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202화 - 完 -
주윤문이 죽은 이후.
관과 무림은 ‘하나의 암중단체’가 끼칠 수 있는 ‘해악’이 어디까지 커질 수 있는지를 확실하게 체감했다.
일이 재발하는 걸 방지하고 싶었던 관과 무림은 연합하여 대대적인 암중단체 수색 작업에 돌입했다.
처음에는 경험이 부족해서 암약하는 흑도를 찾아 없애는 것이 한계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경험이 쌓일수록 관무연합은 점점 위험도가 높은 암중단체를 찾아 없앨 수 있게 됐다.
관무연합의 작전이 1년째에는 혼천회와 규모와 능력 면에서 비슷한 조직을 찾아내어 없애는 활약까지 했다.
덕분에 노난 건 백서휘였다.
관무연합의 작전으로 1년 만에 중원의 암중단체 8할이 절멸해서 수호문주로서의 할 일이 거의 사라졌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점이 있다면 백서휘는 병석에 누워 있어서 이러한 일이 일어난 걸 전혀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드르륵!
문이 옆으로 밀리며 종리연이 수건들과 대야, 따뜻한 물이 든 양동이를 가지고 들어왔다.
그녀는 물건들을 내려 두고 백서휘의 몸을 이리저리 살펴봤다.
다행히도 그의 몸에는 욕창 같은 것이 없었다.
“그거 아세요? 이렇게 욕창 없는 거 확인할 때마다 되게 보람을 느끼는 거? 하아~ 이렇게 말해도 못 들으시겠죠.”
미소 띤 얼굴로 말하던 종리연의 얼굴에 수심이 어렸다.
그녀는 수건에 물을 묻혀서 정성스레 백서휘의 얼굴과 몸을 닦았다.
“됐다. 오늘은 이걸로 끝이에요. 이제 자세를 바꿔드릴게요.”
종리연은 백서휘의 몸에 욕창이 생기는 걸 방지하기 위해 자세를 조금 전과 다른 식으로 취하게 했다.
“관주님께서 무슨 재미난 꿈을 꾸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깨어나셨으면 좋겠어요. 다들 걱정이 점점 커지고 있거든요. 누구도 관주님이 이렇게 될 거라고 상상하지 못했거든요. 그래서 그런가, 되게 낯설면서 무서워요. 이러다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깨어나지 못하고 영영 못 깨어…… 아, 이건 잊어주세요. 저도 모르게 입에서 나온…….”
“싫어.”
자기 목소리만 존재하던 곳에서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종리연은 화들짝 놀라 뒤로 몸을 날렸다.
“꺄악!”
“시끄러워.”
“저, 정말 관주님이에요?”
“그럼 너랑 나 말고 여기에 누가 있는데.”
어느새 눈을 뜬 백서휘가 종리연을 보며 풀어 헤쳐진 옷을 제대로 고쳐 입었다.
“의, 의원을 불러올게요. 아니, 가족분들을 불러오는 게 맞…….”
“아무도 부르지 말고 유소화만 조용히 불러와.”
“그분 없어요.”
“없다고? 왜?”
“관주님이 만든 정보동맹에서 일하는 중이라 북경에 있어요.”
“아, 그랬지. 그럼 누가 좋을까. 내가 쓰러진 이후로 있었던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는 인물로…….”
“제가! 제가 할게요!”
“네가?”
“예.”
“음…… 좋아, 한번 해봐.”
“관주님이 정신을 잃으신 날 이후의 시점부터 얘기하면 되는 거죠?”
“그래, 무림 정세부터 가족들, 나랑 친분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됐는지 얘기해 주면 돼.”
“먼저 무림 정세는…….”
종리연은 백서휘에게 1년 동안 있었던 암중단체 색출 작업에 대해 말해 주었다.
“덕분에 할 일은 줄었네. 좋아, 이제 가족들이랑 나랑 친한 사람들에 대해 말해 봐.”
