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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변함없는 마음 (14/27)

13. 변함없는 마음

레뮤엘의 일과는 늘 새벽에 시작된다.

왕이 되면서부터 레뮤엘은 자신에게 주어진 무게를 한시도 가볍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정비를 맞이했을 때조차 레뮤엘은 초야를 치른 다음날 어김없이 새벽에 일어났으니 이아세가 섭섭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아네가 암묵적인 왕의 반려로 인정되고 나서부터, 레뮤엘의 아침은 조금 늦게 시작되었다.

"......"

"으음..."

레뮤엘은 방금 잠에서 깨서 조금 멍한 눈으로 품에 안긴 이아네를 내려다보았다. 세상모르고 잠에 빠진 왕의 연인은 레뮤엘의 팔을 끌어안겨 기분 좋은 한숨을 내쉬며 꿈속을 헤매는 중이었다.

살짝 손가락을 들어 동그란 콧대를 콕 찌르자 잠결에도 뭔가 간지러웠던지 이아네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 작은 움직임조차 사랑스러워서, 코를 간질이던 손가락을 옮겨 이번에는 뺨을 어루만졌다.

막 자고 일어난 아침나절이라 손은 조금 따뜻해져 있었다. 살짝 서늘한 체온이 기분이 좋은지 이아네가 잠결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안."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부르듯, 레뮤엘이 조그맣게 이아네를 불렀다.

"사랑한다."

꼭 다물린 붉은 입술 위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찰나의 모닝 키스가 지나고 레뮤엘은 다시 이아네의 뺨을 쓰다듬고선 드디어 침대에서 내려왔다.

시종을 불러 옷을 갈아입고 오늘까지 처리해야 할 일들과 결재해야 할 것들을 머릿속에 정리하고 있을 때쯤, 침대 쪽이 소란스러워진다. 레뮤엘은 미소를 머금고 막 잠에서 깨어난 연인을 바라보았다.

"레뮤엘..."

반사적으로 레뮤엘의 이름을 부르는 그가 사랑스러워서, 레뮤엘은 조심스레 그에게 다가가 시트 밖으로 삐져나온 이아네의 손을 잡아 주었다. 이아네가 졸린 눈으로 레뮤엘을 바라보고 배시시 웃었다.

"좀 더 자거라."

"아니... 아닙니다..."

졸린 눈이 깜박이며 잠을 몰아내려 노력하는 것이 보였다. 레뮤엘이 피식 웃고는 이아네의 목 아래까지 시트를 끌어 여며 주며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춘다.

"괜찮대도."

"...웅..."

이아네가 장난스럽게 레뮤엘의 손바닥에 뺨을 부볐다. 레뮤엘이 낮게 웃으며 이아네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다는 듯한 손길이 부드러웠다.

일어나겠다는 이아네를 굳이 다시 재우고서야 레뮤엘은 침실을 나섰다. 예전에 비하면 한 시간 정도 늦은 출근이었지만 성의 사람들 중에 그것을 못마땅해 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집무실에 들어서자 우리아와 펠록스가 보였다. 그 순간부터 레뮤엘은 레뮤엘이 아닌 디날의 왕이었다.

"오늘까지 결재하셔야 될 것들입니다."

"점심 후 델토르 건을 검토해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델토르..."

느른한 말투와는 달리 레뮤엘의 눈에 안광이 날카롭게 빛났다.

이아네는 레뮤엘의 곁에 있으면서 제르멘에게 받았던 상처를 나름대로 치유 중이었지만 레뮤엘은 이아네를 상처 입힌 제르멘을 용서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꼭 이아네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디날과 전쟁을 일으킨 것이나 여동생을 흥정하듯 빼앗아 간 것에는 늘 마음속 깊은 곳에서 빚을 느끼고 만다.

레뮤엘은 차가운 눈으로 벽에 걸린 대륙의 지도를 바라보았다. 아델 강을 사이에 끼고 마주한, 저 아름다운 악마의 땅에서 델토르라는 이름을 기필코 지워버릴 테다.

"...폐하?"

"아무것도 아니다. 델러에게선 소식이 없나?"

"예. 아직은..."

아직도인가.

국혼을 치른 지 이제 근 두 달이 다 되어간다. 이아네를 찾아내느라 바쁘긴 했지만 여동생에게 아무런 연락이 없다는 것은 역시 불안했다.

그러나 아직 속단하긴 이르다. 베델리어는 바보가 아니니 어련히 잘 하지 않겠냐며 스스로를 달랜 레뮤엘이 낮게 한숨을 내쉬고선 일단 급한 용무부터 처리하기 시작했다. 평소와 전혀 다를 것 없는 일상이 지나가나 싶었다.

"폐하, 델토르 비전하의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반가운 일이군."

레뮤엘이 냉큼 펜을 놓고 펠록스가 가져온 서신을 받아들었다. 레뮤엘의 시선이 바쁘게 그 위를 훑었다. 그리 긴 내용은 아니었는지 레뮤엘은 금방 고개를 들었다.

"...낭패로군."

"?"

펠록스와 우리아가 의아한 눈빛을 교환했다. 레뮤엘은 좀처럼 부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 그가 자기도 모르게 그런 말을 꺼냈을 정도라면 상당히 계획에서 벗어난 일일 것이었다.

"비전하의 신변에 무슨 일이라도..."

"...일이라면 일이겠지."

레뮤엘이 서신을 펠록스들이 보기 쉽게 거꾸로 책상에 펼쳐놓았다. 여성 특유의 동글동글한 글씨체가 얼핏 귀엽게 보였지만 내용은 그다지 귀엽지 않았다.

다 읽고 난 펠록스가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우리아도 낮은 한숨을 내쉬며 서신을 둘둘 말았다. 잠시, 집무실은 아무 말 없이 조용했다. 침통해 있던 펠록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좀 더 생각해 봐야 할 문제다. 이 건은 오후에 이야기하지."

"예."

놀랍게도, 마치 아까까지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집무실은 다시 평화로워졌다. 오늘까지 처리해야 할 문서의 마지막 장에 서명을 하고 난 후에야 레뮤엘은 비로소 델러의 서신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아무리 이리저리 생각해 보아도, 아직 섣불리 결정을 내리기는 이르다. 역시 이럴 때는 델토르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정말 내키지는 않지만 레뮤엘은 결정을 내려야 했다. 아주 많은 망설임 끝에 레뮤엘은 펠록스에게 명령을 내렸다.

"...발로아 경을 불러라. 이아네도 함께."

그 시각, 약간 서늘한 바람 속에서 리트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채 마지막 동작을 끝냈다. 얼굴이 온통 땀으로 젖어 있었지만 날씨가 살짝 선선해지자 오히려 기분이 좋아 보였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어, 벌써 끝?"

이아네가 싱긋 웃으며 리트의 젖은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부쩍 검술에 재미를 붙인 리트는 어린아이답지 않게 검끝이 날카로웠다. 분명히 소질이 있다고 생각하며 이아네가 짐짓 엄격하게 대답했다.

"쉬는 것도 중요합니다. 자신을 과신하시면 안 되십니다."

"쳇..."

리트가 입술을 삐죽 내밀기는 했지만 이아네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도 안다. 아쉽기는 하지만 리트는 목검을 이아네에게 내밀었다.

이아네가 그 목검을 받아들어 갈무리하려는 순간,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끝났느냐?"

"아, 아버지?"

이아네가 반가운 얼굴을 했다. 저만치에서 발로아 경이 에밀을 안고 다가오고 있었다. 이아네를 발견한 에밀이 크게 손을 흔들었다. 그 천진한 인사가 귀여워 이아네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발로아 경이 천천히 다가오더니 리트에게 살짝 허리를 숙였다. 전에도 안면이 있었던지라 리트는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고개를 끄덕이며 발로아 경의 인사를 받았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폐하께서 급히 부르셨다. 너와 함께 오라는 명령이시다."

"...저를요?"

이아네가 의아한 눈을 했다. 리트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끄덕인 이아네가 아버지의 품에 안겨 있는 조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에밀은..."

"형아, 형아."

"응?"

리트와 눈이 마주친 에밀이 방긋방긋 웃으며 손을 뻗댔다. 발로아 경이 난처하게 웃으며 에밀을 내려 주자 에밀이 아장아장 걸어 리트 쪽으로 다가갔다.

"에밀, 안 돼."

"음, 뭐, 나는 괜찮다. 무슨 일이냐?"

이아네가 에밀을 다시 안아들려 하자 리트가 헛기침을 하며 앞으로 나섰다. 리트 앞에 선 에밀이 방긋 웃으며 이번에도 손을 내밀었다.

"형아 꺼."

"...?"

리트의 손바닥에 조그만 유리구슬이 톡, 하고 떨어졌다. 신비로운 바다색의 유리구슬은 에밀의 손때가 묻어 있었지만 본래의 색채를 잃지는 않았다.

"에밀이 저하를 보고 싶어 해서, 실례되는 줄은 알지만 데려오게 되었습니다."

발로아 경이 난처한 듯 변명했지만 리트는 크게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구슬을 들여다보다 이번에는 에밀을 바라본다.

"내게 주는 거냐?"

"웅, 형아 꺼."

에밀이 해사하게 웃으며 리트를 가리켰다.

"눈, 똑같애."

