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궁(宮)의 주인 (2/5)

궁(宮)의 주인

ㅡ4월 29일 맑음

내 이름은 홍선담. 영국주재 EEC 연구팀에 의해 세계최초로 만들어진 남성모체다. 

세상에는 ‘남성모체’란 단어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더 많을 것 같다. 인간에게 ‘모체’란 결코 남성이 맡는 영역이 아니니 꺼림칙한 수식어인 것만은 확실하다. 처음엔 나도 어색했다. 하지만 EEC 연구팀에게는 그런 위화감이 사라진지 오랜 것 같다. 그들이 탄생시킨 남성모체가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밥을 함께 먹고, 운동도 함께 하고, 책도 읽고, TV도 보곤 하니까.

하지만 시도단계에서 실패만 12번. 사실 연구원은 모두 실의에 빠져있었다. 

모체가 될 내 혈액과 채집된 정자의 양성반응을 유도할라치면 애써 만들어놓은 아기집이 소멸되었고, 약물투입으로 아기집을 되살려 놓으면 최종확인 전 몇 단계에서 자꾸 제동이 걸렸다. 그래도 무작정 건너 뛸 수도 없는 수순이라 차곡차곡 밟다보면 몇 개월은 그냥이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이고 당초 쉽게 달성할만한 과제가 아니라며 연구실로 들어와 얼마 지나지 않았던 시절에는 서로를 북돋았지만, 쏜살같이 흐르는 시간을 따라잡기는 늘 버거웠기에 그것도 3년까지가 한계였다. 더욱이 우리들에게 주어진 기간은 5년 이내였으니.

뱃속에 아기집을 형성하고 나면 그것이 착상할 때까지는 족히 2개월이 걸린다고 했다. 그 뒤에 행해질 여분의 검사는 아기집이 형성되는 그 두 달이란 기간 동안 날밤을 새며 착실하게 맞추면 되는 것이라고. 그러나 기껏 생성된 자궁과 수란관이 준비해놓은 샘플을 거부하면 연구는 원점으로 후퇴했다. 모든 개체의 샘플을 다 갖다 대어도 인간의 생물학적 육신은 무궁하여 샘플은 계속 나왔고, 그럼 그들은 끝이 보이지 않는 샘플을 일일이 도너(Donor)인 나에게 맞추어가며 서로를 격려해야했다. 인간의 몸에 직접적으로 행해지는 임상실험은 일찍이 어려운 측면이 많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혹독한 분량과 희망고문은 처음이라 모두가 나자빠진 상태였다.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해낸다.

나를 포함해 서른한명으로 구성된 비공개 연구팀인 EEC(The Experiment of Embryo Clone)의 목적. 그것은 남자의 몸에 난소 기능을 포함시킨 수란관과 자궁을 앉힌다는 파격적인 것이었고, 이렇다 할 베테랑이 지원하지 않은 만큼 소장님 한 분만 빼면 대체로 젊은이들로 구성된 팀이라 사기가 바닥이었다. 이것은 소장님 능력이 아무리 좋대도 다수의 의욕고갈이라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햇수로 4년째 겨울, 그게 과거의 일이 되었다. 연구원끼리 신정(新正)파티를 조촐하게 마치고 잠시 짬을 내 나를 실험대에 눕힌 사소한 과정에서 신의 가호가 있었는지 최종 혈액반응이 정자와 일치한 것이다. 샛별이 뜬 이른 시각, 영국의 작은 시골마을 한 구석에서 우리는 엉엉 울며 환호를 터트렸다.

미국의 거대 제약회사 PTA가 진행한 이 프로젝트에 신정이 하루지난 2월 6일 정자투여에 대한 본격적인 허가가 떨어졌고, 오는 5월 1일, 주사를 이용한 인공수정이 약조되었다. 인류역사에 한 획을 그을지도 모를 영광스러운 기념일. 만약 성공한다면 우리한국의 젊은 연구진 서른명은 대단한 진보를 이룩한 셈이 된다고 한다. 그 서른명에는 은협선배도 포함되겠지. 정자를 제공한 선배의 공로는 더 커질지도 모르겠다. 나 또한 이번처럼 간절하게 성공을 바라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임상실험에 쓰이는 정자견본은 동양보다 서양의 것이 더 우수하지만, 도너가 동양인이라 일원들은 서양인의 정자샘플은 부적당하다고 판단했단다. 0.01%의 오차도 허락되지 않는 실험인 만큼 종자가 다른 것은 꺼려진다고 들었다. 마침 PTA사에서도 서양인의 샘플은 달가워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아시아의 정자은행은 실험상의 입지가 약했기 때문에 일원들은 직접 정자를 추출하기로 했다. 이것은 PTA사가 수조원대의 자본을 쟁여놓고 있더라도 통용되지 않는 사안이었고, 따라서 선별된 연구원의 정자를 임시추출하기로 했다. (놀라운 사실! 의대에 종사하는 학생들은 때에 따라 의무적으로 실험정자를 제공하기도 한단다.) 연구를 위한 샘플제공인지라 모두가 급한 맘에 참여했다는데 그 중에서도 은협선배의 정자가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 된 것이었다. 놀랍게도 100%가 일치했다. 이제 이틀 뒤면 모두의 바람이 현실이 될지 모른다.

아, 내 수준에 멋들어지게 쓰려고 했더니 우습다. 추출, 통용, 샘플, 도너…… 게다가 영어까지 풀어놨더니 종이가 아까운 수준이다. 사실 팀장님이 세미나 때 썼던 글을 거의 다 베껴 썼다. 글자를 따라 그리는 것도 노동이구나. 커닝해서 죄송합니다, 팀장님. 그래도 일생의 첫 일기인데 저도 유식한척 좀 해보고 싶었어요. 음… 서당 개 3년이면 천자문을 왼다고 하지 않았나? 사실 이것도 맞는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난생처음 일기라는 걸 제대로 써보고 싶었다. 그간 수고한 일원들과 은협선배를 활자로도 기억하기 위해. 그리고 내일모레 있을 실험으로 쿵쾅거리는 내 마음을 좀 진정시키기 위해. 

글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내가 이렇게 펜까지 들어 유치원생도 웃고 갈 일기를 쓰는 만큼, 정말 기대하는 바가 크다. 꼭 성공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더 이상 아픈 건 싫으니까. 은협선배가 더는 고생하지 않게라도 꼭 성공했으면 좋겠다.

-

“홍선당.”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알았어, 진중하고 과묵한 남자 홍선담.”

“……….”

“믿어지냐. 저 0.04g의 액체가 우리 팀에 결실을 맺어줄 거란 게.”

단단한 유리관에 몇 겹이나 쌓인 자그마한 주사기를 가리키며 연인은 해사하게 웃었다. 날카로운 동공을 품고 있는 눈임에도 따라 웃지 않으면 천벌이라도 받을 것 같은 미소였고, 그래서 선담은 지금까지 열심히 끼적인 A4지를 접어 베개 밑에 숨겨놓으며 함께 미소 지었다. 애인처럼 시원스럽게 웃는 재주는 없어 입 끝만 올려 웃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의 웃는 얼굴이 어떻게 비쳐지는지 궁금해졌다. 분명 옅은 불안이 섞여있을 게 틀림없었다. 선담은 거울을 보기위해 힐끔힐끔 곁눈질을 해보았지만 거울이 너무 멀리 있었다. 물론 선담의 걱정은 무색했다. 그의 불안감을 알아채기는커녕, 빙긋이 웃는 맑은 미소에 영혼이라도 빼앗긴 듯 넋을 놓고 있던 은협이 선담의 링거 꽂은 손을 꼬옥 쥐었기 때문이다.

“이번만 잘 넘기면, 물론 좀 더 고생해야겠지만 평생 우리 홍당이 알바걱정 안 해도 된다.”

“놀릴 속셈이면 관둬. 난 노후엔 관심 없으니까. 그냥, 선배가 이렇게 기뻐하는 것만으로도 좋다.”

“수상한데. 나중에 내가 돈없고 빽없고 힘없으면 냉큼 버리고 도망갈 계획 짜던 거 아니었나?”

“언젠 돈하고 빽이 있었나?”

그러자 속삭이던 도중 그가 하하하, 크게 웃었다. 농담을 자주하는 스타일이 아닌데 정말 기분이 좋은가 보았다. 선담도 짐짓 흐뭇한 미소를 보냈다. 마주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아니 더욱 꽉 쥐고서는 은협이 부드럽게 선담의 뺨을 쓸며 만졌다.

“지금은 네가 무슨 말을 해도 안 미워. 어쨌든 고생 많았다.”

“성공하면 앞으로 10개월은 더 고생한다던데.”

“하긴. 백일잔치, 돌잔치부터 시작해서 제대로 키우려면 25년은 담보 잡아두라고 소장님이 그러시더라.”

“듣고 보니 좀 끔찍하다.”

“같이하면 끔찍할 일 별로 없을 거다. 내가 잘할게. 약속한다.”

거의 맹세에 가까운 약속에 선담은 고개를 살풋 끄덕였다.

“근데 주사는 누가 하는 거야? 선배가 할 수도 있어?”

“나 같은 막내한테 그런 영광이 돌아오진 않지. 전 팀장님이 하실 거다. 노련한 사람이니까.”

말이 막내지, 처음 인공자궁을 투여할 때도 시술의 최선두에 섰던 그인지라 이번 시술도 맡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차마 실망한 빛을 가리지 못하고 선담이 고개를 숙였다.

“……그렇구나.”

“세상없이 노련하대도 그래도 걱정되지.”

“아니야, 그런 거.”

선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걱정이야 어디 가겠냐마는, 나를 여기에 앉힌 사람이 바로 최은협인데 정자를 투입하는 것도 이 사람이 해주었음 싶은 마음이 있어서였다. 실은 기왕이면, 하고 쭉 바래왔던 일이다. 정말로 수정이 성공한다면 영예로운 사건이 아닐 수 없을 텐데. 무엇보다 저 주사기 안 0.04g의 세포덩어리는 최은협의 정자이니 말이다. 원래가 연인인데다 정자까지 그에게서 들어온 것이니 특히나 의미가 각별했다. 이제 와서 든 생각이지만 최은협의 정자가 실험정자로 들어올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좀 더 빨리 접했더라면ㅡ그가 매달려 사정사정하지 않았어도ㅡ선담은 조금 빨리 흔들렸을지 모른다. 

그래도 주사까지는 욕심인가 싶어 선담의 눈꼬리가 축 쳐졌다. 

“당아, 형님은 그만 나가봐야겠다.”

“웩.”

선담이 혀를 내미는 사이 은협이 테이블 위에서 가동 중이던 디지털 캠코더기를 껐다. 수시로 도너의 모습이 촬영되는 테이프는 최은협이 일제 관리하고 있었는데, 꼭 정적인 모습만이 아니라ㅡ직접 들고 쫓아다니며ㅡ동적인 모습을 잡아내기도 했다. (도너의 일일기록을 위한 과정이라고 근엄한 척 캠코더를 들고 있지만 사실은 선담의 쑥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며 은협이 매우 즐기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어쨌든 은협이 테이프를 꺼낸다면 그건 정말로 시간이 다 되었다는 의미였다. 웩하고 푸대접한 것과는 다르게 선담의 눈가가 다시 한번 쳐졌다.

“벌써……?”

“시계 봐. 10시다.”

“아직 안 졸린데.”

“꼭 졸려야 자냐? 때 되면 자야지.”

그렇지, 하고 쓰게 웃자 은협이 선담의 어깨를 잡았다.

“내가 자꾸 붙어있으면 네가 긴장을 놓질 못하잖아. 그럼 호르몬에 변화가 올 거고, 만약 내일 모레 실험이 지연되면 또 죄 없는 막내만 눈총을 받겠지.”

죄 없는 막내라. 선담은 웃고 말았다. 다 좋은데 제발 홍선‘당’이란 별명은 좀 치워달라고만 했다. 그러자 은협도 턱에 놓았던 마스크를 올려 쓰며 안심했다는 듯이 씨익 웃었다. 잘 웃지도 않던 인간이 도너의 비위를 맞춰주느라 근 4년간은 참 잘도 웃었다. 

유치하게 설명하긴 했지만 절대적인 안정을 찾아야 한다는 점에선 맞았다. 정자를 받아들일 모체에겐 그 어떤 변화도 있어서는 안 된단다. 도너계약 전부터 골백번 들은 말이었다. 은협은 투명한 장막을 거둬내고 빠져나간 뒤 문단속을 했다. 그새를 참지 못하고 가운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는 모습이 창 너머로 보였다. 유리판을 사이에 두고 서로 손을 한 번씩 흔들어주는 것으로 작별인사를 끝냈다.

달칵ㅡ

그러나 그가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선담은 이부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침대에서 내려와 링거를 매단 거치대를 잡고는 실험체의 방에서 직통으로 연결된 소장실로 향했다.

“선담이냐. 웬일이냐.”

여상한 목소리로 그를 맞는 사람은 EEC의 책임자이자 총지휘자인 길호문이었다. 원래는 이 실험연구를 수주한 제약회사의 동양인 대주주라는 둥, 알아주는 바람둥이라는 둥, 자산을 현금화하여 일렬로 세우면 63빌딩 10채는 가뿐히 넘기는 초갑부라는 둥의 루머가 많은 양반이었지만 쉽게 묻고 따질 수 있는 범인(凡人)이 아니었기에 모두가 뒤에서만 속닥이는, 다시 말하자면 연구실 내 구설수 1순위의 영감이었다. 길호문은 필기하던 볼펜을 주름진 손등 위로 굴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금 전까지 최은협이가 있었던 것 같은데. 목소리가 들리더라.”

“네. 제가 심심하다고 했더니 잠깐 놀아줬어요.”

“여러모로 수완 좋은 녀석이야, 거참.”

“제 생각도 그래요.”

소파에 앉아 무릎 위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는 선담을 보며 길호문은 그가 연구팀에게 황새처럼 날아와 희소식을 전한 4년 전을 떠올렸다. 

남성의 수정란 착상이란 엽기적인 실험보고서의 제물이 된다는 건 일개 남자들이 쉽게 나설 만한 사안이 아니었다. 때문에 해외의 연구센터에 동행할 도너를 찾는데 자국에서만 수일이 걸려 지친 무렵, 최은협이 홍선담을 데리고 나타난 것이다. 

기준보다 2년 어렸지만 그래도 지원자는 처음이라 뛸 듯이 기뻤다. 당장 데리고 가고 싶었지만 그래도 목표에 맞는 실험군인지 확인해야했기 때문에 절차상 부모님의 서명을 받아오라 했는데 대뜸 하는 말이 부모님은 안 계신다고. 저기 저 깡시골의 보육원 출신이라고 했다. 심심한 위로를 전하기도 전에ㅡ복잡한 절차가 생략되어 더욱 신난 연구팀은ㅡ국가가 청소년 대상 특이실험군 요청에 허가도장을 찍자마자 그를 도마 위에 올렸다. 마침내 검진결과에는 신체 및 정신건강이 모두 기대이상란 평가가 나왔고 그들은 급하게 영국발 비행에 몸을 실었다.

길호문은 커피포트에 남은 물을 끓였다. 당시에는 여유가 없어서 제대로 돌아보지 못했는데 홍선담은 참 어여쁜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여성적이라는 느낌은 아니지만 묘하게 어려 보이는데다 선이 보기 드물게 고왔고 가끔 웃는 눈이 숙부드러웠다. 무엇보다도 피부가 여성에게서도 찾아보기 어려울 윤기로 반짝였다. 옥같이 하얘서 입술이 선명한 빨간색으로 비칠 정도였다. 열여덟에 처음 보았을 때나 스물하나가 된 지금이나 달라진 게 일절 없었다. 차분하고 심성이 고왔다. 때문에 배가 찢어지는 아픔을 참지 못하고 선담이 꺽꺽 대며 밤새도록 우짖으면 일원들은 마음속 깊은 곳에 죄책감 아닌 죄책감을 지어야 했다.

한때는 홍선담이 그랬다.

‘죽지만 않게 해주세요. 제발……’

그때의 침묵을 모두가 기억하고 있었다.

가끔씩 너무 힘들 때는 도대체 이 정도의 모체에 왜 정자가 따라붙질 않는 거냐며 말도 안 되는 원망에 빠질 때도 있었고…… 아무튼 그 정도였다. 지금은 그 뽀얀 속살을 4년 내내 열심히 까뒤집어 본 터라 실험자와 피실험자 사이의 계면쩍은 일은 건더기도 남지 않았다. 그냥 수염 난 영감과 솜털 난 손자 정도였다. 길호문은 인자하게 웃으며 선담에게 뜨거운 녹차를 건넸다.

“헌데 이런 야심한 시각엔 무슨 일이냐? 몸은 괜찮구?”

“네, 괜찮습니다. 그보다 갑작스럽지만, 부탁이 있어서요.”

“그래? 말해보려무나.”

“그러니까…… 모레 있을 최종 실험의 주사시술을 최은협 선배가 해주었음 해서요.”

뜬금없는 요구에 길호문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소장이 왜 이렇게 당황해하는지 그간 보고 배워 잘 아는 선담은 빠르게 덧붙였다.

“으, 은협 선배는 그동안 몇 번이고 포기하려는 저에게 힘이 되어준 소중한 사람이에요. 그리고 그는 누구보다도 이 실험에 엄청난 애착을 가지고 있고요. 쉽게 오락가락할 문제가 아닌 것은 알고 있지만 어차피 소장님이 결정 내리시는 건데, 주사만큼은 그가 집도할 수 있었음 해요. 전상목 팀장님만 옆에 계시면 지시하는 대로 따를 수 있으니까…”

“선담아, 중간에 ‘누구보다도’는 틀렸다. 우리 연구진 전원은 이 연구에 사활을 걸었어.”

“아……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제 말은,”

“아니, 요점은 알아들었다.”

절절히 읊어대는 사연을 듣자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런 임상실험 연구팀은 막내라고 해봐야 최저가 서른이다. 최은협이 스물아홉이니 실제로 특별한 케이스였다. 그 바로 위가 서른둘로, 젊은 팀이라고 해봐야 평균 나이가 서른 중반대였다(다른 분야에서 보면 오히려 늙은이만 바글바글한 집단일지도 몰랐다). 그러니 막내라 하더라도 최은협 역시 아예 생초짜는 아니었고 홍선담 말대로 좀 시켜주어도 손해 보는 일은 없었다. 지원자가 나오지 않아 쩔쩔 맬 때도, 아기집을 형성하는 과정 내내 실험군이 고통에 울 때도, 굳은 일은 그래도 도맡아 하던 놈이었다. 길호문은 조금 감성적이 되었다.

“……. 잉여시간 동안 생각해 보마.”

“소장님. 그렇게 해주세요. 선배의 정자잖아요. 그리고, 선배가 없었으면 저 같은 실험체도 없었을지 모릅니다.”

으잉? 하고 길호문이 껄껄껄 웃었다. 방금 건 듣고 보니 돌려 말하는 협박에 자랑질이다. 길호문은 유쾌함에선 솔직한 타입이라 주저 없이 크게 웃어버렸다. 그러자 다급하게 부탁하던 선담의 볼이 후끈 달아올라 빨개졌다.

“네가 이 실험에 안성맞춤이긴 했지. 얌전하고, 순하고, 신체능력도 뛰어나니 말이야. 갓난이와 딱 어울리게끔 천사처럼 예쁘고.”

“소, 소장님,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흥분하면 얼굴 시뻘게지는 것만 요즘 아이구나. 알았다. 긍정적으로 검토해보겠다.”

“정말, 정말이세요, 소장님…?”

“그럼 정말이지 가말이냐? 전상목이한테는 내가 한번 말해보마. 최종 단계이니만큼 섭섭한 마음이 없진 않겠지만 후배 양성하는 셈치고 지도하라면 아집부리지 않을 게다.”

“아…… 가, 감사합니다. 소장님, 감사합니다.”

길호문이 장난치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안 선담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연거푸 허리를 굽혔다. 혹시 모르니 아기집을 생각해 심하게 움직이지 말라고 몇 번을 주의주어도 말을 듣지 않아 결국 노인네가 직접 링거대를 움직였다. 아기집이 자리를 잡는 시간은 내내 아프기 때문에 선담의 웃는 얼굴을 자주 볼 수 없었던 그는, 손자 같은 아이가 너무도 감사하는 통에 설렁설렁 달래려고 꺼낸 맘을 굳히기로 했다. 

늦은 시간에 이루어진 모종의 청탁으로 인해 결국 이튿날의 최종 임상실험은 팀의 최연소자인 최은협이 전상목의 지시를 받으며 진행하게 되었고, 2주 뒤엔 거짓말 같게도 도너의 몸에 새 생명이 싹튼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신정에 울려 퍼졌던 환호성의 5배는 족히 되는 성원이 미국의 PTA사와 영국의 EEC 연구실 안에 흐르고 넘쳤다.

-

깊은 잠에 빠졌던 선담의 눈꺼풀이 예민하게 꿈틀대더니 이내 힘겹게 뜨여졌다. 민망스럽게도 은협이 코앞에서 자신을 내려 보고 있어서 뒤로 고개를 쭉 빼다 벽에 머리를 쿵 부딪치고 말았다. 은협은 혹이라도 나는 게 아니냐며 선담의 뒤통수를 문질러주었다.

“왜 일어났어. 넌 아직 더 자도 되는데.”

주변이 하도 소란스러워 깨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 자도 된다는 말과는 다르게 선담이 눈을 뜨자마자 은협은 서둘러 시트를 거둬내고 그를 일으켜 앉혔다. 평소와 다른 기류를 느낀 선담의 시선은 다시 문 밖으로 향했다. 연구원들이 죄다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반쯤 열린 문으로 그들이 얼마나 서둘러 움직이고 있는지가 훤히 다 보였다. 연구실 분위기가 이런 적은 없었다. 이미 뱃속에 4개월 된 새끼를 밴 선담은 쉽게 불안해져서 은협의 손을 잡았다.

“왜들 저래? 어디 가? 무슨 일인데 그래?”

재차 묻자 그제야 은협이 선담과 마주보며 침대에 앉았다. 주변은 여전히 어수선했고 그것에 신경 쓰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갑자기 짐을 챙기는 까닭을 아는 것이 더 중했다. 잔뜩 미간을 모으고 쳐다보자 은협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그냥 보아도 선담을 걱정하는 폼이 여실했다.

“PTA 자금줄이 당장에 차질이 생겼어. 지금은 방도가 없어서 일원 모두가 귀국하게 됐다.”

“자금에 문제가 생기다니.”

“그렇게 됐어. 우리 같은 임상실험 연구실은 돈을 무지하게 잡아먹거든. 성공적으로 수정을 끝마쳤으니 앞으로의 기간은 더 길어질 것 같기도 하고, 여러 가지 문제가 좀 겹쳤다.”

여러 가지 문제, 출자, 그런 것은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숨겨진 진짜 진실이 궁금하거나 놀랐다기보다는 선담은 그저 앞날이 걱정되었다. 자신은 이제 혼자만 잘살면 그만인 홀몸이 아니었다. 아무리 실험배아라도 내 뱃속 씨앗인데.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아주 작은 불안감이 들자마자 손끝이 쉬 차가워졌다.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증상이었다. 선담은 떨리는 입술을 최대한 악다물며 침착하려고 애써 물었다.

“그럼…… 여기 이 애기는?”

“너랑 태아는 당연히 모두가 지켜줄 거다. 길호문 소장님도 같이.”

최은협, 그리고 길 소장과 함께라는 이야기가 떨어지자마자 선담은 일차로 안심하며 숨을 돌렸다. 은협이 그런 선담을 잠시 안아주려는 찰나, 전상목 팀장이 반쯤 열려있던 문을 활짝 젖히며 안으로 들어왔다. 이제는 완전히 어린이집 같은 인테리어가 된 방 중앙에 서서 그가 손짓했다.

“선담이 일어났어? 정신 사납지? 놀라지 말고 일단 은협이가 챙겨주는 옷부터 입어.”

“아, 그래. 여기. 이거 입고 나가면 돼. 바로 공항에 직행할거니까.”

트레이닝복을 벗고 가벼운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인데 그 사이 건물은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다. 빈 박스와 이면지, 그리고 먼지구덩이만 바닥을 굴렀다. 연구센터라고 해봐야 3층 구조의 작은 상가 같은 분위기라 빈 영조물은 더욱 휑해보였다. 정원을 지나 도착한 도로에는 대형버스와 승용차가 준비되어있었다. 두 사람은 길 소장이 기다리고 있는 승용차에 올랐다.

“그래, 왔구나.”

선담은 대답할 여력이 없어 눈으로만 인사하고 조수석 바로 뒷자리에 앉았다. 잠시 기다렸다가 임직원이 전부 버스에 오르자 버스가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은협이 잡아주는 강고한 손에 의지한 채 선담은 굴러가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은협에게서 풍겨오는 담배향은 본인으로 하여금 때때로 진저리를 치게 만들었지만 사실 이렇게 맡고 있으면 그의 체취가 느껴져서 안심이 되곤 했다.

바다를 볼 수 있는 공원이 지나갔다. 어제 은협을 포함한 몇몇 연구원들과 함께 저녁노을을 감상하며 유산소 운동을 했던 공원이었다. 운동은 필요한 양만큼만 하자는 취지였는데 워낙에 체력 좋은 최은협이 끼었더니 모두가 힘든 일정이 되었었다. 특히 선담의 경우는 더욱 그랬다. 수태한지는 고작 4개월밖에 안되었으나 원래 몸에 없던 기관을 만들어 부풀리는 중이었기 때문에 평소 때보다 훨씬 힘들었다. 실제로 일반산모들보다 힘겨울 거라고 듣기도 들었다. 캠코더를 들고서도 물 만난 물고기마냥 잘 뛰는 은협을 바라보며 이래서 신체 건강한 스무살 청년을 모집했나 싶었다. 

배 아래가 묵직하고 오줌보가 눌리는 이질감. 오랫동안 아팠고, 지금도 힘들어도, 그래도 단지 모두가 친가족처럼 잘 대해주어서 버틸 수 있는 일이었다. 노을을 등지고 밝게 웃던 연구원들과 은협이 생각나, 지금 떠나면 이 아담한 공원을 언제 또 볼 수 있겠냐는 생각에 돌연 울적해졌다. 

그리고 백미러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길호문은 덤덤하게 말했다.

“PTA사가 망했어.”

선담은 길게 생각할 틈 없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길호문은 턱 아래로 자란 하얀 수염을 몇 번 만지작거렸다.

“원래 미국의 제약회사들은 저네들 신약실험을 아프리카나 중동에서 많이 해. 무료봉사니 뭐니 해도 결국엔 다 지들 돈줄이 될 실험질을 하는 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난민들은 그걸 또 넙죽 받아먹어. 그리고 결과를 지켜보기 위해 주둔하는 제약회사 직원들을 의사라고 착각하지. 물론 의료자격증이야 가지고 있겠지만 말이야. 뭐, 흔한 일이라 큰일만 터지지 않으면 모두 쉬쉬해. 실제로 법에 걸리는 일도 아니고.”

“그런데요…?”하고 선담이 끝이 조금 갈라지는 목소리로 재촉했다.

“그런데 이번에 PTA에서 아프리카의 한 난민촌 전체를 상대로 신약이 아닌 실험약물을 투입한 거지. 거기서 조용히 넘어갔으면 문제가 없는데…”

길호문은 허허 웃더니 중지와 엄지를 비틀어 딱! 큰 소리를 냈다.

“그걸 한 인권단체의 여기자한테 목격당한 거야. 항간에는 돈을 수억 먹였다는데 결국 유명조간 1면에 폭로된 거지. 때마침 부작용이 일어났고.”

그럼 이제 어떻게 하느냐고 망연자실해 묻자 길호문이 주름잡은 눈 그대로 껄껄껄 크게 웃었다.

“뭘 어째. 일단 한국에 가서 계속 하면 되지.”

“소장님, 혹시 저만 이해 못하는 건가요. 지금 이 일이… 제가 잘 몰라서 하는 소리일지도 모르지만 그냥 웃어넘길 일이라고는…”

선담이 우물쭈물 여쭙자 길호문이 무릎을 오버하며 탁 쳤다.

“이런, 홍선담이! 요즘 애 맞냐! 망했을 때만 망했다는 말 쓰냐? 늬들 말대로 망신살 제대로 뻗쳤다는 소리다. 늙은이 농빠도 못 알아 듣냐, 요놈아.”

“선담아. ……소장님께서 장난치신 거다.”

“이 상황에 짜고 구라치냐!”고 버럭 지를 뻔했다. ‘PTA가 망해도 우리 EEC는 안 망한다’라며 흥겹게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봐선 저 노인네가 심심해서 노망난 게 맞았다. 선담은 짜게 식은 가슴 때문에 한숨을 쉬었다.

지구 반대편에서는 죄 없는 난민들은 생체실험으로 고생이라는데도 애꿎게도 안심이 됐다. 선담은 PTA 제약회사 같은 큰 기업이 하루아침 새에 무너졌을 리가 역시 없잖느냐고 중얼거리며 절로 안도 할 수밖에 없었다. 좋지 않은 여론으로 인해 이곳저곳에 뻗쳐있던 자금줄이 잠시 막힌 모양이란다. 아직 동양계 중심의 이 연구진은 언론에 공개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PTA에서 벌려놓은 다른 사업에 차질이 생겼으면 생겼지 이쪽은 자금줄이 잠시 끊긴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은협이 귓속말을 해주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말할 것이지 길호문이 망했느니 어쨌느니 하여 괜히 간만 졸였다. 선담이 뒤통수를 뚫어져라 쏘아보며 대답도 안하고 가만히 있자 길호문은 뒷털이 따끔거렸는지 대번 손뼉을 쳤다.

“너무 걱정 말아라. PTA도 지금까지 투자한 것이 있으니 유도리있게 해결할 테고, 그럼 금방 또 나아질게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연구비 잔액과 내 사비로다가 인근에 작은 집 하나를 구해주마. 이젠 굳이 실험실처럼 안 꾸며도 되니까. 그럼 은협이와 다른 임원들도 수시로 와서 확인할 테고 너도 맘이 편하겠지.”

“아…… 감사합니다.”

“감사하다고 하지 마라. 너야말로 우리에게 큰절 받아야 할 사람이다.”

길호문은 벙글 웃더니 편하게 앉았다. 눈이 마주친 은협도 한차례 웃어보이고는 창밖을 내다보았고 선담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얼마 전, 남성이 수태를 했다는 뉴스 보도를 들은 바 있었다. 사전정보가 전혀 들어오지 않았던 연구진은 모두가 당황하여 주목했는데 다행히 자궁을 가지고 있던 여성 성전환자였다는 사실에 겨우 안심할 수 있었다. 그때 모두가 방출하던 심상찮은 기류만 보아도 이들이 저희들의 연구에 얼마나 애착이 굳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니 아무리 아프더라도 지켜보는 도너입장에서는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굳이 남자에게 애를 붙여놓으려는 제약회사의 실험정신도 대단하게 느껴졌지만 더욱 대단한 것은, 잠자리 도중 해외 출장연구를 선언한 남자를 따라 인공수정을 감행한 자신이었다.

최은협은 여러 의미로 홍선담에게 삶 그 자체였다. 온 애정을 다하여 귀애하는 연인이기 이전에 그들은 삶의 반 이상을 함께한 사이였고, 은협이 없는 삶은 삶이 아닌지 오래였다. 어쩌면 그래서일지도 몰랐다. 영원하다고 믿을 수밖에 없는 사이였기 때문에 둘 사이에 아이까지 갖게 되면 더욱 행복할 거란 막연한 공식이 있었던 것은. 열여덟살의 발상이었지만 아직도 유효했다.

사랑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더욱 사랑하고 싶어서였다. 

임상실험의 실험군이 되는 것은 겁나고 무서운 일었지만 자신을 환영해준 모두를 믿는다고 꿋꿋이 참으며 그의 곁을 지켰다. 그리고 실제로 최은협도 4년 내내 연인에서 친구처럼, 친구에서 연인처럼 함께 있어주었다. 12년이란 긴 시간 동안 늘 그래주었던 것처럼. 

그러니 내가 흔들릴 순 없다.

PTA가 망해도, 자금줄이 끊겨도, EEC와 최은협이 옆에 있는 한 내가 흔들릴 순 없다.

“졸리면 기대서 자.”

“아니야.”

“고개 떨구면서 흔들거리면 내가 불안해서 그런다. 편하게 자.”

“……고마워.”

아이가 들어앉아서 그런지 선담은 까닥하면 졸았다. 이런 중요한 상황에도 안심됐다고 또 꾸벅꾸벅 조는 자신이 싫어 고개를 추켜세웠으나 이내 넓은 손바닥에 이끌려 따듯한 품 안에 곯아떨어졌다.

잠깐 후에 선담은 배아에 문제라도 생기면 가만 안두겠다고 저도 모르게 입을 쩝쩝 다시며 으르렁거렸다. 덜컹대는 차안에서 풋잠이 들어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잠꼬대였는데 주변에서 푸하하 웃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아 꿈결 속에서도 입을 다물어버렸다. 방금 내가 무슨 말을 했던가, 하고 궁금해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저 앙탈로 여겨진 다짐은 진심임에도 그 각오 역시 장난처럼 가볍게 흔들려버려ㅡ 홍선담은 전혀 깨달지 못했다. 

자신에게 실제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은 세계시장의 자금이 유통되는 거대 기업도 아니고 그곳에서 출자 받는 자본금도 아닌,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사건과 원한의 여파라는 사실을.

- - - -

길호문은 명성(?)대로 결코 입만 산 늙은이가 아니었다. 그는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선담이 살만한 빌라를 재빠르게 구해주었다. 그곳은 한국주재 EEC 본사와 소장댁, 그리고 최은협과 홍선담이 살던 예전 집과도 꽤나 인접한 거리에 있었다. 즉 어디로 가나 EEC 연구팀 관련인물들과 가까웠다. 새 집이 영국에서 썼던 연구실만큼 넓지는 않아도 가정집 분위기라 차라리 맘이 편했다. 그들은 기존에 쓰던 초음파 장비와 간단한 운동기구 등ㅡ선담은 용도도 잘 모르는ㅡ기체들을 큰방에 정리해두고 거실은 선담이 쓸 수 있도록 꾸며주었다. 냉장고 문에는 모체의 상태를 체크해주는 스케줄표와 당번이름, 그리고 그들이 업무를 충실히 수행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출석부가 부착되어 있었다. 정밀검사 등은 본사에서 행해지겠지만 간단한 정기검진 등은 이곳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알려주며 전상목은 출석표 옆에 ‘대출금지’라고 써놓는 센스도 잊지 않았다. 

새 집에 들어온 기념으로 초음파 사진도 찍었다. 입덧이 뒤늦게 심해지고 있었지만 아직 견딜만했고, 이렇게 사진을 받아보는 날엔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마냥 기쁘기만 했다.

처음엔 단순히 실험체로 단상에 올라 배아를 주입받는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햇수로 4년. 많은 사람의 피땀을 목격하고 정성과 심혈을 함께 기울이는 사이, 이제는 내 뱃속에서 자라나 또 평생을 함께 할 아이란 생각에 모체 안에서 피어오르는 권애는 끝이 없었다. 처음 아기집을 받았을 때 온몸에서 돋아났던 그런 거북함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나는 화요일, 목요일, 토요일 저녁 7시 당번이고 네가 잠들면 연구실로 돌아갈 거다.”

일원은 막내인 은협에게 간단한 뒷정리를 맡긴 뒤 회식을 나갔다. 은협은 마지막 박스를 현관 앞에 내다놓고 들어오며 말했다. 선담은 스케줄표를 들쳐보았다. 일주일에 3일이라. 조금 아쉬웠다.

“아침에 눈뜨면 없겠네.”

“해 뜨면 갈게. 그럼 밤새 붙어 있는 거니까.”

“자고 있으면 그걸 어떻게 알아?”

“그냥 그렇게 알고 있으면 되지 쫑알쫑알 말이 많다.”

사생활이란 게 없어 방음이 허술한 연구실에선 이런 이야기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몰래몰래 속삭인 적은 많았지만 단둘이 되었다는 느낌은 잃어버린 지 꽤 되었다. 오전 내내 진행된 이사가 끝나고 아무도 남지 않은 거실에 서서 은협을 바라보고 있자니, 선담은 괜히 쑥스러워졌다. 

모체를 자원한 도너와 연구원의 성접촉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철벽 안의 일이었다. 굳이 커밍아웃을 할 필요도 느끼지 못해 둘은 연인임을 꽁꽁 숨겨놓았다. 개중 누군가는 눈치를 챘을 수도 있겠지마는ㅡ불행인지 다행인지ㅡ워낙에 사이좋은 형제 같아서 긴긴 시간동안 문제화된 적은 없었다. 그리고 그 긴긴 시간동안 입술만 맞춰도 혹여나 이상반응이 생길까봐 최은협답지 않게 예민해져서는 실험군으로 결정 난 이후부턴 짧은 입맞춤조차 없었다. 정말 아쉬운 게 있으면 바로 이런 부분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애인의 숨결조차 느껴본 기억이 까마득했다.

조용한 실내에서 마주보고 서 있자 은협의 깊은 동공이 창연하게 빛나보였다. 그의 체취가 온몸을 잠식하러 달려드는 것 같아서 동요 없던 선담의 가슴에 열화가 돋았다. 그간 죽어있던 욕정이 까닥까닥 고개를 들려했다. 선담은 그것을 들키기라도 할까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져서는 수납장에 개어 넣던 옷가지를 과장되게 탁탁 털었다.

“이, 이제는 선배랑 둘만 있는 시간도 길어지겠다.”

“좋냐. 입 찢어지겠다.”

“아니거든? 맨날 나만 보면 장난질이야.”

“귀여워서 그런다.”

“하지 말라고. 오늘 수고했는데 빨리 회식 가봐야지. 맛있는 거 먹는 것 같던데. 가는데 얼마나 걸려?”

“버스로는 30분 정도.”

“이사해주느라 고생 많았어. 고마워.”

“잠깐만. 가기 전에ㅡ… 한번 안아보는 건 괜찮겠지.”

대답도 전에 은협이 두 팔을 활짝 벌리고는 선담을 끌어안았다. 살짝 부푼 배위에 탄탄한 복부가 떨어졌다. 잠시 안아본다던 사람이 품을 죄이고 또 죄였다. 숨소리가 가깝게 들리고 애틋한 향도 났다. 은협은 타액이 섞이면 좋지 않을까봐 키스는 피하며 발간 뺨에 입을 맞췄다. 가끔씩 인내하는 낮은 신음이 고요하게 터졌다. 스물아홉이면 한창일 나이인데 애인은 몸을 사려야 할 실험체인데다 타국에서 연구만 하느라 바짝 골았을 그가 안쓰러웠다. 선담의 이런 난안을 눈치 챘는지 그가 하얀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산모한테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기회 봐서 출산 뒤에는 안 봐준다.”

“애기 듣겠다.”

“좀 들어도 돼. 내가 고생이 얼마나 심한지 알아야지.”

“이럴 거면 왜 실험군 하라고 졸랐어.”

“그럼 너 데리고 갈 능력은 없는데 그렇다고 떨궈놓고 가냐? 막무가내긴 했지만 그 당시엔 머리가 거기까지밖에 안돌더라.”

“기껏 의대생 되고선 머리 쓴 게 고작 이거야? 고생해도 싸. 어쨌든 애기 들으니까 조용히 해.”

“그 말 들으니까 더 열 받네. 들으라고 그래. 실컷 들어라 들어.”

너 잡아먹고 싶어 죽겠다고 끝을 늘려 말하면서 은협이 안아든 몸을 짤짤 흔들었다. 그를 밀어내던 선담도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들어도 된다니. 아기가 처음 나와서 하는 말이 ‘나도 좀 즐겨볼게요, 아버지들.’ 이런 식이면 어쩌려고. 선담은 말도 안 되는 몽상에 웃으면서도 혼자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솔직한 게 장점이긴 하지만 이럴 때는 무식하게 휘두르던 어린 시절이 생각나 다소 걱정스러웠다.

객기를 통째로 삼킨 채 맨몸으로 세상에 부딪쳐 산산조각이 나곤 했던, 

지금은 사라진 그 어린 시절이 말이다.

지금은 많이 점잖아진 게 사실이지만 어쨌든 장장 4년이었고 그도 여러 가지로 참을 만큼 참았을 것이다. 특히 그놈의 색욕은 사람을 아주 가지고 노는데 말이다. 가끔씩 자신을 바라보는 최은협의 시선이 번해질 때면, 침을 꼴깍 삼킬 정도로 매혹적이고 야해서 선담은 자신이 실험군의 몸이란 것도 잊을 때가 있었다. 물론 실제 욕정은 조금도 허락되지 않았지만, 내가 이러한데 저쪽은 더하겠지 싶은 때가 부지기수였다. 허나 별다른 수가 없어 이번에도 선담은 얌전히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자 그를 한참동안 끌어안았던 은협도 몸을 일으켰다.

“이쯤 해야지. 계속 이러다간 경고 먹겠다.”

“잠깐 껴안은 건데…….”

“이런 방면에선 1분이 1시간 되고 1시간이 하루 되니까.”

“하루는 무슨. 누가 뭐 하재?”

조금 아쉬워서 볼 멘 소릴 하자 은협은 씨익 웃으며 선담의 배를 감싸 안았다.

“네 자궁은 인공적인 거지만 그래도 네 장기에 다닥다닥 붙어있어. 원래의 네 일부처럼. 여자들이 임신 중 섹스에 지나치게 몰입하면 태아에게 해로운 것과 마찬가지다. 아니, 넌 있지도 않은 아기집을 만들어 넣은 데다 남자니까 더더욱 조심해야겠지. 태아가 들어가 있는 자리 주변의 모든 내장을 조심히 다뤄야 돼.”

“조심해야 하는 건 아는데 그렇게 말로 풀어놓으니까 이상하다.”

“만약에 내가 흥분해서 도너가 되기 전의 홍선담처럼 대하면 네가 많이 힘들 거란 얘기다. 혹여나 잘못되면 연구원들도 괴로울 테고. 나야 두말할 필요도 없지.”

속뜻을 파악할 수 없어 “도너가 되기 전의 내가 뭐였는데? 애인?”하고 중얼거리자 은협이 배꼽 아래를 톡톡 두드렸다.

“이제는 홀몸 홍선담이 아니잖아. 내 새끼도 품었으니 넌 정말 중요해. 이걸 어떻게 만들어 놓은 건데. 아무리 네가 내거라지만 실험이 종결까지 완벽하기 전까지는 예전 같을 수 없지. 이제 넌 EEC의 모체이기도 하고.”

“……….”

미간에 주름이 잡히려는 걸 순간적으로 참았다. 마치 자신이 그의 새끼를 품었기 때문에, 그리고 실험체이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말하는 뉘앙스였다. 지독한 노력의 산물이라고. 아주 단조롭고 전혀 대수롭지 않게 그렇게 말했다. 단순히 몸조심하고 즐거운 생각만 하라는 의미에서 달래는 중일지 몰라도 듣는 입장에선 달랐다. 자신은 그와 함께 있고 싶어서 도너가 된 것이지 모두의 전유물 혹은 실험체가 되기 위해 도너를 지원한 게 아니었다. 모체지원을 해달라고 조르는 그를 기쁘게 해줄 요량도 있었지만, 그를 포함한 연구진들이 애지중지하는 정자를 투여 받아 또 다른 아버지가 되고 싶었던 까닭도 컸다. 어디에도 소속되어본 적 없는 홍선담에게 ‘소속감’이란 하늘에서 내려준 선물과 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향후 20년간 PTA와 EEC의 직·간접 실험군이 될지도 모른다는 계약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실험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해서 이해해줄 사람은 없지만 그래도 선담의 맘은 한결같았다. 허나 문득 그의 관심이 온통 자신의 자궁과 실험에만 쏠려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섭섭한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는데도 은협은 눈치 없이 자꾸 비슷한 소리만 되풀이했다.

“알았어? 누구도 네 몸에 손을 대거나 절대 함부로 접하면 안 된다는 얘기다. 몸조심해야 돼.”

“………. 그럼 출산 후에는?”

“출산 후에?”

“아까 한 소리 있잖아. 그때가면 옛날처럼 지내도 되는 거라고?”

“제대로 성공하면.”

“‘성공’하면……?”

“그래. 그땐 좀 괜찮겠지. 나도 한계고.”

이제 보니 저것도 농담 반, 진담 반이다. 머리로는 이해가 가는데 가슴으론 이해가 가지 않았다. 

평생 고집하던 삶을 완전히 뒤집고 의학도를 걷겠다던 남자의 신념이 좋아서, 닮고 싶다는 동경과 나를 아껴주는 연정에 대한 보답으로 사랑해왔지만 그렇다고 평생 그에게 실험체로 남아있을 순 없었다. 아니, 싫었다. 만약 그리 된다면 세상 무엇보다도 끔찍할 것이었다.

