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94년 초여름
‘미친.’
어젯밤부터 파란색 트럭에 궁둥이를 붙이고 경유 차 특유의 덜덜거림을 견디며 장시간 이동했다. 하지만 이곳에 도착한 순간 여독으로 인한 피로와 약간의 잠기운이 찬물을 끼얹은 듯 날아가 버렸다.
‘한옥이라고 해놓고….’
돌과 흙을 토대로 쌓아 기역 자로 지은 집은 지금까지 서울에 살면서 본 한옥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으니.
눈앞에 있는 집은 돌과 진흙으로 만든 허술한 벽 위에 그보다 한층 더 너절한, 볏짚으로 만든 지붕을 얹어 놓았다. 그의 기대보다 훨씬 작고 초라한 초가집이었다.
기념사진을 찍어야 하는 사극 촬영지인지, 어느 역사 속 인물의 생가인지 모를 이 초가집은 고고한 자태를 뽐내며 서울 촌놈 홍서진을 철저하게 비웃고 있었다. 도망쳐 온 주제에 뭘 기대했냐면서.
“잠깐.”
입을 헤 벌리고 있던 서진이 애써 침착함을 가장하며 입을 열었다.
“여기 세계 문화유산… 그런 거 아니에요? 막, 막, 침범하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뭔 산?”
파란색 포터 트럭에서 내린 할아버지가 짐칸에서 짙은 갈색 캐리어 두 개를 끌어 내리다가 욕을 퍼부었다.
“하이고오 바리바리 지랄을 해쌌네.”
할아버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다르게 아주 정정한 힘으로 문풍지 바른 나무 문을 대차게 열어젖히더니 가방을 내팽개치듯 홱 던져버렸다. 두 개 합쳐 경차 한 대 값인 명품 캐리어가 쿵쿵 소리를 내며 방바닥에 나뒹굴자, 서진의 심장도 덩달아 새까만 구렁텅이로 쿵 내려앉았다.
“아,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조카 손주가 울부짖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고 할 일을 하러 부엌으로 떠났다. 얼떨결에 방 안으로 뛰어 들어온 서진은 일단 캐리어를 열어 안에 든 물건을 확인하기 바빴다.
검은색 모토로라 삐삐와 슈퍼 패미컴, 게임보이 같은 오락기기부터 드라이기, 고데기처럼 쓸데없는 미용 기기까지 캐리어에 든 물건들은 하나같이 고가 브랜드의 제품이었다. 즉 서진에게는 이제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다른 한쪽 캐리어는 전부 옷가지들로 꽉 채워져 있으니 따로 확인해 보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후우….”
캐리어를 확인한 서진은 그제야 진득하게 한숨을 늘어뜨리며 눈알을 굴려 주변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누런색 벽지와 장판은 바닥의 자잘한 돌멩이를 무시하고 깔았는지 자글자글 울어대고 있다. 당장 고물상에 갖다줘야 할 것 같은 선풍기를 비롯해 부실한 가재도구나 방 한쪽에 개켜놓은 초록색 공단 이불이 촌스러움에 화룡점정을 찍었다.
“웁….”
본연의 색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시꺼멓게 곰팡이 핀 천장을 바라보던 그는 속이 메스꺼운 듯 얼굴을 구겼다.
“이런 데서 어떻게 살라고…….”
몰락.
소위 부잣집 도련님이라 불리던 홍서진의 집안이 얼마 전 쫄딱 망했더랬다.
평생 부족함이라곤 눈곱만큼도 모르고, 미래에 대한 걱정이나 대비도 없이 그저 지난 20년간 하하 호호 여기가 대공원 꽃밭인지, 대가리가 꽃밭인지 모르고 살았던 그는 이런 대재앙급 풍파에 대한 면역력이 없었다.
“부모가 빚을 졌으면 자식새끼가 장기를 팔아서라도 갚아야지?”
집으로 밤낮없이 찾아와 뒤집어엎기 일쑤던 빚쟁이들이 급기야 서진의 일상까지 침범했을 때, 가족들은 사채업자를 피해 뿔뿔이 흩어져 잠시 재기를 위해 기반을 다지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할아버지 댁에서 몇 달만 지내면 아빠가 다 알아서 해결할게.”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재기를 위해 갖는 시간. 다른 말로는 야반도주라고 하던가.
그날로 서진은 학교에 자퇴서를 냈다.
어차피 바닥을 치는 성적으로 하프 특기생이라는 명목하에 대한대 음대에 겨우겨우 입학한 신세였기 때문에 딱히 대학에 미련은 없었다.
자퇴한 직후 서진의 엄마는 연락을 거의 끊고 지내다시피 했던 그녀의 큰삼촌에게 연락해 하나뿐인 아들의 거처를 부탁했다.
여기까지가 서울 촌놈이 산골짜기 초가집까지 오게 된 보잘것없는 스토리다.
“하아….”
서진은 또 한 번 한숨을 길게 내쉬며 노란 장판 위에 철퍼덕 소리가 나게 대자로 뻗고 누웠다. 장기간 누적된 피로가 파도처럼 눈꺼풀을 적셔 울퉁불퉁한 장판 위에서도 저절로 눈이 감겼다.
스스스.
뭔가 들린 것 같기도 하고 안 들린 것 같기도 한 느낌적인 느낌. 서진은 감고 있던 눈을 뜨고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려 주위를 살폈다.
그의 얼굴과 고작 10cm 정도 거리.
그곳엔 성인 남자 발 크기만 한 지네 한 마리가 그에게 열렬한 환영 인사를 보내고 있었다.
대왕 지네와 동거 첫날이었다.
***
“음. 시래깃국 간 잘됐다.”
후루룩,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 마신 서진이 할아버지를 향해 칭찬 섞인 눈빛을 보냈다. 그러고는 시금치 반찬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입술을 비죽 내민다.
“나물 반찬은 좀 짜네요.”
별안간 맞은편에서 할아버지의 숟가락이 날아와 서진의 동그란 이마에 정통으로 부딪쳤다. 서진이 “아!” 하고 이마를 어루만지며 울상을 짓는 동안 쯧쯧 혀를 차던 할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인자부터 니도 밭일 배워야 쓰것다.”
“…예? 뭔 밭이요?”
서진은 생전 처음 듣는 소리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긴 뭣이여, 꼬추밭이제.”
고추밭…….
밥 먹던 숟가락을 입에 문 채 멍청한 표정으로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서진이 갑자기 하하하 소리 내 웃기 시작했다.
“에이, 할아버지. 저 밭일 같은 거 못해요.”
그는 별 황당한 소리를 다 듣는다는 듯, 손을 휘휘 휘저으며 극구 사양하는 제스처를 해 보였다.
“고로코롬 시방 공짜루다가 놀구 처묵겠다. 이 말이여?”
“그건 아니고요. 나중에 아버지 일 잘 풀리면 알아서 다 챙겨드릴…, 아악.”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벌게진 이마 위로 다시 한번 할아버지의 숟가락이 날아들었다.
“염병하고 자빠졌네, 문댕이 자슥.”
“…흑.”
서진은 한쪽 손으로 맞은 부분을 더듬거리며 얼굴에 있는 모든 근육을 동원해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때 아주머니들의 왁자지껄한 목소리가 초가집의 돌담을 타고 들어와 귀를 간지럽혔다.
“김씨 할배. 옥시시랑 감자 좀 쪄왔어라.”
“조카 손주랑 밥 묵고 있었는가베.”
서울에선 야외 테라스라는 말이 더 어울릴 법한 마루 위에 작은 상을 올려놓고 아침밥을 먹고 있던 두 사람은 자연스레 소리가 나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 마을에서 삼총사라 불리는 아주머니들이었다. 자기 집처럼 스스럼없이 마당으로 들어온 아주머니들은 커다란 대나무 소쿠리 하나를 마루에 내려놓고는 대뜸 서진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워매, 설에서 왔다드니 다르긴 다르구마잉.”
“아따 참말로 잘쌩깄네잉.”
“얼굴에서 막 빛이나브러.”
눈 깜짝할 새 아주머니들에게 둘러싸인 서진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할아버지를 쳐다보았다. 그는 “징한 예펜네들” 하고 중얼거리기만 할 뿐 여전히 식사에 열중이었다.
“감사합니다. 근데 누구세요?”
숟가락을 내려놓은 서진이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왐맘마? 성님, 들었어라잉?”
별안간 세 사람이 깔깔깔 웃음을 터뜨리며 배꼽을 잡았다. 뭐가 그리 우스운지 “감사합니다~” “누구세요~?” 하고 서진의 말투를 번갈아 가며 따라 하기 바쁘다.
“오메, 씨부리싸는 것도 생긴 것도 그 테레비 나오는 탈랜트맹키로 훤하네.”
“이짝은 순자, 그 옆은 정숙이 아짐씨. 나는 영옥이 누님이라고 불러야.”
본인을 영옥이 누님이라 칭한 자주색 꽃무늬 옷 여성이 대뜸 서진의 옆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았다. 나머지 두 사람도 영옥을 우악스럽게 밀어내며 좁은 마루 위에 조르르 궁둥이를 붙이자, 오래된 나무 바닥이 고통스럽게 절규하는 것처럼 끼이익, 삐거덕 소리를 냈다.
“저는 홍서진이요. 할아버지 댁에서 몇 달만 지내려고요. 잘 부탁드려요.”