잠시 그 자리에 선 모두는 약간 감동을 받았다. 누가 보더라도 구슬은 파란색이었고, 리트의 눈은 보라색이었다. 리트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뒷목을 긁적였다.

"...쳇, 색맹이라도 되는 건가."

"우웅?"

"뭐어, 음, 이제 곧 간식 시간인데, 초대해 줄 수도 있고."

리트가 딴청을 피우며 말을 툭 던졌다. 간식이라는 말에 에밀의 눈이 반짝였다.

"갈래!"

"저하, 괜찮으시겠습니까?"

"유모도 함께 있을 테니까 괜찮다."

"저하, 그렇지만..."

발로아 경이 난처하게 이아네와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러나 에밀은 이미 간식에 홀려서 리트의 옷소매를 놓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럼, 폐하를 알현하고 오는 길에 데리러 가겠습니다."

"그러도록 해라."

"형아, 간식!"

"저하라고 불러라."

"웅! 쩌하, 간식!"

에밀이 폴짝폴짝 뛰며 리트를 따라 사라진 후, 발로아 경과 이아네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눈을 깜박였다.

"설마..."

"...에이, 아닐 거다."

애써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두 부자는 부리나케 발걸음을 옮겼다. 선선해지기 시작한 가을바람이 텅 빈 후원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발로아 경이 안내받은 곳은 집무실이 아니라 집무실에 딸린 작은 응접실이었다. 먼저 앉아 차를 들이키던 레뮤엘이 이아네가 들어온 것을 보고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이아네도 자중하려고는 했지만 자기도 모르게 슬쩍 위로 올라가는 입꼬리는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이쪽으로."

레뮤엘이 부드럽게 맞은편의 의자를 권했다. 이아네가 조심스럽게 앉아 레뮤엘을 바라보았다.

깊게 가라앉은 심청색 눈동자가 이아네를 똑바로 바라보자, 이아네는 얼굴을 붉히면서도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평온한 얼굴이면서도 이아네처럼 살짝 웃고 있는 입꼬리가 유려했다.

이아네를 뒤따라 응접실로 들어선 발로아 경이 짐짓 헛기침을 하며 먼저 입을 열자 레뮤엘이 살짝 목례를 했다. 레뮤엘이 한 나라의 왕이라 해도 발로아 경은 이아네의 아버지다. 반려의 혈육에게 함부로 대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무슨 일로...?"

레뮤엘이 잠시 이아네의 눈치를 보았다. 이아네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레뮤엘을 바라보자, 레뮤엘이 낮게 한숨을 내쉬더니 서신을 꺼내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델토르의 누이에게서 온 서신이오."

"아."

이아네는 레뮤엘이 왜 주저했는지 알 것 같았다.

레뮤엘은 이아네 앞에서 델토르나 제르멘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이아네는 자신이 제르멘의 이야기를 들어도 전혀 아무렇지도 않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인생의 대부분을 제르멘과 함께했고 최선을 다해 그를 섬겼다. 그런데도 이렇게나 태연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아주 오랫동안 사랑했다. 자신의 마음에 티 하나 없이 이아네는 온전히 제르멘의 사람이었다. 그 마음도 정성도 제르멘이 알아줄 것이라 생각해 단 하나 아까운 것이 없었다.

물론 함께 했던 시간이 길었던 만큼 좀 더 귀가 솔깃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마지막 순간 제르멘이 보였던 끔찍할 만큼 순수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 발정 난 암퇘지야.'

이아네는 가만히 레뮤엘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심청색 눈동자가 가슴 아프도록 솔직했다.

"읽어봐도 괜찮겠습니까?"

레뮤엘이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발로아 경이 서신을 집어 들고 이아네와 함께 읽어 내려갔다.

과연 레뮤엘의 여동생이었다. 깨끗한 필체가 읽기 쉬웠다. 그러나 그 안의 문장은 필체와는 달리 어딘지 당혹스럽고 횡설수설한 느낌이었다. 서신을 써내려가는 왕녀도 매우 당황한 것이 분명했다.

‘오라버니,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격조했던 터라 걱정이 많으셨을 줄로 압니다만...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지낼 만하고, 샤사도 건강합니다. 다만, 지금 매우 당혹스럽습니다. 곧 델토르에서도 정식 사자를 보내어 소식을 전할 예정이지만 아무래도 오라버니께서 빨리 아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저, 제가... 갑작스러우시겠지만... 임신을 한 것 같습니다.’

거기까지 읽고서 발로아 경이 고개를 들었다. 살짝 찌푸린 미간에 당혹감이 역력히 서려 있었다.

‘저도 당황스럽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부군은 아무 말 없이 그저 잘 됐다고만... 오라버니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답신 기다리겠습니다.’

발로아 경이 아무 말 없이 서신을 다시 레뮤엘 쪽으로 돌려주었다. 이아네는 멍하니 레뮤엘만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 동안 방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고민하던 발로아 경이 느리게 입을 열었다.

"폐하, 일단 시간을 들여 지켜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

“지금 델토르에는 제르멘 공 외에 다른 적장자가 없습니다. 비전하께서 아들을 낳으신다면 그대로 다음 대 델토르의 왕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델러는 디날인이오. 델토르의 군신들이 디날 출신의 핏줄을 인정할 것 같소?"

"그것도 그렇습니다만..."

발로아 경이 잠시 고민하다 조금 목소리를 낮추었다.

"델토르의 재상 비안테 공작은 확실히 매우 보수적인 인물입니다. 델토르를 위해 평생을 바친 인간이라, 분명 비전하를 매우 마음에 안 들어 할 것입니다."

그것은 예상했던 바였다. 그래서 레뮤엘도 델러를 델토르로 보내는 것이 탐탁지 않았다. 어느 왕실이나 단일 혈통을 강조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델토르는 도가 지나쳤다.

"그러나 지금 델토르의 국왕 역시 신임을 잃고 있습니다. 현재 라이오넬 기사단 단장이 출신도 분명치 않은 용병이라고 들었습니다. 비안테 공작에게는 그것도 매우 짜증스런 일일 겝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비안테 공작의 화살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일입니다. 라이오넬 기사단장의 소문을 부풀려서 그가 비전하에게서 관심을 끊게 하는 것이 비전하께는 가장 안전한 일일 것입니다."

"그 뒤에는?"

"반이라도 왕가의 피가 섞인 후계자냐, 출신을 아예 알 수 없는 용병이냐를 선택하게 두어야겠지요."

레뮤엘이 손가락으로 턱을 괴었다. 잠시 침묵 후 레뮤엘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왕위다툼 세력이 없다...라.”

레뮤엘이 생각을 빠르게 정리했다.

생각해 볼 것도 없었다. 델러의 임신은 디날에게 있어 절대 나쁜 소식이 아니었다. 델러가 아들을 낳는다면 시간이 좀 더 걸릴 뿐, 전쟁보다 훨씬 확실하게 델토르를–여러 가지 의미로- 정복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무사히 출산하신 후 정세를 보아도 늦지 않습니다.”

발로아 경이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이아네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레뮤엘이 짙푸른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알겠소."

아주 오랜 시간 후에야 레뮤엘이 겨우 대답했다.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돌아가도 괜찮을 듯하군. 그리고 이아네."

"옛?"

이아네가 깜짝 놀라 대답하자 레뮤엘이 무겁게 한숨을 쉬었다.

"잠시 시간을 내 주겠나. 아직 할 얘기가 좀 더 있으니."

이아네가 의아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발로아 경을 배웅했다. 복도 끝으로 발로아 경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이아네가 응접실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무슨 할 얘기- 으앗!?"

갑자기 강하게 손목을 잡아당기는 레뮤엘 덕에 이아네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다 그의 무릎으로 쓰러진다. 엉겁결에 레뮤엘에게 폭 안기게 된 이아네가 눈을 깜박이자, 레뮤엘이 낮게 한숨을 쉬곤 이아네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미안하다."

"......"

"그대의 나라고, 그대의 고국이라는 것도 안다. 나도 전쟁은 피하고 싶고, 델토르와 우호국으로 발전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도..."

레뮤엘이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이아네의 조국이긴 하지만, 델토르는 디날에게 먼저 시비를 건 나라다. 그것도 정당한 명분조차 없이. 물론 왕녀의 경거망동으로 인한 유책이 디날에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왕녀가 드래고니안으로 등록만 되어 있었어도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런 식으로 뒤에서 약점을 틀어잡고 자신의 이득과 국제적 안정을 맞바꿔도 된다는 뜻은 아니었다.

왕녀가 불법을 저질렀다면 왕녀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면 된다. 거기에 대한 부분이라면 레뮤엘은 이 전쟁에서 불리한 입장임을 깨끗하게 인정하고 그에 대한 사죄를 확실히 해냈을 것이다. 분명 치러야 할 대가는 크겠지만 그것도 자업자득이다. 레뮤엘 자신의 불찰로 일어난 일이니 전쟁으로 대가를 치른다 해도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제르멘의 태도는 레뮤엘의 신경을 건드렸다. 드래곤이나 라퓨타는 그렇게 제 욕심껏 휘둘러도 되는 장난감이 아니었다.

그가 제안한 거래는 거래라고는 하지만 결국 협박이나 마찬가지였다. 일을 조용히 처리하고 싶다면 왕녀와 그녀의 드래곤을 델토르에 팔아넘기라는 뜻이었다.

