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한번 터진 눈물은 영옥이 그를 집 근처에 내려줄 때까지 홍수가 나도록 멈출 줄을 몰랐다. 처음에는 무슨 일이여, 와 울어. 달래주던 영옥도 종국에는 뚝 그치라는 말만 남긴 뒤 도망치듯 멀어졌다.
마루에서 콩나물을 다듬던 할아버지가 터벅터벅 걸어서 집에 도착한 서진을 보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아이구 서진아! 니 와 우냐잉?”
할아버지는 버선발로 달려 나와 펑펑 눈물을 쏟는 서진의 몸을 살펴보더니 물었다.
“흑… 흐으윽….”
“아가. 무슨 일이여? 잉? 누가 니 때렸냐?”
“…으흐윽… 할아버지이….”
원래 눈물이란 것은 누가 달래주면 더 왈칵 흘러나오는 법이다. 서진은 웅얼웅얼 들리지도 않는 이유를 대면서 점점 더 서럽게 울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할아버지는 몰랐다. 그 눈물이 며칠 동안 이어질 줄은.
그는 밥을 먹으면서도 흑흑. 밭일을 하면서도 흑흑. 엎드려서 과자를 먹으면서도, 누워서 게임보이를 하면서도 울었다. 심지어 화장실에서도 우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 날 미역국의 간이 잘됐다고 후루룩 떠넘기다가 또 닭똥 같은 눈물을 또르르 떨어뜨리는 그를 본 할아버지가 참다못해 숟가락을 들었다.
“고만, 고만! 고만 쳐 울어. 이 썩을 놈으 자슥.”
“아흑.”
숟가락으로 얻어맞자 서진의 눈에서 또 생리적인 눈물 한 방울이 찔끔 고였다.
그가 울음을 그친 건 그날로부터 딱 일주일 정도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새벽닭처럼 찾아오던 남자는 그날 이후로 정말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았다.
알고 보니 그는 한여름에도 찬 바람이 쌩쌩 부는 남자였다. 질척거리기는커녕 지나치게 쿨해서 온몸이 얼어붙을 정도다. 그럼 그렇지. 세상 따스운 척은 다 해놓고.
어느새 슬픔은 싹 잊고 졸렬한 마음으로 돌아선 서진이 이제는 가물가물한 전 남친을 무심코 떠올리더니 픽 코웃음 쳤다. 남자를 믿느니 지나가는 고라니를 믿겠다.
“할아버지. 전화기 써도 돼요?”
그가 할아버지 방에 있는 전화기를 들고서 물었다.
“앵간치 써라잉.”
부모님이 당분간은 안전을 위해 지인들과 연락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었지만, 그 당분간은 이제 지난 것 같아 오랜만에 삐삐에 건전지를 넣고 전원 버튼을 눌렀다. 켜자마자 바로 긴 화면에 뜨는 숫자에 그쳤던 눈물이 다시 핑 돌았다.
[017902]
영일칠구영이. 영원한 친구 영미……,
이 암호는 김영미였다. 연락도 없이 갑자기 사라진 소꿉친구의 연락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녀석을 생각하니 가슴 한쪽이 찌르르해졌다. 서진은 조심스럽게 수화기를 들고 전화번호를 하나하나씩 꾹꾹 눌렀다.
뚜르르르르― 신호가 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화기 너머에서 달깍 소리가 들렸다.
- 여보세요?
그리운 목소리에 서진이 흡, 입을 틀어막았다.
- …누구세요?
“…….”
- …홍서진? 홍시…?
“……김영미….”
- 야 이 씹새….
잠시 귀에서 수화기를 뗀 서진은 다시 차분하게 전화기에 대고 갑자기 잠수 타게 된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 …뭐? 농사를 지어? 미스 홍이? 크흡―
“아 고추도 심고 고구마도 심었다니까.”
서진이 한 손으로는 전화선을 비비 꼬며 황당하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자지러지는 영미의 웃음소리가 울린다. 그렇게 시작된 수다는 한 시간이 넘도록 계속됐다.
- 나 진짜 상상이 안 가서 그러는데 너 농사짓는 거 구경 가도 되냐?
잠시 눈을 굴리며 고민하던 서진은 그럼 주말에 읍내에서 만나자며 그녀에게 위치를 불러주었다. 전화를 끊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 그는 이것저것 옷을 대보며 주말에 입을 옷을 미리 고르기 시작했다.
