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화 〉87화 혁명군
“이라유님.”
나는 대기실에 있던 수십 명의 사람들이 다음 게임으로 들어갈 때까지 잔뜩 봉사해야했다. 바닥에 누운 채로 온갖 구멍에서 정액을 흘리고 있을 때, 웬 정장을 차려 입은 사내가 내게 와서 말을 걸었다.
“하아....하아....넌 뭐야....”
재수 없게 선글라스까지 끼고 있다. 비밀 요원 같은 건가.
“저희 사장님께서 이라유님을 찾으십니다.”
“좆까, 꺼져.”
나는 정액 범벅인 채로 그를 위협했다.
하지만 그는 내 말을 듣지 않았고, 똑같이 정장에 선글라스 차림인 덩치들을 불러서 나를 부축했다.
누군가가 나를 찾는다고 하면 다음에 일어날 일이 너무 뻔했다.
이제 막 벌어졌던 보지와 항문이 쪼그라들기 시작했는데, 다시 범해질 준비를 해야한다.
하아....
그렇다고 반항할 기력이 남아 있는 것도 아니었다. 괜히 이기어검술을 써서 체력이 다 빠진 대다가 테드놈이랑 대기실 선수들한테 잔뜩 범해지기까지 해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VIP실’
내가 도착한 곳 문에 그렇게 쓰여 있었다.
예전에 투기장 도시에서 나를 후원했다던 놈들이 있던 방과 비슷한 방이 나왔다.
세련된 인테리어, 고급스러워 보이는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고 사교회를 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부자들.
또 나는 이 변태 작자들의 장난감이 되는 건가 자포자기 하고 있을 때, 한 사내가 다가와서 타올로 내 몸을 덮어줬다.
“일단 정리를 좀 하고 이야기를 하시지요.”
그가 방의 구석에 있는 문을 가리켰다.
나는 우물쭈물하며 사람들의 눈치를 살핀 뒤, 그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곳은 고급스러운 샤워실이었다.
하아.....좋다....
나는 온 몸의 정액을 씻은 뒤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아 몸을 담갔다. 온 몸의 긴장과 통증이 풀어지며 나른한 기분이 됐다.
반쯤 졸면서 목욕을 즐긴 뒤, 한참 지나서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왔다.
“편히 쉬셨습니까.”
사내들은 전혀 조급해하지 않았고, 나를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는 투로 나를 반겼다.
그리고 그 중 리더로 보이는 사람이 나를 테이블로 안내해서 마주 앉았다.
이들은 단순한 ‘메스 게임’ 후원자들로 보이지 않았다. 리더를 중심으로 뭔가 집단을 이루고 있는 것 같은 눈치였다.
리더가 손가락을 퉁기며 옆에 서 있던 다른 사내에게 눈치를 주자, 그 사내가 내 어깨에 코트를 걸쳐서 반나체나 다름없는 내 몸을 가렸다.
“실례되는 말이지만, 라유님 몸은 자극이 너무 강하군요. 조금 가리는 게 좋겠습니다.”
그가 웃으며 말했고, 나는 능력치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코트를 꼬옥 여며서 몸을 가렸다.
지금 당장은 나를 공격할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후원자가 나한테 무슨 볼일이야?”
내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너무 경계하지 마십시오. 저희는 라유님께 그럴싸한 제안을 하러 불렀을 뿐입니다.”
“그런 놈들이 마지막에 통수 치라고 장난질을 해?”
나는 테드에게 당할 때 후원자들이 돈을 걸었던 걸 떠올렸다.
“그 일에 대해서는 유감입니다만, 저희는 결코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제 채팅 내역을 확인해 보셔도 좋습니다.”
당시에 떴던 메시지가 엄청나게 많았으니, 이들뿐만 아니라 도시 전역에 후원자가 흩어져 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그 사이에 얘들이 끼어 있었든 아니든, 이미 끝나 버린 일이니 이제 와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게 안 죽일 이유가 되는 건 아니니까.
그가 작은 손수건 크기의 휘장을 테이블에 올려놨다.
“저희는 5번 도시 혁명 반군 ‘에메랄드’입니다. 저는 에메랄드의 리더 아울이라고 합니다.”
먼저 자기소개를 하는 걸 보니 약간은 된 놈인 거 같다.
그보다 5번 도시면 여기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는 도시인데, 여기보다 내 집에서 더 가까운 도시였다.
“들어보신 적 있으신지요?”
그가 약간 기대하는 듯한 얼굴로 물었다.
“뭐, 조금.”
언젠가 어느 도시에 내전이 일어났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너무 하찮은 도시였고,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바로 잊어 버렸다.
그게 아직까지 안 끝나고 있었다니 이 자식들도 한심한 놈들이다.
“저희 힘으로는 도저히 전쟁을 끝낼 수가 없어서 세계에 흩어져 있는 강자들을 용병으로 구하고 다니는 중입니다.”