서진이 살가운 목소리로 인사를 하자, 아주머니들은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깔깔대며 서로 어깨를 찰싹찰싹 때렸다가 또 떠들기를 반복했다.
시골 사람들은 외지인한테 우호적이지 않다는 것이 항간의 속설이지만, 아무래도 잘생긴 외지인은 예외인가 보다.
“아, 뭣땀시 몇 달만 있는당가? 여서 쭈욱 살아야제.”
“기여, 기냥 눌러앉아브러.”
아주머니들은 직접 가져온 옥수수를 베어 물며 선심 써 적선이라도 하듯 이참에 이 동네에 눌러살라고 한마디씩 던졌다. 서진으로서는 달갑지 않은 참견이었기에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밥을 먹는 것에 집중했다. 하지만 아주머니들은 끈질겼다. 동네가 얼마나 살기 좋은지 서진에게 자랑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설은 뭐 공기가 드러버서 숨도 못 쉬어분담서. 여는 공기가 을매나 좋은디.”
“으디 공기뿐이당가. 물맛도 허버 좋…….”
결국 잠자코 식사 중이던 할아버지가 탁! 소리 나게 수저를 내팽개치고서야 시끄럽던 마루에 정적이 흘렀다.
“옘병. 눌러앉아불긴 뭣이 눌러앉어브러! 아그 밥 처묵는 거 안 보인당가!”
할아버지의 호통에 움찔한 건 정작 밥을 처먹던 서진뿐이었다. 아주머니들은 뭐 별일이냐는 듯 대수롭지 않게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더니 서진에게 인사를 남겼다.
“아따 영감태기 승질머리. 애기야, 우린 인자 갈랑께 밥 많이 묵어라잉? 뭐 필요한 거 있으믄 아짐씨는 쩌어기 저짝 퍼런 지붕에 사니께 놀러오구.”
“네, 안녕히 가세요.”
서진은 간단히 고개를 까딱하며 눈인사한 다음, 다시 시래깃국을 한 숟가락 떠서 후루룩 마셨다.
삼총사 아주머니들이 초가집을 떠나며 쉴 새 없이 조잘거리는 소리가 산들바람을 타고 귓구멍으로 흘러 들어온다.
“남정네가 으째 저래 생겨쓰까잉. 허벌라게 잘쌩겨브러야.”
“얼굴도 뽀―얘가지고 그 뭐여, 탈랜트 심은하보다 거시기하구마잉.”
모른 척 콩나물무침을 뒤적거리던 서진의 입꼬리가 위로 솟구쳤다. 자신이 심은하보다 거시기하다니 참을 수 없이 웃음이 새어 나왔다.
모공이라고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깨끗한 피부, 옅게 속 쌍꺼풀이 진 눈, 곧게 뻗은 코, 적당한 크기의 보기 좋은 입술까지 완벽한 이목구비의 조화.
서진은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성적은 뒤에서만 노는 꼴등일지언정 잘생긴 남학생 투표에선 항상 1등을 놓치지 않았고, 대학에 가서도 캠퍼스 킹카로 가장 많이 언급되던 이름의 주인공이었다.
그리고 그 역시 본인의 외모를 잘 알아 약간의 나르시시즘까지 갖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미모는 전국 팔도에서 통하는구나.’
기분 좋게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주억이는 순간,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서진의 귓전에 귀싸대기를 날렸다.
“그라도 철이만은 못하제잉?”
“어휴. 시상천지에 철이만 한 인물이 어딨당가.”
“그건 기여.”
푸흡!
한번 서진의 입 안에 들어갔던 시래깃국이 다시 바깥으로 자유분방하게 뿜어져 나오는 소리였다.
서진이 입에서 내뿜은 액체로 엉망이 된 밥상을 잠시 무표정하게 쳐다보던 할아버지가 “이런 옘병할.”로 시작하는 욕을 속사포로 구사하기 시작했지만, 그의 귓속에 들리는 음성은 오직 한 문장뿐이었다.
그라도 철이만은 못하제잉? 철이 만은 못하제잉? 못하제잉? 모다제잉 모다제잉…….
철이? 그건 또 어느 집 개 이름이란 말인가. 강남에서도 누구에게 뺏겨본 적 없는 1등을 이런 촌구석에서 어느 누가 뺏어갈 수 있단 말인가.
“쌧바닥을 싹 뽑아불라. 니기럴. 밥 처묵다가 뭔 지랄이여 지랄은.”
옆에서 자기 신체를 잔인하게 훼손하는 욕이 난무하는 와중에도 서진의 머릿속엔 방금 제 귀싸대기를 날린 미지의 인물뿐이었다.
그의 상상 속에서 철이라는 존재는 친구네 집에서 본 털이 곱슬곱슬한 갈색 강아지였다가, 어릴 적에 성당에서 보았던 후광이 비치는 예수님의 모습을 하기도 했다. 머릿속으론 도저히 자신보다 잘생긴 남성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에.
서울 한복판도 아니고 이런 촌구석에서 외모가 누구보다 못하다는 소리를 듣고 나니, 살아생전 내세울 거라곤 얼굴밖에 없던 서진의 자존심이 망쳐버린 시험 성적표처럼 마구 구겨지고 찢어지는 것 같았다.
“잘 먹었습니다….”
서진은 눈 밑에 퀭한 그림자를 드리운 채 잔뜩 풀이 죽은 얼굴로 수저를 툭 내려놓았다. 뒤돌아서 신발을 신고 일어날 채비를 하는 그의 대가리를 겨냥한 상추 몇 장이 동그란 뒤통수에 통, 통 부딪히며 마룻바닥으로 떨어졌다.
“잘 처묵긴 개뿔이 잘 처묵냐. 저 느자구없는 새끼.”
그러나 할아버지의 차진 욕은 바닥에 떨어진 상추처럼 서진의 귓등에 부딪혀 주인 없이 허공에 나뒹굴 뿐이었다.
좁은 초가집에서도 그의 방은 신을 신고 몇 발자국 걸어가야 도착할 수 있었다. 서진은 비척비척 걸어가 방에 들어서자마자 바닥에 엎어졌다. 머릿속으로는 아주머니들의 음성을 카세트테이프처럼 반복 재생했다.
어휴. 시상천지에 철이만 한 인물이 어딨당가. 어딨당가 어딨당가…….
그건 기여. 기여 기여……….
심지어 왠지 메아리치고 있다.
“하, …참 나.”
픽 코웃음 친 그가 어깨를 꾸물꾸물 움직여 옆으로 돌아누웠다. 이 촌구석에서 ‘절대 미남’ 역할을 충실히 하며 주민들에게 눈 호강을 시켜주는 대신 사랑받고 놀고먹으려는 음흉한 심산이 철이라는 작자 때문에 물거품이 됐다.
그래. 이제 성인이 되었으니 외모가 전부라고 생각하던 철부지 시절과는 달라져야 한다. 정말 중요한 건 얼굴이 아니라 그 사람의 능력이라든가 내면의 아름다움 따위일 테니까.
애석하게도 서진은 나머지 두 개 모두 해당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어느새 따뜻한 햇볕이 누런 문풍지를 뚫고 들어와 게슴츠레 뜬 눈 위에 부서졌다. 햇볕은 따스하지, 위까지 배부르게 채워놓으니 눈꺼풀이 내려앉는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하지만 의식이 다른 차원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아득해질 때마다 무의식은 어디선가 자꾸 방에서 봤던 대왕 지네를 끄집어내며 서진의 눈을 번쩍 뜨이게 했다.
“처자는가?”
할아버지 목소리가 얇은 문풍지가 발린 문을 뚫고 들어왔다.
“아니요.”
서진은 그대로 자리에 누운 채로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러다 별안간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상체를 벌떡 일으키더니 나무 문을 대차게 열어젖히고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저 여기서 못 자요. 이 방에 지네 있단 말이에요. 지네 좀 잡아주세요.”
서울에 있을 때도 바퀴벌레가 나타나면 식겁하며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사물 위로 피신하던 그였다.
“개똥 싸는 소리 하덜 말구 싸게싸게 따라와야.”
할아버지는 들은 척도 않고 낡은 밀짚모자를 고쳐 쓰며 그를 재촉했다.
“…어디 가는데요?”
“으디긴 으디여 꼬추밭이제.”
“아, 할아버지. 저 그런 거 못한다니까요.”
서진은 눈썹을 팔자로 찌푸리며 온몸으로 거부 반응을 보였다. 그가 태어나서 해본 일이라고는 대학에 가기 위해 하프를 조금 연습한 것과 대학에 가서 하프를 조금 연주한 것이 전부였으니. 그마저도 부모님이 제발 조금이라도 해 보자며 명품 선물을 미끼 삼아 사흘 밤낮을 빌고 빌어 얻어낸 결과였다.
“쓰읍. 발목때기를 뿐질러부러야 나오긋냐. 안 나오긋냐잉?”
집주인의 불호령이 떨어지자 서진이 결국 꼬리를 내렸다. 발목때기가 정확히 어디인지는 몰라도 어감이 좋지는 않았으니까.
“…그럼 저 옷 갈아입고 나올 테니까 잠깐만요.”
서진은 호되게 걷어차인 강아지처럼 시무룩한 표정으로 방문을 닫았다. 편한 운동복으로 갈아입기 위해 캐리어를 여는 순간,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생각해보니 아주머니들이 마주본 모습은 자신의 가장 후줄근한 모습이지 않은가. 평소처럼 적당히 꾸민 모습을 본다면 ‘철이만은 못하지’라는 평가는 다시 배꼽 아래로 쏙 들어가게 될 거라고.
