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5/26)

4.

“문댕이 자슥, 싸게 인나라잉.”

방문 앞에 선 할아버지의 불호령에 서진이 누런 삼베 이불을 머리 꼭대기까지 뒤집어썼다.

“아, 할아버지이! 저 진짜 아파요, 아파.”

그러고는 속이 훤히 비치는 얇은 이불 속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생떼를 부렸다.

“아픈 자슥이 온아침 댓바람부터 밥 두 공기를 처묵냐.”

허를 찌르는 말에 서진이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오늘은 아픈 척 밭에 나가지 않기로 마음먹었는데, 판단 미스다. 감자볶음의 간이 딱 맞아 너무 맛있었던 것이 그 요인이랄까.

에라 모르겠다.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킨 서진이 간절한 목소리로 할아버지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러지 말고 할아버지도 하루 쉬어요. 네? 하루 쉰다고 그 뭐야 그, 고추가 죽기라도 한대요?”

논리와 진정성이 가득한 그의 설득이 통했는지 아무 말이 없던 할아버지는 마침내 “기여.” 하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문지방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앗싸. 서진이 속으로 쾌재를 부르는 그때, 어느새 손에 싸리 빗자루를 든 할아버지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꼬추는. 안 디져도. 니는. 디져불제.”

“아! 아아!”

결국 단어 한 마디마다 리듬감 있게 궁둥이를 맞고 나서야 몸을 일으킨 서진은 할아버지와 함께 고추밭으로 향했다.

오늘만큼은 절대 밭에 나가고 싶지 않았다. 혹시라도 철이 나타나면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만 해도, 아니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다. 어제 일은 하나부터 열까지 머릿속에서 끄집어내 삭제하고 싶은 기억뿐이었다.

“여 분무기로 여짝부터 쩌기 저짝까지. 알았제?”

할아버지는 입이 댓 발 나온 서진의 손에 기어코 기다란 분무기를 쥐여주었다. 칼슘이라나 뭐라나. 한숨을 푹 내쉰 서진은 신경질적인 몸짓으로 분무기를 칙칙 뿌려댔다.

저기 먼 길 어디선가 철이 나타나지 않을까. 작은 고추나무에 몸을 최대한 숨겨가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칼슘 나부랭이를 뿌려대고 있을 때, 밭 근처에 못 보던 승용차 한 대가 조용히 멈춰 섰다.

차 창문이 부드럽게 내려가더니 안에서 은쟁반에 옥구슬이 굴러가는 것 같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할아버지― 말씀 좀 여쭐게요.”

밭에 있던 두 사람의 눈이 동시에 여자를 향했다.

“여기서 시내로 나가려면 어디로 가야 해요?”

여자의 얼굴을 확인한 서진의 동공이 순간 크게 확장됐다.

손가락으로 여자를 가리킨 서진은 “어!!” 소리를 내며 그녀를 아는 체했다. 철과 커피숍에 있던 청초한 외모의 긴 생머리 여자다. 마찬가지로 서진을 발견한 여자의 표정이 미세하게 구겨졌다.

“저 길 알아요! 제가 데려다줄게요!”

서진이 기다란 분무기를 내팽개치고 두 팔을 위로 흔들며 크게 소리치더니 부리나케 달려 나갔다. 눈 깜짝할 새 승용차 앞에 도착한 그가 숨을 고르고 물었다.

“…허억, 안녕하세요. 우리 본 적 있죠?”

여자는 대답하기 불편한지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며 헛기침을 몇 번 흘렸다.

“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진짜 그런 거 아니거든요. 철이랑 그런 사이 아니에요.”

그녀의 탐탁지 않은 표정을 본 서진이 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물론, 그다음에 그놈 집에 가서 정말 고추를 빨긴 했지만 분명 그땐 아니었다고요. 뒷말은 속으로 간직하기로 했다.

“…오해 …라고요?”

말이 통했는지 여자가 서진과 조심스럽게 눈을 맞췄다.

“네. 저, 괜찮으시면 제가 같이 가드릴게요. 시내까지 길 알아요.”

차에 타 시내까지 안내하면 이대로 밭에 있다가 철을 만나는 불상사를 피할 수 있고, 여자에게 해명도 할 수 있으니 일거양득이었다. 뭐, 올 때는 버스 타면 되고.

여자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서진은 신이 나서 조수석에 냉큼 올라탔다.

곧바로 차가 출발하고, 그는 옆에서 길을 알려주며 조잘조잘 이런저런 얘기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여자는 대학생으로, 이름은 수정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친구가 예쁜 여자분이랑 있길래 샘이 나서 장난쳐본 거예요. 제가 좀 심했죠?”

서진이 습관처럼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전날의 일을 사과했다.

“네, 좀….”

수정이 생각보다 솔직하게 대답하고는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범철 씨 여자 친구… 있어요?”

여자 친구? 잠시 눈알을 굴리던 서진이 대답했다.

“없… 을걸요?”

끼이익―!

대답과 동시에 갑자기 차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급정차했다. 서진은 왠지 모르게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이었다. 이 불길함은 뭐지. 질문에 대한 대답과 동시에 멈춰 선 차가 의미하는 것…….

불안함으로 흔들리는 서진의 눈동자가 옆으로 굴러간다. 수정이 심호흡을 하는 모습이 불길함을 증폭시켰다.

“정말로요?”

여자가 간절한 목소리로 한 번 더 물었다.

“예? 예…, 뭐….”

서진이 어색하게 대답했다.

“하아…. 포기하려고 했는데…. 그래서 오늘 서울로 돌아가기로 했거든요.”

수정이 은근히 들뜬 목소리로 계속 말을 이었다.

“…저 사실 범철 씨 좋아해요. 대단하잖아요. 10대 때 친환경 잔류농약 제거에 관한 논문을 쓴 게 있는데 어쩌다 우리 아빠가 그거 보고 완전 반해서…. 아빠가 농대 교수거든요. 저는 얼굴 보고 홀딱 반했죠, 뭐. 근데 처음 봤을 때가 열아홉 살이랬나…. 잡혀갈 뻔했어요. 아무튼 지금은 성인이니까.”

서진은 어쩐지 떨떠름한 미소를 띤 채 그녀의 말에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요? 자, 얼른 서울로 갑시다’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저 마지막으로 해 볼래요!”

대뜸 수정이 결연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뭘… 해 봐? 아니야. 그거 하지 마. 서진이 마음속으로 강하게 반발했다.

“서진 씨 아까 범철 씨 집 안다고 했었죠?”

조잘조잘 쓸데없는 얘기를 너무 해댄 게 잘못이었다.

“예? 아니 그게, 지금 집에 없을….”

당황한 서진이 말을 버벅거리자 수정이 뒷말을 싹둑 잘라먹었다.

“서울 가기 전에 한번 고백이라도 할 수 있게 서진 씨가 좀 도와줘요. 나 이대로 가면 미련 남아서 잠도 못 잘 것 같아.”

그러면 내가 잠을 못 잘 것 같은데요…. 서진은 차마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황당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이건 뭐 개똥 피하려다 낭떠러지로 떨어지게 생긴 꼴이다. 밭에서 마주치기 싫어서 도망쳐 나왔는데 제 발로 집까지 찾아가게 생겼으니.

“그럼 안내 부탁해요.”

그때 수정이 여전히 결연한 목소리로 기어를 바꾸며 차를 출발시켰다. 당황한 서진은 평소 쓰지 않던 머리를 팽글팽글 돌리기 시작했다.

침착하자. 집에 없을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 있다고 해도 자신이 차에서 내리지 않고 숨어 있으면 아무 문제도 없을 것이다.

“…좌회전이요….”

서진은 죽을상을 하고 수정에게 길을 안내했다. 어제 고추를 빨고 튀었던 바로 그 집으로. 차창 밖으로 논과 밭밖에 없는 시골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곧 대궐처럼 커다란 한옥이 보이자 눈을 크게 뜬 수정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 집 진짜 멋있다. 근데 서진 씨는 어디 아파요? 무슨 식은땀을….”

어느새 식은땀을 주룩주룩 흘리고 있는 그를 살피며 수정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 네. 뭐….”

지금 막 대가리가 아파졌거든요. 서진이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식은땀을 손목으로 닦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철의 집 앞에 차를 세운 수정은 조심스레 차 문을 열고 반짝반짝 광이 나는 명품 구두로 흙길을 디디고 섰다. 그녀는 두리번두리번 높은 담벼락을 올려다보더니 대문 근처에서 기어코 초인종을 찾아 눌렀다.

서진은 그 가상한 용기에 박수라도 쳐주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차 안에서 쥐 죽은 듯 그녀의 모습을 지켜봐야 한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가만히 차 밖의 기척에 귀를 기울이고 있노라니 심장이 어찌나 쿵쾅거리는지, 자신의 귀에도 들릴 정도였다.

수정이 초인종을 누르고 얼마간 기다렸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집 안에서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녀는 초인종을 한 번 더 눌러보고 잠시 기다리더니 잔뜩 풀이 죽은 얼굴로 다시 승용차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예스! 서진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꾹 내리눌렀다. 잠시 후 수정이 차 문을 열고 다시 운전석에 올라탈 즈음, 표정을 완전히 갈무리한 서진이 안타깝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저런…. 집에 없었나 보죠?”

“…네….”

수정이 한숨을 푹 내쉬자 서진은 한껏 아쉬움 담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네요. 그럼 출발하….”

“어?”

순간 고개를 든 수정이 눈을 크게 뜬 채 정면을 주시했다. 저 멀리서 다가오고 있는 익숙한 하얀 트럭이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저거 범철 씨 차 맞죠? 네? 서진….”

신이 나서 말하던 수정이 조수석을 보고 당황하며 물었다.

“…서진 씨? 왜 갑자기 누워 있어요?”

철의 트럭을 발견하자마자 바로 좌석을 뒤로 눕혀버린 서진은 일자로 누워 있는 상태였다.

“…예? 차 천장이 좀 특이한 것 같아서…. 튜닝 하셨나 봐요.”

서진은 평범하기 짝이 없는 짙은 회색 천장을 처음 본다는 듯이 쳐다보며 감탄사를 연발해댔다.

“이야, 독일제 천장인가? 다르긴 다르네요.”

헛소리를 남발하며 차 천장을 감상하는 그를 보며 잠시 의아해하던 수정이 눈을 몇 번 깜빡인 다음 입을 열었다.