***
“야, 이거 철이헌테……. 아니다.”
비료 두 개 사이에서 고민하던 할아버지가 저도 모르게 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았다.
해가 뜨면 찾아오던 사람의 발길이 증발이라도 한 것처럼 뚝 끊겼음에도 할아버지는 의도적으로 그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서진은 얘기가 나와도 딱히 상관없었는데 오히려 더 유난이었다.
“저 어때요?”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온 서진이 할아버지를 향해 물었다.
“으짜긴. 딱 양아치시끼 맹키로.”
그럼 이거 입고 나가야겠네. 아무래도 여기 사람들은 세련됨을 양아치 같다고 표현하는 것 같았으니까. 히죽 웃은 서진은 언제 슬퍼했냐는 듯 콧노래를 부르며 머리를 살살 쓸어 넘겼다. 오랜만에 고향 친구를 만날 생각을 하니 마음이 들떴다.
기하학무늬가 알록달록 어지러운 셔츠를 입고 할아버지의 트럭에 오른 그는 삐걱삐걱 손잡이를 돌려 창문을 열고 바람을 맞으며 읍내로 향했다.
다행히 주차장에 차를 세우자마자 서울 번호판이 달린 검은색 외제 차 한 대를 발견했다. 씩 입꼬리를 올리며 웃은 서진이 차에서 뛰어내려 헐레벌떡 검은색 차의 창문을 두드렸다.
“오, 마이, 가쉬.”
바로 창문이 부드럽게 내려가며 등장한 여성이 선글라스를 살짝 내리고 다짜고짜 영어를 남발했다.
“김영미!!”
서진은 좁은 창문 사이로 어떻게든 그녀를 끌어안으며 온몸으로 서러움과 기쁨을 표현했다.
“헤이 헤이, 백오프 백오프.”
영미는 그를 마주 껴안지 않고 허공으로 손을 들어 올리며 떨어질 것을 재촉했다. 서진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녀를 놓아주자, 차에서 내린 영미가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경악을 감추지 못한다.
“콘셉트 개방파야 뭐야…. 촌놈 다 됐네?”
영미의 말에 서진은 영문 모를 얼굴로 시선을 내려 자신의 패션을 살폈다. 이 정도면 괜찮게 입은 건데. 밭에서 일할 때 봤으면 바로 실려 갔겠네. 읍내에서 만나길 잘했다.
그가 말할 때 종종 영어를 섞는 것도, 패션이나 겉모습에 민감한 것도 그녀와 함께 지낸 영향이 컸다. 어릴 때부터 공놀이보단 마론인형을 좋아하고 소꿉놀이를 더 좋아했는데, 또래 애들이 놀리기라도 하면 영미가 나서서 항상 개 패듯 때려 주었다.
“피부 탄 거 봐…. 푸어 베이비.”
“알았으니까 일단 어디라도 들어가자.”
속상해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영미를 끌고 대충 번쩍번쩍 화려한 간판이 달린 커피숍을 찾았다. 지하에 있는 커피숍은 조금 독특한 분위기를 풍겼다.
“어서 오셔라.”
껌을 쩍쩍 씹는 파마머리 종업원이 두 사람을 위아래로 쓱 훑어보더니 메뉴판을 툭 건넨다. 이제 보니 다른 여자 종업원들도 하나같이 짧은 치마를 입고 진한 화장을 하고 있었다.
‘이런, 씹.’
제일 화려한 간판을 고른 건데, 골라도 이상한 티켓 다방을 골라 버렸다. 당황한 서진이 영미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오히려 색다른 경험에 신이 난 듯했다.
벗겨진 가짜 가죽 소파 위에 앉은 두 사람은 메뉴판을 펼쳐 얼굴을 가리고 소곤거렸다.
“여기… 그런 데… 맞지?”
영미가 웃음을 꾹 누르며 조용히 물었다. 아무리 친구여도 여자애를 이런 곳에 데려오다니. 서진은 할 말이 없어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작게 “미안” 하고 말했다.
“나 다방 레지 처음 봐….”
“아, 그런 말 하지 마.”
당황한 서진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한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았다. 딸랑. 돌연 뒤쪽에서 종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리더니, 별안간 영미의 눈이 번쩍 뜨이면서 동공이 크게 확장됐다.
