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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자 창밖의 하늘이 검은색이었다. 얼마나 했고 얼마나 잔 것인지 감이 안 왔다. 몸이 나른해서 힘이 제대로 안 들어갔다.
냄새는 여전히 나지만 정신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다. 방향제처럼 은은하게 감도는 정도였다.
이불을 들춰 아래를 보자 팬티와 셔츠가 입혀져 있었다. 내가 자는 사이 정민이 몸을 닦이고 갈아입힌 것 같았다.
이건 무슨 환자도 아니고.
“일어났어?”
문이 열리고 정민이 방 안으로 성큼 들어와 코트를 벗어 옷장에 걸었다. 단숨에 향이 짙어졌지만 많이 싸서 그런지 발기는 안 했다.
“어디 갔다 와?”
몸을 일으켜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댔다. 일어나고 싶었는데 허리가 울려서 더 움직이는 건 무리였다.
“약국 갔다 왔어.”
“아.”
“열은 좀 어때?”
정민의 손이 내 이마를 짚었다. 차가운 손바닥에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가 이내 그 온도가 마음에 들어 얌전히 대고 있었다.
“내 손이 차가워서 잘 모르겠다.”
“괜찮아, 좀 나른하긴 한데 열은 없는 거 같아.”
“응, 그럼 다행이다.”
조금이라도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정민이 태도가 전과 다를 게 없었다.
정민인 사고로 넘길 생각이 분명했다. 하긴 어떤 남자가 첫 경험을 형과 한 거로 삼고 싶겠나.
“기다려봐.”
정민이 방 밖으로 나가더니 생수병을 들고 들어왔다. 그리고는 장롱 문을 열어 조금 전 벗어뒀던 코트 주머니를 뒤적였다.
“약 먹어.”
“뭐야?”
흔히 말하는 억제제를 사 온 건가.
“피임약.”
정민이 내민 약을 받아 든 손끝이 덜덜 떨렸다. 없던 일로 하려고 하는 줄 알았는데 피임약을 건네는 걸 보니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정신없어서 안에 쌌으니까, 먹어 두는 게 좋을 거 같아서.”
“으, 응.”
“수건으로 닦긴 했는데 씻을래? 욕조에 물 받을까?”
연이어 날아온 물음에 고개만 간신히 끄덕였다.
안에 싼 건 어떻게 한 걸까. 설마 손가락으로 뺀 건가.
약과 함께 물을 넘기면서 정민의 손가락을 힐끗 바라봤다. 유난히 길어 보이는 손가락이 야하게 느껴졌다.
열이 다시 오를 것 같아 작게 기침하며 정민이 얼굴을 바라봤다.
“그, 네 말 대로면 나도 억제제 같은 거 먹어야 하는 거 아닌가.”
오메가가 됐다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먹는 게 좋은데, 형은 처음이니까 일단 병원에서 검사부터 받는 게 좋아. 괜히 시판되는 거 잘못 먹었다 부작용 일어나면 더 힘드니까.”
“응.”
더 힘들다는 말에 침을 꿀꺽 삼켰다. 아까 낮에도 그렇게 개처럼 헉헉거렸는데, 더 힘들어진다니, 그런 건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내일 같이 병원 가자.”
큰 손이 안심하라는 듯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혹시 모르니까 일은 내일도 쉬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응, 그래야겠다. 핸드폰 좀 갖다 줘.”
정민이 기다렸다는 듯이 핸드폰을 내밀었다. 특별히 연락 올 곳이 없었기 때문에 핸드폰은 깨끗했다.
“물 받고 있을게.”
일부러 자리를 피해 주는 것처럼 정민이가 방에서 나갔다.
혼자 남은 나는 머릿속으로 전화해서 할 말을 정리한 뒤 아르바이트로 시작해서 이제는 직원이 된 카페 사장님한테 전화를 걸었다.
몸이 너무 아파서 내일 병원에 가야 할 것 같다고 사정을 설명하자 사장님은 몸조리 잘하고 병원 다녀와서 연락 달라고 했다. 상태가 악화되면 좀 더 쉬어도 좋다는 뉘앙스였다.
일손이 필요하면 동생에게 부탁하면 된다는 말에 사장님한테 동생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사실 세상에 동생이라고 부를 사람은 많다. 아는 동생, 친구 동생, 후배도 뭐 동생일 수도 있고. 물론 나는 동생이라고 하면 정민이 밖에 없지만.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자 정민이 문을 열었다.
“욕실까지 혼자 갈 수 있겠어?”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발이 바닥에 닿는 순간 무릎이 꺾였다. 혼자 갈 수 있다고 한 것이 단숨에 민망해지고 말았다.
“형!”
빠르게 다가온 정민이 내 팔뚝을 붙잡았다.
“내가 데려다줄게.”
단순히 허리를 부축해 준다는 것인 줄 알고 고개를 끄덕인 순간 양발이 바닥에서 떨어졌다.
“어, 읏?”
“목 잡아.”
힘든 기색도 없이 양팔로 나를 안아 든 정민이는 그대로 욕실로 향했다. 욕조 바로 옆에 얌전히 내려 줄 때까지 나는 아무 말도 못했다.
언제 이렇게 큰 걸까. 나를 번쩍 들 수 있을 정도로 힘이 세진 줄은 몰랐다.
“형, 살 좀 찌는 게 좋겠어.”
“어, 어?”
“아까 볼 때도 생각했지만 벗겨 놓으니까 너무 말라서 놀랐어.”
“야, 무슨 소리를, 아니, 일단 알겠으니까 나가 있어.”
너무 태연스럽게 아까 일을 언급해서 얼굴을 보기 민망했다. 정민인 내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작게 끄덕이고는 욕실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자마자 옷을 벗고 물이 반 정도 찬 욕조에 들어갔다. 내 몸이 뜨거워서 그런지 욕조의 물이 미지근하게 느껴졌다.
무릎을 접어 양팔로 끌어당겨 안고 턱을 댔다.
정민이 태도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어떻게 대해야 할지 속이 복잡했다.
내가 너무 유난인 걸까. 원래 알파랑 오메가 사이에서 일어나는 흔한 일인가.
만약 그런 거면, 그게 정말 흔한 일이라면, 정민이는 혹시 경험이 있는 걸까. 하긴 형한테 첫 경험을 일일이 말하는 것도 좀 웃기지만.
그래도 이제까지 정민이 처음은 다 내가 봤는데….
아니지, 그렇다고 섹스하는 걸 보는 것도 웃긴 일이지. 동생 섹스를 참관하는 형은 정신병자나 다름없다.
“그래도 말은 해 줄 수 있잖아.”
머리로는 이해하는 척했으나 가슴으로는 전혀 이해하지 못해서 수면 위로 불만이 툭 튀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