 선택한 길이니 번복하지 못하게 만들려고 유도한 것이다. 개새끼.

백진은 선담을 끌어안고 말았다. 품안에 쏙 들어오는 체구는, 키도 크고 살도 붙었지만 어딘지 여리하고 가늘었다. 이런 몸을 안고 있는 가슴에 울분과 함께 연심이 흘렀다. 애정이란 감정을 가득 담아두었던 유리병이 심장 위에서 텅 깨진 기분이었다. 모든 감정이 복받쳐서 심장께로 줄줄 흘렀다.

‘안 가도 돼, 안 가도 된다. 괜찮아. 안 가도 다 괜찮아!’

진심으로 말하는 건데도 선담은 들어주지 않았다. 재차 고개를 도리 치며 여기 있으면 안 되겠다고, 나가야겠다고만 했다. 백진이 흘리는 피를 보고 아연실색한 것이다.

‘가봐야겠어요, 이제 괜찮으니까 가봐야겠어요.’

‘왜! 괜찮다니까 왜 가려고 하는 건데! 나 때문이라면 괜찮다니까!’

‘아, 안 괜찮으니까 가야죠! 아저씨 다친 거 봐요. 이런 건,’

‘일단은 여기 있어. 적어도 사정은 말해주고 가야지.’

‘그 사람 여기 다시오면 그땐 정말 다 죽어요. 갈래요, 갈래요…’

‘……….’

‘폐 끼쳐서 정말 죄송합니다…….’

ㅡ그 사람 다시오면 그땐 정말 다 죽어요.

연백진은 어느 순간 이것이 꿈임을 깨달았다. 며칠이 지났음에도 눈만 감으면 찾아오는 형상이 이것은 확실한 꿈이고 당신의 미련 저편이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백진은 잠에서 일어났다. 하얀 이불위로 아침빛이 노랗게 깔려있었다. 그간 제 주변을 떠돌던 선담의 체취가 희미해져있었다. 백진은 마약처럼 그 향기를 즐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꿈과 현실을 오가며 결정을 내린 아침이었다.

-

후식으로 진한 커피를 들이키던 연의범은 두 눈을 둥그렇게 떴다.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앞에 앉은 넷째아들에게 다시 물었다.

“EEC?"

그러자 백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미국의 PTA사가 비공식적으로 진행해오던 프로젝트의 수주팀인데 이번에 자본이 분할되면서 한국으로 들어왔습니다. 거기를 지원해주는 기업단체 후원위원회가 있어요. 제가 가진 백람의 지분 일부를 그쪽으로 돌리고 싶습니다.”

연의범이 빤히 바라보자 그가 진심을 조금 더 붙였다.

“……후원회를 직접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지분을 붙이고 싶습니다.”

연의범은 혀를 차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러자ㅡ평소엔 절대 안 그러던ㅡ백진이 잽싸게 불을 대주었다. 부모에게 무언가 바라는 게 있으면 자식들이 비위를 맞추듯, 크게 원하는 게 있는지 연백진도 다르지 않았다. 넷째가 붙여주는 불맛도 꽤 괜찮다고 생각하면서 연의범은 연기를 내뿜었다. 일단 저도 물을 것이 있었다.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냐, 백진아.”

“예?”

“EEC에 대해서. 어디까지 알고 있느냐고 물었어.”

“앞에 말한 게 전붑니다. 저것도 인맥 통해서 겨우 알아낸 거고요. 물론 좀 더 조사한 후에 후원회에 가입하고 싶습니다.”

연의범은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넷째놈이 하는 말은 저가 가족의 일원으로서 얼마나 동떨어져있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백람이 EEC를 지원하는 건 일가족이면 다 아는 사실인데. 애비로서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니었다. 게다가 어디서 또 싸움질을 했는지 얼굴에 멍을 주렁주렁 단 모습이 영 짜증났다. 하지만 이렇게 싹싹하게 굴면 마음이 서글서글 풀어지는 게 또 아버지란 입장이었다.

“이놈아, 너 뒷북치는 솜씨가 는 것 같다.”

노긋하게 꾸짖는 말에 연백진이 고개를 갸웃하자 연의범은 속이 터져 입을 열었다.

“우리 백람이 그 EEC 후원 대표기업이다. 언제 적에 결정 난 일인데 찾아와서 고시랑고시랑 거리냔 말이다, 이놈아.”

신중한 자세로 허리까지 꼿꼿이 세우고 있던 백진이 어이없다는 눈으로 그의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왜 저만 모르고 있었죠?”라고 물어보는 말에 연의범은 한숨이 다 났다.

“그야 네가 집안일에 통 관심이 없으니까 그렇지.”

“……….”

“정확히는 인공자궁과 난소가 포함된 수란관을 가지고 인공수정을 시도하는 사단이다. 처음엔 긴가민가했는데 남자모체에게 수정을 성공시켰다고 하더라. 그래서 후원하기로 했다.”

남성모체라면ㅡ… 홍선담.

백진은 순간 눈앞이 화해지는 것을 참았다. 정확히 짚은데다가 이미 백람이 후원하고 있다니 기뻐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그 전에 자신도 물을 것이 있었다.

“누님과 지애 때문에 후원하신 건가요.”

“지안이는 그렇다 쳐도…… 그래, 막내는 아직 가능성이 있으니까 했다. 후원회에 든 기업 대부분이 개인적으로 소원하는 바가 있어서 관심을 둔 것이니 우리만 새삼스러울 게 없어. 다들 제 득을 위해 후원하는 게지.”

사족을 붙이던 연의범은 속이 답답한지 남초를 쓰게 빨아들였다. 이 침묵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백진은 잠자코 있었다. 임상실험이 성공해도 실제 사례에 적용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걸 잘 알면서도 지애는 아직 스물여섯이니까, 아직 한참 어리니까, 하고 버티는 것일 테다. EEC에서 인공자궁의 성공여부만 밝혀내면 PTA사는 인공자궁의 보편화를 시도할 테니까. 어리석은 짓이었다. 백진에게는 제 애비의 욕심이 고스란히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연의범이 먼저 입을 열었다.

“EEC이 잡은 기간이 지금부터 3년 내지 5년이더라. 1차 수정기간 동안 차질이 생겼다지만 재수정 중이라니까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1차 수정기간이요?”

“그래, 도너문제로 뱃속에서 유산됐다고 하더라. 유전적 문제나 염색체 문제가 아니라 도너가 몸관리를 소홀히 했다는데, 원 기가 차서. 그딴 도너 갖다 버리라고 하려다 이젠 자궁을 옮길 수 없다고 해서 말이다. 사실 그 얘기 들으니까 우리 지애도 나중에 고생하는 게 아닐까 싶어서 걱정이 되더라만.”

맞장구를 기다렸건만 백진이 꿈쩍도 않자 연의범은 아들을 위아래로 한번 훑어보더니 혼잣말을 했다.

“실험이 꽤나 고된가 보더라. 없는 몸에다 인공물을 억지로 앉혔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뭐, 임상실험이라는 게 다 그런 게지. 나중에 우리 지애는 고생이 덜했음 싶다만. 그거야 잘 해결될 거라고 믿는다. 길호문이가 어떤 놈인데. 아무렴.”

돌덩이처럼 앉아있던 백진이 “혹시 도너를 직접 보신 적은 있으십니까?”라고 물었다. 연의범은 고개를 가볍게 까닥였다.

“엊그제 한번 보았다. 후원회 임시소집을 마치고 한번 들렸다가. 도너가 아주 어리더라.”

“어떻던가요.”

넋을 놓고 묻는 말에 연의범은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그러자 백진이 덧붙였다.

“도너요, 도너. 도너의 상태. 어때 보였습니까.”

“어떻기는. 아파서 새파랗지.”

아파서 새파랗다……. 

백진은 얼굴을 감쌌다. 가슴이고 몸이고 엉망인 녀석을 끝끝내 끌고 가버린 놈들을 다 죽이고 싶었다. 이런 분노가 갑작스러웠지만 그만큼 또 아주 자연스러워서, 꼭 오랫동안 연모해왔던 연인이 잡혀간 기분이었다. 

되찾고 싶었다. 막연하게 너무도 되찾고 싶었다.

때문에 연백진은 며칠간 품어왔던 바람을 여기 이 사람에게 털어놓기로 다짐한 것이다. 맞은 곳이 가라앉으면 노여움도 조금은 풀어질까 고이 기다렸지만 도저히 그건 안 되고, 때문에 고심하고 고심했다. 허나 결론적으로 이 방법만큼 명쾌하고 확실한 게 없었다. 그뿐 아니라 연의범도 분명 동의할 것이란 확신이 서 있었다. 이미 백람이 EEC를 후원하고 있었다니까 이 모든 게 마치 필연처럼 다가와 연백진의 각오는 더욱 굳어졌다.

“아버지, 두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늘상 건들거리던 넷째가 갑자기 정연한 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그 눈빛이 너무도 말끔해서, 한방 맞은 듯 연의범은 멍하니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뭔데 그러냐.”하고 작게 물어보았다. 백진은 망설임 없이 부탁했다.

“아버지에겐 무늬만 대표인 EEC의 후원위원장 자리, 그 자리 저한테 인계해주십시오.”

조금 뜬금없었지만 안 될 것도 없는 부분이라 연의범 또한 의연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다음 말에는 어쩔 수 없이 깜짝 놀라 담배를 문 입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그 남성모체가 태아를 가지게 되면 제가 입양하고 싶습니다. 이거 허락 안 해주시면 아버지, 평생 저한테서 손자 같은 거 못 보십니다. 절대로요.”

-

길호문은 전화를 받고 한동안 멍했다. 실험이 성공해서 아이가 뭍으로 나오면 당연히 여기저기서 러브콜이 쏟아질 거라 예상은 하고 있었다. 후원회에 몸담은 기업가 중 여럿도 노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설마 백람에서 직접적으로 러브콜을 외칠 줄은 몰랐다. 더욱이 아직 수정도 완벽히 이뤄지지 않았는데.

“아니, 이 사람아. 그…… 난 좀 당황스럽네.”

[어려울 게 뭐 있어. 정 꺼려지걸랑 우리 쪽에서 학계에 대한 모든 비용을 지불 할 테니까.]

“자네가 태아에 관심이 있었던가? 거, 딸애한테 필요한 부분만 원하던 거 아니었어?”

그러자 수화기 너머에서 껄껄껄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거야 당연하고.]라고 대꾸하며 연의범은 길호문을 재차 졸랐다.

[설마 우리보다 더 크게 매겨줄 쪽을 찾는 거야?]

“아니지, 그럴 리가! 그건 아니지만…….”

[그럼 뭐가 문제야. 이미 수정에 한번 성공했다는 것만도 큰 이슈감인데. 다시 2차 수정 밟고 있다며? 여차여차 2차 잘돼서 애 나오고, 그래서 언론에 공개될 때 말이야, 그때 아무래도 매스컴에서 아이의 생육에 대해 물을 텐데 내가 뒤를 받쳐주는 게 좋지 않겠어? 어차피 해외기업체에서도 덤벼들 텐데 우리 멀리 돌아가지 말자구. 같은 땅 사람들끼리 도와야지.]

그건 맞는 말이다. 허나 길호문에겐 하나 걸리는 게 있었다. 처음부터 이 문제를 홍선담에게 밝혔어야 했는데 감추었었다. 출산 후의 아이문제는ㅡ저희들이 기를 수도 있지만ㅡ입양문제로 불거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 말이다. 이건 안 했다. 그때 당시엔 홍선담이 도장을 찍게 만들어야 한다는 조급증이 더 컸다. 아마 최은협도 지금껏 모르고 있으리라. 

잠시 최은협을 떠올린 길호문은 미간을 찡그렸다. 요즘 들어 그가 예전 같지 않아서 길호문의 속이 영 불편한 차였다. 사사건건 어딘가가 거슬렸다. 몇 번 큰소리를 치고 압박을 주었더니 사람 눈이 달라져서는, 마치 독을 품은 짐승이 사람 탈을 쓰고 연구실을 배회하는 것 같았다. 늙은이의 견부를 묵직하게 누르는 당최 알 수 없는 위압감 덕분에 길호문의 입술이 바짝 말랐다. 게다가 최은협도 아이의 입양 문제에 대해서는 얼핏 듣기만 들었을 뿐, 허락한 적은 없었다란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길호문은 주저주저했다.

“그게 말이야, 지금 이 실험의 권한은 상당부분 나한테 있지만 만약 태아가 나오면 그땐 그 권한이 반으로 줄어들어. 여기 정자를 기증한 임원에게도 친부권한이 생기고, 도너도…”

[아아ㅡ 괜찮아, 괜찮아. 자네 우리 백진이 알지?]

연백진이라면 연의범의 넷째아들. 아주 어렸을 때를 빼고는 보지 못했지만 간간히 전해들은 바로는 아버지 쪽 사업을 싫어해서 소아과의사를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고 했다. 집도 자주 나가고 시위 때 전경에 잡혀서 연의범이 몰래 빼내오는데 고생했다고 하던…. 그런 주제에도 연의범이 사실 제일 아끼는 놈이라 2배로 속을 갉아먹는 아들이라고 익히 들었다. 그러고보니 얼마 전에는 의료사고를 크게 냈다고도 했는데. 허나 길호문은 따지지 않고 “알지, 잘 알지.”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벌써부터 신이 났는지 연의범이 야단이었다.

[이놈이 정신을 좀 차렸나보이. EEC 후원위원장을 나 대신에 맡겠다지 뭔가? 왜 그러냐니까 원래부터 국내 임상실험에 관심이 지대했대. 이놈이 보면 또 의대잖아? 그리고는 백람에서 차후에 태어날 아이를 입양하자고 하더라니까.]

아들놈이 그랬다는 소리에 길호문이 벌떡 놀라서 소리쳤다.

“총각 아니야?”

[음, 아직 장가는 안 들었지.]

“그런데 애를 입양해도 되겠어?”

예상한 질문이었는지 연의범이 속 좋게 허허 웃었다.

[이놈이 도너고 뭐고 다 설득하겠다던데 말야, 아주 굳혔더라고. 특별한 아이지 않나. 나야 손주 보는 거나 다름없을 거란 생각도 드는데다 나나 이놈이나 애들을 좀 좋아해야 말이지. 어차피 이놈 황소고집은 내가 꺾으려 할 때부터 지고 들어가는 거라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어. 백진이 씨로 낳으면 더 좋겠지만 어차피 기증정자인데다 공식적인 아이니까 크게 문제되지 않겠지. 오히려 기업이미지에 도움이 될지 모르고. 일단 내 생각은 그러네.]

“자네 괜찮겠어?”

[놀라긴 했어. 헌데 이놈은 평생 독신으로 살 거 같아서 미리 떼다놓으려고. 그게 낫겠어.]

농담까지 곁들이며 연의범이 털털 웃었다. 저희들 간에는 이미 모든 이야기가 오가고 끝난 모양이었다. 

연의범이 워낙에 대범하고 직선적인 인간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아들문제에도 이럴 줄은 몰랐다. 이렇게 중요한 문제를 이렇게 설렁설렁 넘길 것이었으면 애당초 자식놈과 왜 그리 싸워왔는지 의문마저 들었다. 한편으론 이게 그 ‘넷째아들’이라서 가능한 거라고 납득하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그럼 일단 시간을 좀 주게나. 아무래도 나 혼자 결정할 문제가 아니야.”

[좋아, 좋아. 근데 길호문이. 이거 하나는 좀 기억해줘야겠어. 나도 내 아들놈을 못 말리는데 자네라고 덜 하겠나? 얘가 우리 지애보다 더 해. 제 맘대로 안 되면 지분 다 빼버릴지도 모르는 놈이니까 잘 달래보라고. 난 어쨌든 자리 내줄 테니까.]

“이봐, 연의범이.”

[뭐가 급한지 너 보겠다고 벌써 출발했어. 인수인계는 좀 후에 할 거네. 잘 부탁해.]

“이, 이봐…!”

전화는 매정하게 끊어졌다. 연의범 본인도 자신 없는 일을ㅡ그러니까 연백진을 설득하는 일을ㅡ이쪽으로 은근슬쩍 떠넘기는 것 같아 길호문은 인상 찡그렸다. 그는 오랜 친구를 원망하며 내부버튼으로 최은협을 연결했다.

-

방안의 온갖 물건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바닥에 내팽개쳐져 있었다. 책이란 책은 책장에서 다 빠져나와 흩어져있었고 시트와 쿠션도 침상 위에 있지 않았다. 플라스틱으로 된 가습기는 아예 박살난 데다 커튼까지 뜯어져 전장이 따로 없었다. 방 한구석에 나자빠진 인영과 방 중앙에 서 있는 인영 하나만 생존해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액자를 깰 때 베여서 손바닥에서 피가 줄줄이 흐르는 채로 선담은 침대 밑에 기어들어갈 것처럼 이마를 처박았다. 은협이 그런 선담을 들어 올리려고 별 수를 다 썼지만 선담은 하체에 묵직하게 힘을 주고선 절대 일어나지 않고 버텼다. 이걸 때릴 수도 없어서 은협은 복장을 터트렸다.

“왜 이래, 정말! 홍선담!!!”

벽력같은 고함이 귀를 때리기가 수차례. 문밖에서는 시술준비를 마치고 도너를 기다리는 일원들이 은협을 응원하고 있었다. 시간이 촉박해 은협이 악을 쓰면 쓸수록 선담은 몸을 더욱 축 늘리고 크게 울어댔다.

“하기 싫어, 하기 싫다고…!”

이미 한 시간에 가깝도록 곤욕을 치룬 은협이 드디어 가운을 벗어던졌다. 밖은 한겨울이지만 난방이 잘된 방은 두 남자의 치열한 전쟁 때문에 열이 가해져 무척 더웠다. 반팔 티만 걸친 은협은 이젠 아주 작정하고 선담을 뒤집어 들어 올릴 참이었다. 선담은 그런 은협의 손을 피하며 몸부림쳤다.

“제발 떼 좀 그만 부려! 왜 이러냐!”

가뜩이나 배 끝에서 퍼진 통각이 가슴 언저리까지 올라와서 새벽 내내 한숨도 못 잔 선담은 은협의 막말에 엉엉 울었다. 오늘만, 오늘 딱 하루만 하지 말자는데도 저들은 무조건적이었다. 일정은 빡빡한데 선담이 자꾸 버티자 설득을 포기한 일원들은 은협을 기다렸다가 선담을 맡겼다. 영국에서도 선담의 안부는 은협이 맡았었다. 다만 선담이 이렇게까지 고집을 부린 적이 없어서 이 지경이 된 적이 없었던 것뿐이다. 오늘 중으로 염색체 샘플을 뽑고 몸 안의 샘플을 파기해야 한다는 일원들 때문에 그 사이에 끼인 은협과 버티는 선담은 그야말로 전쟁을 치렀다. 선담이 어찌나 완강한지 좀체 지치지 않는 은협도 피곤에 젖은 얼굴이었다. 저런 얼굴을 보는 게 괴로우면서도 몸이 도저히 따라주지 않아 선담은 끝까지 바닥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은협은 한숨 돌리며 가까이 다가와 앉았다.

“어디. 어디가 아픈데.”

어디가 아프긴. 온몸이 다 아팠다. 온몸의 신경이 고래고래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매섭게도 아팠다. 이런 아픔을 딱히 집어내라고 물어보는 은협에게 서러워서 선담이 자꾸 눈물만 쥐어짰다.

“여기냐, 응?”

쭈그려 자빠진 선담을 끌어안고 배안에 손을 집어넣었지만 선담은 끅끅거리기만 하고 말이 없었다. 은협이 머리를 쓸어 넘기며 깊게 한숨을 지었다. 기운이 많이 빠져 최후의 수단으로 달래기 시작했지만 역시나 꿈쩍도 않았다.

“최은협 씨, 도…와줄까?”

“됐으니까 나가시죠.”

은협은 문을 반쯤 열고 들어온 여직원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이런 일만 생기면 뺀질뺀질 발뺌하는 족속들이 반가울 리 만무했다. 그녀는 매우 무안한 얼굴로 문을 닫았다. 저희들도 지쳐서 은협을 불러놓고는 일이 뜻대로 안되자 매우 계면쩍은 듯했다. 선담의 어깨를 들어 올리며 은협이 나지막이 물었다.

“홍선담, 말해봐. 자꾸 이렇게 고집부리고 엄살 피우는 이유 좀 말해봐.”

“어, 엄살 아니야……. 정말로, 너무 아프ㅡ”

“아니, 너 옛날에도 딱 이만큼 아팠어. 그땐 잘 참았잖아.”

아니다. 틀렸다. 은협은 제가 말하면서도 자신이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린다는 사실에 실소해버렸다. 선담이 지금 어느 정도의 고통을 감수하고 있는지는 지나가던 개가 보아도 느낄 법했다. 몸통 자체가 앙상해지고 얼굴이 정말 새카매졌다. 물기라곤 찾아 볼 수 없는 사막의 나뭇가지 같았다. 향기롭게만 느껴지던 풋내도 사라지고 생글생글한 피부결도, 생기 가득한 눈동자도 죽은 지 오래였다. 

어느 부분에 잘못이 있었는지는 다른 부서에서 밝혀내겠다고 나섰지만 결과는 신통찮았다. 별다른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예전과 똑같은데 도너가 느끼는 통각만 거대해진 것 같다고. 진통제 말고는 별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다시 1기로 돌아가는 과정을 밟고 있는 건데, 그 과정마저도 고통에 겨워 선담은 필사로 피하고 있는 것이었다. 조만간 1기 실험을 재수립할 텐데 이러면 곤란한 건 최은협만이 아니었다. 고통을 이기지 못하는 도너 때문에 EEC의 진행과정은 미약하지만 확실히 더디어지고 있었다.

반복됐다. EEC를 유지시켜야만 목적한 바를 이룰 수 있는 자신의 오랜 열망과, 홍선담이 아파 우는 모습을 지켜보는데 한계가 느껴지는 자신의 인내가. 최은협은 눈을 내리깔았다.

“……오늘 하루만 봐줘ㅡ….”

선담은 흐느끼며 은협의 소맷자락을 잡았다. 은협이 이마의 땀을 닦아내며 한숨을 뱉었다. 종용하고 타일러도 아픈 건 공유해 나눌 수도 없는 부분이라 이 실험의 모든 고통은 실상 홍선담이 전부 안고 있었다. 그걸 모르는 건 아닌데도, 실험이 지연된다는 사실이 은협에겐 참을 수 없는 문책이 되었다. 하루라도 빨리 그 모습을 보고 싶었다. 

선담이 ‘내 온전한 새끼’를 품은 모습을, 세상 무엇보다 간절하게.

너무도 보고 싶었다.

“안 돼, 일어나.”

은협은 방심한 선담을 들어 올리려고 다시 한번 시도했다. 화들짝 놀란 선담이 침대기둥을 잡고 다시 버텼다. 결국엔 시늉만 하고 은협은 손을 다시 놓아야했다. 짜증이 솟구쳐 딱 돌아버릴 것 같았다. 선담의 울음 섞인 투정이 귀엽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요즘엔 지나친 노역에 피로와 스트레스가 쌓여 짜증부터 제대로 났다. 실험마다 아프다고 징징 거리면 그걸 일일이 걸머져줄 수도 없는데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겠느냔 말이다. 결국 은협이 이를 악물었다.

“저, 최, 최은협 씨.”

“나가 있으라고!”

이번에 문을 열었다가 찔끔 놀란 사람은 소장의 비서 안금미였다. 그녀는 문 앞에서 기다리는 일원들에게 대강의 상황을 전달받았고, 때문에 더욱더 재빠르게 은협을 불렀다.

“그게 아니라, 소장님 호출이야. 옆에 전화기 반짝 거리잖아.”

바닥에 나뒹구는 전화기도 망가졌는지 소리 없이 파란불만 들어오고 있었다. 선담이 격심하게 날뛰긴 했다. 이 방 가구를 남아나는 게 없도록 만들었으니. 은협은 얼이 빠져 선담을 잠시 쳐다보다가 수화기를 들었다.

[은협이냐. 인석아, 전화를 왜이리 안 받아!]

“……….”

[홍선담이 데리고 이쪽으로 좀 와라.]

“무슨 일이십니까. 곧 샘플파기에 들어갈 예정인데요.”

옆에서 선담이 히끅 놀랐지만 은협은 개의치 않았다. 몸에 맞지 않은 세포를 품고 있어봐야 좋을 거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수화기 저편은 단호했다.

[어쨌든 좀 와봐. 꼭 보고 나눌 이야기가 있어. 선담이 잘 입혀서 꼭 데려와.]

수화기를 거의 집어던지다시피 내려놓은 은협은 선담의 얼굴을 수건으로 닦아주고 옷을 여며주었다. 방으로 들어와 주변을 보고 경악한 연구진은 넋을 놓고 그 둘을 바라보았다.

-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그래, 어서 들어와라. 백진이 너 정말 오랜만이다. 얼굴은 왜 그래?”

“익히 들어 아시잖습니까.”

“정말 시위라도 참여한 거야? 연의범이 속 단단히 긁겠구나. 그래도 다 컸군, 다 컸어.”

널 보았을 때가 요만할 때였는데, 하고 껄껄 웃으며 길호문이 자신의 허리춤을 가리켰다. 그러나 훌쩍 커버린 꼬마는 지금은 완벽한 남자로서 훌륭한 슈트를 갖춰 입고 저보다 머리 두개는 더 단 훤칠한 청년이 되어있었다. 연백진은 미소를 지으며 소파에 앉았다. 옛날에는 그저 반항적인 눈꼬리를 가진 꼬마였는데ㅡ조만간 후원위원장 자리에 앉을 몸이라선지ㅡ어딘가 모를 위압감이 들었다. 나이 앞엔 장사 없다고, 최은협에게 밀리는 듯하더니 옆집 꼬마였던 녀석에게까지 밀린다는 생각이 들어 길호문은 입맛을 쩝 다셨다.

“거, 얘기는 들었다. 애비 자리를 호시탐탐 노린다며?”

어색함을 덜기 위해 농을 치는 길호문 덕분에 백진이 크게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소리마저도 어딘가 불안불안하니 길호문은 대체 이 범상치 않은 기운이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의아해했다. 어리둥절해 앉아있는 노인네를 보다가 백진은 떠보듯 가볍게 내뱉었다.

“도너도 오고 있는 건가요?”

“그럼, 불렀지. 실제로 한번 봐야 더 좋잖은가?”

“그렇죠.”

“근데 정말로 입양 할 작정인가?”

길호문이 정확한 의사를 원하기에 백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까지의 자신은ㅡ애들이 좋아 소아과를 지망했을지언정ㅡ아버지 때문에 결혼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남편 따위 필요 없으니까 애 하나만 생기면 좋겠다던 친구의 농담조가 자신에게도 적용될지는 이번에 알았다. 오랫동안 함께하고픈 사람이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바람과 맞물린 것이다. 정확히는 선담이 낳은 아이와 선담을 모두 갖고 싶었다. 아니, ‘아이’는 그렇다 치더라도 선담만은 정말이지 절실했다. 그러니 녀석을 EEC에서 안전히 빼와야 했다. 아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선담과 진지하게 함께해보고 싶었다. 백번 양보해도 우는 얼굴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에 가장 적합한 자리는 후원위원장 자리였고, 실험배아로서 최초의 아이를 입양한다는 명분은 그의 행동을 전혀 이상치 않은 것으로 비쳐주었다. 

백진의 명쾌한 반응에 길호문은 수염을 긁었다.

“근데 거참, 이번 1기 과정은 실패했어. 다시 1기부터 되밟아야 하네.”

“그렇군요. ……. 한번 수정하는데 들이는 시간은 얼마나 됩니까?”

“총 8기까지 밟아야 하네.”

8기라. 듣기만 해도 숨이 막혔다. 백진은 이 실험과정에 대해 구체적으로 아는 바가 없었기 때문에 깊게 캐지는 못했고, 그간 궁금했던 것이나 묻기로 했다.

“근데 자연수정은 하지 않으시는군요.”

서인표가 말하길 1/10 확률이라고 했지만 8기나 거치는 시술보다는 차라리 자연수정이 더 나을지도 모르는데. 너무 노골적이라 피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이건 일종의 확률싸움이 아닌가. 그러나 길호문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전혀 딴소리를 했다.

“자연수정이라니?”

오히려 백진이 더 당황해서 주춤했다.

“그러니까…… 말 그대로 자연수정 말입니다.”

길호문은 한참동안 연백진을 이상하게 쳐다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늙어선지 요즘 사람들 농빠엔 못 따라가겠어. 이 친구야, 자연수정이 어떻게 가능하겠나. 이론상 가능하다 할지라도 우리는 성행위를 이용해서 실험을 종식시키고 싶진 않아. 애초 그런 목적도 아니었고. 필요한 건 기술이지.”

“무슨 말씀이신지…….”

“훗날 인공자궁을 갖게 될 사람들이 모두 관계를 통해서 아이를 만들지는 않을 테지. 나중이 되면 자궁과 질을 이을지도 모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건 ‘인공물을 이용한 통해한 수정’이지 ‘성교에 의한 수정’이 아니야. 급한 건 인공자궁을 통해 새 생명의 탄생이 가능 하느냐를 밝히는 것일세.”

순간, 백진은 이 자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노인네는 아무것도, 단 하나도 모른다. 홍선담의 몸에 누군가가 무슨 짓을 해놨는지. 전혀 모르는 것이었다. 허울 좋은 우두머리지 막상 등잔불 밑에서 어떤 교묘한 수가 놀아나고 있는지는 한 가지도 모르는 듯했다. 

도너의 몸 안에서 직장과 수란관이 연결된 사실을 아느냐고 물어보려던 백진은 입을 다물었다. 길호문이 알아서 좋을 일은 단 하나도 없을 거란 예감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일을 벌일 놈이라면ㅡ연구실 임직원에 대해서는 조금도 알지 못했지만ㅡ왠지 감이 왔다. ‘그놈’일 거라는 강렬한 직감이. 선담의 몸에서 자연수정이 이루어지길 원한 것인가? 인공수정의 실패를 대비해서? 이유를 알 수 없는 감각에 백진의 입에서 슬그머니 웃음이 흘러나오려 할 때, 문이 열렸다.

“최은협입니다. 소장님, 부르셨ㅡ”

소장실로 들어오던 상대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백진은 저도 모르게 웃음 지었다.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길호문과 함께 뒤를 돌아본 자신이 꼭 낯설다고만 할 수 없는 남자일 테니.

-

겨우겨우 휠체어를 타고 들어온 선담은 얼이 빠졌다. 얼마 전에 신세를 졌다 헤어진 사람이 예견도 없이 소장실에 떡하니 자리를 틀고 앉아있었다. 아주 태평스런 얼굴로. 고급스럽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말끔한 차림으로. 그러나 그보다 더 놀란 건 단연 최은협이었다. 암석 같은 얼굴에 묘한 동요가 보였다. 그런 세 젊은이 사이에 끼인 길호문은 묘한 기류도 눈치 채지 못했는지 너스레를 떨며 선담의 휠체어를 뺏어 밀었다. 백진은 휠체어에 환자처럼 올라탄 선담을 보고 유감없이 온갖 인상을 찌푸렸다. 단 3주 만에 사람이 거의 산송장이 됐다.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허나 여기서 길길이 날뛴다 함은 자신이 지고 들어가는 어리석은 짓이었다. 길호문은 그런 백진의 눈치를 슬쩍 보고 약삭빠르게 선담에게 그를 소개했다.

“자자, 인사해라. 선담아, 여기가 우리 EEC의 자본 중 40%를 후원해주시는 백람기업의 넷째아드님이시다. 이번에 후원위원장으로 올 거다. 최은협이, 이쪽으로 오지 않고 뭐해?”

무감한 얼굴을 가장하고 지켜보던 은협의 눈에 강한 살의가 비쳤다. 그러나 선담은 이 사태가 어찌된 일인지 헤매느라 그 살기를 눈치 채지 못했고 길호문도 저 나름대로 몹시 바빴다. 백진은 밀랍인형 같은 은협을 보며 웃음을 흘렸다. 이렇게 통쾌할 수가. 

“아, 아저씨…… 어…떻게…….”

선담의 말 더듬는 모습을 다시 보자 몹시도 귀여워서 연백진은 휠체어고 뭐고 다 내던지고 선담을 끌어내 품에 안을 뻔했다. 오랜만에 녀석을 보니 더욱 확실해졌다. 자신은 선담에게 깊은 애정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 하루라도 빨리 이 녀석을 데리고 소독액 냄새 가득한 이곳에서 탈출해야 한다는 사실이. 선담은 반가움 반, 놀라움 반인 얼굴로 재차 “아저씨, 아저씨”라고 백진을 불렀다. 길호문은 거기다대고 아는 사이였냐고 한술 더 뜨며 난리였다. 

“둘이 안면 있는 사이냐?”

“아, 그게……”

“제가 잠시 보살폈습니다. 이 녀석이 EEC에서 도망쳤던 한달 반가량 말입니다.”

“뭐?!”하고 길호문은 금세 낯을 붉혔다. 연백진의 조용한 눈빛이 그를 머쓱하게 만들었다. 머리회전이 빠른 늙은이라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연의범을 포함한 후원회에게 거짓보고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지금 막 들킨 셈이란 걸.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났는지는 몰라도 저 말이 사실이라면 홍선담이 EEC에서 도주했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게 바로 이 차기 후원위원장이었다. 길호문은 몹시 당황하여 은협과 백진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최은협에게서는 친구 집에 도망가 있었다는 식의 이야기밖에 듣지 못했으니 이런 상황에 대한 대처는 아예 문전 밖이었고, 변명하려니 말 잇기가 쉽지 않았다.

“그…… 백진아, 그건 말이다……”

“괜찮습니다. 오히려 저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시간이었습니다.”

백진은 그렇게 말하면서 선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은협이 싸해진 눈으로 지켜보았지만 총구를 겨누는 쪽은 오히려 편안해 보이는 백진이었다. 이대로 수세를 몰아가야겠다고 생각한 백진은 은협을 위아래로 한번 훑어보고는 길 소장에게 능청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소장님, 저는 여기 이 녀석에게 휴가를 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직접 온 겁니다.”

“뭐?”

선담보다 오히려 길호문이 눈을 더 크게 떴다. “아니, 도너를 어디로 데려가겠다는 거냐?”하고 그가 뻔한 질문을 했다. 백진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온갖 감정이 쏟아져 얼룩덜룩한 선담이 뺨을 두드렸다. 금방이라도 픽 쓰러져 다시는 눈 뜨지 않을 것 같은 몰골이었다.

“소장님, 이 녀석 보십시오. 제가 보낼 때만 해도 뽀얀하던 녀석이 이 몰골로 여기 갇혀있지 않습니까. 임시 보호자였던 제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그간 정도 많이 들었는데요.”

“하지만 연의범이에게서는 그런 소리 듣지 못했네!”

“아, 그러셨습니까? 전 애초에 이 녀석을 데려갈 생각으로 방문한 건데요. 여기 뒀다가는 말라죽을 것 같습니다.”

누가 들으면 크게 오해를 살 이야기라 길호문이 험험, 하고 헛기침을 삼키고선 팔짱을 꼈다. 허나 얼마 버티지 못하고 팔짱을 도로 풀며 “그래도 그건 좀……”하고 말끝을 흐렸다. 연의범보다 더하면 더하지 못할 게 없는 연백진은 특유의 고집으로 길호문에게 대꾸했다.

“소장님, 1기 실패하셨죠? 한 사람이 너무 무리한 탓이 아닐까 합니다. 혹은 ‘정자’가 안 맞을 수도 있으니 한번 고려해보셔야겠습니다.”

끝말이 품은 가시를 알아들은 은협이 조용히 미간을 그었다. 그제야 선담이 두 남자 사이에서 슬슬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길호문은 여전히 심각한 표정이었다.