물론 그것이 디날에 이득이 되지 않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제 사욕을 채우려는 그 태도는 사람을 열받게 만든다.

제르멘도 레뮤엘도 한 나라를 책임지는 국왕이었다. 그 어깨 위에 올려진 무게가 결코 적은 것이 아니다. 왕의 명령 한 마디에 수많은 생명이 걸려 있는데, 제르멘은 그 생명들을 책임져야 할 사명이 아니라 마치 귀찮게 달라붙는 짐짝처럼 느끼는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그 꼭두각시놀음에 이아네가 상처를 입었다. 그것이 레뮤엘로서는 가장 치가 떨리도록 화가 나는 일이었다.

“델토르에는 악감정이 없지만...”

“......”

“제르멘 공에게는, 아직 감정이 남아 있지.”

이아네를 바라보던 것과는 너무나도 다른 날카로운 눈으로, 레뮤엘이 이아네의 어깨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미안하다, 안."

전쟁을 치르면서 레뮤엘은 제르멘의 무책임한 태도에 짜증이 날 대로 난 상태였다. 그런 무책임한 인사에게 협박을 당해 하나뿐인 여동생을 시집보내야 하는 상황도 짜증나는데,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을 가차없이 갖고 놀다 버렸다는 것이 사람을 두 번 화나게 만들었다.

"레뮤엘."

이아네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귓가에 울려왔다. 레뮤엘이 대답하지 않고 이아네의 어깨를 감쌌던 손에 힘을 살짝 풀자 이아네가 몸을 일으켜 레뮤엘의 얼굴을 마주 보아 왔다.

슬프고도 기쁜, 복잡한 눈이 레뮤엘을 응시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레뮤엘이 살짝 눈을 찡그렸다. 심청색 눈동자가 조금 어두워지며 이아네의 진의를 알아내려는 듯 날카로워졌지만 이아네는 아무 말 없이 레뮤엘의 뺨을 쓰다듬었다.

잔잔히 가라앉은 초록빛에 씁쓸한 웃음기가 떠오른다.

"저 역시 델토르를 사랑합니다. 제가 나고 자랐던 저의 고향이고, 저의 삶이 있었던 곳입니다. 델토르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저 역시 매우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아네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델토르에서의 제 사랑은 실패했습니다."

"......"

레뮤엘이 살짝 미간을 좁혔다. 약간 좁아진 미간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이아네가 다시 씁쓸한 미소를 물었다.

"당신이 그에게 감정을 가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저는, 그에게 더 이상 감정을 느끼지 않습니다. 델토르에서 그를 다시 만났을 때..."

이아네가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렸다.

한심하다는 듯한 난처한 미소. 자신을 내려다보는 오만한 기쁨. 사흘 밤낮을 갇혀 있던 차가운 방의 조그만 창문. ...방문에 흩어져 있던 핏자국.

"저는 제가 그에게 바쳤던 충정이 얼마나... 얼마나 헛된 것인지 알았습니다."

처절하게 눈을 감은 이아네가 레뮤엘에게 머리를 기대어 왔다. 레뮤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어깨를 끌어안아 주었다.

레뮤엘도 알고 있다. 사랑하는 이의 배신에 대한 아픔과, 꼬리 길게 따라오는 고통을 모르지 않는다. 이아네의 처절함조차도 가슴 아프도록 알고 있어서, 레뮤엘은 차라리 아무것도 묻지 않는 것을 택했다.

"물론 고통스럽습니다. 그가 괴로워하고 힘겨워하며 제게 저지른 과오를 후회하길 바랍니다. 다시는 행복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윽고 이아네가 다시 눈을 떴다. 처절할 만큼 쓰린 고통에 잠겨 있던 눈은 씻겨낸 것처럼 올곧은 강단을 가지고 자신 있게 레뮤엘과 눈을 마주쳐 온다.

"그러나 그런 만큼... 후회도, 미련도 없습니다."

"......"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으니, 저는 이제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레뮤엘은 약간 감명 받은 눈으로 이아네를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올곧게 제르멘만을 바라보던 눈이었다. 그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델토르에 대한 충절과 애정이 가득 차 있었던 눈이다.

레뮤엘이 이아네를 자신의 곁에 가두었던 것은 이것 때문이었다. 이아네를 온전히 채우고 있던 애정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이아네가 정말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 두려웠다.

타국에서 포로로서 붙잡혀 수모를 당하면서도 그가 제르멘의 진실에 대해 모르길 바라서, 그래서 아무것도 모르도록 가두고 숨기고 붙잡았다. 펠록스가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레뮤엘과 이아네를 볼 때마다 일부러 모르는 척했던 것도, 이아네가 어떻게든 자신의 곁에 남아 있길 바라는 그의 욕심이었다.

그러나 지금 눈앞의 이아네는 전혀 달랐다.

실패했어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말한다. 강하고 똑바르게, 초록빛 눈동자는 레뮤엘을 마주보고 있었다. 예전과 똑같이 아름답고 올곧은 맑은 눈으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이아네가 눈이 부셨다.

"그러니 당신의 손에 그의 피를 묻히지 마십시오. 저 같은 것 때문에, 델토르와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것은 당신답지 않아요."

"안."

"저는."

손가락 끝으로 레뮤엘의 입술을 살짝 누르며 이아네가 조용히 말을 잘랐다.

"예전의 저와 다릅니다."

"......"

"지금 제가 사랑하는 것은, 당신입니다. 레뮤엘."

단호한 목소리에서 이아네의 마음이 전해져 왔다. 심장이 따뜻하게 녹아내렸다.

"그대는 정말..."

"...?"

"로요라 여신의 선물인가."

이아네가 얼굴을 살짝 붉히면서 배시시 웃었다. 그 미소가 사랑스러워서, 레뮤엘이 참지 못하고 그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쪽, 하는 귀여운 소리가 지나가자 이아네가 한마디 덧붙였다.

"아직 모르시는 겁니까?"

"...음?"

이번에는 레뮤엘이 허를 찔린 표정을 했다. 의아함이 스쳐가는 표정을 놓치지 않고 이아네가 낮게 킥킥댔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당신이 있어줘서 가능했습니다.'

낮게 웃으면서 이아네는 하려던 말을 속으로 삼켰다. 지금 해도 상관없지만, 레뮤엘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본 이상, 아직은 보류.

* * *

"저하, 어디 계..."

"쉬잇."

리트의 방으로 들어섰던 펠록스가 흠칫 놀라며 자기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리트의 유모가 검지를 입술에 대고 필사적으로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봐요."

펠록스는 유모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리트가, 그 까다로운 왕자님이, 조심스럽게 침대 옆에 쪼그려 앉아 침대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왕자의 침대에 무려 어린아이가 누워 있었다!

펠록스는 순간적으로 너무 당황스러워 말문이 막혔다. 지금까지 리트를 가까이에서 보아 오면서 단 한 번도 리트가 또래의 아이들에게 우호적이었던 적을 본 적이 없었다. 하물며 자신의 방에 다른 아이를 재우다니?

"저 아인 대체 누굽니까?"

"모르겠어요. 오후 간식 시간에 갑자기 데려오셔선..."

유모도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으나 오랜만에 얼굴에는 어머니 미소가 떠나질 않고 있다. 과정이야 어찌 됐든 결과가 괜찮으니 다 좋다는 건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면서 펠록스가 조용히 리트에게 다가갔다.

"저하."

"쉬잇!"

...유모에게 조용히 하라고 시킨 건 아마 리트였나 보다. 유모와 한 치도 다르지 않은 몸짓으로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낸 리트가 심각하게 속삭였다.

"자고 있잖느냐."

리트가 열심히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어린아이의 얼굴이었나 보다. 펠록스가 슬쩍 리트의 어깨 너머로 감히 왕자의 침대에서 잠이 든 꼬마를 넘겨다보았다. 붉은 머리카락이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지만 이목구비가 오밀조밀하고 피부는 하얗고 부드러워 보였다.

"...저하, 송구하지만... 이 아이는...?"

펠록스가 최대한 목소리를 죽이며 묻자 리트가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에밀이다."

"......"

너무 당당한 대답에 펠록스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아하, 이 아이 이름이 에밀이었구나.

...아니, 중요한 것은 이게 아닌데.

"저하, 그것을 물은 것이..."

"에밀, 집에 가자!"

펠록스의 목소리를 가로막으며 갑자기 우렁찬 목소리가 입구에서 들려왔다. 당연히 화를 낼 것이라 생각한 리트가 아쉬운 얼굴로 한숨을 내쉬자 펠록스는 진심으로 혼란스러워졌다.

아니, 잠깐만. 저 목소리는 왜 안 혼내시는 거지? 아니 그 전에, 이 목소리는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

펠록스가 뒤를 돌아보는 순간, 입구에 서 있던 발로아 경과 눈이 마주쳤다. 발로아 경이 당황한 듯 그 자리에 서 있는 동안 이번에는 침대에서 부스럭 소리가 났다.

"웅... 하라부지...?"

아직 발음도 다 잡히지 않은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흐릿하게 들려왔다. 리트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는 소리가 들렸다.

"깼구나."

"우웅... 형아?"