서진은 바로 캐리어를 뒤집어엎고 난잡하게 쌓인 옷가지를 마구 헤집으며 옷을 골랐다. 이윽고 그는 지난여름 하와이에서 입었던 리미티드 컬렉션 셔츠와 밝은 아이보리색 명품 반바지를 골라 들었다.
조금 구겨지긴 했으나 옷걸이가 좋으니 이 정도는 커버할 수 있었다. 거기에 남녀공용으로 나왔던 핑크색 틴트 선글라스를 직접 쓰지는 않되, 셔츠에 걸쳐놓기로 했다.
“흠.”
손거울을 요리조리 들여다보던 서진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 헤어 젤을 찾았다. 동전만큼 손바닥에 짜낸 다음 다갈색 염색 머리를 슬쩍 뒤로 쓸어넘겼다. 원래 젤은 너무 많이 쓰면 느끼해지는 법이다.
반듯하고 잘생긴 이마가 드러나니 훨씬 인물이 사는 것 같다. 한껏 기분이 좋아진 그는 히죽 웃는 얼굴로 콧노래를 부르며 바깥으로 나왔다.
“출발합시다~”
서진은 노래하듯 이상한 음을 넣어 말하며 슬리퍼를 신었다. 그의 옷차림을 빤히 바라보던 할아버지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난데없이 싸리 빗자루를 손에 든다.
그 빗자루가 서진의 엉덩이에 떨어진 건 순식간이었다.
“옘병. 천병을. 하고. 자빠짔네!”
“아! 아아!!”
할아버지는 한 음절 한 음절마다 빗자루를 리듬감 있게 내려쳤다. 금이야 옥이야 어화둥둥 자란 도련님은 생전 처음 맞아보는 매질에 새끼 돼지처럼 소리를 질러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동네가 떠나가라 소릴 지르며 한참 동안 처맞은 서진이 할아버지 손에 이끌려 도착한 곳은 사람이라곤 한 명도 보이지 않는 드넓은 광야였다. 낯빛이 당황으로 물든 서진이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다, 다른 사람들은요?”
“쬐깐한 밭에 사람은 무슨.”
할아버지의 밭은 고추를 3,000주 정도 심을 수 있는 크기의 밭이었다.
“그럼 고추밭이라면서 고추는 어디 있어요?”
고추는 고사하고 풀 한 포기도 보이지 않는 흙바닥을 둘러보던 서진이 한 번 더 묻는다.
“인자부터 니가 심어야제.”
“네?”
할아버지가 트럭 짐칸에서 퇴비 자루를 던지며 대답했다.
“고것들을 저기 저짝부터 저어기 저짝까지 일짜루다가. 알겄냐?”
서진은 자신의 발아래 던져진 퇴비 자루를 남의 일처럼 시큰둥하게 쳐다보았다. 퇴비라니. 자신의 정말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찝찝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자루가 몇 킬로인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무거워 보였기 때문에. 저런 걸 들어 올렸다가는 허리가 작살날지도 모른다. 남자는 허리가 생명인데.
“할아버….”
“쓰읍!!”
소통을 차단당한 뒤에도 얼마간 버티던 서진은 도저히 빠져나갈 구석이 보이지 않자 하는 수 없이 퇴비 자루를 질질 끌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끝에 큰 구멍을 낸 다음 끌고 다니며 퇴비를 뿌리니 일은 생각보다 수월했지만, 작업 속도는 농촌 체험학습을 나온 초등학생만큼 느렸다.
“김씨 영감!”
두 사람이 한창 허허벌판 위에 퇴비를 뿌리고 있을 때 멀리서 한 남자가 다급하게 뛰어오더니 크게 숨을 골랐다.
“와 그란당가?”
남자를 발견한 할아버지가 허리를 펴며 물었다.
“아이고 사달 났어라! 염순이, 염순이가 새끼를 낳는디. 고것이 시방 거꾸로다가 거시기해브렀당께요!”
염소가 역산 중인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지체되면 어미 염소와 새끼 모두 위험해진다. 수의사가 따로 없는 마을에서는 할아버지가 동물 출산 전문가로 통했다.
“워매, 겁나게 구지구마잉. 얼른 갑세.”
작업 장갑을 바닥에 내팽개친 할아버지가 남자와 함께 걸음을 옮기자, 다급해진 서진이 그를 불러세웠다.
“할아버지, 저는요? 저는 어떡해요?”
“니는 고거 마저 뿌리다가 해 지기 전에 들어가야. 왔던 길 알제? 나는 알아서 갈랑께.”
할아버지가 서진을 향해 트럭 키를 던졌다. 얼떨결에 키를 받아 든 서진이 말릴 새도 없이 두 사람은 빛의 속도로 멀어졌다.
“…몰라요. 왔던 길….”
서진은 멀어지는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허망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한숨을 푸욱 내쉰 그는 광활한 밭 위에 쭈그리고 앉았다. 셔츠 앞섶에 얹어둔 선글라스가 거추장스러워 주머니 안에 쑤셔 넣고 다시 퇴비 자루를 잡았다.
일단 뿌리고 있으라고 했으니까 이 똥 같은 걸 계속 뿌리다 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아…….”
얼마간 작업을 계속하던 서진이 주저앉아 숨을 골랐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건지 어느덧 중천에 떠 있던 해가 산 아래로 뉘엿뉘엿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여전히 할아버지는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가로등 하나 없는 낯선 곳에 혼자 덩그러니 남게 된다면 낭패가 따로 없을 것이다. 덜컥 겁을 집어먹은 그는 작업 중이던 도구를 트럭 뒤에 싣고 냉큼 운전석에 올라탔다.
드르르륵 두두두―
차 키를 꼽고 돌리는 몇 번의 시도 끝에 겨우 시동이 걸렸다. 서진은 핸들에 쓰러지듯 몸을 기댄 채 빈약한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집에서 밭에 도착할 때까지 본 거라고는 온통 흙과 초록색뿐이라 딱히 기억할 만한 구조물이나 사물도 떠오르지 않는다.
‘일단 직진하자…. 고 스트레이트.’
서진은 자신의 직감을 과대평가하며 거세게 액셀을 밟았다. 낡은 트럭이 뿌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덜컹덜컹 굴러갔다.
구부러진 비포장도로를 덜컹거리며 달리기를 20분.
충분히 집이 나올 법한 거리인데도, 주변은 여전히 논과 산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해도 완전히 저물어 칠흑같이 어두운 흙길 위에 헤드라이트만 미력한 빛을 내고 있었다.
꾸르륵.
스트레스 때문인지 이제 장까지 꼬이기 시작했다. 화장실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심술이라도 부리듯 배 속이 한껏 더 뒤틀린다.
갈수록 핸들을 쥔 두 손에 꽈악 힘이 들어갔다. 관자놀이를 타고 뽀얀 뺨 위로 식은땀이 흐르고, 점점 시야도 흐릿해졌다.
“아 씹….”
마침내 한계점에 다다른 서진은 길가로 급히 핸들을 틀었다. 끼이익, 흙먼지를 일으키며 트럭이 멈춰 섰다. 키를 꽂아둔 채 급하게 차에서 내린 서진은 미친 듯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로등 하나 없이 깜깜한 시골길은 양옆으로 넓은 풀밭을 끼고 있었다.
짧은 한숨을 내쉰 그는 조심스럽게 아래로 발을 디딘 다음, 정체 모를 풀밭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이게 대체 무슨 밭인지는 몰라도, 발목까지 오는 풀들이 빼곡히 자라 있었다.
행인의 눈에 띄지 않을 만큼 풀밭 깊숙이 들어간 서진은 급한 대로 쪼그리고 앉아 바지를 내렸다.
해방은 짧은 시간 만에 찾아왔고, 오랜 고전 끝에 얻은 승리처럼 달콤했다. 모든 것을 내보내고 한숨을 돌리자 뇌에 산소가 돌며 굳었던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문제가 찾아온 건 그 순간이었다.
‘휴지.’
심장이 싸늘하게 식는다. 승전의 달콤함은 짧고 두 번째 오는 파도는 더 큰 법이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더니, 왜 제게 이런 재앙이 연달아 일어나는지. 결국 참을 수 없는 설움이 복받치며 코끝이 시큰해졌다.
“거 누구요?”
가장 큰 세 번째 재앙은 예고도 없이 서진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
서진은 숨 쉬는 법도 잊은 채 석상처럼 굳었다.
“와 대답이 없을까잉.”
남자의 목소리가 귓구멍이 아니라 가슴을 후벼파는 듯하다. 언제 왔는지 서진의 트럭 옆에 서 있는 트랙터와 커다란 남자의 실루엣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시방 남의 밭에서 뭣 하고 있어라?”
그리고 이제 그 남자는 서진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오… 오지 마요!!”
“…뭐여?”
낯선 외지인의 말투는 오히려 남자의 경계심을 부추겼다.
“오, 오지 마라! 오지 마라… 요…?”
뒤늦게 어설픈 사투리를 흉내 내는 서진을 무시한 남자가 더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여서 괜헌 짓 하믄 확 조사브리는 수가….”
“악! 오지 마! 오지 말라고!!”
서진은 이제 악귀가 빙의한 것처럼 발광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열 걸음 남짓 되는 곳까지 다가온 남자는 서진을 생전 처음 느껴보는 굴욕이란 이름의 낭떠러지로 한 걸음씩 떠밀고 있었으니.
