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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강의실에 있는데 정신은 딴 데 가 있었다. 교수님이 뭐라고 했는지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게 너무 슬퍼서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었는데, 오늘 아침부터는 머릿속이 형들 생각으로 가득 찼다.
급기야 작은형이 또 집에서 나가버리면 다음에 오는 건 큰형이 죽어버린 다음이 되는 게 아닐까 하는 불길한 상상까지 하고 말았다.
그렇게 되는 건 절대 싫다.
너무하잖아, 내가 오메가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오메가가 싫다고 동생까지 피하는 게 어디 있어.
“야!”
“어, 어?”
정문을 막 벗어나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걷는데 등을 때리는 손길에 놀라서 고개를 돌리자 동네 소꿉친구인 시준이가 날 빤히 쳐다봤다.
“뭐 하냐? 무슨 생각을 하기에 불러도 몰라?”
“불렀어?”
“그래, 어…?”
“왜.”
“너 히트 올 때 됐냐? 페로몬 나오는 거 같은데?”
알파인 시준이 내 목덜미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았다.
“아닌데, 아직 일주일 정도 남았는데.”
“너 또 약에 내성 생긴 거 아냐?”
“설마, 지난달에 바꿨는데.”
“아니면 스트레스? 할아버지 돌아가신 거 때문에 심리적으로 불안정해져서 그런 거 아냐? 오메가들은 그런 경우 있다잖아.”
이미 장례식장까지 다녀간 시준이 내 어깨를 두드리며 가벼운 위로를 전했다.
“심해?”
코에 팔을 대고 냄새를 맡았지만 여전히 알 수 없다.
“막 미치겠는 정도는 아니고, 냄새가 좀 샌다 정도.”
“약 더 먹어야겠네.”
편의점에 들러 생수 살 생각을 하며 시준이와 함께 길을 걸었다.
“작은형 왔다며?”
동네가 작아서 그런지 이미 소문이 다 난 모양이다.
“어.”
“근데 왜 버스 타고 가?”
“그럼 걸어가?”
“아니, 너 이렇게 페로몬도 나오고, 작은형까지 왔으면 차로 데리러 오고도 남지, 니네 형들 과보호잖아.”
“이제 안 그래.”
그것도 다 옛날 말이다. 오늘 아침에도 밥은 같은 식탁에서 먹었지만 그 외에는 내 근처에도 안 오려고 했다. 아마 나한테 페로몬이 나오는지도 몰랐을 거다.
“뭘 안 그래, 난 아직도 너 중학교 입학식 생각난다.”
시준이 말에 괜히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확실히 요란한 입학식이긴 했다. 작은 시골 학교에는 안 어울리는 우성이 둘씩이나 등장했으니 난리가 날 수밖에.
형들은 입학식을 참관하는 건 물론이고 교실까지 찾아와 담임한테 얼굴 도장을 콱 찍었다. 그 바람에 교실에 있던 모든 애들이 내가 알파 형을 둘이나 가진 애라는 걸 알게 됐었다.
그 후에도 뻑 하면 번갈아 가면서 데리러 왔다. 그나마 고등학교는 작은형이 집을 나간 뒤로 큰형만 있어서 횟수가 줄은 거다.
중학교 때는 둘이 정말 번갈아 가면서 매일 날 데리러 왔었다.
둘 중 누군가 정문에 서 있는 걸 발견하면 학교 애들이 바로 나한테 말해줬다.
‘야, 네 형 왔다.’
그 가벼운 말이 괜히 좋아서 우쭐한 기분에 빠지곤 했었다.
하지만 대학 입학식 때는 큰형만 왔다. 그리고 최근에는 병원에 가는 날이 아니면 데리러 오지 않는다.
형들도 각자 사회생활을 해야 하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스물이나 된 동생 뒤치다꺼리보다는 자기 친구들이랑 노는 게 더 좋을 거다. 이를테면 여자 친구나 애인 같은 사람들.
“나 약속 있는데, 혼자 집에 갈 수 있지?”