“그럼 저 갔다 올게요.”

고백을 결심한 여자는 차 안에 멍청이를 남겨둔 채 문을 열고 당당하게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혼자 남은 서진은 회색빛 천장을 바라보며 회의에 잠겼다. 그냥 칼슘 나부랭이나 뿌리고 밭일이나 하고 있을걸.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나대다가 여기 자빠져 있게 된 건지.

“범철 씨.”

주차를 끝내고 차에서 내린 철이 수정을 발견하고 물었다.

“여 어떻게 왔어라.”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 철은 그다지 놀란 눈치가 아니었다. 수정이 짧게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그에게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다가가 말문을 열었다.

“저 오늘 서울 올라가요.”

“…….”

그 말에도 철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는 원래부터 무심한 남자였다. 미인에게 무심한 남자일수록 진국이라고, 수정의 아빠는 말하곤 했다.

그건 수정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미모만 보고 들이대던 수많은 남자들은 하나같이 속이 텅 빈 쭉정이들뿐이었으니까. 후우, 한 번 더 호흡을 가다듬은 수정이 입을 열었다.

“사실… 가기 전에 꼭 말하고 싶었어요.”

“…….”

“…저 범철 씨 좋아해요. 처음 봤을 때부터.”

애틋한 마음을 고백하는 수정의 맑은 눈동자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마음을 전한 것만으로도 만족할 것이다. 그녀는 속으로 그렇게 다짐했다.

“미안한디 난 겁나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

철은 조금의 동요도 보이지 않고 지체 없이 바로 거절 멘트를 날렸다. 그리고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한마디 덧붙인다.

“당신 차 안에.”

차 안에? 실연의 아픔을 채 느끼기도 전에 수정의 머리가 또르르 굴러가기 시작했다.

차 안에….

차 안에…….

……차 안에??

표정을 일그러뜨린 그녀가 홱 뒤돌아서더니 성큼성큼 걸어 자신의 차로 향했다. 그러고는 조수석 문을 거세게 열어젖힌다. 여전히 시트에 누운 채 화들짝 놀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런 사이 아니라더니.

“…이… 쓰레기 새끼….”

날 가지고 놀아? 여자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서진이 놀란 토끼 눈을 했다.

“…수 …정씨? …아악!”

수정은 우악스러운 힘으로 서진을 끄집어내 바닥에 그대로 내동댕이치고 바로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그녀가 탄 차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서진에게 흙먼지를 뒤집어씌운 채 빠른 속도로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얼떨결에 길바닥에 나자빠진 서진은 멍한 얼굴로 승용차가 떠나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진짜 거 있었네.”

어느새 다가온 철이 양손으로 서진을 일으켜 세우며 말을 뱉었다. 아무래도 밭에 갔다가 할아버지에게 얘기를 들은 모양이다.

“어? …어어.”

아직 사태 파악이 안 된 서진이 어색하게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쪼까 들어와야.”

“…어? 어어.”

서진은 ‘어’밖에 못 하는 로봇처럼 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서는 철의 뒤를 삐걱삐걱 따라갔다. 이건 뭐, 개똥 피하려다가 개똥밭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게 됐다.

“마실 거 줄까?”

철이 오래된 테이블 의자에 앉은 서진을 향해 물었다.

“어어….”

대답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색깔이 예쁜 과채주스를 가져와 서진의 앞에 내려놓은 철이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서진아.”

“…어?”

“니 어제 와 그라고 갔냐잉.”

“…….”

서진은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달달한 주스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마치 순진한 처녀를 겁박해 겁탈한 것 같은 느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나 할까.

“…니가 그라고 가믄 내가 뭐가 되냐.”

한숨을 내쉰 철이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러다 ‘책임져라….’ 뭐 이런 말이라도 나오는 건 아니겠지? 크어, 주스를 한 번에 다 마신 서진이 컵을 내려놓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문을 떼었다.

“…너무 신경 쓰지 마. 친구끼리 뭐 그럴 수도 있지.”

그 말에 한쪽 눈썹을 휘어 올린 철이 단어를 다시 반문했다.

“친구?”

당황한 서진은 몇 번 목을 가다듬고 차분하게 정리에 나섰다.

“그 뭐냐…, 흠. 원래 서울에선 자주 그래.”

서울이 무슨 할리우드도 아니고, 서진은 황당한 소리를 늘어놓았다. 결국 둘만 있는 넓은 거실에 어색한 정적이 감돌았다.

한참 말없이 서진을 바라보던 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대뜸 그의 앞으로 다가와서 무릎을 꿇었다. 철은 서진이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는 것도 아랑곳 않고 그의 바지춤에 손을 올리더니 그대로 힘을 주며 아래로 끌어내리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야!”

화들짝 놀란 서진이 손으로 바지를 잡고 거센 발길질로 그의 명치를 까버렸다. 갑작스러운 발차기에 맞아 조금 밀려난 철이 윽, 소리를 내며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자주 그런담서. 그람 나도 빨아줄란께.”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더니 이제 헛소리엔 헛소리로 대응하기로 했나 보다.

“여긴 서울 아니잖아!”

당황한 서진이 말 같지도 않은 말을 내뱉으며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양손으로는 소중한 바지춤을 꼭 붙든 채였다. 어제 남의 고추를 내놓으라고 당당하게 겁박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보수적인 모습이다.

“어제도 설 아니었는디.”

철은 비논리적인 말에 논리적으로 대답하며 말을 이었다.

“와. 내꺼는 밖에 싸질러진 돌멩이만도 못한 거고 니꺼는 금덩이 둘렀냐.”

“뭐? 하. 참 나….”

서진은 별 희한한 소리를 다 듣는다는 듯 코웃음 쳤지만, 사실은 그냥 말문이 막힌 것뿐이었다. 그의 말마따나 나르시시스트 홍서진에게 자기 자지는 소중한 금 자지요, 남의 것 따위는 알 바 아니었으니. 촌철살인이나 다름없다.

“그라고.”

자세를 낮추고 있던 철이 몸을 일으키며 계속 말했다.

“나는 니 거시기가 아니라 대가리부터 발끄락까지 다 거시기해블고 싶은께.”

거시기가 두 번이나 들어가 뜻이 명확하지 않은 문장에 서진의 미간에 얕은 주름이 잡혔다. 철의 표정이 너무 심각해서 머리부터 발가락까지 빨고 싶다는 건지, 죽여버리고 싶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뭐?”

“아 근께 꼬추라도 내놔봐야.”

철도 어제 서진이 그랬던 것처럼 당당하게 자지를 요구했다. 얼굴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서진은 바로 전날 밤 남의 것을 맘대로 빨고 튄 사람으로서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붉은 입술만 아래위로 달싹였다.

“더 할 말 없으믄 빨아븐다잉.”

철이 한 발짝 가까이 다가오며 무슨 막대사탕이라도 빨아 먹겠다는 듯이 선전 포고를 던졌다.

“잠깐만.”

여전히 바지춤을 양손으로 꽉 쥐고 있는 서진이 다급하게 말을 뱉는다.

“와?”

“아, 기다려봐.”

빠져나갈 구멍을 찾는 작은 머리통이 또 팽글팽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기여.”

그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서진은 어제의 자신이 성추행범이 되지 않으면서 고추를 빨아준다는 철의 제안을 당당하게 거절할 이유를 생각해내려 고심했다. 데굴데굴 굴러가는 시끄러운 머릿속에 마침내 남자와 나눴던 대화 중 일부가 선명히 떠오른다.

“나랑 사귀자. 내가 진짜 잘해줄께. 니가 해달라는 건 다 해줘불고 니가 하지 말라는 건 다 안 할께.”

한참 동안 가만히 기다리고 서 있던 철이 다시 입을 열었다.

“셋 센다. 셋, 둘….”

니가 하지 말라는 건 다 안 할께. 다 안 할께 안 할게 께 께…….

그 마지막 한마디가 서진의 귓가에 메아리치듯 맴돈다.

“한나, 한나 반….”

“사귀자.”

호기롭게 내뱉은 말과 달리 실상은 서진도 제가 한 말에 제가 놀라 눈이 번쩍 뜨였다.

“…….”

철이 자신의 말에 아무런 반응이 없자 어색함에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말을 덧붙였다.

“…그 뭐야…. 대신… 난 누굴 사귀면 감정 교류가 중요한 사람이라… 육체적인 관계를 싫어해. 막 어딜 만진다든가….”

눈치가 있으면 개소리라는 것을 모를 수 없는 어설픈 연기였지만, 철은 이미 비디오 정지 버튼이라도 눌린 영상 속 사람처럼 그 자리에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그러니까 나랑 사귀려면….”

서진은 시선을 먼 곳에 둔 채 낚시하듯 말을 던지며 흘끔,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여전히 돌처럼 굳은 상태로 눈꺼풀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혹시 진짜로 시간이 멈춰버린 건 아닌가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 때쯤 그가 입을 열었다.

“알았은께.”

긴장한 서진이 침을 꼴깍 넘겼다.

“내가 니한테 손끄락 하나라도 대믄 바로 짤라브러.”

이건 생각보다 더 극단적인 반응이 아닌가. 그 말에 웃음을 참는 서진의 입술이 요사스럽게 안으로 말려들어 갔다.

막 뱉은 말이지만 자신은 천재임이 틀림없다. 사람이 잠깐 사귀다가 헤어지는 일쯤이야 부지기수요, 이 순진하고 꽉 막힌 녀석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자기가 했던 말은 지킬 놈이 아니던가.

“너 나랑 사귀면 내가 하라는 건 다 하고 하지 말라는 건 다 안 한다고 했던 거 기억나지?”

뒤로는 새까만 속내를 숨긴 서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 업고 댕길께.”

철은 간식을 손에 든 주인을 바라보는 강아지처럼 간절함이 묻은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업는 건 좀 그렇고.”

“…그라제. 손 안 댈란께 걱정 말어.”

그는 혹시라도 서진이 제안을 무르는 건 아닐까 걱정하는 듯 조급해 보였다.

너무 순수한 반응에 서진의 새까만 양심이 콕콕 찔렸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한편으론 그에게 잠깐이라도 애달픈 짝사랑 상대와 사귀어보는 추억을 만들어 주는 거 아니겠냐며 합리화하기에 이르렀다.

“그래. 그럼 오늘부터 사귀는 거다.”