“허, 헌데 그걸 연의범이가 허락할지…”

“저희 아버지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이제부턴 제가 이 연구팀을 후원하게 될 테니까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거…”

이미 넘어간 권한인데다 힘의 차이가 막강했다. 그래도 맘이 편치 않아 길호문은 갈팡질팡했다. 백진의 말이 맞기는 한데 이대로 도너를 보내주려면 여러 가지 절차가 필요할 것 같은 관료식의 발상 때문이었다.

“그래도 도너한테 휴가라는 게…”

“소장님.”

늙은이 결정을 기다리는 게ㅡ별 의미도 없을뿐더러ㅡ답답하여 백진이 칼같이 말을 잘랐다.

“필요한 일이 있다면 제가 도너를 업고 돌아다닐 테니 앞으로 협조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뭐라고?”

“PTA사의 간섭이 없어졌다고 너무 지독하군요. 백람이 EEC를 후원하는 이상 도너의 건강은 전적으로 제가 관할합니다. 연구의 핵심인 도너입니다. 녀석의 안전을 챙겨주시죠. 모처럼 백람이 후원하는 첫 의료연구단체인데 인권문제로 치명상 입는 건 바라지 않습니다. 지금 이 상황도 상당히 위태로워 보입니다만.”

“백진아.”

“의의제기는 지정된 비서를 통하는 걸로 하죠. 임직원에게 말씀 전해주십시오. 물론 불만을 말하는 것까진 자유지만 뒤탈은 고스란히 본인이 감당해야 할 것이라고요.”

잘못 대들었다가는 가차 없이 퇴출이란 소리.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버틸 게 뭐있나 싶은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길호문은 턱을 쪼글쪼글하게 하고 입을 다물고 있다가 어렵사리 “그, 그래, 자네 말이 옳네.”하고 승낙했다. 그리고는 구구절절 변명을 늘어놓았다.

“원래는 선담이도 연구실에서 나가 살고 있었어. 우리들이 순번을 정해놓고 들리는 식이었지. 거, 자네도 알다시피 보안상 한번 잘못되어서 연구실로 들였다만… 오랜만에 시술을 하려니까 몸이 익숙지 않아서 그런 것뿐이야. 아, 안색도 곧 좋아질 거구. 원래는 우리가 다들 가족 같은 분위기라네. 음, 어쨌든 자네가 데려간다고 하면 안심하고 맡길 수 있겠지. 헌데 우리가 본가로 찾아뵙기는 영 어려운데 말이다.”

“필요할 때 호출하겠습니다. 이 녀석 아이를 입양한다고 하면 아버지도 흔쾌히 수락해주실 거고요. 앞으로의 실험은 진득하게 기간을 가지고 행해주셨음 합니다. 자본이 확충될수록 PTA사가 설 자리는 좁아질 테니 아마 백람이 상당부분을 떠맡게 될 겁니다.”

그때였다.

“누구 맘대로 입양을 하신단 말씀이십니까.”

있는 듯 없는 듯하고 있던 은협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낮고 팽팽한 음성이 느낌만으론 엄청나게 거대해서 유리창이 죄다 날아갈 것 같았다. 백진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돌아보았다. 누구보다도 길호문이 놀래서 은협에게 손사래를 치려는 찰나, 백진이 다시 노인네를 막았다.

“소장님, 저희 셋 다 한번씩 본 얼굴입니다. 소장님께서 잠시 비켜주시면 제가 알아서 최은협 씨도 설득하겠습니다.”

그러자 선담이 “소장님, 가시면 안돼요.”하고 길호문의 팔을 잡았다. 눈가가 두려움에 바짝 쪼그라들어 있었다. 길호문은 더더욱 알 수 없게 되었다. 심상찮은 건 알겠는데 젊은이들끼리 당최 왜 이러는지는 어림짐작도 가지 않았다. 자리를 피해줘야 일이 해결되려나? 아님 여길 꿋꿋이 지키고 모든 이야기를 다 들어야 할까? 그러나 은협도 소장이 비켜주길 바랬고, 백진이 선담에게 괜찮다고 다독이는 바람에 그는 별다른 선택권 없이 소장실을 나서야했다.

탁, 문이 닫히자마자 백진이 하하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시원한 웃음소리가 소장실을 순식간에 꽉 채웠다. 그는 정말 즐겁게 웃었고, 분명한 도발이었다. 선담은 입양이고 뭐고 신경 쓸 겨를도 없어 불안한 눈으로 이 상황을 살피느라 바빴다. 은협도 이제야 솔직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짓입니까, 당신.”

존대어는 겨우 붙인 것이다. 그에 한참을 웃던 백진은 독이 오른 은협을 힐긋 한번 쳐다본 뒤 무시하고 선담의 팔뚝을 잡았다.

“사람 뼈마디가 이렇게 가늘어 질 수도 있냐, 꼬맹아. 나간 지 얼마나 됐다고. 내가 다시 찌워주마.”

“아저씨, 여기엔 어떻게 오셨어요. 아직도 얼굴이…”

“걱정마라. 도와주려는 거니까.”

선담은 자신의 손마디를 살살 문지르는 남자의 손길에 쓰라림을 느끼고 말았다. 연백진이 사실 대재벌의 직계자손이었다는 반전에 별로 놀라지 않은 것은,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이렇게 나서주는 것은 과분하고 황송한 처사였지만 고통이 더할지언정 다시 EEC를 탈출해 남들 고생시키고 최은협 주먹에 피를 묻히기가 무서웠다. 아파서 하루 종일 버티고 싸우고 씨름을 할지언정 최은협의 눈에서 불똥이 튀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벗어나고픈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이유는 따로 없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최은협의 잔혹함이 주변 사람들에게 해를 끼칠까봐서 그게 너무 두려웠다. 백진이 다시금 위험에 노출되면 죄책감으로 더 아플 것 같았다. 석재를 볼 자격도 없어질 것이다. 은협은 자신을 끌고 가기 위해서 생판 모르는 남의 얼굴을 피투성이로 만든 남자였다. 그것도 적잖게 봐준 것일 테다.

최은협이 얼마나 무서운 인간인지는 자기 외엔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그 지경으로 당해놓고서도 갈 곳이 없어서 돌아온 EEC였다. 지금은 백진이 은협에게 화가 치밀어 자신을 데리고 가겠다고 하지만 만에 하나 백진의 마음이 바뀌면, 그래서 다시 홀로 EEC로 돌아와야 하는 일이라도 생기면 그땐 정말 어디도 기댈 데가 없어진다. 버림받는 게 죽는 것보다도 두려웠다. 때문에 고통이란 고통은 뼈저리게 느끼는 이 상황에도, 만난 지 얼마 안 된 연백진보다는 최은협이 더 안전해 보이는 것이었다. 남들은 이해 못하겠지만 어디에도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은 선담의 동선을 극도로 축약시켰다. 최은협에게로 돌아갈 길이 아니면 눈에 뵈지도 않는 것이다. 소위 ‘귀족’인 연백진에게 언제 버림받을지 몰라 안절부절 못하는 것보다는 16년간 함께 있었던 자가 차라리 나았다. 그토록 당하고 당해서 자신은 이미 닳아버렸고, 이 사람에게는 더는 상처받을 일도 없을 것 같으니 말이다…….

선담은 바퀴를 굴려 백진에게서 비틀비틀 빠져나왔다.

“아저씨, 안 돼요. 이런 건, 그러니까,”

“안 돼?”

“……. 네…….”

“왜?”

대답이 쉽게 나올 리 없어서 선담은 한참 우물거렸다. 백진도 은협도 모두 선담의 대답을 기다리는 양 주변은 조용했다. 말라비틀어질 것 같은 몰골을 한 선담 때문에 백진은 한시라도 빨리 이 녀석을 옮기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은협의 동태를 살폈다. 그때 선담이 입술을 달싹였다.

“사람이…… 자, 자기 집에서 살아야죠…….”

자기 집? 기가 막혀서 백진은 하하 웃었다. 선담의 약점은 이거다. 약점도 이렇게 너저분하고 멍청하고 어리석은 게 없었다. 과거에 두 사람이 얼마나 애틋한 관계였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그렇게 호된 일을 당했는데, 그런데도 몸이 약하니 마음까지 망가져선 상황을 바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이렇게 약해서야 내버려두면 선담은 언젠가 실험도중 정말로 죽을 것이다. 아마 이들이 제 살가죽을 발라내도 그게 잘못됐는지도 모르고 끽소리도 못한 채 허우적거리다 다시는 회복 못할 선까지 망가져버릴 것이다. 하늘이 두 쪽 나는 한이 있더라도 그 꼴은 볼 수 없었다. 백진은 선담의 어깨를 잡고 확고하게 눈을 마주쳤다. 

“꼬맹아. 여긴 네 집이 아니야. 적어도 네가 맘 편할 집이었으면 네 꼴이 이따위로 망가지지도 않았을 거고, 빗길 헤치며 도망치지도 않았을 거다. 여긴 네 집이 아니야.”

선담의 눈이 크게 뜨였다. 지금까지 이런 이야기 해주는 사람은 없었을 테니까. 백진은 짐작했다는 듯이 쓰게 웃으며 더욱 서둘러 선담을 설득하려 들었다.

“여긴 그저 네 뱃속에 든 인공자궁을 연구하는 연구ㅡ”

“잘 했어, 선담아.”

백진은 소리 난 쪽을 바라보았다. 말을 자른 은협이 천천히 이동해 이윽고 두 남자가 마주섰다.

“가기 싫다는 걸 억지로 끌고 갈 필요는 없습니다. 싫다잖습니까.”

“이 녀석이 싫대도 끝까지 끌고 갈 겁니다. 무력을 써서라도. 당신 옆에다 두는 것보다야 백배 나을 테니까.”

여유롭게 대꾸하자 은협은 잠시 생각하는 듯했다. 그는 쉽게 입을 열지 않고 기다리더니 선담의 남은 어깨에 손을 올렸다. 두 남자가 각자 어깨를 공유하게 나란히 서자마자 분위기가 더할 나위 없이 차가워지더니 지켜야 할 ‘선’이란 게 사라졌다. 차라리 몸으로 싸우는 편이 시원할 테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계집애들처럼 입으로만 쫑알쫑알 싸우느라 두 남자 성질이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은협은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그건 이놈이 판단하는 거지 당신이 판단하는 게 아닙니다. 싫다는 녀석 억지로 가지려들지 말고 좋게 말로 해줄 때 물러나시죠. 여기라고 당신이 저한테 쥐어터지지 않으란 법 없습니다.”

“성인이어서 모든 사람이 성인답게 판단할 수 있었다면 당신 같은 인간은 세상에 나지도 않았을 겁니다. 출자금 끊기고 싶지 않으면 닥치고 넘기는 게 좋을 텐데요.”

은협이 미간을 찌푸리자 백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출자금. 출자금 몰라? 네놈이 이 실험에 집착이 얼만한지는 안 봐도 훤하다. 이 녀석한테서 네 새끼가 보고 싶어 죽겠지? 실험 성공시키고 싶지 않아? 그러려면 스폰서가 필요할 텐데, 백람만한 곳이 이 땅에 또 있진 않을 거다. 그러니 알아서 잘 기어보란 소리 좀 했다.”

“아저씨!”

선담은 은협이 돌변할까 겁이나 그만하라고 외쳤고, 백진의 말에 은협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그 놀람이란 출자금 위기에 대한 충격이 아니라 다른 것에 있는 듯했다. 잠시의 정적. 은협은 비리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토시하나 안 틀리는구나. 너네 집안 씨들은 다 그러냐?”

“뭐?”

은협의 입에서 웃음이 뚝 끊겼다.

“돈 가지고 사람 쥐고 틀면…… 재밌어?”

은협의 표정이 보기 드물게 어그러졌다. 금방이라도 백진의 목덜미를 뜯어낼 것 같은 모습이라 선담이 기겁했다. 그의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리고 싶어서 “선배, 그게 무슨 소리야.”하고 간신히 끼어들었지만 은협은 무덤덤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언가 말을 더 하려다가 만 것 같아서 듣던 사람만 속이 탔다. 대신에 백진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뭔 헛소리야, 하고 중얼거리고는 선담의 뒤통수에 손을 갖다 댔다. 그러자 은협의 손칼이 백진을 쳐냈다.

“까불지 마라. 이 녀석은 못 데려가.”

“입 닥쳐. 네놈 목 하나 날리는 건 일도 아니니까. EEC에 붙어있고 싶으면,”

“잘려도 상관없어. 어디 한번 잘라보지 그래?”

백진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은협이 그의 다음 말에 더 놀랐다.

“그렇겠지. 네놈이 몰래 손 쓴 방법이 남아있을 테니까. 그렇게 되면 실험 없이 이판사판으로 덤비겠다는 거냐?”

은협이 굳은 얼굴로 묻는 눈빛을 하자 백진은 은협만 알아들을 수 있는 사인처럼 입모양으로 말을 건했다. ‘자연수정’ 그것이었다. 공기가 삽시에 차가워졌다. 두 남자 모두 인내심에 점점 밑천이 드러나서 힘들었다. 

은협은 손아귀에 힘을 바짝 주었다. 자신은 EEC의 최연소 연구원이었고 상대는 백람기업의 넷째아들에 후원위원장이었다. 도너를 데려가느냐 마느냐, 보내느냐 마느냐. 세살배기 어린애가 보아도 당연한 승부였다. 남은 것은 선담의 의지였지만 저 남자라면 선담의 의견을 무시해서라도 빼갈 것이었다. 무엇보다 자연수정 그것의 가능성을 알고 있는 자가 또 있을 줄은 몰랐다. 이성의 끝이 보이고 눈앞이 허예졌다. 그때 마침 길호문이 문 뒤로 고개를 내밀었다.

“이야기는 다 끝났나?”

약점을 잡힌 은협이 입을 꽉 다물자 백진은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길호문도 잘되었다며 소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선담아, 내가 네 짐 싸주라고 시켰다. 회장님하고 식구 분들께 폐 끼치거나 하면 안 된다. 알지?”

그러자 백진이 선담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리며 반갑게 웃었다.

“가자, 꼬맹아. 싫다고 하면 때려서 기절시킨 다음에 포대기로 업어 갈 거야.”

“아…….”

선담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제야 자신에게 다가온 꿈 아닌 현실이 눈에 보였다. 처음엔 가뜩이나 요즘 위태위태한 은협이 폭발해 난리가 날 것 같다란 걱정이 앞섰는데 이제는 이 지옥 같은 연구실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백진이 완강하게 나서주니 드디어 선담의 마음이 흔들린 것이다. 순식간에 뒤집힌 마음은 혹여나 길호문이 의사를 번복할까봐 선담으로 하여금 뒤늦게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다. 고개를 끄덕일수록 마음이 점점 더 절박해졌다.

그래, 백진이 혹여 변덕을 부려 다시 연구실에 돌아오게 될지라도 사람이 꼭 죽으란 법은 없다. 이미 경험하지 않았던가. 어차피 뒷일을 생각하며 살던 자신도 아니었다. 잠시라도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곳에 오고 며칠 동안 필사적으로 바랐지 않았던가? 왜 코앞까지 다가온 기회를 제 발로 차려 하는가? 바보같이 이번에도 은협선배와 소장님의 기세에 눌리려고? 기회가 있을 때 가야했다. 이곳에서 벗어나야 했다. 

선담은 점점 절박해지는 맘에 이윽고 백진의 재킷을 잡았다. 백진은 그런 선담을 쓰다듬으며 안쓰러운 눈을 했다. 

“녀석도 좋다는군요.”

“그래, 음…… 염치없지만 백진이 네가 위원회에 말 좀 잘해주었음 한다. 출자가 일정하기만 하면 도너가 좀 쉬는 것도 우린 괜찮아. 그간 다들 힘들었으니 휴가라고 하지. 그럼 얼마간 선담이 부탁 좀 하마. 실험이 고달팠을 텐데. 그래, 휴가도 괜찮지. 그래, 그래.”

이렇게 된 이상 변경사항은 없을 거란 생각이 들어 길호문도 점차 미련을 버리며 대꾸했다. 어느새 은협도 살기 띄우던 눈을 숨기고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금 당장 출발하겠다고 휠체어를 미는 백진에게 이끌려 소장실 밖으로 나가려던 도중, 선담이 은협의 가운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선배.”

“……….”

“조금만… 쉴게. 지금은 도저히… 내가 너무 힘들어서, 어려워….”

떠나는 주제에 쫑알쫑알 말이 많다고 생각했지만 은협은 그런 선담을 외면하지 않았다. 뱃속이 뒤틀릴 정도로 꼬였지만 그래도 자신에게 한마디라도 하고 가려는 선담이니 그나마 위안이 됐다. 그러니까, 이 자리에서 저 늙은이의 목줄을 틀어놓고 이 차기위원장이라는 놈의 가죽을 벗겨버리지 않을 정도의 위안은 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아야 했지만 지금은 수순을 밟는 쪽이 현명할 것이었다. 은협은 똑바로 눈을 마주치고 선담에게 당부했다.

“헤프게 굴면 안 된다.”

당황한 선담이 무어라 대꾸하려던 차에 백진이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비서진에게 휠체어를 맡겼다. 선담은 끝끝내 미련이 남았는지 뒤를 돌아보았지만 덩치 큰 비서들에게 둘러싸이자 곧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들고 온 구급상자를 꺼내 아까부터 백진이 거슬려한 선담의 붕대감은 오른쪽 손바닥을 살피기 시작했다. 

새 국면을 맞이한 연구실 분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길호문은ㅡ몰래 구경하고 있던ㅡ연구원들을 정식으로 소집하고 있었다. 아직 소장실에 남아있는 건 은협과 백진뿐이었다. 눈높이가 같은 두 남자는 한치도 양보 없이 서로를 견제했다. 은협은 어렴풋이 웃었다.

“어차피 또 보게 될 겁니다.”

“상관없습니다. 지금은 애가 망설여도 그때쯤에는 당신 따위 생각할 겨를도 없을 테니까요.”

어쨌든 선담을 옮기는 데에 성공했다. 이제 더는 연구에 관심 따위 없었다. 석재의 집과는 다르게 자신의 본가는 경비가 삼엄했고 최은협이 뚫고 들어올 자리는 없었다. 그깟 실험쯤이야 실험군의 건강을 핑계로 언제까지고 미뤄둘 수 있다. PTA사에서 인공자궁에 대한 소유권을 소송으로 건다고 하면 오히려 더 잘된 일이 될 테다. 그 참에 아예 인공자궁 자체를 백람의 소유로 가져올 수 있을 테니. 실마리가 보이자 선담에 대한 애정이 더욱 또렷해지는 자신을 느꼈다. 진작에 찾아왔어야 했다. 속이 다 후련하다 못해 깨끗해지는 기분이었다. 

그 쾌감에는 은협의 알 수 없는 표정도 한몫했다. 기세등등하게 선담을 끌고 간 놈이 보물을 다시 빼앗겨 애써 분노를 숨기고 태연한척하고 있으니 말이다. 백진은 아직도 피딱지가 남은 자신의 손목을 한번 훑어보고는 씨익 웃었다.

“걱정 마십시오, 최은협 씨. 연구실에서 해주었던 것 이상으로 잘 해줄 테니까요. 예뻐해 주고 아껴주고 뭐든지 다 해줄 겁니다. 먹고 싶은 건 다 먹게 해주고 가고 싶은 곳, 보고 싶은 것들도 죄다 들어주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조만간 이 비인간적인 실험에서 빼내어드리기까지 하죠.”

완벽한 도발이었지만 넘어갈 최은협도 아니었다. 그 또한 여유롭게 웃었다.

“글쎄요, 이 실험이 중단된다면 백람의 누군가도 타격이 클 텐데요. EEC를 후원하는 회원들은 개개인 사정이 대단히 급한 부류가 많죠.”

어쩐지 묘한 설명이었으나 백진은 은협의 도발에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서로 조금이라도 더 흠집을 주기 위해 바빴기 때문이다. 저 정도 가정쯤이야 바보도 한다. 네놈이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시간은 끝났다. 

백진은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난동을 부려준 덕분에 더 잘 알게 되었습니다. 녀석을 보살핀 시간이 처음엔 낯설었지만 결국엔 소중한 시간이었던 것 말입니다.”

은협이 조소했다. 

“겨우 두달 만에 반하고, 그 짧은 시간을 빌어 사람 맘을 빼앗겠다는 말씀이시군요. 그것도 지갑에서 나오는 용기입니까?”

“녀석과 제가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더라도 너무 괴로워하지 않으셨음 합니다. 선담이가 헤픈 게 아니라 제가 지극정성이라 가능한 일일 테니 말입니다.”

“속단하긴 이릅니다. 지체 높은 자제분께서 주변 압박을 견뎌가며 사내 녀석을 제대로 끼고 살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글쎄요, 선담이만 허락해준다면 제가 녀석에게서 자식을 보는 것도 괜찮은 일이라고 생각중입니다만. 같이 살다보면 녀석도 제게 정이 붙게 될 테니 말입니다.”

은협은 입을 다물었다.

‘자연수정.’

자신도 확인해보지 못한 그 확률싸움이 어떻게 이루어질지는 몰라도 상대가 만만치 않다는 직감이 뇌리를 스쳤다. 완력이나 권력의 둘레에서 벗어난 그것. 같은 수컷에게서 느낄 수 있는 압도적인 집착. 무언가에 빠지면 앞뒤 없이 달려들게 되는 그 행동력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소장실을 걸어 나가는 연백진의 뒷모습은 이미 한 사람에게 푹 빠지다 못해 눈에 뵈는 게 없는 그런 복에 겨운 남자의 뒷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은협은 그저…… 웃었다.

-

가장 먼저 자신을 반긴 사람은 생각지도 못한 석재였다. 

“선담아ㅡ!”

그 뒤로 눈에 들어온 것은 어마어마하단 소리밖에 나오지 않는 거대한 저택이었다. 처음엔 무슨 호텔이나 리조트인 줄 알고 백진에게 업힌 채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선담은 드넓은 정원 구석 벤치에 초조하게 앉아있는 석재를 발견했다. 때마침 석재도 백진과 선담을 발견하여 눈썹 휘날리게 달려왔다.

“선담아, 왔구나!”

“불곰….”

“선담아, 미안해. 내가 멍청하게 대처해서 그 무서운 데로 다시 끌려가게나 만들고 정말, 내가 입이 백 개라도…”

“불곰, 괜찮아. 나 괜찮아.”

그러나 괜찮다고 말하는 선담은 전혀 괜찮은 얼굴이 아니었다. 얼굴 전체가 전에 없이 거무죽죽했고 광대뼈가 툭 불거질 정도로 야위어있었다. 고작 3주에서 4주 동안 얼마나 고되었으면 애가 이 지경이 되었나 싶어서 멍청했던 자신에겐 물론이고 EEC 자체에도 분노가 올라왔다. 아무리 중한 실험이래도 그렇지 어떻게 이렇게 막무가내란 말인가. 

석재는 비서 중 하나에게서 짐을 뺏은 뒤 그들을 따라 들어갔다. 석재에게 짐을 뺏긴 비서가 백진에게 선담을 대신 업어드리겠다고 했지만 그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현관까지 차로 들어오려는 걸 선담이 바깥바람이 쐬고 싶다기에 걸어 들어오기로 했다. 헌데 따듯한 등에 업히고 코트를 두 겹이나 걸쳤는데도 허기가 져서인지 선담은 몹시 추웠나 보았다. 선담이 옆구리까지 덜덜 떨며 몸을 움츠리자 백진의 걸음이 더 빨라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나마 동선이 짧은 뒷마당으로 들어오는 건데. 

석재가 백진의 걸음을 성큼성큼 맞추며 선담을 들여다보았다.

“하나도 안 괜찮잖아. 너 지금 얼굴이 말이 아니야.”

“불곰….”

“응?”

“나 정말 바보 같다, 그치.”

백진에게 업혀있으니 조금 진정이 되는지 선담은 유례없이 빙긋이 웃었다. 그러나 그 눈꼬리만큼은 슬퍼보여서 석재는 농담으로 대꾸했다.

“조금.”

그러자 백진도 피식 웃었다. 두 사람의 등과 배가 찰싹 붙어있어서 서로의 감정변화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다시는 애기 따위 만들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는데, 그랬는데도 난 바보처럼 얼렁뚱땅 또 실험에 참가하고… 근데 어쩔 수 없었어…….”

“그래, 괜찮아.”

최은협이 자신의 소재를 찾아내고 백진을 그렇게까지 쥐어 팼으니 선담이 얼마나 놀라고 두려웠을지는 십분 이해했다. 석재는 점차로 가까워지는 백람의 본가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넌 너무 착해서 탈인 거야. 그뿐이야.”

선담은 고개를 저었다. 그 사이 백진이 선담을 한번 추어올렸다. 뒤따라오는 비서진은 마치 모델을 뽑아놓은 것처럼 덩치도 좋고 이목구비도 번지르르 했지만 선두에 서 있는 백진을 따라올 자는 없었다. 석재는 새삼 백진에게서 흘러나오는 소위 귀티에 배알이 꼴렸지만 사위를 보는 기분으로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이 백진이 현관에 당도하자 안에서 자동으로 문을 열렸다. 화려하게 장식된 현관문 너머에는 아무래도 일손으로 보이는 중년여성이 셋 서 있었다. 집안에서 기분 좋은 냄새가 났다.

“오셨나요, 백진 도련님.”

“어서 들어오세요.”

“네, 오랜만입니다.”

허리를 직각으로 구부리는 그녀들에게 백진은 고개만 대충 끄덕이곤 계단으로 향했다. 밖에서 얼핏 보았을 때 분명 5층 저택이었다. 설마설마했지만 정말로 백진은 선담을 업은 채로 5층까지 당도했다. 뒤에는 한치 흐트러짐 없는 비서진이 줄을 맞추어 따라 올라왔다(숨을 헐떡이는 건 석재밖에 없었다). 고급스런 나무장식이 정교하게 장식된 집안은 한마디로 일축해 대단히 위압적이었다. 통일된 가구와 그에 어울리는 꽃장식, 유리장식, 천정의 조명등과 커튼에서부터 벽지까지 어찌나 고급스럽게 통일되어 있는지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았다. 각 층마다 거실이 있었고 방은 수십 개였다. 

“2층은 부모님, 3층은 둘째형님과 막내동생, 4층은 셋째누님하고 다섯째가 쓰고 5층은 다 내 차지니까 꼬맹이 네가 좋을 대로 쓰면 돼. 당분간은 아버지 말고 다른 식구들은 네가 여기 와있는 것도 모르게 할 테니까. 아, 오랜만에 올라오니까 숨차네.”

오랜만에 왔다는 말과는 다르게 5층은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했다. 그들은 가장 끝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5층은 다른 층에 비해 방이 적었는데 어쩐지 백진이 주로 사용하는 곳은 이 방인 듯싶었다. 방은 깨끗했고 넓었다. 다만 5층만 어쩐지 다른 층들과는 분위기가 다르더라니, 백진의 방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고품격인 느낌은 없었다. 청결하기는 마찬가지였으나 보통 총각이 편히 지내는 방 같았다. 뒤따라온 비서 중 하나가 “도련님, 여기로 이 분 짐을 옮기시겠습니까?”하고 물었다. 백진은 선담을 침대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꼬맹아, 여기에 짐 풀자. 괜찮지?”

침대가 푹신했다. 난생 처음 누워보는 그런 감촉이었다. 부드러운 이불에 온몸이 푹 들어갔다. 따듯했다. 햇볕이 잘 들어오는 넓은 방이었다. 잘 말린 섬유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연구실의 소독약 냄새가 아닌……. 

코끝이 매워지려는 걸 선담은 간신히 참고 고개를 끄덕였다. 

백진과 은협이 나눈 이야기의 반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어느 순간에 그 지긋지긋한 곳에서 잠시나마 탈출했다는 해방감이 파도치듯 가슴을 두드렸다. 비서진이 물러나자 백진은 석재가 보든 말든 선담의 이마에 입술을 갖다 대었다. 너무 지치고 힘들어서 선담은 눈꺼풀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비로소 긴장이 풀어지고 저를 안아주는 향취에 안도감이 스몄다. 백진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넌 강해질 필요가 있어. 다시는 울지 마. 울게 하지도 않을 테지만 강해져야 너 스스로도 행복할 수 있을 테니까.”

결국 자그마한 얼굴 곳곳을 누비는 백진의 입술에 축축한 것이 닿았다. 뜨겁고 축축한 것이 어루만져주는 입술에 묻어났다. 선담이 눈꺼풀을 파르르 떨자 백진은 석재가 보지 못하도록 선담을 숨기듯 끌어안아주며 계속해 속삭였다.

“괜찮아, 꼬맹아. 이젠 아프지 않을 거다. 괜찮아…….”

- - - -

연백진은 멍하니 누워 천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넌 무서운 게 없어 보여서 인기가 좋은 거야.’

몇년 전 석재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다. 정확히 말하면 두 남자가 터놓고 지내게 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광화문에서 크게 열린 어린이인권 단체시위에 참여했다가 전경에게 제대로 두들겨 맞은 다음 날이었다. 백진은 팔이 빠져서 다시 끼어 맞추고 붕대를 둘둘 감은 채 경찰에 한번 출두했고 아버지 인맥으로 유유히 빠져나왔었다. 경찰측은 대기업의 사지 멀쩡한 강아지가 왜 그리 극성맞게도 시위를 주도했냐고 원망을 털어놓았고, 백진은 관계자들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도 시원하게 날려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석재는 친구들은 다 빼내오지 못했다고 담배를 벅벅 피우는 자신을 향해 쓴웃음을 날리며 그리 말했다(그때는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자신의 여성편력에 대해 말하는 줄 알았는데 돌이켜보면 남성편력도 포함시켜 한 말 같았다). 

‘가는 사람 안 잡고 오는 사람을 안 막아? 참나, 있는 자의 결례야.’

석재는 그렇게도 말했었다. 그때는 무어라 대꾸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자신은 분명 동의했으리라. 자신이라면 능글맞게 ‘잘 알았으면 있는 자를 모욕하지 말라’고 하고도 남은 인간이니까. 그러나 적어도 이 순간의 자신은 달랐다. 

백진은 ‘과거는 정말 과거일 뿐’이라고 생각하며 고륵고륵 잠든 선담을 은근슬쩍 끌어안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의 자신은 선담이 가겠다고 하면 필사적으로 잡을 것이고, 오겠다고 하면 두 팔 벌려 환영할 테니까. 

머리칼에서 솔솔 풍기는 비누냄새가 좋아 뒤통수에 코를 부비자 선담이 꿈지럭거렸다. 백진은 포기 않고 선담의 감긴 속눈썹을 손끝으로 살짝살짝 건드렸다. 숱이 많지 않지만 새치름하게 긴 속눈썹이 푸르르 떨렸다. 선담은 속눈썹을 자주 떨었다. 처음 여기로 와서 울음을 터트려버린 날은 눈물방울이 속눈썹에 맺혀 어찌나 달랑달랑거리는지, 석재 때문에 더한 건 참았지만 녀석이 정신없이 우는 걸 틈타 뽀뽀만 수백 번은 한 것 같았다. 백진은ㅡ스스로 닭살이라고 생각하면서도ㅡ선담을 깨울 요량으로 귓바퀴에 대고 속삭였다.

“아침 뭐 먹을까? 김치볶음밥 해주랴?”

“……아….”

정신없이 곯아떨어졌던 선담은 백진이 자신을 끌어안고 있다는 걸 느끼자마자 목석같이 굳었다. 그러더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푸하푸하 잘만 자던 자세를 바꿔 백진에게 등을 보였다. 슬금슬금 움직이면서 어느새 귀까지 빨갛게 물들이고 말이다. 가뜩이나 사람 놀리는 게 취미이자 특기인 백진은 이런 반응이 쓰러질 만큼 반가웠다. 이전에는 괴롭히면 꺅꺅 거리는 여자들이 귀엽다고 느꼈는데 지금은 그런 째지는 비명소리 따위 회상할 겨를도 없었다. 백진은 선담이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냉큼 부엌으로 나가서 방금 전 해놓은 김치볶음밥을 들고 들어왔다. 선담의 눈이 동그래졌다.

“미리 해놓은 거예요?”

“감격했냐? 사실은 내가 먹고 싶어서 했어. 좋아해?”

선담은 얼굴이 빨개진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백진이 식사 트레이를 올려주자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주황색의 따듯한 볶음밥에 계란프라이까지 덮은 정성어린 아침이었다. 선담이 머뭇거리자 백진이 숟갈을 쥐어주며 마주 앉았다. 아무래도 밥이 식기 전에 자신을 깨운 듯했다.

“잘 먹겠습니다.”

“더 감사한 말은 없어? 한입 먹여드릴게요, 이런 거.”

선담은ㅡ처음 만났을 때부터 쉬지 않고 진행된ㅡ백진의 희롱을 우아하게 무시하고 숟가락 가득 밥을 펐다. 일하는 사람을 쓸 성 싶은데도 백진은 하루 세끼를 죄다 직접 챙겨주었다. 언제나 맛이 좋았다. 백진이 해다 주는 것이라면 버터만 바른 식빵도 맛 좋기가 그지없었다(물론 그것은 정성들인 토스트였다). EEC에서는 늘 링거를 맞아 영양을 보충하거나 미음만 떴었다. 그나마도 최근엔 통 먹지 못한 탓에 백진이 해주는 가정식은 꿈같았다. 이제 막 이 집에 들어온 것이 일주일째라 아직은 목이 깔깔하고 입맛도 없었지만 한번 삼키기 시작하면 충족감을 느꼈다.

“맛있어요.”

“구체적으로 말해봐.”

“아… 프, 프라이 반숙이 좋아요.”

“또.”

“아, 음, 또 노른자가… 어…”

“됐다, 됐어. 보기만 해도 흐뭇하다. 자, 많이 먹어라.”

백진은 고개를 쭉 뻗어 볼을 우물거리는 선담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선담이 경직했지만 백진은 괘념치 않았다. 녀석을 데리고 온 것에 엉큼한 핑계가 아예 없었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것을 급급하게 숨기겠답시고 표현하고 싶은 제 마음 또한 돌려놓을 수도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녀석이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 알려주고 싶었다. 굳이 받아들여지지 않아도 실로 오랜만에 내게 활력을 넣어주어서 감사하다는 마음이 컸다. 늘 빈정거리고 삐딱하고 과격하기만 한 자신이지만 이번만큼은 다르다고 느껴졌다. 상대가 정말 특별하게 만난 사람이니만큼 더 그랬을지도 몰랐다.

“여기 밥풀 묻었네. 칠칠맞게.”

“어디요?”

“여기.”

백진은 직접 집어주지 않고 제 얼굴을 가리켜 선담이 따라하게 했다. 선담은 어설프게나마 백진이 가리키는 곳을 만져봤지만 사실은 백진이 정반대편을 가리키고 있으니 밥풀을 떼어낼 리 만무했다. 결국 그가 선담의 뺨을 손바닥으로 감싸며 밥풀을 떼어주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선담의 콧잔등에 도로 붙여주었다.

“자, 다시 잘 떼어봐라.”

콧등에 밥풀을 붙인 채, 선담은 시원하게 웃음 짓는 백진을 보고 멍하니 넋을 놓았다.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이목구비가 이토록 잘 빠진 사람은 처음이었다. 은협도 보기 드문 미남이었지만 그는 아무래도 차갑고 무정한 이미지가 훨씬 강했다. 눈매가 깊은 게 같아도 이렇게 다른 이미지를 가질 수 있구나 싶어서 잠시 멍해져 있다가 선담은 백진의 시선을 간신히 피했다.

ㅡ헤프게 굴면 안 된다.