서진이는 이슬만 먹고 살 것 같아.
그 음대 홍서진? 진짜 화장실도 안 가게 생기지 않았냐?
서진 오빠는 아마 똥오줌도 안 쌀 거야.
찬란했던 지난날들이 머릿속에서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서진은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장난스럽게 웃어넘기면서도 은근히 사람들 앞에서 화장실 가는 것을 꺼리곤 했다. 사실 그 누구보다 요정 컨셉에 진심이던 그의 눈시울이 결국 뜨끈뜨끈해졌다.
하지만 불도저 같던 남자는 어느 순간 멈칫하더니 더 다가오지 않았다. 너무 어두워 자세히는 보이지 않을 테지만, 정황상 남의 밭에 쪼그리고 앉아 있을 이유가 한 가지밖에 없었기 때문에.
“아따, 똥 쌌으믄 똥 쌌다고 말을 하지.”
“흑… 흐윽….”
“다 쌌으믄 거름으로 쓰게 잘 묻고 나오소.”
“흐으윽….”
남자는 이제 볼 일 없다는 듯 매몰차게 뒤돌아섰다.
“잠깐만!”
서진이 코맹맹이 목소리로 다급히 그를 불러세웠다.
“와?”
“휴지…, 휴지 좀 줘봐요.”
“휴지 없는디.”
“아, 그럼 아무거나!!”
단전에서부터 출처를 알 수 없는 화가 치밀어 올라 신경질적인 말투가 툭 튀어나왔다.
“흠. 닦을 것… 좀 줘봐요….”
급하게 목을 가다듬은 서진이 점점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가지가지 하는구먼.”
기가 찬다는 듯이 비소한 남자가 어깨에 걸치고 있던 수건을 손에 들고 다가오자, 서진이 혼비백산해서 소리 질렀다.
“아악! 가까이 오지 말고 던져!!”
하. 코웃음 친 그가 결국 수건을 둥글게 말아 툭 던진다.
“됐제.”
수건은 서진의 한 걸음 앞에 정확히 떨어졌다. 이어서 저벅저벅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서진은 남자가 다시 길가 쪽으로 향하는 것을 확인한 후 재빨리 수건을 이용해 긴급재난 상황을 해결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개구멍은 있다더니.
산뜻하게 바지를 추켜올리고 밭을 빠져나오는 그의 발걸음이 한결 가볍다.
어차피 시꺼먼 어둠 속에서 서로 얼굴조차 보지 못했기 때문에 아까 그놈이 어디 가서 소문을 내더라도 죽어라 아니라고 우겨댈 참이었다.
그런 안일한 생각도 잠시, 서진은 길가에 다다랐을 때 아직 떠나지 않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남자를 발견하고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생각해보니 김씨 영감의 트럭을 외부인이 혼자 타고 나온 게 수상하게 보였을지도 모른다.
붉은 트랙터와 파란 트럭의 헤드라이트 불빛 속에서 두 사람은 이번에 선명하게 서로를 마주했다.
그라도 철이만은 못하제잉?
불빛에 비친 남자의 얼굴을 본 서진이 저도 모르게 집게손가락으로 그를 삿대질하며 중얼거렸다.
“철… 이…?”
서진보다 한 뼘 정도 더 커 보이는 남자는 까만 밤에도 찬란한 빛을 내뿜는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짙고 가지런한 눈썹부터 높은 콧날과 도톰한 입술로 이어진 선은 곱상하다는 표현이 어울리면서도 남자다웠다. 누구라도 그의 조각 같은 이목구비에 시선이 한 번 닿으면 떨어지지 않을 듯했다.
시골 청년처럼 순박해 보이는 상도 아니었다. 굳이 예를 들자면 강남 나이트에서 여자를 끼고 놀며 좀 생겼다 하는 오렌지족을 열 번 정도 업그레이드한 것 같은 미남이랄까.
마찬가지로 남자도 가만히 멈춰 서서 서진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본의 아니게 시작된 눈싸움에 승부욕이 생긴 서진은 남자를 뚫어지게 쏘아보다 기어이 눈물까지 핑 돌았다.
“철이… 맞죠…?”
독한 자식. 눈싸움에서 패배한 서진이 황급히 눈가를 닦으며 물었다.
“나 알어?”
철의 질문은 언뜻 기대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에 뭐, 아침에 마을 아주머니들한테 들어서요.”
‘그쪽이 철이일 수밖에 없는 얼굴이거든요’라는 말은 속으로 삼켰다. 뾰로통해 있던 서진의 눈에 갑자기 이채가 돌았다.
“잠깐. 혹시 우리 할아버지 집 어딘지 알아요? 김순돌 할아버지요.”
서진은 절박함이 덕지덕지 묻은 목소리로 그에게 구조 요청을 던져 보았다.
“알제. 김씨 영감님 댁은 이짝이랑 반대편인디.”
“…네?”
남자의 대답을 들은 서진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여전히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철이 갑자기 자신의 트랙터에서 손전등을 챙겨 오더니 트럭의 문을 열고 운전석에 올라탔다.
“델따줄란께 타.”
그리고 문을 닫기 전에 한마디를 덧붙였다.
“말 놓구.”
탁, 운전석의 문이 닫히자 멍하니 서 있던 서진이 허겁지겁 반대편 조수석으로 뛰어가 올라탔다. 자신보다 잘생긴 데다 아까 그런 꼬라지로 만난 남자가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굳이 도움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벨트.”
“으응.”
어색하게 대답한 서진이 안전벨트를 매자 파란 트럭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출발했다.
차 안은 덜컹거리는 소음만 가득할 뿐 쥐 죽은 듯 조용하다.
왠지 자꾸 옆에 앉은 남자의 시선이 왼뺨에 닿는 것 같다. 손에 들고 있던 수건이 신경 쓰인 서진은 그것을 최대한 꽉 눌러 작게 만든 다음 오른쪽 허리춤 밑으로 숨겼다.
가만히 정면을 주시하던 철이 넌지시 말을 던졌다.
“똥 닦은 수건은 왜 꼭 끌어안고 있디야.”
“닦긴 뭘 닦아…!”
이 자식은 옆에도 눈이 달렸나. 급한 마음에 짜증 섞인 반말이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다. 어차피 나이도 비슷해 보였기 때문에 그냥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안 닦았단 말이여?”
“…….”
서진이 조용히 그를 노려보았다. 남들이 들으면 세상에 똥오줌 안 싸는 인간이 어디 있느냐고 웃을 얘기지만, 그는 아직도 똥오줌을 부끄러워하는 유아적인 부분이 있었다. 거기에 약간의 나르시시즘까지 합쳐져 남들은 이해 못 할 만큼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너, 이거 사람들한테 소문내면….”
서진의 날 선 목소리에 황당한 표정을 짓던 철의 입가에 어이없는 웃음이 번졌다.
“남 똥 싼 야기를 뭣이라고 소문을 내?”
“자꾸 똥똥 거리지 마.”
다른 누가 듣는 것도 아닌데 서진은 똥똥이라는 부분을 작게 말했다.
“아따. 앵간한 가시나보다 더 염병이구마잉.”
“뭐 가시…….”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단단한 팔뚝이 서진의 앞을 가로막더니 끼이익, 하는 마찰음을 내며 급브레이크를 밟은 트럭이 멈춰 섰다.
야생 멧돼지가 트럭 앞으로 뛰어든 것이다.
가로등이 드문 시골길은 딱 한 치 앞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종종 고라니 같은 동물이 지나가는 차에 치여 변을 당하곤 했다.
“가시나 괘안애?”
멧돼지와 부딪친 것도 아닌데 철은 서진의 안색을 자세히 살폈다.
잠시 상황 파악을 하듯 굳어 있던 서진이 앞을 가로막은 그의 팔을 냅다 뿌리치더니 좌석 밑에 떨어뜨린 수건을 집어 들었다. 그 모습을 보던 남자의 입에서 어처구니없는 실소가 새어 나온다.
그 후로 집에 도착할 때까지 남자가 몇 번 더 살갑게 말을 걸어왔지만, 서진은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대충 단답형으로만 대꾸했다.
자꾸 똥, 똥 거리는 것도, 자신보다 키 크고 잘생긴 것도 다 마음에 안 들었다.
“영감님 주무시는가 본디.”
불이 꺼진 초가집 앞에 낡은 트럭이 부드럽게 정차했다. 아직 이른 시간이었지만 해가 지면 자고 해가 뜨면 일어나는 노인은 서진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음에도 혼자 잠자리에 든 모양이었다.
“어 고마워. 잘 가.”
서진은 팔을 길게 뻗어 운전석의 키를 뽑은 다음, 철과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감사 인사를 그의 귓구멍에 투척했다. 도망치듯 트럭에서 내려 빠른 걸음으로 걷는 서진의 뒤로 남자가 뒤따라 차에서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이, 염병 가시나.”
서진이 반사적으로 홱 뒤를 돌아보자 달칵 소리가 나며 손전등을 턱 아래에서 위로 비춘 철이 씩 웃었다. 이쯤 되면 아주머니들의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딴 각도로 비춘 조명이 무대 조명으로 느껴질 만큼 빌어먹게 잘생긴 얼굴이다.
“또 봐야.”
철이 양손을 들어 크게 흔들더니 뒤돌아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저, 씹….”