딱 일주일 정도만. 뒷말은 속으로 삼켰다. 할 일을 끝낸 서진이 인상을 찌푸린 채 어깨를 몇 번 돌리더니 말을 이었다.

“근데 오늘은 칼슘인지 칼륨인지 뿌리다 와서 그런가… 좀 피곤한데. 나 집에 데려다줄래?”

눈을 깜박이는 것도 잊은 것처럼 가만히 서진을 바라보던 철은 그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뗐다.

“…나와. 델따줄께.”

피곤한 척 눈을 내리깐 서진은 속으로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따라 익숙한 트럭에 올랐다. 평소와 같은 흙길을 부지런히 달리는 차 안은 평화로운 시골 풍경에 걸맞은, 바퀴에 자갈이 밟히는 소리만 가득했다.

창밖을 보던 서진은 조금 의아한 마음에 눈을 돌려 철을 살폈다. 멍해 보이는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니 귓불과 뺨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피식 새어 나오던 웃음이 마음 한구석에 모래알만큼 남아 있던 일말의 양심 때문인지 금방 헛기침으로 바뀌었다.

“감그든 거 아니여?”

말없이 운전하던 철이 기침 소리에 고개를 돌려 걱정스럽게 서진을 보았다.

“크흠흠.”

서진은 목을 가다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서로 다른 마음을 태운 트럭이 시골길을 달려 서진의 초가집 앞에 부드럽게 멈춰 섰다. 냉큼 안전벨트를 풀고 차 문을 열던 서진은 뭔가 생각난 듯 뒤돌아서서 서비스처럼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고마워. 그럼 들어가.”

“서진아.”

급하게 불러 세우는 목소리에 서진이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철이 여전히 조금 상기된 얼굴로 그에게 묻는다.

“이따 맻 시에 올까?”

의도를 알 수 없는 질문에 서진이 고개를 갸웃하고 반문했다.

“몇 시에 오냐니?”

그 말에 잠시 생각하던 철이 대답했다.

“…또 보고 싶은께.”

그 한마디에 서진은 갑자기 철과 사귀기로 한 것이 실감 나 모골이 다 송연해졌다.

“그게 무슨 소리야, 철이야. 일찍 잠을 자야 내일 일찍 밭일을 하지.”

황당한 미소를 머금던 서진은 얼굴을 조금 굳히고 바로 프로페셔널한 농부 같은 말을 남긴 채 돌아섰다.

“기여. 잘 자고 낼….”

탁.

서진은 철의 인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차 문을 닫아버렸다. 젠장…. 다시 생각해도 부르르 몸서리가 쳐졌다.

그날 밤 서진은 일주일 후에 무슨 핑계를 대면서 헤어지는 게 좋을지 생각하느라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밤잠을 설쳤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지만, 결국 자기 전에 마지막으로 머릿속을 점령한 생각은 한 가지였다.

어쩌면 철이 아니라 자신이 차이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고.

***

귀를 간지럽히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서진의 눈이 게슴츠레 뜨였다. 아직 해가 완전히 뜨기 전인지 적당한 아침 햇살이 문풍지 사이로 스며들었다. 먼저 귀에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공은 할아버지였다.

“왐마. 니가 여까지 웬일이냐잉?”

“아, 웬일은.”

이어서 들린 목소리에 몸을 벌떡 일으킨 서진은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한 다음 바로 방문을 열고 뛰쳐나왔다. 마당에 알 수 없는 짐을 잔뜩 들고 서 있는 잘생긴 남자는 복권이라도 당첨된 사람처럼 입꼬리가 하늘로 치솟아 있었다.

흡사 입이 관자놀이에 걸렸다고 하던가. 웃을 때 볼에 살짝 들어가는 보조개 때문인지 장난꾸러기 아이 같기도 했다. 커다란 덩치 때문인지 항상 나이에 비해 성숙해 보였는데, 이제 보니 어리긴 어린가 보다.

“이게 다 뭐여?”

“뭐, 반찬을 디지게 많이 해브러서 쪼까 갖고 왔제.”

마당에 쌓이고 쌓인 커다란 통들을 보아하니 반찬을 아무리 많이 해도 저 정도로 많이 할 수는 없는 거였다. 제사를 지내도 여러 번 지낼 것 같은 양이다.

“아따…. 이걸 다 으데 둔다냐. 철이 야가 미쳐브렀는가. 쌩전 안 허던 짓을 하고 자빠짔네….”

구시렁거리며 부지런히 반찬통을 나르는 할아버지의 눈을 피해 서진이 작은 목소리로 철을 불러냈다.

“철아, 잠깐 나 좀 볼래?”

“잘 잤냐.”

서진을 발견한 철이 아침 햇살만큼 눈 부신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서진이 손가락을 까딱까딱하자 낮은 문 높이에 목을 살짝 숙이며 방으로 들어온 그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따…, 방 꼬라지가 이게 뭐여….”

바로 짙은 눈썹을 잔뜩 찌푸리고 말을 잇는다.

“니 여서 잠은 잘 수 있겄냐잉. 기냥 우리 집에 방 많은께…. 윽.”

철은 갑자기 명치로 날아든 주먹에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놀란 눈빛으로 서진을 바라보았다.

“너 미쳤냐? 어? 미쳤어?”

서진은 명치를 때린 걸로는 부족했는지, 그의 멱살을 틀어잡고 낮은 목소리로 을렀다.

“…뭣이?”

커다란 남자는 저보다 한 뼘 정도 작은 서진에게 멱살을 잡힌 채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동네방네 소문 다 낼래?”

다른 누가 듣는 것도 아닌데 서진은 굳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안 그래도 좁은 시골 사회에서 동성애로 소문이 나면 얼마나 입방아에 오를지 안 봐도 비디오다. 어차피 딱 일주일 있다 헤어질 건데, 그의 인생에 그런 오물까지 투척해선 안되는 거였다.

“난 상관 없는디 니가 싫으믄 조심할란께. 씅내지 말어.”

멱살이 잡힌 채로 눈을 접으며 피식 웃은 철이 한쪽 손을 들더니 부드러운 눈빛으로 서진의 머리를 쓰다듬는 척 허공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오메. 이쁜 거.”

갑작스러운 행동에 서진이 멱살을 틀어쥔 손을 툭 놓쳤다. 제가 이쁘긴 했지만, 갑자기 이렇게 정통으로 들으니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니는 씅을 내도 이쁘고. 으째 아침부터 이쁘냐.”

철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아침부터 낯간지러운 소리를 잘도 해댔다. 생각해보니 이놈은 징그러운 놈이다. 밭에 똥을 싸니 다음 날 전을 부쳐 오고, 토를 하니 다음 날 고백을 했다.

자신의 본판이 워낙 이쁘고 잘생겨서 그게 가능할진 모르겠지만, 더 이상 그에게 이뻐 보여선 안 됐다. 그가 먼저 헤어지고 싶어 할 만큼 못생겨 보여야만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에 가까운 일에 서진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때, 저벅저벅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어느새 반찬통을 정리하고 온 할아버지가 방 안으로 고개를 디밀었다.

“니들 뭣 허냐. 거 인났으믄 아침 묵어. 오늘 배대지 터지게 묵어야 되니께.”

화들짝 놀란 서진은 그대로 철을 세게 밀쳐 방 밖으로 내동댕이쳐버렸다. 앞으로 고꾸라지다시피 쫓겨난 남자는 잠시 얼떨떨한 표정을 짓다가도 또, 뭐가 좋은지 실실 웃었다. 쯧, 좋단다.

탁 소리가 나게 방문을 닫아버린 서진은 불안한 얼굴로 뒤적뒤적 손거울을 찾더니 여러 각도로 얼굴을 비춰보았다. 이윽고 망연자실한 그의 입에서 나직한 욕이 새어 나왔다.

“아, 씹.”

진짜 아침부터 지나치게 잘생겼잖아. 이러니까 저놈이 나한테 환장하지. 후우…. 이러면 안 되는데…….

한껏 재수 없는 생각을 하며 길게 한숨을 내쉰 그가 뭔가 결심한 듯 아랫입술을 꽉 깨물더니 양손으로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 흰색 상의를 잠옷 바지 안에 마구 쑤셔 넣었다.

짙은 남색 고무줄 바지는 최대한 끌어 올려 거의 젖꼭지 바로 아래까지 치켜올렸다. 불알이 좀 끼긴 했지만, 이 정도는 감수해야 할 일이다.

불시에 여자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내추럴한 모습을 보고 홀딱 깼다는 풍문도 있지 않은가. 내추럴한 모습까지 완벽한 자신은 억지로라도 망가져야 했다.

그 상태로 벌컥 문을 열고 나온 서진은 어느새 마루에 밥상을 차리고 앉아 있는 두 사람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뭐여 저건…?”

밥을 먹던 중 먼저 그를 발견한 할아버지가 작게 중얼거렸다.

“아, 배고파.”

서진은 동네 양아치 같은 말투와 팔자걸음으로 귀를 후비적거리며 다가가더니, 마루에 궁둥이를 걸치고 앉았다.

“니 부랄은 괘안냐잉?”

한계까지 치켜올린 바지를 본 할아버지가 황당하다는 듯 묻는다. 서진은 그냥 입술을 삐죽 내밀고 어깨를 으쓱하며 은근 철의 눈치를 살폈다.

제 옆에 앉는 서진을 보고 뺨을 발그레 붉힌 그는 오히려 아까보다 표정이 더 좋아 보였다. 징그러운 놈. 그만큼 내가 이뻐 죽겠다는 거지.

둘러앉은 작은 밥상 위엔 평소답지 않은 10첩 반상이 놓여 있었다. 주저 없이 수저를 든 서진은 잡채와 버섯 요리를 한 번에 입에 쑤셔 넣으며 게걸스럽게 처먹기 시작했다.

원래 사람이 먹는 게 보기 싫으면 정이 뚝 떨어진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잠시 후, 서진은 입 안 가득 넣은 밥알을 입 밖으로 튀기며 저질스러운 개그를 끊임없이 늘어놓고 있었다.

“할아버이. 개미 목구멍보다 작은 게 뭔지 아세요?”

“…….”

“개미 먹이요. 으하하.”

서진이 호탕하게 웃자 튀어나온 밥알이 밥상 위로 후드득 떨어졌다. 참다못한 할아버지가 오랜만에 숟가락을 들고 응징에 나섰다.