은협은 자신을 연인으로 여긴다고 누누이 말해주었지만 선담은 이미 자궁의 문을 닫아버리겠다고 다짐한 뒤였다. 지칠 대로 지쳤을 때 한 맹세는 온몸으로 각인되어 있었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EEC로 돌아갔을지언정 그날의 그 다짐 때문에 몸의 뿌리에서부터 자궁이 새 주인을 거부하는 것이라 믿었다. 실제로도 실험은 난항을 거듭했으니까 이제는 이게 진실일 거라고. 자궁의 주인은 사라지고 그 자리는 비어 없어질 것이라고. 더는 열매도 없을 실험에 참여해 자신의 몸이 닳아 사라진다고 해도, 결국에 자궁은 죽어버릴 것이라고. 한달에 한번 배출되어 자동으로 소별한다는 난자도, 완벽하게 몸에 맞춰진 자궁도, 내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점차 퇴색해 사라질 것이라고……. 허나 그렇게 되면 이 연구에 모든 것을 걸었던 자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단지 그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선담은 가슴이 미어졌다.

“어서 안 먹고 무슨 생각하냐?”

“아, 먹고 있어요.”

“별로야?”

백진은 별생각 없이 묻는 말이었지만 선담은 깜짝 놀라 강하게 부인했다.

“아니에요, 맛있어요.”

백진에 대해 생각할 때엔 더더욱 가슴 한쪽이 울렁거림을 느꼈다. 그가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어주는 것에는 정말 눈물이 날 정도로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그러나 방심한 틈을 타 뺨이나 이마 등에 입을 맞추거나 가끔씩 접촉을 해올 때면 당혹스러웠다. 단순히 낯선 남자와 마주 닿는다는 기분보다는 이 사람의 속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동정하는 것일까? 그것이 아니라면 말 그대로 도너의 건강을 챙겨주는 것일까? 따질 처지가 아닌 선담에겐 무엇이든 그저 감사할 뿐이었지만 얼굴이 붉어지는 것까지 숨길 순 없었다. 이래도 괜찮은 걸까…….

일주일 전에는 미처 자각하지 못했지만 길 소장은 백진이 차기 후원위원장이라고 했다. 예전에 은협은ㅡ1104호 집에 자연스럽게 들어와 있던ㅡ연지애라는 여자가 후원위원장의 딸이라고 했었다. 이야기는 간단했다. 그녀는 백진의 누이동생이다. 선담은 이유 없는 긴장감을 놓을 수 없었다. 물론 자신도 죄지은 건 없었지만 그래도 그녀를 보고 아무렇지 않을 자신은 없었다. 속상할 게 분명했다. 

다행히 5층은 이 집 전체와 단절된 느낌이었다. 아래층에서 인기척은 있었지만 그 인기척이 5층으로 올라오진 않았다. 백진은 식구들이 선담의 존재를 모른다고 했다. 굳이 서둘러 알릴 필요도 없고 안정을 찾을 때까지는 조용히 있자고. 

어차피 5층 안에서 모든 의식주가 해결되니 몸이 불편한 선담도 아래층에 내려갈 일은 없었다. 그나마 한번ㅡ그러니까 제대로 짐을 풀고 이틀 뒤ㅡTV에서나 보던 할아버지 한분이 들어와 자신을 보았고 백진과는 왈가불가했다. 방밖에서 이루어진 소란이라 제대로 듣지는 못했지만 얼핏 들은 바로는 도너를 이렇게 데려와도 되느냐는 그런 얘기였다. 설마 저분이 다시 EEC로 돌아가라고 할까봐서 선담은 잔뜩 위축되었다. 허나 무슨 까닭인지 다시 들어올 때 그분은 싱글벙글했다. 반면 백진은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었다. 기분 나쁜 미소는 아니었지만 정확히 짚어 말하자면, 조금 음험했던 것 같다.

건강을 조금씩 회복하자 선담은 궁금한 것이 많이 생겨서 밥을 끼적이는 동시에 백진에게 조심조심 묻기 시작했다.

“근데 식구 분들은 다 바쁜 거예요…?”

“그건 아닌데 큰형님은 멀리 사니까 내가 집에 들어온지 모를 테고 둘째형님은 출장 중이고 다섯째도 일하느라 거의 나가살거든. 형수님이 계시긴 하지만 시동생 하나 있는 5층까진 안 올라오지. 내가 너 있다는 말도 안했고.”

“저… 여동생 분도 계시잖아요, 그 분은ㅡ”

“지애는 내가 못 올라오게 해. 들어오면 시끄러워서.”

“그렇구나….”

“왜, 소개 안 시켜줘서 섭섭해? 난 일부러 너 편하게 지내라고 그런 건데. 식구들 얼굴 한번 보고 싶어?”

선담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연백진이 든든하니 위태로울 게 없음에도 고통이 몸에 익어선지 안심하는 게 쉽지 않았다. 가끔씩 은협이 생각났고, 그럼 지애라는 이름의 그녀도 함께 떠올랐다. 만약 집안에서 마주치게 된다 해도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니 자신도 입을 다물고 있으면 되었다. 자신도 사실은 최은협이란 남자에게 오랜 시간 사랑받았었더라고, 그의 사랑을 의심한 적은 없다고, 그런 오기에 찬 말 따위 모두 묻어두기만 하면……. 하지만 가슴속 한쪽을 찌르르 울리는 동통은 자신을 괴롭게 만들었다. 

너무 한사람만 오래 사랑해서 그렇다. 

너무 한사람만 바라보고 그 사람에게 죄다 퍼다 주어서 그렇다.

‘선배…… 가지 마ㅡ….’

‘너와 내 새끼가 기형아라도 좋냐! 왜 안 되는 일가지고, 그깟 실험작 하나가지고 애를 먹이느냐고! 병신 같은 걸 낳아서 누가 좋으라고!’

선담은 눈을 질끈 감았다. 한동안 계속되었던 은협의 고함소리는 떠올리기만 해도 손끝이 차가워지고 등을 시리게 만들었다.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이렇게 좋은 대접을 받으면서도 마음 한구석은 뭉그러져있어 습기가 찼고 좀체 낫지 않았다.

우울한 분위기를 만들기 싫어서 선담은 가까스로 김치볶음밥을 한 숟갈 퍼 백진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작게 웃었다.

“햄 얹어주세요.”

“햄?”

“먹고 싶어요.”

계란까지 덮은 김치볶음밥 식단에 반찬은 없었다. 그러나 엉뚱한 주문에도 백진은 전혀 당혹한 기색 없이,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햄은 스팸밖에 없는데. 괜찮지? 얼른 구워줄게.”

백진에게 시비를 걸려던 선담은 깜짝 놀랐다. 그는 당장 나가서 음식을 장만해오려는 백진을 붙잡았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저 “뻥이었어요.”라고 말하려던 입에서 엉뚱한 말이 불쑥 튀어나갔다. 

“아저씨, 저 계속 여기 있어도 괜찮은 거예요……?”

일주일간 내내 마음에 품어둔 것을 물은 셈이었다. 의식하지 못하고 내뱉은 말이라 선담은 자신도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백진은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가 선담이 그릇을 거의 비운 걸 확인하곤 트레이를 사이드테이블로 옮겼다. 그리고 불안불안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선담의 두 손을 꽉 쥐어 잡았다.

“꼬맹아, 석재한테 들었어. 너 원래는 이렇게 소극적이지도 우울하지도 않은 녀석이었다며. 잘 웃고, 잘 먹고, 그런 아이였다며.”

“……….”

“아무리 PTA가 거대기업이어도 이젠 네게 함부로 손대지 못해. EEC도 마찬가지야. 수정을 위해서라면 아파도 어쩔 수 없다는 그런 임상실험조건도 이제는 소용없다. 앞으로는 네 안전이 최우선이고 수정이나 연구는 차후의 일이야.”

“……그래도 되요…?”

백진은 선담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에 가슴이 짜해져선 꼭 잡은 두 손을 자신의 목덜미에 두르게 했다.

“그래, 돼. 그러니까 어서 기운 차려라.”

백진은 여상하게 선담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절대 입술에는 가까이 오지 않았지만 그의 입맞춤은 깊고 진득했다. 은협도 늘 이렇게 해주었는데,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선담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왜 그래?”

“아니에요.”

선담은 자신의 뺨과 이마에 수없이 입 맞추는 백진에게 가만히 받아들이고 있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저한테 왜 이러시는 거예요……?”

“어?”

“EEC에서 데리고 나와 주시고 밥도 먹여주시고…… 이렇게 껴안아주시고……”

백진은 당황했다. 아무리 어리다지만 어쩜 이렇게 둔할 수 있는가. 나이 서른둘의 멀쩡한 남자가 중요한 실험군을 빼내오고 관심도 없던 단체의 위원장 자리까지 고수해가며 방 안으로 사람을 들인 이유에 달리 무엇이 있겠는가. 백진은 그제야 선담의 속을 눈치챘다. 이곳에 와서도 그가 질금질금 겁을 먹고 영 맘을 붙이지 못한 탓은ㅡ이곳에 온지 일주일밖에 되지 않았다는 이유보다도ㅡ자신이 베푸는 애정을 이해하지 못한 탓이 컸던 것이다. 백진은 꼭 말로 해주어야 아냐고 호통하려다가 지금만큼은 장난치면 안 될 것 같아서 조용히 속삭였다.

“말했잖아. 네 녀석 아프면 짜증난다고.”

“네……?”

“그건 네가 좋다는 뜻이잖아.”

커다란 베개에 파묻혀 백진에게까지 감싸인 선담은 그만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귓불은 물론이고 백진의 목덜미를 감싼 손끝까지 떨려왔다. 백진은 참았던 말을 뱉고야 말았다.

“네가 EEC에 끌려간 뒤 내가 어떤 기분이었는지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다. 그래서 널 데리고 온 거야.”

“아저…”

“너한테서 나는 체취도 좋고, 쫄아서 토끼같이 뜨는 눈도 좋고… 무엇보다 네가 하루하루 회복해가는 모습이 너무 좋아서.”

한마디 한마디를 조심히 고르면서 백진의 입술이 선담의 입술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는 몇 번이고 망설이고 망설였다. 닿을듯 말듯, 백진이 겨우 숨결만 맞부딪치고 있을 때 선담은 슬쩍 눈을 돌려 주변을 바라보았다. 처음 왔을 때부터 한결같이 방을 비쳐주었던 햇빛은 지금도 환하게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연한 회색으로 발린 벽지와 대부분의 가구가 짙은 남색인 이 방은 책과 액자가 많았다. 늘 꼼꼼히 살펴보는 신문이 쌓여있었고 조금 어수선한 DVD장이나 CD장, 넓은 책상에는 다양한 잡지가 많았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신기한 것이 많았다. 처음엔 모든 것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지만 백진과 방에서만 지내면서 점점 사람냄새가 배었다. 백진의 방은 그의 기질과 언뜻 잘 어울렸다. 가벼워 보이지만 사실은 짙었고, 조용하다가도 밝았다. 깊게 뜬 눈매만큼이나 거침없지만 사실은 배려를 할 줄 아는 사람. 최종적으로 백진에게서 느끼게 된 감정 같았다. 

입술표면만 겨우 스치며 키스할 분위기를 풍기던 백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 말까?”

“……….”

“하지 마?”

“……….”

“역시 지금은 아니야?”

“………. 아뇨.”

제대로 된 대답은 기대도 않았던 백진이 눈을 크게 떴고 선담은 고개를 수그렸다. 그가 자신의 배 위에 누운 이 상황이야말로 키스를 나누기엔 제격이었다. 선담도 인정해야했다. 머릿속엔 자꾸 은협이 맴돌고 일주일이 지난 지금도 마음 한쪽이 뒤숭숭했지만 그만큼 백진의 입술도 피하기 싫었다. 

“여기서 계속 살 거라고 말해, 꼬맹아.”

대답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전에 백진이 자신의 아랫입술을 슬쩍 물기에 그러지 못했다. 반쯤 벌어졌던 입술을 조심스럽게 당기더니 백진이 입술을 핥았다. 선담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입술과 입술이 마주 닿는 순간 꽃봉오리가 툭 터진 기분이었다. 과장이란 걸 알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도 알지만, 난도 당했던 심장이 조금씩이나마 다시 박동하는 느낌이 들었다. 혀가 들어와 혀를 불러내었다. 치아를 훑으며 백진이 숨을 뱉었다. 선담은 그의 손길에 저도 모르게 매달렸다. 자신을 강하게 끌어안아주는 그에게 모든 걸 다 잊고 안겨도 좋다고 여겼다. 

ㅡ헤프게 굴면 안 된다.

처음으로 이루어진 입맞춤은 길었고, 깊었다.

- - - -

선담이 백진의 방으로 들어와 짐을 푼 지 3주가 지났다. 처음엔 말린 쥐포처럼 바짝 골아서 피죽도 못 얻어먹은 꼴을 하고 있던 선담은 점차 회복했다. 연구실에서 마음고생이 극심했지만 편한 곳에서 안심하고 삼시세끼를 골고루 챙겨먹으니 몰라볼 정도로 나아졌다. 비록 생활반경은 대저택의 5층뿐이었지만 거실부터 부엌에 욕실에 침실에 화단까지 없는 게 없었기 때문에 선담은 너무 오래돼서 잊어버린 줄 알았던 평온함마저 되찾았다. 가끔씩 방문하는 석재는 때마다 신기한 보드게임을 챙겨다 주었고, 백진은 차근차근 설명해주며 선담과 온종일 놀아주었다. 아래층에서 사람이 올라오거나 EEC에서 연락이 오는 일도 없었다. 외부자극에 신경이 곤두선 백진의 가드는 완벽했다.

동시에 새싹이 돋아나듯 다시금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선담을 지켜볼 때면 백진은 난생처음 사내녀석에게 진심으로 발정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플 때는 차라리 골골 거리는 모습 때문에 안쓰러워서 키스도 겨우 했는데 선담이 회복될수록 어떻게든 건드려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톡 치면 활짝 만개할 것 같은 탐스런 꽃봉오리 같았다. 

선담은 이제 침대에서만 누워있지 않고 곧잘 걸어 다녔고 종알종알 말도 잘했다. 저가 아침메뉴를 정해서 도와주기도 했고 가끔씩 널브러진 책도 정리해놓았다. 방구석에 꾸며져 있는 미니와인바(bar)를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서성이기도 했다. 피자를 시켜먹자는 이야기도 하는가 하면 어느 날은 새벽에 일어나 배가 고프다고 냉장고를 뒤지기도 했다. 백진이 시비를 붙이면 소극적이나마 받아치려고 고군분투했다. 그러면서도 무심한척 대꾸하는 투가 영락없는 꼬꼬마였다. 예쁘다고 하면 입을 꾹 다물었고, 다시 연구실로 돌려보낸다고 겁을 주면 밤새 잠을 뒤척였다. 자다가 끙끙거리는 게 재밌어서 농담이었다고 정정하며 슬쩍 안아주면 그 다음부터는 푸하푸하 잠꼬대까지 하며 잘도 퍼잤다. 

조금만 아껴주어도 이렇게 금방 행복해할 정도로 소박한 녀석을 그간 얼마나 방치해두었음 이럴까 싶어서 가슴이 아팠다. 정말 귀여웠고 너무 사랑스러웠다. 처음 녀석의 부른 배를 만지고 기겁하고, 실험군으로서의 자각도 없이 투정을 부린다고 힐난하고, 제 의견도 못 펴는 못난이라고 구박했던 후회스런 기억마저 녀석에 관한 것이라 하나같이 소중해졌다. 강제로 떨어져 지내면서 초조함이 극에 달했을 때 자신의 마음을 확인했다고 생각했는데, 24시간 붙어있으니 주체 못하고 더욱 빠져들었다.

“아저씨, 우리 이거 해요.”

원래가 이렇게 뽀송뽀송하고 살가운 아이였다. 분명 그랬을 것이다. 처음부터 그럴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오랫동안 고문처럼 이어진 실험으로 인해, 그리고 버려지고 상처받았던 쓰디쓴 과거로 인해 숨죽어있었을 뿐이다. 점차로 돌아오는 선담의 진짜 모습을 백진은 읽을 수 있었다.

“할리갈리?”

작은 상자를 들고 가까이 온 선담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파에 늘어져 영화를 보고 있던 백진이 몸을 일으켰다. 사실 보드게임을 들고 온 녀석보다는 녀석의 차림에 눈이 더 갔다. 선담은 EEC에선 환자복차림으로만 생활한 듯했고, 덕분에 챙겨올 옷가지 따위는 없었다. 더욱이 녀석의 건강에만 신경을 쏟아 붓느라 의복엔 신경도 쓰지 않았던지라 백진은 본의 아니게 황홀한 구경을 할 수 있었다. 바로 자신의 헐렁한 파자마를 입고 있는 선담 말이다. 

넓은 집안 곳곳에 신기한 것이 많았는지 슬슬 기운을 차림과 동시에 선담은 기다렸다는 듯이 방안을 뒤지고 돌아다녔다. 그것도 백진의 트렁크와 큼지막한 웃옷만 입고 말이다. 작은 키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선담이 워낙에 말라서, 높은 신장에 허우대까지 좋은 백진의 못은 늘 헐겁다 못해 한쪽 어깨를 드러내게끔 만들었다. 어쩜 저렇게 무방비한지. 자기가 고백 받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건가? 하지만 그날 이후로 숱하게 키스해왔는데. 아직 도장만 찍지 않았달뿐이지 보낼 수 있는 사인이란 사인은 다 보냈다. 그런데도 선담은 허벅다리가 훤히 보이도록 허리를 구부려 신문을 집었고, 하얀 등줄기를 홀랑 드러낸 채 장식장 밑에 기어들어가 석재가 가져다 준 보드게임을 꺼내들곤 했다.

선담이 조금만 주위에 바장여도 금방 시선을 빼앗기는 백진은 잠시 딴생각에 빠졌다가 헛기침을 했다.

“순발력에 자신 있어?”

“네.”

“어쭈, 그래?”

“저 손 되게 빨라요. 이거 종 치는 거잖아요.”

“응, 어디보자. 같은 과일이 몇 개였더라.”

“다섯개요.”

백진은 “그랬나?”하고 대답하며 마주 앉은 선담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선담은 “방해하지 마요.”하고 대꾸하며 카드나누기에 전념했다. 탁, 탁, 탁, 탁. 목덜미에 코를 묻고 껴안아주는데도 무심할 정도로 할리갈리에만 집중하는 녀석이 얄미워서 백진은 심술궂은 목소리로 선담을 나무랐다.

“아무래도 한번 확인해 봐야겠다.”

“뭘요? 아, 한 사람당 26장 나누면 되겠네요.”

“네가 어디 안 아픈지 봐야겠다고.”

“안 아픈데.”

선담은 기어코 백진에게 카드를 쥐어주며 빠져나오려고 기우뚱거렸다. 예전부터 백진을 살살 꼬셨던 선담의 체취가 주변에 가득했다. 달짝지근한 살내 같은 것이었다. 입술에서만도 그렇게 만족스런 향취가 도는데 다른 곳은 어떨까. 그 생각만하면 목이 바짝바짝 말랐다. 일전에 고작 2달 좀 안되게 데리고 있었던 주제에도 선담 때문에 속 태운 일이 많아선지 백진은 조급증 걸린 사람마냥 안절부절못했다. 어쩌면 눈에 띄게 회복해 잘 익은 과일처럼 나아가는 선담의 모습에 더욱 취한 것일지 몰랐다.

백진은 선담이 든 벨을 뺏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네가 안 아프대도 네 몸은 모르는 거니까 검사는 주기적으로 해야 돼."

"소장님이 주신 약 다 먹어서… 괜찮을 거라고 했는데…“

“나도 의사야, 잊었어? 내 소견도 필요하지 않아?”

고통이라면 치가 떨릴 정도로 시달린 선담은 백진의 장난이 장난인지도 모르고 걱정이 됐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집에서 놀고 있지만 백진도 의사는 의사였다. 더욱이 그가 집에 붙어있는 이유가 오로지 자신 때문이라는 것이 상기되었다. 선담이 미약하게나마 수긍하는 빛을 보이자 백진은 그에게서 카드와 벨을 빼앗았다.

“혀로 한번 확인해봐야겠어.”

“혀요…?”

“그래, 한번 쭉 훑는 거지.”

선담이 경악하여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했지만 백진은 이미 선담을 안은 채 침대에 눕힌 후였다. 당황하여 몸을 방어하듯 백진을 밀어냈지만 그는 완고했다.

“혀로 뭘 확인하신단 거예요.”

“민간요법의 일종인데 의사들만 아는 남다른 맛이 있거든.”

“거짓말인거 티 나요.”

“거짓말 아니야.”

꿈지럭거리는 선담을 바짝 당겨 안으며 백진이 다리사이로 들어와 귓바퀴를 물었다. 

“아저씨, 할리갈리…”

선담이 자꾸 버둥거리자 백진은 안심하라는 듯 쉿ㅡ하고 큭큭 웃었다. 선담의 사타구니와 허리가 마주 닿았다. 얇은 트렁크 안에 무언가 달랑거리는 게 있는 것 같았지만 섣불리 손을 대지는 못하고 백진은 선담에게 키스했다. 조금만 길어져도 숨이 버거워 헐떡거리는 선담을 잡고서는 두툼한 혀를 죄 밀어 넣었다. 자신의 입안을 엉큼하게 쩝쩝 맛보는 행위에도 선담은 입을 벌리고 받아주며 낑낑거렸다. 잠시 입술을 떨어트린 백진이 “숨차?”하고 물었다. 선담은 고개를 저었다. 허나 사실은 숨찼다. 어렸을 때부터 은협과 입 맞춰 왔지만 긴 호흡을 따라가야 하는 키스는 늘 벅찼다. 백진은 입술이 벌개져선 빨간 혀를 살짝살짝 보여주는 선담을 주시하다 자그마한 혀를 꽉 물었다. 선담이 흠칫 놀라 혀를 쏙 집어넣자 다시 따라 들어갔다. 그는 선담의 몸 곳곳을 면밀히 신경 쓰고 있었다. 이렇게 야릇하게 대하면 무슨 반응이 있지 않을까 했는데 기대완 다르게 선담은 쉽게 아래를 세우거나 하지 않았다. 아침에 자동적으로 피가 몰리는 생리현상도 그 주기가 길어 거의 없는 듯했다. 잠에서 깨면 아래가 터질듯 팽창해 가끔은 직접 해결 봐야하는 자신과는 현격한 차이였다. 

“여기서 지내니까 어때, 좋냐?”

부드러운 머리칼을 쓸어올려주며 묻자 이번엔 선담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진은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실험군의 건강을 이유로 실험은 잠시 연기된 상태였고 백진이 마음만 먹으면 그 기간을 훨씬 연장할 수 있었다. 어차피 자국으로 분할되어 들어온 연구팀이었다. PTA의 권한은 실질적으로 근절되었다. 후원위원회가 없으면 그들은 재정을 감당할 수가 없을 것이다. 하물며 후원금의 40%를 독점하고 있는 백람이 손을 뗀다거나 하면 실험은 아예 무기한 잠정될 수 있었다. 때문에 길호문도 꼼짝 못하고 홍선담을 내준 것이리라. 어차피 아비지는 손자를 볼 수 있다면 웬만한 것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 것이고, 방법이 어찌되었든ㅡ그것을 숨기고서라도ㅡ인공자궁의 태아가 손자로 들어온다고 하면 뛸 듯이 기뻐할 것이었다. 지금으로서 자신은 선담과 한평생 함께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선담만 허락한다면 그 모든 게 영광이 될 것이었다. 

서른둘이면 혼기가 꽉 차지 않았냐며 가족행사마다 친인척에게 맞선자리 소개받는 것도 지쳤다. 사람 연이란 게 무조건 3년, 5년 만나야 정확해지는 것도 아니다. 2주 만에 결혼해서 잘 사는 사람도 있고 12년 연애해도 막상 결혼해서 불행한 자들도 있는 것이다. 백진은 그저 선담이 쑥쑥 자라 건강한 모습만 보아도 행복한 입장이라 마음을 굳혔다. 세 달 가까이 봐왔으면 고민의 시간은 충분했다. 아버지의 설레발에 애가 애를 낳아야 할 것 같은 상황은 조금 겁났지만 말이다.

백진은 선담의 머리칼이고 뺨이고 할 것 없이 훑으며 파자마 단추를 하나하나 풀었다. 옷 안으로 들어오는 손길에 신경 쓰느라 정작 단추가 풀려나가는지는 모르고 선담이 긴장했다. 아직 제대로 살이 붙지 않은 얇은 뼈가지가 아직도 손에 집혔다. 

“왜 자꾸 피해? 검사해보겠다는데.”

“검사하는 거 아니잖아요.”

“맞다니까.”

“혀로 검사하는 게 어딨어요?”

“민간요법이야. 엄마들이 애기 열재거나 할 때 혀로 하는 거 몰라?”

“거짓말….”

선담이 즉각 대꾸해왔다. 아직 선담에 대해 물어야할게 산더미 같은 백진은 그와 천천히 친숙해지는 걸 즐기며 언젠가는 들어야 할 질문들을 품어놓았다. 다만 아직은 심각한 질답시간을 벌이기보다 선담을 구석구석 살피고 싶었다. 백진은 끈질기게 피하는 선담을 보며 정색했다.

“정말이야. 난 소아과에서 중요한 애들은 다 혀로 체크했어.”

“………진짜요?”

거짓말이다.

“당연하지. 소아과 안 가봤어?”

“제가 다녔던 소아과는 안 그랬어요.”

“중요한 경우가 아니면 잘 안하니까.”

“……혀로 어떻게 확인해보는 건데요?”

“이제부터 직접 가르쳐줄게.”

어느새 파자마가 옷섶을 풀고 벌어졌다. 뽀얀하게 피어오른 가슴의 양쪽엔 동그란 유두가 달려있었다. 여자의 것이 아님에도 백진은 눈을 뗄 수 없었다. 늘씬하게 퍼진 쇄골 아래의 유두는 진한 분홍색에 부들부들해 보였다. 백진은 죽어있는 유두표면을 손끝으로 슬쩍 건드렸다. 동그란 유두가 천천히 부풀어 올랐다. 통통했다. 선담은 눈을 멀뚱히 뜨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백진도 그것을 주시했다. 분홍색 젖꽃판은 자신이 알고 지내던 다른 이들의 것보다 넓은 편이었다. 그래서 더 예뻤다. 유두가 탱탱하게 부풀어 오르면 엄청 야할 것 같았다. 백진은 선담의 유두를 바짝 세워놓고는 그대로 배의 상처를 쓰다듬고 배꼽을 훑었다. 이윽고 헐러덩한 트렁크를 슬쩍 내리려는 찰나에 선담이 손을 잡았다.

“어, 잠깐…!”

“응?”

“거긴 왜요.”

“기왕 하는 거 제대로 해야지.”

선담이 재차 그를 막았다. 눈을 크게 뜬 것으로 보니 정말 당황한 듯했다. 

“그래도, 근데 그쪽은…”

“자궁이 이쪽에 붙어있는 거니까 더 중요한 거잖아.”

“어, 어쩌시려고요.”

“넌 편히 누워있으면 된다니까.”

부드럽게 달래보아도 음흉한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선담은 자꾸 뒤척였다. 이게 무슨 의사놀이 하는 것도 아니고. 다루기 까다롭다고 생각하면서도 백진은 슬슬 웃었다. 제가 덮치겠다고 하면 알아서 벗어주었던 여자들과는 완벽하게 달랐다. 그녀들이 값쌌다는 소리는 아니지만 선담이 다른 것은 사실이었다. 

‘연백진 씨, 당신은 의사가 소중히 가져야 할 기본이 빠진, 그저 객기에 찬 인간입니다.’

“……….”

정말 힘들었던 시기에 찾아온 선담은 자신을 의사로서 본분을 다하도록 만들었던 첫 손님이었다. 모든 걸 버리고 다시 시작해야 할 시간을 기다리던 자신에게 석재가 소개시켜준 귀여운 손님이었다. 그때 선담을 만나지 못했으면, 석재가 소원 들어주기 따위를 운운해가며 자신을 묶어주지 않았으면, 자신은 여전히 거대한 원룸에 혼자 살면서 밤새 악몽에 시달리거나 시도 때도 없이 머리를 싸매고 있었을지 모른다.

“어이쿠, 젖꼭지가 무지 예쁘네.”

“아, 아저씨.”

백진이 편히 누워있으면 된다고 했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그게 쉽지가 않았다. 파자마가 풀어 젖혀지고 백진이 자신의 가슴까지 만졌다. 그 바람에 창피하게도 유두가 곤두섰다. 방법이 이상하긴 했지만 그래도 검사 중이라는데 어쩐지 몸 한쪽이 야릇해지는 것 같아서 선담은 당혹했다. 그가 속옷까지 벗겨버리려고 하니 더욱 놀랐다.

“괜찮으니까, 거기는 막, 괜찮아요.”

“뭐라는 거야?”

“그러니까 거기는 싫어요. 보여주기 싫,”

“어허, 선생님이 좀 보시자는데.”

허나 백진도 고집이었다. 선담이 유산 후 의식을 잃었을 때 그곳에 약을 발라준 적이 있지만 그때는 솔직히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었던 지라 무효였다. 정신을 차리고 약을 발라줄 때에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한번인가 들여다보았나? 그때도 분명 치료를 빙자했던 자신이었다. 이쯤 되니 백진은 누가 쫓아오는 것처럼 조바심이 났다. 본능처럼 녀석의 은밀한 곳이 보고 싶었다.

“싫은 게 어딨어? 내가 제대로 봐야 알지. 너 예전에도 내가 약 발라줬잖아.”

“……혀로 하지는 않았잖아요.”

“말 많네.”

말하는 도중에 백진의 손가락이 은근슬쩍 허벅지와 트렁크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것이 둥그런 고환에 닿았다. 선담은 화들짝 놀랐지만 백진이 하도 집요하게 굴어 더는 말릴 배짱이 없었다. 선담이 안절부절못하면서도 자신을 밀어내지 못하자 백진이 조심스럽게 고환을 주물렀다. 정말 부들부들했다. 벌어진 허벅지가 푸르르 떨렸다. 남은 손으로 허벅지를 쓰다듬어주며 트렁크 안으로 아예 손을 집어넣었다. 워낙에 헐렁해서 손에 잡힌 것을 밖으로 쉽게 드러낼 수도 있었지만 그럼 선담이 도망갈 것 같아서 속 안에서만 만졌다. 선담의 뺨이 빨개지는가 싶더니 고환 위의 것이 점차로 부풀기 시작했다. 유두가 부풀었던 것과는 다르게 조금 느렸지만 백진이 손으로 감싸주자 튀어 오르듯 힘을 받았다. 선담이 당혹스런 눈으로 시트를 말아 쥐었다. 

“연구실에서 다친 데는 없나 꼼꼼히 확인해봐야지.”

“아무데도 안 다쳤…”

선담은 말을 잇지 못했다. 백진의 손가락이 자신의 분문을 슬쩍 건드렸기 때문이다. 선담이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자 백진은 스치듯 만졌던 곳을 능청스럽게 만지기 시작했다. 주름을 세듯 손끝으로 빙글빙글 돌리며 꾸욱 누르기까지 했다. 그가 이러는 것이 정녕 몸상태를 확인하는 과정인지 그것이 아님 음흉한 속셈인지 함부로 판단을 내리지 못해 선담이 소심하게 아래에 힘을 주었다. 

“건강한 것 같기도 하고……. 역시 눈으로 봐야 알겠네.”

백진은 아까부터 눈독 들였던 탱글한 유두를 혀에 품었다. 아래에 신경을 쓰느라 방심했던 가슴께가 발칵 놀랐다. 젖꽃판 주변을 간질이며 유두를 적셔주자 손안에 쥔 성기가 움찔움찔 움직였다. 시트를 쥐고 있던 선담이 백진을 잡았다. 그만두라는 표현 같았지만 백진은 마침내 속옷을 잡아당겨 완전히 내려버렸다. 

“잠깐, 아저씨…”

햇빛을 받아 하얗게 피어오른 선담의 나신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것도 성기가 부풀어 발갛게 익은 모양으로. 진분홍색 고환과 반듯한 성기는 끝이 동그랗게 다듬어져 보기 좋았다. 눈요기만으로도 충분할 정도였다. 무엇보다 회음 아래의 분문은 가지런한 주름이 모여 쏙 말려 들어가 있었다. 그 자리가 불그스름했다. 침이 꼴깍꼴깍 넘어갔다. 검사를 한다느니 어쩐다느니 했지만 사실 ‘혀로’ 검사하겠다는 엉큼한 기대감을 품고 있었던 만큼 백진의 시야가 번들거렸다. 아까 적셔놓은 선담의 왼쪽 가슴께에서 타액이 주룩 흘렀다. 선담은 아직도 이게 맞는 건지 아닌 건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이대로 신사답게 이불을 덮어주자니 눈앞에 일어나있는 녀석의 분신이 아쉬웠다. 결국 백진은 동그란 귀두를 잡아당기며 그를 놀렸다.

“야 임마, 이게 왜 섰어?”

선담은 온 얼굴이 새빨개져선 어버버버 더듬었다.

“의사선생님이 좀 주물렀다고 이거 너무 한 거 아니냐?”

당신이 건드니까 그런 거 아니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다. 가뜩이나 가장 약한 구석을 백진이 잡아당기고 있으니 더 했다. 백진은 아주 작정하고 선담의 성기를 손안에 가득 쥐고 위아래로 흔들기 시작했다. 이러니 선담도 튀어나오는 신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침대 위가 달콤한 유취와 가쁜 숨소리로 가득했다. 입술로 유두를 감싸고 혀를 놀리자 숨소리 속에 신음성을 섞었다. 벌써부터 손바닥이 미끈하게 젖었다. 하얀 배위로 진하디진한 체액이 뚝뚝 떨어졌다. 선담의 허리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쪽쪽 빨리는 가슴팍이 오르내렸다. 목줄기를 물어 연한 살을 물들이고 유두 주변을 잘근잘근 씹었다. 

오랜만에 받는 농밀한 애무에 선담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떨림을 참을 수 없었다. 이제는 확실해졌다. 백진의 검사 어쩌고는 다 핑계라는 것. 그도 남자라서 어쩔 수 없이 자신에게 욕정을 느낀다는 사실을. 긴가민가했지만 확실해지고 있었다. 이래도 괜찮은 건지 아직 확신이 서지 않은 머리와는 다르게 가슴은 쉼 없이 두근거렸고 몸은 그에게 활짝 열렸다. 은협의 얼굴이 자꾸 스쳐지나가면서도 이렇게 따듯한 손길을 받는 게 너무도 오랜만이라 끝없이 설렜다.

유두 양쪽을 죄다 적신 백진은 선담의 허벅다리를 들어 올리고 찔끔찔끔 사정하는 성기까지 핥아 올렸다. 아이스크림 먹듯 혀를 넓게 펴 쓸어들이자 드디어 선담의 허리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손보다는 입으로 하는 것에 약한 것 같았다. 백진이 자신의 분문에도 눈독 들이고 있다는 사실은 인지 못하는지 선담은 힘을 줄 때마다 그곳을 움찔거렸다. 늘 애 같기만 하고 환자 같기만 하고 동시에 얌전하기만 하던 녀석이 이렇게 흐트러지자 백진은 흥이 돋았다. 애무는 삽입직전의 짧은 전희라고만 생각했던 자신이 무색하게 그는 선담의 몸에 집중했다. 꾹 다문 입새로 선담이 자꾸 끙끙 앓았다. 조금은 소리를 내주어도 괜찮을 텐데 입을 악다무는 통에 아까운건 백진이었다. 아예 성기를 입안에 담아 혀를 굴리자 선담이 그를 거칠게 밀어내려고 했다.

“아, 아저씨ㅡ…!”

