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에필로그 (15/27)

<에필로그>

이아네가 정식으로 공작의 작위를 수여받게 된 후에도 사실 바뀐 것은 별로 없었다.

기사와 귀족은 출신이 다르다. 무가를 동경하는 귀족 자제들이 무술을 연마하기는 했어도, 기사 집안이 귀족이 되는 것은, 그중에서도 공작 작위를 수여받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게다가 발로아 경은 델토르에서부터 대대로 군인 집안 출신이었다. 그다지 사치를 즐기지도 욕심이 많지도 않아 아들에게 내려지는 작위로 인해 한순간에 귀족이 된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별로 없었다.

여전히 성 외곽의 작은 마을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생을 마감하는 것이, 발로아 경-이제는 대공이지만-에게는 마지막 소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아네도 마찬가지였다.

하루 두 시간씩 리트를 가르치고, 나머지 시간에는 디날의 문화와 예법에 대해서 배운다. 저녁에는 돌아온 레뮤엘과 대화를 나누거나 체스를 두고, 함께 잠자리에 드는 생활이 이어졌다. 왕의 반려로서 새로운 방이 주어진 것을 빼고는 딱히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평온한 일상이 계속되는 와중에도, 시간은 흘러갔다.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그래. 그대에게 묻는다는 것을 깜박했군."

여느 때와 같으면서도 다른 날이었다.

저녁식사 후 생각에 잠긴 레뮤엘을 내버려 두고 곁에서 책을 읽던 이아네는 레뮤엘이 전에 없이 한숨을 내쉬자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그에게 묻고 말았다. 그러나 레뮤엘의 반응은 더 빨리 물어보는 게 나았나 싶을 만큼 반가워하는 것이어서, 이아네는 더욱 의아해지고 말았다.

"베델리어가 쌍둥이를 낳았다."

이아네는 잠시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몰라 멍하니 있다가 뒤늦게 탄성을 내뱉었다. 너무 오랫동안 듣지 못한 이름이라 누구인지 까먹었다. 그러고 보니 델토르에 대해 생각하지 않은 지 거의 일 년이 넘은 것 같다.

벌써 그렇게 됐나. 하긴, 작위식 전에 들었던 소식이니 아이를 낳아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시간이 흐르긴 했다.

"남녀 쌍둥이라고 하더군. 남자아이는 루비엔, 여자아이는 루시엔이라고 한다."

"좋은... 이름이군요."

이아네가 조금 미소를 지었다. 베델리어가 지은 이름이 틀림없었다. 디날의 민담에 나오는 별이 된 쌍둥이의 이름이다.

"그래서 말이지만..."

"?"

"델토르를 내버려 둬도 괜찮겠나?"

잠시,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이아네가 눈동자를 굴렸다. 그 어리둥절한 표정이 귀여웠는지 레뮤엘이 피식 웃으며 이아네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감아 돌렸다.

사락, 빠져나가는 부드러운 감촉이 기분 좋았다.

"정확히는 제르멘 공을 말이다."

"......"

이아네는 뭔가 생경한 얼굴로 레뮤엘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그와 함께했던 세월들이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는 것이 신기할 만큼, 이아네는 제르멘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지냈던 것이다.

물론 레뮤엘이 이아네에게 얼마나 애정을 쏟았는지는 성 안에 있는 생명체라면 마구간의 개미새끼도 안다. 그러나 그것과는 조금 달랐다.

아마 천성일 거라고 생각한다. 지금 이아네는 레뮤엘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제르멘과 함께할 때도 절대 소홀한 적이 없었다. 제르멘에게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기에 후회가 없는 것이리라.

"그대는 괜찮다고 했지만, 아무래도 내겐 앙금이 남아. 마음 같아선..."

레뮤엘이 폭 한숨을 내쉬더니 어마어마한 말을 내뱉었다.

"당장이라도 드래곤 둥지에 던져버리고 싶지만."

"......"

이아네는 잠시 질린 얼굴을 했다. 레뮤엘이 말하는 곳이 어딘지 알기 때문에, 오히려 이아네는 뭐라 대답하기가 아주 어려워졌다.

레뮤엘의 곁에 있어 오면서 그가 공정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죄를 지었다면 벌을, 고통을 주었다면 고통을 받게 하는 것이 레뮤엘 식이었다. 이아네가 겪은 고통을 그대로 제르멘에게 돌려주고 싶은 것이, 아마 레뮤엘의 마음이겠지.

"그러나 조카들의 아버지고, 델러의 지아비다. 지금 당장 델토르를 정복하기엔 그것이 마음에 걸려... 하여, 그대에게 묻는 것이다. 기다릴 수 있겠나?"