또 보긴 뭘 또 봐. 한마디 하려던 서진은 그의 너른 어깨와 탄탄한 등짝을 보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 보니 여기서 트랙터가 있는 곳까지 걸어가려면 족히 한 시간은 걸릴 터였다.
깜깜한 흙길을 혼자 걸어가는 철의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리자 기분이 조금 풀리는 것 같다. 원래 서진은 철딱서니도 없고 염치도 좀 없는 편이었다.
그날 밤 꿈엔 방에서 봤던 대왕 지네가 나와 한참 동안 밤잠을 설쳐야 했다.
***
“싸게싸게 인나라잉.”
“…어? …우으응…. 지금 몇 신데요…?”
단잠을 자던 서진은 난데없이 찬물을 끼얹는 할아버지의 목소리에 게슴츠레 뜬 눈을 비비며 기지개를 켰다. 아직 새벽닭이 울기도 전인지 활짝 열린 방문 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어둑어둑한 푸른빛이다.
“아, 맻 시긴. 밭에서 일헐 시간이제.”
“아 할아버지히이…….”
“쓰읍!”
할아버지의 쓰읍! 한 번에 오뚝이 인형처럼 몸을 일으킨 서진이 허겁지겁 방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러고는 대충 찬물을 끼얹어 세수한 뒤 제일 편한 추리닝을 골라 입었다. 어제 싸리 빗자루로 처맞은 기억이 그 원동력이랄까.
할아버지의 성화에 못 이겨 부랴부랴 움직이다가 잠시 후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어제 퇴비를 뿌리던 할아버지의 밭에 와 있었다.
“인자 퇴비는 돼았구. 두둑 만들어야겄다.”
“두둑이요?”
할아버지가 서진의 손에 커다란 삽을 쥐여주며 말했다.
“삽질 혀 봤냐?”
“아니요.”
얼떨결에 삽을 받아 든 서진이 격하게 고개를 젓는다.
“쩌기 저짝부터 저짝까지 넓구 높게 일짜루다가. 알긋냐잉.”
그러거나 말거나 할아버지는 자기 할 말만 하더니 옆에서 곧장 흙을 파내며 두둑을 만들기 시작했다. 멀뚱멀뚱 서 있는 서진이 손에 들린 삽을 어물쩍 쳐다보고만 있자 다시 “쓰읍!” 소리가 그의 등짝을 채찍질했다.
또 야단맞은 강아지처럼 꼬리를 만 서진은 대충 할아버지를 따라 흙을 퍼냈다. 삽질은커녕 모종삽으로 화분에 꽃을 심어본 적도 없는 그는 요령 없이 땅을 퍽퍽 헤집기만 해댈 뿐이었지만.
“어메, 염병 총각 아니여?”
저 멀리서 덜덜거리는 경운기 소리와 함께 아주머니들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마을의 삼총사 아주머니 중 영옥과 순자였다.
“염병 총각. 일 잘허구 있어?”
경운기 트레일러에 앉은 순자가 머리 위로 손을 흔들며 사람 좋게 웃는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서진이 양옆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주변에는 자신과 할아버지를 제외하면 개미 새끼밖에 없다. 게다가 왠지 두 사람과 눈이 마주친 기분까지 들었다.
“안녕하세요.”
서진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 인사하더니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근데……. 제가 왜 염병 총각이에요?”
“아이구. 총각 이름을 까묵어브렀으야. 할배한테 또 물어본께 하도 옘병천병을 해싼대서 염병 총각이제잉.”
“제 이름 홍서진이요. 홍서진.”
서진이 손바닥을 펴 자신의 가슴팍을 탁탁 치며 강조했다.
“기여, 이름두 이쁘다. 그라믄 우린 먼저 갈랑께. 염병 총각, 일 열심히 혀잉.”
“잘 혀잉.”
억지로 대화를 끝낸 아주머니들은 제 갈 길을 가듯 경운기 소리와 함께 멀어졌다.
마지막엔 또 염병 총각이라고 했다. 염병 총각이라니…….
서진은 한 손에 삽을 들고 멍하니 서서 충격에 잠겼다. 따지고 보면 이게 다 철이, 그놈 때문 아니겠는가.
그 자식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잘생긴 제 이름을 기억 못 할 리가 없는 데다가 별명이 붙어도 염병 총각 따위가 아니라 잘생긴 총각 내지 미남 총각이 됐을 텐데. 그 한 명 때문에 난생처음으로 평범한 사람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비참함에 단전에서부터 질투심이 끓어올랐다.
“아, 뭣 하고 있냐. 언능 파.”
혼자 열심히 흙을 파내던 할아버지가 재촉하자 서진은 다시 땅을 헤집으며 말 그대로 삽질을 해댔다. 가끔 할아버지가 쌓아놓은 흙을 다시 퍼내서 땅에 덮기도 했지만, 악의는 없었다.
어느새 중천에 뜬 태양이 정수리를 녹여버릴 듯 내리쬐고, 시간이 지나면서 두둑도 어느 정도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이제야 두둑의 모양을 이해한 서진은 작업 속도를 조금 높였다. 이마엔 이슬 같은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삽을 쥔 여린 손바닥에는 물집이 잡혔다.
한창 작업 중인 두 사람 뒤로 어디선가 나타난 하얀 트럭 한 대가 조용히 멈춰 섰다. 차에서 내리는 남자를 먼저 발견한 건 할아버지였다.
“왐마. 철이 니가 웬일이냐잉.”
철이. 민감한 이름을 들은 서진이 삽질을 멈추고 주변을 홱 돌아본다.
“잘 지내셨어라.”
시선을 돌린 곳에 철이 커다란 소쿠리를 들고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샛거리 좀 드시고 하소.”
남자가 어디서도 본적 없는 큼직한 소쿠리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얼굴에 화색을 띤 할아버지가 작업을 멈추고 다가가 소쿠리 위에 얹힌 뚜껑을 열자 고소한 냄새가 서진을 끌어당겼다.
하얀 기름종이 위엔 조기전, 배추전, 김치 고기전, 꼬치전, 동그랑땡 등등 오색찬란한 전들이 제각각 먹음직스러운 빛깔을 자랑하고 있었다. 다 부치려면 서너 시간은 넘게 걸릴 만한 것들이 아닌가. 새참이 아니라 명절 제사상이 따로 없었다.
“아따 오늘이 내 제삿날이여 뭐여. 뭔 전을 다 부쳐 불고. 이거 다 니가 한 거냐잉?”
“아, 쌔빠지게 부쳐 브렀제.”
철이 능청스럽게 어깨를 두드리며 대답했다.
“와 이거 내가 좋아하는….”
어느새 맛있는 냄새에 홀린 듯 다가온 서진이 꼬치전을 보며 중얼거렸다. 쪽파, 소고기, 꽈리고추, 맛살, 오징어, 버섯을 꽂아 계란을 입힌 꼬치전은 노릇노릇하니 굽기도 딱 적당하여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가시나, 거 이리 주고 처묵어.”
철이 순식간에 서진이 들고 있는 삽을 빼앗아 들며 말했다. 괜히 눈알을 굴리며 딴청을 피우던 서진은 은근히 그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소쿠리 앞으로 가 쭈그리고 앉았다. 꼬치전은 못 참지. 안 그래도 뱃가죽이 등가죽에 붙어가던 참이다.
“하이구. 뭔 젓가락까지 있디야.”
할아버지는 들뜬 목소리로 나무젓가락을 뜯더니 동그랑땡부터 집어 들었다. 서진도 오랜만에 보는 특식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집이 빚더미에 앉은 후 몇 개월간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한 탓이다.
서진은 제일 좋아하는 꼬치전부터 야무지게 빼먹고, 남은 꼬치로 노릇노릇한 조기전을 찍어 한입 베어 물었다. 부드러운 조기 살이 입 안에서 살살 녹았다. 삽질을 하다가 먹어서 그런지 서울에서 먹을 때보다 훨씬 맛이 좋은 것 같다.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배가 터지도록 전을 입에 넣는 동안 철은 서진에게서 빼앗은 삽으로 고추밭 두둑을 만들고 있었다. 어찌나 작업 속도가 빠르고 힘이 좋은지, 짧은 시간에 할아버지와 서진이 지금까지 해놓은 것보다 두둑을 더 많이 만들었다.
분명 어제도 한참을 걸어가야 했을 텐데 몇 시에 일어나서 전을 준비하고 무슨 힘으로 남의 밭까지 와서 삽질을 하고 있는 건지 알 길이 없다.
시골 사나이는 확실히 체력이 다르긴 다른가 보다. 하며 서진은 마지막으로 김치 고기전을 입에 쏙 집어넣었다.
“자, 자, 다 처묵었으믄 일해라잉.”
할아버지가 전을 우물거리는 서진의 얼굴에 대고 손뼉을 짝짝 치더니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진은 하는 수 없이 고기전을 꾸역꾸역 씹어 삼키며 엉덩이에 묻은 흙을 탁탁 털어냈다.
털레털레 다시 밭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어딘가 시큰둥하다.
“이제 줘, 내가 하게.”
서진이 철을 향해 한 손을 척 내밀고서 말했다.
“니 손목때기로 으디 삽질 하겄냐. 내가 할란께, 가봐.”
남자는 피식 웃더니 서진을 무시하고 하던 작업을 계속했다. 다른 사람이 들으면 얼씨구나 춤추며 좋아할 얘기일지라도, 그것은 서진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이었다.