“가족분들은 정 학사님, 아니, 관주 대리님께서는 열심히 학무관의 일을 하고 계시고, 백 사범님은 지금 임신 중이세요.”
“뭐? 임신 중? 셋째?”
백서휘가 화들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
“네.”
“낳은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셋째라니…… 아! 그냥 이렇게 듣는 것보다는 만나서 본인한테 이야기를 듣는 게 낫겠다. 설명은 그만해도 좋아.”
“나, 나가시려고요?”
“왜? 몸 때문에? 그거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지금 내 몸 상태는 최상이니까.”
“그렇지만…….”
“내 몸과 관련된 문제니까 내가 알아서 할게. 알았어?”
“……네.”
“일단 누나한테 먼저 가봐야겠다.”
백서휘는 빠른 걸음으로 백은하가 있을 법한 곳으로 걸어갔다.
침실에 달린 종을 울리려는데, 식당 쪽에서 아이가 우는 소리와 백은하가 달래는 소리가 들려왔다.
‘식당에 있구나.’
백서히는 바로 방향을 바꿔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에는 백은하가 둘째 조카에게 이유식을 먹이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딱 한 번만 더 먹으면 돼. 이것까지만 먹자. 옳지. 잘한다. 자, 한 번 더…….”
“으아아아앙!”
“그렇게 해서 애가 먹겠어? 줘봐.”
백은하는 어느새 다가온 백서휘에게 무심코 이유식 그릇과 숟가락을 줘 버렸다.
“자, 독수리 날아간다. 어? 독수리가 먹이를 발견했네. 먹이가 어디 있냐면…… 여기!”
백서휘는 숟가락을 새가 비행하는 것처럼 움직이다가 둘째 조카의 입에 쑥하고 넣었다.
“꺄르륵!”
“봤지?”
“너……!”
백은하는 아무렇지 않게 웃고 있는 백서휘를 보며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여전히 누나는 울보구나.”
“흑흑흑! 이 바보야! 왜 이렇게 늦게 일어났어! 걱정했잖아!”
“어쩌다 보니?”
자격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만든 용안은 영(靈)과 육(肉) 모두에 큰 타격을 주었다.
영에 난 상처를 회복하려면 긴 시간이 필요했고, 망가진 육을 회복하려면 용혈을 불릴 필요가 있었다.
백서휘의 무의식은 그 둘 모두를 해결하려는 방법을 ‘심상 세계’에서 찾았다.
무의식이 구축한 심상세계에서 백서휘는 문자 그대로 도를 닦으며 시간을 보냈다.
영과 육을 동시에 회복할 유일한 방법은 아난타가 알려준 ‘도를 닦는 것’ 말고는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현실과 시간 축이 다른 심상 세계에서 도를 닦으면서 백서휘는 주윤문과의 전투에서 얻은 깨달음도 체화했고, 영과 육이 회복한 이후에 어떻게 살지도 결정했다.
“왜 울고 그래.”
“힘들게 다시 만났는데 또 너를 잃을까 봐 걱정했어. 흑흑흑! 의원들은 그냥 잠을 자는 것이니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흑흑흑! 한 달이 넘고 석 달, 일 년간 계속 잠을 잔다고 생각해 봐.”
“……내가 살려면 심상 세계로 가는 수밖에 없었어. 그래서 오래 잤던 거야.”
“심상 세계?”
백서휘는 심상 세계가 대충 어떤 개념인지 백은하에게 설명해 줬다.
“시간 축이 다르다고? 그럼 넌 거기서 몇 년을 있었던 거야?”
“처음 3년까지는 셌는데 그 이후로는 안 셌어. 그래도 대충 시간을 따져보면…… 심상 세계 속 시간으로 100년 정도 있었겠네.”
“100년이나 혼자서……?”