“내가 애냐?”
“혹시 모르니까, 갑자기 안 좋아질 수도 있잖아.”
“편의점에 들러서 약 먹고 갈게.”
“그래, 그럼 약 먹고 바로 집으로 가. 괜히 문제 생기면 나중에 네 형들한테 나만 욕먹어.”
“잔소리.”
시준이는 형들한테 어렸을 때부터 말을 들은 탓인지 매번 저런 식으로 잔소리를 하곤 했다.
“잔소리가 아니라 생존본능이지, 네 형들 난 그렇게 오래 봤어도 무서워.”
“웃기시네, 약속 있다며 빨리 가.”
“어, 내일 봐.”
시준이와 헤어지고 편의점에 들러서 생수를 사서 뚜껑을 열다가 다시 닫았다.
만약 시준이 말처럼 진짜 심리적으로 불안정해서 페로몬이 새어 나오는 거라면 약으로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내 불안은 할아버지의 부재와 함께 찾아온 작은형이고, 작은형이 집에서 나가면 언제 올지 모른다는 사실 때문이니까.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이 불안정은 작은형이 집에서 나가면 더 심해질 것이다. 일시적으로 가라앉는다고 해도 약은 근본적인 치료 방법이 안 되는 거 아닐까.
의사도 아니면서 멋대로 내린 진단 때문에 심장이 벌렁거렸다.
가뜩이나 오메가 페로몬을 싫어하는 사람 앞에서 페로몬은 풍기면 당장 집에서 나가려고 하는 거 아닐까.
결론을 내리는 것과 동시에 택시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학교 근처에서 멀지 않은 병원 이름을 말하고 창밖을 바라봤다. 기사가 숨을 크게 쉴 때마다 신경 쓰여서 손바닥으로 연신 이마를 문질렀다.
대학 병원 형질의학과에 도착했을 때는 외래 진료와 예약 진료 환자가 뒤섞여서 로비에 사람이 가득했다.
예약을 안 하고 온 바람에 당연히 내 차례는 제일 마지막이었고 난 구석 의자에 앉아서 얌전히 기다렸다.
하나둘 사람들이 줄어들기를 기다리다 보니 어느덧 내 이름을 불렀다.
“안녕하세요.”
어렸을 때부터 한 달에 한 번은 보는 노(老) 의사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어디 안 좋아? 약 바꾼 지 아직 한 달밖에 안 됐는데.”
“그건 아니고요, 페로몬이 나오는 거 같아서요.”
의사는 체온계와 비슷하게 생긴 기계를 내 목덜미에 대고는 수치를 확인했다.
“그러네, 진짜 나오네. 약 먹은 거지?”
“아침에 먹었어요, 아무래도 더 센 약이 필요할 거 같은데요.”
“지금보다 센 약으로 바꾸는 건 안 좋아.”
“왜요.”
“너 내성 고려해서 일부러 약을 번갈아 쓰는데 갑자기 센 약으로 바꾸면 오히려 면역력이 더 떨어지지, 그냥 집에서 쉬는 게 나을 거 같은데.”
“아뇨, 그건 안 돼요!”
“왜?”
“집에… 사람이 와 있어서, 쉴 수가 없어요.”
“사람?”
노 의사가 눈을 예리하게 떴다. 어렸을 때부터 우리 삼 형제를 다 진찰한 의사였기 때문에 집안 상황도 대충은 다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이 의사는 할아버지 친구였다.
“영훈이 말하는 거야?”
잠깐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이자 의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영훈이가 페로몬에 민감한 체질이긴 한데 석훈이도 같이 있잖아. 형젠데 뭐 어때. 장례식 피로 때문일 수도 있으니까 그냥 쉬어.”
“아뇨, 그래도 학교도 가야 하니까….”
“진단서 써줄 테니까 학교에 제출해.”
“선생님, 진짜―”
손바닥을 마주대고 기도하는 포즈로 애원하듯이 조르자 의사의 입에서 엷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약을 바꾸는 건 안 돼, 특효약 줄 테니까 정 안 되겠으면 그거 써.”