저 여우 같은 놈이 자신을 아주머니들에게 염병 총각으로 불리게 만든 것도 모자라 할아버지에게 잘 보여 그의 사랑마저 독차지하려는 것이다.
당연히 두 가지 모두 사실과 거리가 멀었지만, 이미 시기 질투에 정신이 회까닥 돈 서진은 눈에 뵈는 게 없었다.
“지금까지 잘하고 있었거든? 내놔 빨리.”
“내가 싸게 하믄 된단께.”
“내가 할 거라니까?”
“아따. 니는 기냥 가서 쉬어.”
제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철을 보며 혼자 차곡차곡 쌓아놓은 서진의 분노 게이지가 난데없이 폭발했다.
“이 씨, 내 삽 내놓으라니까!”
다짜고짜 눈을 까뒤집고 달려들어 삽을 마구 흔들어대는 순간, 삽의 나무 손잡이 부분이 철의 중심부를 가격했다.
“억…!”
퍽, 하는 소리가 들리며 타격감이 느껴지고 그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단마디 신음이 새어 나왔다. 깜짝 놀란 서진이 삽에서 두 손을 떼고 슬금슬금 뒷걸음질 친다.
“미안… 일부러 그런 건….”
단언컨대 삽만 뺏으려 했을 뿐, 고자로 만들 생각은 없었다. 서진도 같은 사내로서 고통을 알기에 그의 고간을 쳐다보며 대신 미간을 찌푸렸다.
“…부랄 터진 거 아니야? …많이 아파?”
서진은 머릿속으로 깨진 달걀 이미지를 떠올리고는 무의식중에 그의 중심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씁 으디.”
짧은 순간 고통을 인내한 철이 장난스럽게 대꾸하며 서진에게 삽을 내밀었다.
“여, 니 삽.”
“으응.”
얼떨결에 삽을 받아든 서진은 집 나갔던 이성을 서서히 되찾으면서 당장 이 삽으로 자신의 묫자리를 파고 싶어졌다.
객관적인 사실만 따져보면 철은 어제 집까지 데려다주었고, 오늘은 새참을 가져다주고, 대신 삽질을 해주다가 불알을 까인 게 아닌가. 게다가 입 안엔 아직 그가 부쳐온 김치 고기전의 짭조름한 맛이 남아 있었다.
그야말로 무고한 철은 말없이 자신의 트럭 짐칸에서 새로운 삽을 꺼내 왔다. 서진이 이 정도로 자기 물건에 집착하는 줄 알았으면 진작 내줬을 것이다. 내리쬐는 초여름 태양 아래에서 그는 부지런히 남의 밭을 일구기 시작했다.
푸욱. 와중에 서진의 삽이 힘없이 땅에 처박히며 딱 한 주먹만큼 흙을 퍼냈다. 그마저도 힘이 드는지 연신 더운 숨을 내쉬며 손등으로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낸다.
한 번 삽질에 한 번 땀을 닦는 신개념 원 플러스 원 작업 방식에 할아버지는 허허 헛웃음을 지으며 혀를 내둘렀다.
“후우.”
또 한 번 더운 숨을 내뱉은 서진이 한 손으로 얼굴을 부채질하며 저 멀리 부지런히 삽질 중인 인간 포클레인을 감상했다. 지치지도 않는지 오히려 처음보다 삽질이 더 빨라진 것 같다.
그가 땅에 삽을 처박을 때마다 돋보이는 수려한 어깨 근육과 손등부터 팔까지 이어지는 성난 핏줄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다음 슬그머니 시선을 내려 자신의 가느다란 팔을 쳐다보는 서진의 얼굴이 울적해졌다. 젠장. 운동이라도 해 볼까…….
서진은 철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그가 하는 자세를 그대로 따라 하기 시작했다.
이만큼 다리를 벌리고. 삽은 이렇게 쥐고. 아아…, 삽질은 저런 식으로 하는 거구나. 어쩐지 힘이 들어도 너무 든다고 생각했는데, 요령이 따로 있었구먼.
눈으로 열심히 그를 좇으며 삽을 몇 번 허공에 움직여 따라 해 보았다.
아아, 이렇게…. 그래. 이제 알겠네.
서진이 여전히 그를 바라보는 채로 삽을 땅에 내리꽂는 순간이었다.
“아악!!”
“뭐여?”
갑작스러운 서진의 비명에 놀란 두 사람이 일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아아아…. 흐윽.”
별안간 서진이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왼발을 잡고 데굴데굴 흙밭을 뒹굴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더니. 혼자서 자기 발을 찍은 것도 염병 천병 같은데 하필이면 뻥 뚫린 샌들까지 신고 있었다.
“야! 이 가시나야!”
단번에 상황을 파악한 철이 삽을 집어 던지며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그에게 뛰어갔다.
“점마 저거 증신이 싹 나가브렀나. 으째 지 발등을 지가 찍구 지랄이여.”
할아버지 역시 마찬가지로 상황 파악을 끝냈지만, 철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흐…. 씨이… 발….”
잇새로 욕을 짓씹는 서진 앞으로 쏜살같이 달려와 무릎을 꿇은 철이 사색이 된 얼굴로 그의 발을 살폈다.
“으디 손 좀 치워봐야. 발꾸락 짤라븐 거 아니여?”
“아흐윽, 어떡해. 어떡해.”
서진이 서러운 목소리로 울먹이며 조심스럽게 발등을 잡은 손을 떼자 방금 생긴 것 같은 가로 직선의 붉은 선 위로 핏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상처가 보였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그의 힘이 어린아이만큼 약했기 때문에 잘리기는커녕 그냥 낮은 테이블에 발등을 찍힌 정도에 그쳤다는 것이다.
“하이고 짠한 그…. 피 나네. 긍께 이런 거 하지 말란께.”
남자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서진의 발등에 생긴 상처를 후 불어댔다.
“아아…. 발등 찢어졌나 봐. 이거 찢어진 거 맞지. 꿰매야 되지? 흐윽흑…. 몇 바늘이나? 여기 성형외과도 있어?”
“그 정도로 조사불진 않았는디.”
철이 조금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조졌어. 조진 거야. 흑…. 발 잘릴 뻔했다고.”
서진은 고개를 휘휘 저으며 그의 말을 부정했다. 어릴 때부터 엄살 하면 홍서진이요, 어깨만 스쳐도 3박 4일은 자지러진다는 할리우드 액션계의 최고봉이었다.
“걱정 말어. 요로코롬 백번을 찍어싸도 안 짤린께. 많이 아픈가?”
“흐. 죽을 것 같아.”
서진이 처량한 강아지 같은 눈으로 눈물을 글썽이며 끄덕였다.
“그라믄 일단 업혀.”
철은 마치 제가 다친 것처럼 미간을 구긴 채 한숨을 내쉬며 뒤로 돌아 넓은 등판을 내주었다. 흐르지도 않는 눈물 대신 콧물을 훌쩍이던 서진은 팔로 잽싸게 마른 눈가를 훔치더니 그의 등짝 위로 냅다 몸을 던졌다.
밭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이 정도쯤이야.
얼떨결에 서진을 둘러업은 철은 지체하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자신의 트럭으로 향했다.
“너거들 시방 으디 가냐?”
황당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던 할아버지가 묻는다.
“거, 집 가서 약 처바르구 붕대라도 처감아불라 그라제.”
남자는 대충 대답하며 하얀 트럭의 문을 열고 조수석에 서진을 짐짝처럼 집어넣었다.
“을씨구? 뭔 지랄이여.”
“욕보소.”
철은 세상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는 할아버지를 뒤로한 채 운전석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두 사람이 탄 차가 시끄러운 엔진 소리를 내며 곧 출발했다. 조수석에 앉은 서진은 당장 애라도 낳을 기세로 끙끙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집에 진통제 있은께 쪼까 참어.”
철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다급하게 그를 달래며 더 세게 액셀을 밟았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흡사 분만하러 가는 임산부와 같은 모습이다.
동화 같은 시골 풍경이 창밖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하얀 트럭은 얼마간 달려 곧 대궐같이 커다란 한옥 앞에 정차했다.
“어이, 염병 가시나. 정신 차려봐야.”
철이 안전벨트를 풀며 서진의 어깨를 흔들어 깨운다. 서진은 앓는 척하는 것도 귀찮았는지, 어느새 대가리로 상모돌리기를 하며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으응?”
잠에서 깬 서진이 비몽사몽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침 닦구.”
철의 말에 민망해진 서진이 후르릅. 소리를 내며 대충 손등으로 침을 닦았다. 바로 차에서 내린 그는 입을 헤 벌리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여긴 어디야?”
“으디긴. 집.”
철이 검은 기와가 빼곡히 덮인 돌담의 대문을 열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두 사람이 들어선 곳은 서울에서는 본 적 없는 대궐같이 큰 규모의 한옥이었다.
드넓은 마당에는 잘 관리된 소나무와 꽃들이 정갈한 아름다움을 뽐냈고, 끝이 유선형으로 휜 고급스러운 기와로 덮인 한옥 여러 채가 마당을 빙 둘러싸고 있었다. 가장 작은 사랑채 하나의 크기가 딱 서진네 초가집과 맞먹는 크기다.
“와…. 너 양갓집 규수였구나.”
“뭐?”
철은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말에 잠깐 멈칫했지만, 그냥 못 들은 척 넘기기로 했다.
그는 멀쩡한 서진을 부축해주며 집의 대청을 지나 거실로 안내했다. 한옥의 고풍스러운 겉모습과 다르게 내부는 다분히 현대적인 인테리어를 갖추고 있었다.