자신은 13번째 시도에 가까스로 성공한 최초 케이스였다. 솔직히 혈액반응이 성공한 새벽은 모두가 알딸딸한 분위기라 뭐가 뭔지도 모르고 헹가래를 받았다. 제대로 수정 했다지만 출산한 후에 이 연구가 곧바로 정리될 거란 이야기도 들은 바 없었다. 만약을 위해 다른 모체에 수정을 시도하면 또 실패가 나올지도 모르는, EEC의 실험은 그런 실험이었다. 어쩌면 이제 고작 4년일지도 몰랐다. 거대 기업이 받쳐주는 이런 획기적인 실험안이 4, 5년 안에 종결될 리는 없었다. 아니라고는 해도 이런 막연한 생각이 무의식중에 둥지를 틀고 있는 한 최은협과는 아무래도 갈 길이 멀어보였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선담은 훌훌 털어내기 위해 고개를 저었다. 이런 게 연애의 우울이란 거구나. 여태까지 잘 해왔는데 새삼 나빠질 게 어디 있는가. 아무래도 섭취하는 영양소의 반 이상을 뱃속에 뺏기는데다 몸도 예전 같지 않아서 괜히 부정적인 생각만 드는 듯 했다. 이럴 줄 알고 길 소장님이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먹고 좋은 것만 생각하라고 하셨나보다. 

초음파 장비를 정리하고 일어나는 은협을 보면서 어서 빨리 뱃속의 아이가 보고 싶다는 바람을 문득 떠올렸다. 불안하거나 아프거나 걱정거리가 생기거나, 그 어떤 일이 벌어지던 간에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이제 뱃속의 분신밖에 없었다. 선담은 은협의 등을 바라보다가 대수롭지 않게 웃어버렸다.

-

수요일. 

기형아 검사가 있을 거라고 전상목 팀장이 직접 차를 끌고 찾아왔다. EEC 본사에 도착한 선담을 알아본 연구원들은 가볍게 손을 흔들어보였다. 하얀 가운을 걸친 무리가 오랜만이라선지 낯설었다. 점심시간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휴식을 즐기는 인원이 더 많아 보였다. 한국지사라고 해봐야 연구팀은 여상했다. 영국의 시골마을에서 작은 연구실을 차렸을 때와는 규모가 달라졌지만 기개 높은 연구열만은 그대로였다. 

“홍당 왔어? 아침부터 기다렸다.”

깨끗이 정리된 건물로 들어섰을 때 저들과 마찬가지로 하얀 가운을 입은 은협이 로비를 가로지르며 다가왔다. 훤칠한데다 이목구비가 뚜렷하여 위압감부터가 남다른 얼굴이 꽃같이 웃자 분위기가 대번 환해졌다. 어찌 보면 타고난 능력이었다. 

전상목 팀장은 “휴가 좀 얻더니 아주 폈구나, 최은협!”하고 시샘담긴 농을 쳤다. 선담도 그에 맞추어 시큰둥하게 웃었다.

“재밌게 놀았나보네. 무지 좋았나봐.”

“산이 거기서 거기지. 들어가자.”

얼굴은 생기가 넘치는데 휴가가 별로였다는 듯이 대꾸하는 폼이 거슬렸다. 선담은 두 남자 사이에 껴 인상을 찌푸린 채 엘리베이터 안으로 터덜터덜 걸어 들어갔다.

일주일 전에 찾아와 은협이 한다는 소리가, 휴가를 좀 얻었는데 바람을 쐬고 싶다고. 4년 동안 배아실험에 머리만 박았으니 이해는 되지만서도 영 달갑지 않았다. 이제는 출산예정일의 반을 넘긴 시점이라 배가 눈에 띄게 자란데다가 한국에 오자마자 갑자기 심해진 입덧 탓에 하루하루가 고역이기 때문이었다. 덩달아 들어가는 족족 영양분을 뺏겨 이게 정상인가 싶을 정도로 손발에 힘이 없었다. 

연구진들이 최선을 다해 도와준대도 그들은 마누라 수발 하나 제대로 들어본 적 없는 서방들이었고, 뭘 갖다 놓기만 하면 냄새에 반응해 구역질하며 쉬도 때도 없이 곯아떨어지는 도너를 세심한 구석까지 돌봐줄 능력이 없었다. 귀한 실험체에게 이상이라도 생길까봐 마음만 급급한 게 여실히 보여 대접받는 쪽이 더 불편했다. 어쩔 땐 전상목 팀장마저도 변기에 고개를 처박고 토악질을 하느라 쉬지 못하는 선담을 보다 못해 길호문을 부를 정도였다. 최선을 다하는 이들에게 미안할 정도로 조금만 움직여도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렸다. 그런데 그는 중에 가장 큰 버팀목이 돼야 할 최은협이 자그마치 일주일이나 휴가를 받았단다. 길 소장이 휴가를 다녀오라고 등을 떠민다 해도 한사코 거절해야 할 마당에 그걸 또 덥썩 물었다니. 고생길이 열러 컨디션이 안 좋은 참에 홍선담은 뿔이 단단히 돋을 수밖에 없었다(덕분에 휴가 가는 놈 뒤통수에 대고 ‘망할놈’이라고 소리치고서는 후회해 끙끙 앓았다). 입덧이 심한 탓인지 살이 쭉쭉 빠졌고 기운이 없어 만사가 귀찮았다. 5개월쯤 지나면 괜찮아진다고 하니 그 말만 믿고 있었다.  

“속은 좀 괜찮아?”

“임마, 임산부 속이 괜찮을 리가 있냐. 안 그래도 오는 도중에 세 번인가 내렸다.”

열을 체크하던 팀장이 대신 대답했다. 선담은 속이 매슥거려 별 대꾸도 못하고 침상에 누웠다. 

“19주차. 신열 없고 부종 없고 호르몬에도 이상 없고. 기타 이상 무! 신장 178cm, 체중…… 역시 전보다 빠졌네? 역시 입덧 때문에 고생 심하구나, 선담이.”

“아니에요.”

“그래. 딱 21주만 더 참자. 조만간 괜찮아 질 거야. 그땐 식욕이 땡겨서 행복할거다. 우린 괴롭겠지만. 한겨울에 제발 수박이 먹고 싶단 소린 말아다오.”

팔을 주물러주며 전상목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농담을 해대서 선담도 하는 수 없이 웃었다. 솔직히 폭소했다. 그 사이 기기실에서 나온 은협이 선담의 뺨을 몰래 꼬집더니 화면을 틀었고 전상목은 탐지기 온도를 높였다. 

이미 착상은 끝났고 뱃속의 것은 쑥쑥 자라는데 힘들다고 징징거려봐야 반가워할 사람은 없었다. 이미 시작된 일이다. 사서 고생하게 된 현실을 절절히 되새기기보다는 일원과 애인에게 기력을 불어넣어 준다는 사실로 행복해하는 쪽이 자신에게도 편할 테였다. 

“이 검사가 끝이 아니라 오늘은 좀 움직여야 돼. 염색체하고 신경손상 검사도 해야 하니까. 초음파로 볼 수도 있지만 결과가 바로 나오는 건 아니고.”

“기형아가 나올 확률은 얼마나 되죠?”

“갑자기 그건 왜?”

“그냥, 그런 건 다 궁금하잖아요.”

“그건 그렇지. 음, 확률로 따지면 낮아. 우린 자연수정이 아니니까 좀 더 주의를 기울여야한다만 그건 결과가 알려주는 거고. 조만간 태동도 느껴질 거야. 그땐 태아도 바깥소리 다 듣는다고 봐야 돼. 점점 주의할 것투성이가 되어가지.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들어야해. 우리의 아기집은 굉장히 연약하니까.”

“네…….”

선담이 선선히 동의하자 전상목이 장난스럽게 웃더니 한마디 덧붙였다.

“한국에 왔으니 노파심으로 일러둔다만, 성관계는 절대, 조금도 안 돼. 가장 위험한 거야.”

선담의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애 밴 남자가 어딜 가서 추삽질이겠는가(물론 선담의 경우는 그 역할이 조금 다르지만). 팀장은 저 혼자 크게 한번 웃고 초음파기를 작동시켰다. 얼굴이 시뻘게져선 그런 짓은 않는다고 악을 쓰기도 전에 그럴 성미가 전혀 되지 못하는 선담은 고개를 수그렸고, 대신 최은협이 짓궂게 놀리지 좀 말라고 주억거렸다. 그사이 모니터에 동그란 자호(子壺)와 태아의 형체가 나타났다. 

“이렇게만 봐선 구체적인 이상을 전혀 알 수 없으니까 여기선 사진만 좀 찍고 다른 검사로 들어갈 거야. 흠, 쪼그만 게 엄청 쭈그리고 있네? 이젠 몸집이 제법 큰데? 19주치고는 꽤 커. 남성모체라 그런 건가?”

방금 전의 장난기는 싹 가신 목소리로 전상목 팀장이 딱딱하게 말했다. 선담은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는 옆에 서서 화면을 지켜보는 은협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의 눈엔 이채가 떠올라 있었다. 태아를 볼 때면 늘 그랬다. 동굴 안에서 무언가를 기다리는 짐승처럼, 눈동자엔 광채가 어른거렸다. 그는 어두운 검사실 한편을 환하게 비추는 초음파 화면에 빨려 들어가 버릴 것 같이 아주 집중하고 있었다. 호기심으로 가득 찬 그와 그의 우뚝한 콧날이 칼날같이 뻗어있었다.

‘홍선담, 너 아기 가져볼래?’

3년 전 가을에, 그러니까 곧 고3이 되는 시점에 몸 안에 깊이 들어와서는 은협이 숨을 뱉으며 귓전에 속삭였다.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냐고 대답하기도 전에 그가 허리를 흔드는 통에 정신을 놓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좋아, 싫어? 애는 필요 없어?’라고 묻는 음성이 재차 들렸다. 

장난이 섞였어도 의미심장한 주제 같아 선담이 정색을 하고 바라보자 그의 허리짓이 뭉글해졌다. 그러더니 전임교수의 도움을 받아 길호문이라는 남자가 머리로 있는 연구소에 들어가게 됐다고 갑작스레 시인했다. 거대 제약회사의 의뢰를 받아 구성된 팀이고 도너를 구하는 즉시 물자공급이 원활한 해외로 파견될 것이라고. 

‘근데 그게 남자가 애를 갖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터무니없이.’

난감한 심정으로 묻자 은협은 긴장된 낯을 해 선담을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장난 아니니까 잘 들어. PTA사는 그들이 만든 인공자궁을 수란관 없는 남성의 몸에 투입할 예정이래. 그리고 그 실험체에 일반정자의 착상이 가능한지에 대해서 긍정적인 성과를 밝혀낼 거다. 꽤 오래 전부터 진행돼 온 거라 동물실험(Animal Experimentation)은 이미 미국에서 끝났고 이젠 임상실험만 남은 상태야.’

그의 허리에 다리를 감은 채로 듣기엔 거북스런 이야기였지만 주제가 주제인지라 선담은 말머리를 돌릴 수 없었다. 대신에 아연한 표정을 그대로 드러내었다.

‘그런 얼굴 하지 마라. 우리나라 의식이 좀 그래서 그렇지 서양이었으면 지원자가 줄을 섰을 건데, 백인이나 흑인을 상대로는 장기간 이루어질 실험이라 우리가 불편해서 미루는 중이다. 한국에선 좀처럼 나오질 않아.’

‘그래서?’

‘홍당, 너 학교 다니기 싫지 않아? 너도 PTA 제약회사는 들어봤지? 엄청 큰 데야. 그 회사 연구에 실험군 자원하면 너 학교 안다녀도 된다? 알바도 안 해도 돼. 그리고…… 평생 나랑 살 수 있는데?’

‘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학교 다니기 싫고 알바도 하기 싫은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괴상한 인체실험 당할 순 없잖아.’

‘……….’

괴상한 실험이라고 해서 화가 난 걸까, 아님 언성을 높여서 언짢은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프러포즈 비슷한 마지막 단락을 무시해서 서운한 걸까. 그때 은협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 그이 어두운 얼굴을 하자 그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아니 감히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선담은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크게 흔들렸었다. 막말을 한 것 같아 곧바로 깊은 후회가 몰려들었었다.

그리고 마침내 은협은 선담의 마음을 온통 흔들어버려 실험군에 자원하게끔 만든 한마디를 내뱉었었다. 그는 기억할지 모르겠으나 고되고 힘든 영국에서의 일정을 기어이 버티게끔 해주었던 한마디를.

‘ㅡㅡㅡㅡㅡㅡ.’

“선담아, 이제 옮기자.”

“……아, 응.”

퍼뜩 꿈에서 깬 기분이었다. 피곤에 지쳐 넋을 놓고 있던 선담이 고개를 들었다. 벙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은협이 가운을 정리해 입으며 크큭 웃었다.

“이 짧은 시간동안 존 거냐. 길거리에서 쓰러지지 않으려면 큰일이네.”

“이봐, 최은협 군? 실컷 놀고 온 놈은 말을 말아. 부축은 못해줄 망정.”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전선을 감던 은협이 손에 든 걸 팽개치고 쫓아와 침상에서 선담을 내려주었다. 환자취급을 받을 정도는 아니라서 선담은 뒤쫓는 그의 손을 마다해버렸다. 팀장이 그 모습을 보고는 비웃는 시늉을 하자 선담을 지켜보던 은협이 어색해하며 웃었다.

“전 팀장님, 자꾸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선담이한테 미안해지잖습니까.”

“미안해도 된다 이놈아. 선담아, 이놈이 처음에 꼬실 때하고는 말이 좀 다르지? 임상실험 도중에도 많이 아팠고 지금도 몸이 무거워 아주 죽겠지? 근데 지는 산이다, 바다다, 랄랄라 놀러 다니기나 하고.”

“선담이 옮기느라 피곤하셔서 이러는 거면 도중에라도 저 부르지 그러셨습니까.”

은협의 말투를 잘 아는 선담은 그에게 무어라 눈치를 주기보다 그저 셔츠를 추스르며 차가워진 배를 살살 문질렀다. 

“저거 완전 기둥서방이라니까. 임마, 너 선담이가 네 마님인거야. 이런 실험에 잘도 팔아넘겼으면서 하는 싸가지 봐라. 또 휴가 받으면 광주리에 들어갈 각오부터 해.”

구체적인 경고에 은협이 크게 웃는 사이, “연락할 수 있었음 불렀을 텐데 하루 이틀 미루다보니 아직 핸드폰 개통을 못해서 말야.”하고 전상목이 혼잣말처럼 대꾸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하고 은협이 되물었을 때는 이미 다음 검사 준비를 위해 퇴장한 후였다. 선담 혼자 남아 셔츠 단추 때문에 고군분투였다. 

이제는 아주 커다란 남방이나 셔츠를 입지 않으면 배퉁이가 조여서 힘겨웠다. 섬세하지 못한 의학도들은 이런 것에는 영 둔했다. 배를 잡고 어기적거리면서 쇼핑을 할 수도 없는 터라 평소 입던 옷으로 버텼더니 이젠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었다. 단추를 잠그면서 선담이 낑낑대자 은협이 다가와 손등에 손을 얹었다. 

“왜 그래, 뭐 불편해?”

“그게 아니고 단추가…”

새삼스럽게 부른 배가 부끄러워 선담은 말도 다 잇지 못하고 쪼뼛거렸다. 단추 잠그기가 어떻다는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은협은 선담이 정말로 단단히 골난 줄 알고 날카롭고 깊은 눈을 최대한 불쌍한 눈으로 만들었다.

“정말 삐친 건 아니지? 애부터 낳고 같이 놀러 가면 되잖아. 너도 힘들 테지만 나도 갇혀 지내다보니 딱 미치기 일보직전이라 겨우 다녀온 거다. 화내지 마라. 태아에 나쁘다.”

“아니, 그게 아니고…”

“음?”

“다, 단추가 안 잠겨서….”

그제야 은협은 선담의 배를 내려다보았다. 볼록한 배 위로 터질듯이 늘어나 겨우 잠긴 단추들이 애처로워보였다. 아무도 신경써주지 못한 구석을 얼렁뚱땅 발견한 은협은 죄지은 사람처럼 잠시 침묵했지만, 얼굴이 새빨개져서 당혹스러워하는 선담 때문에 금방 푸하하 웃고 말았다. 영문도 모르고 혼자 애쓰던 선담이 그런 은협을 슬쩍 노려보았다. 어차피 단추는 계속 풀어야 하니까 아예 가운을 걸치라고 하나 덮어주는데, 저한테 따지는 게 아니란 걸 알자마자 그렇게 좋은지 은협의 입가에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보는 쪽에선 괜히 더 약이 올랐지만 선담은 더는 꽁하지 않기로 했다. 

무수한 욕구 중에서도 성욕만은 절대 참지 않던 인간이 그동안 밥상을 옆에 두고 쫄쫄 굶었단다. 그래, 여느 때보다도 피가 더울 것이다. 바람 안 피우는 게 어딘가. 여행이면 그나마 양반이었다. 지금의 연구가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데 언제까지고 그에게 책상벌레처럼 연구실에만 틀어박혀있으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바람 한번 쐬는 건 예삿일이 될 것이다. 실험기간이 길어지면, 그렇게 되면 은협에게 끼칠 영향이 점점 줄어들지도 모르겠다. 그의 말대로 연인 이전에 은협은 실험자이고 자신은 피험자이니까. 앞으로 은협이 연구진의 일원으로서 어떤 행동을 취하더라도 모든 것은 권한 내의 일일 것이고 그것에 일일이 감정적으로 대응할 수는 없을 테니까.

발단이라기엔 뭐하지만 어쨌든 시작은 애인의 간절한 바람과 끈질긴 청촉을 거절 못하고 멋도 모른 채 따라나섰던 열여덟살의 자신이었단 생각이 검사실을 옮겨 다니는 내내 자꾸 들었다. 본인의 선택이 절대 일반적이지 않았고 상식적이지도 않았기에 가면 갈수록 일정이 호락호락하지 않을 거란 예감도 맴돌았다. 아직 실험과정이 정리된 것도 아니고 하물며 사람 앞날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 말이다. 그 때문일까. 

마음 한쪽에선 늘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었다. 완전한 두려움이라기 보단 기대와 열망, 환희가 범벅된 두려움. 마치 판도라의 상자 안처럼 뒤엉켜있었다. 그나마 이것을 최은협이 제어해주었었는데 그가 휴가를 한번 떠났다는 것만으로도 섭섭함 비슷한 여타 감정으로 불안정하게 흔들거렸다.

무섭다. 

그러나,

“뭐 먹고 싶은 건 없어?”

이렇듯 태연하게 묻는 말투에는 선담이 느낄 수 있는 애정이 스며있었고 그러면 불안하다가도 안심이 됐다. “지금은 없어.”라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선담은 쓰게 웃었다. 귀국 후 환경이 많이 바뀌면서 구토증과 식욕부진에 시달려서 피곤한 것뿐이라고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선담은 장난삼아 은협의 다른 것을 트집 잡고 넘어지기로 결정했다.

“아침댓바람부터 또 담배 피웠구나. 오늘의 담배 한 개비가 내일의 1년이다, 몰라?”

“노후를 위해 끊겠다고 스트레스 받다가 내일 바로 죽는 거다. 담배 피는 거야 7살 때부터 봐왔으면서 뭘 그래? 아, 반한 건 그때가 아닌가?”

“그땐 내가 미쳤지. 그게 또 멋있다고 뻑가냐.”

“알긴 잘 아네.”

“그만 좀 끊어. 몸에 밴 냄새로도 간접흡연 당하는 거 같아. 끊으라고 몇 번을 말해.”

“담배 끊고 바로 죽을까, 아님 피면서 좀 더 오래 살까? 그냥 네가 코 막아.”

독불장군 같은 대꾸에 선담은 아랫입술을 삐죽대느라 바빴다.

“그보다 이따 끝나고 내 방에 잠깐 들려야겠다.”

“왜?”

“불편해 보여. 급한 대로 내 남방이라도 입으라고.”

“그래도 돼?”

“오랜만에 우리 살던 집도 보고 싶지 않아? 팀장님한텐 내가 데려다준다고 하면 돼. 잠깐 빼돌려도 모를걸. 둘만 있을 수 있는 시간도 길어지고. 괜찮지?”

그는 보통 때와 똑같은 미소로 웃었다. 그 비소가 달빛보다도 넉넉해 아직 검사가 두 차례나 더 남아있는데도 몸이 가벼워졌다. 애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크게 반응하는 것도 다 지금이 민감하고 힘든 시기이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변덕으로 죽도 쑤겠다는 자조감이 들다가도 본인 또한ㅡ인류발전에 기여하는ㅡEEC의 한 사람이라고 다잡으며 성실하게 검사에 임할 수 있었다. 

그렇게 긴긴 과정은 해가 지고 나서야 끝났다.

-

오랜만에 들어온 1104호 아파트는 예전과 똑같았다. 다 큰 남자 둘이서 뛰어놀아도 무난한 크기의 침대와 바닥에 어질러져있는 전문서적, 잡지, 노트, 리모컨. 발코니 가까이에는 나무 테이블이 있었고 부엌은 물기 없이 깨끗하게 정리되어있었다. 냉장고 옆에 가지런히 접혀있는 건조대와 청소기 위치마저 예전과 똑같았다. 낡은 지구본도, 지금은 비어버린 수조도, 머리맡에 놓여있는 작은 탁자와 스탠드도, 액자도, 모든 것이 선담의 향수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피자를 좋아하는 선담 때문에 둘은 곧잘 피자를 배달시켜 먹곤 했는데, 빈 박스를 놓아두었던 흔들의자에도 피자상자가 그대로 쌓여있었다. 다만 너무 오랜만이라 원래는 자신도 주인이건만 갑자기 손님이 된 것 같아 어쩐지 낯설었다. 

“……떠나기 전하고 똑같네. 근데 사람 사는 냄새가 없어졌다.”

차키와 지갑 등을 내려놓고 은협은 곧바로 가슴께까지 오는 서랍장을 열었다. 

“나도 들어온 지 얼마 안됐으니까. 보자, 아무래도 제일 큰 게 낫겠지.”

“선배한테 큰 거면 나한테도 너무 클 것 같은데.”

“옛날엔 그게 좋아서 일부로 너한테 내 셔츠 입히고 그랬는데. 엄청 귀여웠거든.”

그가 빙그레 웃었다. 그래, 자주 그랬었다. 옛날이 기억난 선담도ㅡ웃기보다는ㅡ얼굴을 붉혔다. 은협은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이 가까이 오더니 선담을 끌어안고 뺨에 쪽쪽 소리를 내며 입 맞췄다.

“넌 그때랑 똑같다. 사랑스럽고, 순하고, 착하고……. ‘거기’에서 널 데리고 나온 게 내 평생의 축복일지도 모르겠다.”

따듯한 품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선담도 은근슬쩍 손을 뻗었다. 은협은 기다렸다는 듯이 받아주었다. 그와 마주안고 있으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서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정(情)이 통했다. 이렇게 껴안으면 딱 은협의 쇄골에 눈을 묻을 수 있었다. 선담은 이마를 기댄 채 잠시 눈을 감았다.

18살부터 21살까지면 보통 남자는 한창 자랄 시기였지만 인공자궁을 앉히느라 적어도 300번 이상 주사와 시술로 점철했던 선담의 키는 여전히 178cm였다. 그나마 어렸을 적에 많이 커놔서 다행이었다. 옛날에는 또래에 비해 유난히 컸던 은협을 보면서 저 정도 길이면 금방 따라잡는다고 호언장담 했었지만 그것은 과거는 추억으로만 남았고 여전히 그 둘은 10cm이상 차이가 났다. 그게 숫자로만 보면 별 차이 없어보여도 실제로 서면 꽤 도드라졌다. 어렸을 적의 꿈처럼 은협의 키를 따라잡진 못해도, 그래서 약간 분해도 지금 생각해보면 이렇게 넉넉하게 안길 수 있어 좋았다.

디링디링ㅡ

“아, 선배, 전화 왔어.”

한창 옷을 갖다대보며 은협과 도란도란 장난을 치고 있는데 벨이 울렸다. 핸드폰을 가진 건 저쪽밖에 없었다. 테이블에서 좀 더 가까운 선담이 요란한 그것을 집으러 허리를 숙이자 은협이 잽싸게 핸드폰을 낚아채버렸다. 뻗었던 손이 무색하게 허공에서 잘렸다. 그러나 기껏 그래놓고 은협은 액정을 들여다보더니 받지도 않고 도로 두는 것이었다. 디링디링ㅡ 핸드폰이 계속 울렸다.

“안 받아?”

“음, 전상목 팀장님이네.”

“전상목 팀장님?”

“그래. 또 무슨 잔소리를 하려고. 안 받는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은협은 여행용 가방에 입을 만한 옷을 챙겨주었다. 대수로운 것은 아무래도 선담 하나인 것 같은, 그런 적막감이 찾아왔다. 

“……….”

아까 분명히 전상목 팀장은 핸드폰이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실제로 연구실로 이동하던 내내 선담이 헛구역질을 할 때에도 그는 누구에게도 미처 연락을 취하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렸다. 오늘도 특별철야라고 어깨를 두드리며 우리를 배웅해준 그 사람이 무슨 수로 핸드폰을 개통시켰을까. 혹시 연구실에서 온 전화를 전상목 팀장이라 예상해서 대충 그렇게 대답한 걸까? 그렇다면 왜 안 받는 걸까. 저렇게 시끄럽게 울리는 데도…….

갑자기 이유 없이 가슴이 턱 막히고 심장이 크게 뛰기 시작했다. 그냥 넘겨버리기엔 은협이 전화를 안 받는 것도 이상하고 거짓말을 했다는 것도 지나치게 이상했다. 터무니없는 의심이 아니었다. 같이 살면서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다. 애써 평정을 유지하며 선담은 여상하게 행동하려고 했고, 그나마 간신히 옷가지를 정리해주는 은협 뒤에 쭝그리고 있는데 벨이 또 울렸다. 결국 은협이 멋쩍게 대꾸했다.

“안 되겠다. 잠깐 나가서 받을게.”

선담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은협이 액정을 손바닥으로 감싸더니 발코니로 빠져나갔다. 야경에 파묻힌 그의 뒷모습이 유리문 너머로 보였다. 담배는 물론이었고 하물며 전화를 받기위해 발코니로 나가는 것은 절대 그답지 않았다. 새로운 습관이라도 생긴 걸까?

발신자가 누구일거라는 구체적인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다만 생전 그런 적 없던 최은협이 제 앞에서 무언가를 숨기고 그 은폐행각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쓴다는 것이 선담으로 하여금 순식간에 간을 새카맣게 태우게 만들었다. 미끄러지는 손바닥을 몇 번이고 꼬나 쥐는 순간, 뱃속에서 미약하게 태동이 느껴졌다. 

두근ㅡ… 

심장과 뱃속의 새끼가 함께 뛰었다.

갑자기 미치고 환장할 기분이 되었다. 첫 태동을 느끼면 그래도 모체니까 진실 된 기쁨을 느끼게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기분 탓인지 지금은 묘했다. 끔찍하다거나 거북스럽다는 것은 아니지만 왠지 은협에게 알려주어도 그는 별로 기뻐하지 않을 거란 막연한 불안감이 완강하게 몸서리쳤다. 나는 내 뱃속의 새끼가 너무도 사랑스러운데 정작 씨의 주인은 그저 하나의 결과물로써 냉혈하게 내려다보면 어떨까하는 전에 없던 망상이 뇌리에 스몄다. 선담이 점점 하얗게 질려가는 얼굴로 침대에 걸터앉았을 때, 은협이 들어왔다.

“겨우 끊었네. 너 잘 챙겨주래.”

“……….”

“옷은 저 정도만 챙겨주어도 괜찮겠지. 그간 답답한 걸 어떻게 참고 지냈냐?”

“……….”

“홍당.”

“……응…. 응?”

“위에 입을 옷, 저 정도면 괜찮겠냐고.”

“괜찮아.”하고 끝을 흐려 대답하자 잠시 쳐다보다가 은협이 가방을 챙겼다.

“바지는 기장 차가 있으니까 좀 그렇고, 내일 편하게 고무줄로 된 바지 사다 줄게. 2차 검사는 한달 뒤에나 있으니까 밖으로 나올 일 없을 거다. 일단 실내에선 바지 벗고 셔츠만 입고 돌아다녀. 실내온도 높여놓고. 트렁크 입으면 바지 입는 것보다야 백번 나을 테니까 우리들 눈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입고 지내.”

뭐라뭐라 조언해주는 건 알겠는데 정신은 자꾸 다른데 쏠렸다. 정말로 전상목 팀장님 전화니까 잘 챙겨주라느니 어쩌라느니 하는 소릴 할 수 있는 거겠지? 근데 만약 전화내용이 거짓이라면 일부로 구구절절한 핑계를 늘어놓는 것뿐인데……. 지금 자신의 머릿속엔 한통의 전화로 생긴 뿌리 뽑지 못할 의혹만 가득했다. 덕분에 멍하게 앉아있자 은협이 그의 손을 덥썩 잡아 흔들었다.

“왜 그래. 속 안 좋아?”

“아, 은협 선배, 방금 그 전화…”

“응.”

“그, 러니까…”

“말해.”

재촉하는 은협은 액정을 들여다볼 때와 똑같이 천연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는 눈매가 워낙에 날카로워서 작정하고 순수하게 뜨면 정말 빠져들 것 같은 묘한 눈을 지을 수 있었다. 선담은 고동소리를 눌러보려고 안간힘썼다. 밖으로 소리가 새나갈 것처럼 컸다. 조바심이 났다. 그러나 결국엔 다른 이야기를 내뱉고 말았다.

“……아니야. 근데, 선배.”

“응, 말하라니까.”

“방금 뱃속에서…… 태동이 느껴졌는데,”

“태동……?”

은협은 천천히 무릎을 꿇더니 선담의 배에 귀를 갖다 댔다. 어찌 보면 상투적이지만 너무도 당연한 행동이라 선담은 쓰게 웃었다. 은협은 선담의 옷 안으로 손을 넣어 천을 올렸다. 둥그렇게 부푼 배가 튀어나오자 넓은 어깨로 따듯하게 감싸며 그곳에 귓바퀴를 대었다. 장난기 따위는 없었다. 정말 진지했다. 선담은 아무 말 않고 잠자코 있었다. 다른 때라면 좋아서 그를 껴안았을 테지만 지금은 왠지 이게 더 불안했다. 

“언제 뛰었는데.”

“모르겠어. 추워.”

“잠깐만.”

“춥다니까….”

“알았어. 아, 그럼 차라리 여기서 갈아입고 가라.”

은협은 가방에 챙겨두었던 가장 두꺼운 니트를 꺼냈다. 팔을 끼고 머리까지 쑥 잡아 뺀 후에 선담은 그을린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 은협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까부터 왜. 속 안 좋은 거 아니냐, 너.”

“그런 거 아니야. 그런…… 저, 은협 선배.”

“그래, 말해봐. 왜, 뭔데?”

침을 한번 꼴깍 삼키고 선담은 고개를 숙여버렸다.

“2월 달에, 애기가 태어나면, 그땐 어떻게 되는 거지……?”

“그땐?”

“그러니까, 내 말은…… 성공적으로 출산하면……”

“어떻게 되긴. 너랑 내가 키우지. 가끔은 다 같이 돌보기도 하고. 연구소에서 키우기 싫으면 가까운 데에 집 마련해주신다고 옛날에 소장님이 하신 말씀도 있고.”

은협의 팔을 잡으며 선담은 고개를 저었다.

“그거 말고. 우리 둘. 애기는 그렇다 쳐도 우리 둘은 어떻게 되는 거야?”

“우리 둘이라니. 우리 둘 뭐.”

“애 낳고나면…… 그러니까……”

은협은 선담이 잇기 어려워하는 뒷말을 이어주려 하지 않았다. 몹시, 이상했다. 

원래는 아무리 빙빙 돌려도 말귀를 금세 알아들어 민망할 정도였는데 지금은 제대로 된 답을 회피하고 있으니 이상한 게 맞았다. 그가 눈치가 얼마나 빠른지는 알고 있었다. 아니, 눈치가 빠르다 못해 고갯짓으로만 물어도 좋다고 달려들던 인간이었다. 그런데 별안간 아무것도 모르는 척이었다. 그가 평소답지 않게 굴자 선담도 평소답지 않게 울컥했다.

“선배, 지금 뭐하는…… 진짜 못 알아듣는 거야?”

“잘 모르겠다. 네가 정확하게 말해줘야 알아듣지.”

“이보다 정확한 게 어디 있다고. 태어난 애기가 어디서 어떻게 지내게 될지는 나도 알아. 내가 묻는 건 그러니까, 우리사이잖아. 우리가 단순한 관계도 아니고 어쨌든 이제는 애기도, 애기도 만들어버린 사인데 갑자기 묻는 말에 왜 대답을 제대로 안 해줘?”

극한 긴장감에 싸이자 갑자기 전에 없던 눈물까지 고이려고 했다. 선담이 격양됨을 참으며 낮게 내뱉자 그제야 최은협이 수그러들어 저자세를 했다.

“왜 흥분하고 그래. 새삼스럽게 물으니까 어색해서 그랬잖아. 삐치기는. 너답지 않게.”

선담은 뺨을 감싸주는 은협에게서ㅡ예전이라면 혼을 놓고 바라보았겠지만ㅡ끈적끈적하고 두꺼운 가면이 몇 겹씩 겹쳐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팔부터 시작해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소름은 귓불을 찌를 만큼 길어져만 갔다. 선담은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은 혼자 갈 수 없었기 때문에 차키를 챙기는 그를 기다렸다. 비 오듯 쏟아지던 식은땀이 주먹 끝에 맺혔다. 

“너 안색 안 좋아 보인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사가자.”

“선배, 이 애가 선배한테는 뭐야?”

말하고서 후회했다. 지금 건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뜬금없었다. 아기 이야기를 계속 꺼내는 의도가 상대를 속박하려는 오해로 받아들여질지도 몰랐지만, 실제로 묻는 저의도 그쯤에 속했다. 막연하게 최은협에게서 제대로 된 대답이 듣고 싶어졌다. 열여덟이었던 본인을 꼬드기고 또 꼬드겨 임상실험에 참여하게 했던 그의 의사가 절대적으로 묻고 싶어졌다. 그냥 지나칠 질문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은협도 멈춰 섰다.

“너 아까부터 이상하다.”

“어서, 대답해 봐.”

“그 애가 뭐긴. ……정말 말해?”

선담이 얌전히 기다리자 그도 답답한지 한숨을 푹 쉬었다.

“내 아이.”

쿵, 하고 심장이 떨어졌다. 바랐던 대답임에도 이렇게 놀란 까닭은, 그의 눈이 너무도 무시무시했기 때문이다. 선담은 그만 대꾸할 말까지 잃고 입을 벌렸다. 그러자 광역(狂易)된 눈가를 부드럽게 풀더니 은협이 덧붙였다.

“……동시에 인공자궁과 남성모체인 홍선담을 통해 바깥으로 나올 세계최초의 생명체지. PTA사와 전 세계에서 동일한 주제를 연구하는 수무한 의학계의 큰 꿈.”

“어느 쪽이…… 진심이야? 지금 말한 쪽이 진심이야?”

서운한 빛이 스쳤나보다. 가린다고 가렸지만 저 기민한 시선에 꿰뚫리는 건 언제나 그랬지만 시간문제였다. 은협의 큰 손바닥이 선담의 머리를 헝클어트려놓았다.

“어느 쪽이든…… 대단한 업적이라는 얘기다. 아무리 우리나라가 이쪽 분야에서 발달했다지만 4년 만에 해냈다는 게 대단하다고. PTA사가 임상실험만 남았으니 수정은 5년 만에 끝내야 된다고 압박을 줘서 그렇지 사실 다른 팀이라면 두고두고 실패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다들 말하잖아. 그만큼 소중한 씨앗이야.”

그건 자신도 다 아는 이야기였다. 선담은 입술을 달싹였다. 

당신의 씨앗이라고 말하면서도 그걸 품은 내게 왜 속마음을 온전히 보여주지 않는지, 그게 가장 궁금했다.

기증정자라고는 해도 당신과 반평생 이상을 함께한 사람이고 무엇보다 당신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인데. 내가 너무 예민해져서 혼자 안달하는 건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나는 그때 당신이 사랑한다고 달래주면서 이 실험에 도너로서 참여하면 늘 함께 할 수 있다고 하도 간절하게 부탁하니까, 그래서ㅡ…. 

당신에게 섭섭하다는 그 몇 마디가 목구멍에서 소용돌이치며 입 밖으로 빠져나오기 위해 안달했다. 그러나 생각대로 말하려다 선담은 입을 다물었다. 아직 뭐가 확실한 것도 아닌데 잘못 말했다간 무진장 추해질 게 뻔했기 때문이다. 냉정하게 살펴보면 내가 아닌 다른 모체였어도 그는 의무적으로 정자를 채집 당했어야 했다. 다만 그 모체가 ‘최은협의 숨은 연인’이라는 우연에 맞아 떨어졌을 뿐, 그같이 전문적으로 의학에 몸담고 있는 사람에겐 대단한 일이 아니었을지도 몰랐다. 역사에 길이 남을지 모르는 이런 대업적에 사사로운 개인감정을 부여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었다. 오랜 시간 함께 밥을 볶아 먹고 같은 잠자리에 들었다고 해서, 오랜 시간 살을 섞고 사랑을 나누었다고 해서, 그에게 무작정 인공배아의 아버지이길 바라기엔 선담은 최은협에게 진 빚이 너무도 많았다.

“속이 안 좋아…. 빨리 집에 가고 싶어.”

선담은 그냥 한마디로 축약했다. 그러자 은협은 기다렸다는 듯이 신속하게 움직였다. 자고 가라고 할 수도 있는데 굳이 집까지 바래다주겠다는 것도 괜스레 섭섭했다. 하나둘 마음에 걸리다보니 섭섭하지 않은 게 없었다. 눈에 밟히는 것투성이였다. 시간에 맞춰 다른 연구원도 방문하니까 규정대로 움직이는 것뿐이었지만 그래도 마냥 야속했다.

공교롭게도 그날 밤의 당직은 전상목 팀장이었다. 그는 헤어지기 전에 말한 특별철야가 바로 홍선담이네에서의 ‘외(外)철야’였다며 피자를 시켜놓고는 거실바닥에 앉아있었다. 울렁거리던 속이 잠시 가라앉았지만 선담은 울 수도 없고 웃을 수도 없어 이렇지도 저렇지도 못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물었다. 혹시, 최은협 선배에게 전화를 했었냐고.

분명히 전화를 걸었어야 할 팀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 - - -

정석재는 초조하게 거실과 방안을 들락거렸다. 그의 동선에 포함된 안방은 난지대의 가장자리처럼 뜨거웠고 침대위엔 마른 옷으로 갈아입혀진 홍선담이 죽은 듯 누워있었다. 실내온도를 30도에 맞춰놓고 틈만 나면 이불을 여며주던 석재는 오로지 초인종이 한번 더 울리기를 기도했다. 펄펄 끓기 시작한 열도 열이거니와 저 뱃속이 도대체 어떻게 된 건줄 몰라, 조금이라도 잘못 건드렸다가는 큰일을 치를까봐 옷도 겨우 갈아입혀놓은 상태였다. 

딩동, 딩동ㅡ

싸늘하게 식어버린 커피잔만 들고 의미 없는 왕래를 하던 그가 환희에 가득 찼다. 인터폰 모니터에 어두운 그림자가 머물러 있었다. 누군지 확인하지 않아도 알아서 석재는 인터폰기가 깨져라 오픈도어 버튼을 눌렀다. 방문객이 초인종을 누르는 수고도 덜어주고파 현관문까지 열고 서서 복도의 찬기운을 맞으며 엘리베이터 전광판 숫자가 움직이길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스르륵 열리는 엘리베이터 문틈에서 거대한 그림자를 발견했을 땐 저도 모르게 큰소리로 지명했다.

“백진아, 잘 왔어!”

장신의 남자는 허탈하게 웃으며 우산을 흔들었다. 어둠속에서도 또렷하게 빛나는 눈동자는 웃고 있었지만 흡사 육식류의 그것을 닮아 있었다. 그가 한 걸음 한 걸음 현관으로 다가올수록 실내에서 새나오는 형광등빛을 받으며 높고 날랜 콧대와 시원하게 그려진 입술, 뚝 부러진 전체적인 얼굴윤곽이 점차 드러났다. 

“한밤중에 네놈 목소리에 놀라서 뛰쳐나오느라… 아마 딱지 여럿 끊었을 거다.”

“미안, 정말 미안해. 청구해라. 내가 부담할게. 그보다 아버님이 걱정하시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석재가 안처한 빛을 보이자 연백진이 히죽 웃었다.

“면상 치워. 내놓은 자식 된지가 언젠데. 그러면서도 출가하는 건 당최 허락을 안 해.”

“그런 말 하지 마. 부모님 덕 톡톡히 보고 사는 주제에. 왜, 또 무슨 일 있었어?”

“노망이 났나, 요즘 들어 손자 보고 싶다잖아. 새벽까지 약주하다 불러내서 한다는 소리가 손주랜다. 내 나이가 몇인데 애는 무슨. 오늘밤도 차라리 네가 불러줘서 다행이었다.”

“그럴 만한 일이 있었잖아. 잘 좀 해드려라, 불효자식아. 어쨌든 들어와.”

석재는 서둘러 그를 안으로 들였다. 석재는 퍽퍽하게 젖어버린 바지를 말아 올리라며 백진에게 타월을 던졌고 백진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부터 털었다.

“그런데 이 시간에 무슨 일이냐. 남들 다 자는 시간에 전화해가지고서는 한다는 말이 당장 튀어오지 않음 절교라니. 우리가 십대냐? 잠꼬댄 줄 알고 처음엔 안 믿었다.”

“그럴 일이 있었어. 너도 내가 왜 이러는지 알게 될 거야. 식상하는 말이지만 이럴 때 믿을 수 있는 친구가 너 밖에 없어서, 도저히 어떻게 혼자 처리 할 문제가 아니라….”

“곰 주제에 또 감정잡네. 무슨 일인데 그래?”

사태의 심각성을 알 리 없는 연백진은 소파에 앉아 물기를 닦느라 바빴다. 우산은 폼이고 친구의 호출에 부리나케 달려온 게 진짜였나 보다. 석재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선담이 쓰러져있는 방을 힐끔 들여다보았다가 이내 엄정한 얼굴을 했다.

“연백진. 정말 중요한 얘기야. 잘 들어야 돼.”

“이 시간에 불러놓고 심각하지 않으면 나도 곤란하다.”

“장난치면 안 돼. 잘 들어. 비밀 꼭 지키기로 하고. 지금 내가 널 부른 건 내 얼마 없는 친구 중 하나란 이유도 있지만 네 전공이 내과의이기 때문도 있으니까.”

“쪽팔린다. 의사는 무슨. 병원 나온 지가 언젠데. 짤렸잖아.”

“‘백람’의 넷째아들이 소아과 일반의 하다가 짤렸다는 게 말이 돼? 그냥 순순히 네 발로 나왔다고 해라. ……그리고 지나간 일 너무 신경 쓰지 말아.”

“고시만 패스하고 인턴도 없이 낙하산으로 들어간 건데 밀리는 게 당연한 거지. 동시에 난 병신 같은 일반의고.”

“그건 네 생각이지. 그리고 짤렸다는 그런 소리 하지 마. 맘 아프니까.”

“그만하고 무슨 일인지나 말해봐.”하고 백진이 대꾸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석재는 굽혔던 허리를 세웠다. 그리고는 턱을 빙 돌렸다. 안방을 향하여. 그러나 백진은 의아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턱짓으로 행해지는 무언의 사인. 그러나 상대는 반응이 없고 잠시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이런 눈치 없는 놈 같으니라고. 아무도 없는데 굳이 이럴 필요가 있나 싶었으나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아 턱을 이용해 좀 더 구체적으로 부엌 옆에 달린 안방을 가리켰다. 그러자 백진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미적미적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담부터는 쉽게 손으로 가리켜라”라고 당부하며.

끼이익ㅡ 

안방문이 열리자 두 남자의 실루엣이 나란히 그림자를 그렸다. 방은 스탠드 하나만 켜져 있어 어두웠지만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의 형태쯤은 식별할 수 있었다. 연백진이 침상 가까이로 다가갔다.

“누구야?”

“친구. 4년 전에 친한 친구하고 영국으로 유학 갔었어. 유학가고 나서는 소식이 아예 끊겼었고. 근데 갑자기 이런 꼴로 돌아왔다. 쓰러져서는 깨질 못해. 내가 이 집에 계속 살고 있었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음…… 생각하기도 싫다.”

“열이 상당한데. 구급차 안 불렀어?”

연백진은 익숙한 포즈로 누운 자의 머리와 뺨, 목덜미와 가슴께를 짚으며 무성의하게 물었다. 저 무성의함은 사태의 무지함에서 나오는 여유였다. 석재는 허리숙인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나는 말이다 연백진, 너라서 부른 거야. 다른 놈도 아니고 오직 연백진 너라서 부른 거라고. 그러니까 절대 놀라면 안 돼. 더 중요한 건 절대, 절대로 함구해야 한다는 거고. 나만 두고 도망치는 건 더더욱 안 돼.”

“알았다, 알았어.”

“그럼, 배, 배 부분.”

“응?”

“이 녀석 배…를 보라고.”