“혼자긴 한데 혼자가 아니었어. 내 기억을 바탕으로 만든 거지만 누나도 있었고, 아버지랑 어머니도 있었고, 조카들도 있었고, 오룡단도 있었고, 제자들도 있었고…… 아무튼 많이 있었어. 그래서 외롭진 않았으니까 그렇게 안쓰럽게 보지 않아도 돼.”
백서휘의 말을 듣더니 백은하가 더 서럽게 울었다.
“흑흑흑흑!”
“계속 이렇게 울면 대화할 수가 없잖아. 나한테는 진짜 사람과의 대화가 절실하다고. 아! 말실수했네. 아무튼 울지 마. 계속 이렇게 울면 나는 누나 말고 다른 사람을 만나러 갈 수밖에 없어.”
“흑흑! 그칠게.”
백은하는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옷소매로 닦았다.
“자, 이제 밀린 이야기나 좀 해줘. 나한테 하고 싶었던, 하고 싶은 그런 이야기들 있잖아. 뭐, 지금 가진 셋째에 관한 이야기거나…….”
“알았어. 해줄게.”
백은하는 셋째 조카를 가진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정수련이 학무관에서 활약하는 이야기까지 정말 쉬지 않고 이야기했다.
“이쯤에서 끊고 나머지는 저녁 식사 때 이어서 하자.”
“왜?”
“오룡단이랑 제자들도 보러 가봐야지.”
“아! 그럼 이따 저녁에 봐. 맛있는 거 해놓고 기다릴게.”
“그래.”
백서휘는 식당을 빠져나와 학무관에 있는 오룡단 전용 휴게실로 향했다.
휴게실에는 ‘휴식’이 아닌 ‘일’을 하는 제갈선우가 있었다.
‘저놈 경지가 올랐네? 1년 사이에 뭔 일이 있었던 건가?’
백서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조용히 제갈선우가 앉아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크흠!”
“지금은 바쁘니까 조금만 이따 얘기하자.”
“크흠흠!”
“이따 얘기하자…….”
제갈선우가 중저음의 목소리로 말하며 고개를 들었다.
백서휘가 히죽 웃으며 그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니까…… 흐어억! 과, 관주님? 여, 여길 어떻…….”
깜짝 놀란 제갈선우는 자기도 뭐라고 말하는지 모를 정도로 횡설수설했다.
그러다가 잠시 말을 멈추고 심호흡을 여러 번 해서 정신을 다잡았다.
“이렇게 돌아다니셔도 괜찮은 겁니까?”
“왜 안 되는데?”
“몸 건강이…….”
“최상의 상태니까 걱정 안 해도 돼.”
“그래도 1년 동안 누워 계셨으면 근육이며 살이…….”
“잘 봐.”
백서휘는 팔을 걷어 꽉 찬 알통을 보여줬다.
“벼, 별 이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럼 돌아다녀도 되는 거지?”
“그건 제가 가부를 결정할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하하.”
“그렇긴 하지. 그보다 무슨 일을 하고 있었길래 그렇게 집중하고 있었던 거야?”
“아! 저희 오룡단과 황천익 대협의 봉급과 업무와 관련된 문제 때문에 관주 대리님께 드릴 서류를 점검하고 있었습니다.”
“뭐가 문제였던 건데?”
“일단 저희 소속이 관주님 아래긴 하지만 학무관 소속은 아녔지 않습니까.”
“그렇지.”
“봉급을 주고 업무를 지시해 줄 관주님이 쓰러지시면서 저희랑 황 대협 존재가 좀 애매해졌습니다.”
백서휘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팔짱을 꼈다.
“그래서 저희는 살길을 도모하고자 학무관에 임시로 강사가 되어 일했는데 그 봉급이 다른 사범들의 절반 수준이라…….”
“그 봉급을 올리려고 서류를 꾸몄던 거야?”
“비슷합니다. 사실 저희 수준을 생각하면 그 봉급이 터무니없이 적지 않습니까. 저희 오룡단은 초절정 고수 둘에 절정 고수 셋이고, 황천익은 화경의 무인인데…….”