“옘병. 이건 또 뭔 옘병이여.”

“아!”

서진이 숟가락에 맞아 벌게진 이마를 손으로 만지작거리자 바로 얼굴을 굳힌 철이 옆에서 끼어들었다.

“아따, 영감태기. 재밌기만 하구만. 와 아를 때리고 그랍니까.”

그 말에 황당한 얼굴로 혀를 찬 할아버지는 고개를 저으며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황당하기는 서진도 마찬가지였다. 재밌기는 개뿔.

당황한 그는 결국 전략을 바꾸기로 했다. 원래 먹는 거 뺏어 먹는 게 제일 나쁜 법이니까.

“나 밥 좀 주라.”

이번엔 그 말과 동시에 철의 밥그릇에 제 숟가락을 훅 꽂아 넣더니, 딱 한 숟갈만 남겨놓고 몽땅 자기 밥그릇으로 옮겨갔다.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던 철은 이내 피식 웃으며 재미난 여흥을 즐기듯 서진을 구경했다.

“복스럽게 잘 묵네.”

이런 씹. 순간 서진의 얼굴이 돌이라도 씹은 것처럼 구겨졌다.

“근데 반찬 맛이 다 왜 이래.”

급기야 서진은 숟가락을 탁 내려놓더니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반찬 투정을 시작했다.

“와. 간이 안 맞어?”

철이 그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송이버섯은 짜고. 게장은 싱겁고. 잡채 이건 아무 맛이 안 나는… 아악!!”

서진의 불평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다시 한번 할아버지의 숟가락이 이마 위로 떨어졌다.

“지랄. 해다 줘도 지랄이여. 암꺼나 잘만 처묵던 놈이.”

서진은 이마를 쓱 문지르며 할아버지를 노려보았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따 거 영감 승질머리하곤. 왜 자꾸 가만있는 아를 때린디야.”

인상을 찌푸린 철이 할아버지를 탓하며 서진의 반듯한 이마를 요리조리 살펴보기 시작했다.

“얼씨구. 니놈 시끼도 옘병, 옘병. 아주 쌍으로 옘병을 허네.”

결국 참다못한 할아버지의 숟가락이 철의 머리 위에도 딱! 소리 나게 떨어졌다.

“아.”

생각보다 아팠는지 그 역시 미간을 좁힌 채 한 손으로 이마를 쓱쓱 문질렀다. 그야말로 밥풀때기와 숟가락이 날아다니는 혼돈의 식사 시간이었다.

정신없던 식사가 끝난 후 도착한 고구마밭에서 만난 영옥은 아침에 할아버지가 했던 말과 똑같은 말을 내뱉었다.

“왐마. 철이 니가 여까지 웬일이냐?”

“아, 웬일은. 일 도우러.”

“오메 웬일이여. 나 출세했네.”

영옥이 별일이라는 듯 눈썹을 들썩이며 장난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멀리서 하아, 한숨을 내쉰 서진은 흙밭에 쭈그리고 앉아 평소처럼 밭일을 시작했다.

그는 ‘나 같은 킹카는 어떻게 해야 차일 수 있을까. 매력적인 게 죄라면 나는 무기 징역인가 봐.’ 따위의 재수 없는 생각을 하며 열심히 고구마 모종을 흙 속에 파묻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머리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졌다.

“안 덥냐잉.”

어느새 다가온 철이 햇빛을 가리고 서서 물었다.

“뭐. 그냥저냥.”

서진은 시큰둥하게 대답하며 열심히 흙을 덮었다.

“하이고, 손 봐라. 거 악기 만지는 손을….”

남자가 흙이 잔뜩 묻은 서진의 손을 보며 중얼거렸다. 근데 내가 철한테 악기 한다고 말을 했었나. 뭐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서진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다시 풀때기를 들었다.

“니는 기냥 집에서 쉬면 안 되냐.”

철이 아쉬움이 잔뜩 묻은 목소리로 말했다. 얘가 아직 싸리 빗자루로 안 처맞아봐서 저런 태평한 소리를 하고 자빠졌다.

그 순간, 번뜩 머리를 스치는 아이디어에 서진이 한쪽 입술 끄트머리를 야살스럽게 끌어 올렸다.

“저기 철수야.”

“…뭐?”

갑작스러운 ‘철수’에 철이 눈을 크게 뜬다.

“나 물 좀 갖다줄래?”

서진은 눈치채지 못한 척 밭일을 계속하며 부탁했다.

“쪼까 기다려봐야.”

철은 바로 부리나케 달려가더니 어디선가 물이 찰랑찰랑 담긴 물통을 들고 다시 나타나 서진에게 건넸다.

“고마워 철수야.”

웃으며 물통을 받아든 서진은 바로 헙, 하고 손으로 입을 막으며 놀란 척 연기를 펼쳤다. 여자 친구의 이름을 잘못 불러서 귀싸대기를 맞은 남자의 얘기를 어디선가 들어보지 않았는가.

“잠깐 헷갈려… 아, 아니야.”

서진은 계속 수상하기 그지없는 남자를 연기하며 당황한 것처럼 괜히 시선을 피했다.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철은 대수롭지 않게 입을 열었다.

“뭐. 철수로 이름 바꿔불믄 되제.”

이런 씹. 철은 조금 씁쓸해 보이긴 했지만 별로 타격은 입지 않은 듯했다. 결국 애꿎은 물만 꿀꺽꿀꺽 들이켠 서진은 별말 없이 다시 밭일을 시작했다.

철이 같이 밭일을 하자 작업 속도가 몇 배는 빨라져 예정보다 훨씬 일찍 일을 마칠 수 있었다. 작업을 마치고 돌아가기 위해 오른 철의 트럭에서 안전벨트를 매던 서진이 생각났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 맞다. 나 건전지 사야 하는데.”

삐삐랑 게임보이에 건전지를 안 넣은 지 오래였다. 그의 말을 들은 철이 자연스럽게 핸들을 꺾어 읍내를 향해 운전했다.

수퍼에 도착하자마자 서진은 매장을 휘적거리며 AA 건전지 한 세트와 함께 양팔 가득 과자를 마구 쓸어 담기 시작했다.

사실 건전지보단 저번에 사 간 과자가 다 떨어진 것이 문제였다. 서진은 이럴 때 아니면 또 언제 사겠냐는, 동면을 준비하는 다람쥐 같은 마음가짐으로 부지런히 열매를 모았다.

“아따. 이런 거 묵어봐야 몸에도 안 좋은 거.”

한가득 과자를 건네받은 철이 잘생긴 얼굴을 구겼다.

“뭐 어때 맛있잖아. 그럼 부탁해.”

얼굴에 철판을 깔고 씩 웃으며 과자를 건넨 서진은 그가 계산하는 동안 바깥으로 나와 터덜터덜 먼저 트럭으로 향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돈도 많으니까. 자꾸만 고개를 내미는 양심을 다시 억지로 집어넣으며 정신이 팔린 채 걸어가던 중 갑자기 퍽, 소리가 나며 어깨에 강한 충격이 느껴졌다.

무언가에 부딪힌 서진이 그대로 땅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

놀란 그가 얼굴을 팍 구기고 고개를 치켜들자 조금 낯이 익은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기억이 날 것 같기도 하고, 안 날 것 같기도 한 애매한 얼굴이다.

남자는 서진보다 더 인상을 구기며 어깨를 꽉 붙든 채 소리쳤다.

“아오! 어깨 빠져브러. 야, 이 개시끼야! 니 똑바로 안 보고 댕기냐잉?”

“…네?”

서진은 어이가 없어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봤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 길이 이렇게 휑하니 넓은데 저 혼자만 앞을 안 봤다고 부딪칠 수는 없는 거였다.

서진은 어쩌면 멍하니 걷는 자신을 보고 일부러 부딪친 건지도 모른다는 합리적인 의심을 하며 남자를 노려보았다.

남자는 서진의 얼굴을 보고 갑자기 표정을 바꿔 히죽 웃더니 반갑다는 듯이 태세를 바꾸었다.

“어어? 이거 김 씨네 조카 손주 아니여?”

건들거리는 말투를 듣자 그가 누군지 떠올랐다. 이름은 모르지만 지난번에 밭에서 대낮부터 포도주 타령을 하던 남자다. 아마 고 씨였나, 오 씨였나.

“…안녕하세요.”

서진은 떨떠름한 얼굴로 인사하며 엉덩이를 툭툭 털고 몸을 일으켰다.

“어엉, 기여. 아이구, 어깨야. 이거 빠져븐 거 같은디. 니 으짤래?”

남자가 멀쩡해 보이는 어깨를 자꾸만 서진의 얼굴에 들이밀며 앓는 소리를 했다.

“네? 다시 잘 끼워보세요.”

서진은 별소리를 다 듣는다는 얼굴로 대꾸하며 흙먼지 묻은 손을 탁탁 털었다.

“왐마? 이놈 승깔 봐야. 꼴값하는 거여 뭐여.”

“그럼 이만.”

대충 인사를 건넨 서진이 발걸음을 옮기자, 뒤에서 남자가 그의 어깨를 세게 눌러 잡는다.

“악!”

엄청난 악력에 놀란 서진이 입을 쩍 벌리고 그를 돌아보며 따졌다.

“왜 이러세요?”

“어깨 이래놓구 어딜 토끼냐잉? 니 김 씨가 그르케 가르치던? 엉?”

후우, 한숨을 내쉰 서진은 차라리 대충 사과하고 이 상황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에 결국 고개를 푹 숙이며 사과를 건넸다.

“죄송합니다.”

“기여. 그라믄 이 아잡씨가 술 한잔 살 텐께 따라와야.”

“네?”

그렇게 말한 남자는 막무가내로 서진의 어깨를 끌어당기며 걸음을 옮겼다. 솔직히 왜 자꾸 처음 보는 저더러 술을 먹자는 건지 모를 일이라 짜증이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왔다.

“이것 좀 놔봐요. 저 볼일 있다고요.”

“일은 무슨.”

서진이 길거리에 버티고 서서 그와 실랑이하고 있을 때, 불현듯 옆으로 그림자가 지더니 익숙한 목소리와 어울리지 않는 살벌한 욕설이 귀에 들어왔다. 심지어 조금의 위화감도 없이 자연스럽다.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서진이 귀를 의심하며 놀란 얼굴로 옆을 돌아보는 순간, 뭔가가 스쳐 지나가면서 동시에 서진의 어깨를 잡고 있던 남자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철수야!!”