입안에 뜨거운 것이 확 끼쳤다. 백진의 울대가 꿀꺽, 하고 요동했다. 남자의 정액이 맛있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백진에게는 입맛을 돋우는 맛이 났다. 선담은 입안에 죄다 쏟아 보내는 와중에 몸을 빼내려고 필사적으로 허우적댔으나 백진은 봐주지 않고 나오는 걸 죄다 마셨다. 선담은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백진이 입에서 놓아주었을 때 비로소 수축한 성기가 털렁 떨어져 나왔다. 쪽쪽 빨아들인 탓에 성기가 빨갰다. 백진은 하얀 배에 떨어졌던 정액도 혀로 깨끗이 닦아 올렸다. 아이를 들어냈던 상흔을 정성스럽게 핥고 배꼽에 타액을 가득 받았다. 갈비뼈가 보이는 옆구리에 키스하고 봉긋 선 유두를 손으로 주물렀다. 

“검사 끝.”

능청스럽게 웃는 백진을 맹렬하게 노려보고 싶었지만 그의 입에 파경까지 해놓은 주제에 마냥 뻔뻔할 순 없었다. 선담은 불긋한 얼굴을 숨기며 발목에 걸려있던 트렁크를 추켜올렸다. 타액으로 번질거렸지만 어차피 씻으면 되었고 지금은 몸을 가리는 게 중했다.

“놀랐구나.”

“아, 아뇨. 괜찮아요. 괜찮, 아요.”

백진은 헐레벌떡 옷을 챙기는 선담이 귀여워서 유두를 꼬집어 당겼다. 파자마 단추를 한칸 밀려 채우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선담은 백진에게 다시 가슴을 내주고 말았다. 그리고 눈을 내리깐다는 것이 백진의 국부를 보고 놀랐다. 지퍼를 부슬 기세로 부풀어있는 아래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 순간 백진에게서 풍기는 야성적인 냄새에 겁이 났다. 4년 만에 은협과 맺었던 삽입은 순전히 강제였고 피를 많이 흘렸다. 너무도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얼마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두렵기는 그지없었다. 이렇게 애무 받고 흥분하다보면 백진도 자신의 몸속에 들어오고 싶어 할지 몰랐다. 그럼 또 아프지 않을까? 싫다고 하면 아무도 없는 이런 방에서 백진도 무력을 사용하지는 않을까? 몸속에 강제로 이물질이 침투한다는 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두려워할 일이었다. 그 생각만 하면 두려움으로 심장이 쿵쿵 뛰었다.

“아저씨.”

“응?”

“저…… 이런 거 꼭 해야 돼요?”

찔끔 놀라서 백진이 고개를 들었다. 선담은 어느새 눈가가 축축해진 채로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직장에 이물질을 삽입하고 심하게 마찰한 흔적이 있다. 수란관 바로 아래의 장기가 꽤 다쳤어.’

서인표가 해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녀석이 최은협에게 폭행을 당했다란 사실을 인지하고는 있었다. 3개월이 넘어간 일이라지만 직접 당해본 사람에겐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테다. 백진은 순간 아차하는 생각이 들었다. 녀석이 귀여워서 조금만 만져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뿐인데 놀라게 했나 싶어 걱정됐다.

“놀랐구나, 꼬맹아.”

“……….”

선담은 고개를 끄덕이지도 가로젓지도 않았다. 그저 시트를 꽉 쥐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백진은 그런 선담을 껴안을까 말까 망설이다가 간신히 가슴에 품어 안고 등을 두드렸다. 

“호기심도 아니고 장난도 아니야. 너 같은 어린애가지고 놀 나이도 아니고.”

“……….”

“네가 정말로 좋아서 그런다. 꼬맹이 네가 좋거든. 많이 좋거든.”

선담은 대답 없이 그에게 조용히 안겨있었다.

“그래서 네가 어서 빨리 나아서 내 맘도 받아주고 무럭무럭 자랐으면 좋겠다. 그리고…”

백진은 말끝을 흐렸다. 언젠가는 이렇게 말할 때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선담에게 접근하는 속도가 조금은 빠르다고 자각하고 있었지만 그보다는 어서 선담이 자신의 아이를 가져서 실험에서 완벽하게 벗어나기를 바랐다. 인공수정이든 자연수정이든 상관없었다. PTA의 제약을 받지 않는 EEC정도야 단번에 부숴 없애버릴 수 있으니까. 그래서 조만간 말하려고 했다. 선담을 온전히 데리고 있으려면 이 고백이 정말 급하니까. 

백진은 숨을 깊게 내쉬었다. 막상 입 밖으로 꺼내려니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힘들었다. 선담이 과연 어떤 얼굴을 할까. 그것도 걱정이었다. 

“그리고……”

백진은 말을 더듬는 건 선담 하나면 충분하다고 여기며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나랑 아기 낳고 같이 살자. 평생 입에 담고 다니면서 잘해줄게.”

- - - -

‘선배, 아파. 그렇게 하면……’

그때 자신은 아마도 이제 막 열다섯살이 된 선담의 몸을 탐하느라 바빴던 것 같다. 바라마지않고 오랫동안 열망했던 일이라 자신은 대범했지만 처음인 선담에게는 당혹스런 일이었을 테다. 아직 덜 자라 여물지 못한 몸 구석구석은 자신이 오랜 시간 상상해왔던 것보다 훨씬 보드랍고 푹신했다. 덕분에 여린 피부가 헐 것같이 빨개졌는데도 무던히 핥아댔다. 가끔씩 터져 나오는 신음과 무어라고 자꾸 장알장알 가로막는 녀석에게 수백 번 키스했다. 목덜미와 쇄골에, 유두와 배꼽 주변에, 허벅지와 종아리, 그리고 자신이 가장 열렬하게 움직일 수 있게 만든 선담의 그곳에도 무수히 입 맞췄다. 자위도 얼마 해본 적 없는 선담을 진이 빠지도록 사정하게 만들고 쾌감에 떨게 했다. 몇 년 전 일일까. 벌써 햇수로 8년이 지났다. 정말이지, 사랑스러웠는데.

여덟 살이란 나이 차 때문에 시작은 어려운 일이었지만 망설임은 없었다. 지긋지긋한 보육원에서 도망쳐 나올 때 자신이 끝까지 챙겼던 것은 선담 하나였고 그 결과 저희들은 빈곤하게나마 함께 살 수 있었다. 그 대가로 선담의 몸을 바란 건 아니지만 무엇보다도 달콤한 과일 같아서 어느결에 집요하게 선담을 바라보는 자신을 발견했다. 몸이고 마음이고 할 것 없이…… 참 달았다.

“오빠, 무슨 생각해?”

“……….”

멍하니 침대에 기대 담배를 태우던 은협이 문득 소리 나는 쪽을 돌아보았다. 아침부터 1104호로 찾아온 연지애는 아버지껜 도서관에 간다고 거짓말하고 여기로 왔다며 무슨 자랑이라도 되는 양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애정도 없고 증오도 없는 관계라 플러스마이너스 되는 부분이 없는 여자였는데 연백진이란 놈을 만나고 나서인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자본줄인 백람의 딸내미라고 해서 끼고 있었지만 그 오빠라는 놈이 선담을 채갔으니 이건 뭐 마진도 남지 않는 장사였다. 은협은 대답 없이 새 담배를 꺼내들어 불을 칙 붙였다. 남매가 닮은 부분이 없는 것이 그나마 이 여자에겐 다행이리라. 

“오빠, 담배 좀 그만 피면 안 돼? 어쩜 사람이 그렇게 골초야? 실험 잠깐 중단됐다고 그게 그렇게 배가 아파?”

“………. 그 얘기 누구한테 들었어.”

“오빠가 전상목 팀장님하고 통화할 때 몰래. 도너 어디 갔어? 안 그렇게 생겨가지고 도너가 좀 뺀질대나봐. 저번에 보니까 엄살도 좀 피우는 거 같고, 실험에도 적극적이지 않은 것 같고. 도너 때문에 중단된 거야? 좀 그렇다.”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했지.”

“……왜 나한테 뭐라고 그래?”

째지는 연지애의 목소리가 성가시다고 생각하며 은협은 아까 하던 생각을 이어나갔다. 

어차피 후원위원장이 그놈으로 교체되면 연지애가 연의범의 막내딸이자 물주라는 개념도 상실하게 된다. 그놈이라면 홍선담이 몸담고 있는 EEC를 제대로 후원해 줄 테니까. 그럼 더는 길호문에게 주문받은 대로 연지애를 시켜 연의범에게 이것저것 졸라 EEC에 무엇을 해 달라, 뭘 더 해 달라, 요구할 일도 사라지지 않겠는가. 자신이 굳이 연지애와의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 아닌가. 그깟 자금줄이 뭐라고 여기서 이 계집애의 인형노릇을 더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어차피 자금줄의 권한도 그놈한테 넘어간 마당에.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연지애를 밀쳐낼 수도 없었다. 여기서 그녀와 끝을 본다면 지금 홍선담이 자리하고 있을 백람의 저택에 방문할 구실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연백진은 위급 시 EEC에 연락을 취하겠다고 했지만 그 선발단에 자신이 들어갈 확률은 희박하다 못해 제로에 가까웠다. 그러니 다른 방법으로 저택에 들어가야 했다. 홍선담을 만나 무엇을 할지도 아직 제대로 정하진 않았지만 막연히 다른 놈에게 빼앗겨 두 손 놓고 지켜볼 수는 없었다. 다시 데리고 와야 했다. 그간 많이 아팠다는 녀석의 마음을 풀어주고 다시 자신의 품으로 돌아오게끔 만들어야 했다. 얼른 더 예쁜 아기를 만들자고. 너와 내가 그토록 원해왔던 아기 아니냐고. 

하지만 지금은 자신도 육체적으로 지쳐 휴식이 필요했다. 어차피 홍선담을 끌고 와도 지금으로서는 놈의 감시망에 걸려 실험을 시작할 수도 없을 테였다. 어디서 샌님 같은 게 끼어들어 일이 이따위로 돌아가나 짜증이 났지만 조만간 홍선담을 다시 뺏어오면 그걸로 끝 아니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헤프게 굴지 말라고 당부해두었다. 그래, 그간 고생한 게 있으니 좋은 곳 가서 좀 쉬고 오라고 하는 것도 괜찮겠지. 그래도 속이 영 답답하니 거북해서 은협은 재떨이 가득 꽁초를 쌓았다. 

“오빠, 무슨 생각 하냐니까? 나 왔는데 안 놀아줘? 심심해 죽겠는데.”

은협은 장초를 비벼 끄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너 집에 누구 들어가지 않았어?”

“응?”

“한… 한 달 전에.”

“몰라.”

“연백진이라고.”

지애가 오히려 “백진오빠가?”하고 되물었다. 은협이 짜증 섞인 한숨을 쉬는 것도 모르고 그녀는 신나서 떠들어댔다.

“백진오빠 집에 잘 안 들어오는데? 언제 들어왔지?”

“한 달 전일 거라고 했잖아.”

“하긴 오빠 집에 잠깐 와도 마주칠 일이 거의 없어. 우리 가족이 다 그렇지 뭐. 생활반경이 다들 제각각이니까. 그래도 너무하네… 어떻게 인사도 안하지? 오빠는 어떻게 알았어?”

은협은 다시 부답했다. 연지애는 그런 무심함에 익숙한지 신경 쓰지 않았다. 

큰오빠와 둘째오빠는 터울이 컸고, 넷째오빠인 연백진은 제멋대로에 사고뭉치인데다, 막내오빠는 4차원이라고 불리는 사람인지라, 연지애는 외간남자에게 품은 환상이 굉장했었다. 그리고 그 환상이 정확히 꽂혀 들어간 자리에 최은협이 있었다. 스물여섯이나 됐으면 철 좀 들라는 소리를 들어야 마땅할 환상이었지만 그녀는 백람의 막내딸아이였고 모든 것이 용서되는 입장이었다. 그러니 그녀가 잘빠진 마네킹 같은 최은협에게 끌린다손 치더라도 제 아비조차 막아서지 못했다. 그녀는 은협이 밤새 피워대 산처럼 쌓인 재떨이를 비워주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제 한번 너희 집에 들러야겠다.”

“응?”

“두번 말 안 한다.”

“오빠, 정말이야?”

지애가 재떨이를 내팽개치고 은협에게 달려들었다. 은협은 바닥에 떨어진 꽁치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지만 정확히 해야 했기에 그녀를 외면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방문하다는 의사는 확실히 해두어야 하니까. 신이 난 그녀는 다시 물었다. 

“그럼 우리 엄마랑 아빠한테 인사드리러 오는 거야?”

은협은 “그건 아니고.”라고 짤막하게 대답한 뒤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봐야 할 사람이 있으니까.”

- - - -

ㅡ나랑 아기 낳고 같이 살자. 평생 입에 담고 다니면서 잘해줄게.

선담은 쉽사리 잠을 이루지 못했다. 뒤에서 자신을 끌어안은 남자는 태평스럽게 고른 숨을 내쉬는데 자기만 밤잠을 헤매는 것 같아 약간 억울하면서도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사실 백진의 입안에 사정을 하고나서 바로 그런 고백을 받을 줄은 몰랐다. 이런 새털가슴을 지닌 자신이 헤프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왜일까. 사실은 너무도 낭만적이었다. 볕이 드리운 시트위에서 따듯하게 안아주고 다정하게 속삭여주는 사람에게 달리 무엇을 더 느낄 수 있을까. 

눈물이 날 정도로 행복했다.

아픈 눈물이 아니라, 정말로 행복에 겨워서 흐르는 눈물. 도대체 몇 년 만이었을까ㅡ….

보육원에서 탈출시켜주고 늘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아껴주었던 은협도 있는데, 그런데도 그것이 너무 오랜 시간 퇴색되었는지 살아생전 처음으로 애정 담긴 고백을 들은 것 같았다. 몸이 너무도 지쳤기 때문에 더 달콤하게 들렸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체감하게 된 기쁨은 상상을 초월했다. 어찌나 심장이 뛰는지 잠을 이루지 못할 지경이었다. 

선담은 조심조심히 뒤를 돌아누웠다. 자신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잠들어있는 백진과 얼굴을 마주보았다. 달빛을 받아 그의 높다란 콧대가 은빛 선율을 그리며 뚝 떨어졌다. 그 빛의 양옆에 누운 눈썹은 날카롭게 뻗어있었고 속눈썹은 자신보다 더 풍성하고 반듯이 덮여있었다. 시원하게 웃음 짓는 담백한 입술은 굳게 다물려 있음에도 다정하게만 보였다. 처음 보았을 땐 눈빛이 포악하고 이목구비가 건들거린다고만 느꼈는데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점차 의초로운 인상이 그의 피부위로 드러났다. 

ㅡ네가 정말로 좋아서 그런다. 꼬맹이 네가 좋거든. 많이 좋거든.

선담은 백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그의 품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러자 백진이 깨어나 선담을 다시 보듬어 안았다.

“왜 못 자고 있어….”

잠에 잠긴 목소리는 태평했지만 세심했다. 선담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턱아래에서 고개를 도리도리했더니 백진이 가렵다고 큭큭 웃었다. 다시 주변이 조용해져서 선담도 눈을 감았다. 백진의 심장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쿵덕쿵덕 뛰었다. 이제는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백진이 물었다.

“통상적으로 대답은 언제까지 기다리는 거지? 일주일? 한 달?”

“……네?”

“같이 살고, 아기도 낳고…… 그 말에 대답 안 했잖아.”

“아…….”

선담은 복잡한 심정이 되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황홀한 이야기라 잠시 멍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보다는 이대로 백진의 뜻에 따르면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지에 의문이 들었다. 백진의 말에 의심을 품었다는 게 아니라, 자신이 정말 그래도 되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이대로 그와 함께하면 EEC에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고 실험이 마무리되는 것인지가 궁금했다. 자신이 품은 자궁은 어떻게 되는 건지도 정확히 알아야 했다. 은협이야 이제 그녀가 있으니까 자신을 허심탄회하게 보내줄 지 모르겠지만, 그럼 예전에 연인이었던 두 남자가 한 집안에 각각 편입되는 것인데 그게 윤리적으로 옳지 못한 게 아닐까하는 걱정도 들었다. 때문에 그 자리에서 바로 대답할 수 있는 반가운 고백임에도 고개마저 미약하게 끄덕이지 못했다. 

선담은 계속 갈등했다. 백진은 그런 류에 조바심을 내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선담의 가르마에 대고 세상이라도 다 가진 양 느긋하게 속삭였다.

“뭐… 너 여기다 가둬놓고 대답해줄 때까지 기다릴 거니까 서두르지 않아도 돼.”

“……….”

“뭐야, 설마 싫냐?”

“아, 아니에요.”

선담은 고개를 들어 백진과 마주보았다. 서로 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웠다.

“그게 아니라…… 애기를…… 애기를 가지기 싫어요, 아저씨.”

백진이 당혹한 눈을 했다. 그것에 선담은 놀라서 말을 빨리했다. 그러니 더 더듬게 됐다.

“그, 그게, 그러니까… 이런 변명은 말도 안 되지만… 실험하는 내내 너무 아파요. 근데 저는 제가 왜 아픈지 알아요. 제가 다시는 애기를 갖지 않겠다고 다짐해서, 그렇게 함부로 못된 맘을 품어서, 그래서 애기가 생기는 게 힘든 거예요. 제 맘대로 뱃속의 문을 닫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해서 벌 받는 거예요. 하지만 이, 이제 아저씨가 위원장이 됐으니까 저도 당연히 노력할 거예요. 노력하겠지만…”

“꼬맹아.”

저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절박하게 설명하던 선담이 백진에게 가로막혔다. 선담의 눈동자가 금세 불안으로 흔들리자 타성으로 굳어진 그 모습에 백진은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는 선담을 베개에 눕히고 그 위로 올라타 이마를 마주 댔다.

“꼬맹아, 이 5층 방에서만 살자는 얘기 아니야. 너만 좋다면 서울근교에 정원 넓은 집 사서 같이 살자. 석재가 놀러오면 자고 갈 수 있게 커다란 우리도 지어주고 네 친구들도 자주 부르자. 강아지 좋아하면 강아지도 기르고. 자전거도 사줄게. 네가 해달라는 건 내가 다 해줄게. 다신 아프지 않게 해줄게. 그래도 싫어?”

선담은 아기를 갖는 게 너무 어렵다고 설명했는데 백진이 딴소리를 하자 어리둥절했다. 때문에 고개를 저으며 그를 잡았다.

“아저씨, 아저씨는 실험결과가 필요하시잖아요. 위원장이니까요. 근데 제가 거기로 어떻게 가요. 애기 만들어야죠……. 이, 이번에는 실패했지만 옛날에는 수정했었어요. 제가 이번엔 엄살도 피우지 않고 잘할 거에요. 아저씨가 이렇게 신경써주셨는데 당연히…… 그러니까 저는,”

“꼬맹아. 나랑 아기 낳고 살자는 얘기는 ‘내 아기’랑 너랑 나랑 살자는 뜻이야. 너랑 내 사이의 아기 말이다. 너와 나의 아기. 실험용 아기가 아니라.”

순간 선담이 침묵했다. 커다란 눈망울이 위태롭게 흔들거렸다. 부르르 떨리는 입술 끝에서 “네……?”하고 묻는 말이 흘러나왔다. 백진은 몇 차례나 헛다리짚는 이 모습마저도 귀여워 큰일이라고 생각하며 쓰게 웃었다. 

“이런 가정집에서 고백하려니까 잘 안 되는 건가. 근데 넌 움직일 몸도 아니고…… 내가 업어줄 테니까 우리 어디 레스토랑이라도 나갈래? 새벽 1시라도 멋진 곳은 문 다 여는데. 갈까?”

“아, 아저씨.”

가벼운 농담에도 선담이 당황해 말을 잇지 못하자 백진은 바짝 마른 입술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조금만 건드려도 툭하고 갈라질 것 같은 입술을 혀로 찬찬히 축여주었다.

“네가 원치 않으면 실험은 하지 않아도 돼.”

“그게…… 어떻게……”

선담은 여전히 이해 못해 곤혹스런 표정이었다. 백진은 그런 선담의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때가 왔다. 고백함과 동시에 어차피 말했어야 하는 진실. 백진은 선담을 연거푸 끌어안고 녀석의 체취를 들이 삼켰다. 몇 번이나 그렇게 해서 설명을 요구하는 선담을 조용히 시키고서야 찬찬히 말을 준비했다. 아무리 순화해도 결국엔 하나의 접점에 향할 이야기를.

“꼬맹아.”

말해야 할 때가 왔다. 

부디 녀석이 많이 놀라지 않고, 상처받지도 않고, 순수하게 기뻐해주었으면. 

그간 아픔으로 닫았던 포궁의 문을 내게만은 꼭 열어주었으면ㅡ

“넌 자연수정이 가능해.”

- - - -

“후우…….”

백진은 선담이 잠들어 있는 방 맞은편 욕실의 욕조에 기대 앉아있었다. 아침마다 기상하는 자신의 물건을 손대지 않고 자연스럽게 잠재우기에는 이틀에 한번꼴로 꼭 등장해 자신의 혼을 쏙 빼놓는 홍선담이 너무 매혹적이었다. 이제는 날마다 손수 처리해야 할 만큼 욕구가 쌓이고 쌓여서 완전히 폭발 직전의 활화산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어제는 실오라기 하나 없이 아예 발가벗고 나와서 고생시키더니 오늘 아침엔 깜찍한 팬티를 걸치고 나와서 사람 환장하게 만들었다. 식사하기 전에 욕실 바닥을 더럽히는 아침이라. 그것도 녀석이 생일이라는데. 백진은 자책하는 심정으로 체액이 떨어진 욕실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정말이지 미칠 노릇이었다. 

그는 부랴부랴 샤워기로 바닥을 닦아내고 욕실에서 나왔다. 불에 올려놓았던 미역국 냄새가 고소하게 퍼져있었다. 가볍게 간을 보고 불을 그대로 놔둔 뒤 밥을 펐다. 

“고등어 좋아하려나. 미역국에 떡도 넣어줄까. ……그래, 특별이다.”

선담이 잠들어 있을 때 아침을 차리며 발전한 것이 있다면 그건 혼잣말이었다. 몸에 좋은 걸 챙기려고 신경 쓰면서 이것저것 알아보다 보니 식재료와 정답게 대화도 나눌 수준이 되어 있었다. 백진은 방금 전 갈아둔 양배추 한 컵과 검은깨를 한 숟갈을 양손에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푹신한 이불에 푹 들어가서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는 선담은 예전보다 훨씬 좋은 얼굴이었다. 

이렇게 금세 생기가 돌 줄 알았으면 그때 좀 더 서두르는 건데. 하지만 자신도 사내 녀석을 데리고 살 앞길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물론 고뇌해보나마나인 시간이었지만. 

백진은 사이드테이블에 컵과 숟갈을 내려놓고 선담의 양 볼을 쭈욱 잡아당겼다. 잘생긴 떡두꺼비 같다고 놀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잠에서 깨어난 선담이 미간을 찡그렸다.

“고등어 해 놨다. 꼬맹아, 생선 좋아하지? 고양이도 아니고.”

“………고양이는…… 쥐를 좋아하죠.”

“무슨. 비린내를 더 좋아해.”

선담은 백진의 뽀뽀를 피해 기지개를 펴다 문득 몸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느꼈다. 양 옆구리부터 종아리까지 베개로 벽이 둘러져있었다. 백진은 당황한 선담을 보며 하하 웃었다. 옆에서 곤히 잘 자는 모습에 장난기가 돌아 큼지막한 베개 8개로 사면을 다 막아 놓은 것이다. 선담이 답답하다는 듯 몸을 뒤챘다. 

“베개로 상자 만들어 놓으니까 너 꼭 포장된 인형 같더라.”

“네?”

“못난이 인형.”

선담이 히히 웃자 백진이 이마에 쭉 소리를 내며 키스하고 그를 일으켜 앉혔다. 어제 12시 종이 치자마자 생일 축하한다고 말해주었으면서도 또 한번 “축하해.”하고 속삭이는 걸 잊지 않았다. 그러나 선담은 대답은 뒷전이고 사이드테이블에 놓인 검은깨 한 숟갈과 양배추 주스를 보고 “생일날만큼은 마시기 싫은데.”하고 대꾸했다.

“얼른 마셔. 코 막고 마시면 되겠네.”

“이거 맨날 마셔야 해요?”

“빨리 건강해지려면.”

“이제 괜찮은데…….”

백진이 기다리자 선담은 어쩔 수 없이 양배추 주스를 후루룩 삼켰다. 이제는 괜찮다고 몇 번을 말해도 백진은 도통 믿어주지 않았다. 컵을 비우자 백진이 바로 입안에 검은깨를 털어 넣어주었다. 그나마 고소한 검은깨는 먹을 만했다. 음식을 남기면 벌 받으니까 일단 다 받아먹긴 했는데 어쨌든 양배추 주스는 영 맛이 퀴퀴했다. 

“자, 서둘러라. 미역국도 끓여놨고, 오늘은 네 첫 외출일이니까.”

일어나는 백진을 쫓아 선담도 방에서 나왔다. 이제는 침대에서 식사하는 버릇을 버리고 거실로 나와 백진과 마주 앉아 식사하곤 했다. 바지는 여전히 맞는 게 없어서 선담은 이곳으로 온 두달 내내 트렁크 차림이었다. 트렁크가 꼭 반바지 같아서 노팬티 같다고 불평했을 때 백진은 그럼 자신의 드로즈를 입으라고 권했다. 허나 그런 건 백진 같은 남자에게나 어울리는 속옷이지, 자신이 백진의 드로즈를 입은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굉장히 어설펐다. 게다가 그나마 갖춰 입은 웃옷도 항시 헐러덩벌러덩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자신은 (아마도) 178cm이고 백진이 190cm쯤으로 알고 있는데, 고작 12cm차가 민망하게 육안으로 보이는 덩치차는 엄청났다. 덕분에 전상목 팀장님이 신장을 잘못 재어주신 게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하는 선담이었다. 물론 이 차림이 못 견딜 만큼 수치스럽진 않았지만 외출을 하려면 입을만한 옷이 필요하긴 했다. 그리고 이런저런 사정 덕분에 드디어 오늘. 백진과 삼성역의 코엑스로 쇼핑을 떠나기로 했다. 

“아, 미역국에 떡국 있다!”

“미역국에 떡국이 있냐? 떡이 있는 거지.”

“이거 떡국 떡 아니에요?”

“그래, 특식이야.”

“미역국에 떡국 들어가 있는 건 처음 봐요.”

소파테이블에 상을 펴고 밥 먹는 내내 선담은 백진에게 쫑잘쫑잘 떠들어댔다. 대부분이 백진의 수고에 감사한 마음을 숨기지 못해 반찬칭찬을 반복하는 것이었지만 백진은 흐뭇하게 선담의 수다를 들어주었다. 녀석은 아무래도 밖에 나간다는 것 때문에 더욱 들뜬 듯했다.

“꼬맹이, 뷔페 가본 적 있어?”

“아뇨.”

“그럼 오늘 삼성역에 있는 마르쉐에 가볼래? 거기 맥주도 네 맘대로 마실 수 있다? 통나무에 수도꼭지가 달려있어.”

선담이 미니와인바(bar)에 관심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서 노리고 한 이야기였다. 어린나이에 실험실에 들어가면서 보통 또래가 누리는 여가와 오락을 거의 누려본 적이 없는 선담은 백진이 하는 얘기가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술 마셔본 적 없는데….”

“괜찮아. 너도 성인이고 더 큰 성인이 보호자로 지키고 있으니까.”

백진이 느긋하게 대답하자 선담은 더욱 신이 났다. 선담은 국물맛이 깊은 미역국에 밥을 통째로 말아 김치를 얹고 고등어도 죄다 발라먹은 후에 백진의 밥그릇까지 손수 수거해 싱크대에 넣어두었다. 저희들이 이렇게 해두고 방에 들어가 놀고 있으면 아주머니가 올라와 식기세척기를 돌렸다. 

“그렇게 좋냐?”

“네?”

아침뉴스가 나오기에 오늘의 날씨를 보고 있는데 백진이 옆에 앉아서 팔을 둘렀다. 이제는 이런 스킨십도 자연스러워졌다. 선담도 소파 위로 두 다리를 접어올리고 백진의 가슴에 기댔다. 오늘의 날씨는 맑음이었다. 

“날씨 좋대요. 다행이다.”

“우리가 가는 곳은 밖으로 나갈 일 없는 곳이야.”

“코왁스요?”

“코엑스. 띨빵아.”

백진이 코웃음 치며 선담의 가르마에 코를 부볐다. 그가 이렇게 웃어주고 안아주면 선담은 몹시도 행복함을 느꼈다. 더 세게 안아달라고 부탁하고 싶을 정도로 백진의 품은 넓고 진중했다. 그가 치는 말장난이나 짓궂은 농담에도 익숙해졌다. 

이따금 은협이 생각나 가슴이 아렸지만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만 확실해져갔다. 그러니 더는 구차하게 매달려 은협을 곤란하게 만들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는 자신이 없어도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인데다 능력도 좋고 언제나 남들의 기대이상으로 잘해왔으니까……. 무얼 해도 잘하는 사람이니까……. 그러니 자신은 이제 백진의 마음을 믿고, 또 앞으로 쭉 믿어나가야 했다. 그 길이 모두를 위해 옳았다. 

백진은 환자에게 대해주는 것 이상으로 선담에게 참 잘해주었고 그 정성 때문인지 선담은 몸도 마음도 회복이 빨랐다. 스스로도 이렇게 건강하게 회복할 수 있을지 생각지 못한 탓에 실바람같이 찾아온 일상은 꿈같았다. 마치 다시 태어난 나날이었다. 

아침부터 선담의 체취가 동한 백진은 꿈이 아닌 실존에게서 입을 떼지 못했다. 목덜미를 물어서 잡아당기고 일부로 쪽쪽 소리를 내서 빨고 혀로 핥아 올렸다. 선담은 TV에서 눈을 떼지 않고 얌전하게 앉아있었다. 선담이 주로 사용하는 대응방식이었다. 백진의 손이 슬금슬금 배꼽을 지나 자신의 음모를 쓰다듬는데도 선담은 모르는척 TV화면만 지켜보다가 대뜸 물었다.

“아저씨, 뭐 하세요?”

“여기 구미를 당기는 게 있어서.”

“곧 나가야 되는데 그만해요.”

“나가려면 멀었는데. 꼭두새벽부터 무슨 나들이야. 새벽시장도 아니고.”

기다란 손가락이 선담의 보드레한 음모를 꼬았다. 엄지와 검지로 장난치면서 나머지 손가락들로 고환을 주물러대자 선담이 몸을 한차례 떨었다. 점잖게 앉아있으려는 계획은 실패했다. 덕분에 자세를 바꾸려고 몸을 뒤척이자 백진이 그를 안아들어 귓바퀴를 잘근잘근 씹다 아예 소파에 눕혀버렸다. 백진은 트렁크를 내리지 않고 선담의 성기를 찾아 주물럭거렸다. 벗기는 것도 창피하지만 얇디얇은 피륙 아래에서 그가 자꾸 만져대자 이것 또한 창피해서 선담이 얼굴을 붉혔다.

“아저씨 아침부터 이게 뭐에요.”

“네가 냄새를 폴폴 풍기니까 그러지.”

냄새를 풍긴다는 말에 선담이 놀라자 백진은 엉큼하게 웃으며 웃옷을 들어올렸다. 분홍색 젖꼭지가 죽어있기에 입술로 감싸주었다. 보들보들한 그것이 금세 통통하게 부어올랐다. 선담은 당혹하여 물었다.

“나 냄새 나요?”

“응.”

“아…… 많이 나요? 나빠요?”

예전에 젖내 난다고 말해준 적이 있는데 까마득히 잊었나 보다. 백진은 녀석이 안절부절못하는 게 재밌어서 대답하지 않고 유두를 쪽쪽 빨았다. 여기서 선담을 괴롭힌대도 4층으로 소리가 새나갈 일은 없을 것이다. 어차피 식구도 없을뿐더러 선담은 소리가 큰 편이 아니었다. 아니, 거의 안낸다고 봐야했다. 예민한 곳을 물고 빨아주어도 참는 건지 원래 습관인지 선담은 잠잠한 축에 속했다. 도저히 참지 못할 때는 흐느꼈지만 백진이 만족할만한 소리는 아니었다. 

혀를 살살 굴리며 유두를 툭툭 건드리고 눌렀다. 다리를 허리에 감게 하고 귀두를 잡아당겼다. 그 끝이 젖어가는 게 느껴졌다. 선담의 숨소리가 조금 거칠어졌다. 유두와 입술을 오가며 키스하고 쇄골과 배꼽 주변에 자국을 새겼다. 엊그제도 이렇게 볶았기 때문에 드문드문 자국이 남아있었다. 요령껏 남아있는 하얀 부위에 도장을 찍었다.

“아저씨… 옷 더러워져요.”

“네 옷도 아니잖아.”

“그래도…”

“그럼 벗자.”

선담이 “네?”하고 물었지만 백진은 그대로 트렁크를 소파 아래로 떨어트렸다. 요즘 들어 자주 맛보았지만 맛보면 맛볼수록 선담의 살에서 나는 맛은 정말 황홀했다. 전희 축에도 끼지 못하는 애무인데도 어찌나 냄새가 좋고 맛도 좋은지 백진은 어디 환장한 사람처럼 선담을 핥고 싶어 했다. 이보다 더 좋은 걸 하면 자신이 어떻게 변할지 스스로가 두려울 지경이었다. (선담의 안전을 위해서 자신이 욕망을 참는 격이었다.) 녀석에게 혹한 것으로 귀찮은 후원위원장 자리까지 꿰찼는데 더 깊은 곳에까지 풍덩 빠졌다가는 도무지 헤어 나올 자신이 없었다. 그리되면 자신은 분명히 선담을 입안에 담고 다니리라. 정말로.

“여기 뭘 묻히고 다니냐?”

백진이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는 부분이 축축하게 젖었다. 백진은 정액이 송글송글 맺혀있는 성기를 물끄러미 지켜보다 아래로 내려갔다. 앙증맞은 것의 끝을 물고 잡아당기자 선담의 허리가 동그랗게 말렸다. 짧고 가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혀로 살살 간질이자 무언가 주룩 흘러나왔다. 선담은 제 티셔츠를 쥐어짜며 흐려진 눈으로 할딱거리고 있었다. 그래, 녀석도 수컷이긴 마찬가지다. 이렇게 부드러운 살을 내어주었으니 아주 짜릿할 것이다. 백진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그것을 입안에 가득 담아 압박했다. 허리가 짜르르 전율하는 게 그대로 전해졌다. 입안에서 성기가 꿈틀거렸다. 백진은 선담의 신경이 죄다 이쪽에 쏠려있을 때 은근슬쩍 분문으로 손을 가져다 대었다. 물론 가져대 대보기만 했다. 애무할 때마다 움찔거리는 이곳에도 욕심이 났지만 고진감래라 했던가. 좀 더 기다리고 싶었다. 

반면 백진은 욕망을 한없이 누그러트리고 있었지만 선담이 느끼기에는 아주 그렇지만도 않았다. 그의 나이가 서른둘이니만큼 이해는 했지만 어쨌든 진도가 빠르긴 했다. 만난 지 5개월이 조금 넘었을 뿐인데 벌써 알몸을 보여주었다. 그도 어렴풋이 자신의 이런 마음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에 늘상 애무만 하는 것이겠지만 선담에겐 낯선 일이라 늘 부끄럽기만 했다. 허나 치부를 다 보여주고 창피한 소리를 내면서까지 이 남자에게 몸을 맡기는 까닭은ㅡ

이 남자가 좋기 때문이었다. 

너무너무 좋아지기 때문이었다.

‘헤프게 굴면 안 된다.’