펠록스는 이제 혼란을 넘어서 어지러워졌다. 감히 한 나라의 왕자를 거리낌 없이 '형아'라고 부르는 저 작태를 혼내야 할지 귀여워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저하라고 불러라."

"아, 맞다... 쩌하. 하라부지 와써?"

졸음이 아직 가시지 않은 눈이 뜨이더니 작은 머리통이 주변을 둘러보려 흔들렸다. 마침맞게 발로아 경이 다가와 에밀에게 손을 내밀자 에밀이 졸린 눈을 비비며 발로아 경에게 무릎걸음으로 다가갔다.

"하라부지이..."

"잘 놀았니? 자, 저하께 인사 드려야지."

펠록스의 입이 다시는 다물리지 않을 것처럼 벌어졌다. 그러니까, 저, 저 꼬마가, 발로아 경의, 소, 소, 손자였단 말인가?

"겨... 경의 손자인가?"

"예. 저하를 만나고 싶다고 해서 오늘 입성하는 길에 잠시 얼굴만 비추려고..."

"그걸 말이라고...!"

펠록스가 부들부들 떨며 목소리를 높이려는 순간, 리트가 끼어들었다.

"다음에도 올 건가?"

"예, 저하께서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흐, 흥. 내가 원한다고 했던 적은 없다."

애써 위엄을 찾으려는 듯 말하지만 리트의 귀는 벌써부터 기대감으로 붉어져 있었다. 발로아 경에게 안긴 에밀이 졸린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쩌하, 안녀엉."

"으응, 아... 안녕."

거기까지 말하고서 에밀은 발로아 경의 품에서 다시 잠들어 버렸다. 에밀을 안은 발로아 경이 방을 나간 뒤, 리트는 깊게 한숨을 쉬며 아쉬운 마음을 토해 놓았고 유모는 낮게 킬킬거렸다.

그 혼돈 사이에서 오직 펠록스만이 어지러운 머릿속을 정리하려 혼자 고군분투할 뿐이었다.

* * *

여름의 긴 꼬리가 서서히 희미해지고 가을이 다가왔다.

해풍을 품고 자라난 과실들이 익어가고 바다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만선이 계속되는 계절, 이아네는 그 풍요로움과는 어울리지 않는 얼굴로 레뮤엘에게 다시 물었다.

"...뭐...뭘, 한다고요?"

"? 작위식이 그렇게 놀랄 일인가?"

이아네가 애써 벌어진 입을 다물며 침을 꿀꺽 삼켰다. 예상치 못했던 공격에 완전히 얼이 나가 있었다.

평소와 똑같은 하루였다. 아침에 일어나서 출사하는 레뮤엘을 배웅하고, 디날의 문화나 예법을 배운다. 점심을 먹은 후, 리트의 검술 교습을 진행하고, 땀이 난 몸을 씻고 나면 저녁 먹을 시간. 레뮤엘이 아주 바쁘지 않는 이상 함께 저녁식사를 하는 것이 이제는 아주 자연스러워졌다.

그러나.

"다음 달엔 시간을 비워 두도록. 그대의 작위식이 있을 테니 바빠질 것이다."

평소와 다름없는 저녁식사였다.

양파와 함께 구운 오리고기 스테이크와 유자로 산미를 낸 샐러드, 크렌베리 소스를 끼얹은 닭가슴살 구이가 먹음직스럽다. 콜리플라워와 감자로 만든 포타주가 따끈하게 김을 내고, 소스를 뿌린 통새우 구이가 자리 잡은 가운데 레몬즙을 살짝 뿌린 얇게 저민 연어회 한 접시가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여느 때와 전혀 다를 것 없는 일상이었지만 레뮤엘이 내뱉은 한 마디의 위력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누, 누, 누구의 작위...식입니까?"

레뮤엘이 살짝 미간을 좁혔다.

"다시 얘기해야 하나?"

"아뇨, 아니, 아닙니다!"

충분하고도 차고 넘칠 만큼 알아들었으니 문제지.

이아네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뭔가 간절해진 얼굴로 레뮤엘의 옷깃을 붙잡았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끝이 이상하게 귀여워서 레뮤엘은 조금 웃었다.

"저, 저어... 어떤... 작위를 말하시는 겁니까?"

잠시 레뮤엘은 바들바들 떠는 작은 초식동물 같은 이아네를 좀 더 놀려줄지, 아니면 소신대로 정직하게 얘기해야 할지 강한 갈등에 시달렸다. 과연 이아네에게 장난을 건다면 더 재미있는 광경이 펼쳐지겠지만, 레뮤엘은 결국 유혹을 이겨내고 사실대로 얘기해 주었다.

"공작이다."

"...으아..."

그러나 사실 이아네가 원하는 대답은 아니었다. 그래서 이아네는 자기도 모르게 이마를 짚으며 신음을 흘렸다. 그 모습조차 레뮤엘은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싫어할 줄은 몰랐군."

"아뇨,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이아네가 숨을 고르더니 겨우 진정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 자체도 꽤 작았지만 방 안은 조용했기에 듣기에는 충분했다.

"그... 제겐 너무... 과분한 것 같아서..."

"흠..."

의외로 레뮤엘은 진지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혹시 화나게 한 건 아닌가 싶어 눈치를 살짝 보았지만 화가 난 것은 아닌 듯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한동안 식기 부딪는 소리만 방 안에 낮게 울렸다.

"안."

"네, 넷."

드디어 레뮤엘이 입을 열었지만 그 내용은 이아네가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

"해마다 이맘때쯤, 풍요를 기념하는 수확제가 열리게 된다."

이아네는 뜬금없는 얘기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제 작위에 대한 이야기는 끝난 건가?

"수확제는 전국적인 규모인데다 디날에 대해서 알게 될 좋은 기회가 될 거다. 축제가 열리는 루푸스 광장은 그다지 멀지 않으니, 괜찮다면 함께 가보면 어떨지-"

"좋아요!"

레뮤엘이 눈을 깜박이며 이아네를 바라보았다. 이아네는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 컸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얼굴을 붉혔다.

"아... 저기... 저는 좋습니다."

"...풋. 그럼, 펠록스에게 말해 두겠다. 리트도 가고 싶어 할 테니, 비밀로 하도록 해."

이아네가 고개를 갸웃 했다.

"저하도 함께 가시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어차피 오게 될 거다. 우리는 하루 먼저 가 있으면 돼. 그게 아니면-"

레뮤엘이 문득 뭔가 눈치 챘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나와 단둘은, 싫은가?"

이아네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졌다. 직선적으로 물어 오는 질문이 기쁘고도 미안했다. 그래서 이아네는 할 수 있는 한 힘차게 고개를 저었다. 좌우로 찰랑이는 검은색 머리카락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레뮤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짓했다.

"그럼, 마저 식사하도록."

이아네가 빨개진 얼굴을 접시에 박기라도 하듯 고개를 숙였다. 보지 않아도 옆에서 레뮤엘이 자신을 보며 웃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끄러워 돌아버릴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 비죽 새어나오는 미소를 감출 수가 없었다.

디날에 온 후 첫(엄밀히 얘기하면 처음은 아니지만) 외출이었다. 게다가 축제!

이아네는 축제에 열광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 특유의 흥겨운 분위기는 좋아했다. 델토르에서도 등불 축제가 열리면 그 사이에 끼어들진 않아도 한 발짝 물러서서 등불의 장관을 구경하곤 했다.

디날에서의 첫 외출도 외출이지만, 수확제가 기대되었다. 분명히 델토르의 수확제와는 다를 거고, 게다가 레뮤엘과 단둘.

이아네가 살짝 고개를 들어 레뮤엘의 옆얼굴을 훔쳐보았다. 다시 식사에 열중하기 시작한 레뮤엘이 시선을 느낀 듯 이아네를 돌아보자 이아네는 자기도 모르게 배시시 웃고 말았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단둘이.

아직 알지 못할 미지의 것을 마주했을 때처럼 심장이 기분 좋게 죄어 왔다. 평소보다 더 크게 뛰는 고동소리가 귓가에 웅웅 메아리쳤다. 리트에겐 조금 미안하지만, 연인과 단둘이 유희를 즐긴다는 것이 이아네에게는 생소하고도 설레는 일이었다.

"정확히 언제쯤입니까?"

"사흘 뒤. 루푸스의 축제는 큰 편이라, 거의 일주일 정도 계속될 거다. 예정대로라면 축제의 마지막 날에 축사를 위해 잠시 들르는 정도겠지만, 이번엔 일정이 앞당겨지겠군."

레뮤엘이 느긋하게 젓가락으로 회를 집어 이아네의 입 앞으로 가져갔다. 반사적으로 눈을 반짝이며 회를 받아먹은 이아네가 만족스레 입을 오물거리다 흠칫 뭔가 깨달은 듯 낭패의 눈빛을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레뮤엘이 빨랐다. 낮게 웃으며 이아네의 입가에 묻은 물기를 손으로 훔쳐낸 레뮤엘이 조용히 말을 덧붙였다.

"많은 것을 보게 될 거다. 정신 똑바로 차리는 게 좋아."

이아네는 회를 삼키고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과 기대가 섞인 눈빛이 레뮤엘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이 너무 귀여워서 레뮤엘은 잠시 이아네를 침대로 데려가는 것을 상상하다 흐뭇하게 눈을 반짝였다.