남자를 한순간에 땅바닥에 메다꽂은 철은 그가 바닥에 엎어지자마자 긴 다리로 그의 몸을 힘껏 걷어찼다. 배를 걷어차인 남자가 뭍 밖으로 나온 물고기처럼 파닥거리며 연신 시끄러운 비명을 질러댔다.

눈앞에서 사람이 제대로 맞는 것을 태어나 처음 본 서진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 자리에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으억!! 아이고오, 나 죽…!”

“이 개좆같은, 새끼가.”

엎어져서 소리를 지르던 남자가 쿨럭거리며 피를 뱉어냈지만, 철은 처음 보는 사람 같은 낯선 얼굴로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이게 대체 무슨….’

서진은 바닥에 흩뿌려진 붉은 피를 보자 기절할 것 같았다.

지금껏 홍서진은 주먹다짐이라고는 해본 적도 생각해본 적도 없으며, 어렸을 때 아버지가 복싱 경기를 보고 있으면 바로 채널을 돌려 〈요술공주 밍키〉를 보는 인간이었다.

언제 어디서든 싸움이 일어날라치면 제일 먼저 사라져 절대 찾을 수 없는 사람 중 한 명이기도 했다.

“아이구야 동네 사람들!! 허억… 저 양아치 시끼 저거…!”

몸을 잔뜩 웅크린 남자가 갈라지는 목소리로 주변을 향해 도움을 외친다. 그 순간, 철이 몸을 숙이고 그의 멱살을 틀어쥐더니 가까이 얼굴을 대고 을렀다.

“니 한 번만 더 껄떡대믄 눈깔을 파븐다고 했냐 안했냐잉.”

저 순둥이가 지금 뭐라는 거야….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은 서진은 처음 보는 철의 모습에 신선한 충격으로 뒤통수가 다 얼얼했다.

“씨이벌…. 니 나중에 으짤라고 이런….”

철에게 맞아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남자가 힘겹게 숨을 내쉬며 말을 뱉었다.

“뭐, 니 하나 병신 만들 깽값은 존나게 많은께.”

남자의 말에 철이 별걱정을 다 한다는 듯이 비아냥거렸다. 두 사람을 가만히 지켜보던 서진은 언제부턴가 숨 쉬는 것마저 잊고 있었다.

병신을 만든다니. 역시 돈은 많았구나, 과자 더 살 걸 그랬나…….

아……. 숨이 안 쉬어지…….

“…지져쓰 크라이스트….”

결국 숨이 끄윽 막혀버린 서진은 초등학교 때 이후로 단 한 번도 가지 않은 교회의 예수님을 찾으며 눈을 까뒤집었다.

천천히 의식이 흐릿해지며 점차 어두워지는 시야 속에서 마지막으로 본 건 저보다 더 하얗게 질린 얼굴로 급하게 제 몸을 붙잡는 철의 모습이었다.

***

어딘지 모를 어둠 속에 혼자 있었다. 시선을 내려 몸을 내려다보니 꼭 어린아이처럼 작았다. 아무것도 없는 어둠 속에서 불현듯 빛이 새어 나오는 방이 보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환한 빛을 내는 일본산 텔레비전에서 헌즈와 헤글러의 복싱 경기 중계가 한창이었다.

윽. 얼굴을 잔뜩 찌푸린 그는 〈요술공주 밍키〉를 틀기 위해 채널 버튼을 마구 눌렀다. 당장 마법 도구로 요술을 부리는 분홍 머리 소녀를 보고 싶었지만 아무리 눌러도 채널이 바뀌지 않았다.

「 “헌즈의 날카로운 잽! 이야, 자비 없는 콤비네이션이죠?” 」

「 “하지만 헤글러 절대 쓰러지지 않습니다. 불굴의 사나이!” 」

결국 어린 서진은 강제로 복싱 경기를 시청하며 눈물을 왈칵 터뜨리고 말았다.

왠지 친숙하게 느껴지는 향긋한 냄새와 웅얼거리는 소음이 어둠 속으로 가라앉은 정신에 찬물을 끼얹어 억지로 깨우기 시작했다. 먼저 귓가에 들린 낮은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흠칫 몸을 떨었다.

“자고 있담서 와 맻 시간째 안 깨나는디. 검진 똑바로 한 거 맞어라?”

“예, 예. 다 검사해본께 기냥 처자고 있… 어이구, 저 깨났네.”

침대 옆에서 철과 얘기를 나누던 의사가 몸을 움찔거리는 서진을 보더니 다급하게 턱짓으로 그를 가리켰다.

“서진아!”

그 소리에 바로 의사의 시선을 따라 바로 침대를 향해 몸을 돌린 철은 누워 있는 서진에게 맞춰 몸을 낮췄다. 그러고는 커다란 손으로 서진의 손을 잡는 대신 애꿎은 차렵이불을 말아쥐었다.

늘 단정하던 모습은 엉망으로 흐트러졌고, 꽉 움켜쥔 주먹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런 그를 성가시다는 듯 옆으로 살짝 밀어내며 등장한 의사가 서진의 눈동자에 작은 라이트를 갖다 대고 입을 열었다.

“환자분, 잘 주무셨어라?”

“…어떻게 된 거예요….”

서진이 밝은 불빛에 눈살을 찌푸리며 딱 방금 깨어난 환자다운 대사를 조용히 읊었다. 깨어난 곳은 병원이 아니라 낯익은 침실이었지만.

“거 첨엔 실신이었는디 그 담엔 그 뭐여, 숙면을 취하셨구만요.”

젠장. 어저께 잠을 설친 탓이다. 자기가 맞은 것도 아닌데 기절한 데다 잠까지 잤다는 사실에 민망해진 그는 괜히 미간을 찌푸리며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짚었다.

“거 보호자 되시는 분께서 하도 난리 불르스라 할 수 있는 검사는 다 해 봤는디 다행히 암시롱도 없었구요잉.”

의사는 단전에서부터 최대한 친절함을 끌어 올리려 노력하며 말을 잇더니 무심하게 라이트를 달깍 끄고 왕진 가방에 집어넣었다. 서진이 깨어나기 전까지 꽤나 시달렸는지 많이 지쳐 보이는 표정이다.

“그라믄 오늘은 여서 푹 쉬믄서 안정 취하소.”

주의 사항을 일러준 의사가 허겁지겁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가자 정적이 넓은 안방 안에 남겨진 두 사람을 감쌌다.

“서진아.”

“허억.”

철이 먼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자 흠칫 놀란 서진이 저도 모르게 헉 소리를 냈다. 아까 그 광경을 보고 악몽까지 꾼 터라 자연스럽게 나온 생리적인 반응이었다.

두려운 표정으로 고개를 든 서진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철의 눈가가 벌겠다. 이불을 쥔 주먹에 힘이 꽈악 들어간다. 날카로운 턱 근육이 움찔하더니 그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하아…. 내가 니한테 디질 죄를 지었….”

“아, 아니 아니야.”

여전히 겁먹은 표정으로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은 서진은 그에게 반찬 투정을 하거나, 명치를 발로 까거나, 멱살을 틀어잡은 일 따위를 하나둘 떠올리며 등골이 서늘해졌다.

아까 그 남자는 어떻게 됐냐는 질문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한편으로는 알고 싶지 않아 도로 꿀꺽 삼켰다. 생각만으로도 식은땀 한 줄기가 척추뼈를 타고 흘러내리는 것 같다.

‘내가 미쳤지. 저 근육이 그냥 장식이겠냐고.’

철은 서진의 태도에 당황한 듯 몇 번 눈을 깜빡이다가 다시 시선을 맞추고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그라도 앞으로 그딴 새끼 있으믄 절대로 말도 섞지 말고 기냥 씹어브러.”

“그딴 새끼가 어떤 새끼….”

내가 또 미쳤지. 어디서 말대꾸를. 서진은 급하게 말을 멈추고 이불을 끌어당겨 주접스러운 입을 가렸다.

“…하이고 순진한 거.”

그 모습을 걱정스럽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철이 어린아이를 어르는 것처럼 상냥한 목소리로 입을 뗐다.

“니 머시마들은 다 늑대 새끼에 씨레기들인 거 모르냐잉.”

“…그럼 나도 늑대 새끼에 쓰레기라는… 헙.”

서진은 또 급하게 입술을 붙여 제 주둥이를 막고 고개를 저었다. 닥쳐. 쓰레기라면 쓰레기인 거지. 이놈의 주둥아리가 범 무서운 줄도 모르고 한시도 그칠 줄을 모른다.

갑자기 철이 커다란 몸을 일으키며 말을 건넸다.

“이따 약 묵을라믄 죽이라도 묵어야제.”

순간 그의 몸짓에 놀란 서진이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올려 방어하는 자세를 취했다. 잠시 움직임을 뚝 멈추고 그를 보던 철은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뭐여?”

“…몸이 찌뿌둥해서….”

서진은 괜히 어깨를 위아래로 휙휙 돌리고 고개를 꺾으며 아무 일도 없는 척 말끝을 흐렸다. 조금 미심쩍은 표정을 짓던 철이 몸을 돌려 밖으로 향하고, 방 안에 혼자 남은 서진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

좆됐다.

앞날을 생각하니 눈앞이 깜깜해졌다. 머릿속엔 사귀던 연인에게 이별을 고했다가 폭행당하거나 납치, 살해, 감금됐다는 수많은 뉴스가 전광석화처럼 스쳐 지나갔다.

‘얼마 전엔 헤어진 남자 친구를 3년간 감금한 집착광녀의 이야기가 화제였지 아마.’

감금.

서진은 어쩐지 모골이 송연해지는 단어에 천천히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봤다. 뭔가 이상했다. 쓰러졌으면 병원에서 깨어나야 하는데 가정집이라니.

그리고 이 방, 어딘가 수상하다. 지나치게 넓은 것이 이 안에서 빙글빙글 돌면 케이지에 갇혀서 쳇바퀴를 돌리는 다람쥐처럼 조깅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에이 설마. 나도 참 상상력도 풍부하지. 하, 헛웃음 지으면서도 그는 슬그머니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달깍―

달깍달깍달깍―

“허억.”

서진은 아무리 문고리를 돌려도 열리지 않는 문을 보며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숨을 삼켰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머릿속은 또 다시 애인을 납치 및 감금했다는 집착광녀의 뉴스로 점철됐다.