백진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석재를 한번 돌아보고는 이불속으로 손을 쑥 넣어 선담의 허리를 찾았다. 둥그런 살덩이를 문지르던 백진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처음엔 자신이 허리를 잘못 짚은 줄 알았다. 그러나 환자의 얼굴과 발끝위치로 미루어보아 그 자리는 배가 있어야 할 자리가 맞았다. 목젖이 나온 사내라면 평평한 허리가 있어야 할 그곳이 맞았다. 등 뒤로 파도처럼 돋아나는 소름을 실감했다. 안색이 점점 흐려지더니 급기야 백진이 본능적으로 담요를 확 들쳤다. 

“……ㅡ!”

설마설마 했다. 허나 하얗게 질려버린 남자아이의 배는 실제로 만삭 가까이 불러있었다. 사실 이불을 덮고 있어도 분별 가능할 정도로 배가 컸지만 보통이라면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라 육안으로 확인 하고나니 비로소 그 부피감이 인식되었다. 아픔을 느끼지 못하다가도 상처를 발견하면 돌연 통증이 느껴지는 것처럼.

“뭐야!”

“거봐. 내가 놀라지 말라고 했잖아. 목소리 낮추고 다시 덮어. 감기 걸릴라.”

“그래, 아니 그보다…… 아니지, 해열제 없어? 열이 펄펄 끓는다.”

“아무거나 함부로 먹이면 안 될 거 같아서…….” 

“이놈 여자? 아니지? 남자 맞지?”

“보면 몰라? 근데 너도 놀라면 말을 더듬기도 하는구나.”

“정말 임신을 한 거야, 아님 종양이야. 아니, 종양이면 이렇게 커지지도 못해. 벌써 갔지.”

“내가 그걸 몰라서 너 부른 거 아냐…….”

당혹감뿐이던 연백진의 눈이 이성을 되찾기 위해 흔들렸다. 그는 선담의 배를 몇 번 짚어보더니 석재 뜻대로 이불을 도로 턱까지 덮어주었다. 남아있던 빗방울이 땀줄기처럼 등골을 타고 내려왔다. 그 후엔 묘한 침묵이 흘렀다. 까마득하게 눈을 감고 있던 백진이 이윽고 눈을 떴을 때, 가까스로 침묵이 깨어졌다.

“이런 배를 해가지고 폭우 속에서 널 찾아온 거라고……. 사정은 딱한데 자세한 건 모르겠고, 일단 신고부터 해놔야 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어디 해외연구팀의 중요한 실험군일 가능성이 있어. 적발 되서 숨겨주었다는 의심이라도 사게 되면 소송 걸리는 거 알지? 그럼 정말 큰일 난다.”

“그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지만 역시 그런가……. 이 녀석 유학 간다고 하면서 열여덟에 영국으로 갔는데 사실 유학 갈 형편은 아니었어. 애인이 무슨 제약회사 임상실험팀에 몸담고 있었는데 같이 떠나서…… 아, 옛날얘기는 나중에 하고. 어쨌든 나는 그래도,”

“임상실험에 투자할 제약회사면 거대기업 몇밖에 없는데 만약 맞다면 큰일이다. 이 와중에 넌 뭐가 그래도냐?”

알 만한 사람이 어수룩하게 대처한 것이 황당했는지 백진은 반사적으로 쏴붙였고 석재는 점점 안쓰러운 마음이 되었다.

“그래도… 홍선담이 이 몸을 해가지고서 여기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날 찾았을 정도면 정말 큰일을 당했다는 생각밖에 안 들어서. 큰 기업 실험일수록 횡포가 심해서 실험체한테 실험중단 같은 조건 안 달아주잖아. 그리고 녀석이 폭우를 뚫고 여까지 찾아온 이상 난 녀석을 보호할 의무가 있어. 정말 소중한 아이니까. 얘, 내 첫 친구야.”

“서른하나나 먹어가지고 이런 핏덩이가 친구냐? 부럽다. 법정에서도 그렇게 얘기해봐라. 배심원들이 아주 좋아 할 거다, 미친놈아.”

배가 부른 남자를 보고서도 금세 이성으로 대처하는ㅡ천성이지만 슬쩍 비꼬기까지 하는ㅡ연백진의 모습은 정석재가 기대했던 모습이기도 했고 한편으론 섭섭해질 모습이기도 했다. 

정신을 잃고 쓰러진 사이에 안면도 없는 남자에게 자신의 부푼 배를 보여주고 싶어서 선담이 석재를 찾아온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발도 좁은데다 의사라고는 해도 내과나 산과엔 전혀 연줄이 없던 그는, 자신을 도와줄만한 친구를 소환할 수밖에 없었다. 

선담의 배가 왜 저모양인지, 이렇게 시간을 끌고 앉아있어도 되는 것인지, 무엇도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석재는 자신의 엉성한 대응을 힐난했다. 급박한 마당에 석재가 표정관리도 하지 못해 절절매는 걸 지켜보던 백진은 결정했다는 듯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펼쳤다. 띠, 띠, 띠. 버튼을 누를 때마다 작은 기계가 아코디언 소리를 내며 두 남자 사이를 오갔다. 112에 전화하려는 걸까? 아님 119에? 어디든 반갑지 않아서 석재의 얼굴이 하얗게 굳어갈 때쯤 백진이 입을 열었다.

“인표 형. 전화 받네, 이 시간에.”

땅이 꺼져라 한숨 쉬던 석재가 놀라워하며 고개를 들었다. 연백진이 아는 그 인표라면 아마도 MIU 의대의 서인표로, 두 남자의 대학선배이자 강남에서 산부인과를 운영하는 그 서인표일 것이리라. 석재는 반색하며 핸드폰 겉면에 옆통수를 가까이 댔다. 걸걸하게 가래 끓는 소리가 쩡쩡 울렸다.

[새끼야, 지금이 몇 시냐? 내가 아직도 응급실 인턴인 줄 알아?!]

“정말 급한 일이라 그래. 반포로 좀 와줬으면 하는데.”

[쌍놈의 새끼. 끊는다.]

“잠깐. 뭐가 그리 급해. 옆에 누구 있어?”

[자다가 봉창도 한참 두드린다! 형수님 계시지 누가 있겠냐? 너 지금 몇 신 줄 알아? 지금이 새벽ㅡ]

“아아, 난 또. 형네 병원 카페테라스, 거기 그 생머리 매니저 분이라도 같이 계시는 줄 알았지.”

순간 수화기 저편으로 무시무시한 고요가 찾아왔다. 그 숨 막히는 고요 뒤에 중년의 소심한 분개가 따라왔다.

[……그걸 아직도 기억한단 말이냐?]

“워낙에 뜨거운 사이였어야 말이지.”

[흠, 그, 뭐냐, 그러니까 급한 일이 뭔데? 저명하신 내과의가 한낱 150평짜리 병원 원장을 찾는 이유가 뭔데?]

“안 웃겨. 임산부라고 하긴 뭐한데, 어쨌든 급한 환자가 있어. 내가 그냥 봐서는 잘 모르지만 임신일 가능성이 있는데 이건 형이 보면 딱 알잖아.”

[염병할! 배가 불렀으면 임신인거지 난 왜 부르는 건데!]

“그 매니저 분 이름이 뭐였더라.”

[요즘 백수들 무섭다!]

“반포 9동. 순환선타면 연락 줘.”

백진이 경쾌하게 폴더를 접었다. 통화내용을 들으려고 딱 붙었던 석재가 그 바람에 떨어졌고 백진은 침상 가까이로 의자를 뽑아 앉아 허심탄회하게 뱉었다.

“일단 인표 형 오면 몸에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알아보자. 너도 인표 형이면 만족하지? 의리파에 입 무겁기로 유명하니까. 만져보니까 99% 임신인 것 같다만 전문의는 따로 있으니까.”

“그래. 고맙다.”

“해열할 테니까 얼음 챙겨오고.”

“응, 그래, 알았어. 고맙다.”

재차 감사를 표한 석재가 보기 드문 모양새로 우다닥 달려 나갔다. 어지간히 아끼는 친구인 모양이었다. 속이 복잡해 담배를 꺼내 문 백진은 불을 붙이려다 담뱃갑을 옆에 던져놓았다. 공중에 떠버린 손은 그 대신 선담의 뜨거운 이마로 가 찰싹 붙었다. 서늘한 손바닥이 물기어린 피부를 쓰다듬었다. 

정석재가 저렇게 정신을 반쯤 빼놓은 이유는, 어쩌면 아이의 임신가능성에도 있겠지만 조막만한 얼굴에 물든 구타흔적 때문인지도 몰랐다. 몸 구석구석에서 보이는 자국. 사람의 몸을 아주 망가트리지는 않은, 힘을 조절할 줄 아는 노련한 주먹질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입 밖에 올려봤자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라 연백진도 침묵했다. 간혹 가다 아이는 고열 때문인지 신음을 흘렸다. 고통에 겨운 긴 속눈썹이 파르르 파르르 위태롭게 떨렸다. 이제 막 스무살쯤 되었을까. 연백진은 처음 보는 아이가 딱해 내키는 대로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다 부드러운 촉감에 놀라 손을 떼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이 심각할 때임을 알면서도 아이와 아이의 태아가 마치 주변의 소리를 다 들을 것만 같아서ㅡ 그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별일 아니라는 듯 낮게 속삭였다.

“꼬맹이가, 무슨 지독한 일을 당한 거냐……. 응?”

- - - -

은협은 여느 때와 똑같았다. 달라진 것은 없었다. 눈코입 모두 제자리에 붙어있었고 목소리도 근사했다. 다리도 여전히 길었다. 그리고 초콜릿 같은 담배내가 났다. 다만 달라진 것이 하나 있다면 그가 아닌 그의 핸드폰이었다. 발신자를 숨기려는 의도가 다분했던 지난밤을 넘기고 저녁 7시에 맞춰 그가 찾아왔다. 입고 온 소재가 만날 입던 스타일이 아니라 물끄러미 쳐다봤더니 친구들끼리 나가서 저녁을 좀 먹었단다. 그러려니 했다. 그러다 우연찮게 은협이 핸드폰을 코앞에 두고 욕실로 들어가기에 화면을 열어보았다. 의심의 꼬리가 길어지는 것 같아 불쾌하면서도 자꾸 걱정이 돼 열어본 액정에는 비밀번호를 입력하라는 메모가 띄어있었다. 제발 여기서 의심이 멈추어버렸으면 했지만 그 기회마저 상실한 기분이었다.

“핸드폰은 왜 보고 있어?”

은협이 타월로 얼굴을 문지르며 물었다. 그가 나온 줄도 모르고 비밀번호 창을 황망히 바라보던 선담은 지레 놀라 말까지 더듬으며 내장카메라를 찾았다.

“화질도 안 좋은데 뭐하러. 밥이나 먹자. 먹고 싶은 거 있어?”

“……. 그래도 새 건데, 앨범 보고 싶어.”

어지간하면 고집부리지 않는 선담이 휴대폰을 쥐고 놓지 않자 은협은 속모를 눈을 떴다. 무기질의 검은 눈동자는 한 점 흔들림조차 없었다. 그는 핸드폰에 손을 올려놓고 선담을 똑바로 보았다.

“홍선담. 웬 고집이야.”

“……….”

“돌려줘. 놓고.”

“……왜, 내가 보면 안 되는 거라도,”

“네가 보면 안되는 게 뭔데.”

오히려 되묻자 선담의 반응이 느려져 은협은 휴대폰을 뺏을 수 있었다. 그는 한숨을 덜어내듯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뒤춤에 핸드폰을 꽂았다. 선담이 보여 달라고 하면 뱃속의 내장까지 다 꺼내 보여주던 과거의 모습과는, 역시…… 달랐다. 이젠 더 이상 재고 말고 할 일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행동거지가 변해있었다.

“선담아. 한창 몸 아껴야 할 시긴데 도대체 무슨 걱정이냐. 내가 옆에 있는데. 어디 가는 것도 아니고 늘 네 옆에 붙어있을 건데 무슨 의심이 그렇게 많아서 안절부절못해. 너 자꾸 헤매는 거 소장님이 알면 연구실로 들어가야 할지도 몰라. 그건 싫지 않아?”

물증은 없어도 심증이 너무 확고하게 굳어버려 한쪽이 털어놓거나 털어버리지 않는 이상 해결될 것 같지가 않았다. 핸드폰으로 씨름을 한 후부터는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몰랐고 은협의 얼굴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비밀번호.

사람의 접근을 차단하는 수단으로 만들어졌지만 그 이상으로 사람을 밀어내는 효과까지 있는 줄은 몰랐다.

자신이 보아선 안되는 게 뭘까. 최악은 당연히 새 사람의 흔적일 것이다. 어차피 그 외는 짐작 가는 것도 없었다. 수상한 걸 모두 구체화시켜 따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자신만 창자를 훤히 드러낼 수 없어서 선담은 울고 싶은 걸 꾹꾹 동여맸다. 이러니 음식물이 제대로 넘어가겠는가. 종래엔 드라마에서 보던 치정싸움이 되는 건 아닐까하는 끔찍한 망념에 휩싸였다. 

“선담아, 도대체. 너 자궁이…”

“왜, 자궁이, 왜…?”

“너 정말 신경 쓰이는 일 있구나.”

자기 전에 초음파 검사 한번 하자고 끌고 들어간 방에서 은협은 걱정스런 눈초리를 했다.

“누누이 말하잖아. 네 자궁은 인조라 극세하고 예민해. 네 심장이 조금만 빨리 뛰거나 조금만 피로해져도 아기집이 졸아들고 태아는 극도의 불안을 느끼게 된다고. 아기집이 흔들리면, 이거 봐, 애가 좁아서 울고 있다.”

“설마 많이 안 좋아?”

“물론 이 정도가지고 금방 안 좋아지거나 하진 않지만 그래도 조심해야지.”

“……….”

울고 싶을 정도로 짜증이 났다. 배에 한가득 묻은 젤을 닦아주는 은협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선담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은협 선배. 나 할 말 있어.”

“그래, 조용하니 우리 둘 뿐인데 해.”

“……그러니까, 있잖아. 나 요즘 선배 때문에 많이 속상하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은협이 인상을 찌푸렸지만 댁 때문에 안 좋다고 고백한 이상 변명정도는 들어야했다.

“선배가 그랬었잖아, 4년 전에. 이 인공배양이 성공하고, 아니, 굳이 성공하지 못해도 워낙에 궂은일이니까 선배가 책임지고 옆자리 지켜준다고. 논문이나 언론공개 같은 거 때문에 사람들과 같이 아이를 돌보게 되겠지만 그래도 우리 둘은 연인으로 쭉 함께 있자고.”

“그랬지, 그랬어. 근데 그게 뭐. 설마 내가 그 약속을 깰 기미가 보인다고?”

“아니, 절대 그런 뜻은 아니야. 단지…… 난 선배의 그 약속 하나만 철썩 같이 믿고 여기까지 와서 남자의 몸으로 애까지 가졌는데, 그러니까, 난…… 이런 모습으로는 한국에 돌아와서도 친구 한명 못 만나. 그런 나한테,”

“잠깐, 잠깐, 전화 왔다.”

뒤춤에서 진동이 울렸다. 확 식어버린 선담의 얼굴 위로 은협이 액정을 확인하더니 대충 웃었다.

“받고 올게.”

“여기서 받아.”

선담은 미간을 그으며 조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은협이 생뚱스럽게 그런 선담을 쳐다보았다. 선담이 끝끝내 독에 찬 눈으로 바닥만 쏘아보자 은협은 잘게 진동하는 핸드폰을 쥔 채로 어깨를 늘어트렸다.

“정말 나 때문에 이러는 거냐, 너?”

“왜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해.”

“안하던 짓이라니.”

“밖으로 나가서 전화 받거나 내 앞에서 전화 안 받거나 그런 거.”

“전화를 나가서 받았다고? 연구실 일이야. 너 걱정 할까봐 모르게 받으려는 건데 그런 게 일일이 마음에 걸리면 어떡하냐.”

“연구실 일이라고? 연구실 사람들끼리 언제부터 프라이버시가 형성된 건지 모르겠다. 전상목 팀장님이 긴밀한 이야기니까 홍선담 없는데서 받으라고 했어?”

“후ㅡ”

은협은 짜증스럽게 이마를 짚었다. 흔들리는 머리칼 사이로 드문드문 보이는 그의 눈동자는 바쁜 업무와 그에 따른 피곤에 지쳐버린 듯했다. 그 피곤에는 선담이 어리광부린다고 생각하는 체념도 혼재하는 듯했다.

“전 팀장님하고라면 너한테 셔츠 빌려준 그 날? 그건ㅡ”

“팀장님하고 통화한 거 아닌 거 알아. 거짓말 하지 마.”

“야, 홍선담.”

“팀장님한테 물어봤어. 선배하고 통화한 적 없다고 그랬다고.”

“……….”

부르르르ㅡ 

끊어졌던 진동이 다시 울리자 은협은 “씨발.”하고 뱉으며 일어나 방에서 나가버렸다. 정적이 찾아왔고 초음파기에서는 간헐적으로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선담은 굵은 한숨을 쉬었다.

왜 이다지도 요령이 없을까. 오랫동안 묵혀서 내뱉으면 이보다 더 심했겠지만 아무튼 타이밍 더럽게 못 맞추고 요령도 없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은협이 수상한 건 사실이지만 그가 저렇게 오리발을 내미는 것 보니까 절대 호락호락 넘어갈 것 같지 않은데 괜한 짓을 저질렀나 싶었다. 옛날부터 은협 앞에서는 늘 꺼내놓고 나서 후회했다.

뱃속에 영양을 뺏기는 만큼 기력도 빼앗기는 걸까. 여름 소나기처럼 눈물이 후두둑 떨어지려는 걸 애써 들이마셨다. 

한국으로 돌아온 지 겨우 한달 좀 지났다. 타국에선 단합과 보안이 대단히 중요했기 때문에 혹여라도 바깥으로 새는 낌새를 보이면 대단한 실례로 여겨졌었다. 그렇기에 연구원들은 실타래처럼 똘똘 뭉쳐 굉장한 단결을 자랑했었다. 허나 지금은 달랐다. 여기는 한국이고 그들은 벌집처럼 이루어진 숙소에서 벗어나 야근이 없는 날이면 출퇴근을 하게 되었다. 자유시간을 밖에서 즐길 권한이 생겼고 도너에게 성공적인 수정이 이루어진 후라 여유가 생겨 휴가신청 또한 자율이었다. 모두가 타국의 연구소에 틀어박혀 가족 같은 공동체 생활을 강요받았던 것이 알게 모르게 도너에게만은 큰 위안이 되었던 것이다. 한국으로 돌아와선 손발이 모두 억압된 것은 홍선담과 그의 태아, 단 둘이었다.

“괜찮아, 괜찮아. 홍선담, 괜, 찮아…….”

약하디약한 아기집이 충격이라도 받을까봐 선담은 가늘게 호흡하며 자신의 배를 끌어안았다. 연인의 씨이기 이전에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희망이니까 소중히 다뤄야했다. 최은협만큼은 아니어도 길호문 소장과 전상목 팀장, 그리고 다른 멤버들 모두가 선담에겐 소중했다.

통화가 끝난 지 한참이 되어서도 은협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직도 발코니에서 통화 중일까? 맥없이 끊어져버린 대화와 홍선담만 덩그러니 남아서 그를 기다렸다. 선담은 차갑게 말라버린 손끝을 만지작거리며 은협이 돌아오면 뭐라고 사과해야 할지부터 걱정했다. 미안하다고 굽히고 들어가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도 없을 테지만 나쁜 머리라도 좀 굴려보는 게 나았다. 차라리 이럴 땐 책이라도 제대로 읽을 줄 알면 좋을 텐데. 선담은 우울한 기분에서 빠져나오려고 입꼬리를 올렸다. 미심쩍은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지만 결국엔 그것도 다 기분 탓이니까 내 탓이라고 꾸중하며 일단 사과하자고 다짐하는 선담이었다. 그러나 방 안을 선회하는 묘한 기계진동음을 피해 밖으로 나왔을 때엔, 시계바늘은 새벽 2시를 가리키고 있었고ㅡ… 

“선배, 선배ㅡ 어딨어……?”

최은협은 어디에도 없었다.

-

그 후로 선담은 몇날며칠 동안 하루의 많은 시간을 할애해 거실을 배회했다. 그것은 산모운동이 아닌 방양으로, 잠시 소파에 앉았다가도 가시방석에 앉은 듯 안절부절못해 다시 일어나 제자리걸음을 했다. 눈이라도 붙이자고 이불속에 몇 번이나 틀어박혔지만 자려고하면할수록 말똥말똥해졌다. 이럴 때 연락하라고 있는 친구들인데 ‘실험군’으로 영국에 간다는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고 불룩 불어난 배를 가지고 호출할 수도 없었다. 혼자 침대에 누워있으면 불면증 비슷한 무언가가 가슴을 쪼았고 자꾸 좋지 않은 의혹이 자신을 옥죄었다.

은협은 그렇게 나가버린 이후부터 소식이 없었다. 그가 들러야 하는 날에도 다른 연구원이 대타를 뛰었다. 겨우겨우 용기를 내 몇번 연락을 했지만 도통 받질 않았다. 간음하러 나간 서방이라도 기다리는 양 조바심이 점점 거세지면서 선담은 겨우 눈물만 참는 수준이었다.

내가 그렇게 큰 잘못을 저지른 건가? 완전히 돌아서버릴 것 같은 뒷모습에 숨이 말랐다. 은협의 낯선 변덕이 너무도 급작스럽게 두 사람의 틈에 끼어들었다. 연인이기 이전에 그들은 유년시절부터 한번도 떨어져본 적 없는 사이였다. 함께 살아오면서 싸운 적도 몇 없었다. 싸운다고 해도 8살이나 어린 선담이 투정을 하면 은협이 다 받아주는, 혹은 은협이 쌈질이라도 하고 들어오면 선담이 놀라 울거나, 반찬투정 혹은 잠자리에서 투닥거리는 정도가 다였다.

그러니 은협이 제 연락도 받지 않을 정도로 틀어져버린 게 너무 속상하고 믿어지지 않아서, 선담은 입덧이 멈춘 후에도 통 입맛이 없었다. 옛날에는 입맛이 없어도 밥 때가 되면 곧잘 받아먹었는데 이제는 아예 뱃속부터 음식을 거부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선담이 하루 이틀 식음을 전폐하자 연구실이 슬슬 떠들썩해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은협 앞으로 소장실 호출이 떨어졌다.

“소장님, 들어갑니다.” 

“어서 와라.”

길호문은 한국으로 돌아와 더 좋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영국은 물이 안 맞는다는 둥 하던 노인네의 얼굴이 환해서 보는 사람까지 좋았다. 은협은 길 소장의 명판 앞에 섰다.

“최은협이. 보니까 선담이 보러 가는 날을 죄 대타 돌렸던데, 이게 어떻게 된 일야?”

“……….”

“애랑 싸웠어?”

“아뇨.”

“뭘 숨겨. 아니, 싸웠어도 말이지 한참 선배가 말이야. 엄지만한 21살짜리 하나도 제대로 못 돌봐서 일주일을 대타 뛰게 만들다니. 안 그래도 김우석이 안사람 둘째 났다고 바쁠 텐데 임마, 정도껏 해야지.”

“싸운 거 아닙니다. 제가 일이 좀 있어서 잠시 미룬 것뿐입니다.”

“일 뭐? 연애?”

그가 능글맞게 묻자 은협의 표정이 대번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자 길호문도 다 안다는 식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EEC 자금줄 대주느라 여러모로 힘든 건 안다만 아무리 바빠도 그 애가 참맘으로 기댈 데는 너 뿐인데 잘해줘라. 인가받은 도너래도 남자가 애를 갖는다는 게 보통 일인 줄 아냐? 없는 뱃속에다 창자 밀어내고 자궁 만드는 게, 당하는 입장에선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몰라서 그래? 그 어린 게 밤마다 소장실 너머에서 깽깽거리던 것만 생각하면 자식 없는 나지만 눈물이 다 나더라. 이제 겨우 반 넘었고 배는 갈수록 더 부를 텐데 이 핑계 저 핑계 대지 말고 잘해주란 말이다. 자꾸 요령피우다가 혹여 홍선담이 스트레스 받아서 자궁에 문제 생기면 그거 다 내 탓으로 돌릴 거야?”

길 소장은 농을 치듯 말했다. 최은협은 입꼬리만 힘주어 웃었다. 이것저것 떠안기는 노인네. 몸을 두 동강이라도 내서 움직이란 소린가.

“그리고, 기형 검사 했다면서? 결과는?”

“전 팀장님이 오늘 새벽이나 내일쯤 나온답니다.”

“그렇군.”하고 대답한 뒤 길호문은 들고 있던 차트를 은협에게 넘겼다. 최은협의 이름엔 파란선이 네 번 그어져있었고 대행을 부탁했던 김우석이 칸칸마다 자리하고 있었다.

“전화해서 멋지게 사과하고 잘해줘. 오늘 업무 많걸랑 내일 당번이라도 바로 찾아가.” 

“심려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당연히 죄송해야지. 홍선담이가 우리 팀한테 어떤 아이인지 네가 그걸 모른다곤 생각지 않아. 사람은 무릇 은혜를 알아야 해. 열여덟 짜리 동자가 인공수정에 참여한 날부터 우리는 빚을 진게다. 그런데 심적으로도 많이 힘들 녀석을 감싸주기는커녕 방치해둔다는 게 말이 되냐? 농담처럼 말하지만 우리는 출신이 공사(公社)기관이라 실험 망치는 날엔 나라에서 국민들 세금으로 PTA한테 위약금 물어줘야 해. 좀 잘 해줘라. 이것아.”

“죄송합니다. 잘 알겠습니다.”

털레털레 걸어 나오는 최은협을 보고 연구원들이 흥미위주로 몇 모였다.

“소장님이 뭐라셔?”

“거봐라, 너 자꾸 미루다가 소장님 호령 한번 떨어진다고 말 했잖냐.”

“원래 길 소장님 연구생 지목 잘 안하시는데.”

도움도 안 되는 소리만 지껄이는 게 짜증나 은협은 담배만 잽싸게 한대 태우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1층 로비로 내려왔을 때 그는 휴대폰을 열었다. 1번 단축번호를 꾹 누르자 화면에 ‘홍당’라고 떴다.

[……여보세요?]

“나야.”

[선배…….]

“그래.”

[저기, 있잖아. 지난번엔, 내가 미안했어.]

받자마자 사과하는 꼴을 보니 정말로 꽤나 앓았나 보다. 며칠 굶은 사람답게 목소리엔 힘이 하나도 없었다. 원래 이러던 애가 아닌데 잘잘못을 차치하고 먼저 사과부터 하고보다니 별일이었다. 은협은 핸드폰을 귀에 갖다 댄 채 로비를 한 바퀴 길게 돌았다.

“아니야, 너 때문에 화났다거나 그런 게 아니라 학교서류문제 때문에 바빠서 그랬어. 미리 연락 줬어야 했는데 나야말로 미안하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로 선담의 낮은 웃음이 전해져왔다.

[다행이다. 난 선배가 나한테 화 많이 난 줄 알았거든……. 그 날은 내가 너무 예민했던 거 같아서. 안하던 짓해서 미안해. 가뜩이나 연구실 일로 바쁠 텐데 미안…….]

“내일 보자. 이번엔 내가 갈 거니까 기다려.”

그 다음엔 별 말 없이 끊었다. 고작 열흘하고 이틀 정도였는데, 그 동안 얼굴 좀 안 비쳤다고 그새 풀이 죽어서는 두서없이 사과만 전하는 녀석이 가여웠다. 어딘가 유약하게 변해버린 그런 모습에 낯섦을 느끼면서도 그보다는 그의 건강과 태아의 안녕이 궁금해졌다. 출산 후에도 저렇게 약하게 굴까 의문이기도 하다가 사람이 고통에 많이 저미면 확 바뀌어버리기도 하는구나 싶어 가슴이 욱신거렸다. 

최은협은 자신이 어떻게 행동하는지에 대해 스스로 관심이 없거나 묵과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홍선담이 이렇게 나오는 것도, 자신이 어떻게 행동했었는지도, 그는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때문에 자신을 훌륭하게 통제할 수 있었다. 그저 그는, 본의 아니게 선담을 조련하게 된 덕에 내일은 귀엽게 응석부리는 모습을 볼 수 있겠거니 했다. 한번 꼬리를 흔들면 정말 귀여운 녀석이니까. 이러니저러니 해도 안 그러던 사람이 애교를 떨면 그게 더 예쁘고 안 웃던 사람이 웃으면 그게 더 꽃미소다. 순두부같이 하얀 얼굴과 빨간 입술로 미안하다고 또 다시 사과할 홍선담의 얼굴이 기대된다 해도 부정할 순 없었다. 오랜만에 초음파로 태아의 사진을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을 땐, 차갑게 얼어있던 심장 한쪽이 뛰었다.

-

토요일.

선담은 은협이 가져다주었던 헐거운 트레이닝복을 입었다. 바지가 널찍해 편했고 티셔츠와 함께 입으니 딱 좋았다. 가끔 전신거울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여자도 아니면서 임신한 자신의 모습에 괴리감이 들었지만 지금은 그런 데 정신 팔려 있을 때가 아니었다.

“팀장님, 다 됐어요.”

“그래? 그럼 출항할까!”

목요일에 오겠다고 약속했던 은협은 저녁 7시를 넘기고 2시간이 지나서야 전화로 급한 일거리가 떨어졌다고 전했다. 섭섭하긴 했지만 또 싸우기라도 할까봐 선담은 더 묻지 못했다. 은협과 함께 먹으려고 잘라두었던 롤케이크는 수분이 다 빠져나가 마른지 오래였다. 돌아올 토요일을 기다리며 이틀이 얼마나 긴 시간인지 새삼 느꼈다.

토요일 오전 당번은 전상목이었다. 그런데 헐레벌떡 들어온 그가 은협의 집에 가서 같이 점심이나 하잔다. 거절할 이유가 없어서 선담은 신나하며 따라나섰다. 전상목은 어젯밤 내내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었는지 연구실 특유의 소독향을 가득 달고 있었다. 

“철야하셨나 봐요.”

사사로운 것을 묻지 않는 선담이 괜스레 들떠서 평소보다 말이 조금 많아진 건 사실이었다. 뒷좌석에 앉아 무거운 배를 이끌고 자꾸 묻는 통에 전상목은 다른 날보다 더욱 성의를 보여 대꾸했다. 

“그래. 처음 팀장 됐을 땐 날아갈 듯 좋아했었는데 막상 되고 보니까 별로 좋은 게 없어. 일일이 작성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

“어제는 뭘 작성하셨는데요?”

“온통 너와 태아에 대한 이야기였지. ……. 지금 우리에게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어. EEC가 전부인 인간들이 많아. 다들 살아남기 위해 악전고투 중이지.”

전상목은 사자성어를 붙여가며 하하 웃었다. 밤샘으로 눈밑이 우중충한 주제에 시무룩한 자신을 달래느라 팀장이 오버하는 것 같아서 선담은 머쓱했다. 

“근데, 지금 가면 선배가 있나요? 근무 중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상목은 주머니를 뒤져 선담의 손바닥위에 찰랑이는 무언가를 올려놓았다. 익숙한 모양의 열쇠였다. 1104호 열쇠가 맞는 것 같았다. 설마 훔쳐 오신 건가. 선담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전상목은 한술 더 떠서 백미러를 통해 윙크를 날렸다.

“은협이가 길 소장님 학생시절 논문 보고 싶다길래. 워낙에 희귀본이라 나도 겨우 얻은 거지만 자비를 베풀어 겸사겸사 집까지 배달해 주기로 했다. 우편함에 꽂아두기엔 방대한 크기라서.”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선배가 열쇠를 그냥 막 줬어요?”

“홍선담, 너 지금 나 의심하는 거냐?”라고 한번 째려보더니 전상목은 허허 웃었다.

“뭐, 조용히 할 얘기도 있고 하니 이거야 말로 겸사겸사지. 6시엔 퇴근할 것 같으니까 지금 가서 밥 주문해놓으면 딱이겠다. 자, 도착!”

키를 뽑은 전상목은 서둘러 내려 선담을 부축해주었다. 거동이 불편할 정도는 아니라 이런 배려가 가끔 부담스러웠기 때문에 선담은 팀장을 슬쩍 밀어내는 것으로 혼자 차문을 닫았다. 지하주차장이 없는 구식아파트는 많은 시선에 노출되어있었다. 예전에 은협과 왔을 때는 저녁이라 몰랐지만 바가지만큼 오른 배가 이만저만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건물 바로 앞에 주차한 후에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올랐다.

“총각 혼자 사는 집이니 꽤 볼만하겠는데?”

전상목이 낄낄거리며 현관에 열쇠를 꽂았다. 경쾌한 쇳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자마자 익숙한 체취가 났다. 선담은 자신을 순식간에 잠재울 수도 있고 안심시킬 수도 있는 은협의 냄새에 눈을 감았다. 담배냄새를 싫어해도 옅은 향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선담이 먼저 발을 들여놓았다.

“…ㅡ누구세요?”

처음 보는, 전혀 모르는 여자의 목소리. 웬 젊은 여자 하나가 두 남자와 마주섰다. 한발 늦게 들어오던 전상목은 당황해 목소리가 갈라졌다.

“아! 여기가, 어라, 은협이 집 아닌가?” 

“아뇨아뇨. 맞아요. 최은협이 집 맞아요.” 

여자가 요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좀 더 가까이 다가왔다. 긴 웨이브의 여자는 매우 고급스러운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하얀 레이스 블라우스에 검은색 정장치마를 입고 있었고 각선미가 끝내주었다. 팀장은 더욱 당황했고 선담은 말을 잃었다.

“아, 실례합니다. 최은협 씨와 같은 연구소에서 근무하는 전상목이라고 합니다. 애인분이 계실거란 이야기는 못 들었군요.”

“네, 제가 몰래 찾아온 거라서 오빠도 몰랐을 거예요.”

“그렇군요. 아, 아차, 그리고 이쪽은…”

선담을 소개하려던 전상목은 말끝을 흐렸다. 그제야 선담의 상태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홍선담은 결코 평범한 몸이 아니었다. 멀쩡한 남자 주제에 비정상적으로 부른 배를 가진 처지였고 그 배라는 것도 보통 뱃살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러나 여자는 놀라는 기색 없이 여유롭게 웃으며 또박또박 말을 건넸다.

“알아요. PTA사 인공자궁 임상실험 연구팀 EEC. 길호문 소장이 관리하는. 우리오빠 소속이잖아요. 실험군인가 봐요? 듣던 대로 배가 정말 많이 불렀네요. 실제로 보니…… 괜찮은데요?”

“아, 네, 이쪽은 홍선담이라고 합니다. 선담아, 인사드려야지. 은협이 애인되시나보다.”

“……안…녕하세요.”

그러자 그녀는 지나치게 친절한 웃음을 띠며 팔짱을 끼고 섰다.

“응, 안녕. 이름이 선담이구나. 나 사실 오빠한테 네 얘기 많이 들었어. 이제 막 스물하나라며? 용하다 정말. 아, 난 스물여섯이니까 말 놔도 되지?”

“은협이가 연구실 얘길 해요?”

“아, 저한텐 해도 돼요. 자세한 건 나중에 말씀드리는 걸로 하고. 근데 정말 신기하네요. 그렇죠? 남자가 이렇게 배가 불러있으니까 진짜 신기하네? 말만 들었지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라 그런가?”

“전…… 가, 가볼게요.”

따다다다 쏘아붙이는 말에 속이 울렁거렸다. 가셨던 입덧이 다시 올라와 금방이라도 토악질할 것 같았다. 테이블에 길호문의 책을 내려놓던 전상목이 당황하여 선담의 팔을 잡았다.

“선담아, 괜찮니?”

“어머, 나 때문이라면 괜찮으니까 아프면 쉬었다 가. 팀장님도 계셨다 가세요. 오빠 6시에 퇴근한다고 방금 연락 왔었는데. 아, 저보다 더 잘 아시겠구나.”

‘오빠’라니…. 얼굴로 피가 몰렸다. 그것은 분노가 아닌 수치 때문이었다. 

그녀는 선담만큼 키가 컸고 선담만큼 하얬지만 그런 외형적인 게 아닌 결정적인 것이 달랐다. 그녀는 선담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품위란 것을 당당하게 지니고 있었다. 그 품위는 그녀의 자신감 넘치는 음색에 고스란히 묻어나와 거대한 벽을 형성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선담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한번만 깜박여도 줄줄 흘러버릴 것처럼 커다란 물방울들이 송글송글 고여 버렸다.

“어이, 선담아, 왜 그러는 거야? 어디 아파?”

“아, 아니에요, 아니에요.”

“이런…….”

전상목이 낭패하며 선담의 허리를 받쳐 들었다. 은협만큼 크거나 기운이 좋진 않아도 홍선담을 들 정도는 됐는지 전상목은 그를 소파로 가 옮겼다. 사정을 알 리 없는 남녀가 걱정스레 선담을 바라보았다.

“선담아, 오심 올라오는 거냐?”

“어머, 입덧도 해요?”

“아, 예. 여성 산모와 똑같아요. 이거, 계속 안 좋으면 은협이 오기 전에 가봐야겠군요.”

“혼자 기다리기 심심했는데. 그보다 이걸 어째요. 침대로 가서 눕는 게 낫지 않겠어요?”

“어쩔까, 선담아? 지금 돌아가야겠으면 가자. 아님 은협이 기다렸다가 같이 갈래? 아, 오늘 저녁 당번은 은협이거든요.”

“알아요. 저번 주 내내 제가 들들 볶아서 제대로 근무 못했다고 하더라구요. 바로 가야한다고 했었어요.”

선담은 사지를 늘어트린 채 소파에 걸터앉아있었다. 힘을 주어도 온몸의 신경이 마비가 된 것처럼 차갑게 식어만 가고, 악력엔 반응이 안 갔다. 

몇 번을 들어보아도 그녀는…… 그의 여자인 듯 했다. 아무리 오역하려고 노력해 봐도 까랑까랑한 그녀의 목소리는 선담의 귓구멍을 파고들었다. 최은협이 알게 모르게 숨기던 모든 것들이 그녀에게 뿌리를 두고 있다는 본능적인 직감을 지울 수 없었다. 15년 내내 서로에게 뱃속의 장기도 서슴없이 보여주던 사이였으면서도 숨기려들었던 한 줌의 비밀. 정말로 그녀였던 것일까.

“선담아, 괜찮아?”

“……가고 싶어요. 집에…….”

“그래? 갈래? 가는 게 좋겠어?”

고개를 끄덕였다. 시계는 이미 6시를 넘기고 있었다. 곧 아무것도 모르는 최은협이 들이닥칠 텐데 도저히 얼굴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그러나 언제나처럼ㅡ…

그러니까 보육원 동기들에게 개처럼 얻어맞았던 때처럼,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화장실에서 무슨 짓을 당하는지도 모른 채 온종일 묶여있었던 때처럼, 큰 도움을 받은 후에도 감사한 마음을 전할 순간을 놓쳐 최은협 앞에서 쩔쩔맸던 때처럼, 넘치는 카리스마에 눌려 그를 많이 좋아하면서도 티도 못 내고 어린 맘만 간절하게 태웠던 그때처럼…… 선담은 늘 한발짝 늦곤 했다. 언제나 그랬다. 언제나…….

몹시도 무서웠지만 저랑 살을 섞고 싶다고 덤비는 최은협을 끝끝내 받아들였던 그날 밤도 그랬고, 영국발 비행기에 올라 2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공포에 휩싸였던 4년 전의 그날도 그랬다. 어딘가 변해버렸지만 모진 소리 들을까봐 홀로 헤매며 결국 빈자리만 지켰던 지금까지의 시간도,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선담은 꼭 한발 늦게 깨달았다.

그리고, 달칵ㅡ 

아까처럼 경쾌한 쇳소리가 한 번 더 집안을 울렸다. 

-

"………."

처음 최은협이 보여준 것은 찬물을 끼얹은 침묵이었다. 나머지 세 사람은 각자 다른 행동을 취했다. 전상목은 논문을 가지고 왔다며 선담이와 함께 놀래어주려고 했는데 애인분 때문에 저가 더 놀랐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여자는 입을 가리고 다소곳이 웃으며 저도 이 집 주인을 놀래어주려고 왔다고 전했다. 선담은 여전히 쓰러질듯 말듯 한 의식을 붙들고 소파 끝자락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놀래키러 왔다고……. 근데 별로 안 놀라서 어쩌나.”

가까스로 뱉는 말이 고작 저거라니. 선담이 짜게 웃었다. 

“지애야, 여긴 전상목 팀장님. 팀장님, 연지애입니다.”

“애인이 있었으면 신고를 했어야지.”

“……. 만난 지 얼마 안 됐습니다.”

“어디서 만났는데?”

은협은 차분한 눈동자로 입가만 올려 마치 밀랍인형처럼 웃었다. 달갑지 않은 웃음이었다. 반면 여자는 쑥스러웠는지 연신 미소로 때웠다. 가벼운 웃음이 오고가자 형식적인 질의응답보다는 도너의 상태가 중했던 팀장이 선담을 어깨에 부축해 세웠다. 은협이 그것을 도왔다.

“……저번에 말했던 우리 팀…… 도너.”

“알아, 소개 받았어. 선담 씨, 건강하길 바랄게요.”

선담은 대답하지 않았다. 충분히 대답할 수 있으면서도 피했다. 그녀는 조금 당황해했지만 애를 밴 사람이 아프니 그러려니 하는 눈치였다. 오히려 그녀는 여유롭게 은협을 등을 두드려주며 저는 방을 정리하고 갈 테니 먼저들 출발하라고 했다. 팀장도 빨리 움직이자고 했고 은협도 군말 없이 따랐다. 아마도 지금 그에겐 입을 여는 것보다 머릿속을 재빨리 굴리는 게 유리할 터였다. 거의 업혀가다시피 이동하며 선담은 닫히는 1104호를 바라보았다. 

잔잔하게 빠져나오던 그의 체취가 공기 중에 사라져갔다.

이윽고 무거운 소리와 함께 현관이 닫혔다. 왜인지 마지막이 될 거란 예감이 들었다. 다시는 그 방으로 돌아가지 못할 거란 예감. 둘만의 소박한 공간엔 세련되고 아름다운 그녀의 향이 조금씩 배어들 것이란 예감. 적어도 두 가지 예감 중 하나는 맞을 것이라는 막연하고도 비장한 각오가 그림자처럼 뒤따라오고 있었다.

-

앞에 앉은 두 남자는 뒷좌석에 처박혀 자꾸 몸을 뒤채는 도너 때문에 울상이었다. 전 팀장은 선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싶어 엑셀을 진득이 밟았고 은협은 다른 문제 때문에 입을 다물었다. 선담은 백미러로 보이지 않을 사각에 숨어 눈물을 참았다.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믿겠다는 일념하나로 버텼는데 너무도 간단하게 산산이 부서져버렸다.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았다. 선담은 극심한 불안으로 놀란 가슴을 움켜쥐었다.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았다ㅡ….

집으로 가는 길은 멀지 않았다. 주차를 마친 전상목은 그 와중에도 잠시 은협에게만 시간을 빌렸다. 두 남자는 멀찍한 곳에 서서 무어라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짧은 이야기를 마친 팀장은 선담에게 쓴웃음을 보내더니 무거운 발걸음으로 차에 올랐다. 도로를 주행한 길보다 집으로 올라가는 길이 외려 더 멀게 느껴졌다. 선담은 은협이 부축이라도 해줄라치면 젖어들기 시작한 눈가를 문지르며 그에게서 떨어지려 했다.

삐리릭ㅡ 

경쾌한 전자음과 함께 현관문이 닫혔다. 이제는 공간에 둘뿐이었다. 평소엔 크지도 않은 문소리가 왜 그리 크게 들리는지. 차키를 내려놓고 지갑을 꺼내는 등의 미세한 소리 하나하나에도 선담은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 뒤죽박죽이었다. 그는 물 먹은 진흙더미처럼 무거운 다리를 이끌고 침대에 쓰러졌다. 따라 들어온 은협은 침대 모퉁이에 앉았다.

“선담아.”

“……….”

“홍선담.”

“……….”

“숨겨서 미안하지만 화내지 마라. 그런 거 아니니까.”

들을 가치도 없었다. 선담은 부른 배를 감싸고 기어서 최대한 은협에게서 멀어졌다. 주변이 조용해 훌쩍, 하고 눈물을 참는 선담의 가느다란 호흡이 가까이처럼 들렸다. 참다못한 은협이 침대위로 올라와 그의 어깨를 잡았다.

“선담아, 연지애는 EEC 후원위원장 딸이다. 길 소장하고도 인연 있는 사람인데다 또래라 친하게 지내는 것뿐이고.”

PTA사의 자금이 불안정해 국내에서 후원회를 만든다는 게 저거였나. 국가정부 출신의 기관이어도 결국은 비용감당을 위해 사기업에 지원을 받는다는 말을 얼핏 들은 적이 있었다. 선담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은협은 조용히 반응을 기다렸다. 부드럽게 말을 건네면 부드럽게 받아치던 게 홍선담이었다. 그러나 이내 홱 돌아보는 눈에는 불꽃이 가득했다.

‘우리오빠 소속이잖아요. 실험군인가봐요? 배가 듣던 대로 정말 많이 불렀네요.’