“어메야. 오빠 혼자 왔어라?”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는 별다른 대꾸 없이 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라믄 이따 불러요―”
짧은 치마를 입은 종업원은 한껏 들뜬 목소리로 남자에게 메뉴판을 건네고도 쉽사리 테이블 옆을 떠나지 않았다. 천천히 영미의 입을 막은 손을 뗀 서진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며 물었다.
“뭘 그렇게 놀래?”
“…지저스 크라이스트.”
영미는 멍한 얼굴로 시선을 한 곳에 고정한 채 중얼거렸다.
“예수님이라도 왔어?”
“……아니. 예수님보다 더한 거. 예수는 안 믿어도 저 남자는 믿고 싶거든.”
그녀가 뭔가에 홀린 듯 말을 이었다.
“뭔 소리야.”
서진은 미간을 구기며 메뉴판을 뒤적거렸다.
“홍서진. 홍시야. 놀라지 말고 잘 들어. 저 뒤에 있는 남자….”
영미가 비장한 눈빛으로 침을 꿀꺽 삼키며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너보다 잘생겼어.”
서진은 가볍게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메뉴판을 넘겼다.
“그럴 리가.”
그러다 불현듯 뒤통수에 망치라도 맞은 것처럼 뚝 동작을 멈췄다. 떠오르는 사람이 딱 한 사람 있었으니. 설마. 여기가 어디라고.
“진짜라니까? 살짝 한번 봐봐. 서울에서도 못 보는 미남을 이런 촌구석에서 다 보네.”
영미는 감동한 눈빛으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서진도 평소 같았으면 벌써 백 한 번 정도 뒤돌아서 확인해 봤겠지만, 지금은 목이 딱딱하게 굳어버린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진짜 그 녀석일까 봐. 그 자식이 왜 이런… 유흥 업소에.
“근데 저 상판으로 왜 이런 업소에 다니고 그런다니. 남자 새끼들이란. 어후.”
영미가 질린다는 듯 어깨를 부르르 떨며 입술을 삐죽 내민다.
잠시 후 두 사람이 주문한 커피가 나오고, 홀짝홀짝 마시는 동안에도 서진은 여전히 석상처럼 굳어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
“거북이야 뭐야…. 어깨 펴.”
잔뜩 굳어 있는 그를 본 영미가 손을 뻗어 어깨를 주무르며 몸을 풀어주었다. 그렇게 서진을 한참 주물럭거리던 영미의 입꼬리가 갑자기 의뭉스럽게 올라가더니 금세 이상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어머. 저 오빠 뭐지?”
그녀가 서진의 뒤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장난 섞인 어투로 중얼거렸다.
“…막 나 뚫을 것처럼 쳐다보는데? 내 상판대기 빵꾸 나겠어.”
“너라도 그만 봐.”
불안해진 서진이 그녀를 말리고 나섰다. 영미의 불도저 같은 성격상 자그마한 불씨라도 일단 불이 붙으면 큰일 났다.
“크흡…. 내가 다방 레지인 줄 아나 봐.”
영미가 가까스로 웃음을 참으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미스코리아 파마머리, 딱 달라붙는 민소매와 청바지. 전부 명품이었으나 이 공간에선 그 위화감을 잃었다.
계속해서 뒤에 앉은 남자와 시선을 교환하던 영미는 참다못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미친 계집애야. 어디 가!”
깜짝 놀란 서진이 작게 소리치며 그녀를 말렸지만 이미 늦어버린 후였다. 가게 안에 영미의 하이힐 소리가 또각또각 울려퍼졌다. 서진은 그때까지도 차마 몸을 돌리지 못하고 애꿎은 얼굴을 감싸 쥐었다.
“익스큐즈 미? 왜 사람을 그렇게 보세요?”
뒤에서 영미의 장난기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와. 내 눈깔에 문제 있습니까.”
이어서 남자의 잠긴 목소리를 듣는 순간, 커피 잔을 쥔 손이 흔들리며 싸구려 커피가 테이블 위로 쏟아졌다. 분노에 사로잡힌 서진이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 뭐 눈깔은 아주 엑썰런트 하신데. 그 눈깔로 자꾸 째려보시니까…. 나한테 관심 있어요?”
“있으믄.”
여전히 잘생긴 낯짝의 철이 뒤를 돌아본 서진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뭐…. 그럼 저 오빠가 티켓 끊은 거 물러주고 오빠랑 있으려고.”