맞다 창문. 창문이 있었지 참. 황급히 고개를 돌린 그는 측면에 보이는 커다란 통창을 보며 안심한 듯 휴우, 심호흡을 했다. 그러나….

덜컹덜컹―

창문 역시 꽉 잠겨 있었다.

잠금장치가 대체 어디……. 그렇게 한참을 뒤적거리며 찾아봤지만, 역시 보이지 않았다. 잠금장치가 없는 유리창은 그저 열기 위해 힘을 주면 덜컹거리는 투명한 벽일 뿐이었다.

이런 씹. 대체 언제부터 계획된 일인지 깊은 생각에 잠길 무렵, 뒤에서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리더니 네모난 쟁반 위에 모락모락 김이 나는 죽을 가져온 철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 서서 뭣 하냐.”

덜컥 겁을 집어먹은 서진이 뒤를 돌아보며 짐짓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척 미소 지었다.

“아니…. 밖에 날씨가 좋아서.”

그 말에 창밖을 살펴보던 철의 미간에 얕은 주름이 팼다. 어느새 칠흑처럼 어두워진 창밖은 날씨고 나발이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철은 “오메 짠한그” 하고 중얼거리더니 쟁반을 좁은 탁자 위에 올려놓고 창가에 서 있는 서진을 부축해 다시 침대에 앉혔다.

“죽이라도 쪼까 넘겨봐야.”

그가 죽 그릇이 담긴 쟁반을 들어 올려 서진에게 건넸다. 서진은 멍하니 전복을 잘게 썰어 넣은 하얀 죽을 바라보며 고민에 빠졌다. 지금은 이놈도 저처럼 안에서 문을 열고 나가야 하는 처지니 문이 잠겨 있지 않을 테다.

작은 머리통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르고, 긴 속눈썹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긴 서진을 감상하며 입술을 몇 번 달싹이던 철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맥여줄까?”

그러나 당장 서진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자신이 눈치챘다는 걸 그가 눈치 못 채고 있는 지금이 기회였다.

순간, 와장창! 쟁반을 뒤집어엎으며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킨 서진이 다짜고짜 문을 향해 달려 나갔다.

물론 그 뜨거운 죽이 철의 탄탄한 몸 위에 쏟아지는 건 추호도 계획에 없던 일이다. 일단 당황스러움은 뒤로하고 살기 위해 허둥지둥 문고리부터 돌리며 잡아당겼다.

달깍달깍―

문은 전혀 열리지 않았다. 서진은 문 앞에서 계속 씨름하며 문을 잡아당겼다. 등 뒤로 천천히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질수록 조용한 방 안에 문고리를 돌리는 소리가 다급히 울려 퍼졌다. 서진은 점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제 다 끝났어…….

“…철아!! 잘못했어!! 내가 잘할게!”

별안간 무릎을 꿇고 와락, 그의 긴 다리에 매달린 서진이 단단한 허벅지에 동그란 머리통을 비비며 필사적으로 빌기 시작했다.

“진짜 잘할 거야!! …반찬 투정! 반찬 투정 안 하고… 또, 또… 그 뭐냐, 꼬추! 내 고추도 만지게 해주고! 감금하지 마… 내보내 줘!”

“…….”

하지만 그에게선 아무런 대답이 없다. 잠시였지만 영겁 같은 정적이 흐르고, 서진의 등 뒤로 드르륵― 소리가 들리더니 슬라이딩 형식의 미닫이문이 열리며 익숙한 거실이 펼쳐졌다.

드르륵?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뒤돌아본 서진이 상황을 파악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런, 씹. 방문이 왜 미닫이야.

“또 어떻게 잘할 건디.”

어느새 무릎을 굽혀 서진의 눈높이에 잘생긴 얼굴을 맞춘 철이 입을 열었다. 그의 탄탄한 상체를 감싼 검은 티셔츠와 대비되는 하얀 죽이 아직도 모락모락 김을 내는 채였다.

“…어?”

“반찬 투정도 안 하고. 꼬추도 맨지게 해주고. 또 어떻게 잘할 거냐고.”

철은 죽이 쏟아진 가슴팍이 뜨겁지도 않은지 아무렇지 않은 투로 물었다. 경직된 표정은 감정을 읽기 어려웠다.

“그냥 잘… 할게.”

민망함과 미안함에 눈을 내리깔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다르다더니, 조금 전과 다르게 차분해진 태도와 목소리다.

“안 되겄네.”

바뀐 태도를 본 철이 팔을 뻗어 다시 드르륵 미닫이문을 닫았다. 어쩐지 놀림당하는 것 같은 기분에 눈을 치켜뜬 서진은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죽을 보며 바로 깨갱 꼬리를 내렸다.

깊은 한숨을 내쉰 철이 티셔츠를 벗으면서 다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혼자 방에 남겨져 축 처진 서진의 눈에 바닥에 널브러진 흰죽과 깨진 죽 그릇이 들어왔다. 깨진 그릇을 치우기 위해 다가가려는 찰나 옷을 입지도 못하고 다급하게 다시 돌아온 철이 문 앞에 서서 말을 던졌다.

“거 기냥 둬야.”

“…….”

“건들지 말라고.”

서진이 멀뚱멀뚱 쳐다보며 대답하지 않자, 철이 짧게 혀를 차며 방으로 들어오더니 맨손으로 깨진 그릇을 주워 담기 시작했다.

가까이서 보니 살짝 데었는지 철의 가슴팍 부근의 피부가 벌겠다. 서진은 너무 미안한 나머지 단순한 사과조차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괘안은께.”

아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는데, 철은 괜찮다고 말하며 순식간에 깨진 조각들을 커다란 손안에 전부 담았다. 그리고 더 치워야 하니 떨어져 있으라고 신신당부한 뒤 방을 나섰다. 남겨진 서진이 자괴감에 빠져 두 손으로 얼굴을 폭 감쌌다.

항상 그 앞에선 염병 천병을 해야 속이 시원한가 보다. 제멋대로 단정 짓고, 오해하고, 종국엔 폭발해서 한심한 짓거리를 해댄다.

게다가 앞으로 해야 할 미안한 일이 더 남았다는 사실이 가슴에 돌덩이처럼 얹혀서 생전 처음 느껴보는 통증을 유발했다.

***

어쨌든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고. 다음 날 바로 범 무서운 걸 까맣게 잊어버린 서진은 이른바 이별 밑밥 깔기 작전을 계속했다.

거지 같은 꼬라지로 그의 앞에서 알짱대거나, 위생을 더럽게 하는 원초적인 것부터 시작해서 자꾸 그의 이름을 틀리고, 저도 모르게 다른 연인과의 추억을 헷갈리는 척하는 지능적인 것까지.

철은 이름 그대로 난공불락의 철옹성 같았다. 무슨 짓을 해도 동요를 보이지 않는 모습은 오히려 오기를 불러일으켰다.

“철수야.”

“와?”

트럭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일부러 대시보드 위에 발을 올리고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던 서진이 그를 부르더니 옛날 일을 회상하듯 물었다.

“우리 그때 놀이공원에서 데이트할 때. 니가 청룡열차 타기 무섭다고 막 울었던 거 기억나?”

“어. 그날 쪼까 울었제.”

철이 전방을 주시하는 채로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자 서진은 말없이 그를 노려보았다. 사실 ‘다른 연인과의 추억을 헷갈리기’ 작전은 갈수록 정도가 심해져 이젠 아예 말이 안 되는 수준으로 치닫고 있었다.

“너 그날 분홍 원피스 진짜 귀여웠는데.”

“또 입어야겄네.”

“내가 장미 꽃다발 사 줬는데 네가 장미는 싫다고 막 생떼 썼잖아.”

“…….”

서진이 창밖을 보며 대충 아무 말이나 막 던진 직후였다. 철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조용하더니 질문을 건넸다.

“니는?”

“…뭐가?”

창밖을 보던 서진이 고개를 돌려 의문 섞인 눈으로 쳐다보자 철이 시선을 돌려 눈을 맞추고 다시 물었다.

“니는 좋아하는 꽃이나 풀때기 있냐.”

“나? 해바라기.”

왜 당연한 걸 묻냐는 듯 1초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이었다.

“와?”

“내 탄생화니까?”

단박에 이해가 가는 명쾌한 설명에 철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두 남자의 헛소리를 가득 태운 트럭이 천천히 달려 초가집 앞에 멈춰 섰다. 곧바로 내릴 준비를 하는 서진을 보며 철이 아쉬움이 잔뜩 묻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헤어지기 싫은디.”

그가 말하는 헤어짐이 그 헤어짐이 아니란 걸 알지만 순간 당황한 서진은 사레가 들려 콜록콜록 기침을 했다. 갑작스러운 기침에 걱정스러운 얼굴로 쩔쩔매던 철은 서진의 등을 쓰다듬으려다 허공에서 손을 멈칫했다.

“괘안애? 금방 약 사다 줄란께.”

“크흠, 됐어. 그럼 얼른 가 철수야.”

또 앞날을 떠올리고 나니 뾰족한 가시가 양심을 찌르는 것 같아 도망치듯 차에서 뛰어내렸다.

서진은 후우, 한숨을 돌리며 방으로 향했다. 어제 읍내에서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은 할아버지가 마침 마당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기여. 몸은 쫌 괘안고?”

할아버지를 발견한 서진은 대충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인 뒤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누웠다. 여전히 방문 앞을 떠나지 않고 서성이는 할아버지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방문턱을 넘어 안으로 들어왔다.

“니 좋아하는 감자볶음 해놨은께 배고프믄 나와 묵어라. 으디 아픈 것 같으믄 말허고.”

“…네에.”

풀 죽은 목소리로 대답하자 방문 앞을 서성이던 그림자가 저벅저벅 모래 밟는 소리와 함께 멀어졌다. 이 사람들이 진짜 왜 이래. 어째 가슴에 얹힌 돌덩이가 조금 더 무거워진 기분이다.

자신은 어차피 몇 개월 있으면 떠나서 다신 돌아오지 않을 사람인데, 이런 식으로 자꾸 정을 주어선 안 되는 거였다. 할아버지나 마을 아주머니들이나 그놈도. 왠지 답답한 가슴 위로 묘한 감정이 소복소복 쌓이는 것 같다.