‘은협이가 연구실 얘길 해요?’

‘저한텐 해도 되요. 근데 정말 신기하네요. 말만 들었지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라 그런가?’

‘신기하네요.’

‘신기하네요.’

‘신기하네요.’

뱃속이 뜨거워 딱 미칠 것만 같았다. 선담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우짖었다.

“거짓말 하지, 마! 당신은 거짓말 하는 게 다 보여! 개새끼야!”

“홍선담!”

“치워! 몸에, 내 몸에 손 대지마…!”

“진정해라!”

“시끄러워! 당신 머릿속엔, 나보다도 내 뱃속 걱정밖에 없겠지만, 그것도 이번으로 끝이야! 소장님께 출산하면 실험 포기하겠다고 할 테니까……!” 

멋도 모르면서 뱉는 말이다. 계약서가 불타 사라지지 않는 이상 선담에겐 도너로써 팀에 기여할 역할이 정해져 있었다. 뱃속의 생명을 되돌릴 수 없는 걸 알면서도, 그리고 사실은 무엇보다도 소중하면서도 선담은 벼랑 끝에 내몰려 고함쳤다.

“그 예쁜 사람 때문에, 내가 그렇게 불안해하고 아파하는 걸 다 알면서, 다 알면서도 당신…… 당신은……!”

“선담아!”

“놔!”

쫙!

은협의 고개가 확 돌아갔다. 짠물이 줄줄 흐르는 눈을 부릅뜬 선담은 저가 은협의 뺨을 갈겼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런 몸이 됐는데! 내가 누구 때문에 여자처럼 배를 부풀리고 있는 지 알기는 해……!!”

“……….”

“왜 기어코 나한테 이런 말까지 하게 만들어! 네가 그렇게 부탁만 안했어도, 나는ㅡ…! 이 개새끼야!”

마지막 말을 잇지 못하고 선담은 크게 울었다. 흑, 흑, 하고 고개를 처박고 우는 모양새가 세상 모든 것을 잃은 어린아이와 하등 다른 게 없었다. 뱃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 같아 좁아터진 자궁 안에서 아플 새끼에게 정말 미안했지만 심연 같은 배신감과 고독함 때문에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은협은 시트에 얼굴을 처박고 우는 선담을 끌어안았다. 이성을 잃고 자빠져버린 선담과는 반대로 그는 굉장히 침착했다. 어쩌면 여기까지 다 예상했었다는 듯이. 그는 모든 걸 체념한 얼굴로 선담의 목덜미에 대고 속삭였다.

“홍선담. 내가 몇 번이나 말했지. 자궁이 들어선 네 몸은 이제 너만의 몸이 아니라고. 나와의 문제는 이 실험에 아무 상관없는 거니까, 태아를 이런 일에 일일이 들먹이는 건 안 돼. 내 인내심 시험하지 마라.”

“…흐, 그게… 무슨… 무슨 뜻이야…….”

선담이 고개를 들자 은협은 숨을 가다듬고 잠시 침묵했다. 심연 같은 침묵.

“홍선담, 너를 많이……”

은협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끝내 말을 마치지 못하고 다른 말을 이었다.

“넌 연인이기 이전에 내 삶의 많은 부분을 함께 한 동반자고. 네게 향한 마음은 절대로,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난 언제나 네가 먼저였어.”

“선……”

“하지만 그것도 우리가 고아원에서 함께 자랄 때까지의 이야기고, 앞으로의 이야기는 아니란 소리다. 네가 최우선인건 변하지 않지만 언제까지고 우리가 연인으로 있을 순 없어.”

“서, 선배는, 나한테…… 평생 함께 지낼……”

“그래. 평생 같이 있을 거다. 말했잖아, 쭉 함께 있을 거라고. 하지만 연인으로선 아니지. 넌 이제 우리 팀에 없어선 안 될 실험군이고 나도 이젠 남자와 살수만은 없게 됐어. 이게 무슨 말인지 알겠어?”

거짓말.

“너도 내가 몸으로 때우지 않고 머리로 먹고 살겠다고 했을 때 찬성했잖아. 그래서 내가 의대에 들어갔을 때에도 EEC에 들어갔을 때에도 같이 기뻐했잖아. 그래서 난 네가 조금이라도 더 나를 도와주려고 도너를 지원한 거라고 생각했어.”

“뭐ㅡ…?”

“옛날과 완전히 같을 순 없어도 나는 늘 네 옆에 있을 거다. 아이도 생길 테고 너도 길 소장님과 전 팀장님 그리고 우리 연구원들과 함께 살 텐데 뭐가 불만인거야.”

“그만……. 이러지 마…… 은협……”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아 헐떡이며 그를 바라보자 은협의 눈동자에 새파란 냉기가 돌았다.

“난 분명하게 말했어. 연인은 아니어도 네가 외롭다면 늘 안아줄 거라고.”

“……ㅡ!”

“하지만 어렸을 때처럼 들개같이 뛰놀거나 구르거나 할 순 없어. 앞으로 실험이 끝나도 아이는 자랄 거고 실험결과가 정리될 때까진 넌 도너로 남아있어야 하는데다 난 연구팀에 소속되어있을 텐데, 우리가 다시 연애를 시작한다면 들키지 않고 얼마나 버티겠어. 다 들통 나서 지탄 받아도 좋아? 그건 너도 싫겠지. 무슨 말인지 알겠어? 봐라. 너와 나 둘 다를 위한 일이잖아.”

이 지옥이 제발 거짓이길ㅡ…. 

폭포수같이 떨어지는 눈물을 훔치는 데만도 기력을 소진했다. 은협은 서럽게 떨어트리는 선담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온몸을 벌벌 떨면서 우는 모양이 마치 처음 보육원에 들어왔던 선담의 여섯살 시절처럼 보였다. 

사랑은 하지만 연인은 안 되고, 연인도 아닌데 몸은 섞는 관계. 최상의 길을 걷기 위해 부정한 버릇은 갈아치우고 아름다운 여자를 곁에 두겠다는 말. 그래도 옛사람인 자신을 사랑한단다. 더 이상은 연인도 뭣도 아닌 그냥, 그냥 옛날에 같이 살던 사람으로, 혹은 우수한 도너로……. 최은협의 말은 거기서 끝이었다. 

무서웠다. 

무서워서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선담은 은협의 셔츠 한쪽을 꽈악 잡았다.

“미래가 어떻게 되든 나는 몰라……. 그런 거 알았으면 아이 같은 거 가지지도 않았겠지. 난 선배가 이렇게 변할 줄 알았으면 이런 실험에 참여하지도 않았어. 선배가 나 죽을 때까지 함께 하겠다는 말이 이런 뜻인 줄 알았다면 절대 참여하지 않았을 거라고……. 난 고아원으로 끌려온 이후부터는 쭉 선배뿐이었어. 선배가 공부하고 싶다고 해서 시간당 천원도 안 되는 그런 곳에서부터 알바를 뛰었고, 밤새 성장통과 근육통에 미칠 것 같으면서도 선배가 하자는 대로 했어. 선배가 나 처음 안았을 때 정말 아팠어. 그리고 실험하는 동안은 그보다 더 아팠어! 그래도 정말 사랑하고 사랑받는다고 믿어서 그럴 수 있었다고……! 이런 사정 다 알면서 어떻게 이래……!”

선담은 말을 마치자마자 다시 엎드려 꺼이꺼이 울고 말았다. 눈물이 쉬지 않고 떨어져 눈가가 짓물렀다. 손바닥으로 닦는 게 아플 정도로 눅눅했다. 은협이 선담의 어깨를 감싸자 선담은 목을 놓으며 격하게 내뱉었다. 

“그러니까, 그런 말 하지 마! 제발… 제발ㅡ!”

“홍선담…….”

“날 이렇게 두지 마……. 이미 뱃속에선 매일같이 아이가 느껴지고 하루하루가 불안한데 이제 와서 실험관계니까 좋아하는 건 안 된다고 하면 나보고 어떡하라고……. 난 선배 아니면 아무도 못 좋아해. 그건, 제일 잘 알고 있잖아……!”

“그만 울어라. 나도 네가 소중하다고 했다. 연지애는 여러모로 불가결한 존재니까 더 이상 떼쓰지 말고. 자꾸 울면 아기집 흔들린다.”

“내가 도너라서, 그래서 선배가 이러는 거면 나 도너 안할게. 그냥 나 아무 불평 안할게. 알바해도 괜찮아. 학교 다녀도 괜찮고. 나, 나는ㅡ…”

“그건 안 돼. 이제 와서 도너를 다시 찾는 건 그냥, 말 그대로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어떻게 해야 이 사람 마음을 돌려놓을 수 있을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어디를 고쳐야 하는 걸까. 찰나동안 오로지 그 생각만 했다. 선담의 가슴이 격정적으로 동요하자 아까부터 뱃속의 아이가 괴로운지 어미의 배를 쾅쾅 찼다. 그 끔찍스런 기분이 선담으로 하여금 더더욱 갈 곳이 없게, 그래서 더 처절하게 만들었다.

“그럼 그 사람 만나지 마. 안 만나면 안 돼……? 그럼 나도 실험군 계속 할 테니까…… 여기까지 와서 외관이니 불가결이니 그런 소리는……”

말하면서도 스스로 모순을 느꼈다. 지금 이게 실험을 자원하고 말고의 문제인가? 아니다. 문제는 최은협의 가슴에서 이미 정해버린 방향이란 것에 있었다. 선담이 도너를 하든안하든 최은협이 그리 느끼고 그리 마음먹은 이상, 그를 완벽하게 설득하지 못하면 선택의 갈래는 없었다. 정말로 은협과 남남이 되는 것이다. 선담은 은협이 아닌,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었단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은협은 선담과 더 이상 행복한 연인으로 있을 수 없는 현실에 눈을 떠버렸을 뿐이고, 선담은 어차피 인질도 되지 못하는 뱃속의 태아를 가지고 되지도 않을 협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내내 거짓말로 협박했다. 

내 뱃속의 새끼가 어떻게 만들어졌대도 그래도 내 피를 먹은 내 새끼였다. 배를 가르는 시늉을 지어보일지언정 누군가 해하려고 하면 죽기 살기로 도망칠 것이다. 뱃속의 새끼야말로 선담에겐 불가결한 존재였다. 그렇기에 더욱더 가지 말라고, 껍질만 옆에 남겨두고 마음을 멀리 보내버리는 그런 짓은 하지 말라고, 그렇게 울며 매달리는 와중에 선담은 홀로 붕괴를 맛보았다. 이제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오로지 그를 잃으면 안 된다는 공포 하나로 눈앞이 깜깜해져 놀란 숨을 내쉬고 있었다. 

저를 필요로 한다는 아이가 이렇게 간절하게 흐느끼면 조금은 흔들릴 성도 싶은데, 그래도 최은협은 출중한 흙빛의 눈동자를 세우고 소리죽여 우는 선담을 기어이 바로 앉혔다.

“선담아. 넌 어차피 도너를…… 계속 할 수밖에 없어.”

“싫어, 절대 싫어……. 선배랑 이렇게 될 거면, 이런 도너 같은 거 안 할래ㅡ….”

“아니, 해야 돼. 그러니까, 말하자면…… 넌 다시 해야 돼.”

고개를 도리치며 아무 말도 듣지 않겠다는 듯 고집 부리던 선담은 은협의 어조에 깊은 위화감을 느꼈다. 당황하여 쳐든 눈에서 눈물이 또 한 방울 굴러 떨어졌다.

“무, 무슨, 무슨 소리야…?”

“……….”

“무슨 소리냐고!”

그가 던진 많은 수사 중에서도 유독 ‘다시’라는 말이 맘에 남는 것이었다. 다시 해야 한다는 말은 차라리 홍선담에게 죽으라고 등을 떠미는 것과 같았다. 그는 뿌연 눈을 부릅뜨고 타깃을 쫓는 맹견처럼 고함쳤다. 

“다시 하라니 뭘 다시 해!”

“………. 도너를. 넌 필요하다면 임상실험에 몇 번이고 참여해야 한다고. 이건 내가 시키는 게 아니라 계약한 거다. 내가 몇 번이나 읽어줬잖아.”

“선배는 나한테 그런 말 할 자격 없잖아! 이 아이만 낳으면 나 도너 같은 거 안 해! 도너를 해서 큰돈 받고 그러면 뭐해. 내가 가장 소중한 건… 아ㅡ…!”

극도로 흥분해서 쉬지 않고 뇌었더니 폐가 결려 선담이 몇 번 기침을 했다. 아까부터 아이가 배를 차댔는데 중간중간에 그 힘찬 고동이 느껴져 더더욱 끔찍스러웠다. 시트에 머리를 박고 기침하느라 정신이 없는 와중에 은협은 선담을 제 아래에 가두며 뉘였다. 그의 뜨거운 입술이 목덜미를 세게 물었다. 저도 모르게 선담은 비명을 질렀다. 발버둥을 쳤지만 언제고 쉬 이길 수 있는 힘이 아니었다. 

“선담아ㅡ….”

마른 숨이 흐트러지는 빠른 간격 속에서 최은협은 홍선담의 이마와 뺨, 목줄기를 훑었다. 두 사람의 더운 몸이 정말 사랑하는 연인처럼 엉켰다. 선담은 눈물범벅이 된 제 얼굴을 그에게서 떨어트리며 악을 썼다. 

내게 이런 식으로 이별을 고해놓고 저를 위해 도너로 있어달라는 염치없는 이기심도 미웠지만, 이미 변하고 있는 그를 어떻게 해서든 붙잡고 싶은 자신의 미련에도 화가 났다. 

한참을 은협과 씨름하던 선담은 결국에 그의 품안에 완전하게 갇히고 말았다. 태양같이 뜨거운 애증을 참지 못하고 최은협의 어깨를 이로 물어뜯던 그가 흐려진 눈으로 어깨너머의 천장을 바라보았다. 

“선배…… 가지 마ㅡ….”

처음 은협에게 속살을 내어주었던 날 밤에도 자신은 천장을 마주보았다. 저를 감싸 안은 넓은 어깨에 턱을 올려놓고 있는 건 그때와 똑같은데, 천장에는 다른 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1104호의 벽지에는 야광으로 빛나는 천사가 날아다녔다. 은협이 스티커를 보자 네 생각이 났다며 사왔던 야광 스티커가 저마다 다른 명암으로 반짝반짝 빛났었다. 가끔씩 은협과 밤새도록 비희하며 천장을 올려다보면 샛노란색의 수무한 별들 사이에서 천사가 선담과 눈을 맞추어주었다. 

그 천사가 그리웠다. 

아무리 임상실험이래도 최은협의 정자로 만들어진 아기는, 유일하게 자신이 아는 그 천사보다 더 예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다시는 일하기 싫다고 떼도 안 쓰고, 시간 없다는 핑계 안 부리고 공부도 열심히 할게. 선배 피곤하달 때 놀아달라고도 하지 않을게. 내가 계속 도너로 있는 게 선배한테 좋다면 죽을 때까지 도너 할게. 그러니까, 선배도 예전처럼 돌아와……. 가지 마…… 이렇게 된 날 두고 떠나지 마ㅡ….”

지금까지 무슨 소리를 했든 사실 선담의 진심은 이것이었고 은협도 그걸 알고 있었다. 사람 대하는 경험이 많은 것도 아니고 요령이 좋은 것도 아니며 유창하게 무언갈 배운 것도 아닌 선담이 이렇게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은 은협에게도 처음이었다. 

선담은 거절의 말이라도 날아 올까봐 겁이나 덜덜 떨리는 손모가지로 은협을 힘겹게 끌어안아 매달렸다. 은협도 그를 세게 안아주었다. 은협의 낮고 거친 음성이 흘러흘러 들어왔다.

“선담아. 난 네가 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들어줄 수 있다. 어린 널 지켜오고 돌보았던 건 네가…… 소중하기 때문이었어.”

“선배… 선배…”

“하지만 이번만큼은 아니라는 거다. 이젠 고집대로만 살 수 있는 나이는 지났어. 나보다 여덟살이나 어린 남자아이를 내 짝이라고 외치기엔 이곳은 너무 좁아. 실험군을 사랑한다고 외치기엔 나는 이 연구에 너무 많은 걸 걸었어. 그때는 나도 막연히 네가 도너로 있으면 떨어질 일도 없고 행복할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는 점점 귀중한 유산이 되어가고 나는 점점……”

은협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나 같은 놈은 다 그래.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실패하면 실패할수록, 바로 코앞에 와있을 열망에 목을 걸게 되는 거야.”

“싫어… 그러지 마…….”

“내 씨앗을 품은 넌 이제 내게도 도너다. 이 실험이 성공하는 날에, 네 뱃속의 핏덩이가 온전히 태어나는 날에는 나도 변하게 될지 모른다. 하지만 그 전에 나는 ‘이 세계’를 살아야하는 남자고. 모든 게 다 갖춰진 시점에서 젊은 날의 혈기로 이것들을 망칠 순 없어. 무엇보다 내가 여기서 너 때문에 무너지면…… 여기까지 달려온 모든 게 끝이다.”

두근ㅡ 심장이 옥죄였다.

은협은 선담의 축축한 뺨을 감싸고 자신과 마주보게 했다.

“참고 참았던 말이 있는데 이제와선 의미도 없으니 그냥 말할게.”

“선배ㅡ….”

“네 몸에 내 정자가 일치해서 나도 기뻤다. 정말 행복했고. 역시 네가 내 운명이라고 느껴지면서 뱃속의 씨앗도 그저 내 새끼로만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것에만 의미를 두기엔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계는, 이 좁은 세계는 너무도 광활하게 냉혹하더라. 조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고 조금의 오점도 지워지지 않는 그런 곳이야. 그러니까…… 선담아, 갑작스럽겠지만 조만간 재수정을 갖게 될 것 같다.”

선담은 채 마르지도 않은 눈을 크게 떴다.

“수정을 다시 한다고? 왜… 왜…?”

“……….”

“싫…어. 왜, 왜 다시 해…? 어떤 고생을 해서 만든 애긴데… 설마 선배 애기라서, 그래서 지우고 다시 만들게 하려는 거야……?”

“그런 거 아니야. 말했잖아. 지금까지 숨겼지만 나도 네가 내 아이를 가져서 좋았다고. 지금도 다르지 않다고.”

“그럼 왜……!”

더는 놀랄 일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까마득해졌다. 뱃속에서 들끓어대는 포궁을 만들기 위한 움직임은 혼자 감당하기 여간한 게 아니었다. 든든하게 손을 잡아주는 그가 없었더라면 혀를 물고 죽어버린 지 오래일 것이었다. 더욱이 반년 간 세상에서 가장 가깝게 지내던 것이 피부 바로 아래서 지금도 숨을 쉬고 있는데 어디에 다시 수정란을 앉힌단 말인가ㅡ…! 

이제는 눈물을 참고자시고 할 것도 없어 선담은 젖먹이처럼 울었다.

“아, 안 돼… 선배, 선배 애라서 그런 거라면,”

“그런 거 아니라고 했잖아. 홍선담, 여기 좀 봐.”

“그 지옥 같은 걸 다시 하면, 이번엔 정말 죽을지도 모르는데 왜 다시 해야 돼…? 너무너무 아픈데… 다신 하기 싫어, 하기 싫어… 싫어, 선배…… 그러지 마ㅡ….”

그러나 다음 순간 정수리를 내려친 말은 유약해진 선담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눈앞이 까매지고 선담은 까무룩 의식을 잃었다. 너머의 의식 속에선 심장과 마찬가지로 고동치는 아이의 태동만 느껴졌다. 그는 깊은 잠에 빠져들 듯 젖은 눈가를 접었다. 

집으로 돌아온 뒤 은협에게서 많은 충격을 받았지만 종래엔 단 한마디만 기억에 남았다. 아이처럼 울고불고 흐느끼는 선담을 잠들게 만든 한 마디. 최은협의 낮은 음성이 귓가에 흔들흔들 오래도록 떠돌았다.

태아는 없어져야 돼, 홍선담. 

지금 네 뱃속에서 네 양분을 모조리 훔쳐 먹고 있는 건, 기형이다.

기형이다ㅡ….

-

[유감입니다. 허나 저희 PTA사에선 조용히 처리하고 싶군요. 도너와 연구진에겐 불행한 소식이지만 불완전체가 태어나 사회적 이슈에 오르고 인권문제에 논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습니다. 조속히 처리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지금도 많이 늦었으니 하루라도 빨리 말입니다. 활성화된 인공자궁은 당신들에게 주었던 것이 유일한 하나였습니다. 이 점을 명심해주십시오.]

“알고 있습니다. 허나 인공유산은 수정란 착상과정과 마찬가지로 매우 까다로운 문제입니다.”

[저희도 알기 때문에 그에 합당한 기한을 드린다는 겁니다. 어렵게 찾은 도너에겐 절대 자극이 없이 진행해주시고, 한번 자궁을 받은 모체에 같은 방식의 실험을 진행해주십시오. 두 번째도 성공한다면 태아의 상태를 떠나 저흰 인공자궁과 인공수란관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수정 중 오류인지 착상 중 오류인지, 염색체오류에 대한 사항도 빠른 기간 내 밝히겠습니다.”

[PTA는 많은 자본을 수많은 연구팀에게 배포하고 있지만 자선사업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시간이 지체되면 지체될수록 연구자금이 한정된다는 사실을 염려해주십시오. 자본의 흐름은 깊은 산속의 개울가이기보다는 바다같이 넓고 자유로운 것이어야 합니다. 한곳에만 집중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지요. 모쪼록 시간을 끌어 위기를 초래하진 말아주십시오.]

수화기를 내려놓은 길호문은 안경을 벗고 미간에 깊게 패인 주름을 문질렀다. 각국의 언어를 전달해주는 인터프리터의 기계 같은 음성은 늘 그를 피곤하게 만들었다. 이번 통화 주제도 중도오류에 대한 것이다 보니 피곤함은 더했다. 

PTA사의 관계자들은 아시아에서 제대로 된 도너를 구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뒤늦게나마 숙지했고, 때문에 홍선담이란 젊은 도너에게 관심이 지대했다. 그들은 4년 만에 정말로 착상을 성공시킨 EEC 연구진과 도너에 대한 맹목적인 기대가 있었다. 때문인지 그들은 기형으로 판명된 태아보다는 ‘이미 수정이 한번 성공했던’ 도너에게 안전을 기해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어차피 뱃속에서 죽거나 8개월도 채우지 못하고 나올 운명이라니 도너에게 해를 입히지 않으려면 자궁 안을 먼저 비워두고 그 후에 태아를 분해시켜 꺼내는 편이 나았다. 다른 선택권을 찾을 수 없었다. 만약 출산을 성공한다 해도 염색체변이 때문에 어떤 해괴망측한 결과물이 나올지 예상도 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시간도 없고 여유도 없고 가치도 없었다. 그러니 주사로 어서 유산을 시키고 진행하는 게 여러모로 속이 편할 거라 판단됐다. 약물투여 후 절개는 피할 수 없는 일이 되었고, 길호문은 그저 출산일만 기다리고 있을 그 아이에게 은협이 정황을 잘 전달했기를 바랐다.

- - - -

“이게 웬 날벼락이야. 산과 경력 10년차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 본다.”

“뭐 주워들은 건 없어? 제약회사나 해외국공립 연구팀에서 임상실험 한다거나.”

“전혀 모르겠다. 만약 정식 실험군이라 해도 이런 건 우리나라에서만 순수하게 진행 할 수 없는 분야야. 아무래도 해외에서 수주 받은 실험체일 것 같은데 내가 그 많은 기관을 꿰뚫고 있는 것도 아니니……. 이런 건 처음 본다.”

“갈수록 막막하군.”

더 이상 뽑아낼 게 없는 서인표를 옆에 두고 연백진은 몇 분째 답보 중이었다. 명확한 해석을 기대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실전경력 10년차 대선배니까 혹시나 하고 불렀는데 서인표는 자꾸 저가 마흔 평생 처음 보는 신기한 광경이라고만 피력했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대도 소문까지 밝은 것은 아니니까.”하고 정석재는 낙담하여 홀로 중얼거렸다. 결국 40분 내내 백진과 석재가 알아낸 것은, 선담이 남자이고 임신이 맞으며 착상은 자연수정이 아닌 인공수정이었을 거라는, 짐작해보면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거기서 거기까지의 그런 이야기였다. 아무래도 시간이 좀 더 필요할 듯싶었다.

“보조장비라도 있으면 태아의 상태라도 알 수 있을 텐데. 사실 짚이는 게 있는데 정확하진 않으니 자세한 검사는 병원으로 옮겨봐야겠어.”

석재의 얼굴이 걱정으로 심하게 일그러졌다. 사념 없이 앉아있던 백진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럼 형 병원으로 옮기자.”

“아무래도 그래야겠어. 병원열쇠 가져오길 잘했군.”

“야, 혹시 모르니까 꼬마한테 필요한 생필품 좀 챙겨줘. 얘는 내가 업어야겠다.”

“그래. 잠시만…….”

이불을 걷고 선담을 조심스럽게 안아드는 백진을 보다 기어코 석재는 안절부절 못해하며 업는 걸 거들었다. 허나 선담의 배가 많이 불러 제대로 업는 게 불가능했다. 하는 수 없이 백진이 무릎과 어깨에 두 팔을 끼어 선담을 품듯이 들어 안았다. 힘은 들었지만 이편이 환자를 위해 나았다.

“시동 걸어놓을 테니까 내려와.”

인표가 먼저 사라지고 석재는 묵묵히 새 칫솔과 옷가지를 챙겼다. 입원을 할 수 있을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없어서 나중에 쩔쩔매느니 챙겨두는 게 나았다. 남자이니만큼 여자처럼 자질구레한 것까지 챙기지 않아도 되는데 석재의 손길은 세심했다. 선담을 안은 채로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백진이 허허 웃었다.

“이 코딱지만 한 게 그렇게 중하냐?”

“……. 말했잖아. 내 일생에 첫 번째 친구라고.”

“어떻게 만났는데.”

“그런 거 일일이 돌아보기 힘들어. 벌써 언제 적 일인데.”

“가는 길 멀다. 시간 많아.”

그리고, 실제로 그랬다. 석재가 안달복달한다고 선담이 덜 아픈 것은 아니었다. 덩달아 수고하는 백진의 마음이라도 편하게 해주기 위해서ㅡ그리고 자신을 위해서라도ㅡ짐을 챙기고 차에 올라 출발하는 내내 정석재는 과거를 회상했다.

“대학에 들어간 지 한참 됐는데도 너는 물론이고 학부에 아는 사람 한명도 없을 때였어. 그러니까 그게 본과 3학년 말이었지. 웬 어린애 하나가 교수전용 주차장에서 유니폼을 입고 입김을 풀풀 뿜으면서 주차안내 보조를 하고 있는 거야. 그때 한참 황 교수님 보조로 있을 때라 몇 번 마주쳤는데 척 봐도 10대 초·중반이었거든. 신기하고 만만하기도해서 하루는 너 몇 살이냐고 물었더니 열네살이래. 어떻게 저런 어린애가 대학교에서 일하게 됐나 교수님한테 물었더니 MIU대는 국가에서 고아들에게 일자리를 주기적으로 소개해준다고 하더라고. 대부분이 단순노동 잡일이지만.”

“……이놈 고아냐.”

“여섯 살 때부터 부모 없이 자랐대. 지금은 다 컸어도 그땐 위험해 보일만큼 어리고 송글송글하니 예뻤는데, 보육원에서 자란 것 같지 않게 애가 순했어. 그게 다 지금 생각해봐도 대단한 녀석이 하나 붙어있어서였던 거 같아. 선담이하고는 다르게 눈에 독기가 차가지고 무서운 놈이었지. 어디서든 한 가닥 할 놈이었어. 그 놈도 우리 의대였고. 지금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주차장 안내 요원하던 시절에 만났다면 나도 몇 번 봤겠는데. 너 3학년일 때가 나 2학년일 때니.”

“네가 주변 사람 신경이나 쓰는 놈이냐? 교수주차장에 몰래 차 대느라 바빴겠지. 어쨌든 추운데 고생하는 게 보기 안쓰러워서 햄버거 몇 번 사주고 그랬더니 금방 친해지더라고. 10살 차에 친구란 개념이 좀 우스워도 그래도 좋더라.”

“너 같은 숙맥이 먼저 말을 건넸다니, 그게 더 신기하다.”

석재는 그 말에 웃으며 선담의 젖은 머리칼 한올 한올 넘겨주었다. 두 남자가 심적 안정을 찾기 위해 그럴듯한 핑계를 대며 과거를 짚는 동안에도 선담은 사경을 헤매듯 까무룩 쓰러져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초조함과 급박함이 긴장과 조화돼 길기만 한 주행길이었다. 아름다운 서울의 야경을 냉정하게 뒤로하며 인표는 빠르게 차를 몰았다. 

-

시간은 꽤 길었다. 일할 때만큼은 말이 없어지는 세 사람이라 서인표의 병원은 폐허처럼 고요했다. 아무리 같은 의대 출신이라도 분야가 달랐던 두 남자는 마음만 앞서 있다가 결국 인표에게 몰표를 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인표는 이상하리만치 아무 낌새도 보이지 않았고, 선담을 이리저리 주무르다가 급기야 막바지에 가선 백진과 석재를 쫓아내버렸다. 그리고 잠시 후, 놀란 얼굴의 안사람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수간호사인 그녀가 들어가자 수술실 문밖이 점화했다. 석재가 절망스런 얼굴을 했다.

…ㅡ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푸르스름한 새벽녘을 가르며 노란 햇살이 들어올 즈음. 새벽에 비공식적으로 내방한 그들은 당직을 맡은 간호사들과 마주쳤다. 응급환자가 있다는 얘길 듣지 못한 간호사들은 당황했다. 그러나 곧 서인표가 등장했다. 인표는 파리해진 얼굴로 대충 웃어버렸다.

“지인 사정으로 수술실 개방했어요.”

“어머나, 선생님. 저희를 부르지 않으시고…. 저희 당직이라 입원실에 있었는데요.”

“간단한 거라 임 간호사랑 집도해서 방금 마쳤고요.”

“그럼 환자복 마련해 놓을까요?”

“아, 그건 됐고. 바로 퇴원할 환자니까. 자, 여긴 신경 끄고 어서 오픈들 합시다.”

그러더니 인표는 진찰을 대기시키고 수술실로 들어갔다. 다시 수십 분이 흘렀다. 수술실 앞에서 하염없이 결과를 기다리던 석재는 물론, 초조해하는 그 옆에서 밤새 시달린 백진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좀처럼 소식이 없는 일출 내내 두 사람은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달래보았지만 속 빈 위로였다. 정오를 넘기자 마침내 형수 되는 여자가 나왔다. 그녀는 인사도 없이 재빠르게 복도로 향했다. 그녀의 손에는 제법 큰 검은 봉지가 들려있었는데 겁날 정도로 새까만 그것은 무언가를 담고 있었다. 심사가 복잡하게 뒤엉켰으나 때마침 인표가 핼쑥해진 낯짝으로 문틈에서 손짓을 했다. 그들은 간호사 눈을 피해 수술실로 들어갔다.

홍선담은 수술대 위에 누워있었다. 주변에선 역시나 수술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석재가 암담한 표정으로 핏물 흥건한 삼각대를 바라보았다.

“인표 형, 이 피는…”

사태 씹듯이 물으며 백진이 말끝을 흐리자 인표도 난감한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떼어냈다.”

일순 백진과 석재의 안색이 잿빛이 됐다. 사정이 어찌되었든 뱃속의 생명이 죽었다는 소식은 비보였다. 가라앉는 분위기 속에서 꿋꿋하게 도구를 하나하나 정리하던 인표는 오래 참지 못했다. 그는 더 놀라운 사실이 뱃속의 아이가 죽은 지 불과 12시간도 안된 점이라고 털어놓았다. 더욱 끔찍해 석재가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에 인표도 낙망하여 고개를 들지 못하는 사이, 백진이 눈치 없이 “애가 갑자기 왜 죽어.”하고 물었다. 그러자 인표가 기다렸다는 듯이 수술실을 꽉꽉 메우며 고함 쳤다.

“야! 수란관 딸린 인공자궁을, 창자를 다 누르고 남자 몸에 넣어서 수정시켰더라! 어떤 연구팀인지 실력은 좋다만은! 원래 있지도 않을 걸 만들어놓은 짓거리가 제대로 성사될 거라고 생각했냐! 애는 당연히 죽을 애였어! 이미 죽어있었고!”

괜한 곳에 화풀이였다. 허나 태아 하나 제거하는데 6시간 넘게 간호사 하나 두고 갇혀있었으니 저쪽 기분도 이해되었다.

“인표 형. 형이 지금 애를 죽였다고 생각하는, 설마 그런 건 아니지?”

“기형아래도 생명은 생명이다. 7개월이면 그건 사람으로 봐야 돼. 그런 핏덩이를 강제로 빼내었으니 지금 내 기분이 말이 아냐.”

“그 마음은 아는데 이미 죽어있었다며.”

“그래, 죽어있었어! ………. 그런데 그게 기형이라 죽인 거라 생각하니까 가슴이 아프다. 강제로, 강제로 죽었는데, 이 아이는 제 뱃속이 그런 줄도 모르고 도움을 요청했다고 생각하니까……”

서인표의 분간 없는 말도 지금은 너무도 확고하게 잘 알아들을 수 있었다. 두 남자는 그가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길 바라며 시선을 던졌다.

“자연수정은 아니야. 저건 확실한 임상실험체다. 주사로 정자를 주입한 것 같은데 누구나 그렇듯 태아가 잘못될 확률은 모두가 가지고 있어. 실험체이니 그 가능성이 좀 더 높았던 것뿐인데 어쩌다 그게 또 맞아들었나 보다.”

“그래서 그쪽에서 애를 죽였다고?”

“실험 도중 나온 실패작인데 누가 책임진다고 낳겠냐. 낳을 순 없지. 태어나면 인권문제에 휘말릴 테니까 뱃속에서 지워놔야만 그나마 할 말이 있어. 배아실험이나 난소실험은 많이들 그래. 근데 문제는, 이쪽은 정상적인 절차를 거친 게 아니라…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서인표가 침을 삼켰다.

“실험체를 폭행해서……”

석재가 신음했다. 네모나고 밝은 수술실에 서 있는 세 남자의 우주가 뱅뱅 돌았다. 순간 어지러운 것 같기도 하면서 아득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인표가 막막하게 이마를 감쌌다.

“확실하진 않지만 인공자궁은 실제 여성의 자궁과 비슷하게 만들어진 것 같다. 정확한 건 ‘강고(强固)’가 진짜와는 많이 다르다는 점이야. 인공자궁은 조금만 충격을 주어도 태아가 고통에 많이 노출 돼. 무슨 문제가 있어서 이렇게까지 강제로 유산시켰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주사는 맞는 당시엔 고통스러워도 시간이 지나면 내장 등은 손상 없이 잘 정돈되지. 하지만 이런 폭행은 차라리 내장이 더 다칠 확률이 높아. 폭행 자체부터가 몸에 안 좋지. 무엇보다……”

이런 나쁜 새끼들…하고 정석재가 잇새로 중얼거리다 아예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라는 듯 인표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직장에 이물질을 삽입하고 심하게 마찰한 흔적이 있다. 수란관 바로 아래의 장기가 꽤 다쳤어.”

“………!!”

결국 사면이 꽉 막힌 벽에 반사되어 석재의 과격한 욕설이 돌고 돌았다. 인표는 묵묵히 호스를 틀어 바닥을 닦아냈다. 백진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로 생각에 잠겼다.

“태아는 어차피 정상이 아닌데다 실험체가 정신적 안정을 잘 찾지 못해서인지 그 이전부터 자궁벽이 많이 얇아져 있었더라. 그런데 그 자궁의 말단과 가장 가까운 장기가 격침되니까 견딜 수 없었던 거지. 자궁이 많이 흔들렸어. 기형아를 배양한 연약한 자궁과 외부의 폭행이 모체에게 강제로 유산을 권한거지. 귀중한 실험군 같은데 사고를 당했다기보다는… 내부에서 갈등이 있었을 것 같아. 물론 내 추측이야.”

피곤한 듯 백진은 얼굴을 덮었다. 석재는 모퉁이에 기대서 있었고 인표도 이제는 더 이상 손쓸 방법이 없었기에 가장 중요한 사항만 전하기로 했다.

“그런데 말이야…… 자궁을 없애진 못했다.”

“뭐?”

“일부로 그런 게 아니야. 떼어내려고 했었어. 근데 이젠 모체에 너무 깊이 융화되어있어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었어. 솔직히 말해 자궁은 깨끗하게 만들어 놓았다지만 저 아이의 건강도 책임 못 져. 최선을 다했다만 내가 당해낼 수 있는 차원도 아니었고… 아마도 오랜 시간 회복해야 할 거야. 그리고 이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건… 자연임신의 가능성이다.”

이 이상으로 고요할 수 없을 것 같던 주변이 마지막 말에 싸하고 가라앉았다. 

자연임신.

“나, 나도 보고 놀랐어. 수란관 하부에 상처가 나서 그걸 붙이려다가 우연찮게 발견한 거야. 의도한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가장 가까운 직장과 수란관이 묶여있더라고. 그것도 어설프게 묶어놓은 게 아니라 확실하게 연결시켜서. 어떻게 손을 써보고 싶었지만 함부로 건드릴 수가 없이 정교해서…….”

“뭐라는 거야. 제대로 좀 말해봐.”

백진이 싸늘하게 내뱉자 인표가 낯을 붉히며 주먹을 그러쥐었다. 그조차도 차마 꺼내기 어려운 난제를 전하는 입장이었다.

“잘 들어. 그러니까 내 말은, 두 장기가 이어졌다고 봐야겠지. 때문에 통상 남성과의 교접으로 인해 이 아이의 직장에 정액이 차게 된다면ㅡ…”

석재의 눈가가 점점 벌어졌다. 그것은 백진도 마찬가지로, 두 남자가 눈을 크게 뜨고 믿기지 않는 얼굴을 들었다.

“10분의 1확률로 이 아이의 몸 안에선 자연수정이 가능할지 모른다.”

어디선가 검은 비닐이 바스락, 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 - - -

현사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가장 잘 알고 있는 건 온몸이 촉수처럼 예민해진 홍선담 자신이었다. 뱃가죽 아래의 생명체가 천사처럼 예쁘고 환한 아이가 아닌 염색체변이가 일어난 기형이라고 생각하자 더더욱 아이에게 죄스러웠다. 자신이 맘을 굳게 못 먹어서 아이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나 싶기도 했고, 하늘을 거스르는 짓이라 결국 천벌을 받는 건가 싶기도 해 두려웠다. 아니, 어쩌면 원망스럽다는 쪽이 더 맞을지도 모른다…….

약물을 주입시켜 아이를 천천히 죽이고 그 후에 절개를 하여 깨끗이 속을 비운다는 말에 선담은 그만 직접 꽃을 사들고 찾아온 길 소장 앞에서 지지리도 날뛰었다. 아이가 잘못되었다는 생각보다도 이 불쌍한 새끼가 뱃속의 핏물에서 혼자 죽임을 당할 걸 생각하니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누가 뭐래도 내 뱃속에 있는 내 새끼인데. 언제는 살려달라고 애원하게 만들지언정 뱃속에 태아를 집어넣으려고 죽을힘을 다하던 인간들이 이제 와서 기형이니까 지워버리자는 날벼락 같은 말을 했다. 선담은 애걸하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하면서 길호문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애썼다. 어쩌면 저를 떠나려는 최은협에게 그랬던 것보다 더 애달팠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길 소장은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태아보다는 선담의 안부만 관심에 두었다. 노인네의 눈동자는 최은협처럼이나 확고했다. 그에겐 뱃속의 기형아 따위는 포기하자는 각오가 단단히 박혀있었다.

이제는 선담이 식음을 전폐해도 모두가 태아를 걱정하기 보다는 도너 자체를 걱정했다. 옛날엔 1대 1로 동등하게 나뉘어 관심 받았던 아기가 투명인간처럼 사라져버렸다. 아직 뱃속에서 콩콩 뛰노는 게 모두 느껴지는 선담에게는 지독한 무관심이었다. 

조만간 연구실에 마련한 방으로 시술을 위한 이동이 있을 거라고 통보받았다. 소독약 냄새가 깔린 그곳으로 다시 들어가 하루에 수십 번씩 주사를 맞는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멋도 모르고 따라왔던 지난 시간 동안은 아무것도 모르는데다가 은협도 함께 있었기 때문에 버틸 힘이 있었지만 지금은 완전히 달랐다. 차라리 접시물에 코라도 박고 죽는 게 나을 거란 생각만 오롯했다. 그런데 어미란 게 무엇인지, 아기 때문에 그것도 싫었다.

선담은 틈만 나면 길호문에게 전화를 했다. 기형아라도 그건 생목숨이고 아직 죽지도 않았는데 세상구경만 기다리며 뱃속에서 6개월을 꿈꾸던 아기를 강제로 죽일 수는 없다고 몇 번이나 애걸했다. 지능이 개만도 못한 아기가 나온다고 해도, 설령 다리가 한짝밖에 없어도, 은협의 몸과 선담의 몸이 하나가 된 아이였다. 아니, 그런 건 다 집어치우더라도 내가 가장 가까이에서 느끼던 생명이었다. 며칠째 소식이 없는 은협에게 분노를 느낄지언정 제발 나타나주길 바라며 선담은 몇날 며칠을 울기만 했다. 그러나 선담이 이 난리를 쳐도 모체가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EEC의 결정엔 흔들림이 없었다. 연구원들은 기왕이면 도너의 몸에 해로울 약물 없이ㅡ혹은 귀찮은 절차 없이ㅡ태아가 하루빨리 자연사하기를 바랐다. 그게 싫다면 어서 빨리 약물투여에 동의하라는 무언의 압박이 가해졌다. 그 강제적인 기운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선담은 홀로 아이를 안고 구석으로 숨어들었다.

[청취하지 않은 메시지가 하나 있습니다.]

삐ㅡ

[선배. 어디야……? 있잖아, 소장님께서 주사로 아이 지우고 다시 실험하자시는데 나 말야, 선배는 웃을지도 모르지만 정말…… 무서워. 자꾸 짜증만 내서 미안해……. 나 미워서 안 오는 거면, 다신 안 그럴게. 그 여자 만나도 좋고 만날 놀러 다녀도 좋으니까, 아이만 지우지 않게 해줘. 기형아도 그래도 애긴데, 세상에 나오려고 자꾸 움직이는데 너무 불쌍하잖아……. 선배 아이라서 싫은 거면 내가 평생 비밀로 하고 살게. 아무한테도 말 안할게. 애기가 물어봐도 절대 말 안할게. 그러니까……. 선배, 보고 싶다. 있잖아, 나…… 정말로, 너무 무서워…….]

최은협은 폴더를 닫았다. 애잔하게 흐느끼던 음성이 단 한번의 움직임으로 싹 닫혀버렸다. 

부재중 전화가 서른 통이나 찍혀있는 액정은, 은협이 자취를 감춘 뒤부터 선담이 홀로 큰 압박을 받으며 어쩌지도 저쩌지도 못했을 광경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듯했다. 은협은 쓴웃음을 지었다. 

선담은 잘 모르는 일이지만 이미 EEC에선 연구진을 상대로 정자채집이 다시 이루어지고 있었다. 공인된 기관에서 정자기증을 물색 중이었고, 연구실 내에서 이루어진 기증은 이미 재검사에 들어간 후였다. 자택에 있는 선담은 모르겠지만 이미 2차 수정을 위한 새로운 정자채집이 끝난 상황이었다. 물론 대기샘플엔 최은협의 것도 있었다. 이렇듯 유산날짜만 기다리는 실정이라 태아를 관찰하던 업무도 축소되었고 원래 있는 인원의 1/3이 다시 샘플작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최은협은 다른 이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샘플작업팀으로 합류했다. 저가 자꾸 얼굴을 내비치면 되돌릴 수도 없는 일가지고 애걸복걸할 홍선담을 보게 될 텐데, 희망고문도 아니고 그런 건 솔직히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애 아빠 될 뻔 한 게 아쉽네?”

누군가 힘내자는 듯 농담을 건네며 은협의 어깨를 두드렸다. 

자신의 씨앗이 잉태되는 일은 남자라면 누구나 벅찰 것이다. 이 실험을 애중해 마지않는 최은협도 다르지 않았다. 세계최초 인공배아의 아버지가 될 수 있는 자리를 누가 마다하겠는가. 홍선담에게는 비밀로 부쳤지만 실험이 끝나면 각국의 재벌들이 실험 탄생아를 입양할 수 있겠냐고 발 벗고 나설 것이었다. 물론 내어줄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그 정도로 귀중한 핏줄이었다. 그런 중한 게 기형이라니. 어찌되었든 유산결정엔 변함이 없을진대 녀석이 자꾸 울어대면 속만 쓰렸다.

새해의 불꽃이 터진 새벽, 선담의 몸이 자신의 추출물과 반응이 일치했을 때 그도 기뻐했었다. 성공에 대한 희열도 있었지만 세상에서 두 사람이 가장 특별한 연인이 된 것 같은 감격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나 그 결과물이 실패한 이상 그것도 옛일이다. 한국으로 돌아오고 PTA사의 자금줄이 불안정하자 현실이란 이름은 해일같이 밀려들어와 최은협의 내장을 휩쓸고 지나갔다. 