지칠 대로 지쳤기 때문일까? 미련이 남지 않았다면 새빨간 거짓말이겠지만 이제는 은협이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했는지 중요치 않게 여기기로 했다. 이미 서로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는 느낌이기 때문이었다. 자신은 벌써 두 달가량 실험실에서 빠져나와 있었고 백진은 단호하게 자신을 지켜주겠다고 약속했다. 기왕이면 EEC가 유지되었음 하는 바람이 컸지만 자신에게 재갈을 물리고 혹독하게 대했던 일원들에게 저 또한 감정이 옛 같지 않았다. 그래도 정이 있으니 그들이 다른 연구팀으로라도 잘 양분해 들어갔으면 싶었다.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두 달 내내 정말로 EEC에선 어떠한 간섭도 하지 못했으니, 백람의 힘이 그렇게 크다면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느껴졌다. 다만 은협에 대해서는 안타깝고 미안하고 아픈 기억만 남아 다른 일원들보다 더 좋은 선택권을 쥐었음 했다. 내게 모질게 대했지만 그래도 한때는 서로 사랑했던 사이니 꼭 많이많이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서야 마침내 진정한 평온이 찾아온 것 같았다. 

“쨔샤, 지금 딴생각하냐?”

“아, 아니에요. 아니…”

백진은 변명하는 선담의 귀두를 자근자근 씹었다. 발갛게 젖은 살갗이 이와 혀 사이에서 씹히자 선담이 신음했다. 애무해줄 때는 꼼짝 않고 소극적이기만 했으면서 막상 놀라자 자신을 밀어내려고 안간힘이었다. 그럼과 동시에 몸을 바짝 경직시키더니 허둥거렸다. 

느낌이 왔다. 녀석이 내보내는 걸 다 받아 마실 심산이라 백진은 성기를 물고 놓아주지 않았고 선담도 얼마 참지 못했다.

꿀꺽ㅡ

백진의 울대가 찬찬히 오르내렸다. 한방울도 남기지 않고 쪽쪽 빨아 마신 그가 천천히 선담을 놓아주었다. 그리고는 혀를 끌끌 찼다. 겨우 고추 좀 괴롭혔다고 선담의 얼굴이 축축했다. 긴장과 흥분으로 땀을 흘린 탓이다. 눈주변이 벌게져 있었고 어쩐지 더욱 빨개진 입술로 숨을 할딱할딱 들이마셨다. 이렇게 연한 녀석을 더한 쾌감으로 몰아붙이기 시작하면 도대체 어떻게 될까. 맛만 잠깐 보고서도 녀석의 얼굴을 보면 별의별 상상이 다 되었다. 백진은 조심스럽게 선담과 몸을 포갰다.

“내가 이러는 거 싫지?”

“……….”

“난 좋은데.”

선담은 망설였다. 대답을 하긴 해야 하는데 좋다고 말하는 바엔 차라리 혀를 물 생각이었다. 그러나 백진은 ‘나도 좋았어요, 아저씨’라는 대답이라도 듣고 싶은지 자꾸 유두를 찝쩍거리며 선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눈이 점차로 크게 뜨여지는 걸 즐기며 말이다.

“네 젖꼭지는 어떻게 이렇게 귀엽냐? 색깔이 좋아.”

길고 두꺼운 손가락이 봉곳한 유두를 자꾸 꼬집고 짓누르니 선담은 어딘가 숨고 싶어졌다. 결국 용기를 내 백진을 끌어안고 그 어깨에 턱을 올려 얼굴을 가렸다. 아직도 살이 덜 찐 선담의 가슴은 백진의 두 손안에 죄다 들어왔다. 자신에게 거의 매달리다시피 해서 끌어안고 있는데도 집요하게 백진이 엄지를 놀려 선담을 괴롭혔다. 결국 선담이 속삭였다.

“……저도 해드릴게요.”

선담은 백진이 당장에 오케이 사인을 날리며 좋아할 줄 알았다. 허나 돌아오는 대답은 침묵이었다. 이윽고 그가 귓불을 와그작 깨물어먹었다. 선담은 저도 모르게 “아!”하고 깜짝 놀랐다. 너무 당혹해서 거의 노려보듯이 쳐다봤더니 그도 지지 않고 으르렁거렸다.

“쥐톨만한 게, 뭘 해준다고? 어디서 배웠어, 그런 거.”

백진은 선담을 잡고 먼지 털듯 덜컹덜컹 흔들었다.

“홍꼬맹, 어디 가서 그런 말 입에 올리기만 해봐. 나한테도 안 돼.”

“하, 하지만 아저씨도,”

“어허, 어른이 말씀하시는데.”

선담은 아무래도 그가 잘못 이해했나 싶어서 정확히 말하기로 했다.

“아저씨, 그러니까 저도 입으로 아저씨 거를, 아…!”

백진이 두 번째 공격을 감행했다. 선담의 무릎 뒤에 손을 끼어 올리더니 곱게 닫혀있는 분문을 혀로 간질인 것이었다. 여태껏 이런 적은 없어서 선담이 아연했다. 은협에 의해 크게 찢어지며 나쁜 기억으로 가득 찬 곳이라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자극은 바라지 않았고, 백진도 그것을 알기 때문에 건드리지 않는 거라고 믿었다. 사실 너무 큰 충격을 받았던지라 다시는 쾌감을 느끼지 못할까봐서 겁이 난 것도 있었다. 헌데 백진이 별안간 자신의 다리를 번쩍 들더니 그곳을 핥아대기 시작한 것이다. 

백진은 늘 자신을 유혹하고 또 유혹했던 그곳을 혀끝으로 살랑살랑 오가다 넓게 펴 핥아 올렸다. 타액을 가득 담아서 묻히고 비볐더니 위에서 선담이 아, 아, 하고 울먹이듯 신음했다. 할짝할짝 희롱하듯 간질이자 반항하는 느낌이 강해졌다. 거부하듯 주름이 말려들어가다가도 혀로 집요하게 쑤시면 다시 힘이 풀려 움찔거렸다. 갑자기 극도로 흥분되었다. 동그란 엉덩이를 두 손으로 한껏 받치고 백진은 아예 그곳에 코를 묻었다. 온 입으로 선담의 그곳을 담고 혀를 놀렸다. 시들했던 선담의 성기가 어느새 살아서 털렁거렸다. 선담은 참으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힘겨워 보였다. 통 자극이 없다가 건들인 탓인 듯했다. 

분명 겁을 먹었을 텐데 예상보다 반응이 괜찮아서 다행이라며 백진은 한숨 돌렸다. 물론 그만큼 더 열심히 애무했다. 이렇게 적나라한 애무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선담이 아저씨, 아저씨, 하고 신음을 섞어 부를수록 미치게 흥분되었다. 남자의 가랑이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자신을 낯설게 느낄 여유도 없었다. 쉼 없이 벌름거리는 빨간 주름이 보는 사람을 엄청나게 발정 나게 했다. 덕분에 분문을 아주 닳도록 애무하고 있는데 선담이 갑자기 격심하게 몸을 뒤채였다. 무언가 잘못되어나 싶어서 입을 떼었더니 놀랍게도 선담이 그대로 질금질금 사정하기 시작했다. 

“보지 말아요, 보면 안… 아ㅡ…”

선담은 백진의 고개를 돌리게 하려고 팔을 뻗었지만 도리어 잡혀서 사정하는 걸 공개했다. 진분홍색으로 물든 성기 끝이 우윳빛 진득한 체액을 툭툭 떨어트리며 진동했다. 백진은 그저 밑동을 어루만져줄 뿐인데도 멈추지 않고 줄줄 내뿜었다. 일부는 백진의 손까지 적시며 흘러내렸고 일부는 배 위로 쏟아졌다. 선담이 몸을 흔들어봤자 더 야하게만 보일뿐이었다. 

“너 지금 거기 애무 당해서 싼 거야?”

신기해서 백진은 말을 거를 틈도 없이 그대로 물었다. 이제껏 본 얼굴 중 가장 빨개진 얼굴로 선담이 울먹거렸다. 더 물으면 정말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았지만 정말 신기했다. 이건 너무 귀엽지 않은가. 백진은 선담을 안아 올리며 재차 물었다.

“응? 거기 핥아줘서 그런 거냐고. 많이 좋냐?”

“아, 아저씨!”

“말해봐. 고추 빨아주는 것보다 거기가 더 좋아?”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쪽은,”

“그쪽이 뭐.”

“너무… 오랜만이라……”

백진의 허벅지에 올라타 앉은 채로 선담이 고개를 수그렸다. 빨개진 눈가를 살포시 덮은 속눈썹이 자르르 떨렸다. 백진은 선담의 허리를 끌어안고 눈주변과 입술을 핥아대느라 바빴다. 여태껏 그 누구도 애무만으로 자신을 이렇게 만족스럽게 만들지 못했다. 자신은 옷을 갖춰 입은 채 선담을 애무했을 뿐인데도 흡족스러웠다. 물론 바지 안이 젖어서 찝찝했지만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평생토록 애무만 허락된다고 해도 틀림없이 행복할 것이었다.

“어때, 아저씨가 최고지?”

백진은 선담이 창피해 까무러치는 모습이 보고 싶어서 자꾸 엉큼한 말로 물었다. 이미 파정을 두 번이나 해 정신없는 주제에 그래도 농담을 알아듣고 숨어들려는 모습이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네가 직접 너 자신을 봤어야 하는데. 진짜 귀여워.”

“그만, 그만 해요….”

“왜, 좋아서 그러는데.”

자꾸 고개를 수그리는 녀석의 뺨에 입 맞추다가 백진은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그러니까 나처럼 잘할 자신 없으면 네 입으로 해주겠다는 둥 소리 하지 마.”

선담이 물끄러미 백진을 바라보았다. 백진은 흔들림 없는 눈으로 녀석을 주시했다. 

선담이 구강성교의 개념을 어디서 익혔을지는 묻지 않아도 뻔했다. 그 사실은 자신을 밑도 끝도 없이 심란하게 만들 만한 요소로 충분했다. 어차피 저희들은 늦게 만났고 그 전의 시간을 완전히 메울 수는 없었지만 민감한 부분이 녀석에게 습관화되어 있는 것은 원치 않았다. 원래 있던 선담의 습성이야 너그럽게 모두 수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문제는 안됐다. 그러니까 국을 잘 흘리고 먹는다든지 가끔 잠꼬대를 한다든지 하는 것은 원래 선담의 것이니까 상관없어도, 잠자리에서 학습 받거나 주변의 압박에 의해 위축되는 모습 같은 건 절대 원치 않았다. 자신이 하나하나 고쳐주려고 벼르고 있었던 부분이었다. 

구강성교는 해주는 입장이 진정으로 즐기는 게 아니면 몹시 어려운 노동이었다. 그리고ㅡ연백진 자신이라면 모를까ㅡ선담은 남자에게 입으로 서비스해주는 걸 즐길 것 같지는 않았다. 학습의 일부였다. 혹은 남자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습관적으로 굳어버린 행동이라든지. 만약 학습 받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선담이 낑낑거리며 자신의 허리아래에서 애쓰는 꼴은 보기 싫을 것 같았다. 선담이 진정 구강성교를 즐긴다면 모를까, 이건 개인차지만 어쨌든 자신은 싫었다.

“알았어? 내가 너같이 허연 꼬맹이한테 오럴 받으면서 즐길 짬밥은 지났다.”

백진은 무어라 대들려는 선담을 휘떡 안아들고는 욕실로 들어갔다. 오후에는 녀석을 데리고 바깥나들이를 떠날 계획인지라 몸을 깨끗이 씻겨야 했다. 물론 자신의 아래도 해결 봐야 했고 말이다.

-

오후 4시가 되어서야 백진은 선담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그나마 작은 옷을 입혀주었지만 재킷만은 맞는 게 없어서 선담의 옷차림은 조금 우스웠다. 그는 직접 차를 몰기로 했지만 뒤로는 어김없이 새카만 세단이 따라붙었다. 이제는 완벽한 봄이라고 부를 수 있는 날씨라 하늘은 화창했고 선담의 기분은 최고였다. 터프하게 주행하는 백진 덕분에 가끔씩 찔금찔금 놀라기는 했지만 무사히 코엑스에 도착했다. 금요일 오후의 코엑스는 인파로 북적였다. 백진이 단번에 후진주차를 성공하자마자 쫓아오던 세단도 그 가까이 차를 댔고 검은 슈트의 세 남자는 쏜살같이 움직여 사라졌다. 그들은 아무래도 저희들을 지켜볼 것 같았지만 백진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했다.

삑삑ㅡ 리모컨이 차를 잠그는 소리에 잠시 돌아봤던 맞은편의 여자가 백진을 위아래로 쓱 훑어보았다. 그녀는 선담과 눈이 마주쳤지만 별다른 신경전은 없었다. 상대가 남자이니 그 속을 모르는 여자입장에선 당연한 일이었다. 선담은 묘한 기분이었다. 은협과 함께 다닐 때도 늘 그랬다. 거리로 나가면 사방이 그의 외향을 탐구하는 여자들로 북새통이었다.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이 꼭 뒤라도 한번 돌아보더라. 이제는 익숙한 일임에도 느낄 때마다 묘했다. 헌데 그걸 백진에게서까지 느껴야 하다니. 

백진은 곰곰이 생각에 잠긴 선담의 목주변을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에스컬레이터로 발길 했다. 희미하게 새겨진 키스마스를 골라서 찌르며 말이다.

“여긴 만남의 광장이야.”

“네?”

화려한 상가가 펼쳐진 신기한 내부에 감탄하며 선담은 백진의 성큼성큼한 발걸음을 쫓았다. 선담이 주변을 구경하느라 자꾸 뒤처지자 결국 백진이 손을 잡고 속도를 좀 늦췄다. 선담은 여전히 고개를 부산하게 두리번거리며 그에게 물었다.

“만남의 광장이 뭐에요?”

“여긴 인구밀도가 높아서 아는 사람 마주칠 일이 많거든. 네 친구 아무개도 마주칠지 몰라?”

“아, 그럼 좋겠다.”

“안 돼, 방해 돼.”

“아저씨, 저건 뭐에요?”

“극장. 메가박스.”

“메가박스? 메가박스?”

“극장 이름이다, 띨빵아.”

하나부터 열까지 물어보는 선담에게 다정하게 꼬박꼬박 대답해주었지만 사실 백진은 속이 쓰렸다. 선담은 18살에 실험군을 자원해 영국으로 떠났다. 그 전까지는 추운 겨울에 대학교 주차안내요원이나 하고 있을 정도로 여유가 없었다고 들었다. 석재의 이야기를 짜집어 보면 보육원 출신에 삶이 각박했을 거란 가정이야 금방 세울 수 있었다. 그러니 이 흔하디흔한 코엑스를 이름도 제대로 기억 못해 코왁스라고 부르며 쫓아다니는 것이다. 

이러니 자신에게 선담은 무조건적으로 퍼다 주어도 아깝지 않은 아이로 여겨지는 게 당연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 욕심도 없고 그저 어리고 순하기 때문에 조건 없이 베풀어도 늘상 뿌듯하기만 했다. 만약 선담이 세상에 눈이 트인 데다 계산이 빠른 아이였으면 이 정도까지 애정이 피어오를 순 없었을지 모른다. 지천에 널린 여자들과 비슷한 취급을 받았을지 누가 아는가? 허나 선담은 그런 물질 따위는 잘 모르는 녀석이었다. 서른둘 나이에 적적함을 논할 생각은 아니지만 기왕이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내 사람으로 맞이하고 내 아이도 있으면 좋을 것이다. 그것에 대한 욕망 또한 홍선담이 자꾸 부풀어 오르게 하고 또 충족시켜주었다. 

일단 급한 건 옷이라서 백진은 닥치는 대로 상점을 돌아다녔다. 실험실에 갇혀 옷이라곤 제대로 챙겨 입어 본 적이 없었을 선담을 위해 백진은 시시콜콜 잘난척을 늘어놓았다. 꼭 아들 옷을 골라주는 어머니가 된 기분이었다. 일단 사이즈를 정확히 해놓고 코엑스를 누볐다. 점차로 손에 든 짐이 많아지자 알아서 비서 중 하나가 다가왔고 백진은 그에게 선담의 짐을 넘겼다. 

“아저씨, 이거는요?”

“이건 어떠냐?”

“그건 좀 이상한데……요.”

얇은 천으로 된 핫팬츠니까 당연히 이상하겠지만, 이제 선담이 트렁크를 입고 돌아다니는 모습을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섭섭해서라도 백진은 당장에 이걸 구매해야 했다. 백진의 카드는 계속해서 긁혀나갔고 비서들이 옮기는 짐짝은 그들의 뒷좌석에 쌓였다. 역시 사내애라 그런지 쇼핑이 길진 않았다. 선담의 의상취향이 각별한 것도 아니라서 옷을 고르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색이 밝은 셔츠에 청바지와 무난한 재킷 몇 벌이 주를 이뤘다. 하나 신중한 게 있다면 청바지의 왁싱이었는데 그건 백진도 이해하는 부분이라서 꽤나 만족스런 쇼핑이 되었다. 쇼핑이란 것ㅡ특히 이런 드넓은 쇼핑몰에서의ㅡ자체가 선담에겐 굉장히 낯선 것이라 그의 입에선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종이백이 백진과 비서의 손을 통해 몇 번이나 옮겨가고 드디어 그들은 저녁을 먹으러 움직였다. 

“석재가 무슨 케이크 사올지 궁금하지 않아?”

“궁금해요. 아저씨, 우리 아이스크림 먹어요. 저기 베스킨 라빈스요.”

“밥 먹어야지.”

“아직 배 안 고파요. 아이스크림 먼저 먹으면 안돼요?”

“감기 걸려.”

“안 걸려요.”

“사실 내가 먹기 싫어.”

“아저씨!”

백진은 제 손을 질질 끌고 가는 선담에게 못이긴 척 발걸음을 돌렸다. 이렇게 놀려도 마냥 좋다고 딸랑거리는 녀석은 정말 귀여웠다. 설마 내 속마음을 꿰뚫어 일부러 이렇게 밀고 당기는 것일까란 생각이 들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내 눈이 삔 걸까, 그게 아니라면 역시 선담이 귀여운 거겠지. 이렇게나 예쁜데 그 최은협이란 놈도 녀석을 순수하게 사랑했던 시절이 있지 않았을까.

“어? 백진오빠?!”

선담의 아이스크림콘은 더블로 올려주고 자신도 아이스크림을 받아들려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에 백진이 고개를 돌렸다. 

“연지애?”

“오빠, 여기 웬일이야? 와, 백진오빠가 코엑스엘 다 오다니!”

“너야말로 뭐냐?”

지애는 백진에게 달려들 기세로 팔짝팔짝 뛰었다. 그리고 백진의 등 뒤에 서 있는 인물을 발견하고 한톤 높게 “어?!”하고 외쳤다. 동시에 선담의 얼굴에도 놀라움이 스쳤다. 백진이 말하던 만남의 광장이 바로 이런 건가 싶었다. 그녀는 선담에게 “안녕….”하고 잠시 말꼬리를 흐리는가 싶더니 백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떻게 된 거야?”

“뭐가.”

“도너 아니야? EEC 도너.”

“어떻게 알았냐?”

“나도 본 적 있어.”

오누이간이 어쩜 저렇게 뜸할까. 선담은 백진이 여전히 집안에는 자신의 존재를 비밀로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하긴 그간 아무도 저희들을 찾아 올라오지 않았으니까. 그 때문에 부담 없이 좋았었는데 그것도 끝이 보였다. 

백진은 어깨를 으쓱했다.

“네 머리맡에서 우리 살고 있었는데.”

“뭐라고?”

“아버지가 말씀 안하셨어? 내가 아버지 자리 맡았어. 그 위원장. 덕분에 우리 도너 5층에다 모셔놓고 있었는데. 이건 비밀이지만.”

“……정말?”

그녀는 연신 선담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밝고 쾌활해 보이는 지애는 그만큼 기도 세보여서 선담은 괜스레 위축되었다. 백진은 그런 선담의 어깨를 감싸며 그녀에게 소개했다.

“홍선담. 내가 돌보는 꼬맹이. 꼬맹아, 여기 우리집 막내다. 연지애야.”

“전에 봤어. 근데 언제까지 돌볼 건데?”

아무래도 선담보다 더 중한 문제가 있는지 지애가 따지듯 물었다. 선담이 그녀를 보고 심정적으로 복잡해할 짬도 없었다. 백진은 그녀를 보며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연장자가 되가지고 인사 받는 폼이 그게 뭐냐? 그리고 그건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지.”

“백진오빠.”

“근데 너 왜 혼자야. 혼자 왔어?”

“아냐, 남친이랑 왔는데 잠깐 담배 태우러 나갔어. 오빠, 말 돌리지 마.”

“너 애인 있었어?”

“오빠, 집안일에 관심 좀 가져! 지금 식구 중에 오빠 집에 들어온 건 눈치챘어도 딴 사람까지 데리고 들어온 거 아는 사람은 없어. 이게 말이 돼? 오빤 너무 멋대로야.”

“아버지 아시니까 됐어. 왜 네가 더 난리야?”

선담은 급하게 “아저씨.”하고 끼어들었다. 그녀가 남자친구와 함께 왔다고 밝힌 이상 자신은 더 이상 여기서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그녀의 남자친구가 그 사이 바뀌지 않았다면 조만간 최은협이 이 자리로 들이닥칠 테니까. 이제는 거리낄 게 없다고 하더라도 백진과 은협의 관계는 그다지 올곧지 못했고, 자신도 아직은 은협의 얼굴을 제대로 볼 자신이 없었다. 나중에 사실을 천천히 이야기하더라도 지금 여기서 맞닥뜨리긴 싫었다. 백진은 지애가 무어라 구시렁거리는 걸 무시하고 선담을 보았다. 선담은 아이스크림엔 입도 안댄 채 자신을 불안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이제 다른 곳으로 가요.”

“그럴래?”

백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지애가 그를 잡았다.

“오빠, 잠깐만. 나랑 얘기 좀 해.”

“안 돼, 이 녀석 옷 사느라 굶었단 말이야.”

“잠깐이면 돼.”

백진은 아이스크림을 한입 덥썩 떼어먹고 시큰둥하게 “얼른 해.”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지애가 “여기서?”하고 또 물었고 선담은 조바심이 났다. 빨리 움직여주었음 했지만 아무래도 그녀는 남매끼리 꼭 해야 할 이야기가 있는가보았다. 물론 그녀는 선담의 발목을 송두리째 묶을만한 주제를 꺼냈다.

“도너, EEC에 언제 되돌려 보낼 거야?”

백진은 실소했다.

“네가 무슨 상관이야. 돌려보낼 생각 없어.”

“오빠가 도너 빼돌리는 바람에 우리오빠가 요즘 완전 의욕상실이라고. 실험 중단됐다며!”

심장이 덜컥 가라앉았다. 선담의 얼굴이 흙빛이 된 가운데 백진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뭐야, 너 연구원하고 사귀냐? 누구한테 들었는데.”

“자세한 얘기는 길 소장님한테 들었어. 그보다 내가 언제부터 사겼는데 어쩜 이렇게 관심도 없어?”

“너야말로 어쩌다 연구원하고 눈이 맞았어. 진짜야?”

“그래. 그리고 우리오빠 요즘 기운 없어. 오늘도 끌고나오는데 고생했다구. 원래 EEC에 열성이 대단한 사람이었는데 오빠가 갑자기 맘대로 중단시키고 그래서 그런 거잖아. 급한 연구라는데 이런 게 어딨어? 위원장이면 맘대로 해도 괜찮아?”

“얼씨구, 진짜 사귀나 보네.”

백진은 코웃음을 쳤고 이젠 더는 놀랍지도 않다는 표정을 지으며 지애가 고개를 끄덕였다. 눈에는 불만이 가득이었다. 백진은 잠시 그런 동생과 눈을 마주치다가 선담의 아이스크림도 한입 뺏어먹고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네가 아는진 모르겠지만 PTA사에서 보내온 인공자궁이 하나뿐이라 햇수로 5년간 이 녀석 혼자서 온갖 고생을 떠맡았어. 1차 수정 실패한 이후로는 실험이 몸에 안 맞아서 몰골이 인간 같지도 않았고. 네 남친이 실험중단 때문에 우울증에 걸려도 아닌 건 아닌 거지. 일단은 건강상 문제로 내가 데리고 있기로 했으니까.”

“오빠.”

“철 좀 들어라. 네 남친 기분 맞춰주러 도너가 죽어나도 상관없어?”

지애가 꼬투리를 잡고 늘어지려는 찰나에 백진이 고개를 돌렸다.

“식구들이 나 들어온 거 눈치챈 건 상관없으니까 도너 데리고 왔다는 소린 하지 마. 수선 떠는 거 귀찮고 구경하겠답시고 올라오는 것도 짜증날 거 같다. 조만간 나갈 거니까.”

선담은 이제 정말 급해져서 백진의 옷가지를 잡아당겼다. 시간을 너무 오래 끌었다. 손바닥이 땀에 흥건해졌다. 그제야 백진이 선담이 이상한 것을 알아차리고는 지애에게서 등을 돌렸다.

“왜 그래?”

“아저씨, 이제 그만 가요.”

“그래. 가자, 가자.”

허리를 굽혀 선담에게 속닥속닥 속삭이는 백진을 보고 지애가 앞머리를 푸 불어 넘기며 팔짱을 꼈다. 여자를 주렁주렁 달고 다닐 때도 코엑스는커녕 가족에게 소개시켜주는 법이 없었는데. 길에서 마주쳐도 여자가 무안하리만치 옆에다 멀뚱히 세워두었던 게 이 넷째오빠였다. 헌데 고작 임상실험 도너인 남자아이를 다정하게 챙겨주고 동생 앞에서 편도 들어주고 집까지 데리고 오는 둥 지금은 팔불출이 다 되어있었다. 아무리 중요한 도너라지만 집까지 들여오다니 무슨 바람이 불었냔 말인가. 

“아, 저기 우리오빠도 온다. 그럼 백진오빠, 집에서 봐.”

백진은 동생 애인이라고 인사 받을 생각도 없었기 때문에 뒤돌아보지 않고 손만 한번 흔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자리를 이동하려는 찰나, 이번에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담배 만들다 왔어?”

“두 대 태우느라.”

“어후, 이 골초!”

“새삼 왜 수선이…”

뒤쪽에서도 어색하게 말을 멈췄다. 백진이 완전하게 뒤를 돌아보았기 때문이었다. 선담은 잔뜩 위축되어 한걸음 뒤로 섰다. 겁이나 물러선 것일 뿐인데 위치상 마치 백진의 뒤에 숨어버린 것 같은 분위기였다. 백진이 자리를 옮기지 않자 결국 지애가 신나서 자신의 남자친구를 소개했다.

“오빠, 여기 우리 넷째오빠 연백진. 아마 얼마 뒤에 후원위원장으로 들어갈 거야. 오빠, 여기 내 남자친구 최은협.”

“……….”

“……….”

“아저씨….”

백진과 은협은 꼿꼿이 서서 서로를 주목했다. 지애는 갑자기 이 남자들이 뭐하는 것인가 싶어 번갈아 바라보았고, 돋보이는 장신에다 그에 못지않은 용모의 두 남자가 대칭하고 서 있자 가뜩이나 많은 인파의 시선이 네 사람에게 꽂혔다. 어느샌가 비서 세 명이 인파에서 두드러져 나와 백진의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허나 백진은 단호하게 그들에게 고갯짓을 했다. 접근을 제한하는 것이었다. 비서들은 주춤거리며 사태를 관망하는 입장이 되었다. 물론 백진과 은협 중 그것에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 말도 오가지 않는 이 시간이 끔찍하게 길었다. 선담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쉴 새 없이 흘렀다. 백진에게 향하던 은협의 시선이 어느 순간 자신에게 그대로 내리꽂혔기 때문이다. 선담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수그렸다. 녹아 흘러내린 아이스크림이 손을 끈적끈적하게 적셨다. 그러자 백진이 잠시 뒤로 물러선 선담을 끌어당기듯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것은 과시보다도 혹시 모르는 사태를 대비한 방어 같은 것이었다. 그만큼이나 선담을 바라보는 은협의 눈초리가 더없이 싸늘했다.

“인사 안 해? 아는 사이야?”

지애가 묻자 은협은 간단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백진은 갈등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무슨 드라마도 아니고 설마 여기서 최은협을 마주보게 될 줄은 몰랐다. 무엇보다 더 끔찍한 건 막내동생이 아무래도 이놈에게 정신이 단단히 나간 듯싶었다. 아는 사이냐는 말에 백진은 대꾸하지 않았고 은협도 슬몃 웃기만 했다. 선담이 덜컥 놀라는 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일단 이 자리를 피하는 게 상책일 것 같았지만 백진은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최은협 같은 자들에겐 등을 보여주어선 안 된다는 사실을. 하다못해 위협이라도 주는 게 낫다는 것을. 등을 보이는 순간 목덜미를 물어 뜯길지도 모르는 일이니 말이다.

백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고 지내는 사이지.”

“정말?”

“그래. 그렇지 않습니까, 최은협 씨?”

그러자 은협도 함께 웃었다. 

“그렇죠. 오랜만입니다. ……두 달만이군요.”

잠시 침묵 후 은협이 입을 열었다.

“선담아, 잘 지냈어?”

정말이지 끔찍하게 멋진 웃음이었다. 입가를 슬쩍 올려 웃는 저 웃음이, 최은협의 미소가, 그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너무도 평안했다. 

문제는 은협이 한발짝, 그들에게 다가왔을 때 이루어졌다.

“……. 목에 그건 뭐야, 홍선담.”

입술자국.

고의적으로 새겨진 타인의 자국이었다. 백진은 은협의 차가운 눈빛 속에서 불같이 맹렬한 분노를 읽을 수 있었다. 자신의 것에 다른 수컷이 영역표시를 하고 있다는 데서 느껴지는 그 어마어마한 격분. 그는 숨기지 않았다. 먹잇감을 눈앞에 둔 맹수가 흘리는 위협소리처럼 아주 낮은 소리가 전율했다. 그 순간 백진이 은협의 목덜미를 턱! 잡아 제 쪽으로 바짝 당겼다.

“여기서 난동부릴 생각마라.”

이마가 마주 닿을 듯 아슬아슬한 거리였다. 선담이 그런 두 남자 사이에 끼어 어쩔 줄 몰라 했다. 하지만 백진에겐 이 방법밖에는 없었다. 사람 많은 곳에서 정식으로 주먹질을 해야겠는가? 그러다 혹여 선담이 다치기라도 하면? 최선의 방법은 위협이었다. 어느새 백진의 눈동자가 흉포하게 번뜩이며 빛났다. 은협보다 정갈하게 다듬어져 있었지만 그 눈빛 또한 거칠기는 마찬가지로, 상대의 목덜미를 당긴 손끝에 힘이 포악스럽게 들어갔다. 동시에 선담을 감싸 안은 품은 더욱 단단해졌다. 무표정한 은협과 마주보고 백진이 웃으며 경고했다.

“지애한테서도 떨어져. 수틀리면 너같이 근본 없는 놈 묻어버리는 건 일도 아니야.”

은협은 눈을 내리깔았다. 정작 그의 손끝은 선담의 목주변으로 쭈욱 뻗어나가 붉은 자국을 훔쳤다. 선담이 어깨를 움츠렸다. 마치 온기라도 확인하는 듯한 아주 잠깐의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은협 또한 나지막이 속삭였다.

“너야말로 남의 물건에 손대지 않는 게 좋아. 근본 없는 놈한테 개죽음 당하고 싶지 않으면.”

아는 사이치고 형성하는 분위기가 심상찮아 지애가 껴들었다. “오빠! 왜 그래?” 그녀가 소리치자 그제야 백진이 손아귀에 힘을 풀기 직전에 한마디 더 붙였다. 

“도너는 안 돌려보내. 다시는 네놈에게 넘기지 않는다. 그리 알아.”

그러자 고개를 뒤로 빼던 은협도 떨어지는 순간에 한마디 더 속삭였다. 선담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기다렸다는 듯이.

“녀석은 죽어서도 내거라는 것부터 기억해놔.”

두 남자의 틈에서 빠져나온 선담은 이미 형체도 없는 아이스크림을 들고 겁에 질려 백진을 올려다보았다. 이렇게까지 팽팽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왜 은협이 저희들을 보며 저렇게 싸늘하게 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지애가 자신을 탐탁찮게 보는 거야 당연히 그럴 수도 있겠거니 했지만 은협까지는 아니지 않은가. 저렇게 예쁜 여자에게 사모 받고 있으면서. 자신을 그렇게나 미워했으면서 말이다. 

지겨워했으면서. 욕하고 때리고, 미워했으면서. 아무래도 자신이 실험에 제대로 참여하지 않아서 화가 단단히 난 듯싶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래도 그는 자신이 처음 학교에 입학하는 시절부터 성인식을 올리는 시간까지 내내 함께 해주었던 사람인데…….

“둘이 왜 그래? 오빠, 왜들이래?”

두꺼운 장막에 가려 백진의 품안에서 넋을 놓던 선담은 문득 지애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백진과 은협은 여전히 서로를 주시하고 있었고 지애가 은협을 잡아끌고 있었다. 백진이 선담의 손에 들려있는 아이스크림을 뺏어 쓰레기통에 버리더니 “다시 사줄게.”하고 속삭였다. 

그 사이 은협은 거의 뒤를 돌아 있었다. 칠흑 같은 눈동자가 마지막으로 선담을 훑으며 조용히 내뱉었다.

“생일 축하한다.”

은협은 어느 순간 등을 돌렸고, 지애는 못마땅한 얼굴로 저의 오빠와 선담을 쏘아보았다. 

더는 아저씨라고 겁먹은 목소리로 부르기도 면구스러워서 선담은 가만히 있었다. 속을 알 수 없는 은협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는 꼼짝할 수가 없었다. 점점 지독하게 율렬해지는 그의 모습이 뇌리에 박혀 쉬 지워지지 않았다. 그는 십대의 어느 순간부터 분명히 변했었다. 의대에 진학하기로 다짐한 뒤로부터는 보육원에서 보았던 그런 모습에서 점차 탈피하는 듯했다. 비록 담배는 끊지 못했지만 그밖에 해로운 것들은 다 끊었었다. 사람도, 소속도, 무엇 하나 남기지 않고 말이다. 헌데 다시 퇴화하는 듯했다. 저토록 극심한 눈빛도, 밀랍인형처럼 무지각한 모습도…… 너무도 끔찍했다. 하지만 답은 알 수 없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따져들어 간다면 아예 자신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게 차라리 나았을 거라고 생각하게 되리라. 

“뭘 그렇게 떨고 있어. 손 줘봐.”

백진은 비서에게서 받은 티슈로 아이스크림 묻은 선담의 손바닥을 닦아주었다. 

선담 때문에 몸을 사려야하는 입장이라 답답했다. 말한 대로 언젠가는 묻어버려야 할 새끼가 맞았다. 실험도너를 겁간하고 신체를 조작했으며 제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무도한은, 적어도 저희들의 주변에서 맴돌게 내버려둘 수 없었다. 백진은 턱짓으로 비서진을 사라지게 만든 후 선담을 보았다. 

선담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만약 혼자 있을 때 은협을 마주쳤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불 보듯 뻔했다. EEC를 버리고 후원위원장에게 숨어들어갔다고 질타를 받았거나 심한 경우 더 크게 상처받았을 테였다. 백진이 있었기 때문에 아무 탈 없이 무사히 넘어간 것이다. 강해져야 한다고 다독여주며 자신을 보살펴주는 백진에게 면목이 없었다. 그에게 쓸데없는 걱정까지 끼치고 앉아있으니 더욱 볼 낯이 없었다. 결국 선담은 백진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감싸며 겨우 토해내듯 그를 불렀다.

“아저씨…”

“괜찮아.”

“……….”

“너랑 깊은 사이였던 거 안다. 성질 사나운 놈 같은데 분하겠지. 하지만 내 자리도, 네 입장도 변하진 않아.”