에이씨. 뭐 어떻게든 되겠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어뜨린 서진은 더 생각하기를 그만뒀다. 원래 사람이 근심 걱정이 많으면 나중에 대머리가 될 수도 있다고 했으니까.

그리고 그날 저녁, 누런 문풍지가 발라진 방문 앞엔 검은 비닐봉지에 담긴 감기약과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어여쁜 해바라기 한 송이가 놓여 따뜻한 노란색을 뽐냈다.

***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철은 새벽닭 울듯이 아침부터 초가집을 찾아왔다. 믿을 수 없게도 핑계는 매일 달랐다.

반찬을 디지게 많이 해브러서, 뭐가 또 디지게 남아브러서, 꼬추밭에 꼬추가 얼맨큼 컸는지 궁금해 디져브러서, 마침 이 집이 지나가는 길에 딱 있어브러서.

“어, 왔냐잉.”

이제 철의 방문이 익숙해진 할아버지는 그를 보자마자 자연스레 인사하며 커다란 통을 패스하듯 떠넘기고 말을 이었다.

“오늘 약 칠란께.”

살균제 통을 받아 든 철이 조금 살펴보더니 미간을 찌푸리고 할아버지에게 다시 건네며 말했다.

“약 이거 ‘사’ 말고 ‘카’로 쳐야제.”

“기여?”

고추밭의 탄저병을 예방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였다. 다시 통을 받아 든 할아버지는 창고로 들어가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어차피 무슨 소린지 못 알아듣는 서진은 옆에서 자꾸 흘러내리는 밀짚모자를 고쳐 쓰며 신발을 신었다.

“오늘은 내가 다 할란께, 니는 기냥 쉬고 있어.”

“응?”

서진이 어느새 앞으로 다가온 철을 올려다보며 눈을 치켜떴다. 철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를 감상하더니 별안간 가슴께를 부여잡고 “오메 이쁜거” 하고 중얼거렸다.

서진은 그냥 그러려니 하며 무시했다. 뭐, 아무것도 안 해도 맨날 저 지랄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지랄에 익숙해진 서진은 그를 무시하고 트럭에 올라 고추밭으로 향했다.

어느덧 초여름이 지나고 구름 한 점 없는 고추밭에는 뜨거운 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안 그래도 더워 죽겠는데, 철은 서진에게 마스크에 장갑에 토시까지 씌우고 있었다.

“아, 왜 이래.”

서진은 철의 예상대로 바로 마스크를 벗으며 짜증부터 부렸다.

“이거 안 하믄 니 대머리 돼분다잉.”

미끼를 던진 철이 기다렸다는 듯이 낚시질을 시작했다.

“…뭐?”

“젤 좋은 거는 아예 가까이 안 오는거제.”

그 말에 충격받은 얼굴로 들고 있던 분무기를 툭 떨어뜨린 서진은 냅다 달려 밭 근처에 세워진 정자로 도망쳤다.

철이 새참을 흙바닥에 앉아서 먹는 게 마음에 안 든다며 며칠 동안 잠도 안 자고 지어놓은 정자는 어느새 근처에서 밭일하는 모든 아주머니들의 성지가 됐다.

서진은 정자에 대자로 뻗고 누워 작업 중인 두 사람을 태평하게 구경했다. 나중에 빗자루로 처맞더라도 대머리가 되는 것보단 낫지.

“어이구, 우리 염병 총각 또 철이 부려 먹고 혼자 싸질러져 있네.”

머리에 새참 쟁반을 이고 등장한 순자와 정숙이 서진을 보며 아는 체했다. 그는 바로 몸을 일으키며 살갑게 인사한 다음 새참을 얻어먹기 위해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곧 세 사람은 알록달록한 꿀떡을 나눠 먹으며 정신없이 수다에 빠져들었다.

“아 왜, 그 기정이 알제? 그 설 가서 변호사 한다는 아.”

“알제 알제. 그 닭집 외동 딸내미 아니여.”

서진은 알지도 못하면서 고개를 마구 끄덕이고 동조하며 꿀떡을 하나 더 입에 넣었다. 순자가 갑자기 눈알을 굴려 주변의 눈치를 살피더니 고개를 숙인 다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시방 그 집 겁나 초상나브렀어야.”

“와?”

서진과 정숙은 함께 고개를 숙인 채 순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어서 순자가 한 손으로 입 근처를 가리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아, 그 집 딸내미가 밴대질 한다잖애.”

쿵. 별안간 찬물을 끼얹은 듯 서진의 심장이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히익― 정숙이 놀란 소리를 내자 순자가 입술에 집게손가락을 올리고는 어차피 아무도 없는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왐마. 그라믄 그 가시나끼리 동성애… 그거란 말여?”

정숙이 놀란 얼굴로 조심스레 입술을 뗐다.

“기여, 호모.”

순자가 간단하게 대답했다.

“호… 뭐?”

정숙이 한쪽 눈썹을 찌푸리며 다시 묻자, 순자가 입 모양을 크게 하며 재차 단어를 반복한다.

“호―모. 호―모.”

“효모?”

“호―모―. 호―모―. 따라 해봐야. 호―모.”

“호머.”

“아따. 호오, 모오―”

“호오목.”

“아이참! 호. 모!”

이 여편네들이 일부러 이러나? 그들은 계속해서 서진의 귓속에 호모라는 단어를 화살처럼 푹푹 꽂아 넣고 있었다. 결국 순자가 답답한 듯 가슴을 탁탁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아유 증맬루, 내 입 모냥 잘 봐. 호! 모! 호….”

“아이씨. 호, 모요! 호, 모!! 호모호모호모!!”

참다못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서진이 악에 받쳐 침까지 튀겨가며 아득바득 소리쳤다.

“왐마 놀래라.”

“아따. 와 또 염병이여?”

두 사람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진을 올려다보며 황당함을 여과 없이 내비쳤다. 씩씩거리던 그는 조금씩 차분하게 숨을 가라앉히며 서서히 이성을 되찾았다.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란 말이 있지 않은가. 오히려 이런 과민 반응이 더 의심스러울 수 있으니 평정심을 유지해야 한다.

다시 자리에 앉은 그는 짐짓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얌전하게 꿀떡을 입에 넣었다.

“암튼 갸도 이라고 소문이 왁자해서 시집은 다 가브렀제.”

“그라제잉.”

두 사람이 다시 이야기의 물꼬를 트고 수다 꽃을 피워나갈 때쯤, 저 멀리서 유독 눈에 띄는 실루엣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평정심. 평정심.

“잘 쉬구 있냐잉.”

어느새 정자 앞에 다다른 철이 햇살보다 눈 부신 미소를 띠며 서진에게 물었다.

“내가 잘 쉬든 뒤져브렀든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야악―!!”

잘 쉬고 있냐는 한마디에 평정심이라고는 개미 먹이만큼도 찾아볼 수 없게 된 서진이 펄쩍 뛰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아따…. 염병 총각 아니랄까 봐.”

“어메. 승깔 보소.”

서진은 짓궂은 말투로 놀려대는 아주머니들과 당황한 표정의 철을 뒤로하고 정자에서 뛰어내려 근처에 세워둔 트럭으로 향했다.

트럭에 올라타 문을 쾅! 소리 나게 닫은 그는 미친 듯이 달음박질치는 심장을 잡고 후우, 하아, 느리게 심호흡을 했다. 평정심. 평정심.

설마 아주머니들이 다 알면서 일부러 모르는 척 호모 타령을 한 건 아닐까. 마지막에 철이한테 너무 과민 반응해서 눈치채지 않았을까. 온갖 상념과 잡념이 뒤엉켜 도무지 진정되질 않았다.

안 되겠다. 라디오라도 들으면서 생각을 정리하자. 평정심. 평정심. 서진은 바로 손을 뻗어 라디오 버튼을 눌렀다.

「 “네, 다음 소식은 배우 A 씨의 문란한 성생활, 동성애 스캔들에 관한 소식입니다.” 」

“허억.”

「 “네, 배우로서는 최초로 공식적인 동성애 스캔들이죠…….” 」

순간 입을 틀어막은 서진은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라디오 내용에 귀를 기울였다.

잘 들어보면 합의하에 여러 동성과 잠자리를 했다는 게 세간에 드러났을 뿐 다른 피해를 준 것도 없었는데, 방송에서는 벌써 한 인간이 사회적으로 매장당한 것으로 단정 지어서 말하고 있었다.

「 “……그렇습니다. 앞으로 연예계 활동 재기는 힘들 것으로 예상이 되네요.” 」

서진은 더 들을 것도 없어 슬며시 버튼을 눌러 라디오를 꺼버렸다. 모든 상황이 진즉에 해야 했을 일을 하라고 종용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시간을 너무 오래 끌었다. 머리로는 이미 알고 있던 일이다. 하루라도 빨리 말하라고.

느닷없이 차 문이 벌컥 열리며 커다란 남자가 옆 좌석에 올라탔다. 습관이란 게 무섭다더니 자연스럽게 그의 트럭 조수석에 타고 있었나 보다.

운전석에 오른 철이 바로 몸을 옆으로 돌리고 시트에 기댄 채 입을 열었다.

“서진아.”

“…….”

“아이고, 가시나야. 니 와 또 씅났냐잉.”

진짜로 이유를 물었다기보단 이유를 불문하고 달래는 듯한 말투였다. 침을 꼴깍 넘긴 서진이 입을 열었다.

“…철….”

“철아.”

그 순간 뒤에서 차 문이 벌컥 열리며 할아버지가 그를 찾았다.

“와요?”

“아 둘 다 일하다 말구 여서 뭣 하냐. 꼬추 저거 거시기해븐 거 좀 와서 보란께.”

“아따. 거참…. 서진이 니는 여서 쪼깨 있어 봐야.”

작게 혀를 찬 철이 다급하게 말을 남기고 차에서 내렸다. 후욱. 참았던 숨을 내쉰 서진은 그를 따라 차에서 내린 다음, 밭일하는 그의 주변을 배회하며 머릿속으로 안전 이별 시뮬레이션을 돌려보았다.

그럴 때마다 왠지 집착광녀의 뉴스가 점철되면서 이미 정상적인 범위를 한참 벗어나고 있었지만. 감금, 폭행, 협박… 설마 살인……?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며 소름이 오소소 돋은 팔뚝을 쓸어내렸다.

쓸데없는 상상으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밭일을 마친 철이 멀리서 서진을 찾아내고 헐레벌떡 달려왔다.