“은협씨. 소장님이 부르시는데?”

상념에 잠겨 담배를 태우는 은협에게 소장의 비서로 있는 중년 여직원이 손짓했다. 이제와 새삼스럽게 왜 또 부르나 싶어 은협은 잘 떨어지지도 않은 발걸음을 무겁게 옮겼다.

“최은협입니다.”

“그래, 그래. 들어와라.”

볕이 잘 드는 소장실이 이날따라 어두웠다. 그만큼 길호문의 기분도 썩 좋지 않다는 신호였다. 문을 닫고 가까이 다가가자 소장은 편한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샘플만 만들기로 했다더구나.”

“네. 그 편이 낫습니다.”

“선담이에게 말은 잘 전한 거냐? 샘플팀이 바빠서 알고 있을는지는 모르겠다만, 지금 상황이 말이 아니다. 저러다 귀한 실험군 하나 잃지 싶다.”

틈틈이 들어오는 음성메시지 때문에 누구보다도 가까이에서 지금의 상황을 느끼고 있는 최은협이었다. 허나 그는 입을 다물었다. 길호문이 홍선담을 도너 이상으로 애지중지 한다는 사실은 EEC 일원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길호문에겐 모체가 앓는다는 소리가 청천벽력인 것이다. 머리를 싸매는 그를 보며 은협은 작게 읊조렸다.

“……. 그렇게 걱정이시라면 선담이가 원하는 대로 애를 낳는 건 어떻겠습니까.”

길호문은 힐끔 한번 쳐다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그러고 싶다. 그럴 수 있다면 그러고 싶어. 근데 그게 내 뜻대로 되는 일도 아니고. 무엇보다 우리는 일반기관이 아니지 않냐. 독자적인 기관이었으면 그냥 내버려뒀을지도 모른다. 실험체라 해도 생명은 생명이고 도너가 저렇게 원한다면 그럴 수 있지. 하지만 우린 그런 처지가 아니지 않느냐. 출자 받은 만큼의 몫은 할 수 있어야지, PTA도 후원진도 얼간이가 아니니 기형아출산 따위가 논의되면 곤란해. 사실 독자적인 기관이고 뭐고, 생명이고 뭐고도 다 소용없어. 우리는 그저 성공해야 한다, 반드시. 그러니 도너의 바람이란 것도 별 소용없다.”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네가 가서 한번 더 설득해 주었으면 해서 불렀다. 내가 갔더니 울고불고 난장 치느라 오히려 기운만 더 빼더라. 네가 가서 잘 좀 타일러봐. 한번 수정했던 모체니까 옛날같이 오래 걸리지도 않을 거고 고통도 많이 없을 거라고 살살 좀 달래봐라. 그깟 핏줄 하나 떼어내는 거야 일도 아니지만 저러다 애 잡을까봐 그런다. 요새 통 먹지도 않고 바짝 골아서는 보는 사람이 다 겁나더라.”

“……….”

선담은 저가 아플까봐 그게 무서워서 인공유산을 거절하는 게 아니다. 그렇게 겁 많은 놈도 아니고 그렇게 이기적인 놈도 아니다. 은협은 알고 있었다. 오랜 시간 고생하여 벌써 반년이나 품고 있던 새끼는 모두의 실험체일지언정 선담의 아이가 맞았다. 그것은 어쩌면…… 최은협과 홍선담, 두 사람의 아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자신의 사탕발림에 꼬여서 아무것도 모르고 쫄래쫄래 따라와 갖은 고비는 다 넘긴 선담에게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최은협은 누구보다도 알고 있어야 했다. 

자신은 선담에 대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어떻게 맺은 결실인데 그깟 기형이란 이유 하나로 아기를 떼고 말고를 저들끼리 정하나. 아무도 찾지 않는 구석에서 누군가의 방문을 두려워하며 울고 있을 선담의 모습이 뇌리에 파랗게 떠올라 은협은 잠시 눈을 감았다.

“좋은 도너인건 안다만 아무래도 가족이 있는 지원자였어야 했어. 그럼 설득하기가 훨씬 용이했을 거다. 부모 없는 녀석에게 이런 말하기 뭣하지만 옹고집이라 당연한 일을 하는 건데도 맘이 영 편하지 않구나.”

“소장님, 그런 말씀 마십시오. 선담이는 제가 가족입니다.”

“그런 거 말고 진짜 혈육 말이다. 엄마나 아빠 그런 거 말이야. 사면초가인 스물한살 정도는 쉽게 어루꾈 수 있는 부모. 그런 게 있었으면 이 고생은 안하지.”

최은협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곳에서 최은협과 홍선담의 출신을 아는 사람은 길호문 한 사람이었다. 늙은이여도 사리(事理)가 밝아 출신 가지고 왈가불가할 인물은 아니었지만, 위급해지자 배려란 것도 없어진 노인네 막말에 은협은 약이 올랐다.

“제가 설득하면 됩니까?”

원하는 대답이었는지 길호문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더니 간청하듯 말했다.

“그래. 네가 설득 못하면 이제와 누가 한다는 말이냐. 좋아하는 것 사가서 며칠 붙어있고 하면서 어르고 달래보란 말이다. 연지애한텐 내가 말 잘해줄 테니. 선담이가 그래도 그나마 네 말은 좀 들을 것 같더라니 이건 이도저도 아니고, PTA에선 조치를 취하라고 난리고, 연구실이 아주 어수선해 죽겠다. 샘플팀에 말 전해줄 테니 나서서 좀 해봐라. 56% 확률이면 기형으로 봐야하니까 이번만 지우고 다시하자고 하면서 살살, 엉?”

최은협은 고개도 끄덕이지 않고 일어났다. 대답하지 않은 것으로 그것은 이미 긍정이었다. 단지, 그는 연구실의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눈으로 길호문을 내려다보았다. 

새파랗게 빛나는 푸른 서슬. 오랜 시간을 날짐승으로 살아온 자에게서만 볼 수 있는 간악하지만 굶주려 창연한 눈동자. 생면부지 어린짐승의 벌떡이는 생살이라도 뜯어먹을 수 있는 저열한 육식류의 무언가가 최은협의 눈동자 아래에 진득이 깔려있었던 것이다. 모든 걸 다 가지고 태어나 부유한 학도를 걸어 이른 나이에 소장직이나 맡은 길호문 따위가 당해낼 수 있는 눈빛이 아니었다. 날 적부터 앞뒤 가리지 않고 생존에 목숨걸어온 핏덩이의 눈동자였다.

그 싸늘한 시선을 거두지 않고 노인네를 내려 보던 최은협은 하나만 약속해달라고 했다. 더듬더듬 “그, 그래, 들어주마. 뭔데 그러냐.”라고 묻는 늙은이의 턱이 부르르 떨렸다. 그러자 참고 참았던 욕망 한 덩어리를 뱉어내는 것처럼 감추어두었던 그의 속내가 탁 풀어졌다.

“두 번째 실험정자도 제 정자를 써주시길 바랍니다. 홍선담의 몸에 들어가는 정자는 무조건 제 정자였음 합니다.”

길호문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

벌써 이야기가 오갔는지 최은협이 소장실에서 나오자 전상목 팀장이 차키를 건네주었다. 은협은 락커룸에 가운을 처박아두고 승용차에 올랐다. 시동을 거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나야. 오빠 다 끝나가지? 오늘 4시 퇴근 맞지? 나 지금 학굔데 곧 출발하려고.]

“……….”

까랑까랑한 목소리 때문에 관자놀이에 불길이 화르륵 올랐다. 이건 시도 때도 없이 전화질이다. 편두통이 일 것 같았다. 은협이 잠시 간 대답이 없자 “오빠?”하고 한번 더 재촉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은협은 키를 꽂아 넣고 시동을 걸었다.

“미안. 갑자기 일이 생겼다. 며칠간 좀 바쁠 것 같은데. 약속은 미루자.”

역시 너머에서 앙칼진 목소리가 건너왔다.

[뭐야, 무슨 일 있는 거야? ……또 그 도너 일이구나.]

“그래. 이번은 큰일이라 오래 걸릴지도 모르겠다.”

[짜증나…. 뭐가 그렇게 복잡해? 아빠한테 다 들었어. 기아(畸兒) 양성반응 나왔다며. 근데 그 도너가 애 못 지우겠다고 버틴다며. 어차피 실험인데 그냥 지워버리면 되지 이리저리 민폐 끼치고 왜 그런대? 길 소장님도 참 답답하다. 오빠도 똑같아. 이게 진짜 몇 번째야!]

“그렇게 말하지 마라. 실험군이 아무나 하는 건 줄 알아?”

[그럼 아무나 하는 거지 뭐가. 오빤 허구한 날 홍선담, 홍선담 노래만 부르고. 좀 만날라치면 일 있다고 쌩 달려가고. 이게 무슨 연애야, 어른들 사업이지!]

“아버님께 안부나 전해드려.”

[나 진지하게 말하는 거야. 오빠가 그 연구에 목숨 건건 잘 알겠는데 자꾸 이러면 울 아빠한테 부탁해서 얘기 막 해버릴지도 몰라. 그냥 대학이나 같이 다니자니까 오빤 고집만 부리고. 솔직히 내가 이런다고 치사한 건 아닌 거 같아. 오빠도 지금 무지 치사하잖아?]

뚜ㅡ

은협은 핸드폰을 차창 밖으로 집어던지려다 조수석에 내팽개쳤다. 잇따른 난폭한 주먹질에 크랙션이 빵빵 울렸다. 이래서 어린 여자들은 말 섞기가 싫다. 게다가 있는 것들이 더 하다고 연지애같이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자란 것들은 눈 마주치기도 싫을 때가 있었다. 은협은 핸들에 머리를 박고 잠시 숨을 참았다 뱉었다.

한참 어린 선담을 데리고 의대를 계속 진학하느냐 마느냐로 갈등일 때 길호문에게 받은 제의는 꿈같은 것이었지만…… 이 지랄로 일이 꼬일 줄 누가 알았던가.

모든 것이 너무 피곤했고 지겨웠다. 후원회의 압박이 좀 수그러들게끔 하려면 PTA사의 자금이 조금이라도 풀려야 했다. 그럼 후원위원장 아버지 빽 믿고 설치는 연지애의 압박도 덜할 텐데. 아니면 정말이지 캠퍼스로 돌아가고 싶었다. 차라리 학생이면 이런 고생은 안할 것이다. 오히려 커리큘럼을 완수하면 의사로서 더 행복한 삶을 누릴지 몰랐다. 그러나 이미 시작된 실험에 대한 열망은 그를 파도처럼 몰아세웠다.

참아야 한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여러 일이 있었다. 지금 이 고비도 소원하는 목적을 위협하진 못했다. 때문에 과거를 회상하던 도중 은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시동을 걸어 주차장에서 빠져나왔다.

-

은협을 보자마자 선담은 꼼짝도 못하더니 그가 슬쩍 웃을 때쯤 그대로 품에 기어들어와 안겼다. 맘고생이 심했을 선담의 긴 속눈썹 아래로 눈물이 다롱다롱 맺혔다. 배만 빼면 팔다리가 비쩍 말라서 어디 버려진 난민촌의 유아 같았다. 선담은 자신을 안아주는 은협에게 매달려 눈물을 닦았다. 닦으면 또 흐르고 또 닦으면 또 흐르고. 주인의 통제에서 벗어난 눈물샘을 달래느라 애를 먹었다. 은협은 그런 선담을 하염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우는 모습은 많이 보아왔지만 익숙해지는 것은 아니라서 선담이 이러면 이럴수록 그의 어깨가 무거워졌다.

“다… 다시는 안 오는 줄 알았어…….”

“그럴 리가.”

“있잖아, 애, 애기 지우려고 온 거야……?”

“아니.”

고개를 젓던 은협이 선담을 번쩍 안아들었다. 워낙에 기운이 좋은 탓에 옛날부터 습관처럼 자주 선담을 들어 안았다. 은협이 비행기를 태워주면 어렸을 적 선담은 투정을 부리다가도 뚝 그치곤 했다. 허나 지금은 너무 오랜만인데다 갑작스러워서 오히려 당황했다. 선담이 당황하는 사이 그는 거실을 가로질러 선담을 침대에 내려놓고 자신도 출렁이는 매트리스 위에 앉았다. 커튼 사이로 느른한 초겨울 빛이 쏟아졌다. 조금은 옛날로 돌아간 것 같아서, 왠지 은협이 지금까지의 일은 모두 꿈이었다고 말해줄 것 같아서, 선담은 바람결에 흔들리는 종이배처럼 얌전히 있어야 할 자리를 지켰다. 

“제대로 안 먹는다는 얘기 들었다.”

“그냥… 밥맛이 없어서…”

“이제부터 더 힘들어질 텐데 잘 먹어둬야지. 너 같은 경우는 낳는 것만큼 지우는 것도 어려워. 네가 아프면 안 돼.”

“……. 그 얘기 하려고 온 거야?”

“홍선담. 네가 무슨 소릴 해도 애는 지울 거야. 난 네가 기형아를 낳고 슬퍼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다. 실험이 중도에 멈춰버리는 것도 싫고, 새 도너도 필요 없고, 너와 내 씨가 불완전한 것도 싫어.”

마치 준비해 온 것처럼 은협은 감정 없이 내뱉었다. 음성은 차가운데 뺨을 보듬어주는 그의 손은 따듯해서 묘했다.

“나도 싫어…….”

다른 누구도 아닌 은협의 앞이라 용기를 얻은 걸까. 아이를 지우겠단 기미만 보여도 발작하던 선담은 의외로 담담하게 대꾸했다.

“만에 하나 애기가 뱃속에서 날 떠나더라도 확실해질 때까지 나는 기다릴 거야. 건강하게 나오는 게 내 바람이지만 그게 안 되더라도, 이 핏덩이를 강제로 죽이고 싶진 않아.”

“……….”

“나랑 반년을 함께 살았어. 그리고 선배의 아이이기도 하고 모두의 노력이 담긴 아이이기도 해. 팔다리 하나 없으면 어때. 지능이 낮아도 사랑받으면서 살면 행복할 텐데. 어떻게 선택할 기회도 주지 않고 우리들 맘대로 죽여……. 그런 짓은 못 해.”

“홍선담. 이건 단순한 출산이 아니라 임상실험의 한 부분이야. 제발 철 좀 들어라.”

힐책하는 어조에 선담의 눈꼬리에 다시 눈물이 맺혔다. 

“만약에 다른 사람의 정자였으면…… 나도 포기했을지 몰라.”

바람이 한차례 들어와 커튼이 휘날렸다. 햇빛을 받은 최은협의 동공이 수축했다. 

“선배 기다리면서 열심히 생각해봤어. 처음엔 나, 사실 이 임상실험에 딱히 애정 같은 거 없었어. 희한한 실험이라고만 생각했고 몇 번하다가 안 되면 포기하게 되는 그런 실험인 줄 알았어. 난 무식하니까 그런지도 모르지만 정말로 그렇게만 생각했었어. 그런데 그런 내가 점점 애착을 가질 수 있었던 건, 물론 모두가 한뜻으로 움직이는 연구원들, 팀장님들과 소장님 때문도 있었지만, 그 전에 선배의 정자가 채택되었다는 게 가장 컸어.”

“……….”

“이런 걸 핑계로 선배 발목을 잡을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난 그랬거든. 다른 사람한테는 그냥 실험일지 몰라도 나한텐 정말 소중해. 그러니까 늦었을지 몰라도 그렇다고 바로 포기할 순 없어. 기형이라고 죽이고 그런 게 어딨어…. 애기한테 미안해서라도 못해. 그래, 어쩌면 나, 다시 실험대 위에 오르는 게 무서워서 이러는 건지도 몰라. 선배를 붙잡을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 같으니까 오기부리는 건지도 몰라. 그래도ㅡ…”

선담은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애기가 벌써부터 신나서 뛰노는 게 느껴지는데…… 그리고 애기가 뛰면 뛸수록 점점 내 심장처럼 느껴져서 이 애를 죽이면 내 심장이 멎어버리는 게 아닐까하고…… 가끔씩 두려워져.”

선담의 말대로 선담은 제대로 배우지 못해 말을 고를 줄 몰랐고 의사를 전달하는데 서툴렀다. 그래도 옛날부터 꾸준히 지켜오던 뜻이 있다면, 그것은 최은협을 사랑한다는 것 하나ㅡ… 확실한 한가지였다. 그런 그가 초점을 조금 돌려 최은협뿐만 아닌 태아에게도 맞추어놓았단다. 연인사이의 다른 문제를 덮어두더라도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그는 갖은 수를 동원해 발버둥 치고 있었다. 

세상에 나오면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도 모르는 제 새끼를 위해서. 아무리 그래도 제 뱃속의 새끼라 죽일 수는 없어서 한결같이 매달리는 모습은 누가 보아도 마음 죄이는 일이었다. 그래서 길 소장이 속을 볶아치는 거고 실험이 미진해 지는 것인데 최은협이라고 덜할 수 있겠나. 

홍선담이 진지하게 앉아서 제 생각을 어필하려고 애쓰는 모습이나 서럽게 우는 모습은 중도하차할 수 없는 연구와 도너에 대한 애정 사이에서 사람을 번민하게 만들었다. 길 소장이 선담을 얼마나 아끼는진 몰라도 최은협이 지켜온 15년과 길호문이 관찰한 3년은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기형아는 뭍으로 나와선 안 된다고 누차 말하는데도 고집부리는 녀석이 밉다가도 너무 딱해서 은협은 마음을 둥글게 다듬으려고 애썼다. 강제로 묶어서라도 동의를 얻을 수 있는 그였지만 그러기엔 필사적인 선담의 모습이 너무나 안 되어보였다.

“선담아, 나도 안다. 우리들 중 누구도 태아를 배고 있던 널 이해할 순 없다는 거. 하지만 몇 번을 말했듯 이건 우리 둘에게만 해당된 문제가 아냐. 실험의 일부라고. 아이가 없다고 내가 사라지는 게 아니야.”

“거짓말…. 아이가 생기고 나서 변하기 시작했으면서…. 선배 말은 안 믿을 거야.”

“그럼 날 변하게 했던 그 아이는 왜 낳으려는 건데?”

“……….”

“아이가 생기고 나서 내가 바람피우는 것 같고 미우면, 원흉은 왜 낳으려는 건데?”

“말장난 하지 마. 전혀 다른 문제잖아. 그리고 나도 마찬가지야. 선배가 변했다고 해서 이 아이를 낳고 말고를 결정하는 건 옳은 일이 아니야.”

은협이 왔다는 이유만으로 안색이 밝아졌던 선담은 계속되는 책언과 반박에 다시 엉망이 되었다. 눈가가 찢어질듯 부르텄고 같은 이야기만 반복하며 시간을 허비했다. 무거운 배와 모자란 힘 때문에 쉽사리 움직이진 못해도 그는 최은협에게서 필사적으로 떨어지려 했다. 대화는 끝이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선담을 타일러보려는 은협과, 다른 문제를 뒤로 미루고서라도 지금 이 아이를 지켜야겠다는 선담 사이에선 의미 없는 불꽃만 튀었다.

“선배는 아마도 평생, 내 마음 모를 거야ㅡ….”

독이 오른 발간 입술은 입버릇처럼 그리 말했다.

- - - -

최근 2주 가까이 최은협은 연구실에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행방에 대해서는 누구도 궁금해 하지 않았다. 그가 도너를 설득하러 들어갔다는 사실이 공공연한 까닭이었다. 강제로 주사라도 놓았다가는 혀를 물 것 같은 도너의 신변을 위해 가장 믿음직한 일원을 투입하자는 작전은, 그러나 열흘이 지나가도록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헌데도 모두가 최은협을 믿는 분위기라 연구소를 가득매운 그 알 수 없는 기대감은 기이했다. 평소 최은협이 숨기고 돌아다녔던 그의 위압감이 주인 없는 곳에서 폭파라도 했는지 그들은 이상하리만치 도너에 대해서는 걱정이 없었다.

그 사이 PTA사에선 왜 인공자궁 안의 불순물을 제거하지 않느냐고 강도 높은 닦달질을 해왔다. 아직도 언론의 비난을 피하지 못한 PTA사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탈세혐의까지 입어 주가가 날로 하락했고 그러면 그럴수록 관련부서에선 전화통에 불을 냈다. 가끔씩 자금줄이 뚫리다가도 막혀버리기 일쑤였다. PTA사와 관련 있는 기관이라면 하나같이 겪는 난리라고해서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반대로, RTA사가 축소되자 입김이 거세지는 자국의 후원회 때문에 길 소장의 주름은 펴지는 날이 없었다.

도너가 없는 상태에서 가상실험을 해야 하는 연구팀은 영국에서 겪었던 권태보다 더 큰 위기를 맞았다. 타국에선 그나마 서로밖에 없었으니 협조하고 배려하며 사기를 충전했지만 귀환 후 사정은 달랐다. 도너가 없는 실험은 말이 안 된다며 시시때때로 진보 없는 불평이 터졌다. 물론 그 불평에는 철없는 도너를 향한 질타도 섞여 있었다. 터전을 내건 직장이니 어디 도망갈 일원은 없지마는 그 분위기란 것이 대단히 묘했다. 고작 2주만에 많은 것이 변해버렸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최은협과 홍선담이 겪는 고초에 비하면 별거 아니었다. 뱃속의 것은 죽을 생각을 안 하고 무서운 속도로 자랐다. 기초영양이 여성보다 풍부한 남성모체라서 그런지 이제 막 7개월인데 배는 만삭이었다. 새끼는 제 어미의 것을 모조리 뺏어먹어 버렸기 때문에 선담은 언제나 허기졌다. 도대체 어떤 괴물이 나올까 겁날 정도로 핏덩이는 빨리 자랐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은협은 애간장이 다 녹았다. 저러다 선담이 어느 날 확 쓰러져버리기라도 할까봐, 본질적으로 홍선담 하나부터 걱정되기 시작해 그도 몹시 불안했다. 신경을 건드리는 불안은 은협에게 거슬리는 통증이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최은협의 연락이 뜸해질수록 사정을 알 리 없는 연지애는 길호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를 쪼았다. 다방면에서 날아오는 압박 때문에 은협마저도 비쩍 마를 판이었다. 반대로 은협이 곁에 있자ㅡ그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ㅡ조금이나마 맘이 편해진 선담은 뱃속에 영양을 쪽쪽 빨아 먹히는 와중에도 힘을 실어 한사코 유산을 거부했다. 길호문의 전략이 오히려 반대로 먹히는 중이었다.

선담이 어미로서 새끼를 지키는 일이야 당연했다. 참을성 있게 기다리던 은협도 점차 이성의 제어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다행히도 이성의 반대는ㅡ… 감성이었다.

겨울이 깊어져가는 따듯한 방안에서 두 사람만의 시간이 길어지자 은협도 선담에게 눈처럼 동화됐다. 연구실이 마법에 걸린 것처럼 울렁거렸다면, 2주 가까운 시간 동안 은협은 선담에게 아주 조금이나마 솔직할 수 있었다. 서로의 의견을 피력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다만 두 남자는 공통된 씨앗을 가지고 묘하게 이화됐다. 남자이면서 임신을 했던 선담이 괴리에 빠졌던 것처럼, 시간은 자꾸 흐르는데 선담을 움직이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은협도 괴리감에 빠졌다. 그 괴리감이란 것은 달콤하면서도 차가웠고 아늑하면서도 불길했다. 사랑으로 감싸안아주고 싶다가도 실험자인 자신을 채찍질 했다. 

촉매제도 없는 시간은 자비 없이 흐르는데. 

아름다우면서도 못내 지독한 나날이었다.

그렇게 은협이 선담의 집으로 출근도장을 찍던 16일째였다. 길호문에게서 호출이 왔고 그가 소장실에 발을 들이는 순간 면상에 서류다발이 퍽하고 떨어졌다. 은협의 얼굴을 세게 치고 지나간 종이짝은 지난밤에 전상목이 진행했던 검진결과였다. 먼저 들어온 전상목과 다른 팀장들은 죄인처럼 어깨를 모으고 앉아있었다.

“최은협이. 도너 설득 시켰어?”

“……….”

“자궁벽이 이게 뭐냐! 천조각도 아니고, 조만간 뱃속에서 다 찢어지겠다!”

정밀초음파 사진을 받아들고 말을 잃은 은협 앞으로 다른 부서의 팀장이 나섰다.

“묶어서 강제로라도 유산시켜야 합니다. 정확한 원인도 밝혀내야겠지만 이대로 가다간 도너와 자궁 모두 위험하겠어요. 그럼 모든 게 도루묵입니다!”

“강제로 하는 건 안 돼! 몇 번을 말해! 도너한테 피해가 안가도록 해야 돼!”

“소장님, 시간이 없습니다! 언제까지 그 지각머리 없는 도너에게 휘둘리실 겁니까?”

“영국 파견팀에 없었던 사람은 빠지도록 하지. 난 그 애가 아프다고 살려달라고 통사정하는 꼴 이제 더는 못 봐! 그거 당하는 사람보다 지시하는 사람 맘이 더 괴로워! 그간 어떤 고생을 한 앤데 손발 묶어서 주사 주입할 생각을 해! 말이 되는 소리야! 그건 PTA사에서도 바라지 않는 일이란 말이다! 도너 잘못 됐다가 고소당하고 싶어?!”

길 소장의 벽력같은 고함에 연구실 전체가 찬물을 얻어맞은 양 조용해졌다. 날이 선 노인네의 목청은 쩌렁쩌렁했다. 서른, 마흔줄에 들어선 팀장들도 움찔움찔 놀랄 정도니 최은협에겐 더더욱 짜증나는 추궁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군다나 아까부터 주머니 안의 핸드폰이 징징징 울려대고 있었다. 분명 약 오른 연지애의 이름 석 자가 둥둥 떠 있을 것이었다. 

고통을 호소하듯 내장을 옥죄는 노성, 한계선을 넘긴 닦달질. 복도를 따라 걷는 순간부터 은협의 머리를 매섭게 짓누르던 통증이 뇌리를 짜하게 울렸다. 참을 수 없는 통한으로 그가 눈살을 찌푸리는 내내 길호문은 선담을 설득시킬 방법을 찾으라고 불칼을 들고 고함쳤다. 주머니는 진동으로 들썩이는데 눈앞의 소장은 길길이 날뛰었다. 소장실이 소란스러워지자 그 물살을 타고 점차 연구소 자체가 들썩이는 것 같았다. 지진이라도 난 것 같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최은협이 소장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길호문의 고함을 묻어버릴 만큼 크게 닫힌 문 너머로 구두굽 소리가 일정하게 반복하다 사라졌다.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비를 지나는 동안 많은 임직원이 그를 목격했지만 누구하나 선뜻 나서서 말을 거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 최은협이 떠난 연구소는 몹시도 괴괴했다.

-

눈가에 타오른 광염이 쉬 가라앉질 않았다. 몸이 꼭 십대 시절로 후퇴하는 것 같았다. 

모체는 절대 바꿀 수 없었다. 연구소에서도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아 이 문제는 가시화 되지도 않겠지만, 소중한 모체에게서 그 역시 기형 따위를 뽑아내고 싶진 않았다. 허니 뱃속에 들어앉은 내 씨앗부터 철저하게 파괴하자. 독 한번 품는 것이다. 어미가 좋다고 해봐야 뭐하나. 득 없는 소리나 지껄이면서 기형을 낳겠다고 고집 부리다니. 이건 자원낭비였다. 

포기할 수 없는 모체와 배아, 그리고 자궁에 대한 진득한 열망에 슬슬 불이 옮겨 붙은 것일까. 몇 번이나 핸들을 바로 쥐면서 은협은 제발 좀 진정하자고 제 머리를 쓸어넘겼다. 간헐적으로 신음이 새어나왔다. 가까스로 선담이 머무는 아파트단지로 들어섰을 때엔 가슴이 쓰라리도록 콱 막혔다.

“아, 선배 왔어?”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화사하게 웃으며 저를 반기는 선담은 여전했다. 여전히 턱 바로 아래서 가르마를 볼 수 있었고 송아지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속눈썹이 길고 눈동자가 맑았다. 도자기 같은 살결도 변함없었다. 은협을 사로잡았던 무수한 모습 중에서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커다란 배뿐이었다. 

이곳으로 향하는 줄곧 은협은 자신을 도야했다. 진정하자고, 진정하자고. 지금까지 어떤 개고생을 했는데 이쯤가지고 흥분을 하냐고. 과거를 일일이 들춰내 이보다 더 역정 났던 일들을 생각하며 그는 핸들을 움켜쥐었다. 그 결과 비교적 평온해진 마음으로 현관문을 열었다. 허나 막상 선담의 얼굴을 보자 말초신경이 곤두섰다. 그는 신발도 벗지 않고 현관에 선 채 바로 말했다.

“아이 지우자.”

“선배!”

며칠간 태아에 대한 이야기가 없어서 조마조마하게 넘어가기만 기다렸던 선담은 실망에 차 은협을 노려보았다.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한참동안 그를 노려보던 선담은, 그러나 무언가 위화감을 느꼈다. 

“선배…… 괜찮아? 무슨 일 있었어?”

많이 달라진 눈동자. 보육원에서 한창 뛰놀던 시절에만 볼 수 있었던 그 모습. 순흑으로 가라앉은 눈동자가 어느샌가 눈꺼풀 아래에 자리 잡고 있었다. 갑자기 걷잡을 수 없는 공포가 몰려들었다. 은협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홍선담. 내 새끼가 안에 들었다는 사실 이전에 수정관을 앉힌 네 몸이 얼마나 위대한 업적인지 알기나 해? 인류의 손에 박해당해 사라지는 수만 가지의 종(種)을 되살릴 수 있는 기초가 된다는 사실을 인식 못해? 난소가 없어 자식을 낳지 못해 우는 사람들, 수정관이 없어 임신을 못하는 사람들, 자궁이 없어서 애를 가지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네가 어떤 희망인지 몰라서 지금 고집을 부려!”

점점 커지는 고함에 선담은 당황해 저도 덩달아 소리 질렀다.

“내가, 내가 그걸 왜 몰라! 다만 기형아라서 애를 지워버리자는 거면, 차라리 내가 실험을 더 하더라도 낳아야 한다고 말하는 거잖아! 선배가 누구랑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니든 연구팀 배신하지 않고 아이를 낳을 거라고! 근데 이러는 게 어딨어! 기형이면 낳을 가치도 없어? 자기 자식이기도 하면서, 연구엔 그렇게 애착이 깊으면서 왜 애기한텐 못 그래?”

손끝이, 그리고 발끝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은협은 분통을 터트리며 선담의 팔뚝을 붙들었다.

“내가 왜 그 애기한테 애착이 없어! 다만 지금 우리에게 그 태아는 새 생명이 아니라 실험의 오차일 뿐이다! 그런 애를 누가 기른다고!”

“오차라고? 그렇게 열심이었으면서 남들하고 조금 다른 거 가지고 지금 오차라고!”

“EEC 입장에서는 오차다! 돌이킬 수 없는 오류라고!”

그만하라고 애원하듯 외치며 선담이 고개를 흔들었다. 이런 모습에 속이 터져서 은협이 손아귀에 힘을 굳게 쥐었다.

“싫어, 그래도 안 돼! 애는 죽이지 마! 그것만은 절대 안 돼!”

“너 나 미치는 꼴 보고 싶어서 이래!”

“나 같은 건 이제 돌아보지도 않을 거면서! 자기 입장만 지키는 주제에 나한테 상관하지 마!”

“……ㅡ!”

은협이 무언가 더 크게 대꾸하려는 차에 선담이 한쪽 귀를 틀어막았다. 은협은 그런 선담의 두 팔을 강하게 휘어잡고 더 크게 고함쳤다.

“연지애 얘긴 이미 끝났어! 이제는 옛날로 돌아갈 수 없다고 했잖아! 지금 사정이 그렇게 안 돼! 그래도 난 네가 좋다는데 왜 이렇게 치졸하게 굴어! 네가 이딴 데 신경을 쏟으니까 자궁도 낡아버렸다고! 아이는 지워야,”

“싫어! 낳아야 돼! 절대 낳을 거야! 이대로 죽일 순 없어!”

“뭐? 낳아? 배 갈라야 낳을 수 있는 주제에 너 혼자 뭘 낳겠다고? 다신 애가지고 이 지랄하게 만들지 마! 애는 물론이고 너까지 싸잡아서 묻어버리기 전에!”

“그만 해ㅡ!”

짜악ㅡㅡㅡㅡ!

매서운 소리와 함께 최은협의 뺨에 금이 갔다. 맨손이어서 살을 찢을만한 것도 없었는데 왜 그런지는 몰라도 은협의 뺨에 한줄기 선혈이 그어지더니 피가 떨어졌다. 새빨간 피였다. 그 피를 보고 더 놀 찢는 선담이 결국 눈물을 터트렸다. 

“그런 말 하지 마……. 선배가 다른 사람에게 가버렸다고 하면, 차라리 죽고 싶어지니까, 그러니까 사실은 그렇더라도 내게 그런 소리 하지 마. 기형이라서 지우겠다는 그런 얘기도 하지 말아줘……. 나한텐 이제 남은 건 아이밖에 없으니까. 이미 다 정리한 일이야.”

“……….”

“나보다는 선배가 훨씬 나은 삶을 살 수 있으니까, 선배의 인생에 걸림돌이 된다면 나는 그늘에 있어도 괜찮아. 그래도 괜찮으니까, 연구실 사람들 마음대로 하지만 않게 해줘. 애기만 지우지 않게 해줘……. 이제 난 이것밖에는…….”

머리를 세게 맞아 얼얼한 가운데 은협은 선담의 말이 그치기를 기다렸다. 하얀 손등은 눈물을 훔쳐내느라 축축하게 젖어있었고, 부탁하는 입술은 평소보다 유난히 더 붉어져있었다. 지켜보던 은협의 눈가가 싸하게 풀려버렸다. 그는 선담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살갗에 붙었던 입술이 농밀하게 목 주위를 훑어 올렸다. 

“네가 중요해. 그리고 네가 품은 내 새끼도.”

그답지 않은 고백에 선담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대는 동안, 은협은 고백만큼이나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일이…… 모두 널 위해서 하는 일이라 생각해라.”

갑자기 최은협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손목을 비틀어버릴 정도로 거센 완력이었다. 놀라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선담의 몸체가 질질 끌려 침대위로 떨어졌다.

“선배…!”

“섹스할거다, 너랑.”

낙뢰 같은 손바닥이 선담의 눈 아래로 떨어졌다. 커다란 소리와 함께 뺨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불구덩이를 갖다 댄 것 같이 아팠다. 미처 피하지 못하고 얼굴을 감쌌더니 은협이 손을 거둬내고는 다시 철썩! 무지막지하게 뺨을 갈겼다. 눈앞이 돌아 선담이 휘청거렸다. 은협은 그대로 손을 뻗어 선담의 멱까지 잡아 올렸다.

“용서해줘.”

“흐윽……!”

같은 곳을 한번 더 가격 당했다. 세 번째엔 몸체가 돌아갈 정도로 아파서 선담이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뜨거운 실내온도에 맞춰 얇게만 입고 있던 셔츠도 부욱ㅡ 찢어졌다. 배가 많이 무거워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없는 선담은 알몸이 되어버리는 과정 동안 보복하듯이 은협을 몇 번이나 내쳤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그래도 원하는 바를 성취하기에는 그 움직임이 거슬렸는지 커다란 주먹이 옆구리를 쑤시고 들어왔다. 선담이 고통에 몸을 마는 사이 은협은 찢어진 셔츠자락으로 선담의 한 팔을 묶어 침대장식에 달아놓았다. 손과 연결된 침대장식이 덜컹덜컹 흔들렸다. 허연 속살을 모조리 드러낸 선담이 아연하여 소리쳤다.

“선배! 하지 마!”

목이 조이는 바람에 눈앞이 샛노래졌다. 가파르게 헐떡대며 선담이 몸을 푸르르 떠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은협이 두 다리를 넓게 벌렸다. 언제 맛보아도 기대이상이었던 붉은색의 틈새가 드러났다. 실험에 참여한 이후부터 내리 아물어있던 그 골짜기를 축축하고 뜨거운 혀가 싹 핥고 지나가자 꽉 닫은 선담의 두 눈이 눈물과 짓물러 새빨개졌다. 혀와 손가락이 차례로 오가며 안쪽의 속살까지 침범해 야들야들한 살을 후볐다. 선담이 고함치며 다리를 모으려고 악을 썼다. 온몸이 자갈밭에 구르는 것처럼 몹시 아팠다. 그 와중에 굵게 세운 혀가 성기를 흉내 내며 아귀에 와 박혔다. 두 다리를 단단하게 잡힌 배불뚝이가 할 수 있는 짓거리라곤 고작해야 남은 한 손으로 은협의 머리를 밀어내거나 대차게 때리는 정도였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 그가 자신을 거침없이 탐식하는 동안 선담은 무력하게 흐느꼈다. 배까지 부른 상태에선 힘으로 절대 최은협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를 당해낼 능력도 없는 주제에 여기서 강제로 추행 당하기는 죽어도 싫었다. 

선담은 자신이 숨을 터트리며 울면 신음과 섞여 오히려 더욱 야하다는 사실도 모르는지, 부족한 깜냥 탓에 더는 덤비지 못하고 자꾸 그만두라고만 애원했다. 돌변한 최은협이 무서웠다. 얻어맞은 볼이 너무 아파 울고 있는 사이 속살이 남김없이 젖었다. 힘이 안 되면 설득이라도 하려고 선담은 자꾸 은협과 눈을 맞추며 빌었다.

“선배, 선배…! 하지 말자, 이러지 마! 애기가…!”

“뱃속 걱정은 하지 마.”

“제발! 이러는 거 싫어!”

쫘악ㅡ!!!

싫다고 하면 한 대씩 날아왔다. 성질이 날대로 난 은협이 선담의 머리채를 잡아 제 앞으로 끌고 왔다. 입안에 쇠맛이 나 피를 뱉어내려고 하자 은협이 난폭하게 입을 틀어막아버렸다.

“빼지 마, 홍선담. 나 아니면 싸지도 못하는 주제에 해주겠다고 하잖아. 얼마만이냐, 어?”

“……헉, 선배…! 흡…!”

“일석이조 아니냐. 애도 떼고 기분도 좋고. 그냥 즐겨라.”

그는 돌아가 있었다. 그 시절로.

다만 그때와 다른 것 하나. 마귀의 탈을 쓰고 남들에겐 잔혹하게 휘두르고 다닐지언정 자신에게만은 늘 다정했던 사람이, 자신에게만은 단 한번도 함부로 대하지 않았던 최은협이, 도끼날을 갈아 이번엔 자신의 배를 찍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폭주하는 최은협은 보육원 교사는 물론이고 학교 교사들도 막을 수 없는 일종의 재난이었다. 그 광란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해있다는 걸 자각하고 나자 온몸의 소름이 돋았다. 피가 고인 입을 틀어막고는 선담이 눈물을 줄줄 흘렸다.

“꼭 쳐 맞아야 정신을 차리겠냐, 어!”

선담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무거운 배를 잡고 뒤퉁거렸다. 은협은 짐승처럼 우그러진 얼굴로 선담을 강제로 뒤집었다. 우악스런 손길에 아기집이 짓눌리기라도 할까봐 무릎을 세우자 하지가 넓게 벌어지면서 젖은 항문이 드러났다. 무거운 뱃덩어리가 시트에 파묻혔다. 선담의 움직임은 하나하나가 온통 아기 생각뿐이었지만 은협에게는 모든 게 부질없이 느껴져서 이 자세가 우스웠다. 은협이 뒤에서 연신 웃자 선담이 두려움에 으스스 떨었다. 어차피 막판까지 가면 선담이 몹시 아프게 될 거란 걸 알기 때문에 그나마도 위안하겠다고 은협이 그곳을 다시 애무했다. 선담은 허벅지를 잡힌 채 모멸 당하면서도 통하지도 않을 간청을 계속 시도했다. 그 애걸은 매우 간절함에도 겉돌기만 했다. 침대 위가 선담의 울음소리로 범벅됐다.

“…ㅡ!”

어느새 뜨거운 것이 입구에 닿는 듯싶더니 뱃속으로 주욱 밀고 들어왔다. 흐린 눈동자가 터질 듯 크게 뜨여졌다. 은협의 남근이 가차 없이 몸 안에 침입했다. 아기집에 닿아버릴 정도로 깊게. 한번에 아주 안쪽까지 뚫고 들어와 선담의 몸이 통한으로 경직했다. 공포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아래에 살덩이가 철썩 붙었다. 선담이 눈을 크게 뜨고 꺽꺽거렸다. 뱃속이 찢어져버릴 것만 같았다. 오랜만에 들어온 이물감이 지독하게 낯설었고, 그래서 아래에 힘을 주었더니 인정사정없는 주먹이 옆구리에 꽂혔다. 다시 한번 비명 지르며 잇새로 신음이 쏟아져 나왔다. 지독하게 아팠다. 몸이 마구잡이로 흔들렸다. 묶였던 손이 풀렸지만 놀란 몸을 진정하기에도 버거워 선담은 그 손으로 허공을 휘저었다. 선담이 도망가려고 애를 쓸수록 은협은 허벅지를 당겨 교합을 더욱 깊게 했다.

놀란 아기의 비명이 뼈를 타고 전해지는 것 같았다. 겁이 난 어미의 눈에서 눈물이 쉬지 않고 흘렀다. 자신의 등에 가슴을 붙인 채 난폭하게 허리를 휘두르는 최은협에게선 사락거리는 옷자락 소리와 함께 낯선 체취가 그득하게 베여 나왔다. 

그 순간 선담의 입주변으로 핏줄기가 흘렀다. 피는 은협의 것이었다. 혀를 물려는 각오를 읽었는지 은협은 급하게 선담의 주둥이에 자신의 손등을 재갈같이 물렸다. 입까지 막혀버린 선담은 제 연인의 손등을 물어뜯으며 고개를 수그렸다. 우득, 하고 살갗 안으로 이가 박혔다. 동시에 활짝 열린 몸 안으로 뜨겁고 거친 성기가 사정없이 박혔다. 

“……! …ㅡ!”

선담은 은협의 지배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몸부림쳤다. 얼굴을 문대고 있던 베개엔 온통 최은협의 손에서 흐른 피와 뜨거운 눈물흔적 밖에 없었다. 역겨웠다. 직장 바로 위에 있는 수란관까지 성기가 뚫고 들어오는 느낌이, 토하고 싶었다. 

은협은 벌어진 틈으로 피가 줄줄 흐르기 시작하는데도 검붉은 분신을 꽂아 넣었다. 어린 시절부터 훈육한 여린 몸은 예전과 그대로였지만 지금은 이 행위 자체가 강제라서 짜증나 미칠 것 같았다. 이따위로 거부당하면서 하는 섹스는 본인도 싫었다. 은협은 피칠 된 손으로 연한 주름을 살살 문지르며 허리를 움직였고 선담의 날개뼈에 입 맞추며 어르듯 속삭였다.

“벌 받는 거니까 울지 마라. 지금은 끔찍해도, 괜찮아 질 테니까.”

“흑……!”

“어쩌면 주사보다 덜 고통스러울 거다. 아이가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도 모르고 지나갈 거고, 여기가 아픈 건 내가 치료해줄게.”

“…싫어… 싫어……!”

잠깐 잊었다. 싫다고 하면 맞는 것을. 퍽 하고 날아오는 손아귀. 예외는 없었다.

안쪽에서 정액이 한번 왈칵 쏟아졌으나 잠시의 수축이 있을지언정 은협은 더욱 거세게 몰아쳐갔다. 아주 작정하고 정을 떼놓고 왔는지 다루기를 인형 다루듯 했다. 아프다고 비명 쳐도 뿌리 끝까지 박혔다가 쑥 빠져나가고 더 강하게 찔러 들어오며 그럼 주사를 맞지 뭐했냐고 선담의 머리채를 쥐고 흔들었다. 살아있는 몸을 상대로 그는 쾌락을 강탈하고 있었다. 선담의 힘 잃은 성기가 정신없이 털렁거렸다. 이제는 울음소리도 못 내고 선담이 꺽꺽거리자 어느새 은협이 깊숙이 끌어안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아프냐.”

“……!”

몸을 가혹하게 부리면서도 음성은 부드럽게 내어주는 은협의 귓속말을 듣자마자 선담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몇 대 맞았으니 이것은 강간일까? 머리 한구석에서는 강간이 맞다고 소리 지르는 한편, 허락 없이 육체를 범하는 그를 죽을 각오로 밀어내지 못하는 자신에게 과연 아이를 지킬 자격이 있냐는 의문이 들었다. 정말 싫다면 혀라도 물어야하는 것 아닌가? 강간이라고 생각하면서 사실은 화간을 하고, 더는 아이를 지킬 수 없을 것 같으니 스스로 핑계거리를 만드는 건 아닐까? 심심한 자기위로 같은, 혹은 ‘어쩔 수 없었다’라는 수식어가 꼬리처럼 붙어 따라다니는 그런 핑계를…….

“아파, 아파…. 아파, 선배….”