그렇게 말한 영미가 서진을 돌아보더니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윙크를 날렸다. 서진은 불꽃놀이처럼 터지는 분노로 머릿속이 어지러워 그런 사실도 몰랐다.
‘저 자식이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이런 업소에….’
어쩐지. 몰래 이런 데서 풀고 있었단 말이지. 아주 착한 척, 순진한 척은 다 해놓고 뒤에서 온갖 더러운 짓은 다 하고 다니셨구먼.
“…그랍시다.”
그의 명쾌한 대답과 동시에 라디오에서는 신나는 리듬의 전주와 함께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이 흘러나왔다.
눈앞에서 믿었던 전 남자 친구가 제 친구를 돈으로 사겠다는 장면을 목격한 서진은 정수리 위로 1톤 트럭만 한 돌덩이가 떨어진 것 같았다. 이건 어릴 적에 즐겨 보던 〈요술공주 밍키〉가 마지막 화에서 차에 치여 죽어버렸을 때 받았던 충격보다 더하다.
당장 터져 나올 것 같은 웃음을 겨우 참은 영미는, 다짜고짜 소파에 앉은 철을 옆으로 밀쳐 버리더니 바로 옆자리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 장난에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와우. 얼굴도 얼굴인데 이…. 바디가 진짜 나이쓰 하시네요.”
서진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상체를 푹 숙이고 바닥을 보면서 분을 삭였다. 속았어. 나쁜 새끼. 똥개 새끼. 해바라기는 개뿔…….
서진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나 터벅터벅 걸어 두 사람이 앉아 있는 테이블을 그대로 지나쳤다. 딸랑. 종소리가 나는 문을 열고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곧바로 주차장으로 향한 그는 트럭에 앉아서 영미를 기다리기로 했다. 장난이 심하긴 해도 항상 마지노선은 넘지 않았으니 여기서 조금 기다리다 보면 밖으로 나올 것이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신경질적으로 커피숍 계단을 올라오는 영미의 모습이 보였다. 서진은 차에서 내려 기다렸다는 듯 영미에게 다가갔다.
“어우, 재수 없어. 어우!”
영미는 뭐에 화가 났는지 매사 유쾌한 그녀답지 않게 치를 떨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서진이 잘됐다는 듯이 맞장구쳤다.
“그러게, 누가 그런 장난을 치냐?”
“…뭐 저래. 사람을 무시해도 진짜…. 다시 가서 죽일까?”
다시 들어가서 놈을 죽이고 싶은 사람은 영미가 아니라 서진이었지만, 가슴에 ‘참을 인’ 자를 새기며 고개를 저었다. 이제 상대할 가치도 없었다.
뭐, 애초에 저한테 미련이 조금도 없으니까 한 번을 안 찾아오고 이런 데나 뻔질나게 드나든 거겠지. 덕분에 딱 개미 먹이만큼 남아 있었던 철에 대한 자신의 미련도 소화돼서 똥으로 배출된 느낌이었다.
“너 국밥 못 먹어봤지?”
서진은 딱 한 번 돼지국밥을 먹어본 경험을 가지고 으스대며 그녀와 함께 근처 밥집으로 향했다.
변변찮은 식사 대접이었지만, 영미는 까다로운 성격답지 않게 맛있게 먹어주었다. 사실 밥알이 코로 넘어갈 정도로 깔깔 웃고 수다 떠느라 무슨 맛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우리 홍시. 애인은 언제 생긴다고?”
“…뭐. 여자 친구?”
숟가락을 입에 물고 있던 서진은 왠지 애인이라는 표현이 조금 낯간지러워 정정했다.
“…뭐…. 그럴 수도 있고.”
영미는 눈알을 이상하게 굴리며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기류를 놓치지 않은 서진이 정색하며 물었다.
“그 표정 뭐냐?”
“응? 아니― 우리가 숨길 게 있나 해서….”
영미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끝을 흐린다.
“너 지금 나 호모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아니. 절대.”
서진이 굳은 표정으로 묻자 영미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란 말에 바로 표정이 부드럽게 풀린 그는 다시 밥을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었다.
“호모 아니고 게이.”
“풉―”
“호모면 또 어때. 원래 잘생긴 남자는 다 게이….”