“하아, 차에 있으란께 더운디 왜 나왔냐.”

철이 가쁜 숨을 고르며 말문을 열었다.

“…할 말이… 있어서.”

“…뭔디?”

주변을 둘러보며 눈치를 살피던 서진이 잠깐 산책이라도 하자고 제안한 뒤 그를 끌고 조용한 곳을 찾기 시작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근처에 있는 낮은 산속의 흙길을 함께 걸었다. 초록색 풀잎들은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파란 여름 하늘은 뭉게구름이 그림같이 피어 있어 감탄을 자아냈다. 연인과 헤어지기엔 지나치게 좋은 날씨다.

철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서진과 눈만 마주치면 웃었다. 한참을 말없이 걷던 중 그가 먼저 아쉽다는 어투로 입술을 뗐다.

“오늘 니한테 보여줄 거 있었는디.”

“…뭔데?”

서진이 고개를 돌려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담에 보여줄께. 니부터 씨부리 봐야.”

“…어?”

“씨부릴 것 있담서.”

철이 잘생긴 눈썹을 들썩이며 말을 보챘다. 왠지 씨부리라는 말 다음에 헤어지자는 중대한 말을 하는 게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서 서진은 조심스럽게 말을 흐렸다.

“할 말 있다 그랬는데….”

“근께. 씨부릴 거.”

이 자식이. 그러니까 왜 ‘할 말’이라는 두 글자를 굳이 길게 늘이는 거냐고. 크흠흠, 결국 목을 가다듬은 서진이 자리에서 뚝 멈춰 서서 말문을 열었다.

“…내가 전부터 생각해 봤는데… 우리…. 헤어지….”

“서진아.”

대뜸 서진의 말을 자른 철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잇는다.

“움직이지 말어.”

“…왜? 왜….”

머릿속엔 아까 했던 수많은 시뮬레이션이 스치며 서진의 동공이 정신 없이 흔들렸다.

“니 대가리에 나나리벌 앉아 있….”

“끄아아악!”

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날뛰기 시작한 서진을 응징하듯 벌이 엉덩이에 달린 침을 그의 매끄러운 콧잔등에 푹 꽂아버렸다.

코를 쥐고 아악! 엄살을 부리던 그는 이러다 피부가 괴사하는 건 아니냐, 코가 낮아지는 건 아니냐, 따위의 헛소리를 늘어놓으며 염병 블루스를 춰댔다.

결국 철이 그를 나무 그늘 밑에 앉힌 다음, 콧잔등에 박힌 침을 빼주고 나서야 조금씩 진정이 되기 시작했다.

“으… 아파.”

서진이 양쪽 콧방울을 꾸욱 눌러 잡고 중얼거렸다. 철은 조용히 그의 얼굴에 손으로 부채질을 해주며 픽 미소를 머금었다.

이쯤 되면 가시나 니가 꽃보다 이뻐서 그렇다든가, 주접을 늘어놓아도 여러 번 했을 차례인데 아무 말도 없는 게 조금 이상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둘 사이엔 미묘한 정적이 흐르고, 대신 나무 위의 매미가 시끄럽게 우는 소리만 산에 가득했다. 설마…… 아까 들었나.

“서진아.”

철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정적을 파고들었다.

“하려던 말 해. 괘안은께.”

갑자기 바뀐 표현에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그도 알고 있는 것이다.

“…우리, 헤어지자.”

매미 소리에 서진의 단조로운 목소리가 섞였다. 이 말을 왜 오랫동안 못 했는지 이해가 안 될 만큼 쉽고 매끄럽게 입 밖으로 빠져나왔다.

서진은 생각보다 간단하게 가슴에 얹혀 있던 바윗덩이를 그에게 던졌다. 남자는 딱히 놀란 기색이나 화난 느낌도 없이 가만히 눈을 맞춘 채 여전히 부드럽게 물었다.

“와. 사귀어봐도 별로냐.”

“응.”

서진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뭔가 부족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일부러 몇 가지 더 덧붙이기로 했다. 뭐든 확실히 하는 게 좋은 법이라고 했으니까.

“말투도, 생긴 것도, 다 별로야. 지금 입은 옷 스타일, 흰 티셔츠도 별로고. 그 머리 스타일, 그 짧은 머리도 별로고. 맞다. 그리고 성격도, 집도, 차도 다 별로.”

푹, 푹, 내리꽂는 발음이 평소보다 정확하게 철의 귓속에 꽂혔다. 철도 서진이 이 정도로 대놓고 말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터라 행동을 멈추고 조금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막말 융단 폭격에 잠시 정신을 못 차리던 철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별 희한한 질문을 던졌다.

“…헤어지믄 내가 어떻게 해줄까?”

어쩌긴 뭘 어째. 서진은 하는 수 없이 헤어진 연인으로서 지켜야 하는 것들도 차례대로 읊어주기로 했다.

“찾아오지도 말고, 아는 척도 하지 말고, 말도 걸면 안 되고, 쳐다보는 것도 안 돼. 그냥 다 안 돼.”

“아따, 힘든 거.”

철이 한 손으로 미간을 짚으며 불평했다. 생각보다 시시하고 무덤덤한 반응에, 서진은 마치 뻥 터질 것 같아서 무섭던 풍선이 푸시시 허무하게 바람 빠지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먼저 간다.”

서진은 당장 내일 볼 것처럼 간단한 인사를 남기고 엉덩이를 툭툭 털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로 걸음을 옮기는 그의 뒤로 철이 말을 건넸다.

“오늘까지만 같이 있으믄 안 되냐잉.”

서진은 잠깐 자리에 우뚝 멈춰 서서 생각해 봤지만 그건 좀 아닌 것 같아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안 돼. 그러면 잘… 살아. 안녕.”

호―모 같은 것도 하지 말고. 괜히 떠날 사람한테 정 주지도 말고, 라는 말 대신 담백하게 인사를 건네며 머리 위로 흔들흔들 손을 흔들었다.

시골 산속에서 이루어진 꽤 할리우드 같은 이별이었다. 감금은 무슨. 지난날의 자신이 얼마나 황당한 생각을 했는지 깨닫고 나니 피식 웃음이 삐져 나왔다.

다시 산 아래로 내려온 서진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할아버지의 트럭을 찾았다. 그러나 당연히 철의 트럭을 타고 어디든 갔겠거니 생각한 할아버지는 먼저 집으로 떠난 뒤였다. 푹 한숨을 내쉰 서진은 터덜터덜 걸어서 집으로 향했다.

어느덧 뜨겁던 해는 뉘엿뉘엿 산어귀에 걸리고, 오렌지빛으로 물든 석양이 시골 마을을 동화처럼 예쁘게 비춰주었다.

태양 빛 하나로 완전히 뒤바뀐 풍경을 감상하던 중 뒤에서 시끄러운 경운기 소리와 함께 영옥의 목소리가 들렸다.

“염병 총각―! 집까지 걸어가는 거여?”

뜻밖의 행운에 신이 난 서진은 영옥에게 곰살갑게 인사하며 냉큼 경운기에 올라탔다.

“아따 내 정신! 이걸 으째. 기냥 걸어가는 게 낫겄네. 나 밭에 쪼까 들러야겄는디.”

영옥이 뒤늦게 뭔가 생각난 듯 자기 뺨을 찰싹! 두드리더니 미안한 표정으로 그를 돌아봤다.

“좀 돌아가도 괜찮아요.”

서진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어차피 여기선 남는 게 시간이었으니.

결국 경운기는 길을 조금 돌아가기로 했다.

두두두― 일정한 백색 소음에 나른해진 서진은 경운기에 앉아 깜빡 잠이 들었다.

흐릿하고 몽롱한 꿈속에서 서진은 나무가 울창하게 자란 커다란 숲을 헤매고 있었다. 은은하게 콧속에 스미는 초록색 내음이 안락하고 편안하다. 그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흐느낌 소리가 그의 발길을 끌어당겼다.

도착한 곳엔 몸을 작게 웅크리고 고개를 파묻은 남자가 울고 있었다. 듣기만 해도 가슴이 미어지는 울음소리에 서진이 위로를 건네기 위해 그에게 다가선다. 그리고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드는 순간, 서진은 화들짝 놀라 그 자리에 자빠져 버렸다.

그가 자신의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꾸벅꾸벅 졸던 서진이 눈을 끔뻑이며 크게 하품했다. 얕은 꿈은 그새 까먹어 버렸는지 그저 나른하기만 하다.

서진은 게슴츠레 눈을 떴다. 순간 그의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눈이 번쩍 뜨였다.

말도 안 돼…….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꺼풀을 천천히 감았다 뜨고 손바닥으로 비비적거렸다. 불과 얼마 전에도 지나갔던 길인데,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이…, 이게 뭐예요? 어떻게 갑자기….”

“어어. 웃기제. 나도 저거 보고 까무라칠 뻔했잖애.”

앞에서 영옥이 웃음을 터뜨리며 입을 연다.

“…웬 해바라기예요?”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넓은 평원에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심어 놓은 해바라기였다.

“나두 몰러. 철이 갸가 뭔 해바라기씨 장사를 할라 그라나. 어서 해바라기를 사다 죄다 심어브렀능가. 저런 식으루 하믄 돈도 안 되는 거 땅만 아깝제….”

영옥이 구시렁거리며 불평을 늘어놓는 동안 서진은 끝이 보이지 않는 해바라기밭에 마음을 빼앗겨 멍한 얼굴로 노란색 꽃을 바라보았다.

끝없이 펼쳐진 노란 물결은 넘실거리는 바다처럼 따뜻하게 느껴졌다.

지금은 해가 거의 진 탓인지 바라볼 곳을 잃은 해바라기들이 슬퍼 보였다.

“하이고 돈이 많은께 밸 미친 짓을 다 해. 그제? ……뭐여?”

자신의 말에 동의를 구하듯 고개를 돌린 영옥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염병 총각? 울어…?”

“…네…?”

“아이구, 우네! 뭔 일 있당가?”

영옥의 말에 슥슥 자신의 눈가를 닦은 서진의 손에 뜨뜻한 물기가 그득했다. 그 와중에도 눈물이 쉴 새 없이 퐁퐁퐁 흘러나오며 그는 그제야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와 울어? 무슨 일이여?”

“…흐윽…. 벌에 쏘여서… 흑… 아파요.”

서진이 살짝 부어오른 콧잔등을 가리키며 울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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