선담이 조심히 고개를 들자 백진은 기다렸다는 듯이 내뱉었다.

“아무래도 EEC를 파산시키거나 영구적인 중단으로 대체해야겠다. 더는 대책이 없겠어.”

그것이 비로소 선담에게 진정한 자유를 줄 것이다. 세상에 하나뿐인 인공자궁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것을 붙들 연구단체가 없으면 그것으로 그만이니까. 언론도 자본도 지분도. 티끌하나의 잔재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멸절시켜버리자. 백람의 자본을 쏟아 부어 흔적도 없이 묻어버리는 거다. 

-

“선담아ㅡ!”

마르쉐에서 선담이 첫 번째 그릇을 비워내자마자 석재가 도착했다. 양손에 큼직한 짐짝을 들고 헐레벌떡 들어온 석재는 선담을 보고선 반가운 기색을 금치 못했다. 

“난 꿔다 논 보릿자루냐?”

“아, 연백진이구나? 오랜만이다.”

“꺼져.”

“선담아, 생일 축하한다!”

선담은 석재가 막무가내로 넘기는 커다란 선물을 받아들며 고맙다는 말을 더듬더듬거렸다. 당황하거나 쑥스럽거나 놀라거나 하면 꼭 저렇게 말을 더듬었다. 백진은 만년솔로인 석재 앞에서 지나친 애정표현은ㅡ의리상ㅡ보여줄 수 없어 이를 꽉 물었다. 커다란 선물 꾸러미 때문인지 주변 테이블 시선이 잠시 그들에게 쏠렸다. 선담의 얼굴이 더욱 빨개졌다.

“풀어봐, 선담아. 너 좋아할 거 같아서 골랐어.”

“그래, 얼마나 대단한 거 사왔는지 한번 보자. 풀어봐라.”

푹신한 감촉으로 봐선 인형이었다. 커다란 인형. 선담은 꼭대기에 묶인 리본을 어렵사리 풀어냈다. 리본도 어찌나 큰지 매듭이 세번이나 지어져 있었다. 바스락거리며 벗겨진 포장지 안에서 역시나 인형머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선담이 끌어안기 벅찬 크기라 결국 석재가 도와주어 포장지를 다 걷어냈다. 커다란 곰인형이 상자를 하나 들고 있었다. 백진이 웩 하고 혀를 뺐다.

“이거 불곰이냐? 센스하고는.”

“보면서 긴장해, 연백진. 늘 지켜보고 있겠다는 뜻이야. 선담이 배게 옆에다 놔.”

“지랄하네. 이건 또 뭐야?”

백진은 선담이 끌어안고 버거워하는 곰인형의 주둥이를 주먹으로 툭툭 건들다가 상자를 열었다. 

“도미노.”

꽤나 큼지막한 나무로 된 비싼 도미노였다. 백진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석재를 바라보자 그가 당황했다.

“별로야? 도미노 안 좋아?”

“담에 이 녀석더러 보드게임 카페라도 차리라 할 거냐?”

“차려도 나랑 선담이랑 차릴 테니까 걱정 접길 바란다.”

“도미노래. 센스하고는.”

“야!”

선담은 두 남자의 다툼에도 아랑곳 않고 물끄러미 인형의 눈을 바라보다가 히히 웃었다. 

“불곰, 고마워. 꼭 끌어안고 잘게.”

“그러다 질식사 한다.”

석재는 활짝 웃으려다가 백진의 훼방에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백진은 물을 한 모금 들이켜면서 선담의 눈치를 힐끔 보았다. 아까 동생과 마주쳤을 때ㅡ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시간 전에ㅡ선담의 기분이 영 아닐 것 같아서 집으로 돌아갈 거냐고 물었었다. 당연히 그러자고 동의할 줄 알았던 선담은, 그러나 고개를 저었다. 석재와 약속을 깨고 싶지 않다며 오히려 침착함을 되찾으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입술을 꽉 다무는 모습에서 선담의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끝 모르고 나약하기만 한 줄 알았는데 표정만큼은 정연하여 백진은 의외의 기분을 체감했다. 최은협이 앞에 서 있을 때만해도 사자와 마주친 사슴마냥 벌벌 떨더니 그래도 제정신을 찾겠다고 노력했다. 그 후로는 아까의 일에 대해 일절 언급 없이 그저 차분히 미소만 지었다. 눈동자엔 여전히 불안이 그득했지만 의식적으로 밝은 모습을 유지하려는 게 눈에 보였다. 애쓰는 모습이 대견하다가도 한편으로는 안쓰럽고 영 힘들어 보이고해서 가여웠다. 

“백진이 넌 선물 없어?”

“음, 나도 있지.”

잠시 조용하던 백진이 짐을 뒤적였다. 선담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곳에 온 후로 계속 붙어 다녔는데 백진이 선물로 추정되는 무언가를 사는 걸 본 적이 없었다. 백진은 비서에게 맡기지 않은 물건 중에서 하얀색 종이가방에 하늘색 리본이 묶인 선물을 꺼내들었다. 석재가 휘파람을 휙 불었다.

“연백진이 누구한테 선물도 하는 사람이었구나.”

“너한테는 그런 적 없지.”

“나쁜놈.”

백진은 하하 웃으며 선담에게 선물을 건넸다.

“생일 축하해, 꼬맹아. 집에서 몰래 풀어봐라.”

그러자 석재가 야유했다.

“내 선물은 여기서 풀어보게 하더니 넌 이러는 게 어딨어?”

“네 건 굳이 안 풀어도 뭔지 뻔히 다 보였어. 꼬맹아, 혼자 있을 때 풀어봐.”

석재는 못 말리겠다는 듯 눈사이를 찡그리고 케이크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러자 직원이 쫓아와 빈 접시를 거둬가며 “노래 불러드릴까요?”하고 물었다. 선담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석재와 백진이 흔쾌히 수락했고 결국 선담은 화려한 고깔모자를 쓰게 되었다. 북과 탬버린을 들고 온 직원들이 율동하며 노래를 불러주었다. 선담이 민망하여 어깨를 펴지 못하는 사이 폴라로이드 카메라가 찰칵 터졌고 백진이 예고 없이 폭죽을 터트렸다(그는 손을 삐끗했다며 석재 쪽으로 펑 터트렸다). 

그리고 뿌옇게 피어오르는 폴라로이드 사진이 피사체를 드러냈을 때, 선담은 사진 안에 들어가 있는 모든 걸 볼 수 있었다. 자신의 생일, 가까스로 찾아온 일상, 생전 제대로 느껴보지 못했던 여유, 자신을 많이 아껴주는 석재와 한없이 믿고 따르게 되는 백진까지. 한 장의 사진이 그 모든 것들을 담고 있었다. 선담의 눈은 자꾸 사진 속 백진에게 향했다. 웃는 모습이 근사하고 같이 있으면 스스로의 가치를 찾게 되는 이 사람에게.

선담이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할 때 석재가 케이크 상자를 다시 챙겼다.

“선담아, 케이크는 가져가서 천천히 먹고 오늘은 여기서 저녁 많이 먹고 가.”

“불곰은?”

“난 단 거 싫어서. 알잖아.”

“아, 그랬지. 으응, 잘 먹을게.”

“꼬맹아, 뭐 먹고 싶냐. 가져다주랴?”

두 접시를 챙겨오겠다는 말에 선담은 같이 가겠다고 대꾸했다. 그러나 먼저 일어난 두 남자가 샐러드바(bar)로 향하는 모습을 쫓으려던 선담은 움직이지 못했다. 문득 백진이 건넨 선물을 풀어보지 않고서는 못 견디겠다란 생각이 든 것이다. 

바스락바스락

혼자만 보라는 백진의 장난을 꼭 진담으로 들은 선담은 샐러드바에서 왈가불가하는 석재와 백진의 눈치를 살피며 하늘색 리본을 풀었다. 종이가방 안에는 아이보리색의 얇고 널찍한 상자가 들어가 있었다. 어째선지 손끝이 떨려왔다. 선담은 숨을 한번 들이마시고 예쁜 상자의 모서리를 잡아 상자를 열었다. 

그곳엔, 손바닥만 한 배냇저고리가 곱게 접혀 있었다.

“아…….”

선담은 저도 모르게 탄성하고 말았다. 눈밭보다 새하얗고 솜털보다 더 부드러운, 정말 사랑스러운 배냇저고리였다. 세상에 태어난 아기가 맨 처음으로 입게 되는 옷. 선담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배냇저고리를 쓰다듬었다. 마치 처음으로 아기를 안아보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새하얀 배냇저고리. 꿈에서 보았던 그 아기가 입었다면 얼마나, 얼마나 사랑스러웠을까……. 

두 번 다시 아기를 품지 않겠다고 눈물이 말라버릴 정도로 울며 다짐한 겨울은 아직 완벽한 봄을 맞지 못했다. 허나 선담은 아직도 뱃속에 가득 든 새끼의 태동을 잊지 못했고, 배냇저고리를 보며 금세 흔들리는 마음 또한 주체하지 못했다. 백진이 자신의 새끼를 입양하겠다는 이야기를 해도 자신이 크게 거슬려하지 않았던 이유는, 다시는 아이를 만들기 어렵다고 다짐함과 동시에 포기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가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자는 말에는 잠을 설쳤다. 백진에게서 안정을 느끼게 되었고 그가 베푸는 권애에 한없이 몸을 떨었다. 

ㅡ넌 자연수정이 가능해.

자연수정이 가능하단 이야기는 사실 믿을 수 없었다. 백진이 거짓말할 까닭은 전혀 없었지만 그저 체감되지 않았다. 실험도중에도 그런 소리는 듣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백진이 자신을 속였을 리는 역시 없었다. 

아이를 갖고 함께 살자는 그의 말이 진심이라면, 지금은 무리더라도 훗날엔 그의 바람대로 그의 아이를 볼 수 있지 않을까. 백진의 가족이 인공자궁에서 태어난 아이를 기꺼이 받아준다고 한다면, 백진이 오랜 시간이 지나고서도 늘 변치 않는 마음으로 아이를 사랑해준다면, 이제는 다른 삶을 걷게 된 은협에게보다는 좀 더 나은 선물이 되지 않을까……. 자연수정도 실험의 성공으로 본다면 은협도 순수한 연구원으로서는 기뻐하지 않겠는가. 자신은 백진의 바람과 은협의 바람을 함께 이루어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이대로 ‘그’와의 인연은 끝인 거구나.

여섯살 적부터 신세를 참 많이 졌고, 감사해서 은혜를 갚고 싶었는데.

그의 아이라면 언제고 행복할 것이라 믿었는데…….

배냇저고리에서 따듯한 온기가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주변의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선담은 뜨거워지는 눈을 감았다. 아기를 유산하고 스스로 표독스러운 각오를 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역시나 자신은 아기를 바라고 있었다. 배냇저고리를 보자 이전 몇 년간 간절히 바라왔던 그 열망이 끓이지 않는 물줄기처럼 가슴을 적셨다. 백진과 함께 하면서 뒤늦게나마 실험의 성공을 볼 수 있다면 더는 바랄게 없다는 생각이 밀물처럼 밀려들어왔다. 다시는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다짐은 결국 파도에 무너져 내릴 모래성과 같았나 보다. 몸이 말을 안 들어 실험에 난항을 겪고 죽을만치 고생했음에도 결국엔 이렇게 마음먹게 되는구나. 자궁이 뱃속에서 자신을 썩게 내버려두지 말라고 간절히 바라는 것일 수도 있겠다. 선담은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EEC에 다시 발을 들여놓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연백진 같은 사람을 만나게 됐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막연한 억측이었지만 지금의 선담에게는 가슴을 짜하게 울릴 정도로 설득력이 있었다.

다시 한번 수정하게 되어도 괜찮을까……?

힘들어하는 나를 구해주고 오랫동안 함께하고 싶다고 진심으로 속삭여주는 그와 함께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하지만 만약 이번에도 잘못된 아이가 만들어지면, 그땐 어떻게 되는 걸까……. 앞일은 아무도 모르는 일임에도 상처받아 문드러졌던 가슴은 쉬 소심해져서는 선담의 다짐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괜찮지 않을까하고 시작하게 된 한가닥 희망은 그의 가슴 깊숙한 곳으로 곧게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꼬맹이, 따라온다더니 뭐하냐? 맥주 마실래?”

홀로 상념에 잠긴 어깨를 백진이 툭툭 두드렸다. 그는 한손에 두 쟁반을 겹쳐들고 또 한손에는 맥주잔 두 잔을 겹쳐들고 서 있었다. 선담은 고개를 저으려다가 이내 끄덕이고 말았다. 선담은 맥주를 시원하게 넘기는 백진을 똑같이 따라했다. 시큼하고 톡 쏘는 맛이 입안을 가득 메웠다.

“선물 풀어 봤어?”

선담은 대답 않고 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백진이 다시 물었다.

“……맘에 들어?”

선담은 눈을 내리깔았다. 조금은 이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대는 이미 서른둘의 나이로, 지극히 이성적이고 독립적인 사람이었고 자신도 빠른 시간에 그에게 깊은 애정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살다보면 여느 때처럼 최은협이 떠오를 것이다. 자주자주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다시 아기를 갖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괜찮지 않을까. 시간이 상처를 치유하게끔 도와주지 않을까.

나에게 이런 기회를 준 사람은, 

이미 하늘나라로 가버린 첫 번째 아기가 아니었을까.

‘너만 좋다면 정원 넓은 집 사서 같이 살자. 네가 해달라는 건 내가 다 해줄게. 다신 아프지 않게 해줄게. 그래도 싫어?’

좋았다. 아프지 않을 수만 있다면, 그것도 이 남자 곁이라면 좋았다.

“아저씨, 저랑 오래도록 같이 살 거예요……?”

선담에게 먹여주겠다고 스파게티를 돌돌 말던 백진의 몸짓이 딱 멈췄다. 그는 노란색 조명 아래에 청초하게 앉아있는 선담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평소에도 그저 어여쁘다고 느꼈지만 이번은 더했다. 선담의 옆자리에 놓인 불곰은 동그랗고 새카만 눈으로 어서 대답을 내놓으라는 듯이 허허 웃고 있었다. 백진은 이 시간을 방해하지 말라는 듯 불곰을 노려보다가 결국 함께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하지. 아저씨 장가들고 자식 볼 나이야. 그러니 어서 구제해주라.”

선담은 웃고 말았다. EEC도, 연지애도, 최은협마저도 이 순간엔 잊어버리고 백진에게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보여주었다. 가슴을 적시고 흘러나오는 기쁨을 숨길 수 없었다.

연백진이 홍선담을 만난 지 백일하고도 일곱 번째 열흘. 

처음으로 보게 된 꽃미소였다.

- - - -

길호문은 새벽에 터진 비상전화 때문에 심장을 졸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신자는 전상목이었다. 수화기를 들기 전에 길호문의 머릿속에는 온갖 잡생각이 빗발쳤다. 첫 번째 예상은 도너에 대한 것이었다. 혹여 도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1차로 떠오르자 순식간에 등 뒤가 젖었다. 그 다음은 출자금 문제였다. 혹여 후원위원회에 가담한 단체 중 발을 빼겠다는 기업이 있다면? 하긴 그렇게 되면 백람이 좋다구나 달려들어 자본을 더욱 확충할 것이다. 차기 후원위원장이 그렇게나 적극적이었으니 두 번째 걱정은 이제 문제가 안 되었다. 세발을 로 떠오른 근심거리는 줄줄이 소시지처럼 물고 이어지는 탓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PTA사가 자본을 재개하기 시작했나? 아님 연의범이 언제쯤 재수정을 시도할 거냐고 압박해왔나? 연구원 중 누군가가 지연되는 연구에 불만이 폭발해 임직원을 선동했을 수도 있다. 물론 두 번 생각해보면 모두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놀라서 잠에 깬 노인네의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했다.

[소장님, 전상목입니다.]

“대체 무슨 일인가. 이 시간에.”

[은협이가 연락을 드렸습니다. 헌데 소장님께서 전화를 안 받으신다고…]

“그랬어?”

길호문은 허겁지겁 부재중 전화를 확인했다. 정말로 최은협에게서 전화가 와 있었다.

“무슨 일인가 그래?”

[아무래도 직접 만나서 이야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도 급한 문제라고만 들은 상태라… 은협이는 벌써 출발했고 저도 가는 중입니다. 소장님 댁으로요.]

“뭐야? 귀뜸이라도 해주게.”

수화기 저편은 잠잠했다. 인내하고 기다리려던 길호문은 괜히 긴박해져서 “무슨 일인데 그러냐구?”하고 되물었다. 그러나 전상목도 어려워하는 듯했다.

[저도 제대로 듣지 못했어요. 금방 가겠습니다, 소장님.]

그는 길호문의 동의도 없이 급히 전화를 끊었다.

-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이럴 때 담배를 피워봤자 도움이 안 된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습관처럼 손이 갔다. 하지만 허옇게 피어오르는 담배연기로는 선담의 목둘레에 새겨져있던 자국을 인정할 수도, 기억에서 지워버릴 수도 없었다. 손등 관절이 하얗게 샐 정도로 억세게 핸들을 쥐었던 최은협은 쾌속으로 주차를 마치자마자 차에서 내렸다. 기다란 다리가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계단을 올랐다. 대문에 멈춰서 초인종을 누르자 곧바로 철문이 열렸다. 저택의 돌담길을 단숨에 뛰어넘고 최은협이 현관문을 두드렸다.

“이제 왔나!”

벌컥 열린 문 너머에는 전상목도 이미 자리를 한 뒤였다. 안색이 좋지 못했다. 길호문도 겨우 빗질한 머리에 셔츠와 면바지를 대충 껴입은 차림이었다. 노인네가 많이 놀라긴 했나보았다. 의도한 대로 길호문이 몹시 당황한 것 같아서 최은협은 입가를 슬쩍 올렸다. 그가 자리에 앉자마자 길호문은 호통을 쳤다.

“인석아! 오밤중에 이게 대체 무슨 소란이야!”

“오늘 연백진 씨와 선담이를 만났습니다.”

“그래? 간간히 소식을 듣긴 했는데 몸은 괜찮구? 선담이 좋아 뵈더냐?”

“많이 회복된 것 같습니다.”

“설마 그 이야기 전하려고 이 시각에 자는 사람들 죄 깨운 거냐?”

최은협은 고개를 저었다. 길호문이 테이블을 쾅 쳤다.

“그럼 뭐야?”

“돌려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래, 그래서 내가 너 기다린 거 아니냐. 어서 말해봐라!”

전상목도 온 신경을 집중해서 최은협을 주목했다. 노인네 혼자 사는 적적한 집안이 가뜩이나 쓸데없이 넓어서 더욱 휑했다. 최은협의 낮고 거친 목소리가 공연히 크게 울렸다.

“백람에서 도너를 EEC로 돌려보내지 않을 모양입니다.”

“뭐야?!”

“으, 은협아, 정말이니?”

최은협은 불필요한 대답은 해주지 않는 버릇이 있었다. 그의 침묵은 곧 ‘그렇다’다. 길호문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경악을 감추지 못해 다짜고짜 물었다.

“지애는 뭐라고 하냐!”

은협은 미간을 찌푸렸다. 영감들 속이 다 이렇다. 선담이 있을 당시에는 EEC의 성황이 자신의 바람도 충족시켜주었기 때문에 돈줄인 연지애가 붙어있는 것에 별다른 불만은 없었지만, 위원회에 무슨 문제라도 생길 시 재확인을 위해 연지애를 붙여놓자는 제안은 길호문의 발상이었기에 짜증이 났다. 오늘밤은 내내 말이 많아지겠다고 생각하며 은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연지애는 연백진 씨에 대항할만한 게 아닙니다. 그저 떼나 쓸 줄 아는 막내일 뿐이죠. 제가 쪼아봤자 연지애의 투정정도야 간단히 무시될 겁니다.”

“이런……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은협은 최대한 감정 없이 말하자고 자신을 독려했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표정에 변화를 주어선 안 된다고. 그는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그 자가 녀석을…… 도너를 많이 아끼는 것 같습니다. EEC가 아무리 주의한대도 도너에게 따르는 고통은 별개니 그 점을 염려하는 것 같습,”

“잠깐! 그런다고 되는 일이 아니잖나! 정말로 연백진이가 그리 말했어? 도너를 데리고 간다고? 인공자궁을 포기하고?”

자꾸 말을 끊어내는 노인네가 귀찮다고 생각하면서 최은협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전상목은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하고 물었다. 그 질문 또한 은협에게 날아왔다. 경황없는 길호문보다 이 상황에서도 침착하기 그지없는 최은협에게 믿음이 갔기 때문이리라. 은협은 이 현실감각 없는 인간들을 거의 체념하며 대답했다.

“안될 것도 없잖습니까. PTA사는 임상실험에 있어 이제 껍데기만 남은 입장입니다. 그 덕분에 공중에 붕 떠버렸던 EEC를 세워준 후원위원회가 실질적으로는 백람의 소유인데 위원대표가 도너를 보호한다는 게 무슨 대숩니까?”

“그건 그래. 이거 정말 큰일인데…”

“설마 연백진이가! 내 그 새끼 고집부릴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한국에서는 꼬리 잡힐 게 많습니다. 인권문제라도 들먹이기 시작하면 EEC는 파산입니다. 바다건너 미국의 거대기업에서 실험하다는 개념은 이제 없습니다. 연구도중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해봤자 먹혀들 리 없습니다. 삽시에 공격받아 터져버릴 겁니다.”

길호문은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전상목은 찍소리도 못한 채였다. 최은협만 여유로웠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그가 이들을 몰아붙인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이성적으로 보면 현시점에서 EEC에서의 실험은 더는 불가능했다. 아니, 결정 난 건 없었지만 불가능에 가깝다고만 해둬도 백번 양보한 것일 테였다. 아마도 연백진은 녀석에게 완벽하게 매혹된 듯 했고, 그런 연백진이 마음만 먹고 휘두르면 홍선담은 영원히 EEC에 소속되지 않을 수 있으니 말이다. 물론 연지애의 불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연의범이 뛰어든 자리지만, 그렇다면 EEC를 해체하고 다른 기관을 만드는 것만으로도 그 부자(父子)는 원하는 바를 성취할 수 있었다. 인공자궁을 연구할 수 있는 실험팀은 EEC만 있는 게 아니니까. 그렇게 새 실험팀을 꾸리면 연백진은 거리낌 없이 홍선담을 보호할 수도 있고 도너를 대체할 수도 있다. 이제는 한걸음 잘못 디디는 것만으로도 순식간에 판이 뒤집힐 일이었다. 2차적으로 실험이 더욱 본격화되면 PTA사에서 인공자궁의 샘플이라도 사들일 수 있을지 누가 아는가. 그리고 그렇게 되면……

홍선담은 더는 자신의 손아귀 안이 아니게 된다.

무엇을 위해 EEC의 전 직원의 눈을 속여 홍선담의 뱃속에서 자연수정을 가능토록 만들었는지를 잊어선 안 된다. 자신이 끝끝내 길호문 사단에 들어와 여기까지 버틴 이유를. 그것을 기억하고 있어야 했다. 자신이 진정 원했던 것. 지독하고 혹독하게 홍선담을 몰아붙이고 이성을 잃으며 날뛰었던 자신에게 타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 남은 하나. 그 하나만은 끝까지 고수해야만 했다. 여기서 포기할 순 없었다. 이제는 사면이 막혔으니 더더욱 돌아갈 수 없었다. 최은협은 자신의 주먹을 내려다보았다.

길호문은 머리를 싸매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만약 그렇게 되면 우리 EEC는 아무런 소득도 없이 끝이겠구나…… 늦어도 2주 뒤엔 연의범이 이임하고 그 자리를 연백진이가 잡으면서 지시사항이 떨어질 거다. 어쩌면 각오를 해야 할지 모르겠어. 정말 기분 엿 같은 일이 아닐 수 없군…….”

은협은 숨을 깊게 마셨다가 뱉었다. 두 남자의 시선이 동시에 은협에게로 쏠렸다. 

“아무런 소득도 없지는 않을 겁니다. 홍선담은…… 수정을 하게 될 겁니다.”

“실험이 중단된 이 마당에 어떻게 수정이 된단 말이냐?”

“제가 차기위원장 취임식 때 녀석을 설득하겠습니다. 연지애를 통해 집으로 찾아가려고 했는데 그게 어렵게 되어서 지금으로선 만날 수 있을 때가 그때뿐입니다.”

그러자 길호문이 미간을 찡그렸다.

“곧 죽어도 따르던 너도 놓고 가버린 녀석이 네 말을 듣는다고?”

이래저래 짜증이 겹쳐 저도 모르게 튀어나간 말이었지만 길호문은 순간 크게 놀랐다. 자신을 쳐다보는 최은협의 눈빛이…… 기겁할 정도로 섬뜩했기 때문이다. 그저 바라보는 것뿐인데도 굶주린 야수의 눈동자처럼 낯설고 두렵기가 그지없었다.

“최, 최은협… 늙은이에게 보내는 눈빛이, 그게 뭐냐.”

“제 말 자르지 말고 잘 들으시죠, 소장님. 그리고 팀장님. 이대로 물러난다면 당신들의 반 십년은 그 정도밖에 안되었던 겁니다.”

알게 모르게 실험의 애착이 대단했던 전상목은 최은협의 눈빛에서 알 수 없는 기류를 본능적으로 읽고 그에 순응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절실하게 동의했다. 이 연구에 얼마나 많은 걸 기대해왔는가. 전상목 또한 길호문에 지지 않게 크게 열 오른 얼굴이었다. 

“……….”

초조한 긴장감이 주변을 맴돌았다. 은협은 미간의 주름을 풀지 않았다. 

원래는 이런 부탁 따위 누구에게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늘 혼자 살아왔고, 홍선담에게서 연정을 느꼈을 때에도 자신을 잃어본 적은 없었다. 홍선담이 순종적이었기 때문도 있지만 그런 게 아니었어도 최은협은 누구에게도 손을 벌리지는 않았으리라. 하지만 이번만큼은 다른 이의 도움이 필요했다. 혹시 벌어질지 모를 EEC의 잠정 연구중단과 홍선담의 부재를 막아내기 위한, 자신의 마지막 수단을 위해서 말이다.

“제가 딱 30분만 홍선담과 둘만 있을 수 있게 협조해주십시오.”

- - - -

“자, 팬티하고 티셔츠 두 장 남았네.”

그러자 선담이 우물쭈물 대꾸했다.

“전 애초에 많이 안 입었잖아요. 좀 불리해요.”

“어차피 내가 한번도 안 졌는데 불리하고 말고가 어딨어? 너밖에 벗을 일이 없었는데.”

“그래도…”

“양말도 한짝씩 벗는 걸로 쳐주고 벨트도 옷으로 봐주고 주머니 속의 동전도 하나하나 개수로 쳐줬는데 무슨 소리야?”

듣고 보니 정말 많이 봐줬다는 생각이 들어 선담은 따지지 못했다. 백진은 “몸에 걸치고 있는 게 또 있으면 봐주지 뭐.”하고 능청스럽게 웃었다. 선담은 울상이 되었다. 처음부터 이런 이상한 게임은 참여하는 게 아니었다. 

EEC의 후원위원장 자리를 인계받는 문제 때문에 백진은 요즘 통 바빴다. 인수인계에 별다를 게 없다고 해도 그의 속내는 EEC를 꺾는데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혼자서 알아보는 게 많은 듯했다. 마음이 영 불편했지만 그에게는 임직원에게 손해가 없게 해달라고 부탁하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집안은 늘 조용했다. 연지애와 그렇게 마주쳤다 헤어져서 무슨 큰일이라도 날 줄 알았는데, 생각해보니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지 않은가. 은협과 자신이 연인사이였다는 것만 모른다면 백진과 은협의 사이가 흉흉한 거야 그녀가 참견할 권한 밖이다. 물론 다른 식구들과도 접촉은 없었다. 회장님은 다 알고 있어도 형제간은 소원한 듯했다. 아니, 누구도 5층에는 올라오지 않았다고 해야 옳았다. 가끔씩 백진이 내려가서 그들에게 한번씩 얼굴을 비치는 것이 다였다. ‘가족’을 동경해왔던 선담으로선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백진의 말대로 EEC 문제가 정리될 때까지는 자신도 그쪽이 더 낫다고 여겼다. 그 EEC 문제에는 아무래도 연지애와 은협의 관계도 포함된 것 같았고, 동의하는 수밖에 없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이 멀어진다고 했던가. 넓은 5층을 곳곳이 누비며 백진과 함께 밥을 먹고, 잠들고, 가끔씩 찾아오는 석재와 함께 웃으니 EEC에서 실험군으로 고생했던 일들이 아주 먼 옛날일 같았다. 

‘넌 강해질 필요가 있어. 다시는 울지 마. 울게 하지도 않을 테지만 강해져야 너 스스로도 행복할 수 있을 테니까.’

좌우명처럼 굳어버린 백진의 주문에, 밖으로 나가놀든 방에만 박혀있든 한결같이 보호받는 선담은 정말로 자신이 강해질 것이라 믿었다.

“자, 티셔츠부터 벗을래? 아님 팬티부터?”

어쨌든 이런저런 이유로 바쁜 백진이 오늘 하루는 집에만 붙어있다기에 선담은 보드게임을ㅡ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할리갈리를ㅡ하자고 졸랐다. 헌데 웬일로 공짜로 해줄 수는 없다며 백진이 내기를 걸었다. ‘옷 벗기 게임.’ 연인이라면 꼭 거쳐야하는 필수코스란다. ‘연인’이란 단어보다는 ‘옷 벗기’란 단어에서 덜컥 놀랐으나 선담도 순발력에는 자신이 있었다. 백진을 제압한 적이 꽤 있었으니까. 때문에 득의양양하게 시작한 게임에 선담은 뒤늦게 깨달았다. 지금까지는 백진이 쉬엄쉬엄 봐주었다란 사실을! 원하는 내기가 걸리자 이 인간이 삽시에 돌변하여 순발력으로는 세계 정상급이 되어있었다. 뒤통수를 맞아도 눈알이 튀어나올 만큼 대차게 맞았다는 억울함에 선담은 티셔츠를 잡고 불만스럽게 쭝쭝거렸다. 이미 허벅다리를 훤하게 다 보여주었는데 욕심도 많다고.

“벗겨주랴?”

“아, 안돼요.”

“안 된다고 하면 더 하고 싶던데.”

선담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가뜩이나 허벅지에 입술자국이 많이 남아있어서 민망한데 가슴은 더했기 때문이다. 지난밤에도 백진은 무슨 걸신들린 사람마냥 자신의 가슴을 쭉쭉 빨았다. 섹스다운 섹스도 아니지만 애무만큼은 너무 진해서 스스로 몸을 내려다보기가 겁날 지경이었다.

“그럼 티, 티셔츠부터요.”

“그래, 감상 좀 하자. 마침 햇빛도 잘 들어오는데.”

승부는 승부니 무를 순 없다고 생각하고 선담이 최대한 터프하게 팔을 크로스 했다. 재빠르게 옷을 벗는다는 게 턱에 걸려서 허우적거리다 백진이 웃음을 터트리기 전에 후다닥 벗어던졌다. 

“보기 좋다.”

“카드나 섞으세요.”

티셔츠를 잡고 허우적거리는 동안 백진이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쏜살같이 팬티를 쭉 잡아당기는 손을 탁 쳐내고 선담이 카드를 들었다.

“아직 승부 안 났으니까 카드부터, 우아…!”

백진은 카드를 쥐어주며 따지고 드는 선담의 입을 손바닥으로 막고 그대로 안아들었다. 침대 바로 밑에 앉아 놀던 그들이라 선담을 금세 침대위로 올려놓을 수 있었다. 선담이 팬티를 벗을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는데 생각해보니 자기가 벗겨주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이번엔 백진이 선담의 입술을 입으로 막았다. 이제 적당히 살이 올라 낭창낭창하니 부드러운 몸을 두 팔로 강하게 끌어안자 선담도 어렵사리 목덜미에 팔을 둘러 매달렸다. 두 사람의 몸이 시트를 누비는 소리와 가끔씩 촉, 촉, 하고 떨어지는 달짝지근한 입술소리만 충만했다. 선담에게서는 여전히 좋은 냄새가 났다. 

“네 냄새는 어디서 나는 냄새냐?”

“냄새타령 좀 그만해요.”

“젖꼭지냐?”

타액이 주욱 이어진 채 속삭이다 백진이 선담의 유두를 꼬집어 당겼다. 장난기 가득한 행동에 선담이 그를 밀어냈다. 물론 백진이야 꿈쩍도 않고 오히려 제 티셔츠를 벗어던졌지만 말이다. 부드러운 면 시트에 등이 닿고 백진의 탄탄한 복근이 위에서 누르자 몹시 야한 느낌이 들었다. 길고 두툼한 혀가 다시 입안에 들어와 혼까지 빨아먹을 양 자신을 괴롭혔다. 선담은 정신이 없었다. 절로 눈이 감기고 그가 몸 이곳저곳을 만질 때마다 창피하게도 온몸이 꿈틀거렸다. 속옷이 벗겨지는데도 선담은 반항하지 않았다.

“여기가 아니야?”

“장난치지 마요….”

“그럼 여기.”

엊그제 밤 내도록 입안에서 농락당한 성기가 금세 손길을 눈치 채고 긴장했다. 백진의 커다란 손바닥은 그대로 선담의 남성을 모조리 그러쥐었다. 손가락 다섯 개가 성기를 감싸고 부드럽게 어루만져주었다. 숨을 가쁘게 내쉬는 선담의 미간에 입을 맞추며 백진이 자꾸 웃었다.

“약하기는.”

“아저씨…….”

“젖꼭지나 고추나 예민해가지고선. 이 새초름한게 뭘 느끼긴 하냐?”

선담은 백진도 나신이란 걸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허벅지에까지 저렇게 정교한 근육을 갖춘 남자는 은협 외엔 생전 처음 보았다. 다른 남자 허벅지를 유심히 들여다볼 이유도 없었지만 어쨌든 황금비율로 근육이 분할된 몸 곳곳은 숨기려야 숨길 수 없는 부분이었다. 단단하게 벌어진 가슴팍부터 근육이 제자리에 딱 잡힌 복근과 실팍한 허리는 괜한 위축감까지 들게 만들었다. 백진은 배꼽에서부터 이어진 자신의 음모를 선담의 음모에 비비는 장난을 쳐 낯부끄럽게 만들었다. 

선담은 목덜미에 키스를 퍼붓는 그의 성기와 자신의 성기가 닿는 걸 최대한 방지해보려고 허리를 요리조리 비틀었다. 이제는 나체로 끌어안을 수 있는 내공이 쌓였지만ㅡ백진은 하나도 안 어색하대도ㅡ자신은 아직 많이 어려웠다. 이 방이 너무 밝은 것도 문제였다. 커튼을 치지 않으면 밤에도 달빛이 쏟아져 들어와 시야가 밝았다. 이러니 낮에는 더했다. 

보드라운 성기에 제 것을 부비고 싶은데 상대가 자꾸 피하자 백진은 아예 허리를 바짝 끌어안아 자신의 아래와 딱 붙였다. 벌건 회음을 귀두가 쿡쿡 눌렀다. 이제껏 둘 사이엔 페팅만 있을 뿐 삽입은 없었다. 덕분에 백진의 굵직한 성기가 자신의 다리사이를 찌르고 누벼도 이제 선담은 크게 두려워하지 않았다. 늘씬하게 빠진 두 다리를 활짝 벌려놓고 백진은 자신의 성기를 그의 몸에 마찰시켰다. 힘줄이 불거진 거근이 애액을 가득 묻히며 선담의 아랫도리를 적셔놓았다. 음모가 젖고 살갗이 온통 미끈거렸다. 전희가 무척 짜릿해 선담은 그만으로도 성기에서 정액을 줄줄 흘렸다. 백진은 유두가 붓도록 씹고 잡아당기며 쉬지 않고 입술자국을 새기는데 지나지 않아 선담이 좋아하는 방식으로 성기를 애무해 질척한 사정을 유도했다. 조심스럽게 입에 품고 핥았다. 선담이 지쳐 떨어져나갈 때까지 어지간해서는 그냥 놓아주지 않았다. 