“거기서 살기 싫으면 그냥 다른 도시로 옮겨가면 되잖아?”
나는 별 일 아니라는 투로 대답했다.
물론 모두가 전투직도 아니고, 그곳을 벗어나기 힘든 사정이 있는 사람도 있지만, 전쟁까지 일으켜가면서 그 도시에 남아 있어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게....관리자가 인질을 잡고 있어서 쉽게 도망쳐 버릴 수가 없습니다.”
나는 계속 혼자 다니다보니 간과한 게 있었다. 현실에서처럼 이 게임 안에서 가족을 이루고 사는 사람들이 있었고, 마음이 맞는 사람들을 스스로 고를 수 있다 보니 실제 가족보다 더욱 끈끈하게 연결돼 있는 경우가 많았다.
별로 관심을 두진 않았지만 그 도시의 관리자는 도시 발전을 명목으로 시민들의 자유를 얼마간 뺏어서 노동자로 부려먹으면서 관리하고 있었다.
일종의 뒤틀린 전체주의 같은 거였는데, 현실과 또 다른 게 있다면 여기서는 정말 사람들이 노력한 만큼 도시가 발전하고 개인에게 그 보상이 돌아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가 억압당하고 있지만 굳이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것에 대한 욕구가 크지 않은 사람들은 체제에 순응하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관리자가 사람들에게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정해주고, 그걸 성취하면 보상을 준다.
누군가는 그걸 가축 같은 삶이라고 부르겠지만, 현실에서 가축만도 못한 삶을 살아본 사람들에게는 그것이야말로 인간다운 삶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누군가는 진정한 자유를 위해 싸우고, 누군가는 자유가 없더라도 안락한 삶을 지키기 위해 순응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민들에게 영향을 줄만한 주요 인물들은 교육을 목적으로든, 연구를 목적으로든 가족 중 한 명을 인질 격으로 중앙 관리소에 붙잡혀 있었다.
이 리더라는 작자도 딸을 인질로 붙잡혀 있었다.
아아, 어떤 꼴이 돼 있을지 눈에 선하다.
“우리가 이 세계에 들어와 있는 이유를 망각한 자들입니다. 우리가 이 게임에 들어와 있는 건 진정한 자유를 누리기 위한 것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이대로 놔두면 서서히 게임이 변질돼 버릴 겁니다. 우리는 현실 같은 게임을 하고 싶은 거지, 현실을 다시 한 번 더 살고 싶은 게 아니니까요.”
결국 관리자의 방식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보여서 반군을 만들었고, 인질을 잡히지 않은 사람도 그들의 뜻에 동의하며 오로지 정의감만으로 상당수 참여했다.
“하지만 아직은 힘이 너무 부족합니다.”
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어쨌거나 관리자의 정책은 성공적이었고, 시민들의 자유가 조금 박탈당하고, 도시의 주요 인물들이 가족을 인질로 잡힌 것만 제외하면 경제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발전 속도가 상당히 올라갔기 때문에, 대부분의 시민들은 관리자의 방식에 동조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자유를 되찾겠다는 반군에 대해 반감을 가진 시민도 상당히 많았다.
“그러면 너희들도 그냥 적응해서 살면 되지 않아?”
“그럴 수는 없습니다. 지금 당장은 저희 도시 하나뿐이지만 만약 이 도시가 다른 도시의 관리에 영향을 주기라도 한다면, 다른 도시들도 도시 발전을 명목으로 시민들의 자유를 뺏게 될 것입니다.”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단순히 인질들을 풀어주는 것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세계 평화를 위한 군대다 이 말이네. 대단한 영웅 나셨구만.
하지만 완전히 모르는 체 해버리기엔 아까운 제안이었다. 이 자들의 말을 들어주면 긴 거리를 단숨에 뛰어넘을 수 있다.
용병을 구한다고 했지.
“저희는 ‘메스 게임’과 투기장을 통해 강자들을 모집하고 있습니다. 이라유님은 저희가 오래 전부터 욕심을 내고 있던 인재였습니다.”
그들은 이미 내가 예전 투기장의 챔피언이었다는 걸 알고 있었고, 13번 도시 해방군의 주인공이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메스 게임’ 참가자를 둘러보다가 나를 발견하고 초반부터 쭉 내 모습을 지켜봤다는 것이다.
씨발, 그럼 엉망진창으로 범해지는 것들도 다 봤다는 거 아냐.
나는 새삼 얼굴이 화끈거리며 부끄러워졌다.
“그런 건 사소한 일입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 이라유님을 보고 음란한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씨발 사소한 일이라니. 나는 몇 번이나 차라리 죽여 달라고 몸부림쳤는데.
“그럼 뭐가 중요한 일인데?”
“이 세계를 구하는 일이죠.”
그가 다시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지만, 그렇게까지 거대한 일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도시의 관리자를 끌어 내리는 일이잖아?
이미 한 번 해본 적도 있고, 거창하게 실패해서 호되게 당하기도 했지.