“잠깐만, 초절정 고수 둘에 절정 고수 셋? 황천익은 화경?”
전혀 예상도 못 했던 소식을 접하게 되자 백서휘가 깜짝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아! 다들 관주님이 가르쳐주신 걸 열심히 수련하다 보니 경지가 올랐습니다.”
“1년 만에 오른 걸 보면 정말 열심히 수련했나 보네.”
“이건 진짜 자신 있게 ‘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그 경지가 있다 보니 다른 사범들보다 적은 수준을 받기도 좀 그렇고, 아예 정식으로 사범이 돼서 임금 협상을 제대로 하는 편이 낫겠다 싶어서 서류를 꾸미던 중이었습니다.”
“초절정에 오른 건 당기준이랑 황보정석이지?”
“그 둘 말고는 사실 무인으로서 잠재력을 가진 게 남궁 동생 정도 아니겠습니까.”
“그렇긴 하지.”
“아,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남궁 동생은 지금 초절정의 경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뭐? 걔가?”
“일 년 동안 정말 많은 일이 있었고 그 일들을 겪으니…… 아니, 이건 직접 다른 이들한테 듣는 게 낫겠습니다.”
제갈선우는 웃더니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서류를 삼매진화로 다 태웠다.
“그건 왜 태워?”
“관주님이 일어났으니 저희는 다시 관주님 밑으로 들어가야죠.”
“아, 그러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당기준과 황보정석, 남궁민이 들어왔다.
그들은 백서휘를 보자마자 깜짝 놀라서는 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허억!”
“헉!”
“흡!”
“왜 셋만 와? 모용진은 어딜 가고?”
백서휘는 앞에 있는 세 사람에게 질문했는데, 대답은 뒤에 있는 제갈선우에게서 들려왔다.
“모용진은 지금 관주님의 제자들이랑 있을 겁니다.”
“내 제자들이랑? 왜?”
“그 애들 처지도 저희랑 다를 게 없어서 모용진이 자처해서 그 애들과 수련하고 있습니다.”
“다를 게 없다니? 아!”
얼마 가르침을 받지도 못했는데 스승이란 놈이 쓰러져서 언제 일어날지 모르니 제자들 입장에서는 죽을 맛이었으리라.
‘나를 스승 삼았다는 게 방방곡곡 알려졌으니 다른 스승을 섬기지도 못하고 속앓이하면서 계속 시간만 보내야 했겠지.’
백서휘는 세 제자를 제대로 챙겨야겠다고 결심했다.
“모용진이 무공을 가르치는 거야?”
“가르치기보단 같이 수련하는 입장입니다. 모용진이 관주님의 제자들이 배운 무공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기도 하고, 관주님이 스승이니 함부로 가르칠 수도 없으니까요.”
“그러네. 음…….”
백서휘는 팔짱을 끼고 회복한 이후에 살려고 했던 삶을 떠올렸다.
‘나도 행복하고 주변 사람들도 행복하게 만드는 삶을 살려고 했지. 근데 그러려면 마음속에 품은 소망을 좀 들어봐야 할 것 같은데…… 가족들 소망은 이따 저녁 식사 때 듣기로 하고, 일단은 이놈들 소망을 들어보고 제자들에게 가봐야겠다.’
백서휘는 놀라서 입을 벌리고 있는 세 사람에게 앉으라고 손짓했다.
세 사람은 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너희들 원하는 거 있냐?”
“저, 저희는 관주님이 건강히…….”
황보정석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그런 아부 들으려고 한 게 아니고 진짜 너희들한테 있는 소망을 들으려고 한 거야. 내가 죽다 살아난 이후에 마음가짐에 좀 변화가 생겼거든.”
“아부가 아니라 진심…….”
“바쁘니까 소망이나 빨리 말해.”
“그 소망을 말하면 어떻게 되는데요?”