잠깐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급한 상황이 왔을 때 쓰면 되니까 없는 것보다 나을 것이다.
“부작용 있을 수 있으니까 한 번에 많이 쓰시면 안 돼요.”
접수처 간호사에게 특효약을 받으며 마지막 주의사항을 들었다.
주사기가 두 세트가 들어 있는 케이스를 받아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해가 완전히 진 다음이었다.
병원에 사람이 많다고는 생각했지만 내 생각보다 대기 시간이 훨씬 길었던 모양이다.
서둘러 집에 들어가 대문을 지나 미닫이 현관문을 열자 누가 봐도 화가 나 보이는 작은형이 서 있었다.
“아, 형―”
“너 지금 몇 시야?”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봤다. 이제 7시 반, 그렇게까지 늦은 시간은 아니다. 아니, 이렇게 화를 낼 정도로 늦은 시간은 절대 아니다.
“일이 좀 있었어.”
가볍게 대꾸하며 형을 스쳐 지나가는데 손목이 붙잡혔다.
“무슨 일? 늦으면 전화라도 해야 할 거 아냐? 너 강의 끝난 시간 지났는데 안 온다고 형이 데리러 갔어.”
“전화?”
그 가벼운 단어에 쌓아뒀던 감정이 툭 튀어 올랐다. 붙잡힌 손목을 세게 뿌리쳤다.
“번호 바꿨으면서…!”
순간 작은형이 입을 딱 다물었다.
“나한테만 안 알려줬잖아, 그거 나한테 전화하지 말라는 의미 아니었어? 내가 전화했으면 차단했을 거잖아, 나도 그 정도 눈치는 있어.”
서러움이 터졌다. 할아버지도 안 계신데 작은형이 또 나갈 거라는 초조함을 더 이상 억누를 수가 없었다.
“또 나갈 거잖아!”
빽 소리를 지른 순간 심장이 빠르게 튀어 오르더니 머리가 멍해졌다. 온몸이 뜨거워지면서 무언가 팍 터지는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내가 느끼기에도 진한 꽃냄새가 확 피워 올랐다.
놀란 형이 팔뚝으로 코를 막고 나한테서 한 걸음 떨어졌다.
“너….”
형이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갈 것처럼 뒤로 움직여 나도 모르게 팔을 뻗었다.
“혀, 형….”
“잠깐만, 오지 마.”
명백하게 거리를 두는 말에 울음이 터졌다.
“형….”
가방에서 처방받은 주사기를 꺼내려고 움직였지만 손끝이 떨려 자꾸만 미끄러졌다.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었다.
“잠깐 기다리고 있어, 큰형 부를 테니까.”
큰형을 부른다는 핑계로 작은형이 나를 피해 자리를 뜨려는 게 느껴졌다.
“큰형 부르면, 흡, 형은…? 그냥 갈 거 아, 냐?”
울음 섞인 목소리가 듣기 싫게 갈라져 튀어 나갔다.
“지훈, 아.”
“기다려봐, 나, 주사 맞으면… 괜찮아, 지니까, 흑….”
내 뜻과 다르게 주사기가 들어 있는 케이스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줍기 위해 바닥에 주저앉자 시야에 작은형 다리가 들어왔다.
주사기를 주우려던 손이 방향을 바꿔 나도 모르게 형 바지춤을 붙잡았다.
“가지 마… 형, 집에서 나가지 마… 나한테서, 흡, 떨어지지 마, 싫어….”
눈물이 뚝뚝 떨어져 형 바지를 적셨다. 머리에 열이 몰리면서 몸이 붕 떠올랐다.
이렇게까지 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이러면 나한테 더 정이 떨어지는 게 아닐까 싶은 순간 형이 몸을 낮췄고 내 턱이 붙잡혔다.
시야가 위를 향하자 새까만 눈동자와 눈이 맞았고 다음 순간 입술이 닿았다.
내 입술 탓인지 마주 닿은 입술도 뜨겁고 말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