"그럼, 오늘은 일찍 잘까."

"예?"

이아네가 눈을 깜박이는 사이, 레뮤엘이 태연히 시종에게 손짓하더니 식탁을 치우라고 일렀다. 평소와 전혀 다를 것이 없는 모습이라 이아네는 혹시 자기가 잘못 들었나 했다.

"저, 제가 방금 뭔가 잘못 들은 것 같습니다만..."

"제대로 들었다."

"예? 으앗-"

이아네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레뮤엘이 이아네의 손목을 낚아챘다. 버둥거리기엔 너무 센 힘이라, 이아네는 속수무책으로 질질 끌려가며 울상을 했다. 곁에 섰던 시종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눈길을 보내 보지만 마지막으로 식탁을 치운 시종은 살짝 홍조를 띠며 살짝 인사한 후 침실 문을 닫을 뿐이었다.

침실 문이 닫힌 지 얼마 되지 않아 억누른 신음소리가 희미하게 두터운 문 사이로 새어나왔다. 처음에는 억눌려 있던 신음은 곧 파도처럼 강렬한 쾌감을 싣고 규칙적으로 커져 갔다. 첫 절정에 다다른 후에도 한참 동안, 밤이 늦도록 소리는 끊이지 않았고 문을 지키던 기사들은 약속이나 한 듯 솜을 꺼내 귀를 막곤 평화롭게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이아네는 눈앞에 펼쳐진 장관을 보고 잠시 말을 잃었다.

"정말...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다. 몇 번이나 얘기했잖나."

"역시 저도 함께..."

"호위는 지금도 충분하다."

루푸스로 떠나는 날, 레뮤엘은 조용히 성을 빠져나가기 위한 준비가 한창이었다.

한 나라를 책임지는 국왕이 성을 떠나는 것은 안 될 말이다. 성 안에서도 위험한데 하물며 성 바깥이라니. 민생을 살피기 위해서 꼭 필요한 일임을 모르지는 않지만 펠록스의 얼굴은 걱정이 가득했다.

"그... 그렇게 가시는 겁니까?"

"아, 안. 와 있었나."

이아네가 가까스로 입을 열자 레뮤엘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 모습에 이아네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늘 국왕의 정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모습만을 봐 왔다. 흐트러진 모습이래 봤자 잠자리에서 편한 가운으로 갈아입은 거라던가, 이마 위로 머리카락이 흘러내린 정도다. 그런데 지금 그는...!

"? 왜 그러지?"

"...아, 아닙니다..."

이아네는 귀까지 붉어진 얼굴을 돌리며 입을 가렸다.

평소보다 훨씬 수수했지만 몸에 잘 맞는 흰 셔츠와 금실로 수를 놓은 조끼, 그 위에 걸친 감색 재킷은 레뮤엘을 어딘가의 젊은 귀족처럼 보이게 했다. 진한 딥 블루의 머리카락을 감추기 위해 모자를 쓰긴 했지만 단정한 얼굴선과 유려한 이목구비는 숨길 수 없었다. 평소에는 절대 보지 못했을 레뮤엘의 평상복 차림이 너무, 뭐랄까, 이아네에게는 치명적이었다.

"괜찮나? 어딘가 아픈 건가?"

"아니, 그게 아니라..."

이아네가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고서야 겨우 평정을 되찾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평소와 똑같은 얼굴로 평상복을 입은 레뮤엘은 다시 봐도 뭔가...

'...코피 날 것 같아.'

거기에 비하면 이아네는 정말 평소와 크게 다를 것 없는 복장이었다. 기사로서의 정복은 따로 있었지만 이아네는 귀족이 아닌 무사 가문 출신이었으므로 셔츠 한 장에 검대를 걸치면 그걸로 충분했다.

물론 펠록스가 그것을 허락했을 리 만무했다. 새 셔츠와 바지, 구두와 재킷을 점검하고 허리에 검대를 찬다. 가벼운 단검을 검대에 매고 그 위에 어두운 녹색의 케이프를 둘렀다. 얼핏 평범해 보이긴 했으나 몸에 걸치는 순간, 이아네는 그것들이 최고급 벨벳과 어린 송아지 가죽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알아챘다.

시종들을 시켜 이아네의 옷을 갈아입히며 펠록스는 끊임없이 잔소리를 해 댔다.

"절대 폐하의 곁에서 떨어지면 안 됩니다. 물론 호위가 함께 가겠지만, 축제 중에는 엄청나게 붐빌 테니 주의해서 걸으십시오."

펠록스가 걱정을 크게 써붙인 것 같은 얼굴로 이아네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이아네가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사실 이아네도 델토르에서 왕실 기사단을 했던 몸이라는 것을, 펠록스는 잊은 모양이었다.

아직 암묵적이긴 했지만 이아네는 레뮤엘이 인정한 왕의 반려였다. 그러나 그것 말고도 쌍둥이들의 사형을 면하게 해 준 은인이라는 이유로, 펠록스는 이아네에게도 깍듯하게 말을 높였다. 이아네가 아무리 편하게 해 달라고 부탁해도 펠록스는 고집스럽게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아네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예전에 비하면 엄청난 변화였다.

"당연한 말입니다만 호칭은 절대 '폐하'라고 불러선 안 됩니다."

"펠록스."

"해가 지고 난 다음엔 숙소에서 절대 나오지 마십시오."

"펠록스."

"눈에 띄는 행동은 당연히 금지..."

"펠록, 스."

레뮤엘이 펠록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펠록스가 체념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자 레뮤엘이 어깨를 으쓱하며 이아네에게 고개를 돌렸다.

"마차가 준비되어 있을 거다. 가지."

"예..."

이아네가 얼빠진 표정으로 레뮤엘을 따라 나갔다. 펠록스가 굉장히 걱정되는 표정이긴 했지만 마차에 오르는 순간 이아네는 괜히 설레는 자신을 다시 느끼고 말았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승차감이 좋은 마차가 출발하고, 익숙한 성의 풍경이 창 바깥으로 멀어져 갔다. 선선해진 바람이 한낮의 태양에 데워져 적당히 미지근하게 마차 옆을 지나쳤다. 붉게 물들기 시작한 초목의 끄트머리가 시야를 어지럽게 수놓았다.

신기한 듯 바깥으로 시선을 주는 이아네의 맞은편에 앉아 레뮤엘은 느긋하게 이아네의 반짝이는 초록색 눈동자를 감상했다.

"그러고 보니, 그날 이후 외출은 처음이겠군."

"네."

이아네가 문득 창 밖을 향하던 시선을 떼어 레뮤엘을 바라보았다. 느긋한 표정으로 창문에 받친 팔로 턱을 괸 채 이아네를 바라보는 레뮤엘은 평소와는 어딘가 달랐다.

옷차림이 조금 달라지는 정도로, 이렇게 인상이 달라지는 건가? 이아네의 시선이 멍하니 레뮤엘을 향했다. 지금은 레뮤엘의 평소와 다른 모습을 눈에 담고 싶었다.

"마음에 드나?"

"예?"

레뮤엘이 대답하지 않고 피식 웃었다.

살짝 말려 올라가는 붉은 입꼬리가 믿을 수 없을 만큼 요염해서, 이아네는 순간적으로 허리 아래가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살짝 시선을 돌리며, 이아네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네에... 그, 저... 잘 어울리십니다."

레뮤엘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이아네의 심장이 주책맞게 뛰기 시작했다.

"모르는 모양이군."

"예?"

마차 안은 그다지 넓지 않았다. 무릎이 맞닿을 만큼 좁은 공간은 허리만 조금 숙여도 서로의 숨소리까지 들렸다. 레뮤엘도 그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레뮤엘이 느긋하게 손을 내밀어 이아네의 무릎에 짚었다. 천 위로 느껴지는 차가운 체온에 이아네가 살짝 정신이 들었다. 고개를 들자 레뮤엘의 얼굴이 훨씬 가까워져 있었다.

"그대가, 훨씬 잘 어울려."

"아..."

"눈을 떼기 힘들 정도야."

그 말대로 레뮤엘은 아까부터 이아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이아네의 수수한 차림만을 봐 와서인지, 아니면 이아네라서인지,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가 레뮤엘의 시야를 즐겁게 자극했다.

레뮤엘에 비하면 훨씬 수수하긴 했지만 단순하면서도 우아한 무늬의 재킷과 짙은 초록의 케이프는 소름끼치도록 이아네의 초록색 눈과 잘 어울렸다. 평소의 무채색에 가까운 옷차림에 비하면 아주 약간의 색조를 입힌 것만으로도 이렇게까지 화사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안."

"앗..."

레뮤엘이 예고 없이 이아네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살짝 홍조가 물든 뺨이 사랑스러웠다. 이아네가 깜짝 놀라며 눈을 감자, 이번에는 입술에 다시 입을 맞추었다.

부드러운 압력으로 입술을 눌러 오는 감촉에도 이아네는 눈을 뜨지 않았다. 대신 무릎에 놓인 레뮤엘의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갤 뿐이다. 이아네의 손에서 느껴지는 반지의 감촉에 레뮤엘의 키스가 좀 더 짙어졌다.