결국 이아네는 대답 대신 웃으며 레뮤엘의 가슴팍을 끌어안고 뺨을 비볐다. 그가 자신을 위해 화를 낸다는 것이 너무나도 기뻤다.

"복수하지 않아도 좋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안."

"그 사람 덕분에 당신을 만났어요. 제가 이렇게 행복할 수 있는 것도 그날 라퓨타에서 당신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래, 모든 것은 이아네가 라퓨타에서 레뮤엘에게 검을 겨누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었다.

그때 이아네가 레뮤엘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 찌르는 듯한 심청빛 눈동자와 대치하는 일이 없었다면, 그후 라퓨타에서 다른 기사들과 똑같이 지내며 제르멘을 그리워하다 그의 마음조차 모른 채 죽었을 것이다.

오히려 이아네에게는 그것이 더욱 오싹한 일이었다. 제르멘의 마음을 모른 채 지내는 것 이상으로, 레뮤엘을 만나지 못하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 되어 있었다.

"안... 그대는..."

레뮤엘이 무슨 말을 하려다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와는 조금 다른, 부드럽고도 즐거운 한숨.

"어떻게 그리도 사랑스러울 수 있지?"

갑작스런 말에 이아네가 얼굴을 붉히는 순간, 레뮤엘이 카우치에서 일어나더니 이아네를 안아 들었다. 깜짝 놀란 이아네가 몸을 경직시키며 낮게 비명을 질렀다.

"레뮤엘...!"

"오늘은 참으려고 했는데, 그대 때문이다."

드물게 장난스런 목소리가 들리며 이아네가 푹신한 침대 위로 떨어졌다. 자세를 바로잡을 틈도 없이, 이아네의 어깨를 잡아 누르며 레뮤엘이 입을 맞춰 왔다.

"음, 레... 하윽..."

입술 새로 연약한 신음이 새는 것조차 흡족하다. 온전한 자신의 것을 마음껏 맛보고 농락하였다. 촉촉하게 젖은 붉은 과실이 레뮤엘의 혀 위로 몇 번이나 구르고, 가지런한 치열과 도톰한 입천장을 훑는 동시에 능숙한 손길이 이아네를 태초의 모습으로 되돌렸다.

"하아... 레뮤엘..."

완전한 나신이 된 이아네가 얼굴에 홍조를 띤 채 레뮤엘을 불렀다. 아직 끄지 않은 등불 아래 드러난 맨들한 피부가, 나약한 신음이, 벌써부터 뿌듯한 하체까지 모든 것이 사랑스럽다.

"...아니다."

"...네?"

"그의 덕으로, 나를 만난 것이 아니다."

이아네가 의아한 눈으로 레뮤엘을 올려다보았다. 그 사랑스러운 사과빛 뺨을 어루만지며 레뮤엘이 소중하게 속삭였다.

"그가 아니라고 해도, 나는 그대를 찾아냈을 것이다."

"......"

"이렇게 사랑스러운 그대를, 내가 몰라볼 리가 없지 않나."

"레, 레뮤엘!"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이아네가 당황스러운 비명을 질렀지만, 레뮤엘은 쿡쿡 웃으며 여유롭게 이아네의 쇄골에 입술을 묻었다.

"우응-!"

"그대는 내 것이다. 처음부터, 내 것이었어."

붉은 낙인이 하나 둘 늘어갈 때마다 이아네의 숨결이 더워졌다. 푸른 불꽃같은 레뮤엘의 손이 이아네의 구석구석을 훑으며 자신을 각인시켰다. 차갑지만 농염한 손길이 이아네를 나락으로 이끌고 마침내 뜨겁게 하나가 되는 순간, 같은 반지를 낀 손이 겹쳐졌다.

그날 밤 꿈속에서 이아네는 아주 오래 전 꿈에 보았던 푸른 눈의 드래곤을 다시 만났다.

커다랗게 포효하던, 꿰뚫을 듯 강렬한 남청색 눈동자의 드래곤. 그렇게도 사납던 눈은 이제 여유와 경애를 담아 이아네를 바라본다.

천천히 손을 내밀자, 드래곤이 그 손 위로 머리를 내려놓았다. 꿈인데도 놀라울 만큼 생생한 감각이었다. 여전히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심청색의 눈 안에 이아네의 얼굴이 비쳤다. 그 눈을 마주보다, 이아네는 마침내 무언가를 깨달았다.

그가 이아네를 불렀다.

'-이아네.'

문득, 이아네가 눈을 떴다.