서진은 안심시켜 놓고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영미의 말에 사레가 들렸다. 결국 숟가락을 집어 던지듯 내려놓은 서진이 또 악에 받쳐 소리쳤다.
“이런, 씹. 그놈의 호모! 호모호모호모!!”
“호모나 세상에. 아니면 아닌 거지.”
서진의 급발진에 놀란 영미가 주변을 둘러보며 그를 진정시키는 건지 놀리는 건지 모를 말을 했다.
“아냐, 아냐, 아니야!!”
“강한 부정은 강한 긍…. 헙, 아니야.”
영미는 원래 서진을 놀리는 데 도가 튼 사람이었다. 결국 전쟁 같은 식사 시간이 끝나고 난 뒤에야 다시 평정심을 찾은 서진은 어느새 어두워진 주차장에서 서울로 돌아가는 영미를 아쉬움 속에 배웅했다.
차에 올라탄 영미가 운전석 창문을 내리며 물었다.
“그럼 우리 홍모 서울 언제 올라와?”
홍모는 조금 전에 그녀가 새롭게 지어준 별명이었다. 벌써 새 별명이 익숙해진 서진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뭐 길어봐야 여름 안에.”
영미는 혹시 몇 달 후에도 일이 해결되지 않으면 자신이 어떻게든 도와줄 테니 말하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서울로 떠났다.
서진은 시야에서 차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아쉬움에 눈을 떼지 못했다. 조금만 버티면 금방 서울에서 만날 수 있겠지. 서진은 어쩔 수 없이 아쉬움을 뒤로 하고 파란 트럭에 올라탔다.
왠지 울적해진 기분에 억지로 콧노래를 부르며 초가집으로 향했다. 조금이라도 틈이 있으면 철에 관한 기분 나쁜 생각이 머릿속을 파고들 것 같아 집에 도착하자마자 빠르게 몸을 씻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해가 중천에 뜨고 나서야 흐느적거리며 몸을 일으킨 서진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방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왔다.
‘분명 오늘 고추밭에 약 쳐야 한다고 들었는데…….’
할아버지가 자신을 깨웠어도 열두 번은 두들겨 패서 깨웠을 시간인데 여태 아무런 기척이 없는 것이 이상했다.
“할아버지?”
서진은 의아한 마음에 할아버지의 방 앞을 서성이며 그를 불렀다. 역시 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혼자 밭일이라도 나가셨나.
그냥 자기 방으로 돌아가던 서진이 순간 멈칫하더니 다시 할아버지의 방문을 두드렸다. 이번에도 방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서진은 조심스레 끼익, 방문을 열어보았다.
“할아버지!!”
방바닥에 쓰러져 있는 할아버지를 발견한 서진은 아연실색하며 그에게 달려갔다. 침착하게 코 근처에 손가락을 대 보고 손목의 맥박까지 확인한 다음 지체하지 않고 전화기를 들고 119 버튼을 눌렀다.
뚜르르―
입술을 잘근잘근 물어뜯으며 불안에 떨던 서진은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다급하게 사정을 설명하며 앰뷸런스를 빨리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대답은 예상과 달랐다. 서진은 화가 나서 큰 소리를 내며 펄쩍 뛰었다.
“아니, 급해 죽겠는데 그걸 어떻게 기다려요!!”
무슨 놈의 앰뷸런스가 오는 데만 한 시간이 넘게 걸린다는 건지. 병원에 가는 길을 알면 직접 운전해서 가는 게 훨씬 빠를 것 같았다.
전화를 끊은 서진은 방에 있는 모든 서랍을 미친 듯이 뒤지기 시작했다. 보이는 수첩들을 빠르게 넘기며 확인하다가 기어코 전화번호가 적힌 수첩을 찾아냈다.
뚜르르르르―
급한 대로 수첩을 뒤져 영옥부터 삼총사 아주머니들에게 차례대로 전화해 봤지만, 다들 밭일을 나갔는지 속이 타들어 가는 연결 신호만 계속될 뿐이었다.
“미치겠네.”
머리를 쥐어뜯으며 다시 수첩을 내려다본 서진이 아는 이름을 찾기 위해 몇 장 더 뒤적거렸다.
‘범철’
서진은 주저할 것 없이 이름 옆에 쓰인 전화번호를 꾹꾹 눌렀다. 지금은 자존심이나 개인적인 감정 따위는 개나 줘버렸으니 아무래도 좋다.
뚜르르르―
- 예.