마차는 잘 포장된 도로를 따라 바다 쪽으로 내달렸다. 성에서 루푸스까지는 그다지 멀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공기에 섞이는 짠내가 짙어지고, 사람들의 행렬도 자주 보이기 시작했다. 이미 축제가 시작된 지 사나흘 정도가 지났기 때문에 거리에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어, 엄청나군요."

"이맘때쯤엔 늘 그렇지."

이아네가 반쯤 질린 얼굴로 창문에 걸린 우단 커튼을 살짝 걷어 바깥을 살폈다. 마차가 지나가는 차도에까지 사람들이 걸어 다녀 말을 몰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도 마차는 솜씨 좋게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갔다.

커튼을 내리고 있어도 바깥의 소리는 시끄럽게 고막을 때려 왔다. 장난감이나 군것질을 파는 행상인의 호객 소리, 어린아이들의 들뜬 환호성 소리, 광대와 악대들의 음악 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마치 커다란 물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활기차 보이네요."

"다행히도 올해는 풍년이었다. 바다에서도, 뭍에서도."

레뮤엘이 무덤덤하게 말하긴 했지만 그의 눈은 진지했다. 왕이라는 자각이 있는 만큼, 그가 수확제까지 친히 나온 것은 그저 즐기기 위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아네는 심청색 눈 깊숙이 따뜻한 애정이 찰랑대는 것을 보고 있었다. 자신의 백성들에 대해 레뮤엘은 마음 깊이 애정을 느끼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행복해 보이는군."

레뮤엘의 낮은 혼잣말을, 이아네는 일부러 모르는 척했다.

마차에서 내리고 나서는 한 걸음마다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치면서도 이아네는 쉼 없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델토르와는 또 다른 느낌의 활기가 광장에 가득 차 있었다.

대륙 저편에서 건너왔다며 진주 핀이나 팔찌를 파는 매대가 늘어서 있는가 하면, 아이들이 침을 삼키는 솜사탕이나 설탕으로 만든 꽃을 파는 상인도 있었다. 저민 대나무살에 얇은 종이를 덧댄 연이 하늘을 날고, 광대가 칼을 삼켰다 불을 내뿜었다 하며 재주를 부렸다.

잘생긴 음유시인이 하프를 뜯으며 먼 나라의 사랑 이야기를 노래하는 동안 마을 처녀들은 얼굴을 붉히며 유연한 입술을 바라보았고 광장 한편에서는 맥주 빨리 마시기 대회가 한창이다.

다들 웃고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분위기에 이아네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레뮤엘을 놓치면 큰일이지만 그의 뒤만 보고 가기엔 축제의 모든 모습이 너무도 즐거운 풍경이었다.

"아, 저것..."

이아네가 반갑게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가리켰다. 앞서가던 레뮤엘이 시끄러운 주변에도 불구하고 용케 알아듣곤 뒤를 돌아보았다. 깊이 눌러쓴 모자 때문에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레뮤엘이 이아네에게 여전히 신경 쓰고 있었다는 것이 왠지 기뻤다.

"델토르에서 자주 본 것입니다."

"델토르에서?"

레뮤엘이 흥미롭게 이아네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작은 마차에서 상인이 달려드는 꼬마들에게 무언가를 쥐어 주고 있었다. 달콤한 냄새가 풍기는 것을 보니 간식거리를 파는 것 같았다.

"가요!"

레뮤엘이 대답할 틈도 없이 이아네가 레뮤엘의 손을 잡고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람이 많아서 조금 고생하긴 했지만 무사히 노점에 도착한 이아네가 그제야 레뮤엘의 손을 잡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깜짝 놀라 손을 놓았다.

그러나 레뮤엘이 그 손을 강하게 마주 잡아왔기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인파 속에서 순간적으로 자신의 심장 소리가 크게 들리는 것을 인지한 이아네의 얼굴을 빨개졌다.

"여기까지 끌고 온 이유는?"

"그게..."

이아네가 얼굴을 빨갛게 한 채 손을 빼려고 했지만 레뮤엘의 손은 더욱 힘 있게 이아네의 손을 쥐어 왔다.

"사과...인가?"

그런 와중에도 레뮤엘의 눈은 매대에 고정되어 있었다. 빨갛게 잘 익은 사과에 무언가를 입힌 듯 반질반질한 윤기가 났다.

레뮤엘의 손을 빼내는 데 실패한 이아네가 애써 태연하려고 애쓰며 고개를 매대로 돌렸다.

"네, 네에... 캐러멜 사과라고 하는데, 델토르에서 축제 때 자주 보이는 간식거리입니다. 전에 저하...아니...그..."

"리트라고 불러도 좋다."

레뮤엘이 눈치 빠르게 허락하자 이아네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리트...님이, 얘기해 드렸더니 먹고 싶어 하셔서..."

"음."

거기까지 설명을 들은 레뮤엘이 지체 없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막 아이에게 거스름돈을 건넨 상인이 웃는 얼굴로 레뮤엘을 바라보았다.

"어서 오십시오, 나리! 캐러멜 사과 어떠십니까?"

"델토르에서 왔나?"

"어이구, 식견이 넓으십니다! 지난번에 델토르의 등불 축제에 놀러 갔다가 배워 왔습죠."

상인답게 변죽이 좋은 언변이었다. 레뮤엘이 잠시 고민하는 듯 매대에 주르르 꽂힌 사과들을 바라보았다.

"매대는 언제 철거할 예정인가?"

"내일 오전에 바트니잔으로 떠날 생각입니다만?"

레뮤엘이 아무 말 없이 품에 손을 넣었다. 사과는 살 생각도 없이 이상한 질문만 하는 이 귀족을 상인이 점점 귀찮은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할 때쯤, 레뮤엘의 손이 작은 자루를 상인에게 던졌다.

"그 정도면 충분할 테니, 모레까지 여기 남아 있도록. 다시 오겠다."

"예? 아니, 나리, 전 내일 오전에..."

상인의 불만은 자루를 열어보는 순간 쏙 들어갔다. 자루는 가벼웠지만 금화가 이 정도면 거의 일주일 치 매상이었다. 멍한 얼굴로 입을 딱 벌린 상인에게, 레뮤엘이 평온하게 덧붙였다.

"그럼, 일단 두 개 주시게."

이아네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레뮤엘의 곁을 걸었다.

지금 그는 한 손에는 레뮤엘의 손을 잡고, 한 손에는 캐러멜 사과를 핥으며 디날의 수확제가 한창인 루푸스 광장을 걷고 있었다.

부끄럽긴 했지만 사람이 너무 많아서 아무도 그들을 눈여겨보는 것 같지 않았기에 이아네는 조금 용기를 냈다. 레뮤엘의 손은 차가웠지만 이아네의 체온과 맞닿으며 비슷한 온도가 되어 갔다.

"맛있나?"

레뮤엘이 문득 묻는 말에 이아네가 빙긋 웃었다.

"어렸을 땐 자주 먹었었죠. 디날에서 먹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이아네가 웃으며 캐러멜이 벗겨진 부분을 살짝 깨물었다. 아삭, 소리가 나며 싱그러운 과육이 씹혔다. 어렸을 때 이런 식으로 겉의 캐러멜을 먼저 벗겨 먹고 나중에 안의 사과를 먹었던 것이 생각났다.

향수에 젖은 이아네가 사과에 정신이 팔린 순간, 곁을 지나던 남자들 중 한 명의 어깨에 이아네의 팔이 부딪혔다.

"어-"

-파삭.

앗 하는 사이 이아네의 사과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예상치 못한 대참사에 이아네가 멍하니 눈을 깜박이자 이아네에게 부딪혔던 남자가 당황하며 말을 걸었다.

"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

"괜찮습니다."

그러나 이아네는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바닥에 떨어진 캐러멜 사과를 내려다보았다. 아-아. 아직 사과는 한 입밖에 못 먹었는데.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닌 도로에는 흙먼지가 있는 대로 쌓여 있었다. 한 입 깨문 사과가 빙그르, 한 바퀴 돌자 사과는 더 이상 매끈해 보이지 않았다.

"아까워하지 말고, 자."

레뮤엘이 곁에서 달래듯 자기 사과를 건네주었다. 이아네가 약간 울상이 되어서 사과를 받아들자,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남자가 약간 웃음을 터뜨렸다.

"앗, 죄송합니다. 두 분이 매우 다정해 보이셔서."

"...네?"

"사과 대신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이거라도."

이아네가 얼빠진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는데, 남자가 아직 입술에 미소를 문 채 이아네의 케이프 단추 구멍에 붉은 지즐리아 꽃을 한 송이 꽂아 주었다.

"아, 이렇게까지는..."

"괜찮아요. 한 송이 '더' 있거든요."

"그치만..."

이아네가 당황하며 사양하려 하는 순간, 남자의 일행이 남자의 팔을 살짝 잡아끌었다.

"늦겠어, 슈젠. 그만 가자."

"응? 하하, 뭐야. 질투하는 거야?"

"그런 게 아니라..."

"알았어, 알았어. 그럼, 즐거운 시간 되시길."

이아네가 황망히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들었을 때 이미 슈젠이라는 남자는 일행의 어깨에 다정하게 팔을 두르고 저만치 멀어져 가는 중이었다. 거기까진 모든 것이 좋았다. 정확히는, 슈젠이 팔을 두른 '그' 일행에게 사람 많은 길 한복판에서 당당하게 입을 맞추는 것을 보기 전까지는.