가만히 지켜만 보던 남궁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뤄질 수 있도록 도와줄 거다. 참고로 온 힘을 다해 들어준다, 이런 건 아니야. 그냥 여유 있을 때 들어주는 정도니까 잘 생각해서 말해.”
“저는 아시니까 말 안 할게요.”
“안다고 내가? 네 소망을? 아! 할아버지 관련한 그거 말한 거야?”
남궁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남궁민 너는 넘어가고, 당기준이랑 황보정석, 제갈선우 너희들 말해 봐.”
“저는 나중에 말하면 안 되겠습니까?”
“나중에 언제?”
“소망이 생기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의 삶에 만족하나 보네?”
“예.”
제갈선우가 활짝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나머지 둘은?”
당기준이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저는 있습니다.”
“뭔데?”
“문파를 열고 싶습니다.”
“잠깐만, 문파?”
“지금 당장은 아니고 관주님이 저희에게 자유를 주셨을 때, 그때 만들고자 합니다.”
“그럼 당장 이룰 건 아니란 거네?”
“예.”
“나 질문 있어!”
갑자기 반말하는 걸 보니 그새 남궁민에서 남궁혁으로 인격이 바뀐 모양이었다.
“질문?”
“생각해놓은 문파 이름이나 문파의 목표, 이념 이런 것들이 궁금해서.”
“문파 이름은…… 당문(唐門)이다.”
“사천당문은 사라졌잖아?”
“사천당가(唐家)를 말하는 거라면 틀렸다고 말하고 싶다. 그들은 외부인이 아닌 혈족들에게만 무공을 전수했어. 진정한 의미에서 문파라고 할 수 없지. 하지만 난 달라. 나는 문하생을 받아서 가르칠 거다.”
당기준이 어금니를 악물고 말했다.
“지금부터 내가 하나씩 도와주면 자유를 줬을 때 바로 개파할 수 있겠네. 그럼 당기준은 그걸로 하고. 황보정석 너는?”
백서휘의 시선이 당기준에게로 갔다가 황보정석에게로 향했다.
“뭐든 다 되는 겁니까?”
“온 힘을 다해 도와줘야 하는 건 안 돼. 나도 내 삶이 있잖아.”
“관주님이 마음만 먹으시면 아주 쉬운 겁니다.”
“뭔데?”
“저에게 걸린 제한을 완전히 풀어주십시오.”
황보정석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오룡단을 떠나겠다는 거야?”
“아, 그건 아닙니다.”
“그럼?”
“도박이나 여타 제한들 말입니다.”
“좋아, 풀어주지. 대신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가는 일을 하면 안 돼. 돈을 빌려서 안 갚는다든가.”
“아!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러면 제한을 풀어줄게.”
“감사합니다.”
“그럼 다 소망은 다 말한 거지?”
“예.”
“난 이만 제자들한테 가본다.”
이 주변에서 같이 수련할 만한 장소라고 해봐야 자신이 제자들을 항상 가르쳤던 곳 말고는 없었다.
백서휘는 전력을 다해 항상 수련했던 연무장으로 달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그곳에는 모용진과 진운, 금태평, 서강호가 1 대 3으로 대련을 하고 있었다.
네 사람의 이마에 땀이 많이 맺힌 걸 보면 시작한 지 좀 된 것 같았다.
‘구경을 좀 해볼까.’
서강호가 천왕중보로 모용진에게 다가가 붕천대력검을 휘둘렀다.
모용진은 팔을 교차시켜서 방어한 후 앞으로 달려가 그에게 무영각을 날렸다.
서강호가 놀란 얼굴로 검을 회수하려고 했지만, 무거운 검이기도 하고 회수 시기도 놓쳐서 공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푸우-!
서강호가 약간의 피를 내뱉으며 뒤로 날아갔다.
금태평이 진운과 전음을 나누며 눈을 맞추었다.
‘뻔하지. 뭐. 한 놈이 시선을 끌면 한 놈이 일격을 날리는 그런 거겠지.’