신호가 한두 번 울리자마자 바로 연결된 전화에 멈칫한 서진이 잠시 할 말을 찾았다.
“…….”
- ……영감님? 뭔 일 있습니까.
아무래도 전화 건 사람의 번호가 뜨는 모양이었다. 별안간 서진의 목구멍이 꽉 막혔다.
무엇보다 왜 이러는지 정말 이해가 안 가는 건, 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갑자기 멀쩡하던 눈에 수도꼭지라도 튼 것처럼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는 거다.
“……흐윽, 철아… 도와줘. 병원…, 병원 좀 데려다줘…. 할아버지, 흑, 쓰러지셨어.”
서진 본인도 갑작스레 쏟아지는 눈물이 당황스러웠지만, 뺨을 적시는 뜨뜻한 물은 그칠 줄을 몰랐다.
- 거 가만 있어.
그 한마디를 끝으로 뚝 하고 전화가 끊기고, 서진은 흐르는 눈물을 닦으면서 끊임없이 할아버지의 맥박을 확인하며 그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타이어 마찰음이 들리고 마당에 커다란 SUV 한 대가 멈춰 섰다. 아무래도 커다란 한옥 근처에 세워져 있던 여러 대의 차가 다 그 집 차였나 보다.
철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활짝 열린 방문으로 뛰어 들어왔다.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또 서진의 눈에서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흐윽…. 어떡해…”
철은 별말 없이 바로 할아버지를 조심스레 들어 올려 미리 일자로 눕혀둔 뒷좌석에 눕혔다. 서진이 조수석에 오르자마자 급하게 출발한 차는 속도가 어마어마했다.
그가 운전하는 동안 옆에서 당장 장례라도 치를 기세로 울고 있던 서진은 어느새 차 안에서 티슈까지 찾아내 코를 풀고 있었다.
“킁― 흐윽… 흑, 크흥…!”
코를 푼 티슈가 무릎 위에 조금씩 쌓일 때쯤 도착한 병원 응급실은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할아버지는 바로 들것에 실려 정밀 검사에 들어갔다.
서진이 검사실 앞에 쪼그리고 앉아 할아버지를 기다리는 동안 철은 보이지도 않았다. 병원에 도착하고 나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뭐, 알 바도 아니고.
잠시 후, 서진은 간호사에게 5층의 입원실로 가보라는 안내를 듣고 환자 입원실을 찾았다. 바로 침대에 앉아 있는 할아버지를 발견하고 동공이 커다래진 서진이 할아버지를 부르며 침대 앞으로 달려갔다.
“오메. 시끄러븐 거.”
그를 본 할아버지가 인상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곧 도착한 의사는 할아버지의 당뇨가 오래되었고 조절을 잘하지 못해 케토산증이란 것이 생겼다고 전했다. 최소 일주일 이상은 입원 치료를 하는 것이 좋다고.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며 설명을 들은 서진은 일단 수납을 하기 위해 병원 1층으로 내려갔다. 사실 돈을 내는 게 아니라 양해를 구하기 위해서였지만.
심호흡을 크게 하고 수납 창구에 몸을 기댄 서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수납을 조금 나중에 천천히 할 수 있을까 해서요.”
“환자분 성함이?”
“김순돌이요.”
그 말에 잠시 서류를 뒤적거리던 직원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음. 김순돌 환자분 수납 다 끝나셨어라.”
“예?”
황당한 얼굴로 직원을 보던 서진의 머릿속에 한 사람이 스쳤다. 서진은 곧장 창구에서 몸을 돌려 커다란 남자를 찾아 나섰다.
병원 안을 샅샅이 뒤지던 서진은 바깥 주차장까지 뛰쳐나와서야 검은색 SUV의 문을 여는 그를 발견하고 다급하게 소리쳤다.
“철아! 허억, 철아!!”
헉헉 숨을 몰아쉬며 달려오는 서진을 발견한 철이 동작을 멈추고 가만히 그를 바라봤다. 표정에도 온도가 있다면 한 마이너스 100도 정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후우, 그냥 가면… 어떡하냐.”
힘겹게 호흡을 고른 서진이 간단하고 명료한 인사를 건넸다.
“고맙다.”
사적인 감정은 사적인 일이고, 한두 푼도 아닌 병원비를 내준 건 고마운 일이었으니까.