"......"

"놀랐나?"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는 이아네의 곁에서, 레뮤엘이 무덤덤하게 물었다. 이아네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레뮤엘을 바라보았다.

"저, 저, 저, 저 사, 사람들, 바, 바, 방금..."

"그래. 키스했지."

그래, 레뮤엘도 눈이 있는 이상 보았을 것이다. 이아네가 보았던 키스를, 레뮤엘도 똑똑히 보았다고!

그런데 왜?

"아, 아,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

"?"

레뮤엘이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이아네를 내려다보자, 이아네가 꿀꺽 침을 삼켰다.

그래, 여긴 디날이었다. 동성애가 터부시되는 델토르가 아니라, '해상 무역 왕국'인 디날. 레뮤엘에게서 디날이 어떤 연애관을 가졌는지 듣긴 했으나, 릴로와 딜로 쌍둥이를 빼면 이아네는 '멀쩡한' 남자 연인들을 본 것이 이번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그의 연인도 지즐리아를 꽂고 있었잖나."

"예?"

이아네의 멍한 대답에 레뮤엘이 잠시 잊고 있었다는 듯 이아네의 손을 다시 잡고 걷기 시작했다. 어쩐지 아까보다 더 가깝게 붙었다고 느낀 건, 역시 기분 탓이겠지.

"디날에서 여자가 꽂는 흰 지즐리아는 결혼을, 남자가 꽂는 붉은 지즐리아는 동성애를 상징하지. 처음에는 어린 레이디들의 절망을 막으려는 의도였지만, 요즘에 와서는 동성애보다는 연인이 있음을 시사하는 바가 더 크다."

"앗...!"

이아네가 급히 지즐리아를 내려다보았다. 그, 그럼 저 남자가 얘기한 '한 송이 더 있다'는 건...?

"아마, 연인과 맞춰서 꽂고 왔겠지."

이아네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그러니까, 지금 이아네가 지즐리아를 꽂고 있다는 건, 그러니까... 레뮤엘과 '연인'으로 보인다는 얘긴가?

"그, 그럼 돌려줘야..."

"나와 연인으로 보이는 게 그렇게 싫은가?"

"아, 아뇨! 아닙니다!"

이아네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목소리가 너무 커서 지나던 사람들이 살짝 돌아볼 정도였지만 이아네는 필사적이었다.

"그저, 꽃을 다른 사람에게 줘 버리면 서운해 하지 않을까 해서..."

"귀한 꽃도 아니고, 꽃의 마감 상태를 보니 광장 어딘가에서 산 것 같군. 신경 쓰지 마라."

"그렇지만..."

레뮤엘이 피식 웃었다.

"길 한복판에서 그렇게 뜨겁게 키스할 정도라면, 그 정도로는 식지 않아."

이아네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귀까지 빨개져 고개를 푹 숙인 이아네가 레뮤엘의 손을 잡은 채 그 뒤를 졸졸 따라갔다. 여전히 나머지 한 손에는 레뮤엘이 건넨 캐러멜 사과를 꼭 쥐고서.

해가 져 가면서 광장의 곳곳에는 등불이 걸리기 시작했다. 낮에는 어린아이들과 젊은 청년들 특유의 들뜬 분위기였다면, 밤이 어두워지면서 광장의 분위기는 좀 더 녹진해졌다.

음료수보다는 주류 매대가 더 자주 보이기 시작할 때쯤 이아네는 조금 피곤을 느꼈다. 축제를 즐기면서 이것저것 군것질을 했기 때문에 배가 고프지는 않았지만 오랫동안 걸은 탓에 무릎 뒤가 저려 왔다.

"잠시 쉴까."

레뮤엘도 같은 생각이었던 건지, 광장에 마련된 쉼터로 이아네를 이끌었다. 쉼터에도 사람들은 많았지만 다행히 둘은 빈 벤치에 엉덩이를 붙일 수 있었다.

"하아..."

"즐거운가?"

"예. 즐거웠습니다."

이아네가 레뮤엘을 바라보며 대답하자, 레뮤엘도 만족스러운 듯 조금 웃었다. 피곤해 보이긴 했지만 온전히 둘만의 시간을 즐기는 것이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고단해 보이십니다."

"음..."

레뮤엘이 애매하게 대답했다. 레뮤엘의 성격상 이런 대답을 하는 것이 어울리지 않았기에 이아네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러나 레뮤엘은 뭔가 고민하는 듯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길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레뮤엘이 그런 상황일 때는 무슨 얘기를 해도 대답하지 않을 것을 알기에, 이아네는 조용히 옆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이윽고 레뮤엘이 입을 열었다.

"내일 아침이면 끝나는군."

"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무리 없이 대답한 이아네가 그 다음 말을 기다렸다.

수확제 기간은 아직 하루 더 남아 있었지만 다음 날 아침부터는 국가 행사가 진행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그 전날이 마지막 날이었다. 수확제의 마지막 날은 다른 날들과는 다르게 밤이 늦도록 광장의 불은 꺼지지 않고 마지막 휴일을 즐기는 사람들로 붐비게 되지만, 다른 때보다 인파가 많아지는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슬슬 가 볼까."

"예? 어디를...?"

레뮤엘은 대답하지 않고 이아네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놓치지 말고 단단히 따라오라는 뜻이었다. 영문을 모른 채 이아네가 레뮤엘을 따라갔다.

광장에서 약간 벗어나자 마차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 레뮤엘은 이아네를 잡고 타고 왔던 마차 쪽으로 향했다.

"마차에 타는 겁니까?"

"음."

애매한 대답을 하며, 레뮤엘과 이아네가 마차에 올라타자 곧 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차는 광장 외곽의 도로를 따라 비교적 외진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길에 사람들이 점점 적어지자 이아네는 의아한 눈으로 레뮤엘을 바라보았지만, 레뮤엘은 여전히 팔을 창틀에 걸친 채 바깥을 살필 뿐이었다.

"피곤하십니까?"

"...글쎄."

이아네의 얼굴이 다시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지금까지 레뮤엘을 보아 오면서 이렇게까지 두루뭉술한 대답을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뭔가 계획이 있는 것 같긴 했지만 표정이 별로 없는 레뮤엘에게서 생각을 유추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별 수 없이 이아네도 레뮤엘을 따라 마차 바깥으로 시선을 주었다. 남보라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하늘 아래, 아직 축제의 여흥이 가시지 않은 사람들이 크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득 마차가 약간 기울어지는 것을 느끼고서 이아네는 뒤를 돌아보았다. 마차는 오르막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어깨 너머로 멀어지는 광장이 약간 밑으로 보였다.

그 뒤로도 꽤 지난 후에야 마차는 야트막한 둔덕의 꼭대기에 올라섰다.

"여기는...?"

"다 왔나."

레뮤엘이 창밖을 살피곤 문을 열었다. 이아네가 얼빠진 얼굴로 그런 레뮤엘을 바라보자 레뮤엘이 이아네에게 손을 뻗었다.

마치 레이디를 에스코트하는 듯한 그 손길에 이아네가 왠지 부끄러워졌다. 그러나 레뮤엘은 마치 당연하다는 듯한 심청색 눈으로 이아네를 향한 손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잠시의 신경전이 오간 끝에 이아네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저 올곧은 깊은 바다색 눈을 마주할 때마다, 이아네는 자신의 고집이나 생각들이 쓸모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결국 레뮤엘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린 이아네는 잠시 발아래 펼쳐진 장관에 할 말을 잃었다.

"아..."

"마음에 드나?"

언덕 아래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하나 둘 별이 뜨기 시작한 초저녁의 남빛 하늘 아래 온통 불빛이 반짝이는 루푸스 광장이 엎드려 있었다. 그 사이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흥분과 열기가 고스란히 느껴졌지만 한 발짝 멀리서 바라본 축제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레뮤엘이 왜 이아네를 데려왔는지 선명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아름답네요."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광장에서부터 불어온 바람이 언덕을 핥으며 올라왔다. 레뮤엘의 손이 이아네의 어깨를 둘러 왔다. 케이프를 두르고 있었지만 서늘한 가을녘 바람에서 감싸 주려는 배려가 따뜻했다. 이아네가 살짝 레뮤엘을 올려다보자, 레뮤엘도 광장을 바라보던 얼굴을 돌려 이아네와 눈을 맞추어 왔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전혀 변함없이, 흔들림 없이 똑바른 눈빛이 아름다웠다.

"이아네."

"예."

"나는..."

레뮤엘이 부드러운 눈으로 다시 광장을 바라보았다.

"디날의 국왕이다."

"...?"

"저들을 모두 발밑에 두고 있으면서도, 또한 저들을 머리 위에 이고 있기도 하지."

이아네도 레뮤엘을 따라 광장을 바라보았다. 웃고, 떠들고, 노래를 부르며 흥에 취한 사람들. 저 넓은 광장을 가득 채운 이들이 아까와는 다르게 보였다. 모두가 자신의 삶을 살고 있지만, 그들의 삶은 레뮤엘의 삶이었다. 국왕이자 디날, 그 자체.

"내가 그런 위치이기 때문에, 나의 반려 역시 그러한 위치가 된다."