삽입이 빠르고 길게 계속되자 선담은 피 묻은 베개에 얼굴을 처박고 전신에 힘을 뺐다. 찢어지든 말든 구멍을 헐렁하게 내버려두었다. 어차피 저항하면 더 맞았다. 차라리 이게 나았다. 최은협의 주먹이 얼마나 효율적인지는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온몸이 땀에 흠뻑 젖어 기력 없이 흔들렸다. 어차피 팔다리에 힘을 빼도 허리를 단단히 붙들렸기 때문에 휘늘어지지도 않았다. 힘을 빼면 재미가 없어져 그만둘 줄 알았는데 아주 결단을 내려는 것인지 그 예상은 빗나갔다. 마지막이 다가오자 참을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워졌다. 순전히 너무 아파서 밑에 힘을 주기도 하고 허리를 어그러트리기도 했다. 그러나 들이박는 쪽에서 끝을 내겠다고 덤빈 이상 살집에서 기어이 피가 펑펑 쏟아졌다. 은협은 성기에 옮아붙는 핏물을 보며 쓰디쓴 한숨을 삼켰다. 깊이 들어갔던 성기가 두 번째 환희 없이 빠져나왔다. 좁은 틈에서 나오자마자 은협의 남성이 액화된 분신을 내보냈다. 후두둑 떨어진 그것은 시트를 적신 선담의 것과 섞였다. 애무당하고 삽입당하는 와중에 선담도 오래전 한차례 파정한 후였다.

아직도 선담은 지금의 행위가 무엇인지 구분 짓지 못한 자신에게, 아니, 모든 걸 떠나서 제대로 반항한번 하지 못한 자신에게 욕설을 퍼붓느라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 상황을 홀로 책임을 지지도 못하고 남에게 전가시키지도 못할 주제로 혼자 갈등하면서 이젠 말라 흐르지도 않는 마지막 눈물찌꺼기만 방울방울 달아놓고 맥없이 쓰러져있었다. 은협에게 얻어맞은 곳들은 원망스러울 정도로 욱신거렸고 장시간 이물질이 출입한 아래는 몹시도 쓰라렸다. 

그리고, 기분 탓일까ㅡ

자주 있던 태동이 아직까지 없었다. 

잠시 떨어져있던 은협이 다가와 선담을 바로 눕혔다. 망설이던 그의 손이 아무렇게나 놓인 다리사이로 들어와 회음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힘없이 떨어진 성기 끝에 묻은 정액을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은협의 손도, 선담의 몸도, 정액보다도 붉은 피로 인해 엉망이었다. 

“뭘 잘했다고 울어.”

설마 정말로 아이가 죽을 거란 생각은 안하면서도 선담은 자꾸 눈물이 흘렀다. 내가 욕보이면 애기한테도 침을 뱉는 거란 생각이 들어 몹시도 서러웠다. 은협이 어디를 어떻게 주무르든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저 온몸이 불로 지지듯 뜨겁고 따가웠다.

“그러게 왜 버텨. 주사 한번이면 뱃속이 좀 아프더라도 쉬웠을 텐데. 어쨌든 아프지 말라고 정말 약하게 했다. 그러니까 더 이상 덤비지 마. 나도 이러기 짜증나니까.”

“……….”

“………. 이제 주사 맞을 생각이 좀 들겠지.”

뱃속에서 수괴스런 분노가 올라왔다.

“하루라도 빨리 네가 다시 수정했음 한다. 그땐 절대 기형으로 만들어놓지 않을 테니. 외적인 문제든 내적인 문제든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다.”

“……….”

솔직히 말하자면 이제는 버틸 자신도 없었다. 내 사람이 다른 사람의 남자가 되었다는 사실과, 사랑의 결실이 될 거라고 희망 품었던 아기가 괴물취급을 받는다는 사실만이 무의식 저편에 깊게 깔려 그의 모든 것을 앗아갔다. 

선담은 대답 없이 눈을 감았다. 어느새 단편적인 분노도 사라져가고 눈물만 흐르고 흘렀다. 옆통수를 흠뻑 적시고도 부족하다고 자꾸 흘러넘쳤다. 그간 참았기 때문에 더할지도 몰랐다. 아무것도 느끼고 싶지 않았다. 고치 속에 싸인 애벌레처럼 선담이 몸을 둥글게 말았다. 은협의 입술이 전희하듯이 이마와 눈가를 오르내렸다. 눈물을 핥아주기도 했다. 방금 전의 것은 합의해서 이루어진 행위이고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나게 될 것이란 선포 같은 키스에 애통해서 눈물은 끝을 보이지 않았다. 

“괄약근하고 직장이 좀 찢어졌을 거다. 정말 죽었겠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안 죽었다면 또 할 거야. 네가 차라리 주사를 맞겠다고 할 때까지 계속 계속 널 이딴 식으로 안을 거라고. 반항하면 때리고, 애무도 배려도 없이 끝까지 할 거다. 알았어?”

“……….”

“어차피 네 자궁벽은 많이 얇아졌으니 이 정도로도 태아는 충분히 위협받았을 거다. 기형이라 뱃속에서 죽을 확률이 원래 더 많았지만 이젠 내버려둬도 알아서 처리되겠지. 근데도 만약 안 되면…… 내가 널 실험대 위까지 끌고 갈 거야.”

힘으로는 최은협을 이길 수 없었다. 그렇다고 심성이 더 강한 것도 아니었다. 모든 것이 완패였다. 유일하게 편을 들어줄 사람이 이렇게 나오자 뱃속의 것도 무가치하게 느껴졌다. 

다만, 죄 없는 아기에게 고해를 묻기란 참 어려운 일이었다. 실험체의 태아란 사실이 죄는 아니다. 기형으로 판명 난 것도 태아에겐 죄가 없다. 그저 거대기업의 사익을 위해 탄생한 배아여도 그래도 반년을 넘게 어미와 함께 자랐다. 남들은 결코 모르는 제 새끼의 생명력을, 모체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정말 여기서 끝인 걸까…….

두근

가치를 느끼지 못하겠다고 생각한 탓이었는지. 아니면 포기하려는 어미의 속내를 들은 것인지, 아이가 배를 찼다. 순간 선담이 깜짝 놀라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자 아이는 다시금 배를 찼다. 익숙한 태동ㅡ….

“그렇게 쉽게 죽진 않아.”

고작 할 수 있는 말은 이것이었지만 힘을 실어 말했다. 뱃속의 아이도 들을 수 있게끔 크고 또렷하게 말했다. 약동하듯 꿈틀거리는 핏줄을 느낄 수 있었다. 은협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헛소리 하지 마.”

“죽지 않는다고…….”

“그래도 내가 죽여.”

선담의 주먹이 은협의 가슴에 가 꽂혔다. 그의 몸이 약간 흔들렸다. 오른손엔 피가 흥건하고 뺨에도 핏날이 선 은협은 오히려 선담보다 더 피해자 같아 보였다. 그 모습이 선담의 가슴을 뒤흔들었지만 아이를 죽인다고 기어이 제 입으로 말하는 그가 죽도록 미웠다.

“안 죽어! 안 죽는다고!”

“……….”

“이 정도론 안 죽어! 주사도 안 맞을 거고, 아직 살아있어! 안 죽는다고!”

“태동이 있었나본데 태아가 바로 죽는 건 아니야. 이렇게 안 먹는데다 맘고생도 심하고 내장까지 손상이 갔으니 곧 죽는다. 얼마 안 남았어. 그 다음엔 약물로 빼든지 절개를 하든지 하자. 그땐 절대 안 아프게 할게.”

“싫어…… 싫어! 여기서 나갈 거야.”

선담이 침대에서 내려갔다. 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쇠꼬챙이로 꿰듯 치부가 몹시도 아팠다. 무언가 뜨거운 액체가 꿀럭꿀럭 새어나오는 느낌도 잠시고, 선담은 서둘러 윗도리부터 챙겨 입었다. 은협이 피곤한 듯 눈가를 덮었다.

“선담아, 그만해라.”

“더는 도너 안 해. 선배도 변하게 만들고 어렵게 만든 생명도 죽이려고 하는 짓 못 봐주겠어. 안 해. 안 할 거야. 나 혼자 낳을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 말고 좋게 말할 때 이리 와. 피곤하다.”

들은 체도 안하자 은협이 내려와 선담의 팔을 낚아챘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간신히 지탱하던 몸뚱이가 강하게 당기는 힘에 거의 넘어지듯 침대에 나뒹굴었다. 일어서려고 버둥대는 팔이 거칠게 잡혀 머리맡에 올라갔다.

“더 예쁜 아이로 만들어준다니까. 더 예쁜 애로 갖자.”

“이미 맘 떠난 선배한테 씨앗 같은 거 받고 싶지 않아. 실험도 하기 싫어…. 너무, 너무 힘들어…….”

“그런 얘기라면 그만 해라.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그래도 난 널 버리지 않는다고도 했어.”

그러자 “선배는…”하고 선담이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이미 나 같은 건 버렸잖아.”

최은협의 눈가가 흉포한 빛을 띠웠다.

“뭐?”

“갈래…….”

갈 곳도 없으면서 선담은 다시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발목을 붙들려 은협이 있는 곳까지 또 다시 질질 끌려갔다. 그의 거친 수악이 허연 피부를 속속들이 드러냈다. 이제는 반항하는 것도 지칠법한데 선담이 길길이 날뛰었다. 은협이 제 다리사이에 손을 넣자 섬뜩했다. 찢어질 듯 피륙이 재차 벗겨지고 다리가 벌어지는가 싶더니 혈흔이 가시지도 않은 틈새로 굵은 울대가 퍽 침투했다.

“흐, 아악!”

적어도 쾌감으로 시작해 고통으로 끝나는 것이면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고통으로 시작되는 섹스는 시작도 끝도 지옥밖에 없었다. 두 발목을 꽉 잡힌 채로 엉덩이가 벌어지고 피가 마르지도 않은 자리로 그의 남근이 뚫고 들어왔다. 머리가 꽂히는 순간 선담이 눈을 사납게 부릅떴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통증이 찢어지는 생살을 누볐다.

“선배……!”

너무나 아파서, 가슴이고 몸이고 할 것 없이 너무 아파서 선담이 자신을 붙든 은협의 팔을 절박하게 붙잡았다. 그러나 떨어지는 것은 대답이 아닌 무지막지한 주먹이었다. 이성을 잃은 은협은 손바닥이고 주먹이고 할 것 없이 선담의 얼굴을 내리긋고 거침없이 배까지 때리기 시작했다. 뒤가 찢어지는 고통을 잊을 정도로 처참하게 맞았다. 불같이 뜨거운 길을 열고 그의 음모가 철썩 붙었다. 찢어진 살점으로 성기가 들이찬 것이다. 선담이 고통으로 이를 물며 시트를 말아 쥐었다. 연한 주름은 피범벅이 되어 너덜거렸고 두 팔은 공중에서 허든댔다. 치부에 힘을 주고 침입을 막을라치면 더한 힘으로 밀고 들어와 살갗이 북, 하고 헝겊처럼 찢어졌다. 고통보다는 잃어가는 감각에 소스라쳐 선담이 온몸으로 날뛰었다. 생비늘이 벗겨진 생선처럼 하얀 배를 까뒤집힌 채 숨도 못 쉬고 퍼덕거렸다. 방금 전 짓거리와는 완전히 달랐다.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통나무같이 굳은 몸이 살려달라고 들썩였다. 정신 사납게 맞고 뚫리고 우는 동안 은협의 고함이 빗발쳤다.

“이 멍청아! 왜, 내 맘을 몰라!”

“자, 잘못했어…! 그만! 흐윽……!”

“너와 내 새끼가 기형아라도 좋냐! PTA사에서 손해배상이라도 청구하면 네 맘이 편하겠어! 왜 안 되는 일가지고, 그깟 실험작 하나가지고 애를 먹이느냐고! 병신 같은 걸 낳아서 누가 좋으라고!!!”

“잘못했어… 선배, 잘……!”

빡! 관자놀이로 불세례가 떨어졌다. 허억, 하고 선담이 제 얼굴을 감싸 쥐며 고통에 헐떡거렸다. 은협은 미간을 빽빽하게 일그러뜨리며 선담을 패만하게 밀어붙였다.

“PTA가 흔들리는 지금 우리한텐 출자단체가 없으면 실험이고 뭐고 없어! 후원위원장이 연지애 아버지라고 몇 번을 말해줘야 돼! 네 뱃속에 달린 인공자궁이 쓸모가 없어진다고 몇 번을 말해줘야 알아듣겠냐고!”

“쓸모없어져도, 윽, 좋아……! 난, 난 상관없어!”

상관없다는 말에 은협이 이를 악물었다.

“웃기지마라, 홍선담. 난 네 배에서 나오는 내 새끼를 꼭 봐야겠어ㅡ…!”

그 말에 몸서리치던 선담이 잠시 움직임을 멎었다. 떨림이 손끝에서 발끝까지 죽 이어졌다. 은협의 몸에서 분출하는 끝 모를 위압감로 인해 선담은 거의 미친 사람처럼 넋을 놓았다가 이내 발버둥치기 시작했다.

“시, 싫어, 싫어! 선배한테서 이제 더 이상 정자 같은 거 안 받아, 싫어ㅡ!”

은협의 눈이 시퍼런 색으로 돌변했다. 이번엔 주먹대신 흉기 같은 남근이 퍽, 하고 엉덩이를 때렸다. 살갗이 죽 찢어지는 느낌과 함께 핏물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것 같았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선담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잇몸을 물었다.

“홍선담. 사람 속이나 뒤집히게 만들고……. 넌 그 고집부리는 병 좀 고쳐야 돼……!”

또 한번, 살집을 울리는 소리가 공기를 가르며 선담에게 떨어졌다. 몸 안에서 이루어지는 파괴와 밖에서 이루어지는 파괴가 절묘하게 맞물리는 순간, 차라리 죽여 달라고만 싶었다. 이렇게 괴롭힐 거면 차라리 죽여 달라고 외치고 싶었다.

창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완벽한 겨울을 알리는 세찬 폭우였다. 

그리고 그 빗소리에 갇혀 홍선담의 절규는 바깥세상으로 나가지 못했다. 혹독했던 십대 이후 최은협이 처음으로 다시 짐승으로 돌아가 홍선담을 산채로 삼킨 날이었다. 홍선담의 눈물처럼, 최은협의 눈물처럼ㅡ 비는 그치지 않았다.

춥고도 모진 날, 귀중한 실험체를 버릴 수도, 설득할 수도, 사랑해줄 수도 없었던 증오는 결국 자궁과 가장 가까운 육체를 집요하게 파먹었다. 길고 긴 폭력의 시간보다 사람으로서의 자부를 붕괴시키는 이쪽이 더 빨랐다. 

뱃속의 자궁은 빠르게 붕괴됐다. 

어차피 처음부터 알몸으로 최은협 앞에 섰던 홍선담은 아주 어렸을 적부터 그에게 다 보여주었고 다 먹혀주었다. 그 앞에선 아꼈던 것이 없었다. 그렇기에 더욱더, 네가 도통 내 말을 듣지 않아 힘들고 괴롭고 네가 밉기도 하다며 아프게 난도하는 최은협은 홍선담의 자궁에 깊이 박혔다. 

뇌도, 심장도 아닌 그의 자궁에. 

사랑하는 사람의 흉기로 인해 찢어지고 상처받아 벌어진 붉은 자궁의 심천까지, 

깊게 박혔다.

- - - -

“네가 좀 도와줘.”

“뭐?”

불을 붙이려던 연백진이 라이터를 내려놓았다. 늦은 저녁이었다. 

석재의 집으로 돌아온 두 남자는 선담을 조심스레 뉘여 놓고 각자 눈을 붙였다. 밤을 꼴딱 샌데다 예정과 다르게 수술 후 바로 환자를 옮겨야 했던 그들은, 서인표의 연줄을 타 응급차를 빌려오고 깨끗한 새 침구류를 장만하는 데만 오후 내내 진을 뺐다. 겨우겨우 집에 도착하자 저녁 7시였고 아주 정신없이 곯아떨어졌다가 눈을 뜨니 다시 한밤중이었다. 

그간 선담은 한번도 정신을 들지 못했다. 열도 내렸고 호흡도 안정되었지만 아직 눈을 뜨기엔 이르지 싶었다. 

“놀라는 척 하지 말고 좀 도와줘.”

선담의 상태를 확인하고 나온 석재가 담배만 벅벅 피우는 백진에게 건넨 말이었다.

“선담이를 보살펴야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내가 병원을 때려 칠 순 없거든. 큰아버지께 폐를 끼칠 수도 없고. 게다가 솔직히 아무리 용을 쓴대도 내과의만 하겠냐. 혹시 무슨 일 생기면 서인표 선배님도 불러야 하는데, 사실 난 잘 모르는 사람이고.”

“그게 이유냐? 언제는 일생에 처음 만난 친구라는 둥, 어쩌구 지랄하더니 결국 저 꼬맹이 보살피는 게 혼자서는 벅차다는 거 아냐.”

연백진이 말 가리지 않고 터프하다는 사실이야 학과 내에서도 유명했으니 그러려니 했지만 감정이 상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넌 이 상황이 안 보이나본데 저 애 지금 배 가르고 7개월짜리 핏덩이 떼어냈어. 맞기도 많이 맞았고. 앞으로 정신 들면 알아내야 할 것도 있고. 많이 아픈 앤데 솔직히 내가 뭘 알아야 도와주던지 하지.”

“넌 의대 공으로 다녔냐? 이래서 정신의과 놈들이 싫어. 날로 먹는 새끼들.”

“그러지 말고 좀 도와줘. 애들이라면 껌벅 좋아 죽으면서 왜 그래? 소아과 나오고 너 지금 하고 있는 거 없잖아. 이럴 때 선행도 베풀고 그래라, 좀.”

“너 출근하고 없는 동안 애보기 하라고? 와, 정석재, 이제 보니 할 말 다 하고 사네.”

백진은 거리낌 없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야, 환자 있는데 무슨 짓이야!”

“지금까지 잘만 피웠는데 뭐가. 안방까지 연기 가지도 않는다.”

“그래도 꺼! 이제부터 환자 돌봐야 할 놈이! 끊어, 끊어!”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석재를 바라보던 백진은ㅡ이쯤에서 농담을 칠 법도 한데ㅡ말이 없었다. 그는 연기를 한 모금 뱉더니 비가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짙은 밤하늘을 적시며 굵은 빗줄기가 추적추적 떨어지고 있었다. 조급증 걸린 사람마냥 석재가 조건을 내걸었다.

“너한테 보수를 준다는 것도 웃기니까 네가 지금 내 부탁 들어주면 나도 네 부탁 들어주는 걸로 하자. 친구 좋다는 게 뭐야, 연백진. 여기까지 개입한 이상 네가 발 뺀다고 속 편할 것 같아? 아닐걸. 오히려 선담이 안부 궁금해서 나한테 물어보고 그럴걸?”“장담하지 마라.”

백진은 뭐가 그리 심각한지 한숨처럼 또 한번 연기를 뱉어냈다. 우뚝한 콧날을 지나 연기가 천장으로 스멀스멀 올라갔다. 그가 꽤 오래 침묵하자 석재는 애가 탔다. 얼마 전 의료사고를 내 가운을 벗은 놈이니 갈등하는 것도 십분 이해했지만 이건 다른 이야기였다. 석재는 또 재촉하기엔 뭣해서 넌지시 혼자 중얼거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모르겠어. 떠나기 전만해도 굉장히 행복해보였는데, 저 드레진 녀석이 뭐가 그리 무서워서 최은협이고 뭐고 다 집어던지고 여기까지 왔는지는……. 좀 연약해 보여도 실지로는 안 그래. 그렇다고 아주 모질게 강한 것도 아니었지만 애가 점잖고 괜찮은 애야. 제 할일 묵묵히 잘하고 순하고 착하고, 같이 있다 보면 사람을 홀딱 빠지게 한다니까. 정말 고운 애다.”

“그만해, 새끼야. 뭐 더 갖다 붙인다고 내 맘이 변할 줄 아냐.”

“백진아!”

석재의 애원 아닌 애원에도 그는 무심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

다 틀렸나보다. 석재는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감쌌다. 상대가 안 된다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내일은 큰아버지께 병원을 그만두겠다고 해야겠다. 꼭 신세지고 있는 병원 때문이 아니라도 선담을 간호하는 것 자체에 자신이 없었지만, 저놈도 가끔씩 와서 도와주는 것 정도는 해줄 것이다. 선담이 중요한 사람인만큼 사실 백진도 소중한 사람이라 석재는 되도 않는 투정은 그만두기로 했다. 

“피곤할 텐데 그만 가봐. 어제오늘 정말 고마웠다.”

깨끗하게 포기하고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그 와중에도 연백진은 담배를 또 꺼내 물었다. 

“마저 피우고.”

“나가면서 펴라. 연기 들어 갈까봐 계속 신경 쓰여. 주차장까지 배웅할게.”

“돛대니까 좀 기다려.”

고래심줄 고집인 건 알지만 이건 때와 장소를 가릴 줄도 모른다. 섭섭하게 생각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게 무색하게 석재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야, 생각이 좀 있어봐라. 다섯 걸음만 움직이면 복도야. 나가, 나가자, 얼른.”

“내가 왜 나가.”

“그럼 여기서 눌러 살거냐?”하고 석재가 신경질적으로 따졌다. 그러나 이내 석재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눈을 통해 백진의 말에 다른 의미가 숨어있다는 걸 깨달았다. 석재의 얼굴이 화색으로 번지자 그가 멋쩍게 웃었다.

“마지막 담배정도는 느긋이 끝내게 해줘라. 환자 돌보려면 어차피 제대로 태우지도 못한다. 아, 진짜. 귀찮은데. 의리파는 이래서 안 돼.”

석재가 백진을 격하게 끌어안았다. 덩치가 남산만한 두 남자가 격하게 끌어안자 매우 어색했지만 어쨌든 포옹했다. 백진은 담뱃불이 닿을까봐 꽁지를 손바닥 안에 가두고 팔을 들었다. 그리고는 장하다고 등을 토닥여주는 석재를 밀어내며 흉흉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떨어져라. 곰 같은 사내놈 붙는 건 별로니까.”

“무슨 말이든 해라. 야, 진짜 고맙다!”

“떨어지라니까.”

“필요한 거 있으면 말만 해. 먹는거, 입는거, 자는거, 뭐하나 불편하지 않게 해줄 테니까.”

“알았다, 알았어. 지금 보니 완전 지 좋을 때만 적극적이군.”

잘못했다간 옆집에서 항의가 들어올 정도로 석재는 크게 웃었다. 얌전하던 인간이 저렇게까지 기쁨을 표현하는 건 또 처음 봐 연백진도 허탈하게 웃어버렸다. 두 남자는 웃음소리 때문에 시끄러워서라도 선담이 정신을 차리지 않을까 조금은 기대해보았지만 여전히 감감무소식이었다. 

마지막 담배니까 조용히 태우겠다던 부탁이 민망하게, 연백진은 필터의 반도 빨지 못하고ㅡ짐을 가지러ㅡ차에 올라야했다.

-

선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는 물론이거니와 온몸이 무겁고 뼛속까지 아파 저절로 눈이 떠졌다. 

밤인가. 눈앞이 캄캄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알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칠흑 같은 어둠에 대비된 피부가 평소보다 더욱 허예보였다. 어지간히도 창백한 피부라고 생각하며 선담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까부터 배며 허리며 할 것 없이 묵직하게 아팠다. 선담은 앉은 채로 하지를 들여다보았다. 정확하지 않은 부분에서 긴 핏줄이 이어져 있었다. 잠시 동안 그것이 탯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 탯줄은 꽤나 멀리멀리 뻗어나가 있었다. 

선담은 엉거주춤 앉아 있다가 자리에서 힘겹게 일어나 탯줄을 거둬내며 검은 길을 따라 걸었다. 탯줄을 차곡차곡 감으며 한참동안 걸었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어느샌가 배는 홀쭉해져 있었다. 이 길을 따라 걸으면 그렇게나 꿈꾸던 아기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설마 태몽일까…?’하고 중얼거리기도 하며 그렇게 한참을 걸었다. 

검은 언덕 끝머리에 작은 고깃덩어리 하나가 있었다. 탯줄도 거기서 끝나있었다. 선담은 조심스럽게 허연 덩어리에 다가갔다.

아기였다.

아버지이자 어머니인 그를 꽤나 오래 기다리고 있었는지 아기는 그 장소가 매우 익숙하다는 듯 평온하게 앉아있었다. 말간 얼굴에 분홍색 볼을 하고 웃고 있었다. 꿈에서나 보던 천사 같은 모습이었다. 1104호 천정에 붙어있던 연두색의 천사보다 훨씬 예쁜 천사였다. 손가락 열 개에 발가락 열 개. 눈도 두 개였고 귀도 두 개, 입은 하나……. 아무데도 아파보이지 않았다. 눈물이 나려했다. 

‘애기야, 어디 아프지는 않아……?’

아기의 볼을 콕콕 찔러보다 살 오른 뽀얀 볼을 감쌌다. 뒤통수에만 조금 난 숱 없는 머리털을 쓰다듬었다. 솜처럼 부드럽고 가벼웠다. 달구어진 눈에서 눈물이 툭툭 떨어졌다. 아기를 발견한 후에도 여전히 몸이 아팠지만 적어도 가슴이 아프진 않았다. 선담은 어설프게나마 그 새하얀 아기를 안아들었다. 아기는 방긋방긋 웃으며 다리를 굴렀다.

제발 꿈이 아니었으면. 

어디로 가야할지도 모르면서 선담은 다시 암흑 속에 발을 디뎠다. 아기와 함께 걷다보면 기대어 쉴만한 좋은 곳이 나오지 않을까. 어쩌면 은협을 만날지도. 제 아무리 최은협이라도 이렇게 예쁜 아기를 본다면 마음이 풀어져 화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선담은 기대에 부풀어 싱긋 웃었다. 그는 아기를 소중하게 안고 길을 걸었다. 어느새 팔에 감아두었던 핏물 그득한 탯줄도 사라지고 없었다. 길은 끝이 없었다. 허나 걸어도 걸어도 이상하게 지치지 않아 그는 쉬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손을 더듬어 보았는데,

아기가 없었다.

선담은 몹시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동아줄 같은 게 다시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탯줄이었다. 선담은 반자동적으로 탯줄이 이어져있는 부위를 내려 보았다. 자신의 다리사이에서 탯줄이 다시 나와 허공을 길게 가르고 있었다. 선담은 그 탯줄을 쫓아 달렸다. 달리고 또 달렸다. 다행히 탯줄이 끝나는 자리에 아기가 있었는데, 그 아기는 아까전의 그 아기가 아니었다. 

‘어, 어떻게……. 저기, 애기야. 아까 전에 그 애기는 못 봤어……?’

대답이 돌아올 리 만무했다. 어쩔 수 없이 선담은 아까완 다른 아기를 안고 걸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이 되면 손에서 감쪽같이 아기가 사라졌고 또 탯줄만 남아있었다. 숨이 턱까지 차도록 달려가서 아기를 찾아놓으면 아기는 자꾸 다른 아기로 변해있었다. 무언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일단 아기를 챙겨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우선되었다. 

때문에 기계처럼 반복적으로 검은 길을 뛰어다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것에 지나지 않아 새카만 바닥에 허물이 떨어져있는 것을 발견했다. 묘하게 허여멀건 한 것이 꼭 사람가죽 같았다. 선담은 제발 허물들이 진짜 살가죽이 아니기를 바라며 하염없이 길을 걸었다. 아기가 없어지면 되돌아가 아기를 데려오고, 또 없어지면 또 걷고, 달리고…… 끝이 없었다. 허물을 벗듯이 자꾸 다른 모습을 하는 아기와 그 껍질들이 무릎까지 쌓일 때까지, 선담은 쉬지 않고 뛰었다. 백만 번을 뛰었다한들 아기를 데리고 일정영역 밖으론 나가지도 못하면서도 미련이 남아 자꾸 뒤돌아 뛰었다. 검은 바닥을 돌고 돌았다. 그 짓을 반복했다.

…ㅡ알고 보니 완벽한 지옥이었던 것이다.

-

눈을 떴을 때에도 선담은 여기가 꿈인 줄로만 알아서 한참동안 소금 맞은 지렁이처럼 몸을 꿈틀거렸다. 꿈과 다른 것이 있다면 손가락 하나 꿈쩍할 수 없는 고통 때문에 숨을 내쉬기조차 힘들다는 것. 그는 담요에서 빠져나오려던 의지를 버렸다. 현실로 돌아오자 눈물을 닦을 기력은커녕 침 삼킬 기력도 없었다. 무력하게 천정을 바라보며 눈물만 꿈벅꿈벅 떨어트리는 게 다였다. 몹시 힘들었다. 뱃가죽에 누군가 칼을 꽃아 주욱 그은 것처럼 활활 타오르며 아팠다. 지금 누워있는 천장은 생전 처음 보는 벽지를 하고 있었다. 전에 있던 집도 아니고 연구실도 아니고 은협과 살던 집도 아니었다. 울지 않으려고 입술을 악물고 겨우 고개만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이보리색으로 도배된 방은 꽤나 넓었고 원목 책상과 책장, 장롱과 장식장, 스탠드테이블이 있었다. 굉장히 깨끗한 곳이었지만 배치된 가구들을 봐서는 아무래도 사람이 사는 곳 같았다.

여기가 어딜까…. 은협에게서 도망친 후의 기억은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내가 목적지에 제대로 도착을 했던가? 혹시 다시 잡혀서 주사시술을 한 걸까? 그럼 은협 선배는? 소장님, 팀장님은…? 머리가 지끈거리고 어쩐 일인지 코도 막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꿈에서 아팠을 때보다 더욱 생생하게 고통스러웠다. 그러다 선담은 문득, 자신의 배가 매우 가볍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ㅡ!”

배가 푹 꺼져있었다. 심장이 뚝 떨어지는 느낌. 

선담이 겁도 없이 자신의 배를 만져보려는 순간, 문이 열렸다.  

“어, 꼬맹이 일어났다.”

낯선 남자가 목에 타월을 두른 채 문을 열고 들어왔다. 선담은 퍼뜩 놀라 토끼 같은 눈으로 남자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남자도 얼마간 선담과 시선을 교류하더니 가까이 다가왔다.

연백진은 혀를 찼다. 의식을 차렸음에도 일어나지 못하고 누워만 있는 걸로 봐선 아이에게 가해지는 고통이 아직도 상당한 듯싶었다. 여전히 식은땀을 비실비실 흘리고 있었고 손발이 찼다. 심하게 폭행당하고 비바람에 쫓기듯 도망 나와 7개월이나 된ㅡ게다가 보통의 태아보다 훨씬 큰ㅡ생핏줄을 뜯어냈으니 멀쩡히 살아있는 게 용할 터였다. 그는 의자를 끌고 와 앉아 선담을 바라보았다.

“고생했다. 무서웠지?”

눈물범벅인 선담의 얼굴이 익숙한지 백진은 티슈로 삭삭 닦아주며 선선하게 웃었다. 

“꼬박 나흘 자면서 너 많이 울었다. 근데 울면서도 잘 깨진 않더라.”

냉정해 보이는 얼굴 이면에 따듯한 손끝을 가진 사람이었다. 날카롭게 뜨여진 눈동자 어딘가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최은협의 잔존이 겹쳐 보여 선담은 그만 낯을 찡그렸다. 얼굴을 닦아주는 손길을 피하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꿈에서 놀란 가슴 때문에 눈물이 주체 없이 자꾸 흘렀다. 눈물 따위 모두 소진해버린 줄 알았는데 뭐가 아쉽다고 눈만 뜨면 번번이 울어대기만 하는 건지. 선담은 미적대며 자꾸 도리쳤다.

“그만 울어라. 울면 더 아프다.”

이 남자는 누군데 이토록 침착한 걸까. 도대체 어딜까 여기는. 그리고 애기는, 애기는 또 어떻게 된 걸까. 내 애기는ㅡ….

갈증에 허덕이는 사람처럼 입술을 움찔움찔 개폐하며 몇 차례 주저하고 망설이다가 결국엔 물꼬를 터트리듯 선담이 입을 열었다. 

“…제, 애기…… 애기는……”

연백진은 쓰게 웃었다. 간신히 성인식이나 치렀을 땅꼬마주제에, 남자주제에, 그래도 또 핏줄이라고 눈뜨자마자 역시 제 새끼부터 찾는다. 이래서 이 녀석이 눈을 뜨기를 정석재 못지않게 간절히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만 더 늦게 일어났으면 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막막해질 게 뻔했으니까. 백진은 헛기침을 몇 번했다.

“석재야! 정석재!”

‘정석재…….’ 선담이 익숙한 이름이라고 멍하니 생각할 무렵 쿵쿵쿵 발소리가 나더니 열린 문으로 낯익은 얼굴이 불쑥 들어왔다. 

“애 깼다.”

“선담아!”

퍼뜩 떠올랐다. 불곰! 불곰이 맞았다. 선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석재는 환희하는 얼굴로 다가와ㅡ가까이 앉아있는 백진을 밀쳐버리고ㅡ의자에 앉았다. 어딜 나갈 참이었는지 세수를 한 얼굴엔 물기가 베여있었다. 곰발바닥처럼 두텁고 뭉실뭉실한 손이 덥썩 선담의 손을 끌어다 잡았다.

“선담아, 오랜만이다. 응? 괜찮아?”

“부, 불곰… 진짜, 불곰… 아니 석재 형이야…? 나, 여긴…”

“내 집이야. 기억 안나? 네가 찾아왔잖아. 비오는 날 밤에.”

“아…….”

석재를 보고 당황 반 기쁨 반이었던 얼굴이 순간 흙더미처럼 검게 변했다. 무언갈 떠올렸을 테다. 그 변화를 알아차렸지만 길게 말하기 싫어서 석재는 화두를 돌렸다.

“너 감기래. 의사선생님이 오래 쉬어야 한댔어. 내 집이 네 집이나 마찬가지니까 편하게 생각하고 지내. 난 출퇴근하지만 여기 내 친구가ㅡ”

“애기는?”

“……. 응?”

“애기, 나 애기 있었잖아…….”

기력이 모자랐는지 선담이 헛소리를 찍 했다. 연구실 사람도 아닌 일반인에게 뜬금없이 애기타령을 하니 그게 증거였다. 물론 두 남자야 사정을 훤히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물어볼 줄은 예상치 못했다. 당황하여 동시에 말을 잃자 선담의 눈에 담긴 동공이 정처 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백진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올게 왔구나, 그러게 어색하게 말주변은 왜 돌려. 어차피 다 말해야 할 건데. 

석재가 대답을 꺼리자 선담은 재촉하듯 잡힌 손을 흔들었다. 방안에는 응? 응…? 어딨어…? 하고 불안에 가득 차 되묻는 목소리만 간헐적으로 들렸고, 누구도 말이 없었다. 

사실 물어야 할 쪽은 이쪽이었다. 멀쩡한 사내의 몸으로 7개월 된ㅡ그리고 사망한ㅡ태아를 품고와 주변 사람들을 경악케한 홍선담에게야말로 물을 말이 산더미였다. 그러나 초두를 잘못 잡은 사람은 밀리기 마련이다. 일방적으로 묻기 시작한 선담 때문에 석재는 난감해하며 몇 번이나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니까… 그게……”

“배가, 확 꺼졌어. 아직 7개월이었는데…… 중요한 애야. 애기, 낳은 거야……?”

진심으로 그걸 낳을 수 있다고 여겼나보다. 석재는 어색하게 웃었다. 이보다 어색한 표정이 어디 있을까. 시간을 끌면 안 되는데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서 뜸을 들였다. 전후사정은 모르지만 흠씬 두들겨 맞은 몸으로 선담이 비바람을 뚫고 이곳에 온 것은, 아마도 순전히 뱃속의 태아 때문이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대고 네 아기는 이미 비닐봉지에 들어갔다고 말하라고? 그럴 순 없었다.

“일…단은 선담아, 네가 기운을 차려야 돼. 보니까 나한테 찾아온 것도 제대로 기억 못할 정돈데, 네 몸 챙기는 거 말고 또 어디다 신경을 쓴다고 그래.”

“그래도…… 나보다는, 난 괜찮은데. 근데 애기는……”

“선담아.”

그때 뒤에서 백진의 한숨소리가 재차 들렸다. 아차하는 순간 석재가 저지하기도 전에 우려한 대로 그가 한마디 날렸다.

“너 유산했어.”

잠시의 정적, 그리고 “뭐…?”하고 선담이 입만 뻐끔거렸다. 처음엔 어디서 난 소리인지도 몰라서 허공만 바라보던 그였다. 어디 정신병원에 수감된 환자 같았다. 그 모습을 보고 석재가 이를 악물었다. 백진은 이렇다 할 동요 없이 선담을 바라보며 되짚어주었다.

“떼어 냈다. 너 쓰러진 사이에.”

정해진 순서처럼 푸르르, 맞잡은 손이 심하게 떨려왔다. 석재의 몸까지 진동할 정도로. 

석재가 미간을 좁혔다. 좋은 말 다 내버려두고 또 저런다. 원래 말 안 가리기로 소문난 건 알지만 이런 와중에서도 구태여 저렇게까지 솔직해야 할까싶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대처법이 옳은지는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없었지만, 그런데도 어쨌든 맘에 안 들어 석재가 백진을 노려보았다.

“…ㅡ안 돼…….”

남자들의 미묘한 시선이 엇갈리는 사이, 선담이 속삭였다.

“안 돼요ㅡ….”

“서, 선담아….”

눈물이 차오르더니 역시나 주룩 흘렀다. 선담은 아주 짧게 “꿈이…….”하고 작게 중얼거리더니 등을 돌렸다. 

잠시 움직이는 것도 버거운 몸뚱이.

이 고통은 허락도 구하지 않고 자궁을 가른 죄악과 그에 투영된 형벌이었다. 

아래가 찢어져 내려앉을 것만 같은 극한의 통한. 

배만 가른 게 아니라 자궁의 주인까지 끌어낸 죄악이었다.

기나긴 탯줄. 그것은 역시나 꿈이 아니었다.

남들 앞에서 우는 건 싫은데, 이렇게 운다고 어디가 덜 아프거나 한 것도 아닌데. 그런데도 서럽고 죄스러워서 선담은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빨리 저들이 방에서 나가주기를 기다리며 숨을 죽였다.

“선담아…….”

석재는 안절부절 못하며 돌아누운 선담의 뒤에서 서성거렸다. 무언가 말을 해줄라치면 선담은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고 그럼 석재도 풀죽은 얼굴로 선담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가 백진을 쏘아보았다. 훌쩍이는 소리만 허공에 맴돌자 석제는 괜스레 마음이 착잡해져서 오히려 백진에게 무슨 말이라도 해보라는 눈치를 주었다. 그러자 백진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저를 가리키더니 석재가 고개를 끄덕이자 더욱 난감한 빛을 했다. 사실을 말해주니까 쏘아볼 때는 언제고 다시 찾나 싶었다.

“실험태아였다는 거 안다. 그리고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실험의 오차였는지 환경의 영향이었는지 어쨌는지 몰라도 어차피 태아는 죽어있었으니까. 넌 인사불성이었고, 우린 그저 해야 할 일을 한 거다.”

연백진의 낮고 어두운 목소리가 적막과 부딪쳤다. 반사되고 반사되어 돌아오는 빛처럼 연백진은 마치 혼자 말하는 기분이었다. 돌아누운 채 꼼짝도 안하는 선담은 모든 소통을 거부하고 있었다. 결국 석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초조한 듯 두 손을 모으고 선담을 지켜보다가 방을 나섰다. 잠시 후 쫓아 나온 백진이 부엌으로 들어가는 석재의 등을 탁 쳤다.

“야, 저 꼬맹이가 짝사랑 대상이냐?”

“농담 좀 가려서 해라.”

눈가가 벌게진 석재가 안경을 벗으며 화풀이하듯 대꾸하자 백진도 잔에 담긴 냉수를 벌컥 삼켰다. 대수롭잖게 구는 그에게 석재는 작게 윽박질렀다.

“넌 왜 기름을 붓고 그래?”

“뭘.”

“어른이 돼가지고 말하는 게 왜 그래? 실험용이든 어쨌든, 솔직히 나도 저 심정은 이해 안 되지만, 어쨌든 큰 수술 마치고 애기 어딨냐고 우는 애 앞에서 할 소리가 따로 있지. 네가 그러고도 전직 소아과 의사야?”

“숨넘어가겠다, 천천히 말해.”

백진은 어르듯 대꾸한 뒤 물을 한잔 더 따랐다.

“어차피 다 알게 될 걸 뭐 하러 감싸고돌아. 지금은 놀라서 저래도 좀 지나봐라. 차라리 일찍 알게 된 게 다행이라고 할 거다. 지독한 일을 당한 건 사실이다만 어차피 실험배안데 사내놈한테 얼마나 애틋한 맘에 있었을라고.”

“……….”

선담은 조금 다를지도 모른다고 말하려다가 석재는 그만두었다. 남의 성취향에 대해서 일일이 밝히고 다닐 만큼 개념이 덜 차진 않았다. 아무리 남자에게 사랑받는 게 익숙할지라도 단순히 아이까지 갖고 싶어 할 그런 경지까지 뛰어 넘었을 거라 연관 짓지 않았다. 백진 말대로 몸속에 꽉 들어차있던 게 빠져나가버리니 놀라서 저러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래도 백진의 처사가 너무 몰인정하다고 생각하는 것엔 변함없어 석재가 찌푸린 미간을 문질렀다.

“하여튼 너 연백진, 넌 정말 그 터프한 성질부터 죽여야 해. 앞뒤 안 가리고 저지르고 말도 막하고 그러니까 여자들이 줄줄이 서다가도 일정 기간 지나면 다 땅으로 꺼져버리지.”

“너나 잘해. 여자는커녕 남자한테도 말 못 걸어서 빌빌대는 주제에.”

“너랑 나랑 좀 섞었으면 좋겠다.”

그러자 “1/2로 믹스하면 딱 일 텐데, 나한테서 더 가져가고 싶은 건 없어?”하고 웃더니 백진이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왜 저러나 싶어 지켜보니까 아무래도 습관처럼 담배를 찾았다가 금연약속이 생각난 듯했다. 손이 민망해진 그는 석재를 빼꼼 눈치 보더니 “출근 안하냐?”라고 물었다. 벌써 8시 30분이었다. 버스로 30분 거리라지만 5분만 늦어도 교통체증에 시달리게 되거나 5분만 일찍 타도 한가로운 주행을 즐기게 될지 모르는 게 아침출근시간대다. 자신이 나가면 저놈이 또 아무것도 모르는 척 담배를 뻑뻑 피워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면서도 큰아버지께 폐를 끼칠 수 없어 석재는 주섬주섬 옷을 꿰어 입었다.

- - - -

“이ㅡ! 허투루 빠진ㅡ!!!”

작고 주름진 몸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시커먼 구덩이보다 더 깊고 컸다. 길호문은 붉어진 혈관이 이마에 불툭불툭 돋아나 혈압이 터질듯 팽창해 있었다. 가끔씩 사래가 걸려 크게 콜록대기라도 하면 지켜보던 이들은 혹여 그가 쓰러지지나 않을까 안절부절 못했다. 시뻘게진 얼굴로 연신 테이블을 탕탕 쳐대던 길호문은 기도 안찬다며 소파 주변을 빙빙 돌다가 절규에 가까운 고함을 또 버럭 지르고 말았다.

“임상실험! 임상실험 실험군이 사라진다는 게 말이 돼! 이 한심한 놈들아! 이걸 어떻게 한단 말이냐! 이걸 어, 이걸 어떻게 해야 해!!!”

길호문은 제 성에 제가 못 이겨 머리를 움켜쥐었다. 그때 똑똑, 소장실 문을 두들기더니 중년의 여비서가 반쯤만 상체를 밀고 들어와 모두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소장님, PTA사 EEC지원 대리인이 아까부터 통화를 기다리고 있습니다만….”

“지금 이 상황에 그것 하나 제대로 못 둘러대?! 비서직 하루 이틀 해보나!!”

“하지만 소장님, 매우 급한 일이라고,”

“나가 있어!!”

옆의 재떨이라도 집어던질 기세라 그녀는 움찔 놀라 문을 닫고 사라졌다. 잠시 분산되었던 노기가 다시 집중포화 될 걸 아는 일원들은 모두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전상목 팀장을 비롯한 다른 주요 임직원 모두와 함께 그 자리엔 최은협도 있었다. 성난 황소처럼 씩씩거리며 주변을 한 바퀴 빙 둘러보던 길호문의 시선이 한곳에 맺혔다.

“최은협이. 마지막으로 홍선담 목격한 사람이 너야. 근데 네가 모르겠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 하냐!”

“소장님. 은협이 잘못만 있는 게 아니잖습니까. 그렇게 따지면 관리감독이 허술했던 저희 모두를 책문하셔야죠….”

전상목이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길호문이 “시끄러!”하고 고함을 쳤고 동시에 은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말로 모릅니다.”

“미치겠구만!!”