“약 찾아 올란께, 쪼까 있어.”
철은 고급스러운 가죽 소파에 서진을 앉혀놓더니 혼자 약을 찾으러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서진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집 안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구경하기 시작했다.
‘와 텔레비전 제일 좋은 거 쓰네. 우리 집도 저거였는데. 와 장식장에 있는 접시도 다 명품이네. 어머니가 저런 거 모으시나? 와 이거 턴테이블도 진짜 비싼 건데.’
집 안 여기저기를 들쑤시던 서진이 턴테이블 앞에 멈춰 섰다. 선반에 쌓인 LP는 전부 클래식이었다. 신기하게도 대부분 하프와 협주하는 오케스트라 곡이라 서진도 잘 아는 곡들이다.
“와. 이게 있다고?”
심지어 마르셀 그랑자니의 하프를 위한 환상곡도 있었다. 서진이 대학을 다니며 죽어라 연습했던 곡이다. 하피스트라면 누구나 아는 곡이지만 보통 사람들에겐 조금, 아니 많이 생소한 곡이었다.
서진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손을 뻗어 레코드판 중 아무거나 한 장을 뽑아 들었다. 파헬벨 캐논 D 장조.
그 순간, 구급상자를 들고 나타난 철을 발견한 서진이 들고 있던 레코드판을 장난스럽게 흔들며 입을 열었다.
“이런 거 좋아해? 나 이거 대학교 신입생 연주회 때 했던 건데.”
철은 말없이 레코드판을 제자리에 놓으며 서진을 끌고 가 다시 소파에 앉혔다.
“발이나 내놔봐야.”
서진이 한쪽 무릎을 꿇어앉아 자세를 낮춘 철에게 다친 쪽 발을 쓱 내밀자 그가 자연스럽게 발을 잡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약을 발랐다.
“근데 부모님은 어디 계셔?”
서진이 그의 동그란 뒤통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두상도 예쁘다.
“글쎄. 둘 다 떠난 지 한 2년 정도 돼브렀나.”
남자가 꼼꼼하게 약을 바르며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생각지 못한 답변으로 순식간에 무거워진 공기에 서진이 할 말을 잃었다.
“…미안….”
딱히 잘못한 건 없었지만 그냥 으레 사람들이 하는 사과라도 건네기로 했다.
“세계 일주 중인디 니가 뭣이 미안해.”
이 새끼가. 서진이 어금니를 빠득 깨물었다.
“그럼 너 비둘기 아들, 뭐 그런 거구나.”
양갓집 규수에 이어 다시 한번 자신의 귀를 의심하게 된 철은 “크흠, 뭐 그라제” 하며 어색하게 말을 넘겼다.
“다 됐쓰.”
철의 생각에도 붕대는 좀 아니었는지 상처엔 커다란 밴드가 붙어 있었다. 서진은 씨익 만족스러운 미소를 입에 걸고 발목을 요리조리 돌려가며 제 발등을 살폈다.
‘이거 조금 다친 거 가지고 시퍼렇게 사색이 돼서 집까지 데려오는 꼴이라니. 뭐, 아무리 날티 나게 생겼어도 시골 사람은 시골 사람이라 순박한 면이 있나 보네.’
별안간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발등을 쳐다보던 서진의 눈빛이 간사한 빛으로 번뜩였다.
“아, 너희 집 욕실도 되게 좋더라. 막 샴푸도 있고. 뜨거운 물도 되게 잘 나오지?”
“뭐…. 그라제.”
의도를 알 수 없는 그의 물음에 철이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와…, 부럽다. 우리 집은 뜨거운 물은 끓여서 써야 한대. 샴푸도 없어. 비누로 머리 감으면 머리 완전 빳빳해지는 거 알아?”
이제야 질문 의도를 파악한 철이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여서 씻칠래?”
“어. 그럼 지금 바로 씻는다?”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서진은 아까 미리 점찍어둔 욕실까지 신난 발걸음으로 향했다. 안 그래도 밭일을 하며 잔뜩 땀을 흘려 찝찝함이 말도 아니었다.
그는 욕실로 들어가기 전, 문 앞에서 훌렁훌렁 뱀 허물처럼 옷을 벗어 던져놓고는 나신이 된 상태로 그 안에 쏙 들어갔다.
샤워기를 온수 쪽으로 돌리고 물을 틀자 따뜻한 물이 콸콸 쏟아져 내린다. 신이 난 서진은 콧노래를 부르며 향긋한 샴푸로 머리를 감았다. 이게 며칠 만에 제대로 하는 목욕이란 말인가. 인제야 좀 살 것 같다.
상쾌하게 샤워를 끝마치고 아랫도리에 대충 수건만 두른 채 바깥으로 나온 서진이 집주인을 찾아다녔다.
“나 옷 좀 빌려주라. 빤쓰도.”
철을 발견한 서진은 씩 미소를 지으며 두 손을 내밀었다. 깨끗하게 씻은 다음 땀에 젖은 옷을 다시 입고 싶지 않았던 탓이다.
“기여. 갖다줄께.”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던 철이 그를 한번 훑어보더니 몸을 일으켰다. 잠시 후, 옷방에서 옷을 가지고 나타난 그가 서진에게 정갈하게 접힌 티셔츠와 반바지, 새 속옷을 내밀었다.
“앗싸! 땡큐.”
옷을 받아 든 서진이 히죽 웃으며 수건을 벗어 던지더니 그 자리에서 속옷을 입기 시작했다. 이거 빤쓰 크기가 왜 이래. 듣도 보도 못한 사이즈에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에이, 뭐 어때’ 하며 하얀 티셔츠와 검은 반바지까지 걸쳐 입었다.
크기가 좀 컸지만 옷감이 부드럽고 가벼운 것이 마음에 쏙 들었다. 왠지 옷에서 향긋한 향도 나는 것 같고. 크응, 콧속으로 향을 빨아들인 서진은 생각에 잠겼다.
섬유 유연제 뭐 쓰려나…. 그리고 저건 뭐지…….
“근데 너 다리 사이에 있는 건 뭐야?”
옷을 다 입은 서진이 아까부터 계속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다. 욕실에서 나올 때부터 철의 바지 속에 웬 막대기인지, 방망이 같은 것이 들어 있는 게 눈에 띈 탓이다.
“여 꼬추밖에 더 있냐.”
철이 뭐 별일이냐는 듯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게 고추라고? 그럼 왜 서 있는데?”
“…건강한께?”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서진은 뿅망치로 뒤통수라도 맞은 듯이 황당한 표정이었다. 아무리 자지가 크다고 크다고 해도 저건 인간의 크기가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말도 안 돼. 에이, 거짓말하네. 그거 고추 아니지?”
피식, 비소를 머금은 서진이 그를 추궁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 자식이 저를 놀리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게 안 봤는데, 생각보다 장난기가 많은 스타일인가. 좀 어지간한 크기로 넣어놨으면 모를까, 이건 아니지.
“뭐. 까서 보여줘야?”
계속되는 그의 추궁에 철이 한쪽 눈썹을 치켜뜨고 물었다.
“까봐.”
서진이 자신 있게 얼굴을 들이밀며 말을 뱉었다. 순진한 시골 청년이 나이대가 비슷한 저와 친해지고 싶어서 하는 장난이 나름 귀엽게도 느껴졌다.
당황했는지 아무 말 없이 굳어버린 남자의 모습을 보며 서진은 한술 더 떠 덧붙였다.
“까보라고. 안 까면 내가 깐다.”
이게 누굴 바보로 아나. 서진은 호기롭게 그의 바지춤에 손을 올렸다. 운동복 바지는 고무줄로 돼 있어 힘을 주면 바로 벗길 수 있는 형태였다.
장난스러운 얼굴로 씩 웃자, 철은 마음대로 하라는 듯 눈짓했다. 생각보다 쿨한 그의 반응에 미간을 가늘게 좁힌 서진이 순간 바지와 속옷을 한 번에 끌어 내렸다.
바로 퉁, 하는 질량감과 함께 튕겨 나와 서진의 얼굴과 마주한 건 방망이나 다른 무언가가 아닌, 생전 처음 보는 크기의 거대한 살덩어리였다.
“와….”
서진의 입에서 뜻하지 않은 감탄사가 새어 나왔다. 말도 안 돼.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놀라 신기한 물건을 만져보듯 손부터 움직였다.
살덩이는 손으로 툭툭 밀어봐도 오뚝이처럼 다시 튕겨 올라왔다. 울퉁불퉁한 핏줄까지 선명하게 보이는 진짜 자지다. 팔뚝만 한 진짜 자지.
서진의 손이 계속 그것을 장난감처럼 조몰락거리자, 미간을 찌푸린 철이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진짜 고추였네. 미안….”
겨우 정신을 차린 서진이 머쓱하게 중얼거리며 흉흉한 흉기 위로 다시 속옷과 바지를 살포시 덮어주었다. 졌다. 고추 크기까지 완벽한 패배였으니. 감히 비교하고 싶지도 않다.
저도 모르게 철의 고간에 딱 붙어 있던 서진이 느물거리며 몸을 일으키더니 얼굴에 의아한 빛을 띠었다.
“근데 원래 이렇게 아무 때나 서고 그래?”
그를 빤히 바라보던 철이 오히려 되물었다.
“니는 어떤디?”
“당연히 좀 흥분이 돼야 서지.”
“글지.”