유두가 진한색이 되어 바짝 서고 온몸에 벌건 자국을 수두룩하게 새긴 채 선담이 백진에게 음경을 잡혀 헐떡거렸다. 피부가 벗겨질 정도로 만져지고 뜨거운 남근과 맞비벼지고 예쁘다는 말로 쉬지 않고 애무 당했다. 백진이 성기를 만져주며 귓바퀴를 간질이자 선담이 어깨를 움츠리다 그만 백진의 복부에 정액을 튀기고 말았다. 우유색 체액이 백진의 배꼽과 음모주변에 묻어났다. 그의 몸에 무어갈 묻히는 건 처음이라 선담이 튀어 오르듯 벌떡 일어났다. 가뜩이나 빨간 얼굴에 눈시울까지 붉어진 채였다. 

“미, 미안해요.”

“뭐가.”

“닦아드릴게요.”

어차피 자신이 내보내는 체액은 다 마시려고 드는 남자인데 이깟 게 대수롭지도 않을 것임에도 선담은 창피해 숨고 싶었다. 늘상 사정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공개하면서도 역시 이런 경우는 더없이 창피했던 것이다. 그런 속내를 다 아는 백진은 자신의 배를 손으로 급하게 훔쳐내려는 선담을 잡고 씨익 웃었다.

“정 미안하거든 거기도 보여줘.”

“거기……? ……아, 안돼요!”

“난 되는데. 볼래.”

“아저씨!”

백진이 선담을 뒤집어 순식간에 엉덩이를 번쩍 들어올렸다. 선담이 몸을 도로 뒤집으려고 하자 허벅지를 아주 겨드랑이에 끼웠다. 다리가 쭉 벌어지면서 닫혀있던 틈으로 시원한 공기가 와 닿았다. 선담의 분문을 한번 입에 댄 이후부터 백진은 집요하게 그곳에 집착했다. 본능적인 일이라 탓할 수는 없었지만 왜 꼭 그렇게 몸 깊숙이 숨어있는 부위를 까뒤집고 관찰하고 싶어 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 선담은 이때마다 어쩔 줄을 몰랐다. 이불에 얼굴을 푹 파묻고 있으면 어김없이 백진이 그곳에 대고 혀를 놀렸다. 역시나 이번에도 주름을 한껏 벌리고선 뜨거운 살덩이로 그곳을 쭈욱 말아 올렸다. 순식간에 선담의 귓바퀴가 새빨개졌다.

“꼬맹아, 부드러워.”

정말 부드러웠다. 부드럽다 못해 물기를 한껏 배어먹은 것처럼 물렀다. 혀로 핥아 올리면 주름이 그대로 말려 올라가고 쿡쿡 찌를 때마다 아무리 얌전히 있으려하는 것 같아도 푸르르르 떨고 움찔거렸다. 혀를 넓게 펴 꾸욱 누르며 쓸어 올리면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벌름거렸다. 살금살금 간질이면 창피해서 싫다는 녀석 입에서 달콤한 신음이 쏟아져 나왔다. 음경을 입에 물고 흔들어줄 때만큼이나 몹시도 느껴서, 이곳을 애무하다 고개를 들어보면 선담은 거의 우는 얼굴이었다. 늘상 느끼는 것이지만 녀석이 그런 표정을 지으면 백진은 만족스럽다 못해 황홀했다.

엉덩이골을 따라 쭉 뻗은 등줄기를 손바닥으로 쓰다듬자 선담이 자꾸 아저씨, 그만 보세요, 하고 칭얼거렸다. 일단 백진이 덤벼드니 내버려두기는 하는데 아주 드러내놓고 애무 받으려니 창피해서 저랬다. 백진은 대답 없이 혀로 회음을 싹싹 핥다가 분문을 쿡 찔렀다. 얇은 주름이 꽃봉오리처럼 정결하게 맞물려있었다. 주변이 발갰다. 앙다문 입구를 혀로 후비고 들어가자 선담이 시트를 세게 쥐었다. 속살을 파헤치듯 혀를 밀어 넣었다. 지금껏 핥아주기만 했지 이렇게 들어가 보려고 한 적은 없었다. 힘주어 혀를 반쯤 밀어 넣자 선담이 온몸을 죄다 떨었다. 처음엔 힘을 주는가 하더니 혀를 뺐다 다시 집어넣자 허리가 전율하기 시작했다. 주름을 벌려보면 번질번질하고 빨간 속살이 남몰래 모습을 보였다가 아닌척 쏙 숨어들어갔다. 선담이 그러지 말라고 하도 보채는데다 어차피 혓바닥 가지고는 속살을 제대로 볼 수는 없을 것 같아서 백진은 평소 하던 대로 싹싹하게 애무했다. 

다시 곧추서 털렁거리던 선담의 성기에서 정액이 뚝뚝 떨어져 시트를 적셨다. 몇 번 만져주자 다시 쉽게 사정하기 시작했다. 사정을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아랫도리에 힘이 들어가면서 선담은 잘 젖은 분문을 조였다가 풀기를 반복했다. 백진이 넋을 잃고 지켜보는지도 모른 채 입으로는 앗, 앗, 하고 흐느끼며 말이다. 자기 쪽으로 엉덩이를 향하고 덜렁거리며 분출하는 모습이 귀여워서 백진은 다시 장난기가 도졌다. 성기를 뒤쪽으로 쭉 잡아당겼다. 선담은 몸을 푸들거릴 뿐 그래도 계속 싸댔다. 금세 손바닥이 묽은 정액으로 가득했다. 사정하느라 더욱 예민해진 것을 자꾸 뒤쪽으로 잡아당겨 만지작거리자 선담이 무릎을 허물어트리며 울먹거렸다.

“우리 꼬맹이 아저씨 때문에 오늘 많이도 싸네. 좋냐?”

“아, 아저씨….”

“응.”

“해도, 괜찮아요.”

만족스런 장면을 지켜본 백진이 날개뼈에 키스할 때, 선담이 자신의 치부를 벌려주며 허리를 슬쩍 들어올렸다. 타액으로 축축이 젖은 데다 푹 익어버린 곳을 활짝 벌려주는 모습은 정말이지, 잔인할 정도로 야했다. 

“괜찮아요. 해도…….”

선담은 빨개진 눈으로 백진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자신의 연한 살을 벌려준 채였다. 아마도 자신을 이토록 탐하면서도 삽입을 않는 백진에 대한 배려일 것이다. 욕망이 있으니 애무를 하는 것일 테고, 보통수컷이라면 자신의 성기를 어딘가에 끼워 넣고 압박받고 싶을 테니까. 선담이 이제야 온전히 그를 받아들이겠다고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치부를 벌린 손이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백진은 그런 선담에게 흡족함을 느끼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어쨌든 심정이 묘해져 되레 심술궂게 물었다.

“뭘 해?”

벌려준 곳을 손가락으로 살살 만지자 선담이 몸을 떨었다.

“여기에…… 아저씨가……”

“계속 말해봐.”

축, 하고 목덜미에 키스하면서 분문을 쓰다듬는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선담은 간신히 말을 이었다.

“여기…”

“응.”

“아저씨 꺼 넣어도…”

“된다고?”

“네….”

백진은 씨익 웃었다.

“싫은데.”

시선을 떨어트리던 선담이 고개를 들었다. 눈에는 당혹감이 서려있었다. 애무하는 내내 터질 것 같은 음경을 배출도 못하고 있으면서 백진이 거절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선담의 심란한 속을 눈치챘는지 백진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콘돔 없어.”

“네…?”

“대책 없이 들어서면 어쩌려고.”

“아.”

“배냇저고리 하나 사주고 바로 그럴 순 없지.”

선담이 눈을 크게 떴다. 자연수정이 가능하단 사실을ㅡ믿기지는 않아도ㅡ인식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실제로 듣게 되니 묘하기 짝이 없었다. 선담이 알맞은 대답을 찾지 못해 눈을 굴리는 사이 백진이 엎드린 선담 위에 올라탔다. 그의 뜨거운 남근이 등을 애무 받는 내내 몸 이곳저곳에 닿았다. 선담은 어쩐지 감동스럽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해서 얌전히 있었다.

“그리고 내가 널 완벽하게 안기에는 아직 너에 대해 모르는 게 너무 많아.”

“모르는 거요……?”

“그래, 들어서 마냥 기분 좋을 리는 없지만 그래도 너에 대해선 다 알아놨으면 하거든. 석재한테 들은 거 말고. 네 과거나, 네 바람이나 그런 것들.”

백진은 여전히 정성스럽게 등을 보듬어주었다. 

“네가 제대로 말해주기 전까지는 네가 완전하게 날 받아들인 게 아니라고 생각할 거니까.”

선담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가까운 시일 내로 얘기하려고 했었다. 함께 하기로 한 이상 백진이 섭섭해할만한 건더기는 남겨두지 않을 것이라고. 내가 어떻게 태어나 어디서 어떻게 자라왔는지, 이전의 삶은 어땠는지, 어떤 각오로 EEC에 합류했는지, 그리고 영국에서 있었던 시간과, 그가 원한다면 은협과의 시간도 모두……. 선담은 조용히 속삭였다.

“아저씨가 좋아요.”

등에도 빨갛게 흔적을 남기던 백진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선담은 뺨을 시트에 기댄 채 조용히 속삭였다.

“평생 저를 돌봐준 사람을 쉽게 잊을 수는 없어요. 하지만…… 그래도 아저씨가 좋아요. 오랫동안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저씨가 원하면 아저씨 애기도 보고 싶고,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아저씨랑 같이 살고 싶어요.”

백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선담을 꽉 껴안았을 뿐이다. 선담은 그런 백진의 단단한 팔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그러니까 하고 싶은 대로 하셔도 돼요. 아저씨랑 있으면 아프지 않을 것 같아요.”

백진이 고개를 숙여 선담의 눈꼬리에 키스했다. 이제는 이런 얘기를 하면서 눈물을 글썽거리기는커녕 절대 울지 않는 녀석이 대견했다. 하지만 무턱대고 녀석의 몸 안으로 들어갈 순 없었다. EEC를 소각시키고 최은협을 연지애에게서도 떨어트린 뒤 길호문 사단과 묶어서 해외로 보낼 생각이었다. 그리고 곧바로 식구들 득실거리는 이곳에서 벗어나 원룸으로 짐을 옮기고 느긋하게 선담이 맘에 들어 하는 집을 볼 계획이었다. 아버지가 조급해 할 테니 EEC를 대체하는 기관을ㅡ형식적으로나마ㅡ설립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되면 녀석도 안정을 찾을 테고 약속대로 자신도 입에 담고 돌아다닐 여유가 생길테다. 

선담과의 아기는 그렇게 안정적인 시기에 보고 싶었다.

“그래도 안 해. 네 마음에 남아있을만한 거 싹 다 해치우고 이 우중충한 집에서 나가면 할 거다.”

선담은 얇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백진이 선담의 허벅지를 곧게 오므리며 속삭였다. “허벅지 모아봐.” 무얼 하려는지는 몰랐지만 선담은 만져주는 대로 허벅지를 모았다. 잠시 후 엉덩이 바로 밑의 회음과 허벅지가 맞물린 곳으로 젖은 살덩이가 침투했다. 선담이 화들짝 놀라 제 허벅지를 단단히 모으는 백진의 팔을 잡았다. 그 사이 허벅지와 엉덩이 사이에 꽂혔던 성기가 쑥 빠져나갔다.

“가만히 있어봐, 꼬맹이.”

“아……!”

백진은 자신의 남근을 선담의 허벅지에 끼워 넣는 것으로 삽입을 대체했다. 지금껏 어떻게 참았냐고 묻고 싶을 정도로 여유 없는 모습이었다. 귓전에 꼬맹아, 네가 좋다, 라고 되뇌며 백진이 그럭저럭 허리를 움직였다. 마찰하는 허벅지 안쪽이 뜨겁게 달아오를 만큼 백진은 쉬지 않았다. 딱히 아프다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행위가 처음인데다 아쓱해서 선담은 얼떨떨하게 백진의 품에 갇혀있었다. 이윽고 그가 성기를 빼내 동그란 엉덩이골에 비비며 제 손으로 주물렀다. 어깻죽지를 꾹꾹 물어가며 용두질하는 찰나 선담의 아랫도리에 뜨거운 기운이 촤악 끼쳤다. 

“후ㅡ 죽겠다…….”

선담은 꽁꽁 얼어서 한마디도 못했다. 백진이 제 몸에 대고 자위한 것은 그렇다손 쳐도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거친 숨소리가 귓전을 멍하게 울렸다.

“놀랐지.”

그리고 그가 능청스럽게 묻는 말에 저도 모르게 오뚝이처럼 끄덕였다. 몸을 바로 눕혀주면서 백진이 폭소했다. 

“절박하니까 별별 방법이 다 떠올랐어.”

“그냥 해도 된다니까….”

“진짜 하면 그땐 그만하라고 찡찡거릴 거면서.”

선담은 경악하여ㅡ그보다는 자존심이 상하여ㅡ소리쳤다.

“안 그래요!”

“에이.”

“정말 안 그래요!”

“과연.”

말문이 막혀 뻐끔거리고 있으니 백진이 벌어진 입으로 혀를 쏙 집어넣었다. 시간이 상당히 흘러 있었다. 알몸으로 구르며 시간가는 줄도 몰랐던 시절이 까마득하여 요새 벌어지는 이런 일상은 꼭 꿈같았다. 

“일주일 뒤엔 본격적으로 EEC 해체선언도 할 수 있고 아버지께도 잘 말씀드릴 테니까 걱정 말고 살고 싶은 곳이나 생각해놔.”

“회장님께 뭐라고 말씀 드려요……?”

“내가 너한테 사심 품은 건 일단 빼고, 사나이들끼리 합숙에 들어간다고 해야지.”

“그럼…… 2층집 돼요?”

“20층 집도 거뜬해.”

선담은 활짝 웃으며 백진의 옆통수에 뺨을 비볐다. 

정말로 백진이 EEC를 해산해도 일원들에게 피해가 없게 외국으로 특파를 보내준다면 더는 바랄게 없었다. 솔직히 그들에게 섭섭한 게 많고 많았지만 그들 역시 자신에게 기대했던 바가 컸을 테니까 말이다. 은협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컸지만 그 역시 자신에게 상처를 주었으니까 서로 비긴 셈 치고 싶었다. 이제 더는 상처 받기도 싫었고 그의 속을 시커멓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그의 성공을 가로막는 장애물 역할을 사절이었다. 

폭력과 고통에 노출된 혹독한 보육원에서 스스로 지키는 법을 홀로 배워야 했던 그니까. 그 각박한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몫까지 진창에서 굴러주었던 그니까. 그러니까 행복했으면 했다. 내게 상처를 입혔더라도 지금 자신은 행복하니까. 그가 모질게 굴었던 모든 것은 어쩔 수 없는 사고였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아직도 그를 좋아하는 작은 마음을 힘들여 지우고 싶지 않았다. 백진과는 다른 의미로, 그는 여전히 자신에겐 온정이 남은 사람이었다. 그것을 아둔한 미련이라고 욕해도 어쩔 수 없었다. 어렸을 적부터 자신의 세상에는 보육원과 최은협밖에 없었으니 그것을 지우는 데는 단연 시간이 필요했다.

마음이 울적해질 것 같아서 선담은 더는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16년간 쌓아온 관계가 서서히 붕괴되면서 먼 길을 돌고 돌았어도, 결국 그는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할 테고 자신도 행복한 길을 찾게 될 것이라고, 그저 진심으로 바랐다.

- - - -

‘선담이를 도망치게 만든 것도 저고 기형아를 유산시킬 빌미를 제공한 것도 접니다.’

‘최은협이! 장난치는 거면 가만 안두겠다! 어떻게, 어떻게 그랬단 말이야!’

‘폭행했습니다.’

‘뭐야!!!’

‘자궁 아래 장기를 일부 손상시켰습니다.’

길호문과 전상목은 할 말을 잃었다. 새카만 눈동자에 담겨있는 흉포함. 영국에서는 제대로 느끼지 못했던 것이지만 한국으로 돌아와 연구에 난관이 닥칠 때 이따금씩 최은협이 지었던 그 눈빛이었다. 눈동자가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그가 지금 말하는 끔찍한 일들이 진실이란 것을.

길호문은 아래턱이 떨리는 것을 애써 감추며 물었다.

‘도대체 왜 그랬냐, 최은협! 홍선담이 EEC에서 도망가고 우리가 그 개 같은 고생을 한 게 네가 저지른 실수 때문이란 거냐!’

최은협은 어처구니가 없어 피식 웃었다.

‘이제 와서 실수라니 우습군요. 누구도 말하진 않았지만 모두가 녀석이 유산하기를 간절히 바라지 않았습니까? 전 총대를 맨 것뿐입니다.’

순간 정적이 찾아왔다. 날카로운 갈고리에 정곡을 파인 기분이었다. 아연하여 말을 잃었던 전상목이 고개를 들었다.

‘은협아, 이게 잘못 알려지면…’

‘말 아직 안 끝났습니다.’

‘은협아!’

‘홍선담은 자연수정이 가능합니다.’

길호문은 그만 정신을 잃고 쓰러질 뻔했다. 보통 같으면 젊은이들 농빠라며 웃어넘겼겠지만 도저히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길호문이 머리를 짚자 전상목이 그를 지탱했다. 최은협은 머리를 한번 쓸어넘기고 한숨을 쉬었다.

‘비밀로 해주십시오.’

전상목과 길호문은 길게 신음했다.

‘도대체 어떻게…’

‘은협아, 자연수정이라니. 그게 가능한 일이니? 만약 그게 가능했다면 대체 언제…’

‘처음 자궁을 주입할 때 수란관작업 도중 이어 붙였습니다.’

‘맙소사…….’

질문에 대답하면서도 최은협은 여전히 내키지 않은 표정이었다. 

‘저 역시 도움을 바라지 않았습니다만, 녀석을 꼭 봐야 하기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겁니다.’

‘은협아, 그게 무슨,’

‘이대로 가면 EEC는 폐쇄됩니다. 사실 EEC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지만 선담인 아니죠.’

그제야 길호문이 고개를 들었다.

ㅡEEC는 망하든 어쨌든 상관없지만 홍선담은 아니다.

그것은 즉, 어떻게 해서든 실험군 홍선담에게 수정을 성공시키겠다란 그의 오랜 집념을 돌려 말한 것이었다. EEC에서 안된다면 다른 곳에서라도 연구를 이어갈지언정 그래도 도너만은 절대 바꿀 수 없다는 그런. 

오래 산 늙은이의 눈에는 단번에 보였다. 최은협에게 다른 도너란 가치가 없다. 그에게 가치 있는 도너란 그저 홍선담 하나인 것이다. 자연수정을 가능케 만든 그 기술력은 가히 천재적이었지만 그렇기에 쓰임이 혹독했다. 잘못된 쓰임이었다. 허나, 대단한 수완인 것은 인정해야 했다. 지나치다 못해 지독스런 집착이었다.

잠자코 있는 길호문을 뒤로하고, 아직 최은협의 무서우리만치 거대한 집념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 전상목은 성급하게 물었다.

‘그래서 은협아, 이제……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 후원위원장이 누군지는 알잖아. 백람의 넷째아드님이야. 게다가 도너의 안전을 챙기겠다고 데려간 상태고. 네 말대로라면 EEC는 해산되고 우리 연구팀도 분열되거나 파견팀으로 대체될지 모르는데……. 너도 백람이 어떤 기업인지 모르는 거 아니잖아. 가만히 있어야 봉변 안 당해. 가뜩이나 너 선담이한테 정말 그런 짓을 했었다면, 그래서 만약 그 넷째아드님이 정말로 화가 날 일이라도 생기면 정말……’

최은협은 우물쭈물 의견을 전하는 전상목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전 상관없습니다. 홍선담이 제 아이를 품는 것. 이것밖에 바라는 건 없습니다.’

끝없이 메마르고 메마른 목소리로 은협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녀석이 제 자식을 낳는 것. 그거 말고는 바라는 게 없습니다.’

띠리리리리리ㅡ

길호문은 얕게 들었던 잠에서 퍼뜩 깨어났다. 요 며칠 잠을 설쳐서 안색은 한층 더 컴컴해졌고 눈이 푹 들어갔다. 늙은이는 딱딱한 이부자리에서 일어나 푸석푸석한 얼굴을 한번 쓸어올렸다. 오늘이다. 그는 모닝콜 울리는 핸드폰을 집어 들고 번호가 적힌 메모지를 따라 버튼을 눌렀다. 심장박동과 통화 연결음이 함께 뛰었다.

[여보세요.]

“백진아, 나다.”

[네, 소장님.]

“어, 언제 출발할 거냐?”

[시간 맞춰 갈 겁니다.]

길호문은 쓰게 웃었다. EEC의 임직원 중 이 연구에 사활을 걸지 않은 인간은 없었다. 그들은 저희들의 연구를 위해서라면 어떤 가면이라도 뒤집어 쓸 수 있는 서명에 맹세하며 EEC로 들어온 자들이었다. 소장인 자신은 어떻겠는가? 젊은이들 혈기는 못 따라가도 욕심만큼은 지지 않았다. 그는 나이도 지긋했다. 그렇기에 이번 실험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학계에서 은퇴할 생각도 하고 있었다. 일생에 마지막이 될 연구가 아무런 빛도 보지 못한 채 묻히는 건 저 역시 사양하고 싶었다. 길호문은 숨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오늘 올 때 홍선담이도 오나?”

[아뇨, 녀석은 집에 있을 예정입니다.]

“그래……? 이를 어쩐다…….”

[왜 그러십니까.]

올곧은 연백진의 목소리 때문에 큰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길호문은 마음을 다잡았다. 이건 지금까지 애쓴 EEC의 노력을 무시하고 뜬금없이 권력을 차지하고 나타나 도너를 빼간 쪽의 잘못이기도 하다고. 어차피 자신은 선담을 꼬여내기만 하면 되었다. 나머지는 최은협이 알아서 할 테니 당연히 죄의식은 반감되었다. 최은협이 계획한 거지 자신이 계획한 게 아니니까. 자신이 EEC의 연구와 도너에 욕심을 가진 것은 당연한 거니까. 법 없이도 살 전상목까지 동참할 정도로 EEC의 내부사정은 급박했다. 그래, 지금은 개개인의 사사로운 죄의식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길호문은 살살 웃었다.

“거, 회식에는 홍선담이도 함께 왔으면 해. 연구원들이 오랜만에 얼굴도 보고 싶어 하고, 나도 녀석이 잘 지내는가 궁금하니까 말이야.”

-

“도미노 챙겨가도 돼요?”

“그럼.”

선담은 아침부터 몇 번이나 늘어놓고 무너트리고를 반복하던 도미노 상자를 주섬주섬 챙겼다. 온종일 EEC 본사에서 회합을 진행한 뒤 회식도 있을 거란 소리에 선담이 고안해낸 시간 때우기는 석재에게 선물 받은 도미노였다. 백진은 그 무거운 상자를 너 혼자 들고 갈 거냐며 비서에게 손짓했고 그러자 오늘 동행할 두 남자가 선담의 짐꾸러미를 대신 떠안았다. 

“도련님, 출발하시겠습니까.”

백진은 고개만 까닥했다. 선담은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저럴 때는 백진에게 재벌2세라는 호칭이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저들이 옆을 지키고 서있어만 주어도 감사인사가 거듭 튀어나가는데 백진은 몸에 밴 습관처럼 그들에게 무관심하기만 했다. 하긴, 초반에는 자신에게도 상당히 거칠거칠했던 그였다.

“오늘 하루는 피곤하겠다. 그치?”

백진은 라인이 늘씬한 검은 슈트에 셔츠만 걸친 가벼운 차림이었지만 몹시도 근사했다. 타이는 좀체 하지 않는지라 단추를 한두 개 풀어놓은 모습에서 여유가 묻어났다. 그에 비하면 별무늬가 커다랗게 찍힌 긴소매 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자신은 정말로…… 꼬꼬마였다. 선담은 어차피 도미노나 즐기는 연령인데 옷차림이 무슨 대수냐며 스스로를 독려했다.

하늘은 맑았다. 봄이 실감됐다. 휘휘 불어오는 바람엔 따듯한 공기가 섞여있었고 사람들의 옷차림은 가벼웠다. 새카만 선글라스와 슈트로 통일한 비서 둘을 보고 있으면 계절을 까먹다가도, 바람을 쐬면 봄을 만끽했다. 백진은 평소처럼 선담을 조수석에 앉히고 직접 운전했다. 그러면 세단이 알아서 쫓아왔다. 식사도 운전도 대부분 직접 하는 백진이야말로 드라마에서나 보던 그런 도련님들과는 달랐다. 

“얼마나 걸려요?”

“아버지 말씀 길어지면 인수인계하는데 따로, 간부회의에 따로 시간 보내겠지. 미팅룸 가까운 데서 도미노하고 놀고 있어.”

“혼자서요?”

선담은ㅡ억지라고 생각하면서도ㅡ백진과 함께 할 수 없냐며 물은 것이었는데 백진은 다르게 이해했는지 턱짓으로 뒤편을 가리켰다.

“저 덩치들 무시하지 마. 도미노 가르쳐주면 좋아할걸. 섬세한 인간들이야.”

선담이 히히 웃었다. 어차피 EEC 임직원은 회의로 다들 바쁠 테다. 조용히 도미노나 하다가 회식에 따라가서 맛있는 거 많이 먹어야지. 선담은 시야 뒤로 흩어지는 차창 밖 풍경을 지켜보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 은협선배도 오겠죠……?”

“오겠지.”

“정말로 EEC 해산시키실 생각이세요?”

백진은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EEC를 해산한다고 인공자궁이 쓸모없어지는 건 아니야. 이유가 어찌되었든 EEC말고도 제대로 연구팀을 차릴 인재군단은 많다. 그리고 만약 다시 연구를 시작해야 한대도 널 아프게 하진 않아.”

“……고마워요.”

그러자 백진이 “말로만.”하고 심술 맞게 웃었다.

“추후에 연구팀을 재모집한다 해도 EEC 출신은 못 믿는다. 전적이 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네가 걱정하는 ‘그놈’도 나한텐 탐탁찮아. 아니, 사실 싫다.”

“아저씨…….”

“순해빠져서 잊었는지는 몰라도 거기서 넌 인간이하의 대접을 받았어. 나라면 가만두지 않았을 거다. 고작 EEC를 없애는 걸로는 시원찮지만 네가 잘 봐달라고 부탁해서 넘어가는 거니까 아쉬운 얼굴하지마라.”

“……….”

“내가 참는 건 순전히 네가 건강한 모습으로 내 옆에 있어주겠다고 했기 때문이니까.”

선담은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였다. 커다란 손이 선담의 부드러운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자신도 제멋대로만 행동할 수 없는 둘레 안의 인간이었기 때문에, 말마따나 고작 EEC의 해체나 유도하고 홍선담의 안전을 챙기는 게 다였지만 사실 백진은 하나를 더 취한 셈이었다. 자신의 구애를 받아들인 홍선담과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최은협은 주체 못할 질투를 느낄 테니까. 홍선담을 겁간하여 아프게 한 벌은, 자신이 더욱 깊게 어루만져주는 것으로 보복이 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그놈을 동생의 옆에서도 떼어낼 날도 멀지 않았다.

“생각보다 가깝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선담과 농담 따먹기를 하던 백진은 EEC 본사입구에 차를 대었다. 곧바로 도미노 박스를 든 비서 둘이 따랐다. 로비에는 벌써 몇몇 간부가 모여앉아 차기 후원위원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선담에게 낯선 얼굴들인 것으로 보아 그들은 EEC 소속이 아닌 후원위원회 멤버들인 듯했다. 너스레를 떨며 악수를 건네 오는 늙은이들을 잠시 뒤로 하고 백진이 선담에게 속삭였다.

“잠깐만 기다려. 같이 올라가자.”

“연백진이 왔어?”

로비 끝에서 길 소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진에게 붙어있던 선담이 불안한 시선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렇게 EEC를 빠져나온 후로는 처음 보는 일원들이었다. 길호문과 몇몇 팀장들, 그리고 최은협이 로비를 가르고 다가왔다. 

“연의범이는 아직 도착 안했는데?”

“바로 오신다고 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길 소장은 선담을 바라보았다. 선담이 그제야 꾸벅 인사를 했다. 

“선담아, 얼굴이 많이 좋아졌구나. 꼭 너 열여덟살 때 같다.”

“안녕하셨어요, 소장님.”

선담은 소장에게 인사를 하면서도 은협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는 선담을 지그시 바라고만 있을 뿐 미동도 없었다. 꼭 석고로 잘 짜둔 속 빈 인형 같았다. 새카만 눈동자는 어떤 사념도 담고 있지 않았다. 그는 곧 무리에서 벗어나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선담아, 같이 회식 가려고 온 거지? 와 줘서 고맙다. 어른들 이야기 나누시는 동안 심심할 테니 휴게실에 있으면 돼. 과자 잔뜩 사뒀어.”

전상목 팀장이었다. 그와는 정말 오랜만이어서 선담이 활짝 웃었다. 돌아가는 정황을 살펴보니 홍선담이 도너인 것을 충분히 눈치챌 수 있어 후원회 멤버들이 힐끔힐끔 곁눈질을 했다. 마냥 신기한 것을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이제 곧 약속한 시간이라 다들 로비에서 일어나는 분위기가 되었다. 백진은 길 소장을 향해 말했다.

“이 녀석과 동행하고 싶습니다만.”

그러자 길호문이 겸연쩍게 웃었다.

“우리들이야 상관없네만 얘가 지루하지 않겠어? 전상목이 말대로 휴게실에 들어가 있는 게 좋을 거 같네. 딱딱한 자리에 앉아있으면 녀석도 불편하지 않겠나.”

최은협의 얼굴을 보니 쉬 진정되지 않았다. 때문에 선담을 옆구리에 꼭 끼고 있으려고 했건만 길호문이 구태여 연백진을 말렸다.

“게다가 우리 일원들이 군것질거리도 챙겨놨는데 말이야. 성의를 무시하지 말아주게. 우리 EEC의 자그마한 성의 말이야.”

“그 일원들은 다 어딨습니까?”

“그야 조만간 오기로 했네.”

“……….”

백진이 실실 웃는 늙은이를 바라보며 어쩔까 고민하고 있을 때, 선담이 나섰다.

“아저씨, 가셔서 회의 얼른 끝내고 오세요.”

그리고는 발꿈치를 들어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어차피 그 자리에 앉아있으면 제가 더 불편할 것 같아요.”

아마도 다른 이들의 시선 때문인 듯했다. 도너가 눈앞에 서서 돌아다니니 위원회의 시선은 계속 도너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백진은 길 소장도 끈질기게 권하는데다 선담도 그러겠다고 하니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어졌다. 그는 선담의 등을 두드려주며 먼저 자리를 움직이라 했다. 그리고 다가온 비서 둘에게 지시했다.

“아무도 녀석 주변에 얼씬 못하게 해.”

-

EEC 본사건물 2층의 미팅룸은 길게 늘어진 테이블과 잘 꾸며놓은 관목 몇 그루가 자리해 있었다. 후원인 중에서도 영향력 있는 멤버 몇과 길 소장이 연의범의 옆자리를 차지했고 나머지는 팀장들이 자리했다. 마흔 개 가까운 자리가 금세 꽉 찼다. 연백진 또한 연의범의 바로 옆자리에서 배부된 A4지를 들여다보았다. 그곳엔 향후 EEC의 목표와 인공자궁의 발전가능성 등이 면밀히 기재되어 있었다. 형식적이란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그는 EEC 간부들이 앉은 자리를 한번 훑어보고는 길호문에게 물었다.

“이 미팅에 참여하는 자격조건이 따로 있습니까.”

“팀장들만 자리하기로 했네.”

그래서였나. 아까 사라졌던 최은협이 보이지 않았다. 백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어차피 사람 눈이 많은 EEC 건물 안이고 비서들도 붙어있을 테니 별탈이야 없겠지마는 괜한 신경일까. 그놈이 자신의 시야 안에 확보되었음 하는 바람이 생겼다. 회의가 시작되면 절차 따지는 늙은이들 상대하기는 물론이고 인수인계를 밟는 데도 시간을 꽤 잡아먹을 텐데.

“잠깐 실례 하겠…”

“아, 회장님 오셨습니까?”

백진이 일어서려는 찰나에 문이 열리며 연의범이 들어왔다. 그러자 길호문이 그의 손목을 붙들며 “자, 이제 EEC는 우리 연백진의 것인가?”하고 너스레를 떨었다. 참여멤버가 자리에서 일어나 악수를 건네는 사이 연백진에게도 다시금 인사가 들어왔고, 연의범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자리함으로써 EEC의 처음이자 마지막을 결정짓게 될 회합의 시작을 알렸다.

-

은협은 미팅룸을 포함한 3층 내부를 쭉 한번 둘러보았다. 간부와 스폰서가 모두 미팅룸에 엉덩이를 붙였으니 복도는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긴 복도를 빠져나와 휴게실을 주시하며 자판기에서 캔커피를 뽑았다. 굳게 닫힌 휴게실 밖에는 연백진을 쫓아왔던 비서 둘이 떡하니 지키고 서 있었다. 저 안에 홍선담이 있을 것이다. 웃기게도 홍선담과 마주할 생각을 하자 손끝이 차가워졌다. 일단 저들을 어떻게 처리하고 들어가느냐가 관건인데 그 과정도 참 불편하기 그지없을 테다. 잠시 소파에 앉아서 주먹을 쥐었다 펴고 있는데 누군가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뭐하고 있는 거냐?”

“소장님.”

“취임식 시작했다. 화장실 간다하고 빠져나왔으니 어서 서둘러라.”

복도 끝에서 긴장한 낯짝의 전상목도 그들에게 재빠르게 다가왔다. 문을 지키고 서 있던 비서들이 그들 쪽으로 잠시 주위를 기울였지만 어차피 EEC 관계자라고 생각했는지 이내 관심을 거뒀다. 길호문은 자판기에서 얼른 음료를 뽑더니 너스레를 떨며 그 자들에게 다가갔다.

“우리 연백진이 비서 분들이신가.”

머리가 허옇게 세고 주름이 자글자글한 늙은이가 다가가 헛헛 웃으며 음료를 건네자 비서들은 잠시 머뭇거릴지언정 그것을 얼른 받았다. 그들도 이 자가 EEC의 소장이고 연의범과도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정도는 알았다. 길호문은 연백진이가 자기한테도 아들 같은 존재라며 노인네 특유의 게걸스런 수다를 늘어놓았다. 그리고 비서들이 캔음료수를 까는 순간, 최은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상목이 그 뒤를 따랐다. 젊은이 두 명까지 소장을 따라 다가왔지만 애당초 연구원들이란 걸 인지하고 있어서인지 비서들은 아까처럼 자리만 지키고 있을 뿐 별다른 경계태세를 취하지 않았다. 

뚜벅 뚜벅

복도를 울리는 최은협의 구두굽 소리가 음산했다. 앞으로의 일을 직감하고 있는 길호문과 전상목에게는 세상의 그 어떤 존재보다 크게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최은협이 바깥쪽에 선 비서의 정면에 선 순간,

빠악!