"깼군."

"......"

자신을 바라보는 다정한 눈빛에, 부드럽게 마주 웃는 입술이 행복을 머금었다.

"피곤했었나?"

"으음... 조금..."

이아네가 살짝 기지개를 펴며 몸을 일으켰다. 아름다운 석양이 청록의 바다 위에 어우러지며 환상적인 색조를 만들어 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왜 깨우지 않으셨습니까?"

이아네의 당황스런 눈이 레뮤엘을 향하자, 레뮤엘이 빙긋 웃었다. 예전처럼 매끈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선이 아름다운 입술이었다.

"좋은 꿈을 꾸는 것 같기에."

"...후후."

이아네가 레뮤엘이 내민 손을 잡고 일어났다. 기분 좋게 불어오는 바람에 테라스의 해먹에서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벌써 저녁 식사 시간이 가까워져 있었다.

"산책이라도, 할까요?"

"그럴까."

낮잠에 빠져 있기엔 하루는 너무 짧다. 레뮤엘이 이아네의 손을 잡고 해변으로 내려섰다. 짠내를 머금은 포근한 바람이 불었다. 건조했던 겨울이 가고 봄이 오고 있었다.

"무슨 꿈이었나?"

"음..."

이아네가 느릿하게 레뮤엘의 손을 잡고 걸었다. 맨발에 감겨드는 고운 모래가 간지러웠다. 레뮤엘은 대답을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걸었다.

대여섯 걸음쯤 걸었을 때, 이아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당신을 만났을 때의 꿈이었습니다."

"...아."

레뮤엘이 짧게 대답했다. 정확히는 대답이 아닌 애매한 감탄사였지만 이아네에게는 충분했다.

"...꽤 옛날 일이군."

"그렇지요?"

이아네가 살짝 웃었다. 살짝 휘어지는 눈꼬리에 예전에는 없었던 잔주름이 잡혀 있었다.

"왜 갑자기 그 때의 꿈을...?"

"...글쎄요."

이아네가 시선을 먼 바다로 돌렸다. 흰 거품이 밀려드는 파도가 수평선 끝에서부터 밀려들었다.

"...드래곤의 꿈을 꾼 적이 있습니다."

느릿하게 뺨을 감싸 안는 바람을 느긋하게 받아들이며, 이아네가 조용히 말을 이어갔다. 석양이 빠르게 보랏빛으로 변하며 바다 저편으로 가라앉았다.

"제가 아직 델토르의 기사였을 때 일입니다. 벌써 20년은 됐겠군요."

막상 입 밖으로 내놓고 보니 정말 너무 먼 옛날이야기라 웃음이 나왔다. 이아네가 쿡쿡 웃었지만 레뮤엘은 진지하게 이아네의 손을 잡은 채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정확히는 기억이 안 납니다만... 푸른 드래곤이, 제게 포효하는 꿈이었지요."

"흠."

라퓨타의 드래곤 중에 푸른색은 없는데. 레뮤엘이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이아네가 말을 덧붙였다.

"당신이었습니다."

"...?"

"당신이, 저를 불렀어요."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아네가 만족스럽게 웃고 있었기 때문에 레뮤엘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혼자 뭐가 그리 즐거운지 피식 미소가 새어나는 입술에 자연스럽게 입을 맞추자, 이아네가 낮게 킥킥대며 장난스레 레뮤엘의 입술을 살짝 핥았다.

이아네의 장난은 심장에 좋지 않다. 20년 가까이 함께 해 왔는데도 새삼 다시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레뮤엘이 생각했다.

오늘도 그냥 재우기는 틀렸군.

이제 남빛으로 물들어 가는 석양을 바라보며 레뮤엘이 이아네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만 돌아갈까."

"아아, 조금만 더요."

"오늘 저녁엔 농어로 회를 떴다던데."

순식간에 진지해진 얼굴로, 이아네가 대답했다.

"셰프를 기다리게 하면 안 되겠죠?"

낮은 웃음소리가 별장을 향해 돌아선다. 마지막 태양빛이 돌아가는 연인의 그림자를 길게 비추었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닷바람이 부드러운 향내를 머금고 굴뚝 위로 피어오르는 가느다란 연기를 타고 오른다. 수평선 멀리, 석양과 섞여 보랏빛이 된 바다의 수면에서 돌고래가 뛰어올랐다. 벌써 어두워지기 시작한 동녘 하늘에 달을 마중하는 별이 깜박이며 눈을 뜬다.

여행자의 섬, 크라니아의 평화로운 하루가, 봄을 기다리며 저물어 갔다.

< 완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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