서진이 한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지만, 남자는 여전히 찬 바람 부는 눈으로 가만히 그 손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철이 악수를 받아주지 않자 민망해진 서진은 슬그머니 손을 뒤로 물렸다.
“뭐, 암튼 고마웠어.”
그러고는 왠지 머쓱한 느낌에 급하게 인사를 마무리하기로 했다. 그렇게 뒤돌아서려는 찰나, 익숙한 목소리가 발목을 잡았다.
“고마우믄.”
그 목소리에 서진이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어진 말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다신 내 눈에 띄지 말어.”
그 말을 들은 서진은 잠시 의미를 생각하듯 멍하니 서 있었다.
“뭐?”
이내 못 들을 것을 들었다는 듯 눈썹을 찌푸리며 되묻는다.
“연락도 하지 말고. 알겄냐잉.”
철은 여전히 얼음장 같은 얼굴로 말을 잇더니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어찌나 찬 바람이 쌩쌩 부는지, 한여름에 춥다는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허.”
서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혼자 멀거니 서서 커다란 자동차가 저 멀리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봤다.
‘방금 내가 고맙다고 한 인사를 저렇게 받는다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저놈의 자식이?’
헛웃음이 입술 사이를 비집고 새어 나왔다.
그냥 가만히 서 있었는데 면전에 개똥을 투척 당한 기분이라 당장 해바라기밭에 가서 똥이라도 싸야 그나마 기분이 좀 풀릴 것 같았다.
“씹… 팔….”
서진은 욕을 짓씹으며 차오르는 분노로 의지를 불태웠다. 그래. 더러워서 다시는 그 눈깔에 안 띄고 만다. 굳이 허공에 퉤, 하고 침을 뱉고는 매몰차게 뒤돌아섰다.
***
할아버지가 입원해 계신 동안에는 옆에서 영옥이 가르쳐주는 대로 고추밭을 돌보기로 했다.
“아이구, 염병 총각! 그거 그라고 뿌리믄 안 돼.”
“네?”
분무기를 든 서진이 뭐가 문제냐는 듯 순진한 얼굴로 영옥을 돌아보았다.
“여 여, 보이제? 한나도 안 묻은 거. 요로코롬. 어? 요로코롬 뿌려야제잉.”
영옥이 직접 시범을 보여주며 타일렀다.
“이렇게요?”
서진이 대충 그녀를 따라 하며 다시 묻자 영옥이 답답한 듯 가슴을 마구 두드렸다.
“오메… 답답해 뒤져불겄구만. 이라고 일허는디 그 영감태기가 가만 내비둔당가?”
잠시 생각에 잠긴 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는 일을 안 나가면 궁둥짝을 때렸지만 못한다고 뭐라 하진 않았으니까.
“하이고오. 우리 염병 총각 나중에 장가는 으찌 갈라나…. 얼굴 뜯어먹고 사는 여자루 골라야겄네.”
웃음을 터뜨린 영옥이 노래하듯이 중얼거리며 밭일을 계속했다.
서진은 그녀와 일을 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대충 일하고 있었는지 새삼 깨달아가는 중이었다. 아니, 사실은 거의 방해를 하고 있었다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다.
그렇게 영옥의 매서운 지도편달 아래 밭일을 끝내고, 병원에 입원한 할아버지의 병실을 찾은 그는 일이 힘들다며 잔뜩 불평을 늘어놓았다.
“아, 그럼 일이니께 힘들제.”
할아버지의 촌철살인에 고개를 끄덕인 서진은 병실에 있는 텔레비전으로 시선을 옮겼다. 때마침 흘러나오는 뉴스에서는 곧 폭우가 내린다는 집중 호우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쯧, 니 꼬추밭 물고랑 만들어야 쓰겄다.”
혀를 차며 뉴스를 보던 할아버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물고랑이요?”
“기여. 삽질.”
이런 젠장. 제일 하기 싫은 일에 딱 걸려버린 서진의 표정이 마시고 버린 깡통처럼 일그러졌다. 하필이면 이럴 때 삽질이라니.
그리고 그다음 날, 벌써 비가 쫄쫄 내리기 시작한 하늘을 보며 서진이 헐레벌떡 삽을 챙겨 고추밭으로 향했다. 그에게도 이제 이 꼬추들은 그냥 지나가는 꼬추들이 아니었으니. 소중한 꼬추들이 이대로 폭우에 잠기게 둘 순 없다.