불덩이 같은 주먹이 비서의 면전에 그대로 꽂혔다. 선글라스가 박살날 정도로 매서운 주먹이었다. 다음 순간 전상목과 길호문이 또 다른 비서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은 비서를 어쩐다기보다는 입을 틀어막으려고 안간힘이었고, 선글라스가 깨져 코를 부여잡은 비서의 목덜미를 쥔 채로 은협이 나머지 한명의 복부에 칼주먹을 꽂았다. 두 비서가 동시에 허리를 수그렸다. 은협은 차례로 그들의 관자놀이를 제 무릎에 갖다 박았다. 뻐억! 뻐억! 하고 굉장한 소리가 터졌다. 길호문과 전상목은 육식류보다 날렵하고 정확한 최은협의 움직임에 경악했다. 허나 그것도 잠시, 은협이 마지막 한 대까지 정확히 명중시켜 그들을 바닥에 내던지자 전상목이 기다렸다는 듯이 청테이프를 꺼냈다. 가위가 없으니 이로 물어뜯어야 했는데 질긴 청테이프가 잘 뜯어지지 않자 길호문은 조각조각을 입가에 묻히고 난리도 아니었다. 두 사람이 쓰러진 자들의 입을 봉하는 데만도 서툴러서 용을 쓰자 은협이 직접 나서서 그들의 손을 결박했다. 어찌나 빠른 움직임인지 비서들의 팔이 희한한 방법으로 완벽하게 묶여지는 그 짧은 시간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땀 한방울도 흘리지 않고 숨도 가빠지지 않은 채, 은협은 그들을 처리하고 허리를 들었다.

“화장실은 안 됩니다. 어디 창고에다 넣어두십시오.”

잠시 넋을 놓고 있던 전상목은 지금이 촌각을 다투는 시간임을 알면서도 묻게 되었다.

“은협아, 너 도대체 이런 걸 어디서 배운 거니?”

“알아서 뭐하시려고요.”

“이건 꼭…… 그러니까 네가 간단히 처리하기엔…… 이들은 비서 겸 경호요원 같은데……”

“한참동안 긴장해 있던 사람 손에 무언가를 쥐어주면 긴장이 극도로 완화됩니다. 그럼 갑작스런 공격에 대한 대처가 한발 늦어지고요. 제가 이용한 건 그거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바보가 아니면 알 것이다. 잠시 긴장을 풀었다고 이 거구들을 단숨에 제압해 때려눕히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란 사실을. 결국 참지 못한 전상목이 “멀쩡한 사람들 기절시켜놓고 너처럼 무감각해 보이는 사람은 처음이야.”라고 중얼거리자 마침내 은협이 비소했다.

“파주 고아원 출신 중에 저처럼 무른 인간도 없을 겁니다.”

옆에서 길호문이 낮게 호통했다.

“전상목이, 자네 자꾸 옆에서 도움도 안 되는 소리 지껄일 텐가? 최은협이 뭘 강요하기라도 했어? 자네도 연구실패는 원치 않으니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참여 한 거 아냐?! 연백진이 눈치채기 전에 먼저 들어가!”

그때였다.

“저기, 무슨 일이에…”

굳게 닫혀있던 문이 열리면서 여상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전상목은 서둘러 미팅룸 쪽으로 사라졌고 길호문은 어정쩡한 자세로 홍선담을 바라보았다. 처음엔 상황을 파악 못해 눈동자만 굴리던 홍선담이 쓰러진 비서진을 보고 놀라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턱!

은협의 손이 그보다 빠르게 선담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자 길호문이 죽을힘을 다해 비서를 끌고 가기 시작했다. 절박한 움직임이었다. 비서들은 청테이프로 손과 발과 입이 모두 봉해진 채 쓰러져있었다. 얼굴이 멍투성이에 한명은 선글라스까지 박살나 있었다. 등 뒤로 소름이 돋았다. 입이 막힌 채 선담이 버둥거리는 동안 은협은 길 소장이 복도 끝 방에 비서 둘을 제대로 옮기는지 확인했다. 마침내 복도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깨끗하게 정돈되자 길호문은 비지땀을 줄줄 흘리며 선담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은협의 손등을 마구 할퀴는 선담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눈을 흘기며 웃었다.

“홍선담이, 네가 널 손주처럼 아끼는 건 잘 알고 있지?”

“……! ㅡ…!”

“네 뱃속의 인공자궁은 우리 EEC의 결실이야. 절대로, 절대로 그걸 뺏길 수는 없네. 방법이 좀 험하지만 이해해줄 거라 믿어. 너도 아이를 갖고 싶어 했으니 말야. 우리도 돈이면 만사 오케이라는 되는 현 사태에 대처하려는 것뿐이니까. 만약 EEC가 사라진다고 해도 네 자궁이 우리들 작품이란 건 잊히면 곤란해.”

“ㅡㅡㅡㅡ!”

선담은 죽을 기세로 발버둥 쳤다. 입을 틀어막은 손등을 죄다 긁어내고 몸을 미친 사람처럼 흔들었다. 다시 실험실로 끌려갈 것이라는 공포가 온몸에 소용돌이쳤다. 꼼짝도 안하던 은협이 귓전에 대고 선담을 얼렀다.

“얌전히 있어.”

은협이 선담을 끌고 들어간 방은 엑스레이실이었다. 엑스레이실은 내부소리가 절대 빠져나가지 않는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중요한 기계가 많아서 마스터키는 길 소장만 가지고 있었다. 소장이 문을 열어주자 은협이 선담을 잡은 채로 방에 들어갔다. 그 짧은 시간에 선담은 온몸이 식은땀으로 푹 젖었다. 커다란 올가미에 갇힌 채 발버둥 치는 것도 기력을 크게 소진하는 일이라 이내 움직임도 약해졌다. 길호문은 고개를 도리 치는 그를 향해 안타까운 웃음을 지었다.

“남성모체에 수정이 되었다고 알려지면 EEC는 의학계의 큰 이슈로 오를 거야. 의견 대립이 팽팽하겠지만 어쨌든 백람 마음대로 해체시키지 못할 정도의 돌풍을 몰고 올지도 몰라. 이렇게 된 이상 나도 그런 영광을 포기하기는 싫네. 자고로 늙은이의 마지막은 화려해야 해.”

은협은 인상을 그었다. 순순히 협조하는 늙은이의 속셈을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입 밖으로 낸 소리를 직접 들으니 역겨운 것이었다. 물론 이 녀석에겐 지금의 자신도 똑같이 느껴질 것이다. 선담에게 잡아 뜯겨 엉망이 되어버린 손등만 보아도 느낄 수 있었다.

길 소장이 “쉬는 시간은 2시간 후에 갖겠다.”하고 내뱉은 뒤 문을 닫는 순간, 최은협이 선담의 입을 떼 주었다. 선담은 필사적으로 버둥거리며 애원했다.

“소, 소장님! 안 돼요! 여기에 두고 가지 마세요!”

“미안하구나.”

“소장님, 소장님……!”

쾅!

철커덕 하는 묵직한 소리가 엑스레이실을 가득 울렸다. 선담은 이제야 느슨하게 풀어주는 팔에서 빠져나와 철문을 두드렸다. 쾅! 쾅! 쾅! 하지만 엑스레이실의 방음이 얼마나 뛰어난지는 자신만큼 잘 아는 사람이 없었다. 눈물이 차오르려고 했다. 자신의 이런 모습 하나하나를 뒤에서 지켜보고 있을 은협에게 전에 없는 공포를 느꼈다. 

“손 다친다. 그만 해라.”

지독하게 낮고 거친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동시에 연백진이 자신에게 전했던 속삭임도 떠올랐다.

ㅡ넌 강해질 필요가 있어. 다시는 울지 마. 좀 더 강해져야 너 스스로도 행복할 수 있을 테니까.

쾅! 쾅! 쾅……! ……….

필사적으로 문을 두드리던 선담은 잠시 진정하는 듯했다. 은협은 조용히 그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혈색도 좋아지고 몸에도 살이 올라 어여뻐진 선담을 아까부터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다. 

“…………. 선배.”

선담은 주저주저하다 가까스로 뒤를 돌아보고 섰다. 촬영을 위한 침상 하나와 그 주변의 커다란 기계들, 그리고 넓은 유리판으로 막힌 벽 하나 사이에 은협이 서 있었다. 선담은 생각보다 은협이 얌전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도 지레 겁을 집어먹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자신은 은협에게 전해야할 말도 있었다. 결국 꼿꼿이 선 선담이 조심조심 입을 열었다.

“잘…… 지냈어……?”

“별로.”

돌아오는 말은 사납기 짝이 없었다. 손바닥이 땀에 찼다. 선담은 청바지에 제 손바닥을 문지르며 은협을 올려다보았다.

“할 말 있어.”

“해.”

수백 번 마음속에서 정리했던 말을 꺼내야 할 기회가 온 것이다.

“있잖아, 그 동안 생각해 봤는데…… 내가 멍청했던 거 같아. 저번에 봤을 때 선배랑 연지애 씨랑…… 잘 어울렸어. 내가 예전에 둘이 헤어지면 안 되냐고 떼썼던 거 때문에 선배가 화 많이 냈잖아. 근데 다시 생각해보면 선배도 좋은 사람 만나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ㅡ”

“연지애는 EEC 후원위원장 딸이라서 만나는 거라고 했어.”

“그, 그랬지만 어쨌든 그녀는 선배를 많이 위하는 거 같고, 선배 말대로 선배는 더 이상 나 같은 남자애 데리고 살 수 없잖아. 선배는 능력도 좋고 인기도 많으니까. 그러니까…… 나랑 더는 어렸을 때처럼 못산다는 거 이해할게. 그리고 나는…… 어차피 여자하고는 살 자신이 없으니까, 그래서 또 남자를 만나게 되겠지만 그래도 선배는 예쁘고 좋은 여자 만나서, 그래서…… 능력도 더 인정받고 그랬으면 좋겠어.”

은협은 대답이 없었다. 선담은 입이 바짝바짝 마르는 걸 무시하고 겨우겨우 말을 이었다.

“선배가 나한테 얼마나 잘해주었는지 알아. 선배가 없었으면 난 보육원에서부터 제대로 살아가지 못했을 거야. 선배를 진심으로 많이 좋아했고 지금도…… 선배를 미워하지 않아. 늘 고마웠던 사람이야, 선배는. 그러니까 선배가 행복하길 바라고 나도ㅡ”

“너도, 뭐.”

무심결에 선담은 깜짝 놀랐다. 허나 서둘러 대답했다.

“나도… 연백진 아저씨랑 행복하고 싶어서…”

“……….”

“선배랑 연지애 씨가 불편할 거 알아. 근데 어차피 아저씨가 우리는 따로 나가야겠다고 했었어. 그러니까 선배가 어려워 할 일 없이 내가 조심할게.”

영 말이 없는 은협 때문에 선담은 점점 무서워졌지만 당신의 행복을 바란다는 말에 그가 흉포한 반응은 보이지 않을 거라 믿었다. 당신도 행복했으면 좋겠고 나도 행복해지고 싶다고, 요점은 그것이었으니까.

“실험이 멈추진 않는댔어. 어떻게 된 건진 몰라도…… 선배, 나 실험 없이도 수정이 가능하대. 그러니까 EEC가 실패한 건 아니야. 선배가 나 때문에 고생 많이 한 거 알아. 처음에는…… 선배가 미웠지만 이제는 잊기로 했어. 내가 철부지였던 거 같아서 미안하고, 그러니까……”

선담은 은협의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끼고 말을 멈추었다.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던 은협은 모처럼 웃는 얼굴을 보였다.

“잊겠다고…….”

“선배.”

“날 잊겠다고 한 거냐, 홍선담.”

“아니야, 선배를 잊겠다고 한 게 아니라 선배가 내게 했던ㅡ”

“내가 뭘 했는데.”

“뭐?”

“내가 너에게 내 정자를 준 걸 말하는 건가.”

문득, 선담은 눈을 내리깔았다.

그는 자신의 아이를 주었고, 그것을 도로 뺏어갔다. 영원히. 돌아가지 못할 길로. 심장과 함께 뛰던 그 작은 아기를…….

선담은 큰소리로 따질 수 있었다. 당신이 내게 한 짓을 벌써 잊었느냐고. 당신 아니면 느끼지도 못한다고 소리치고 때리고, 얄팍한 엄살이나 부리는 병신 취급하며 그 날, 그 침대에서, 내게 어떤 짓을 저질렀느냐고. 나만이 아닌 내 새끼한테까지 얼마나 잔인하게 대했느냐고. 그 때문에 내가 처음으로 품은 내 새끼는…… 영원히 하늘나라로 가버렸다고.

하지만 선담은 그리 말하지 않았다. 이제는 구구절절이 늘어놓아봤자 비참해질 뿐이었다. 그 앞에서 더는 울고 싶지 않았다. 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싫었다. 백진의 말대로 강해져야 했다. 다시 아기를 갖고 행복하기 위해서는 여기서 은협과 서로의 잘못을 인정하고 후회 따위도 다 버려야 했다. 그렇기에 선담은 초월한 눈동자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은협을 향해 조심스럽지만 단호하게 내뱉었다.

“선배, 연지애 씨한테 잘해줘. 좋은 집 따님이야. 그리고 선배도 행복하길 바랄게. 내가 속 썩였던 것도 맘에 담아두지… 헉…!”

사정 봐주지 않는 손아귀에 선담은 멱을 잡혔다. 정신없이 콜록거리는 작은 입새로 두툼한 혀가 치고 들어왔다. 선담은 눈을 홉떴다. 은협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며 키스해왔던 것이다. 선담이 그의 어깨를 뜯을 기세로 비틀어 잡았다. 키스는 거칠었다. 이미 선담이 은협의 혀를 힘껏 물어뜯어 피가 흘렀으니 키스라고 부를 수도 없었지만 은협은 원래 고통이란 걸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인간이었다. 키스 아닌 키스가 길어졌다.

꿀꺽ㅡ

어느 순간 목뒤로 무언가가 넘어갔다. 선담이 발악하자 은협이 고개를 들었다. 

“……허억…! 흐…! 뭘… 뭐야, 이거……!”

“OPC.”

OPC가 뭔지는 몰랐지만 어쨌든 그 약물이 식도를 넘어갔다는 사실은 확실했다. 선담의 눈이 불안으로 얼룩질 때 은협이 으르렁거렸다.

“홍선담, 넌 내가 말할 때 대체 뭘 듣고 있었어? 더는 화나게 하지 마, 부탁이다.”

“……콜록…! 흑……!”

“내가 언제 연지애랑 행복하겠다고 했냐고.”

쿠당탕!

은협의 난폭한 움직임이 엑스레이실 한가운데 놓여있던 의자를 구석으로 내던졌다. 그는 선담을 들어 올리려다 그대로 빈 바닥에 집어던지듯 눕혔다. 

“큭…! 선배…!”

“홍선담, 내가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어. 제발, 내 말 좀 제대로 들어.”

은협이 잇새로 내뱉는 말에 선담은 숨을 삼켰다.

“너한테서 아이를 보고 싶다고 했잖아.”

선담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뭐……!”

“온전한 내 새끼를 네게서 보겠다고 한 것이 널 다른 남자한테 돌아가게 할 만큼 나쁜 짓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난 할 일을 했을 뿐이야.”

“나, 나는! 그런 선배 때문에 너무 아팠어! 이제는 그때 일 생각하기도 싫어!”

“목소리 높이지 마.”

툭 뱉는 은협의 말에 선담은 더욱 소리쳤다.

“너무 힘들었어.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할 정도로 아프고 고통스러웠어. 그렇게 만든 애기를 그렇게 쉽게 죽이고……! 선배는 이런 내 마음 조금도 이해해주지 않았잖아! 이럴 거면 왜 나한테……!”

“알았어. 내가 잘못했다.”

선담의 눈이 커졌다. 은협은 멈추지 않았다.

“여러 말 하게 하지 마라. 나도 맘이 급해서 어쩔 수 없었다. EEC에서 쪼는 와중에 네가 고집을 부리니까 방법이 없었어. 너도 막상 기형아가 나오면 놀랐을 거다. 염색체 기형으로 태어나는 태아가 얼마나 끔찍한 모습인지 네가 몰라서 그러는 거라고. 널 위한 일이기도 했어. 다소 험했지만 그래도 말했잖아. 언제고 너만……”

“선배!”

“제발, 말 들어라. 제발 힘쓰게 하지 말고 말 들어. 아프지 않게 하자.”

선담은 싫다며 발악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자신을 짓누르는 무게는 더욱 무거워졌다. 이제 다 끝난 줄 알았는데, 그런 줄 알고 진심으로 좋아했는데 은협이 이렇게 나오자 속이 쓰라렸다. 고개를 도리 치는 선담과 눈을 맞추려고 했지만 번번이 실패하자 은협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다 끝났어! 너무 힘들어……! 이제 다시는 EEC에 들어가지 않을 거야. 나같이 등신 같은 도너 말고 더 좋은 도너 구해. 그 도너한텐 나한테 했던 것처럼 하지 말고 제발 잘해줘. 아무리 중요한 실험이라도 도너가 얼마나 아픈지는 선배나 EEC 사람들이 알아줘야 돼!”

“홍선담, 내가 진짜로 남성모체를 못 구해서 고민했다고 생각해? 한시라도 빨리 널 설득하려고 수 쓴 거지 그게 아니면 내가 뭣하러 그딴 잔업에 머리를 싸맸겠어. 난 너 아니면 애 같은 거 필요 없다고! 네가 모체가 아니었으면 자금줄 확보에 신경 쓰지도 않았을 거고, EEC가 어떻게 되든 상관 안했을 거라고! 알아듣겠어!”

“그래서, 나한테서 애를 보고 싶어서 연지애 씨랑 사귀었다고? EEC를 지원해주는 백람에 노예처럼 들어가 살겠다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어딨어! 다신, 다신 선배하고 이런 걸로 되풀이하면서 다투기도 싫어! 나도 아프지 않으면서 살고 싶다고!”

감정이 쉽사리 격해지지 않는 은협마저 폭발해버리자 선담 또한 감정에 휩쓸려 즉석에서 튀어나오는 말에 앞뒤가 없었다. 은협의 행복을 바라겠다는 마음도 순간으로, 그가 광분할 기미가 보이자 자신도 똑같이 돌아버리기 직전이었다. 고래고래 소리 지르면서도 선담은 이성을 찾아야 한다고 매질했다. 허나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일 뿐, 그간 쌓였던 고통이 그리 쉽게 순화될 리는 없었다. 

“그래서 그놈하고 잤어?”

“뭐?”

“말해!”

선담의 목덜미가 손안에 덜컥 잡혀 들어갔다. 모가지에 가해지는 압력이 호흡을 불가능하게 만들었지만 선담은 마지막 힘을 쥐어짜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저씨가, 좋아.”

“뭐……?”

“연백진… 아저씨……. 애기 낳고… 행복하게 살자고, 했어. 윽… 선배는 이제 나 없이도 행복할 수 있잖ㅡ…”

부우욱!

면으로 된 후드티가 거짓말처럼 찢겨나갔다. 선담이 질겁하여 소리 지르려는 찰나 물어 뜯겨 피가 철철 흐르는 혀로 집요하게 은협이 키스해왔다. 입술이 떨어져나갈 정도로 난폭한 키스가 다시 이어졌다. 피맛이 비렸다. 선담이 사력을 다해 은협을 밀어내려고 하자 숨이 멎을 것 같은 주먹이, 

퍼억!

복부에 꽂혔다. 그대로 눈물이 터져 나왔다. 호흡은 물론이고 사지가 덜덜 떨릴 정도로 거센 주먹이었다. 예전에도 이렇게 강하게는 맞지 않았던 것 같았다. 은협은 그 한번으로 선담의 사기를 잠재웠다. 얼마나 아픈지 입가로 타액이 죽 흘러나오고 온몸이 축 늘어졌다. 뱃속의 내장이 다 찢어져버린 것처럼 끔찍하게 고통스러웠다. 숨을 내쉴 때마다 뱃가죽이 쩍 벌어질 것만 같았다. 토기가 올라왔다. 더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은협이 제 바지와 속옷을 다 벗겨내는 와중에도 선담은 구역질을 참기 위해 읍읍거리기만 했다. 

“예전처럼 많이 안 때릴게. 대신에 그 한번이 좀 아플 거다.”

허나 최은협은 거짓말을 했다. 선담이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도 선담의 혀도 물어뜯어버렸기 때문이다. 혀가 떨어져 나가지는 않았어도 출혈이 심해 피가 순식간에 입안에 흥건히 고였다. 선담의 발가락이 관절까지 새하얗게 세며 말렸다. 은협이 그런 선담의 뺨에 입 맞췄다.

“말하지 마. 나도 네 얘기는 안 들을 테니까.”

강제로 알몸이 되었지만 도저히 저항할 힘이 없었다. 아마도 일전에 연백진을 때렸던 것처럼 때렸을 것이다. 이 주먹을 맞고도 견뎠던 연백진이 실로 대단하게 여겨졌다. 동시에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지 온몸으로 깨달았다. 선담은 제 다리가 벌어지는지는 신경도 못쓴 채 자신이 손가락 하나라도 까딱 할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늘어진 손끝을 보며 안간힘 썼다. 입안에서 피가 넘쳤다. 은협의 격양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네가 얼마나 행복할 수 있을지 보자. 네가 그렇게나 바라는 그 행복이란 게 얼마나 대단한지 한번 보자고……!”

선담은 고개를 도리쳤다. 겨우겨우 움직인 의사표현이 그거였다. 은협은 그런 선담을 끌어안고 숨 죽어가는 목소리를 토해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너와 난 서로 없이 행복할 수 없어. 적어도 난 그래. 네가 내 이런 마음을 몰라준다는 것에 화가 나 미칠 것 같다.”

선담은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다. 다시 한번, 뜨거운 것이 자신의 다리사이를 누볐기 때문이다. 그때의 고통이 시작되는 것이다. 원치 않는 것이 생살을 후비며 들어와 욕망과 번식을 위해 거칠게 마찰하는 그 끔찍한 순간이. 

“날 사랑한다고 했었지? 날 위해서 내 뱃속에 자궁을 앉히고 기꺼이 내 정자를 받았잖아.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해.”

그만…….

“홍선담, 넌 완벽한 나만의 모체다.”

은협은 선담의 허리를 들어올렸다. 여남은 시간동안 몇 번이나 들어가야 할 자리를 강제로 뚫었다가는 자식을 보기도 전에 이곳이 제구실을 못할 것이었다. 아직도 고통의 후유증 때문에 사지를 꿈쩍도 못하는 선담을 인형처럼 덜렁 들어 안고 은협이 입에 품었다. 선담의 손끝이 꿈틀 움직였으나 거기까지일 뿐, 힘을 쓰지 못했다. 벌써부터 맞은 데가 시뻘겋게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홍선담이 그놈과 잠자리를 했다. 그리고 같잖은 청혼을 받아들였다. 이것으로 최은협의 이성은 날아가 버리기 충분했다. 더는 봐주고 말고 할 게 없었다. 여기서 자연수정을 성공시킨다. 그것밖에는 다른 수가 없었다. 이렇게 난폭하게 시작하려던 맘은 없었다. 달래고 달랠 생각이었지만 홍선담의 마음이 이미 다른 쪽으로 쏠렸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머리와 몸이 따로 뛰기 시작했다. 홍선담과 실험이 빗나가기 시작할 때부터 통제가 안 되던 자신의 몸뚱이. 지금도 예외는 없었다.

예전처럼 격한 반항은 없었다. 어느새 선담은 넋을 놓고 눈물만 흘렸다. 멍청이 같이 맞기만 하는 주제에, 남이 도와주지 않으면 쪽도 못 쓰는 주제에 감히 내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녀석이 증오스러우면서도 우스웠다. 그리고 진심으로 놓기 싫었다. 녀석이 자신과 연결되기를 바랐다. 나만 바라보고 나를 향해서만 웃어준다면 바랄게 없었다. 그렇게 나의 아이를 낳아주고 영원히 나와 함께 살아주었음 했다. 만약 이제와 사랑이니 진심이니 하는 증거가 소용없다면 눈에 보이는 확실한 것으로…… 그래, 그래서 아이가 필요한 것이다.

강제로 아래를 애무 당하던 선담은 이제는 말라붙어버려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눈물이 계속계속 바보처럼 흐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배의 고통 때문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호흡이 벅찼다. 예전엔 은협이 힘조절을 하고 때렸기 때문에 반항할 기운이라도 났던 걸까? 지금의 자신은 껍데기나 다름없었다. 

이윽고ㅡ… 선담의 몸 위로 은협의 몸이 포개졌다. 선담은 눈을 감았다. 

강해지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기엔 유예기간이 짧았는지도 모르겠다. 배에 주먹이 한번 꽂혀 들어왔다고 그대로 자빠져서는 옷까지 다 벗겨져 다시금 겁간당하기를 기다리는 자신은 예전과 다를 바 없는 병신이었다. 완력의 차이를 논할 수도 없었다. 그게 안 된다면 혀라도 마저 깨물어야겠지. 하지만 우습게도 예전처럼 혀를 깨물 용기도 나지 않았다. 틀림없이, 연백진이 생각났기 때문이리라. 

“울지 마.”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이제는 혀를 물면 정말 죽을까봐서 그러지도 못했다. 이렇게 약한 주제에 삶에 집착만 커져서는 은협이 두 번째로 제 몸을 강제로 취하는데 아무 대항도 못하는 것이다. 허리를 잡은 그가 목덜미를 애무할 때도 선담은 힘없이 덜컹거리기만 했다. 다리사이로 무언가 침투해들어오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벌어지는 살갗 때문에 힘겹게만 느껴져서 선담이 소리 내 울었다. 검은 정장에서 성기만 꺼낸 채 은협이 선담을 끌어안았다.

“내 자식을 위해 네게 자궁을 준 거지, 다른 놈의 자식을 보라고 만들어 준 게 아니야.”

그리고 말했다.

“네가 아프더라도 내 마음은…… 진심이다.”

치부를 가르며 은협이 꽂혀들었다. 선담은 이를 악물었다. 고통스럽지 않다고 할 수 없었다. 사실 온몸이 저도 모르게 덜컥거릴 정도로 아팠다. 역시 애무도 소용없었다. 은협은 선담의 속살에 대고 자신의 것을 몰아붙였다. 받쳐주지 않는 두 다리가 공중에서 힘없이 흔들렸다. 피가 터지진 않았지만 온몸이 공포와 고통에 날뛰었다. 은협은 그런 선담을 더욱 꽈악 안고 속안을 관통했다. 몸을 경직시키려고 온갖 애를 써 봐도 성기가 제 몸에 끝까지 들어와 짓쳐 올리면 선담이 어쩔 수 없이 진동했다. 아래가 질척질척하게 젖어가는 느낌에 공포를 느끼는 감각과는 별개로 오싹해졌다. 제 몸에 대고 자신의 씨앗을 뿌리심어 놓는 은협이 도저히 인간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이 쾌감을 느끼지 않는 만큼 그에게도 쾌감이 없는 듯했다.

“……아으윽……!”

선담의 배가 벌컥 튀었다. 은협이 남근의 뿌리 끝까지 너무도 깊게 박아 넣었기 때문이었다. 금세 엉덩이골을 따라 뜨거운 기운이 흘러내렸다. 은협은 지치지 않았다. 선담은 몸 안에서 다시금 살아 일어나는 고통을 느낄 수 있었다. 끔찍한 시간이었다. 자신의 몸안을 허락 없이 후비는 그 욕망이 거대하기 짝이 없었다. 

길가에 버려진 들짐승도 이런 대접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무자비한 영역표시는 그치지 않고 계속되었다. 계속, 계속. 계속 되었다. 아무리 울어도, 아프다고 소리를 쳐도, 그를 때리려고 해도, 정말로 끝장을 볼 것 같은 움직임은 선담이 구하는 자비를 무참히 짓밟았다. 덜컹덜컹 흔들리는 몸뚱이와 이물질로 꿰뚫리는 아랫도리가 진개통 취급당하는 그런 기분이었다. 고작 몇 십분 만에 자신의 몸뚱이는 쓸모없는 살덩이가 되어버렸다. 그저 한 수컷의 배출과 번식을 위한 장난감이었다.

백진은 말했었다.

스스로 강해지지 않으면 행복할 수 없다고. 행복해져야 한다고. 

자신은 그 말을 믿었고 그렇게 하고 싶었다. 

나는 이런 대접을 받기 위해 빙판길을 구르며 석재를 찾아간 게 아니다.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치고, EEC에서 도망치고, 백진을 만난 것은, 결코 불행해지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보육원에서 힘없는 구더기 취급받으며 맞아 죽을 위기를 몇 번이나 넘겼어도 자신은 행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 은협의 손을 잡았던 것이고 나를 사랑한다는 말을 의심한 적은 없었다. 그런 내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이렇게 혹독한 고통을 주는가. 도대체, 내가 잘못한 일이 무엇인가. 많은 건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소박하게 행복해지고 싶었다. 행복해지고 싶었다.

이렇게 살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니다. 이렇게 살기를 바라서 수백 번의 고통을 참아내며 뱃속에 자궁을 앉힌 것도 아니다. 점점 미쳐가는 그에게 아이를 낳아주는 도구로 전락되기 위해 여태껏 살아남은 게……! 

“당신……… 절대 가만 두지 않아.”

쓰라리게 벌어지는 아래에 힘을 푼 채 선담이 저 홀로 중얼거렸다. 그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은협이 웃었다. 고통으로 인해 선담의 몸이 수축했다. 성기가 모조리 삽입된 틈에서 어쩔 수 없이 핏물이 흘렀다.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내 손으로 죽여 버릴…… 흑……”

그는 선담의 머리칼에 코를 묻으며 속삭였다.

“홍선담, 약한 자는 섭취되고 강한 자는 포식한다는 말 기억하지. 세상은 약육강식이라는 그 말. 그런데 지금 먹히고 있는 네가 날 죽이겠다는 거냐.”

선담은 초점 잃은 눈동자로 허공을 주시하는 것으로 그것에 답했다. 은협은 오소소 솜털이 돋은 선담의 귓불을 입에 물며 속삭였다.

“네가 날 죽일 수 있을 리가 없어.”

ㅡ홍선담, 너 아기 가져볼래?

ㅡ숨겨서 미안하지만 화내지 마라. 그런 거 아니니까.

ㅡ그만 울어라. 나도 네가 소중하다고 했다.

ㅡ네가 중요해. 그리고 네가 품은 내 새끼도.

더는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뜨거운 피가 흐르던 심장이 어느 순간 천천히 박동을 멈추어갔다. 더는 표현할 수 없는 고통으로. 곱게 기르고 싶어 했던 작은 세상이 완전하게 박살나는 그 소리가 가슴 속에 쩌렁쩌렁 울렸다. 완벽한 고요가 찾아왔다.

이제는, 그저 이 한마디를 전해야한다는 강한 집념이 선담으로 하여금 생전처음 차갑고 매서운 목소리를 내뱉게 만들었다. 

“아니.”

최은협이 잠시 움직임을 멈출 정도로 차갑고 낮게, 홍선담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당신이 나한테 죽여 달라고 매달리게 될 거야…….”

- - - -

백진은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길 소장이 화장실엘 잠시 다녀오겠다고 나섰다. 그러더니 40분이 되어서도 들어오지 않았다. 취임문제는 어차피 연구원들이 간섭할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부재가 두드러지진 않았지만 백진에게는 거슬리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전상목이란 팀장 또한 비슷한 시기에 나갔다가 들어왔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괜히 찝찝한 기분이 들어 백진은 잠시 숨이나 돌리자고 공지하려다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길호문을 보고 행동을 멈췄다. 길호문은 살금살금 자리로 다가와 앉으며 백진을 향해 수다스럽게 속삭였다.

“늙은이가 되니 변의를 제때 관리 못하겠어 그래.”

백진은 그저 한번 웃어보였다. 그리고는 다시 A4지를 펄럭이는데 문득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

길호문의 허연 수염에 청테이프 조각이 붙어있던 것이다. 백진은 눈을 크게 떴다. 다시 보아도 청테이프가 맞았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백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백진아.”

갑자기 자리에서 박차는 아들 때문에 연의범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허나 연백진은 그를 무시하고 미팅룸에서 빠져나왔다. 그 모습을 보고 길호문은 무언가를 직감했지만 구태여 막지 않았다. 최은협이 홍선담을 끌고 들어간 지 벌써 40분이 지났다. 자신은 땀을 식히느라 늦게 들어왔을 뿐이고, 그 사이 엑스레이실에서는 벌써 일이 차곡차곡 진행되었을 테다. 더군다나 열쇠가 없으면 그곳은 문도 열지 못하게 되어있었다. 일은 끝났을 테다. 길호문은 미소를 띠었다.

“고얀 것들…….”

EEC가 지금까지 고생한 게 얼만데 그 공을 이제와 자본으로 흡수하려 드는가. 생각하면 할수록 용서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만약 이 일이 공개되면 애송이 주제에 애비 빽 믿고 설친 연백진은 도너관리에 소홀했다는 질타를 면치 못할 것이다. 길호문은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복도를 나온 연백진은 비서들이 없다는 사실에 의문을 품었다. 그는 휴게실 문을 벌컥 열었다. 매트가 깔려있는 휴게실 바닥엔 도미노와 과자봉지가 늘어져 있을 뿐 사람은 없었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발아래 밟히는 플라스틱 찌꺼기를 발견했다. 허리를 숙여 조각을 집었다. 그것은…… 선글라스의 파편이었다.

“홍선담!!!”

연백진은 복도를 뒤집고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문을 일일이 다 열어보고 홍선담을 불렀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대고 머리가 터질 듯 아파왔다. 잘 지키고 있으라고 신신당부했던 비서들이 자신이 자리를 비운 단 40분 새에 무슨 일을 당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홍선담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불길한 생각만 들어 호흡이 빨라졌다. 오로지, 오로지 그 녀석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온몸의 세포가 극심하게 날뛰었다. 연백진의 고함소리를 들었는지 미팅룸에서 간부들이 웅성거리며 하나둘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홍선담의 이름을 수백 번 부르며 복도를 누비던 백진은 복도 가장 안쪽의 그늘진 공간이 반쯤 열려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문틈으로 누군가의 하얀 발이 보였다.

“선담아ㅡ!!!”

백진은 그대로 엑스레이실로 달려들었다. 점점 소란스러워지는 바깥과 차단하기 위해 문을 닫았다. 그곳엔 선담 이외엔 아무도 없었다. 백진은 힘없이 널브러져있는 선담을 안아들었다. 누구 것인지 모를 정장 마이가 덮어져 있었다. 입안엔 피를 가득 물고 있었으며…… 그리고, 사방이 정액투성이었다. 

“선담아… 선담아……!”

몇 번을 불러도 선담은 반응이 없었다. 극도로 흥분한 탓에 선담을 안아들자마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뺨을 두드리고 열을 짚던 백진이 거의 울화통을 내듯 소리쳤다.

“정신 차려라! 선담아, 선담……!”

“……….”

“선담아, 제발……!”

“…ㅡ아저씨…….”

백진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선담의 눈꺼풀이 미약하게나마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백진은 자신의 마이를 벗어 그런 선담을 감싸 안았다. 안일하게 비서들에게나 선담을 맡기고 갔던 자신의 모가지를 비틀어버리고 싶었다. 눈동자가 분노로 덮여 눈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선담을 홀로 두었던 자신. 그놈이 얼마나 지독한 놈인지 직접 당했으면서도 자본으로 EEC를 묻어버린다는 둥 안일한 소리나 지껄이며 선담을, 홍선담을 홀로 둔 자신. 미안하다고 말하려던 백진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가뜩이나 몸과 마음이 말이 아니었던 선담이 또 다시 흘릴 눈물을 생각하니 진저리가 났다. 연백진은 최은협의 정액냄새가 흥건한 몸뚱이를 연거푸 끌어안으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 침묵은 오래 갈 것 같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 차갑게 얼어있던 홍선담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없어.”

지독하게도 낮은 목소리. 백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을 깊게 안아드는 그의 품안에서 선담은 눈을 감은 채 속삭였다.

“살려달라고 해도……”

소용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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