길호문이 이마를 짚고 테이블에 기대섰다. 모른다고만 일관하는 최은협 때문에 한풀 꺾이고 말았는지 그는 낙담을 가득 담은 얼굴로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자 주변이 다시 웅성웅성 거리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디로 갔느냐는 둥, 어떻게 해서든 잡아야 하지 않겠냐는 둥의 융성 없는 속삭임이 다였다. 옆에 서 있던 전상목도 최은협의 어깨를 두드리며 속삭였다.

“선담이에게 무슨 일이 없어야 할 텐데. 걱정이다, 은협아.”

“……….”

“혹시, 소장님께만 말씀드려야 할 사항이 있는 거면 내가 다들 데리고 나갈 테니까 그렇게 할래? 자리 비켜줄까?”

은협은 팀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전상목은 행방이 묘연한 선담도 물론이거니와 금방이라도 고꾸라질 것 같은 저 영감도 걱정하는 빛이 역력했다. 평소에 길호문은 인자하고 웃음 많은 사람이었다. 그가 이렇게 화가 나서 할말 못 할말 제대로 가리지 못하는 정도면 대단히 큰 위기에 국면 했단 이야기가 됐다.

그렇다. 임상실험의 핵이랄 수 있는 모체가 사라진 것이다.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욕설이 난자하는 연구실내에서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 EEC 결성 이래 최초로 터져버린 내부문제는 소소한 에피소드라기엔 타격이 너무도 컸다. 실험은 물론이고 연구소 내 모든 활동이 중단됐다. 모체를 찾지 못한다면 1000여종으로 뽑아둔 샘플도, 선별한 기증정자도, PTA사와의 조약도, 지금까지의 피땀도, 모든 게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뿐인가. PTA사가 소송이라도 걸어오는 날엔 EEC 후원단체를 비롯한 정부에서까지 그들이 요구하는 피해배상액을 지불해야 할지 몰랐다. 그들이 만든 인공자궁의 위력이란 그런 것이었다.

길호문의 얼굴이 까맣게 타들어갔다. 정계에 힘을 좀 빌려서라도 수배를 해야 했다. 그러나 수배를 하면 언론의 노출을 각오해야했다. EEC팀이 노출되는 거야 상관없지만 도너를 잃어버렸다는 내용만은 절대 안됐다. 긴 시간동안 열심히 꾸려온 연구팀이 모체 하나가 도망갔다는 이유로 크게 휘청거렸다.

“어쩌면 소장님, 도너가 잠시 바람이라도 쐬러 나간 게 아닐까요? 한국에 들어와서 남들은 다 나가 놀고 쉬는데 혼자 갇혀있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어떻게 해서든 길호문을 달래려고 누군가가 뱉은 말이었으나 분위기는 험악해지기만 했다. 배가 남산만 해진 도너가 가긴 어딜 간단 말인가. 오히려 눈총만 산 입은 곧 침묵했다. 소장실 안은 도합 입이 쉰 개가 넘었지만 어느 때보다도 조용했다.

은협은 자신의 구두 끝을 내려다보았다. 그도 나름대로 선담의 행방을 머릿속으로 찾고 있었다. 짚이는 곳이 몇 있었으나 선담은 어린 시절부터 알바를 많이 한 데다 성격이 서글서글하여 알고지내는 지인이 은근히 많았다. 더욱이 늘 학업과 생계에 시달렸던 은협은 선담의 수다를 일정부분 무시해왔기 때문에 머릿속에 남은 게 없었다. 영국으로 출발하기 전날까지도 조잘거린 녀석을 분명 기억하고는 있는데 막상 떠올리려니까 기억나는 인물이 몇 없는 게 사실이었다. 그보다는 선담이 어디 길바닥에라도 쓰러져 있는 게 아닐까 하여 초조한 기분이 되었다.

“……….”

녀석에게 심하게 대한 건 사실이지만 녀석이 그 배를 해가지고서 도망을 칠거라곤 생각 못했다. 아픈 것에 극도로 민감해진 녀석이니 오히려 굴복할 가능성이 높다고 여겼는데 위험한 도주길을 선택할 줄이야. 연구실에서 쟁여주었던 비상금 10만원이 사라졌으니 택시로 달아난 건 그렇다 쳐도 그 배를 이끌고 도대체 어디의 누구를 찾아갔을 지가 궁금했다. 

“사과하려고 했는데…….”

은협이 아무도 듣지 못할 소리로 중얼거렸다. 거절당하면서도 밀어붙였던 섹스와 마찬가지로, 시도하기도 전에 거부당한 사죄 때문에 뱃속이 뒤틀릴 정도로 화가 났다. 그렇게까지 했으면 얌전히 포기하고 앉아있어야지 잠깐 집을 비운 사이에 달아나버렸다. 그 몸을 해가지고서는,

자신을 두고…… 자신을 남겨두고 달아나버렸다.

그날의 행위를 결코 후회하진 않았다. 자신이 손찌검을 해서 도망쳤을지언정 녀석은 맞을만해서 맞은 것이다. 순순히 주사시술에 참여했으면 좀 좋았을까. 상황이 상황이었으니 어쩔 수 없이 구타가 필요하기도 했다. 마지막에 가서는 손안에서 되살아나는 옛날의 습관 때문에 저도 모르게 더욱 중독되어 때렸던 것도 기억한다. 그럴 필요까지 없었을지도 모르지만 몸에 익었던 타성처럼 선담에게 손을 댔다. 그 주먹을 녀석에게 휘두르게 될지는 자신도 몰랐다. 아파하는 녀석을 보면서 가슴 한쪽이 무너졌는지, 지금에 들어선 감각이 전혀 없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있는 홍선담의 모습은 거의 실신하여 초점도 제대로 잡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파열돼 피가 새는 아래는 물론이고 온몸의 혈이 다 올라오고 있었다. 풀린 동공 아래로 고작 눈물만 흘리고 있는 모습이 절대 탈출 따위를 시도할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벌어진 다리를 오므려주고 시트를 덮어주는데도 반응이 없었다. 그러니…… 결코 있어선 안 될 일이지만, 정말로 도망치다 쓰러져서 지금 어딘가 길바닥에서 구르고 있을지도 몰랐다.

선담의 투정에 화가나 순간 저도 모르게 눈앞을 태우고 저질러버린 일이었다. EEC 관계자 누구도 알아선 안 되는 일이었고, 그래서 알아서 해결하려고 했는데 아예 사라져버릴 줄은 몰랐다. 그래, 자신이 저한테 그러는 모습은 아예 처음이었을 것이다. 많이 놀랐겠지. 가뜩이나 몸이 아프고 마음도 힘들었을 텐데 거기에 매질을 하고 합의 없이 교접질을 했으니ㅡ…. 목구멍 뒤에서 쓴맛이 올라왔다. 

태아는 어떻게 됐을까. 이미 너덜거리는 자궁이었다. 기형인 태아도 불안정했고 배도 많이 때렸으니 그렇잖아도 얇아 헐렁했던 자궁 안의 태아는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녀석의 뱃속이 많이 상했을 텐데 행방을 알 수 없으니 돌봐줄 수가 없었다. 최은협은 미치게 조마조마해져만 갔다.

자기라고 속편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순간만큼은 내 정자로 만들어진 내 새끼라는 개념보다는 그것이 기형아이고 곧 실험의 실패라는 입장이 강했기 때문에 선담의 맘을 알고는 있으면서도 이해하진 않았다. 녀석의 심정까지는 납득할 수 있었지만 고작 기형배아에게 온갖 애정을 퍼붓는 녀석의 행동은 이해할 수 없었다. 아기 자체를 잃는 게 싫다는 것 같아 또 만들어준다고 했지만 그래도 싫다고 하고,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망가진 실험태아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이미 죽였을 씨앗이었다. 그러니…… 후회는 없다. 후회는 없다.

“일단 소장님. 조금 기다려보는 게 어떨까요. 신고는 물론이고 수배도 할 수 없으니 저희가 일일이 찾아다니는 수밖에 없습니다. 다행히 최은협 씨가 홍선담이 갈만한 곳을 알려줄 수 있으니 비번 없이 팀을 이뤄서 저희가 직접 찾아나서는 게 어떨까요? 이제 곧 임신 8개월에 들어갑니다. 기형을 담은 자궁의 한계는 33주일로 측정되었었으니 일단 태아가 뱃속에서 죽으면 건강엔 이상이 좀 있더라도 오히려 뒷일은 수월할지도 모릅니다. 자궁을 강제로라도 벌리고 사해를 긁어내기만 하면 되니까요. 그때는 이전처럼 호락호락 넘어가주지 않고 말입니다.”

혈액부서 팀장의 말에 모두가 동감하듯 눈빛을 새로이 했다. 그러자 누군가가 손을 들어 자신의 의견도 내놓았다.

“도너가 주사를 거부하는 동안 샘플링은 다 나와 있었습니다. 새로 정비된 인공자궁에 1기 샘플을 맞출 때까지는 새 샘플을 준비할 필요가 없으니 일손이 꽤 많이 남습니다. 어차피 도너 없이는 샘플도 필요가 없으니 성 팀장님 말대로 갈만한 곳부터 저희가 자력으로 수사하기로 하죠.”

그러자 하나 둘씩 찬성하는 분위기로 바뀌어갔다. 결국 길호문은 PTA사에 새로운 시안을 보내는 등으로 시간을 끌기로 하고 일원들은 당장 홍선담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지금 모인 이 인원이라면 가능했다. 위기 속에서 오랜만에 단합을 맞은 것 같아 다들 조만간 모체를 찾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대세였고, 한국지사에서 추가된 일반사원 스무명도 추격현장에 끌고 나가자는 이야기도 나왔다. 뾰족한 수는 아니어도 딱히 기댈 데가 없어 결정을 내린 길호문은 당장에 일정을 짜는 열성적인 일원들을 불신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최은협은 주요참고인 취급을 받게 되었다. 사립탐정을 고용하면 이름과 출신학교만으로도 누구든 찾아낼 수 있다는 이야기가 오갔다. 그나마 좀 나은 방안이 나와서 풀어질 줄 알았던 긴장감은 이야기가 진척될수록 더욱 고조되었다. 은협은 선담이 자주 입에 올렸던 이름을 되살려 약 5명 정도로 추려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들의 행적을 밝힌다고 바로 선담을 쫓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어쩌면 선담은 처음부터 누군가를 찾아가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지인이름을 수백 번 갖다 대도 아예 못 찾을 최악의 상황이 발생할 것이다. 달리 방법도 없는데 협조를 안 할 수 없어서 은협은 내키는 대로 한명, 한명,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김강혁, 박원종, 이윤희, 박화윤…….”

마지막 이름은 조금 긴가민가했다. 유난히도 선담을 아꼈던 놈이었는데 MIU 의대 동기니 가장 쉽게 찾을 수 있는 놈이기도 했다. 이 이름이 맞던가.

“그리고…… 정석재.”

그때 누군가가 소장실 문을 박차고 뛰어 들어왔다. 아까 혼쭐이 났던 여비서였다. 어디서부터 저리 급하게 뛰어온 것인지 몰라도 머리가 헝클어져있었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머리를 맞대던 임원들이 오히려 길 소장보다 더 짜증스럽게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어느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듯 했다.

“소장님, 큰일 났습니다. TV 좀 켜보세요!”

그제야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채고 길호문이 서둘러 리모컨을 들었다. 비서는 “7번이요.”라고 말한 뒤 소장실 문을 닫고 들어왔다. ‘긴급속보’라는 타이틀이 띄워져있는 화면에서 엄숙한 얼굴을 한 앵커가 건네받은 서류를 살피더니 대본을 읽기 시작했다. 

[미국의 제약회사 PTA사가 한국시간으로 오늘 오전 9시, 국제기구 GN으로부터 자본분할 신청을 승인받았습니다. PTA는 지난 9월 경, 아프리카의 난민촌에서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졌던 희귀약물 실험이 뉴욕타임즈에 폭로되며 불법실험과 자금실험, 주가조작, 뇌사혐의가 속속들이 밝혀져 공식적인 활동에 지대한 영향을 받아왔습니다.]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은 화면에는 PTA사의 대표이사라는 자가 카메라 세례를 받으며 경직된 표정으로 자사의 현황과 전 세계가 품고 있는 오해에 대해 뻔히 보이는 변명을 늘어놓고 있었다. 화면이 사라지자 딱딱한 앵커의 목소리가 다시 찾아왔다.

[PTA 캐피털을 기반으로 추진되면 의료 연구단체들은 PTA사의 자본이 분할되는 시점부터 대다수가 독립된 단체로 분류될 것으로 예정돼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이에 미국정부는 이번 문제가 국가차원의 경제불안을 초래할 것을 대비해 PTA사의 향후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제야 길호문이 여비서에게 “전화 연결해.”하고 귓속말했다. 급작스럽게 터진 사변은 연구원들에게 패닉을 가져다주었다. 모체를 잃어버린 이 상황에 PTA사가 크게 휘청인단다. 지금까지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진 않을까하는 두려움이 팽배했다. PTA사가 자사에 직접적으로 연관되어있는 관계사는 지킨다 하더라도, 타국에서 밑천을 잡아먹으며 행해지는 임상실험 연구팀은 죄다 분할될 것이었다. EEC만이 아닌 실증실험팀, 가상실험팀 등은 모두 분열이다.

사면이 막힌 심정으로 길 소장은 최은협을 주시했다. 기민하게 눈초리를 느낀 최은협은 대수롭잖게 시선을 받아넘겼다. 길 소장은 초조한 듯 테이블을 두드리며 자리로 가 앉았고 홀로 생각에 잠겼다. 최은협에게서 홍선담의 도주가능한 행적지를 묻던 일원들도 묵묵히 머리를 굴렸다.

‘PTA가 망했다.’

말이 씨가 된다더니. 은협은 어이가 없어 허허 웃고 말았다. 폭삭 망하지야 않겠지만 이번에야말로 망했다란 표현이 딱 맞았다. 그러나 그것은 EEC도 다르지 않았다. 조만간 EEC를 지원해줄 ‘연합’후원회가 본격적으로 소집될 것이고 이 실험에 엄청난 기대를 품은 많은 스폰서들이 두발 벗고 나설 것이다. PTA의 자본줄이 위태위태한 시점에도 ‘인공자궁’이란 한 가닥 희망에 목을 맨 자들이 여기까지 이끌어주지 않았던가. 더욱이 길호문이 연지애를 자신에게 천생연분 남녀처럼 붙여놓은 꼼수가 효력을 발휘할 차례였다. 그 후견인 한 놈의 딸내미 때문에 도너가 도망쳤는데 말이다. 웃기는 노릇이었다.

문득, 최은협은 확신했다. 

이렇게 찾아낸다 한들 …ㅡ아마도 뱃속의 것은 죽었을 것이리라는 직감을 말이다.

- - - -

사람 많은 출근길을 오가면서도 꿋꿋이 입에 담배를 물고 다니는 몰지각한 뭇 남성들을 바라보며 석재는 백진의 담배 피는 얼굴이 떠올라 안절부절 못했다. 설마 자는 애 옆에서 말보로를 세 개비 입에 끼고 뻑뻑 피워대진 않겠지? 그놈은 선담이 콜록대며 일어나면 기분 좋게 해준답시고 직접 입에 담배를 물려줄지도 모르는 놈이었다. 전화를 해보고 싶어도 그놈 성격에 불같이 승질을 낼 것 같아서 석재는 힘없이 핸드폰을 주머니에 꽂았다. 이놈하고 씨름하고 지낸지도 벌써 9년차니 익숙했다.

한국정부주재의 MIU(Maggon institute of unification curriculum)대학교의 의대를 1년차로 졸업한 연백진은 ‘백람’의 넷째아들이란 타이틀로도 유명했지만 유력한 급진파로도 유명했다. 굴지의 세계기업 백람의 넷째아들이 사회적 급진파라니, 참 아이러니하게도 그랬다. 

어떤 그룹에서나 없는 듯 조용히 지냈던 석재는 재수를 해 들어온ㅡ소문 요란한 또래ㅡ백진과 실제로 마주칠 일이 없었다. 다만, 어쩌다 한번 참석했던 종강파티에서 공감 가는 주제에 좋은 반응을 보여주자 바로 호의적으로 돌아섰던 그를 기억하고는 있었다. 또한 굉장히 짓궂은 장난꾼으로도 여기고 있었다. 소문에 살이 붙어서 그런 것이려니 했는데 실제로 만나보니까 백진은 인간으로써 부릴 수 있는 장난질의 한계를 모르는 것이었다. 오히려 소문이 그를 과소평가하는 수준이었다.

연백진은 훤칠하니 어딜 가도 보기 드문 외모를 가지고 있어서 여자들에겐 학생, 조교, 교수 할 것 없이 인기가 많았다. 그것도 최은협이 입학하면서 반으로 깎였다지만 어쨌든 뒷소문으로는 섬세한 남학우들에게도 인기가 매우 좋았다고. 또한 그 하늘 높은 인기 때문인지 자유분방한 성향 때문인지는 몰라도 여색만큼은 아니지만 남색에 대해서도 관대하다는 소문 등, 뒤로 오가는 풍평이 꽤나 난잡했다(사실무근이지만 선담을 혼자 남겨두고 온 것이 괜히 불안해지는 부분이었다). 가만있어도 페로몬을 풀풀 풍기는 놈이니 그러려니 했지만, 그런 것에 일일이 신경을 썼으면 이렇게 절친한 친구사이로 남지 못했을 저급한 류도 소문에 더러 있었다. 그래도 석재는 혼자서는 외로운 의대생이었고, 이래저래 멋있는 녀석을 만나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짓궂게 말을 막하고 그게 또 굉장히 강압적이어도 슬쩍 능글맞아 대다수가 불쾌감 없이 백진을 추종하다시피 따랐다. 그런 백진이 2학년이던ㅡ그러니까 석재가 3학년이던ㅡ해에 신입생으론 처음으로 걸물이란 칭호가 붙은 최은협이 들어왔고, 그나마 후배라서 망정이지 이 두 세력이 한 학년에 놓여있었음 사달 났을 거란 소문도 잦았다. 그러나 공공연히 떠도는 풍문들은 꼭 그 주인공들만 몰랐다.

어쨌든 의과 6년 과정을 모두 수료한 뒤 일반의자격증을 딴 백진이 백람서울병원 소아과의에 들어간 것은 다들 놀라면서도 당연시한 결과였다. ……물론 얼마 못 버텼지만. 그 앞에서는 쉬쉬하지만 사실 ‘그 사고’는 꼭 연백진만의 잘못은 아니었다.

“정석재 씨. 이게 일반환자 목록이고 이게 응급환자들 꺼. 저번에 부탁했던 대로 나눠줄 수 있어요?”

“네, 금방이면 됩니다.”

건네받은 차트뭉치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가운을 입으며 석재는 볼펜을 들었다. 큰아버지 정명환이 간접 운영하는 종합병원의 레지던트로 들어온 석재는 목표가 전문의 취득이었지만, 사실 전문의자격도 갖추지 않고 일반의로 낙하산을 탔었던 과거의 백진과 별다를 게 없었다. 자신도 큰아버지 소유의 병원에 입사한 셈이니까 말이다. 다른 인턴들보다 훨씬 수월하게 과정을 밟아가는 것도 사실이었다. 불공정한 편애 등을 원치 않는 건 오히려 석재와 그의 백부였지만 오히려 주변에서 의식하고 그를 대했다. 다정하면서도 경계적인 친절함. ‘가진 자’로 여겨지는 입장에 대한 뜻 모를 분개 말이다.

“놈도 이런 압박감을 맛봤으려나…….”

낙하산은 싫다고 멋모른 채 인턴생활을 하다가 호되게 고생하고 그나마 기어온 곳이 이곳이니까 자신도 어쩌면 배부른 소리를 하는 것인지 몰랐다. 석재는 입맛을 쩝 다셨다.

“……연백진 녀석. 선담이 괴롭히는 건 아니겠지.”

결국은 혼잣말만 늘어났다. 

감당 못할 농담도 주저 없이 툭툭 내뱉는 백진과, 남들 하는 말에 화들짝 화들짝 잘도 놀라는 선담이 마주 앉아 있으면 어떨까. 분명 중재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니까 어서 가고 싶었다. 차트를 나누는 일은 단순업무임에도 시간이 매우 더뎠다. 보고 싶은 사람이 몽땅 다 집에 있는데 여기의 일이 제대로 잡힐 리 없었다. 

-

정석재의 걱정이 무색하게 진짜 고생을 하고 있는 건 오히려 백진이었다. 우발적인 사고로 얻어맞은 뺨이 시큰거려 눈가가 따가웠다. 머리 가까이에서 이렇게 크게 쫙 하고 터지는 소리는 오랜만이라 미지근한 물에 설탕을 녹이던 백진은 놀란 가슴을 달래며 낮게 중얼거렸다.

“쬐그만 게 힘없는 척은 혼자 다하더니 감히 어른을 때려…….”

백진은 티스푼으로 컵바닥까지 저어 설탕을 모두 녹이고는 쟁반에 받치고 다시 침실문을 열었다. 침대에 놓인 식사테이블과 그 위의 내용물은ㅡ먹었으리라고 기대도 안했지만ㅡ고스란히 새 밥이었다. 석재가 바쁜 일정에서도 선담이 좋아하는 거라며 챙겨둔 계란말이와 소시지, 조기구이가 푸짐하게 한상 차려져 있었다. 그런 정성을 외면하고 이불속에 웅크리고 들어가 있는 실루엣이 영 못마땅했다. 보다 못한 백진이 한숨을 뱉으며 쟁반을 내려놓았다.

“임마, 뭘 먹어야 기운을 차릴 거 아냐. 먹으란 밥은 안 먹고 쓸데없는 데 힘써서 사람 때리고. 그럼 되겠냐.”

울음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뜬 순간부터, 아니 제 새끼가 여기 없다는 사실을 안 순간부터 가뜩이나 비쩍 골은 녀석이 겁날 정도로 밥상을 거부했다. 일주일은 꼬박 쓰러져있을 거라는 예상을 깨고 사흘 만에 일어난 게 대견해서 밥도 잘 받아먹을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닌가보았다. 애는 앤데 아주 생어린애도 아니고 복잡 미묘한 어린애라 백진은 속만 끓였다. 차라리 몸이라도 작으면 후떡 들어서 맘대로 굴렸을 텐데. 크긴 또 다 컸다.

방금 전만해도 그랬다. 먹기 싫다는 걸 억지로 떠먹이려고 붙들었더니 손사래를 치다가 남의 뺨을 힘껏 갈기고 되레 저가 더 놀라 또 와아앙 울어버리는 것이다. 꼭지까지 얼얼하게 맞은 탓에 그깟 실험배아 하나 잃어버린 것 가지고 왜 이 지랄이냐고 소리를 빽 지르고 싶다가도, 반년 넘게 뱃속에 기르고 있었다니 그 심정이 모처럼 이해가 갈듯도 해 관두었다. 

부모도 자식도 사실은 모두 타인이라 온전히 상대를 이해해 줄 수가 없다. 그렇기에 부모와 자식이 평생을 함께 살면서도 가장 깊게 교류하는 시간은 딱 처음 10개월, 어미가 새끼를 배에 품었을 때이다. 7일이 되었든 7주가 되었든 그게 무슨 상관인가. 어미의 귀애는 조금도 틀림이 없었을 것이다. 얼마나 소중한 시간이었을까.

백진은 멋쩍게 턱을 긁었다. 어쨌든 굶은 사람답지 않게 악력이 보기보다 꽤 매웠다. 욱신거리는 뺨은 둘째치더라도 뭘 좀 먹여야 한다는 생각에 백진은 투덜투덜 선담의 어깨를 부드럽게 잡아 올렸다.

“밥 먹으란 소린 안 할 테니까 마시기라도 해야지.”

벽에 찰싹 붙어있던 선담이 백진의 끈질긴 부탁으로 그나마 정면을 바라보았다. 베개가 눈물바다였다. 들어봐야 할 건 많은데 이야기보따리를 움켜쥔 녀석이 이 모양이니 한동안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도 시원찮을 것 같았다. 고개를 받쳐주고 컵을 입가에 가져다주었더니 산새마냥 입술만 조금 적시고 그나마도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건 무슨 간병인도 아니고. 싫다고 피하는 입에 들이대던 컵을 치우자 선담이 눈동자만 또르르 굴러 연백진을 힐끔 쳐다보았다. 백진은 선담이 남긴 설탕물을 단숨에 들이 마셔버리고 시선에 응대했다. 

지금은 동공이 툭 풀어져 있지만 또랑또랑하게 뜨면 퍽 귀여울 녀석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선담이 빼어나게 아름다운 용모의 소유자가 아니더라도 20여년간 성실하고 순하게 살면서 품은 화풍 같은 것이었다. 정석재가 사랑스러워하는 요소야 다른 곳에도 있겠지만 저 옥돌 같은 피부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지금은 멍투성이라 볼품없지만 매우 희고 고왔다. 백진은 까만 머리칼에 손을 쓱 넣어 한번 쓰다듬었다. 잠시 우는 걸 잊었는지 눈물이 떨어지진 않았다. 어렵사리 뒤통수를 보듬고는 백진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밥상엔 아직 온기가 남아있었다.

“너 안 먹으면 내가 이거 다 먹는다. 석재가 너 먹으라고 얼마나 열심히 차려둔 건데 안 먹냐? 남겨놓은 거 보면 섭섭해 할 거다.”

남을 위해서라도 먹으라고 하면 입을 벌릴 것 같은 녀석이라 구슬려보았지만 도통 듣지를 않았다. 힘없이 천장을 올려다보는 눈에는 기본적인 욕구가 전혀 비치지 않았다. 꼭 죽은 사람을 눕혀다 놓고 혼자 떠드는 기분이었다.

“피자 좋아한다고 하던데. 피자나 시켜줄까?”

“……….”

“그래. 대답을 바란 내가 병신이지.”

이번에도 대꾸 없을 줄 알았던 선담은 백진이 뱉은 말에 입이 대번 땅콩모양이 되더니 흑, 하고 소리 내며 손등으로 눈가를 닦았다. 밥알을 우겨넣던 백진이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불 속으로 꼬물꼬물 기어들어가는 녀석을 잡고 백진은 입에 든 것을 일단 삼켰다. 도대체 뭐랬다고 운단 말이냐.

“아, 새끼야. 왜 또 울어 또.”

선담은 귀까지 빨개져서 얼굴을 숨기려고 낑낑거렸다. 백진이 놓아주지 않자 이번엔 심하게 반항도 못하면서 그래도 연신 기어들어가려 했다.

“ㅡ…….”

무언가 속삭이듯 중얼거리기에 백진이 귀를 갖다 댔다. 그러자 눈물로 얼룩진 밭은 숨 아래로 희미하게 음성이 들려왔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라고. 

무어라 달래보려던 연백진은 입을 뚝 다물어버렸다.

- - - -

어두컴컴한 방 한쪽이 희미한 인공불빛으로 어른거렸다. 그 불빛은 누군가의 웃음소리를 간간히 담고 있었다. 나무로 된 장판 위에는 낡은 지구본이 얌전히 앉아있었고 최은협은 그 지구본을 빙글빙글 돌리며 소파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캔맥주가 바닥을 굴러다녔지만 그것들은 빈 캔이 아니었다. 따지 않은 새것이었다. 대신에 재떨이는 뿌리까지 태워버린 꽁초로 빈틈이 없었다. 

최은협은 어두운 배경을 환하게 비추는 TV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EEC가 영국에 있을 당시 자신이 캠코더를 들고 쫓아다니며 홍선담을 담았던 테이프였다. 그것은 CCTV와는 다른 개념으로, 도너의 일상을 모조리 담아내고 있었다.

“……….”

최은협은 표정 없이 화면을 주시했다.

[이런 것까지 다 찍는 거야?]

[당연하지. 나중엔 너도 보면서 웃을 텐데.]

[그, 그치만 이 옷 엉덩이가 다 보이는데?]

[그건 옷이 아니라 환자용 위생의야.]

선담이 걸친 퍼런색 천조각은 너풀거리는 소재로 직사각형 모양이었다. 팔을 끼우고 목의 끈을 묶어 입으면 가슴을 포함한 중요한 부위는 다 가려주어도 맨다리와 엉덩이는 완벽하게 가려주지 못했다. 그 때문에 선담은 검사실로 종종종 걸어가다가도 엉덩이가 휑해지면 천조각을 잡아당겨 제 엉덩이를 가리느라 바빴다. 맨발로 따박따박 걷다가도 뒤를 힐끗 보고. 깜짝 놀라 옷을 추스르고. 다시 걷다가도 멈추고 마는 녀석. 얼굴엔 불안이 가득했지만 자신의 뒤를 밟아주는 누군가를 보며 해사하게 웃음 짓던 녀석. 홍선담이 열여덟, 처음으로 EEC 검사실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나 검사 내내 이런 거 입어야 해? 애기들이 입어도 수치스러울 거 같아.]

최은협은 피식 웃었다. 그는 담배를 한 모금 깊게 빨아들이고 빨리감기를 눌렀다.

[많이 아파?]

[응……. 이렇게 아픈 줄은 몰랐어.]

[그만 두고 싶어?]

[아니. 그건 싫어.]

흔들리는 화면 속에서 선담이 힘겹게 웃었다.

[선배 애기잖아.]

그와 동시에 최은협의 눈동자도 흔들렸다. 그는 실습대 위에 누워있는 선담의 얼굴이 클로즈업 되는 순간 정지버튼을 눌렀다. 일렁이던 푸른 불빛이 일순 멈추었다. 그는 쓰디쓴 담배를 몸속 깊이까지 빨아들였다. 그의 한쪽 손은 지구본을 돌리고 돌렸다. 시선은 여전히 홍선담에게 고정된 채였다. 오랫동안, 그렇게 오랫동안 그는 홍선담을 주시했다. 

“……….”

어느 순간부터 볼 수 없게 된 미소. 은협은 꽉 찬 재떨이에 더 이상 꽁초를 버릴 수 없게 되자 맥주 한 캔을 대충 따라버리고 그 속에 꽁초를 떨어트렸다. 취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이대로 밤새도록 지새고 싶었다. 한 캔, 두 캔, 재떨이가 늘어날 때마다 그는 씁쓸히 웃었다.

“……미치겠다….”

- - - -

새벽 3시가 되어서 들어온 석재는 내일도 정시근무라며 침대에 쓰러졌다. 

“선담이는?”

“잔다.”

“오늘 하루 뭐했어?”

“그냥 저냥.”

둘러대며 백진이 벽에 기대섰다. 한 것이라고는 소득 없는 씨름밖에 없었다. 자꾸 우는 녀석을 옆에 끼고 달래보기도 했다가 성도 내보고, 밥 먹으라고 닦달을 하다가 숟가락도 한번 집어던졌다. 혈관이 비칠 정도로 창백한 얼굴을 해가지고선 물 한모금도 안 마시는 몸 어디에 그렇게 많은 눈물을 비축해놓았는지 궁금했다. 이제 레지던트 과정 1년 남은 석재를 위해 도맡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대로 내버려두어도 될지 모를 일이었다.

“……. 실험군 지원해서 얻은 배아일 텐데 그래도 거기에 정이 생기나 보지?”

“갑자기 무슨 소리야?”

타이를 풀던 석재가 뒤를 돌아보자 씁쓸하게 입맛을 쩝 다시며 백진이 허심탄회하게 대꾸했다.

“몸만 아파서 저러는 게 아닌 거 같으니까 그게 신기해서. 사내놈 아니냐. 자궁을 가지고 있다지만 그래도 멀쩡한 사내자식인데 그깟 실험 한번 실패한 것 가지고 저러느냐고. 나라도 저럴까? 너라도 저러겠냐?”

‘고생 좀 했나보구나.’하고 생각하며 석재는 코트를 옷장에 걸었다. 그리고는 시큰둥한 눈빛으로 백진을 바라보았다.

“남자들이 다 너같이 터프하고 강하고 단순무식한 줄 알아?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어.”

“어?”

“선담이는 부모는 물론이고 형제도 없는데 인공배아래도 그 새싹이 얼마나 귀했겠냐. 처음 있어본 가족이잖아. 숨겨진 일이 더 많겠지만 사연 없이 맹목적으로 저럴 녀석은 절대 아니야. 우리가 모르는 일도 많이 겪었을 거 같은데. 멀쩡한 가족 틈에서 스스로 빠져나온 네가 처음부터 가진 적 없었던 녀석의 아픈 속을 어떻게 알겠어.”

마지막 말은 좀 지나쳤다고 생각했는지 석재가 “미안…”하고 말끝을 흐렸다. 백진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고 석재는 여기서 말을 끝내기엔 뭔가 아쉬워서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데…… 너 최은협이라고 알아?”

“몰라. 누군데.”

“역시 모르는구나. 하긴 네가 주변에 뭘 세심히 신경 쓸 위인도 아니지. 있어, 우리랑 동문인데 전(全)학기 수석장학생. 입학했을 당시에 엄청 시끄러웠는데.”

“6년 장학생이 있었나? 예과, 본과 다 합쳐서 공짜로 다녔다고? 언제?”

“너 2학년 때 신입생이었어. 입학성적이 그냥 수석이 아니라 올 만점수석이라 완벽하게 공짜로 다니게 된 놈. 12학기 장학금은 7년 만에 한번 나왔다고 그때 난리였었는데.”

석재는 “그리고 그놈이 저번에 말했던 선담이 영국으로 데려갔던 그 친구야.”라고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그러나 무슨 반응이 나올지 몰라 조마조마해하던 석재가 펄쩍 뛰어올랐으니, 곧바로 떨어진 백진의 뜬금없는 질문 때문이었다.

“저 녀석 남자 좋아하냐?”

석재는 “뭐?”하고 되물어버렸다.

“갑자기 선담이가 남자 좋아하는 게 왜 나와?”

“맞나보네.”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ㅡ어떻게 알았어?”

그러자 백진이 피식 웃었다. 하여간 꼬리 하나도 놓치지 않는 습성은 학생시절부터 잘도 써먹더니 나이를 더 처먹어도 끊을 줄 몰랐다. 석재뿐 아니라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 무서워하는 연백진표 코웃음이었다.

“너 옛날 얘기할 때.”

“어, 응. 내가 선담이 얘기 할 때?”

“저 꼬맹이 ‘애인’하고 떠났었다고 그랬었잖아. 그 전엔 또 ‘친구’하고 떠났었다고 그러고. 갈피를 못 잡고 말 자꾸 바꾸더라. 근데 묘하게 애인이란 단어가 더 기억 남더라고. 친구 아니라 애인이 맞지? 혹시 그 애인 따라 영국으로 실험군 자원한 거 아니야?”

석재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그러고 보면 본과를 다 마치자마자 최은협이 길호문 사단의 연구팀에 들어갔다는 소문이 묘하게 돌고 있던 시기였다. 특히 이런 종류의 소문은 괜히 나는 게 아니라서 관심 있는 사람들은 다들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렇다. 확실히 최은협에게서 그런 소문이 돌았었다. 그리고 홍선담은 최은협과 함께 영국으로 떠났다. 그때는 막연히 같이 가는가보다, 좋겠구나, 이랬는데 갑자기 뱃속에 애를 품은 채 돌아왔다. 어쩌면 백진의 예상대로 임상실험군을 자원해서 함께 떠났을지도 몰랐다. 만약 최은협이 꼬드겼다면 선담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을 테니까. 지금 봐선 억측인 것 같아도 막상 말로 전해 듣고 보니 그럴 듯한 전개인 것이었다. 석재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도 설마. 설마 그럴 리가. 아무리 그래도 애를…?”

“이제 와서 임신을 했고 말고가 무슨 상관이야. 우리가 직접 목격했는데. 어쨌든 추측이지만 아주 빗겨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군. 그래, 그럼 그 애인놈은 지금 어딨어? 애가 저모양이 됐는데도 왜 안 나타나?”

“그건 아니잖아!”

“뭐가 아니야?”

“잊었냐? 선담이는 도망친 거고! 태아가 죽어있었어!”

백진은 귀찮다는 듯이 “우리들만으로는 가정하기 어렵겠다. 이렇게 된 이상 도망친 건지 쫓겨난 건지도 모르는 일이고.”라고 내뱉었다. 그 순간 석재가 버럭 성을 냈다.

“너 선담이 귀찮아서 그러냐? 무슨 말을 그렇게,”

“귀찮을 게 뭐 있어. 어차피 반시체라 움직이지도 못하는데.”

“연백진!”

듣다못해 고함치자 백진은 귀찮다는 듯 한손을 저으며 방에서 나갔다. 씻을 준비를 하고 있던 석재가 그걸 또 기어이 쫓아 나와서 혹여나 선담이 깨기라도 할까봐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너 성의 없이 이럴 거면 그냥 말아. 내가 레지던트고 뭐고 다 때려 치고 할 테니까.”

“전문의 되고 싶은 거 아니었나?”

“전문의 그까짓 거 안하면 어때. 나 시간 많은 사람이야. 선담이 예전으로 돌아갈 때까지는 다 팽개칠 수 있어.”

전문의자격증 한 장을 위해 인턴 1년, 레지던트 4년 생활을 견뎌야하는 일은 대단한 인내심을 요하는 과정이었다. 의사집안에서 자란 석재가 전문의에 얼마나 욕심이 많은지 백진이 모를 리는 없었다.

“치워. 덕분에 담배까지 끊었는데 내가 해야지.”

“그러니까 그렇게 빈정대면서 하려면 아예 하질 마! 아픈 애 정성껏 돌봐주기는커녕 뭐? 반주검? 장난감 대하듯이 할 거면 꺼져, 이 자식아!”

“너 정석재 맞냐? 아님 돈 거냐?”

평소에도 자주 티격태격했지만 이번처럼 눈에 불똥이 튀긴 적이 없어서 석재는 숨도 쉬지 않고 내뱉었다.

“안 말려. 여기서 햄스터같이 갇혀있지 말고 그냥 평소처럼 나가 놀아라. 클럽 가서 여자남자 실컷 꼬시고 원나잇 하고 춤 실컷 추고, 시위 가서 전경들 개 패듯이 패고, 그러다가 지겨워지면 백람병원으로 돌아가서 가운입고 환자들 보면 되잖아. 네가 가운 던졌다고는 해도 뉘집 자식인데 누가 뭐랄 거야? 너같이 바쁘신 분한테는 황송해서 못 맡겨놓겠다.”

“진짜. 왜 갑자기 성질이야. 누가 못한대? 애인하고 관련된 귀한 실험배아였을 수도 있다는데 언제 기운 차릴지도 모르는 생병신을 챙기고 있어야하니까 피곤해서 그런 거지.”

“그러니까 네 그런 태도가…! 생병신이 뭐야! 취소해라!”

“야, 고작 인공배아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실험군으로서 자각이 있으면 다 실험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참아야지. 큰 연구팀 도너면 하루 이틀로 끝날 일도 아니었을 텐데 지금 신파 찍냐?”

“연백진! 후회할 짓 하지 마라! 선담이한테 하는 욕은 나한테 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지랄하네, 네놈 마음이 동정심이지 아님 뭐냐.”

“………!!”

석재가 멱살 잡을 기세로 덤벼드려는 찰나에 안방에서 콰당 하고 둔탁한 마찰음이 들렸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문을 박차고 들어가자 선담이 꽈리를 튼 뱀마냥 몸을 말고 바닥 한가운데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선담아?!”

석재가 일으켜 세우려고 하자 배가 찢어지는 고통에 선담이 숨을 뱉으며 신음성을 내질렀다. 온몸이 비지땀에 흠뻑 젖어있었다. 늘어진 사람을 부축하는 건 요령 없이는 몹시 어려운 일이라 석재가 애를 먹자 백진이 그를 뒤로 물리고 선담의 등을 짚었다. 

“놔……!”

그러나 이번엔 선담이 백진의 손을 쳐냈다. 온 얼굴이 젖어있었다. 거실에서 언성을 높인 바람에 죄다 들었는지 백진에게만은 격한 거부감을 나타내며 선담이 몸을 떨었다. 배를 움켜쥐고 끙끙 거리는 모양새에 석재는 눈물이 핑 돌았다. 정신을 차린 후부터 내내 우는 얼굴만 실컷 보았는데도 볼 때마다 맘이 아팠다. 

“선담아, 울지 마. 울지 마.”

다시 바닥으로 떨어진 선담은 이마를 처박고 서럽게도 울었다. 저까지 눈시울이 빨개져서는 석재가 그를 끌어안으며 훌쩍거리자 백진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어버리고 말았다. 

“야, 정석재. 같이 울면 뭐하냐. 비켜, 올려놓게.”

백진 같은 등치를 다시 밀어내는 건 무리인지 선담은 몇 번 버둥거리다 덥썩 잡혀서 침대위로 올라갔다. 이불을 덮어주자마자 석재가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창가를 타고 들어와 방안을 밝게 비쳐주었다.

“선담아, 내일부턴 내가 옆에서 돌봐줄게. 의리 없이 너 두고 출근이나 하고, 그냥 나 때려라.”

따듯한 두 손바닥에 꼬옥 감싸인 채로 선담이 정신없이 고개를 도리쳤다.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처음부터는 아니지만 두 남자가 싸우는 소리를 거실에서부터 다 듣고 있었다. 석재의 맘은 절대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민폐를 지나치게 끼치는 것 같았고, 자기 몸 하나 건사 못해서 하나에서 열까지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처지가 볼썽사나웠다. 자신으로 인한 잔업 때문에 바쁜 두 사람이 할당을 놓고 싸우는 것 같아서 점점 더 죄송스러워졌다. 몸이 내 맘대로 움직이기라도 하면 이제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라고 떳떳하게 서서 이야기할 텐데 뱃속에 불꼬챙이를 넣고 닫아둔 것처럼 너무도 아팠다. 당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딴 식으로 눈길을 끌고 싶지는 않았는데.

고작 주둥이만 움직일 수 있어서 선담이 “미안, 불곰……”하고 속삭였다. 그러자 석재가 세게 부정하며 선담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덮었다.

“신경 쓰지 마. 너 미안할 거 없어. 내가 무신경해서 오히려 미안해. 몸 마음 다 편해질 때까지 여기서 나랑 있자. 아니, 그냥 여기서 살아도 돼. 아픈 거 죄 아니니까 미안해 할 필요 전혀 없어.”

지극정성이다. 차고 넘치는 온정을 베풀만한 상대가 없던 놈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제 자식한테도 저렇게도 못하겠다. 백진은 우두커니 뒤에 서서 ‘짝사랑이라도 하는 거 아냐?’하고 석재를 속으로 픽 비웃어주었다. 그러나 이내 힘주었던 눈가를 슬쩍 풀었다.

바닥에서 허우적대는 녀석을 석재가 들어 올리려 할 때, 백진은 함께 올라간 파자마 셔츠 아래에서 생살을 찢은 수술자국을 보았다. 아직 실밥도 풀지 않아 깨끗하게 봉인해둔 흔적이었지만 칼자국에 익숙한 백진의 눈동자는 마치 투시라도 하듯 아이의 허연 배와 그곳에 지진 인장을 인식하고 만 것이다. 머릿속을 떠돌던 추상적인 단상이 일거에 드러난 것뿐인데도, 막연하게 생각하는 고통과 실제로 목격하게 된 고통의 두 느낌은 매우 달랐다. 그 사실을 자각했을 뿐인데도 죄를 지은 기분이 들었다.

“……….”

타인을 싫어하진 않았다. 그러나 딱히 남의 일에 깊이 관여하는 성격도 아니어서 대다수는 적당한 거리를 두었다. 가끔씩 장난을 치고 필요하면 호령도 하고 심심하면 꿀리는 대로 굴기도 했던 것뿐이지 사실 어린아이는 굉장히 좋아하는 편이었다. 특히 아파하는 아이라면 반드시 도와주고 싶었다. 소아과의를 지원한 것도 다 그 때문이지 그게 아니라면 힘들여 의대로 오지도 않았다.

“선담아, 기운 내. 이렇게 쓰러져서 점점 말라만 가니까 눈물도 많아지고 힘도 계속 없고 그런 거야. 내일 뭐 먹을까? 나랑 같이 먹자.”

소아병동에 근무했던 백진도 저렇게 다정하게는 못했다. 자신의 주무기는 시원시원한 장난질이었고ㅡ무기가 될 만큼ㅡ그것이 편하고 잘 어울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일만큼은 시원시원하게 넘기는 스타일이 적절치 않은 모양이었다. 저 녀석에겐 다정함이 필요한 것일까. 자꾸 보고 있자니 내가 좀 심했나싶은 마음이 들어 연백진도 슬슬 조바심이 났다.

염치불구하고도 너무 아파서 온종일 누워만 있던 아이가 밖에서 들리는 고함소리를 듣고 도저히 모른 척 누워있을 수가 없어 아리는 배를 붙들고 일어날 만큼, 자신의 표현이 격했나 싶어졌다. 제 힘으로 일어나 무엇이라도 하려는 아이가 결국엔 고꾸라져서 허우적대고, 도와주려는 자신을 밀어내고, 또 서러워하며 운다. 부끄러움을 배운 성인남자가 남들 앞에서 저토록 울어대는 건 쉽지 않았다.

워낙에 감정파인 정석재가 부랴부랴 날뛰니 오히려 자신은 침착해져서 저 아이의 아픈 구석을 무시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덩달아 들었다. 그저 실험배아, 결국 실험배아, 라고 눈치 없는 소리만 지껄이면서. 