더 큰비가 내리기 전에 얼른 고랑을 파내야 했다. 서진은 우비가 벗겨지는 것도 신경 쓰지 못하고 미친 듯이 삽질을 시작했다. 요령 없이 퍽퍽, 물에 젖어 질퍽한 흙을 파낼 때마다 여린 손바닥과 손가락의 피부가 벗겨지는 것처럼 쓰라렸다.
“아….”
작은 삽 하나로 넓은 고추밭의 물고랑을 파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느껴질 때마다 더 열심히 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그래도 몇 번 해봤다고 제법 능숙해진 삽질은 시간이 갈수록 속도가 붙었다. 그는 종일 비를 맞아 거친 숨을 헐떡거리며 늦은 시간까지 혼자 밭에 남아 작업을 계속했다.
그렇게 꼬박 이틀 동안 쉬지 않고 온몸으로 비를 맞아가며 삽질을 한 결과, 서진은 머리 어깨 무릎 발 무릎 발까지 어디 한구석 안 쑤시는 곳이 없는 통증을 얻었다.
손에 잡힌 물집은 이미 여러 번 터지고 터져 그냥 장갑만 닿아도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래도 아직 만들지 못한 물고랑이 반이나 남아 있었기 때문에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소처럼 밭을 갈아야 했다.
그리고 삽질 사흘째가 되던 날, 드디어 하늘에 구멍이 난 것 같은 폭우가 시작됐다. 그는 폭우 속에서도 아직 다 못 만든 물고랑의 마지막 작업을 계속하고 있었다.
밭에서 삽질을 하는 건지 수영을 하는 건지, 숨쉬기가 힘들 정도로 쏟아지는 빗줄기에 거의 정신을 잃을 뻔했다.
그는 들숨을 들이켤 때마다 입속으로 들어오는 빗물을 끊임없이 뱉어가며 소중한 고추나무를 지키기 위해 무거운 흙을 퍼내고, 또 퍼냈다.
대체 무슨 정신으로 했는지 모르지만, 서진은 악과 깡으로 결국 물고랑을 마무리 짓는 데 성공했다. 처음 혼자 힘으로 해낸 값진 노동의 결과였다.
그 뿌듯함도 잠시, 쏟아지는 폭우를 피해 바로 트럭으로 도망친 그는 온몸을 몽둥이로 두들겨 맞은 것 같은 지독한 통증과 살을 에는 듯한 추위로 벌벌 떨었다.
‘해바라기밭.’
서진은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도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바로 차 시동을 걸었다. 당장 한 치 앞도 보기 힘든 빗길을 천천히 달려 그곳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이유는 몰랐다. 혹시 이 폭우에서 누군가가 해바라기밭을 지키려고 노력했었다는 흔적을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거북이가 기어가듯 한참 걸려 도착한 해바라기밭에 차를 세운 서진은 지체할 것 없이 바로 차에서 내렸다.
기다렸다는 듯 바로 거센 빗줄기가 온몸을 강타한다. 혼미한 정신 때문인지 시야가 흐릿했다. 서진은 몇 번이고 손으로 눈을 닦아내며 끔뻑거리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눈앞에 마주한 것은, 이제 꽃이라고는 한 송이도 찾아볼 수 없이 폭우에 폭삭 잠겨버린 풀 더미들이었다.
“…….”
해바라기는커녕 노란색 꽃잎조차 탁한 물에 잠겨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이곳엔 처음부터 그런 건 없었다는 듯이, 따뜻한 노란색 물결은 차가운 흙탕물로 바뀌어 어서 단꿈에서 깨어나라며 현실을 일깨워주는 것 같았다.
사실은 매일 보러 왔었다. 분명 집까지 한참 돌아가야 하는 길인데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매일 이곳을 지나쳤었다.
노란색 커다란 꽃들이 한결같이 해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아침 해가 뜰 때부터 여명이 질 때까지, 한 곳만 바라보는 해바라기가 좋았다.
이제 무력하게 쓰러져 사라진 해바라기밭을 멍하니 바라보던 서진은 결국 그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쏟아지는 빗속에 버림받은 꼴로 처량하게 남겨진, 한때 한 곳만 바라보는 해바라기가 가득했던 평원을 바라보면서.
그리고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남몰래 연인을 위해 해바라기를 심던 그 남자를 좋아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