대련이 지루하게 흘러가는 듯하자 백서휘가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모용진도 진운과 금태평이 대충 어떤 식으로 나올지 알고 있는 듯했다.
‘금태평이 시선을 끌겠지. 그렇게 하기 더 적합한 무공을 가졌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금태평은 호왕무로 모용진의 시선을 빼앗으려고 노력했다.
‘자, 이제 모용진이 딴 데 보는 척하면 바로 달려들겠지. 그래. 이럴 줄 알았다니까.’
진운은 딱 백서휘가 생각한 순간에 뇌룡보를 극성으로 펼쳐 접근했다.
‘반격의 적기는 지금인데…….’
모용진은 진짜 무공이 많이 늘었는지 천뢰신창을 펼치려는 그 순간에 진운에게 몸통 박치기를 날렸다.
진운 마저 무력화되자 금태평은 항복을 선언했다.
“오늘도 즐겁게 복기하는 시간을 가지자! 매번 말했지만 남 탓은 절대 하지 마.”
모용진이 남 탓 하는 모습을 엄청나게 많이 봐왔기에 백서휘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가장 먼저 고칠 점은 생각을 안 한다는 거야. 너희가 지금 한 작전 내가 몇 번이나 봤을 것 같아? 그 작전의 성공률은?”
모용진이 열과 성을 다해 고칠 점을 얘기했다.
너무 맞는 말이라 세 사람은 제대로 반박하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확실히 시선을 끌지 못할 거라면…… 응? 왜 들 그런 눈으로 봐?”
백서휘가 모용진과 세 제자를 보며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지었다.
“관주님!”
“스승님!”
“다들 오랜만이다.”
고립무원의 처지에 처했었기에 세 제자의 기쁨은 엄청나게 컸다.
“무공은 일단 지금 말고 좀 지나서 본격적으로 가르쳐줄게. 지금은 고칠 점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자.”
“네!”
백서휘는 중간부터 본 대련이지만 마치 처음부터 본 것처럼 모용진과 세 제자의 문제점을 잡아냈다.
“다들 자기가 가진 문제점이 뭔지 알았지?”
“예!”
“그럼 이제 소망을 얘기해 봐.”
“소망이요?”
“왜? 없어?”
“딱히 없어요. 그냥 스승님이 계속 건강하셨으면 좋겠어요.”
진운의 말에 나머지 세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람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일일이 알 수는 없지만, 고생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진짜 소망이 그게 끝이야? 말하면 내가 힘을 써서 도와준다니까?”
“진짜 없어요.”
“아니, 분위기에 취해서 그러지 말고 다시 생각해 봐. 남들 따라서 결정하지도 말고.”
“전 없어요.”
“저도.”
“저도 없어요.”
“전 진짜로 스승님이 건강하셨으면 해요.”
네 사람이 사실을 말하고 있다는 게 눈빛에서 전해져 왔다.
백서휘는 진심으로 감격해 울컥했지만, 그 사실을 티 내지는 않았다.
“그럼 소망은 없다고 치고. 뭐 간단한 부탁? 그래, 부탁이라고 하자. 그런 것도 없어?”
“그것도 없어요.”
“진짜?”
네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참고로 말하자면 다른 오룡단원 중 둘은 소망을 말했어. 한 명은 다음에 말하기로 했고, 다른 한 명은 내가 알고 있는 소망이었어.”
“그, 그럼 저는…….”
모용진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기회를 놓친 거지.”
“아아아악!”
모용진이 머리를 쥐어뜯는 모습을 보였다.
1년 사이에 그도 완전히 어른이 된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닌 것 같았다.
“한 번 더 기회는…….”
“없어. 내가 그래서 몇 번이고 물어봤잖아.”
“미뤄둘 수 있는 줄 알았다면 미뤄뒀을 거예요.”
“쏘아진 화살은 되돌릴 수 없단 거 몰라?”