그렇긴 뭐가 그렇다는 건지. 아무 때나 세우고 있었으면서. 황당한 표정으로 코웃음 치던 서진의 머릿속에 번개와 같은 생각이 스쳤다.
‘설마…….’
서진의 상처를 치료하고 욕실까지 빌려준 철은 그를 집으로 데려다주기 위해 함께 바깥으로 나왔다.
품에 자기 옷을 안고 쭐레쭐레 조수석에 오른 서진은 아까부터 무슨 생각에 잠긴 듯 멍하니 창밖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 철이 조심스럽게 몇 마디를 건네봐도 묵묵부답이다.
결국 몇 마디 나누지 못한 채 돌아가는 차 안은 바퀴가 구르며 자갈을 밟는 평화로운 소리만 가득했다. 하얀 트럭이 서진의 초가집 앞에 도착하자 차를 부드럽게 세운 철이 기어를 바꿨다.
“철이야.”
가만히 창밖을 보던 서진이 다소 간지러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와?”
철이 옆을 돌아보는 순간, 서진이 갑자기 운전석 쪽으로 상체를 기울이며 얼굴을 바짝 디밀었다.
가만히 눈을 맞추고 1초, 2초, 3초. 서진의 손가락이 그의 귓불과 날카로운 턱선을 살짝 스치더니 보드라운 뺨을 엄지손가락으로 한 번 쓰윽 쓸어낸다.
“눈썹이 붙어 있어서.”
그가 손가락을 후우 불며 마가린보다 느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행동이 어색했는지 철은 눈꺼풀을 끔뻑이다가 괜히 목을 가다듬었다.
“그럼 가볼게.”
서진이 여전히 느끼한 미소를 유지한 채 몸을 돌려 트럭의 문을 열었다. 3초, 2초, 1초.
“서진아.”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서진의 한쪽 입꼬리가 실로 당긴 것처럼 위로 솟았다. 분명 어딘가 가증스럽고 사악한 미소였지만, 뒤돌아볼 땐 언제 그랬냐는 듯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근데 서진이란 이름을 알려준 적이 있던가.
“또 봐야.”
그의 음흉한 미소를 모르는 순진한 철이 자상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서진은 눈을 위로 치켜뜬 채 턱을 아래로 당기며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다른 사람이 봤다면 분명히 소름이 쭈뼛 돋고 몸서리칠 만큼, 어딘가 재수 없는 몸짓이었다.
트럭에서 내린 그는 곧장 자신의 방으로 걸어 들어가 조심스럽게 방문을 탁 닫았다. 그리고 살며시 손을 들어 제 입을 틀어막더니,
“프흡―!”
손가락 사이로 참을 수 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결국 서진은 아예 배꼽을 잡고 방바닥에 드러누운 채 발까지 동동 굴러가며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누가 들어도 악당의 사악한 웃음소리다.
보았다.
손가락이 뺨을 스치는 순간 붉게 달아오르는 녀석의 귓불과 목덜미를.
이겼다.
저 고추도 겁나게 크고 더럽게 잘생긴 놈이 나한테 첫눈에 반했어. 날 좋아해. 그것도 혼자서. 막 미쳐, 나한테.
“큽.”
서진은 짜릿한 승리감에 히죽히죽 웃으며 노란 장판 위를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결국 자신의 미모가 그를 이긴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동네 달리기 시합에서 어쩌다 금메달리스트를 만났는데, 다짜고짜 그 금메달리스트를 꺾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랄까.
이것이 남의 애달픈 마음을 깨달은 그의 감상평이었다.
‘그 여우 같은 녀석이 언제 어디서 나한테 홀라당 반했으려나.’
실실 웃는 얼굴로 잠시 회상에 잠겨 있던 서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조금씩 사라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한 일이라고는 밭에 똥을 싸고, 불알을 깠다가, 결국 고추까지 까버린 일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알게 뭔가. 될 놈은 뭘 해도 된다는 말이 있다. 이쁜 놈은 첫 만남에 자기 밭에 똥을 싸도 이뻐 보이는 게 틀림없었다.
무적의 정신 승리로 짧은 회상을 갈무리한 서진은 껄껄거리다 못해 끅끅 웃으며 다시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이게 뭔 소리여?”
바깥에서 처음 듣는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메. 우리 염병 총각 뭐 좋은 일 있나벼. 허벌라게 웃고 자빠짔네.”
이어서 마을 아주머니 영옥의 목소리가 얇은 문풍지를 뚫고 들어왔다. 화들짝 놀라 몸을 벌떡 일으킨 서진은 커흠흠, 목을 가다듬고 대충 머리칼을 정리한 다음 방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왔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마당에는 딸기가 가득한 쟁반을 들고 있는 영옥과 열일고여덟 정도 돼 보이는 여자애가 함께 있었다. 서진과 눈이 마주친 여자아이는 헉하고 숨을 삼키더니 눈빛을 초롱초롱 빛냈다.
“기냥 이것두 좀 갖다줄 겸, 울 딸내미가 하도 보고잡다고 해서 와브렀제. 여거는 내 딸 재숙이.”
영옥이 여자아이의 어깨를 앞으로 툭 밀치며 말했다.
“재숙이 안녕?”
서진이 머리칼을 가볍게 쓸어 넘기며 인사했다.
“오메. 이 오빠 씨부리는 거 봐야?”
재숙이 감동한 눈빛으로 영옥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중얼거렸다.
“내 말 맞제?”
의미심장한 영옥의 물음에 “맞네잉” 하며 맞장구치던 재숙은 그녀의 귀에 손을 갖다 대더니 슬그머니 제 입가를 가리고 덧붙였다.
“그라도 철이 오빠만은 못하네.”
“글지.”
이 여편네들이 진짜. 말 그대로 손만 갖다 대서 입 모양만 감췄을 뿐 목소리 볼륨은 전혀 줄이지 않았기 때문에 두 사람의 앞담화는 그대로 서진의 귀에 흘러 들어왔다.
그래, 그러거나 말거나.
“잠깐 앉았다 가세요.”
서진이 한껏 여유롭게 웃으며 두 사람을 마루에 앉혔다. 어차피 철이라는 남자는 이제 서진의 자존감을 깎아 먹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으므로.
세 사람은 나란히 끼익 소리를 내는 나무 바닥에 앉아 딸기를 나누어 먹으며 시답잖은 담소를 나눴다.
한창 시끄럽게 떠들던 중, 먼저 그의 얘기를 꺼낸 건 서진이었다.
“근데 철이… 는 어떤 애예요?”
“응? 둘이 만났능가. 겁나게 잘쌩겨브렀제? 승질은 쪼까 까탈스릅긴 해두.”
영옥의 말에 서진이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까칠하기는 개뿔.
“여 가시나들은 죄다 철이 오빠한테 시집가는 게 꿈이여라. 그 집 땅만 해두 10만 평이 넘은께 여서 땅 밟으믄 거진 철이 오빠 꺼제.”
재숙이 딸기 꼭지를 따서 입에 넣으며 말했다.
“하이구, 퍽이나. 여 가시나들이 시집, 그게 되긋냐잉. 뭐 장가를 가도 설 가서 이쁜 가시나 하나 델꼬 오겄제.”
“아, 긍께. 작년엔 설에 깔따구 있는 거 맹키로 자주 가드만 팍 깨져브렀나, 갑자기 싹 끊기데.”
서울에 여자 친구가 있었나. 서진은 입 안 가득 딸기를 오물거리며 흥미롭게 이야기를 들었다.
“나두 설 가서 쌍까풀 수술하고 오믄 함 꼬셔 불라고.”
재숙은 손톱으로 눈꺼풀을 꾹꾹 눌러 쌍꺼풀을 만들어 보였다. 그녀를 보던 영옥이 비웃음을 머금고 중얼거렸다.
“꼴갑허구 있네.”
저런. 재숙아, 그럴 필요 없단다. 서진은 혼자 고개를 가로저으며 속으로 말을 삼켰다.
그렇게 세 사람은 해가 뉘엿뉘엿 저물 때까지 떠들다가, 밭에서 할아버지가 돌아올 무렵이 돼서야 두 사람이 떠나며 겨우 수다를 끝낼 수 있었다.
집에 돌아온 할아버지는 혀를 끌끌 차며 서진의 발등에 붙은 커다란 반창고를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서진은 조용히 자신의 방으로 숨어들었다가 그대로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새벽. 어제 그만큼 엄살을 떨어놨으니 오늘은 조금 쉬게 해줄지도 모른다는 안일한 예상과 달리 할아버지는 또 동이 트자마자 어김없이 서진을 끌고 밭으로 나왔다. 뾰로통한 표정으로 힘없이 삽을 흙에 처박는 몸짓에 짜증이 가득하다.
‘슬슬 나타날 때가 됐는데.’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밭 근처에 하얀 트럭이 모습을 드러냈다. 운전석에서 내린 커다란 남자는 또 대수롭지 않게 커다란 소쿠리를 꺼내 턱 내려놓았다.
기름종이를 위에 깐 대나무 소쿠리엔 어제 서진이 잘 먹던 전은 물론이고, 뭘 좋아할지 몰라서 다 준비한 것처럼 새참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수준의 산해진미가 가득 담겨 있었다. 순박한 시골 청년 같으니.
그날 역시 철은 남의 밭에 와서 종일 삽질을 해댔다. 그가 손수 발라준 대게 다리를 입에 문 서진이 음흉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확실해. 나한테 반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