이렇게 무감동해지려고 병원을 나온 것은 아니었는데. 막연하게만 생각했던 수술자국이 훤하게 시야에 드러나자 뒤통수를 한 대 때려 맞은 기분이었다.

“정석재. 그냥 병원 나가. 할 수 있을 때 바짝 당겨서 해놔야지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그러나 석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짝 격양된 목소리를 감추며 “됐어. 너나 나가.”라고 대꾸했다. 얌전하고 섬세한 만큼 한번 삐치면 잘 풀리지 않는 게 정석재였다. 시간이 꽤 걸릴 거라 예상한 백진은 팔짱을 꼈다.

“백부님한테 폐 안 끼치겠다고 한 게 누구더라. 레지 막 1년 남았고 좀만 참으면 꿈에 그리던 전문읜데 미루겠다고? 저 녀석이 그 말 듣고 좋다 하겠냐.”

“야, 연백진! 그만 좀 해라! 넌 사람이 왜 그리 독하냐!”

석재가 자리를 내치고 일어나자 백진은 한번 쫓아 나와 보라는 식으로 침실문을 나섰다. “그래, 너 나랑 얘기 좀 하자.”라고 짜증내며 따라오는 석재를 기다리던 그는 학교에서 보던 소심한 모습이 정석재의 전부가 아니었다고 생각하며 목소리를 작게 해 말했다.

“……미안해.”

석재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

“미안하다고.”

“……. 그럼 선담이한테도 사과해.”

백진은 그럴 줄 알았다며 “아, 진짜ㅡ”하고 미간을 찡그렸지만 석재는 단호하게 침실방을 가리키고 있었다.

“내일 너 출근하면 할게.”

“웃기지마. 은근슬쩍 웃으면서 넘어가려고. 내가 널 모르냐? 가서 정식으로 사과해.”

“징그러운 새끼.”

“내 부탁이기도 하다, 연백진 이놈아. 너 없이는 힘들단 말야. 자꾸 나 놀래키지 좀 마라.”

“그렇게까지 말 안 해도 제대로 하려고 했어”

백진이 부루퉁하게 한마디 콱 쏘는데 석재가 갑자기 손을 덥썩 잡았다. 

“그리고, 사실 또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어.”

“뭔데.”

“고깝게 듣지 마라. ……말이야 바른 말이지, 네가 학교에서 소문이 좀 많았잖아. 소문이란 게 또 당사자한테는 잘 안 들어가니까 넌 잘 모르겠지만 그 중에서 내가 마음에 좀 걸리는 것이ㅡ”

“남자관계에도 관대하다고?”

암담한 표정으로 바닥을 내려 보던 석재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백진이 큭큭 웃는 소리에 소름이 돋아 목뒤가 싸해졌다. 무슨 말이 날아올까. 이 와중에 무슨 개소리냐고 윽박지를 지도 모른다. 하지만 괜한 걱정은 아니라고 믿었다. 촉수가 발달한 정신과 의학생이니만큼 이런 감은 틀린 적이 없었기에. 

선담은 참 어여쁜 쪽에 속하는 아이였다. 이성애자인 자신이 만약 게이였다면 저 아이에게 푹 빠졌을지 모른다고 생각할 정도로. 대단한 용모의 소유자는 아니어도 아기자기하고 사랑스러운 구석이 많았다. 얌전하고 숙부드러운 분위기와 말캉해 보이는 살집이나 조분조분한 말투나 그런 많은 것들이 말이다. 제 눈에도 보이는 이런 것들이 연백진의 눈에 피해갈 리가 없었다. 그러니 혹여나 선담과 배꼽 아니면 눈이라고 맞추겠다고 하면ㅡ그것이 한낱 농담일지라도ㅡ이 인간을 꽁꽁 매달아 불쏘시개로 찌를지도 모른다는 각오를 했다. 이 말을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망설이는 사이 백진이 또박또박 대답했다.

“녀석이 환자로서 귀여운 건 사실이지만 그건 네 기우다.”

석재가 천천히 고개를 들자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관대한 건 맞아.”

“지, 진짜였어?”

“소문이 그냥 나냐. 다만 남자하곤 깊게 맺어본 적 없고 즐기는 정도만. 그땐 어렸고.”

“어리기야 했지만…… 근데 즐기는 게 어느 정도인건데?”

“중요하냐?”

“그럼 너한테 대시한 놈들 있다는 게 그럼 정말이야? 우리 과에도 있었어?”

“중요하냐고 그게.”

아차해서 석재가 헛기침을 했다. 어쨌든 제 입으로 아니라니까 됐다. 석재는 어서 가서 사과하라고 등을 두들겼다. 심드렁하게 팔짱을 끼고 있던 백진은 발걸음을 옮겼다.

연백진은 한다면 하는 놈이었다. 무심한척 돌아서지만 그래도 선담과 정면에 서면 분명 넉넉하게 사과할 걸 알고 있었다. 저렇게 사과할 마음이 생겼다는 건 연백진 스스로도 어느 정도 자신의 잘못을 느꼈다는 것일 테니까. 

선담을 위하는 마음이 너무 앞서는 바람에 그 앞에서 오버를 좀 했지만 그래도 천하의 연백진이 곧잘 수긍할 줄은 몰랐기 때문에 석재는 얼떨떨하면서도 아닌척 쓴웃음을 지었다. 큰소리 떵떵 쳤지만 사실은 석재도 정확히 알 순 없었다. 사지 멀쩡한 남자가 새끼를 밴다는 건 영화에서도 보기 어려운 공상과학적인 이야기였고, 검은 비닐봉지에 담겨있었을 ‘그것’을 기억하면서도 선담이 왜 저리 힘들어하는지 의아해했다. 이런 사건이 현실에서 일어날만한 일이였단 사실마저도 믿기지 않아 갸웃했다. 어쩌면 백진의 말대로 단순히 실험의 일부일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도ㅡ… 그래도 사람이 아픈 건 싫었다.

비현실적으로 태아를 떼어냈을지언정 그 상처로 사람이 고통 받는 것은 실제였다. 선담은 엄살이나 부리고 괜한 떼를 쓰는 그런 아이가 아니었다. 저렇게 엉엉 울고 쓰러질 정도면 몸도 마음도 심하게 멍울진 것이다. 의사로서 세상 모든 사람을 구할 수 없다면 하다못해 주변사람만이라도 꼭 챙겨줘야 했다. 과격하고 거센 성향 때문에 어울릴 수 없을 거라 단정지었던 연백진과 이날까지 친구로 남을 수 있었던 한마디. 석재는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ㅡ석재야, 고통의 후유증은 아픔의 잔재가 아니라 아무도 보살펴주지 않았을 때 남는 외로움이란 걸, 우리가 알아야 한다.

나쁜놈. 나는 기억하고 있었는데 저 새끼는 잊고 있었던 것 같아 좀 괘씸했다. 선담이더러 연백진 좀 바짝 굴리라고 해야겠다. 석재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물을 한잔 마시고 친구의 동선을 따랐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뒤끝 없는 멋진 놈이라는 생각은 버릴 수 없었다. 조금 섬세해지면 금상첨화일 텐데.

선담이 아파하면 그것은 정말로 아픈 것이고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라도 그에겐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니 굳이 이해하지 못해도 애정으로 돌봐야 한다고 다짐했다. 배후에서 선담을 괴롭힌 무언가가 있을 거란 막연한 불안감을 품을망정, 지금은 듬직하게 두 남자가 저 아이를 받쳐주어야 했다. 연백진도 저희 같은 젊은 의사가 가져야 할 그 마음가짐을 되새긴 것이 아니겠는가.

침실에서 넘어오는 연백진의 낮은 음성에는 꼬맹아, 미안, 많이 아프냐 등의 어절이 드문드문 섞여있었다.

- - - -

소위 부동산 불패의 신화 강남땅의 32평형 아파트란 30대 초반줄의 미혼남자가 혼자 살기엔 그 사이즈도, 책임져야 할 액수도 만만치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아파트에 걸린 시세는 변함없다손 쳐도 변화를 줄 수 있는 게 따로 있었으니, 바로 거주하는 인원의 머릿수였다.

“그럼 다녀올게. 오늘부터는 한 일주일 비울지도 모르겠어.”

“그래, 얼마 안 남았으니 수고해라.”

“선담이한테 인스턴트나 정크푸드 먹이지 마!”

“알았다고, 이 아줌마야.”

덜컹. 문이 닫히자 삐비빅 하고 현관문이 자동장금 되었고 백진은 익힌 닭고기를 썰어 능숙하게 냄비에 넣었다. 흰쌀과 함께 물에 넣어 휘휘 젓고 충분히 불려 김치와 함께 쟁반에 올렸다. 아버지께 단식투쟁을 하겠답시고 굶다가 새벽 몰래 혼자 밥 해먹은 경력이 벌써 15년차였다. 이 정도는 닭죽, 아니 식은죽 먹기였다.

“꼬맹이, 아침 먹자.”

새로 간 시트 덕분에 침실에서는 상큼한 섬유향이 났다. 멀뚱히 누워있던 선담이 꼬맹이란 부름에 눈을 슬쩍 돌렸다. 백진이 그의 무릎에 상을 내려놓자 그제야 선담이 눈을 한번 비볐다. 잠시 눈물이 맺혔던 모양이었다. 

밤새워 용서와 자비(?)를 구했던 그날 밤으로부터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처음엔 쉽게 용서해주지 말라고 부추기던 석재도 결국엔 선담이 백진의 사과를 받게끔 유도했고 그렇게 선담은 온전한 식구로 두 남자에게 받아들여져 일주일을 함께 지냈다.

기왕 터놓고 지내게 됐으니 그들은 선담이 조금은 변할 줄 알았다. 부기가 가라앉고 멍울이 사라지는 만큼 웃음도 늘고 살도 오르고 밥도 잘 먹고. 그러면 곧잘 웃을 수 있게 될 줄 알았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자면 선담은 말수가 여전히 적었고 밥 먹는 모양새도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그나마도 웃는 모습은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아직도 가끔씩 눈물을 훔쳐내다 그 모습을 들켰다. 선담의 반응을 이끌어내려고 광대처럼 애쓰는 석재가 애석해 보일 정도였다. 그런 석재더러 불쌍한 놈이라고 놀리면 내 끈기를 얕보지 말라고 대찬 응수를 받았다(그러나 꼭 스스로를 위한 위로 같았다). 선담이 아직도 석재의 정성에 제대로 답하지 못하는 걸 보면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물어보나 마나였기 때문에 백진도 입을 다물었다.

상다리를 톡톡 치며 “어이그, 또 울고 있었냐”라고 가볍게 꾸중하자 선담은 고개를 가로젓는 것을 끝으로 숟갈을 집어 힘없이 죽을 떴다. 백진은 맞은편에 앉아 녀석이 그릇을 비울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렸다. 워낙에 삼키는 속도가 느려서 한 그릇 비우길 기다리면 한 시간이 후딱 갔다. 때문에 가끔씩은 책을 들고 와 읽기도 했다. 

원래는 웃음도 많고 환한 아이라고 하는데ㅡ인상으로 봐서도 그 말이 타당성은 있었지만ㅡ지금 하는 짓으로 봐선 영 사실무근이었다. 웃기는커녕 입가에 묻은 걸 닦아줘도 눈 한번 마주치지 않았다. 목석을 모셔두고 수발을 드는 일이었다. 그러나 일부러 저러는 게 아니라 정말 몸에 힘이 없어서 그런 거라 비정하게 구박 할 수도 없었다. 

“뭐 그래도 시체보다는 낫지.”라고 중얼거리며 백진은 구급상자를 열었다. 온몸에 다양한 타박상을 입은 선담은 백진에게 꾸준히 치료받는 중이었다. 부러진 곳은 없었지만 상처가 꽤 깊어 찰과상이 된 곳도 있었고 반창고를 제때 확인해봐야 하는 곳도 있었다. 누군가에게 맞은 부분도 그러했지만 맨발로 이동하며 정신없이 뛰어온 탓에 넘어져 구른 흔적이 많았다. 그러나 타박상과 찰과상을 아우르는 가장 큰 상흔이 있었으니, 바로 항문의 열상이었다.

상처를 정리해주면서 백진이 ‘이제 여긴 안 아프냐, 여기는 어떠냐.’라고 물어보면 선담도 고갯짓으로 의사를 전했다. 짧게 대답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둘의 대화가 수그러드는 것은, 아무래도 가장 마지막에 있을 치료 때문 같았다. 봉합을 필요로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출혈이 꽤 심했고 안쪽까지 상해있어서 개인병원을 운영하는 동기의 도움을 받아 정밀검진을 해 직장상태를 확인하고 약도 탔다. 내복약이야 밥상 옆에 함께 놓아주면 됐지만 바르는 약에 대해서는 환자나 석재에게 무작정 맡겨놓을 수 없었다. 이 부분이 난점이었던 것이다.

깨끗이 씻은 손에 실리콘 소재의 위생장갑을 끼고 미리 덜어놓은 연고를 묻혀 상처 부근과 내벽 깊숙이까지 골고루 바르면 끝인 일인데 이게 정말 어려웠다. 의식이 없었을 때는 속옷을 훌렁 내리고 조치했기 때문에 수월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식사를 기다리는 50분보다 항문에 약을 발라주는 15분이 천배는 길었다.

누구나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길 겁내한다. 아무리 치료절차라고 강조해도 환자의 마음이 불편하면 의사의 의도와 상관없이 정말 힘든 진료가 되는 법인데 선담도 꼭 그랬다. 녀석의 성적취향도 그렇다니 이해는 했지만 진료와 이해는 완전히 별개였다. 몸을 편하게 맡겨주면 좋겠는데 그러지도 못하고 쉽사리 상처를 보여주지도 못해 낑낑거리는 통에, 씨름하는 게 지친 백진은 선담에게 너 한대 때려서 기절시킨 다음에 얼른 끝내주는 건 싫으냐고 농담 삼아 물어보기까지 했었다. 

엎드리게도 못하게 하고, 무릎을 잡아 벌리지도 않고. 늘 버벅대다가 결국엔 백진이 그를 뒤에서 끌어안고는 상처를 보지 않고 손가락만 놀리게 되었다. 그 장학생인가 하는 놈이 녀석의 몸을 어찌나 잘 길들여놨는지 감탄이 절로 났다. 지금은 앙상해서 좀 문제였지 수컷들이 보는 시점의 몸으로는 엄청나게 실했다. 사람 궁하다고 생각해 본적 없는 백진도 선담을 만지고 있으면 급박할 정도로 외로워졌다. 향도 끝내주게 좋았다. 상처 때문에 부위를 더듬는 손길은 부드러워질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주름근처를 배회하다가 중지를 조심스럽게 밀어 넣으면 녀석의 몸이 파르르 떨리는데 그때마다 특유의 살내가 솔솔 풍겼다. 그럼 백진이 당황하는 만큼 선담도 소스라치게 놀라서 몸을 경직시키려했지만 육욕 약한 남자 몸에 그게 어디 쉽나. 마침내는 백진의 품안에 갇혀 꼬무작거리고 발발 떨고 마는 것이었다. 가끔씩은 백진도 음흉하게 눈을 감고 어루만지면서 녀석의 유취를 즐기곤 했다. 일을 마치고 녀석이 떨어져도 품속에는 녀석의 채취가 감돌았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꼭 시작하기 전에는 기분이 묘했다. 연고는 앞으로 2주는 더 발라야 할 텐데 매번 낯을 붉히기도 참 거북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걱정은 백진의 손끝이 선담의 허벅지까지 내려가면 까마득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덕분에 백진은 요즘 자제중인 원나잇 생각까지 동해질 지경이었다.

“이렇게 하자.”

백진은 머뭇거리는 선담이 몹시 귀엽다고 생각하며 그를 자리에 눕혔다. 평소와 자세가 달라 선담이 놀란 사이 백진은 두 다리를 허리에 두르게 하고 끌어안으며 옆통수에 옆통수를 갖다 댔다. 선담의 턱이 자연스럽게 백진의 어깨에 걸쳐졌다. 이렇게 고개를 교차시켜놓으면 상처를 굳이 들어다보지 않아도 되었다. 백진은 숨을 참았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지만 그들에겐 중요한 문제일지도 몰랐다.

항문은 전체적으로 열상을 입었지만 그 중에서도 심한 부위가 있었다.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그 상처부위를 찾아 약을 듬뿍 바르면 되는 일이었다. 대신에 새근거리는 숨소리만 들으면 민망해지니 오늘은 말을 걸어보기로 했다. 중지와 검지에 담은 연고가 항문에 닿아 비벼지자 선담이 몸을 긴장시켰다. 그러자 백진이 급하게 입을 열었다.

“석재한테 얘기 들었냐. 그놈 일주일은 제대로 못 들어올 거라더라.”

“……….”

“그…러니까 우리 몰래 피자 시켜 먹을까?”

“……ㅡ.”

“……싫냐? 먹고 싶은 거 말해봐.”

“…ㅡㅡ.”

주름이라도 세듯 손끝으로 하나하나 문지르다가 백진이 손가락을 쑥 집어넣으면서 대답 좀 해보라고 보챘다. 선담의 몸이 미약하게 떨려왔다.

내시경 사진을 기억하고 있대도 모든 열창을 다 기억할 순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손끝이 멀쩡한 곳을 누르기도 했다. 그럼 놀란 몸 안이 꽈악 조였다. 이런 와중에 본인은 정신을 다른 곳으로 분산시킨답시고 되지도 않는 질문을 만들어내고 있는데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녀석이 조금 얄미웠다. 약이 올라서 아주 살짝, 아주 살짝 손가락을 흔들었다. 당황한 선담이 입을 달싹거렸다. 반면에 백진은 이렇게 하면 기분이 좋은 거냐는 질문을 간신히 삼켰다. 진지하게 묻고 싶었지만 상처가 될까봐서였다. 연고를 덜어 마지막으로 안쪽 내벽에 눌러 바르자 어깨 너머로 얼굴을 숨기던 선담이 끌어안은 손끝에 바짝 힘을 주었다. 이 자세는 실패다. 너무 적나라했다. 자신까지 민망한데 당하는 입장은 어떻겠는가. 백진은 어차피 생채기를 만지는 건데 부드럽다고 뭐가 느껴질까 싶다가 곧 생각해냈다. 

ㅡ고통과 가장 이웃한 감각이 바로 쾌감이라는 사실을.

선담은 일방적으로 안긴 채 몸을 한껏 굳히면서도 아래를 신경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듯했다. 그때마다 장난을 치고 싶다가도 자칫 뭔 일이라도 날까봐 신중해졌다. 마지막 한 덩어리까지 몸 안에 모두 발라주고 조심스럽게 손을 뺏다. 언제나 그렇듯이 선담의 얼굴이 빨갰다. 양 볼은 물론이고 귓불에 귓바퀴까지 빨갛게 익었다. 백진은 잠시 그런 아이를 바라보았다. 뻣뻣하기만 한 얼굴이 조금이지만 찰나라도 풀어지는 순간이었다. 꽤나 귀여운 얼굴이라고 생각하는 즈음, 선담이 주저하더니 속옷을 올려 입으며 중얼거렸다.

“저, 저기, 아무래도…… 다음부터는 이거, 제가 할게요, 이거…….”

그러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겠는데 상처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다 만진다고 알 수도 없는 녀석에게 다짜고짜로 맡길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건 곤란하지.”라고 대답하자 선담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쳐다보았다.

“난 만져보면 상처가 어디 있는지 알지만 넌 모르잖냐.”

“……….”

얼굴에 열을 띄운 채 고개를 푹 숙이기에 이때다 싶어 백진이 이불을 덮어주는 척, 진짜 목적을 가지고 작게 속삭였다.

“많이 불편하냐.”

“아뇨…… 이젠 혼자서도 걸을 수 있어요. 이젠 안 아파요.”

동문서답. 백진은 한번 실소하고는 좀 더 구체적으로 물었다.

“그거 말고 다른 거. 그거 많이 불편하냐고.”

“아…”하고 망설이더니 선담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했다. 남이 제 항문을 쿡쿡 쑤시는데 수치스럽지 않은 인간이 몇이나 있겠나. 게다가 생리적인 반응까지 일어나니 말할 것도 없었다. 그래도 “왜?”라고 집요하게 묻자 녀석의 안색이 굳었다. 인생 다 산 것 같은 99세 노인인양 무심하던 녀석이 이러니까 흥미로웠다.

“지금부터 2주 정도는 참고 해야 하는데 네가 불편해하면 안되잖아.”

“……….”

녀석이 바텀이라면 그곳이 많이 민감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고질병ㅡ그러니까 상대를 짓궂게 갈구는 그런 류의 고질병ㅡ이 도진 백진은 싱글싱글 웃었다. 

“그리고 너. 너한테서 젖내 나는 거 알아?”

선담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로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백진의 깊은 눈이 장난기에 젖어서 초승달같이 휘었다.

“놀라서 푸드덕거릴 때마다. 그때마다 젖내 난다, 꼬맹아.”

눈까지 시뻘게진 선담은 그만 고개를 떨어트리고 말았다. 시선을 마주치기는커녕 어딘가 들어가 숨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백진은 놀리는 재미가 있다고 기쁨의 살사댄스라도 추고 싶어졌다. 

석재와 다르게 전문의자격증까지는 욕심이 없었던 자신은 백람서울병원 낙하산 사원이라는 뒷꼬리에 예민한 적이 없었다. 타고난 배경능력은 있는 대로 써먹어줘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일생을 살았다. 그러니 병원도 예외는 없었다. 낙하산도 능력이 아닌가. 그만큼 더 열심히 뛰어주면 그것으로 된 게 아닌가. 그러나 그런 가벼운 욕심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근 3년 만에 자신은 치이고 치여 버려 지금은 병원에서 나왔고, 딱히 다른 일을 하는 것도 아닌 채 친구의 부탁을 들어주고 있었다. 넉넉하고 여유로운 휴지기를 즐긴다고 할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자신에게 지성한 바람이 하나 있다면 그건 ‘내 사람이 아프지 않는 것’이었다. 의형제인 석재한테 내 사람이면 백진에게도 내 사람이었다. 심정을 모조리 헤아릴 수 없어도 그래도 어린 녀석이 맘고생이 심했다고 하니 저 꽃 같은 얼굴이 늘 시무룩하게 구겨져 있어 마음 한쪽이 썼다. 웃는 얼굴을 보고 싶어지곤 했다. 이건 의사로서의ㅡ비록 영구퇴직했지만ㅡ오기이기도 했다.

임신한 남자, 실험군으로서 자각 없는 맹추, 엄살에 꾀병이 심한 먹통이라고만 생각했지만 그건 또 아닐 거라는 막연한 믿음이 머릿속을 크게 지배해 오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 홍선담이라는 아이의 분위기가 자신을 홀려버린 건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이 타인과 이렇게 잘 지내보려고 애쓰지 않았을 것이다. 풀죽어 깽깽대는 모습이 아쉬워서 어떻게 해서든 도와주고 싶었다. 

눈앞에서 쭈뼛거리는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연백진이 점잖게ㅡ그러나 그 내용은 절대 점잖지 못한ㅡ제안을 내놓았다.

“그럼 내가 보면서 도와줄 테니까 네가 직접 넣어서 바를래?”

이제부터 치료는 저가 하겠다고 잘못 뱉었다가 꼬투리를 잡혀서는 선담이 당황해하며 고개를 저었다. 물론 백진도 통상적으로 사내놈이 품에 안겨 쌕쌕거리는 게 썩 좋다고만은 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묘하게, 괜찮았다. 참을만했다. 아니, 사실 참을만한 정도가 아니라 꽤 좋았다. 꽤 많이 좋았다. 다만 지금 이 상황이 묘해서, 호감을 숨기고 이런 방식으로 사람을 놀리게 될 줄은 몰랐다.

남자와 직접 관계해 본적은 없지만 발이 넓은 그는 주변에 소수성향자들이 꽤 많았다. 더욱이 남색이야말로 한번 맛들이면 발을 못 빼니 절대 넘보지 말라는 경고 아닌 경고를 받으며 편견 따윈 허물어버린 지 오래였다. 가끔 젊은 혈기와 분위기에 휩쓸려 입을 맞추는 정도나 가벼운ㅡ그러나 남들이 보면 오해를 살만한 강도의ㅡ터치도 경험이 있었다. 그래도 심각하게 궁금증을 품거나 노력해본적은 없었는데 홍선담이란 인간 하나 때문에 요즘엔 얼핏 관심이 가기도 하는 것이다. 

이성애자에게의 대시가 치욕스러운 결과를 얻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은 얼빵한 동창 몇과, 거절당할 걸 알면서도 한번 들어대 보는 클럽맨들, 그리고 같은 부류로 오해한 낯선 인물들에게 대시를 받아본 적이 있었다. 허나 그때마다 거절한 것은 모두 ‘향’이 없어서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만약 홍선담이 접근을 했으면 어땠을까. 어쩌면 자신은 홀라당 넘어가버렸을지도 모른다.

잠시 주저하다가 백진은 내내 궁금해 했던 것을 묻기로 결심했다.

“…ㅡ몇 살 때부터 했어?”

선담은 못 알아들은 얼굴을 했다. 그러자 백진이 능글맞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선담의 그 부위를 가리켰다. 

“그거. 거기.”

비로소 무슨 말인지 알아듣고는 선담이 당혹스런 얼굴을 유감없이 떠올렸다. 이건 좀 아닌가 싶었지만 사내놈끼린 동정 떼는 걸 훈장처럼 여기는데 별반 다르지 않다고 여겨 대답을 기다렸다. 

외관은 성년인데 속안이 꽤나 낭창낭창한 게 아무래도 꽤 어린 나이부터 한 사람하고만 지속적으로 했을 가능성이 컸다. 역시 그 전학기 장학생인가 뭔가 하는 놈인가. 백진이 여러 생각을 하는 사이 대답을 회피하려고 눈부터 피하던 선담이 겨우 입을 열었다.

“…여, 열다섯…….”

“열다섯?”

“완전 애기였을 때잖아.”라고 백진이 휘파람을 훅 불었다. 희롱하는 휘슬소리에 선담이 불안한 시선을 했다. 백진은 갑자기 담배가 땡긴다는 생각을 하며 서분서분하게 말을 이었다.

“겁먹지 마라. 그렇게 편협한 인간 아니니까. 다만 치료를 빙자삼아 내가 자꾸 널 괴롭히게 되는 것 같아서 미안해서 그런다. 네가 퍼들거릴 때마다 가슴이 쿵덕거리는데. 이걸 어쩌냐, 응?”

“……….”

홍당무 하나가 이불에 푹 파묻힌 채 시선을 어디에 둘 줄 몰라 갈등하다가 새까매진 낯을 숨겼다. 몹시 놀란 눈빛이었다. 그러나 이런 농담이야 만난 지 5초된 사람에게도 건넬 수 있는 백진은 그 미묘한 흐름을 눈치 채지 못하고 구급상자를 닫았다. 

-

석재는 정말 바쁜지 출근 3일이 되어도 연락이 없었다. 악명 높은 레지던트 과정이 과연 이런 것인가 싶었다. 석재가 오래 집을 비우니 마주보고 지내는 사람이 백진 한사람뿐인지라 꼭 오래된 식구 같았다. 

백진이 친구의 전화를 받기위해 방을 잠시 비운사이 선담은 아랫도리에 힘을 주어보았다. 끈적거리는 연고느낌이 꽉 아물려서 좋지도 싫지도 않았다. 그저 이물감 그거 하나뿐이었다. 선담은 오늘 하루 찍소리도 못한 채 진료를 받았다. 손가락이 여상하게 몸 안에서 노닐었지만 평소보다 더하게 긴장해서인지 전처럼 떨거나 하는 일도 없었고 오히려 백진은 그런 선담에게 장하다고 농담을 했다. 지난번에 가슴이 두근거린다느니 하는 소릴 해대는 통에 신경 써서 몸에 한껏 경직시켰는데 저쪽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서 어리둥절했다. 

몸의 상흔이 나아가고 있다는 건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가끔씩 싸하게 등골을 타고 흐르는 통각만 빼면 그럭저럭 살만했다. 그 짜한 통초의 선이 등 뒤를 훑고 지나갈 때마다 선담은 겨울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리도록 파란 하늘이었다.

진정으로 무서운 고통은 바깥에 있었다.

죽음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기꺼이 번데기라도 되어 고치 안에 싸여 들어가고 싶었다. 

이미 내 아기는 쓰레기통에 처박혀버렸겠지. 고등학교 성교육 시간에 낙태에 대한 비디오테이프를 본 적이 있었다. 가늘고 긴 철봉으로 아기를 마구 헤집어 찢어발긴 다음에 그들은 쓰레기봉지에 핏덩이를 담아 대충 분리수거함에 갖다 버렸었다. 내 뱃속에서 고물고물 뛰놀던 것이 잠시 정신을 잃은 사이 분리수거가 된 것이다. 내 일부였던 것이 일반쓰레기통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 생각만 들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수도꼭지를 튼 것처럼 눈물이 새어나왔다.

사무치도록 미안했다.

자신이 강하지 못해서, 오랫동안 기다린 새끼에게 한줌 빛도 보여주지 못하고 말았으니. 

평생을 걸고 사죄하고 싶었다. 너를 위해서라도 다시는 약하게 굴지 않을게ㅡ라고.

아기의 대답이 들리지 않아 눈물이 또 흘러나왔다. 누워서 우는 것만큼 귀찮은 일도 없는데 이놈의 눈물은 그치질 않았다. 그렇게 울면서 아기 생각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최은협이 떠올라 숨이 턱하고 막혔다.

ㅡ웃기지마라, 홍선담. 난 네 배에서 나오는 내 새끼를 꼭 봐야겠어!

선배는 날 찾고 있을까. 화가 많이 났겠지. 애기가 지워졌다는 걸 알면 좋아할지도 모르겠지만 무단으로 연구진을 이탈한 자신에게는 온전한 감정을 품고 있지 않을 것은 분명했다. 어차피 죽어버릴 핏덩이가지고 왜 그의 속을 갈가리 찢어놓으려고 했나. 갑자기 무지막지한 후회가 몰려들었다. 그러자 버석버석하게 흐르던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최은협이 자신에게 저질렀던 패악다운 패악도 죄다 잊고서는 기운을 차리자마자 못내 그리워졌다. 그가 몹시도 보고 싶었다. 

분명 그는 자신을 보면 화를 낼 것이다. 무엇을 가지고 화를 낼 지는 잘못한 게 너무 많다고 생각하는 선담이 쉬 짚어낼 수 없었지만, 그래도 어쨌든 그가 화를 낼 것만은 확실하게 알았다. 

또 나를 때릴까……. 맞는 건 정말 아팠다. 완력이 좋은 건 알았지만 그렇게 아플 줄은 몰랐다. 그때의 폭행을 생각하면 사지가 정신없이 떨렸다. 그래도 자신은 다시금 은협을 생각하고 말았다. 쓸모없는 녀석이라고 실망했겠지. 아님, 다시는 날 찾지 않을까……? 머릿속 용량은 한정되어있어서 여러 번 굴려 봐도 답은 거기서 거기였다. 그러나 사념으로 가득한 빡빡한 머리가 터져나갈 것 같음에도 선담은 계속 걱정을 했다.

“또 운다, 또 울어. 왜 울고 있어.”

언제 왔는지 백진이 이마에 손을 짚었다. 이 사람의 따듯한 손바닥이 얼굴을 쓸어주면 졸음이 쏟아지곤 했다. 그럼에도 은협이 아닌 다른 남자가 내 몸을 만진다는 게 너무 겁이 났다. 온몸이 피떡이 되도록 때려도, 그래도 그가 아닌 다른 남자가 만지는 건 사나운 일이었다.

“그럼 좀 보자.”

백진은 추스르지 않은 허벅지 안쪽으로 손을 뻗었다. 

상처를 보던 도중 전화를 받고 나간 거라 선담은 어정쩡한 자세로 대기 중이었다. 이 남자의 손길은 어딘지 부드러워 선담은 긴장을 하면서도 저도 모르게 반응했다. 사실 백진의 손길이 음흉하다는 사실은 잘 모르는 채이기도 했다, 자신이 헤픈 걸까 걱정이 되다가도 번개처럼 올라오는 반사적인 반응을 이길 순 없었다. 어쨌든 오늘만큼은 백진이 꼭 상처를 직접 봐야한다고 우겨서ㅡ나름 의사선생님이기도 했고ㅡ굽히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봉합할 데가 없어서 다행이다. 이제 조금만 참으면 다 나을 거야. 고생 많았다.”

ㅡ홍선담, 고생 많았다.

두근, 하고 심장이 아렸다. 순간 눈앞이 흐려지더니 이 남자와 은협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것 같았다. 선담이 눈을 침침하게 뜨고 입술을 깨물자 백진이 속옷을 올려주었다.

“며칠 내내 춥다가 오늘 날씨 좀 풀렸는데. 밖에 걸어볼래?”

선담은 고개를 저었고 그도 강요하진 않았다. 아직 얼굴의 멍은 다 가라앉지 않아 누르스름하게 덩어리를 달고 있었다. 물론 이것 때문이 아니어도 밖으로 나갈 용기가 없었다. 빛을 받으면 온몸이 쪼개질듯 따갑고 가슴이 쓰렸다. 

아직도 무언가를 느낄 줄 아는 몸뚱이가 지독히도 원망스러웠다. 빗속에서 정신을 놓을 정도로 고되고 아파서, 그래서 그렇게 쓰러져 새끼까지 잃었으면 어떤 것도 먹지 못하고 느끼지도 못하고 그냥 천천히 시들어야 마땅하다고 여겼는데 어느 순간이 지나고나니 식욕이 느껴지고 배변도 이루어지고 상처엔 점점 새살이 돋더라. 덩달아 순전히 진료를 위한 움직임에도 몸 안이 슬쩍슬쩍 들뜨고 말더라.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 의지는 완전히 배제하고 몸과 머리가 따로 놀았다. 두 개체가 함께 움직이지 못하는 괴리감에 선담은 큰 상실감으로 매를 맞고 있었다. 이러면 자해충동이 일어날 정도로 급하게 우울해졌다.

다시 자리에 눕자 “계속 그렇게 부비고만 있다간 욕창 생긴다.”하고 백진이 혀를 찼다. 

“그늘에만 누워있으면 더 우울해져. 어린애답게 많이 먹고 그만큼 또 뛰놀아야지.”

“……….”

말끝마다 꼬맹이 혹은 어린애였다. 자신은 아저씨라고 불러야할지 의사선생님이라고 불러야 할지 아직 정하지도 못했는데. 형이라고 부르긴 좀 이상해서 선담은 말을 고르다가 조심스럽게 “몇 살이신데요…?”라고 물었다. 뜬금없는 것 같아 “불곰하고 동갑이에요?”하고 덧붙였다. 백진은 선담이 더듬거린 이유를 알았는지 씩 웃더니 “동갑이야. 편한대로 불러.”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선담이 인상을 그으며 중얼거렸다.

“어린애라고 하지마세요. 10살 차이밖에 안 나는데….”

“임마, 너 응애하고 기저귀 갈 때 내가 국민학교 3학년 진학했다.”

“아…….”

그렇게 말하니 확 와 닿았다. 그래, 10살차이. 내가 태어났을 때 이 사람은 공공기간에서 교육을 받았구나. 내가 초등학교를 들어갔을 때엔 교복을 입고 진로를 고민했을 나이였구나. 새삼스럽게 백진의 훤한 얼굴에서 농익은 성인의 흔적이 보였다. 그러고 보면 은협은 그보다 2년 더 어렸다. 그리고 은협과 처음으로 살을 섞었을 때가 열다섯이었다. 자신은 한창 중학교에 다니면서 또래와 티격태격 거릴 때 은협은 벌써 MIU 의대의 본과 4년생이었으니 나이 차이가 실제로는 꽤 많이 난다고 볼 수 있었다, 8살 차이도 굉장히 컸는데 10살이면ㅡ아저씨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ㅡ정말 큰 차이였나. 선담이 수긍하자 백진이 갑자기 그를 끙차,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번개같이 빠른 손놀림으로 두툼한 양말이 신기고 장갑을 끼워주었다. 석재가 사다준 노란 털모자까지 꾸욱 눌러 씌워주었다.

“그래, 알겠으면 의사 말 들어라. 나가자.”

“하,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걱정 마라. 업어줄 테니.”

선담은 얼굴 꼴이 너무 흉하고 사지가 아프다고 말하려다가 그만 화두를 뺏기고 백진의 등에 엉거주춤 업히고 말았다. 백진이 허리를 추켜세우고 두 팔을 뒤로 꿰어 선담의 엉덩이를 단단히 받쳤다. 그리고 나가는 길에 소파에서 얇은 담요를 뒤로 건네주고 그 위로 코트를 두 겹이나 덮었다. 12월의 밖은 꽤 추울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선담은 백진의 어깨에 뺨을 기댔다. 오랜만에 바깥바람을 쏠 생각을 하니 턱이 무거워지고 눈이 으슴푸레했다. 어딘가에 얼굴을 기대지 않으면 고꾸라질 것 같아서 코트 안으로 몸을 파묻고 빛을 차단하듯이 웅크리렸다. 밖으로 나가는 게 대체 얼마만인가. 두려울 정도였다. 선담은 얕은 어둠속에서 백진의 흔들리는 행보를 따라 엎어져 있다가 햇살이 쏟아질 즈음에 감았던 눈을 실같이 떴다. 양말과 파자마 사이로 드러난 종아리에 제법 차가운 공기가 철썩 붙었다. 마침내 복도에서 벗어났을 때에는 눈이 부셨다. 놀이터에서는 아이들이 뛰어놀았고 나뭇가지는 앙상했다. 눈이 쌓인 세상이 꿈같이 하얬다. 

“첫눈 왔거든. 어때, 나오니까 좋잖냐.”

온종일 혼잣말만 하게 되는 백진에게 사뭇 감사한 마음이 들어 선담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말랐어도 그래도 남자고 키도 꽤 큰데 백진은 싫은 소리 하나 없이 아파트단지를 한 바퀴 돌자고 했다. 한가한 오전 시간이라 인적은 드물었다.

사박사박

네이비색 스니커즈가 하얀 눈밭에 족적을 남기며 공원을 가로질렀다. 힘없이 웅크려 눈만 빼꼼 뺀 선담은 그래도 기대이상으로 기분이 좋은지 군소리 없이 얌전히 업혀있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바깥공기를 모으기도 했다. 그런 작은 움직임이 피부로 느껴져 백진은 잠시 말이 없었다.

사람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안아준 기억은 너무도 오래되어 빛이 바래버렸다.

척추까지 스며드는 찬바람에 보호받는 건, 오히려 선담의 따스한 온기를 둘러 안은 자신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 꼬마가 숨기는 것이 무엇인지, 어쩌다 남자의 몸으로 수태를 했는지, 어느 계열사의 실험군이었는지, 무슨 일을 당해 이렇게 다쳤는지, 회복한 후에 다시 실험군으로 돌아갈 것인지……. 단순하기 때문에 더욱 당연한 의문들이 백진의 발걸음을 점점 느리게 만들었다. 

제멋대로인 삶을 즐기는 내가 누군가를 이렇게까지 돌본 적이 있었나.

소아병동의 아이들마저 제대로 건사 못해 옷을 벗어야 했던 내가…….

백진의 입가가 굵은 호선을 그렸다.

이윽고 눈이 소복이 쌓인 공원 끄트머리에 백진이 멈춰 섰다. 아무도 없는 공원은 하얀 도화지가 깔린 작은 동산이었다. 눈송이가 쌓이지 않은 곳이 없었다. 나뭇가지와 울타리, 자그마한 벤치에도. 백진이 걸음을 멈추자 선담이 꼬물거리며 코트에 처박아둔 고개를 들었다.

“꼬맹아. 네 애기가 보고 싶냐.”

“……….”

“그래서 하루하루가 그렇게 고단하고 아직 일어나지도 못하고, 그런 거냐.”

“……….”

“사실 나는 잘 모르겠다. 너는 말 하지 않지만 나랑 석재는 네가 인공배아 연구진 소속일거라고 보고 있는데 실험이든 뭐든 그래도 네게 소중한 배아였다면 그게 맞는 거겠지. 마음이 많이 아파서 일어나지 못한다는 거라면 이해한다. 나도 우리 누님이 첫째 낳다 실패하셔서 그 낭패감을 간접적으로나마 겪은 적이 있었어.”

선담은 대답 없이 고개를 돌려 다른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움직임에 거부감은 없어서 백진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네 자궁, 온존하다.”

바람에 작은 눈송이가 흩날렸다.

“자궁의 주인은 죽었지만 그래도 그 궁전은 유효해. 아직도 네 뱃속에 있다. 그 임상실험팀은 실패하지 않았어. 이게 끝이 아니니까 아이를 잃어서 슬픈 거라면 울지 마라.”

나를 달래려는 말이면 부탁이니 그만두라고 대꾸하려던 선담은, 백진의 귓바퀴가 새빨개져있는 것을 보고 깨달았다. 진심이구나. 

……….

비장한 각오로 도망치긴 했지만 사실은 거듭된 울분을 참지 못해 박차고 나온 연유가 더 컸다. 더욱이 태아를 잃어버린 이상 그들에게 면목도 없었다. 그들을 한번 배신한 셈이었다. 그 귀한 태아를 잘못 품은 주제에 도망치고, 거기다 잃어버리기까지 했다. 은협이 아무리 괴롭혀도 꿋꿋이 지켰어야 했는데. 태아를 배에 태우고 도망가서는 흔적도 없이 떼어버린 인간이 자신이었다. 

자궁은 당연히 사라져버렸을 줄 알았다. 아기를 날려 보냈으니 그 집도 함께 소멸했다고 생각했다. 너무도 당연한 이치인 줄 알았는데 아직도 자궁이 내게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자궁이 살아있다.

그저 자궁을 잃었다는 생각 때문에 그간을 허무하게 보낸 건 아니지만 새로운 사실을 접한 충격은 컸다.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온 충격과 비슷할 것이다. 눈 아래가 뜨거워졌지만 왜인지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눈밭이 된 공원 한가운데에 노란 진돗개가 새끼 대엿을 이끌고 주인과 함께 달리고 있었다. 그중 몸집이 작고 꼬리도 몹시 짧은 새끼 한마리가 제 어미와 형제들을 쫓고 있었다. 녀석은 다리를 몹시도 절었다. 엉덩이가 바닥에 질질 끌릴 정도로 흉하게도 절었다. 그래도 강아지는 멍멍 짖으며 잘도 달렸다. 

눈가에 고여 있던 더운 물기가 화기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개는 인간하고는 달라서 기형여부를 확인할 필요가 없다는 그런 말로는 도저히 자신을 위로할 수 없었다. 

개새끼조차도 제 새끼를 낳아서 기를 권리를 가지는데 하물며 죽도록 고생해서 남의 뜻에 따라 겨우겨우 새끼를 밴 인간에게는 그런 권한 따위 주어지지도 않았다. 인간임에도…… 자신은 분명한 인간임에도 개보다 못한 대접을 받았다. 짐승에게도 주어지는 지극한 섭리가 자신에게는 송두리째 뽑혀나갔다. 내 새끼는 오로지 실험의 일부란 이유만으로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 다리를 저는 강아지마저도 저희들과 저렇게 잘 어울리는데 내 새끼는 그깟 기형아 확률이 높다고 바깥세상 빛 한줌 비쳐보지 못한 채 도륙 당했다. 제 아비에게 거부당하고 어미가 정신을 잃은 사이 쓰레기통에 처박혔다. 어미의 심장과 함께 뛰던 그 연약한 핏덩이가. 아무것도 모르고 세상에 나올 준비만 하던 핏덩이가. 선담의 눈가가 빨개졌다.

그 집에서 뛰쳐나온 이상 자신은 그들에게 용서를 빌어야 할 잘못을 저질렀다. 그래선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EEC는 반쯤 정신을 놓고 모체를 찾고 있을 것이다. PTA사도 발칵 뒤집어졌을지 모른다. 막대한 자금도 의미 없이 새나가고 있을 것이다. 화를 많이 내어도 할 말은 없었다. 또 때린다고 해도 할 말 없었다.

그러나 단 하나, 그의 심장에 각인된 고통은 죄스러운 마음보다 넓고 깊게 도사리는 뜨거운 생의, 그 자체였다. 피눈물이 흐를 것 같은 빨간 눈이 표독스럽게 일그러지며 선담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악물었다.

언젠가 이곳을 떠나 EEC로 돌아가게 되면, 언젠가라도 EEC로 돌아가게 된다면, 나는 당신들 방식대로 징계를 받거나 평생 못 갚을 벌금을 물어야 할지 모른다. 수억의 자본을 갉아먹으며 그깟 실패작 하나 고수하겠다고 도주까지 감행한 내게 죄를 묻는다면 나는 기꺼이 당신들이 시키는 대로 할 것이다. 그래, 자궁이란 이름의 의무를 버리고 도망쳤던 내게 손가락질을 하고 침을 뱉고 매질을 할지라도 전부 옳다. 뭐든지 받아 주리라. 그러나 당신들의 발길질과 지탄을 받아 스스로 목줄을 끊어버릴지언정 나는 결코, 결코ㅡ….

메마른 뺨을 가르며 붉디붉은 눈물이 길게 흘러내렸다. 

당신들의 아이는 낳아주지 않는다.

절대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