웬만하면 두 번 다시 관리자를 상대로 싸움을 걸고 싶지 않다.
“그래서, 조건은?”
내가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제안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들을 따라 간다면 몇 개의 도시를 건너뛰어서 집으로 가까이 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적당히 잡병으로서 눈치만 보다가 기회를 틈타 열차를 타고 도망쳐 버릴 것이다. 이 자들이 여기까지 와 있다는 건 마족에게 점령됐던 도시와 달리 교통수단까지 통제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니, 충분히 가능해 보였다.
“전쟁에서 승리하도록 도와주시면 엄청난 부와, 도시 관리의 요직을 드리겠습니다.”
“아냐, 그런 거 필요 없어. 확신도 없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 자신도 없고.”
“아닙니다! 13번 도시에서 보여주신 실력이라면 충분히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가실 수 있습니다!”
너는 내가 승리한 것만 보이겠지만, 나는 여성 도시에서 죽음보다 더한 패배를 당한 적이 있다.
“일주일, 딱 일주일만 용병으로 협력해주지. 그 다음은 몰라.”
“끄응....정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죠.”
“그리고 보수는 5번 도시로 같이 데려가 주는 것과, 돈 어느 정도면 돼.”
“그 정도는 충분히 해드릴 수 있습니다.”
그가 고민도 하지 않고 말했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사내들이 잔뜩 긴장해 있었는지, 협상이 끝나자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상 그냥 거절당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나도 거절하고 싶었다.
5번 도시로 직행할 수 있다는 조건이 없었으면 말이다.
그들은 즉시 자기들끼리 작전을 짜기 시작했다. 나는 이 방에서 그들과 함께 있기로 했다.
그들은 단순히 내가 일주일동안 같이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희망적이 된 것 같았고, 나를 어떤 식으로 써먹을지 논의하는 것 같았다.
그래, 내 보지는 놔두고 검만 써주면 그 정도야 해줄 수 있지.
“저, 이라유님, 옷을 좀 어떻게 해주시면 안 될까요?”
젊은 사내 하나가 얼굴을 붉히며 내게 말했다. 나는 코트를 달라는 의미인 줄 알고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서 그에게 건넸지만, 그가 고개를 돌리며 손사래를 쳤다.
“도, 돌려달라는 게 아닙니다. 조금 피부를 가려주셨으면 합니다.”
뭐야, 노출 많은 옷을 나만 입고 다니는 것도 아니잖아. 물론 나라고 노출하고 싶은 건 아니지만.
하지만 이 사내나, 아울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괜히 이 꼴로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는 없으니 능력치가 낮아지더라도 몸을 가리는 게 좋아 보였다.
어차피 상대가 마음먹고 날 제압하려 들면 저항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았고 말이다.
“그럼 나도 코트 하나만 줘.”
“물론입니다!”
그리고 반군의 상징이 그려져 있는 붉은 색의 굉장히 화려한 코트를 받았다. 리더인 아울의 옷보다 더 화려해 보였다.
아니, 나 잡병으로 머리만 채우고 있을 건데.
“아무래도 반군에 용병도 상당수 섞여 있다 보니 거친 자들이 많습니다. 이라유님 몸을 목적으로 접근하려는 자들도 있을 거구요. 그리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메스 게임’을 통해서 이라유님께서 그런 자들에게 저항을 하지 못한다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씨발, 그러니까, 지금 당장 너희들이 나를 덮쳐도 내가 반항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단 말이지? 그런데도 덮치지 않았고?
생각 이상으로 정의로운 자들이었다.
“그래서, 이라유님을 보좌하는 자들을 붙여 드리겠습니다. 이라유님보다는 한참 약하지만, 그런 상황을 막아줄 수는 있을 겁니다.”
“저, 사우스입니다.”
아까 나에게 옷을 어떻게 좀 해보라고 했던 쑥맥 사내였다. 여전히 부끄러워하는 얼굴인데 믿을 만할까.
“페넬로페입니다.”
구석에서 존재감 없이 서 있던 여자가 나에게로 와서 소개했다.
하아....결국 또 이렇게 되는 건가. 눈에 띄어서 좋을 일이 없는데, 모두 나를 가만 놔두질 않는다.
물론 내가 너무 강해서 이러는 거였기 때문에 약간 기분이 좋긴 했다.
“그럼 이동하시죠. 일주일밖에 없으니 당장 이동하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아, 나는 단거리 열차밖에 못 타.”
“네? 왜죠?”
모두가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사정이 있어. 좋아, 일주일에서 하루 더 일해 줄 테니, 그냥 단거리 열차로 이동시켜줘.”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단거리 열차를 몇 번 갈아타며 5번 도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모든 비용을 그들이 내줬고, 객실에서도 호위가 붙어 있었기 때문에 상당히 많은 거리를 쉽게 이동했다.
좋아, 잘 풀리고 있어.
목적지에 거의 도착했을 때 나는 신나서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