이아네가 숨을 죽였다. 그가 말하는 것은 단순한 디날의 이야기가 아닌 이아네의 이야기였다.

"내가 국왕이자 디날인 이상, 그대는 내게만 특별한 이가 아니다. 내 아들에게도, 내 백성에게도 특별한 이가 되는 것이다."

"......"

"그대가 부담스러워 한다 해도, 나는 그대를 그저 그런 측실로서 대할 생각이 없다. 그대는 이제 내 반려야. 그 누구라도, 그대를 하찮게 대할 수 없도록 할 의무가, 내게는 있다."

"...레뮤엘."

"오늘 하루 종일, 그대는 무엇을 봤지?"

갑작스런 물음에 이아네가 멍한 머리를 애써 굴렸다. 오늘 무엇을 봤더라.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래. 그럼 그들이 우리를 본 것도 기억하는가?"

문득 이아네는 아직도 단추 구멍에 끼워진 지즐리아 꽃을 내려다보았다. 흙먼지가 앉기는 했지만 지즐리아 꽃은 여전히 붉은 꽃잎을 매혹적으로 펼치고 생생하게 빛나고 있었다.

"...예."

"어떻게 생각하던가?"

이아네는 고개를 푹 숙이고 꽃잎을 어루만졌다. 레뮤엘이 이렇게 묻는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평범했습니다. 아무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레뮤엘의 손이 이아네의 턱을 당겨 올렸다. 이아네가 순순히 고개를 들자 약간 젖은 초록빛 눈동자가 보였다. 레뮤엘이 미소를 지으며 이아네의 턱을 끌어당겨 입을 맞추었다. 달콤하고도 짧은 키스가 입술에 내려앉자 이아네의 심장이 순간적으로 크게 뛰었다.

"그대가 본 그대로다. 안."

"...레뮤엘..."

레뮤엘이 사랑스러운 것을 끌어안듯 이아네를 품 안으로 당겼다. 이아네가 레뮤엘의 가슴에 기대자 평소보다 살짝 높아진 체온이 느껴졌다.

"그대가 정말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 델토르에서 온 그대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뭔지, 충분히 알고 있다."

이아네가 레뮤엘의 케이프 자락을 꼭 쥐었다. 질 좋은 우단이 부드럽게 손 안에서 우그러졌지만 상관없었다.

레뮤엘은 알고 있었다. 이아네가 정말 두려워하는 것은 높은 작위도, 왕의 반려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사람들의 환멸. 혐오와 경멸, 무시와 연민이 뒤섞여 복잡해진 시선이다.

델토르에서 동성애는 암묵적인 금기였다. 부끄러운 치부, 용서할 수 없는 죄악, 로요라 여신의 조화를 거스른 불순분자들. 그런 시선 사이에서 제르멘과 나누었던 정들은 말 그대로 금지된 장난이었고 존재해선 안 될 이단이었다.

스무 해 넘게 델토르에서 자라온 이아네가 디날에 와서 한순간에 모든 것이 바뀌기는 힘들 것을 레뮤엘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레뮤엘도 이번만큼은 양보할 수 없었다. 말로만 해서는 이아네가 얼마나 고집을 부릴지 알기에, 레뮤엘은 부러 사람들에게 그의 성애를 드러내어 그 반응을 직접 보고 느끼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델토르에선 어떨지 모르지만, 여기는 디날이다. 그대의 고향과는 달라. 아무도 그대를 인해서 내게 허물을 씌우지 못한다. 내가 그렇게 만들 것이다."

이아네는 찔끔 흐를 뻔한 눈물을 감추려 괜히 레뮤엘의 가슴팍에 뺨을 비볐다. 커다랗고 차가운 손이 이아네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걱정 말라는 듯한 부드러운 움직임에 이아네가 짐짓 토라진 표정으로 레뮤엘을 올려다보았다.

"어린애가 아닙니다."

"알고 있다."

레뮤엘이 부드럽게 웃으며 이아네의 이마에 다시 입을 맞추었다. 이아네가 마주 웃으며 레뮤엘의 가슴팍에 다시 고개를 묻었다.

그 순간, 광장 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날카로운 휘파람을 부는 것 같은 소리에 뒤이어, 펑 하는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

깜짝 놀란 이아네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광장을 바라보았다.

완전히 까만 어둠이 내려앉은 광장에서. 실타래를 푸는 것처럼 가느다란 빛줄기가 올라와 검은 먹물 같은 하늘 위에 여러 가지 색으로 퍼졌다. 붉고, 푸르고, 희고, 요란한 소리와 함께 하늘로 치솟은 불꽃은 어딘지 지즐리아 꽃과 닮아 있었다.

"시작했군."

처음 보는 광경에 완전히 당황한 이아네와는 달리, 레뮤엘은 느긋하게 중얼거리며 이아네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등으로 전해지는 가슴의 체온보다도 이아네는 눈앞의 이상야릇한 불꽃들에 시선을 뺏기고 말았다.

불꽃들은 각양각색으로 하늘을 수놓았다. 수십 개의 유성이 한꺼번에 내리듯 선연한 빛의 폭포를 그리던 불꽃들은 광장의 바로 위에서 파르르 떨며 가루가 되었다. 모닥불을 피웠을 때 나는 듯한 묘한 냄새가 바람에 실려 이아네의 코끝에 감겨 왔다.

사람들이 더 많아지던 이유가, 이것이었구나.

이아네가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불꽃을 바라보았다. 땅에서 솟는 별똥별처럼 한참 공중으로 솟아 오르다, 펑 소리와 함께 꽃 모양으로 퍼진다. 어느새 이아네의 입가에 미소가 돋아났다.

"아름답군."

"예, 정말..."

"그대가 말이야."

"!?"

멍한 얼굴의 이아네가 묻고 싶은 것이 잔뜩 있는 얼굴로 레뮤엘을 바라보았지만 레뮤엘은 조금 웃으며 하늘을 수놓는 불꽃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아름다웠다. 정말로.

"지즐리아 꽃을 닮았군."

"...예."

"지즐리아의 꽃말은 알고 있나?"

이아네가 고개를 저었다. 레뮤엘이 부드럽게 호선을 그린 얼굴로 이아네의 꼭 다물린 입술을 바라보았다.

"변함없는 마음."

레뮤엘이 할 말을 다 했기 때문에, 이아네는 무엇을 말한다 해도 지금은 사족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지금 이아네가 해야 하는 일은 얌전히 레뮤엘의 품에 안겨서 검은 하늘에 수놓인 지즐리아 꽃들을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수확제는 다음날로 끝이 났다.

평소와 다름없는 왕의 정복을 빈틈없이 차려 입고서, 레뮤엘은 단상에 올라 풍년을 기원하는 축사를 읽고 성화에 직접 축사를 태웠다.

어제와는 전혀 다른, 완연한 국왕의 얼굴이었다. 레뮤엘의 반려가 된다는 것은 국왕의 반려가 된다는 것. 영광과 함께 책임도 함께 수반하는 자리라는 것을, 진지한 레뮤엘의 얼굴을 보며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그만을 바라보는 수많은 사람들 틈에 섞여 레뮤엘을 바라보며 이아네는 결심을 굳혔다.

그가 원한다면.

"이아네!"

이아네가 뒤를 돌아보곤 깜짝 놀랐다. 수수한 귀족 자제의 복장을 한 리트가 펠록스를 따라 이아네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저..."

저하, 라고 아무 저항 없이 부르려다, 이아네는 리트를 뒤따르는 펠록스의 눈썹이 살짝 찡그려지는 것을 보았다. 이아네가 살짝 웃고서 다시 리트를 불렀다.

"리트 님, 언제 오셨습니까?"

"오늘 아침에! 아버지께서 너와 함께 있으면 곧 오시겠다고 하셨다. 캐러멜 사과가 있다지?"

이아네가 피식 웃었다. 발갛게 상기된 리트의 얼굴이 귀여웠다. 축제 끝물이라곤 하지만 아직 활기찬 루푸스 광장을 가리키며 리트가 이아네의 바지 자락을 잡아당겼다.

"빨리, 빨리!"

"자, 손을 잡으세요. 놓치면 안 됩니다."

"응!"

리트의 손을 잡고 광장으로 걸어가는 이아네의 얼굴이 화사하게 빛난다.

그가 원한다면, 무엇이든 해 낼 것이다.

무엇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레뮤엘이 곁에 있다면, 그리고 그가 원한다면 이아네는 기꺼이 강해질 것이다. 그에게 어울리는 반려가 되어 보일 것이다.

굳은 강심이 초록빛 눈동자 속으로 피어났다. 캐러멜 사과 매대 쪽으로 뛰어가는 리트의 잿빛 뒤통수를 보면서, 이아네는 자신이 있을 곳을 다시 확신했다.

수확제가 끝난 후, 성에서는 간소한 작위 수여식이 진행되었다. 작위식은 측근들만 대동한 채 짧게 끝났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작위식이 아닌 그 후의 식순이었다.

로요라 여신의 가장 신성한 사제가 도착하고, 하얀 예복을 정갈하게 차린 두 사람이 사제 앞에 섰다. 짧은 축복 후 언약의 증표로 반지를 교환하고 정식 반려가 됨을 선언함으로써 긴 여정이 드디어 끝을 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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