“하아.”
백서휘는 미소 띤 얼굴로 다시 세 제자 쪽을 바라봤다.
“너희들도 후회해?”
다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이들이 아직 욕망에 물들지 않은 어린아이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럼 오늘은 이만 가볼게.”
“벌써요?”
“가족들이랑 저녁 식사 같이 하기로 했거든.”
“아!”
“내일부터는 예전처럼 빡빡하게 가르칠 거니까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하고 와.”
“헤헤! 그럼 저는 이제 안 와도 되겠네요.”
“너도 수련받고 싶으면 오고.”
모용진을 가르치는 건 자신이 없는 동안 제자들을 돌보준 것에 대한 일종의 보상이었다.
“예!”
“그럼 난 가본다.”
백서휘는 다시 장원을 향해 전력으로 응룡비천신법을 펼쳤다.
장원과 한참 거리가 떨어져 있는데도 맛있는 냄새가 풍겨왔다.
‘뭘 얼마나 많이 만들길래 이러는 거지?’
감각을 증폭하게 아닌데도 이렇다 보니 괜히 기대됐다.
백서휘는 장원의 문을 열어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
“생각보다 일찍 왔네.”
“그래도 가족이 더 중요하니까.”
다시 눈물이 차오르는지 백은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매형이 너 찾더라.”
“매형이? 날? 왜? 인사를 안 해서 그런가?”
“다른 문제 같았어.”
“식당으로 가면 돼?”
“매형 집무실로 가.”
“알았어.”
백서휘는 정하진이 기다리는 집무실로 가서 종을 울렸다.
“들어오게.”
정하진의 목소리는 오랜만에 들어서인지 조금 낯설었다.
백서휘는 정중히 허리 숙여 인사하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아내에게 들었네. 심상 세계란 곳에 있었다고?”
“아, 예.”
“잘 돌아왔네.”
“하하.”
백서휘가 멋쩍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내가 부른 건 자네에게 줄 것이 있어서라네.”
“줄 것이요?”
“관주 대리가 하면 안 될 일일 것 같기도 하고, 자네에게 의미가 있을 것 같아 그냥 맡아만 두고 있었네.”
“맡아만 두고 있었다고요? 뭘요?”
“황제 폐하의 하사품.”
“예? 저한테 하사품이 내려왔다고요?”
백서휘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편의에 의해 옹립한 것이기에 자신이 충신이라기도 뭣했다.
그냥 데면데면한 사이라 일이 끝났으니 다시는 볼일 같은 건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하사품을 내려? 왜?’
자신이 계속 고개를 갸웃거리니 정하진이 설명을 이어갔다.
“중원의 운명을 구해서 주는 것이라고 들었네. 혼천회 관련해서 자네만 한 공을 세운 영웅이 없기도 하고…….”
“그럼 감사히 받긴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 하사품이란 거 뭡니까?”
“말로 하는 건 감동이 덜하니 물건을 직접 보여주겠네.”
정하진은 금고에서 금색 비단에 쌓인 물건을 그대로 백서휘에게 건넸다.
“한번 풀어보겠습니다.”
백서휘는 금색 비단에 쌓인 물건을 풀었다.
새빨간 천에 금색 실로 문구가 수놓아진 천이 두 개가 있었다.
“이건…….”
“두 개 모두 깃발이라네.”
“지, 지금 이걸 걸어도 됩니까?”
“그럼 지금 걸겠습니다.”
“맘대로 하게. 하하하.”
백서휘는 바로 학무관으로 달려가 두 개의 깃발 모두를 올렸다.
노을이 지면서 그 빛이 금색 실에 이리저리 반사되며 문구가 보였다.
천하제일학관(天下第一學館).
천하제일무관(天下第一武館).
백서휘가 야망이 넘치는 눈빛으로 반짝이는 두 개의 깃발을 바라봤다.
‘다음은 고금제일(古今第一)이다!’
<귀환무관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