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199화
“도대체 우리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이냐!”
검객이 핏발 선 눈으로 백서휘를 무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백서휘는 넘치는 여유로움을 표정으로 드러내며 적들의 면면을 감상했다.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꼴을 구경하는 것이 이리 재밌을 줄이야.
말없이 구경만 하고 있으니 검객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
“어서 말해! 우리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산공독을 쓴 거냐? 아니면 술법을…….”
“너희들이 포위했을 때 기독을 하독했다.”
“기독?”
“무색, 무취, 무미, 무향의 독이다. 중독되면 가지고 있는 진기가 모두 흩어지게 되지. 참고로 해독제도 없으니까 해독할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런 말도 안 되는 독이 세상에 있을 리가…….”
“그럼 네 진기가 흩어지는 건 원인이 뭐일 것 같은데?”
백서휘가 살기 어린 미소를 다시 한번 지어 보였다.
“그건…….”
창수는 백서휘의 말을 논파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한 가지 재밌는 점을 알려줄게. 너희들이 당황하지 않고 계속 공격했다면 그래도 승산이 조금은 있었을 거야.”
“뭐?”
“멍청하게 시간을 끄니까 진기만 계속 흩어지잖아. 물론 나로서는 너희에게 고마워해야 할 일이지만 말이야.”
백서휘는 말을 끝내자마자 구천현현보를 극성으로 밟아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당황해서 머저리 같은 모습을 보여줘서 그렇지 그래도 적들은 경지에 오른 자들이었다.
무인과 주술사 가릴 것 없이 백서휘에게 반격할 준비를 했다.
창수가 가진 진기의 반을 담아 창을 쭉 내뻗었다.
그의 공격은 찌르기로 유명한 점창파의 사일검법(射日劍法)보다 훨씬 더 날카로웠지만,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극에 다다른 기술과는 별개로 창에 담은 진기가 너무 적었다.
공격이 실패했을 때를 대비해서 회피할 진기를 따로 빼둔 모양이었다.
자신이 창수랑 동급이거나 하수라면 나쁘지 않은 판단이었을 거다.
하지만 자신은 창수보다 아득한 차이가 나는 고수였다.
그런 상대에게 진기를 아낀다는 건 그냥 목숨을 가져가란 뜻과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공격 방법도 잘못 선택했어. 무기가 창이니 어쩔 수 없긴 한데…….’
점 형태의 공격은 힘이 집중되어 공격력이 강하지만 그만큼 피하기가 쉬웠다.
백서휘는 가볍게 창날을 피한 후 일검관천의 초식을 펼칠 준비를 했다.
미리부터 백서휘의 반격을 대비했던 창수는 따로 빼뒀던 진기를 써서 뒤로 내빼려고 했다.
‘판단을 잘못 내린 죄로…….’
백서휘는 미소 띤 얼굴로 일검관천의 초식을 펼쳤다.
창수가 했던 것과 똑같이 점 형태의 공격이지만 기술, 진기, 힘, 속도 모든 면에서 창수의 찌르기를 압도했다.
‘너는 사형이다!’
백서휘는 창수의 가슴을 꿰뚫은 검을 빠르게 회수한 후, 땅을 힘껏 구르며 구천현현보로 앞으로 나아갔다.
그를 본 주술사는 경악하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진언을 내뱉는 걸 멈추지 않았다.
“옴 다스라 레 카란 인…….”
“흥!”
백서휘는 코웃음 치며 강환을 십수 개 날렸다.
“헉!”
주술사는 그제야 진언을 멈추고 황급히 보호 주술을 걸려고 했다.
‘너무 늦었어.’
강환은 그대로 주술사를 때렸다.
외공도 익히지 않았고, 보호 주술을 거는 게 늦었던 그의 몸은 강환에 의해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남은 건 무인 넷에 주술사 하나인가.’
백서휘는 살아 있는 적들을 주시하며 빈틈을 찾았다.
그때 코끝이 아플 정도로 강한 매화향이 바람에 실려 왔다.
슬쩍 곁눈질로 전장을 보니 화산파의 문주와 매화검수들이 십방매화검진(十方梅花劍陳) 펼치고 있었다.
‘운학도 잘하고 있네.’
걱정을 괜히 했다 싶을 정도로 다들 굉장한 활약을 보여주는 중이었다.
곁눈질하면서 조금 빈틈을 보여줬다고 화경의 고수들은 시체를 파먹는 들개들처럼 달려들었다.
‘옳은 판단이지만 상대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잖아.’
화경의 무인들이 펼치는 공격을 허용해 주기엔 지금까지 백서휘가 쌓은 경험이 너무 많았다.
거기다 의념이 강화된 이후로 천의일기공이 진일보하면서 다른 무공 역시 전체적으로 강해졌다.
‘너희들로는 안 돼.’
백서휘는 광풍번천의 초식으로 바로 앞에 있는 공간을 제압했다.
화경의 무인들이 달려오다 말고 놀라서 뒤로 물러났다.
“죽어라!”
그때 조용히 기회를 보고 있던 주술사가 흑색 불덩이를 백서휘에게 날렸다.
‘목인걸만큼은 아니더라도 꽤 강한 주술사야.’
독령이 신순을 최대로 펼쳐 흑색 불덩이의 위력을 약화했다.
‘신순을 맞으면서 날아왔는데 이 정도라니…….’
날아오는 흑색 불덩이가 지옥의 겁화처럼 느껴졌다.
백서휘는 정신을 집중하고 흑색 불덩이를 향해 검강이 깃든 검을 휘둘렀다.
술법의 근본을 이루는 결합 구조가 검강에 의해 깨끗이 잘려 나갔다.
“아까 일은 우연이 아니었던가.”
“실력이지.”
백서휘는 피식 웃으며 주술사를 향해 강환을 만들어 쏘아 보냈다.
주술사는 소멸하면서 무척이나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자, 이제 남은 건 네 명. 빨리 죽이고 주윤문을 처리하러 가자.’
그때 운태산과 그 부근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갑자기 왜 이런 일이?’
땅이 이리저리 갈라지고 하늘에는 먹구름이 잔뜩 끼었다.
주변의 기운은 미친년 널뛰기하는 것처럼 요동을 쳤다.
백서휘는 본능적으로 주윤문이 승천 의식을 진행했다는 걸 깨달았다.
‘시간이 없다.’
네 명의 무인이 비장한 얼굴로 백서휘의 사방을 둘러쌌다.
운태산을 오르지 못하게 하려고 수를 쓰는 것 같았다.
“나와라.”
“싫다.”
“너희들 지금 주윤문이 무슨 짓을 하는 건지 알기나 해?”
“알아야 할 건 한 가지뿐이야. 곧 우리의 세상이 온다는 것.”
무인들의 눈빛에는 광기와 탐욕이 동시에 어려 있었다.
백서휘는 이놈들을 설득해서 될 일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빠르게 처리하는 게 좋겠어.’
무인들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거리를 조금씩 벌렸다.
애초에 그들의 목적은 승천 의식을 치를 시간을 끄는 것이기에 따라붙기만 할 뿐 막 덤벼오지는 않았다.
“아난타!”
이름을 부르기 무섭게 백서휘의 몸을 타고 흐르는 용혈들이 들끓었다.
눈은 용안으로 바뀌었고, 피부엔 비늘이 덮였다.
관자놀이에 사슴뿔도 조그맣게 났다.
‘여기까지.’
백서휘는 반쯤 진행된 상태에서 용인화를 끝냈다.
반용인이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백서휘를 바라봤다.
“어떻게 그 힘을…….”
백서휘는 반용인이 말을 하는 틈을 노려 회천만일의 초식을 날렸다.
딱 절반만 용인으로 변했을 뿐인데도 진짜로 하늘을 돌리고 지는 해를 잡아당기는 듯한 강한 힘이 검에 담겼다.
콰앙!
반용인은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했지만, 완력부터 경지까지 모든 면에서 백서휘가 더 격이 높았다.
콰드드드득!
백서휘가 내리그은 검은 반용인을 일도양단한 후, 그대로 앞으로 나아가 옆에 있는 도객을 노렸다.
“제기랄!”
도객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대도로 백서휘의 검을 쳐냈다
검이 위쪽으로 올라가려 하자 백서휘는 완력을 써서 검의 진로를 강제로 수정했다.
하늘로 올라가려던 검은 다시 도객의 목을 노렸다.
튕겨냈는데도 검이 계속 다가오자 도객의 눈이 커다래졌다.
“제, 젠장할!”
서걱!
도객의 머리가 무가치하게 땅을 굴러다녔다.
백서휘는 진각으로 도객의 머리를 부순 후 나머지 두 명의 무인을 공격하려고 했다.
두 명의 무인은 빠르게 전음을 교환하더니 각각 동쪽과 서쪽으로 나뉘어 도망갔다.
백서휘는 강환을 쏘아 보내 그들을 죽이고는 바로 운태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꼭대기 부근에 있군.’
안 느끼고 싶어도 느껴질 만큼 기운이 요동치고 있었다.
응룡비천신법을 펼쳐 날듯이 달려가 보니 동굴이 하나 보였다.
‘이 안에서 승천 의식이 이루어지나 보네.’
백서휘는 모든 감각을 증폭시키며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한참을 가니 만년한철로 만들어진 문이 나왔다.
문은 안쪽에서 굳게 잠겨 있어서 열 수가 없었다.
“제기랄! 시간이 없는데…….”
백서휘는 검강이 깃든 검에 경력을 꾹꾹 눌러 담아서 휘둘렀다.
콰앙!
문에 가해진 충격은 동굴로 번져나갔다.
자칫 잘못하면 동굴이 무너져 안에 갇힐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백서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머릿속에서 불필요한 생각을 지웠다.
지금 중요한 건 문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가 주윤문의 승천 의식을 막는 것이었다.
‘제발 좀 뚫려라!’
백서휘는 강렬히 염원하며 검을 힘껏 휘둘렀다.
강렬한 염원은 의념을 강화했고, 강화된 의념은 기의 응집력을 높여 검에 절삭력을 부여했다.
서걱!
만년한철 문이 베어지면서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만들어졌다.
백서휘는 그 길을 따라 기운이 요동치는 곳으로 달려갔다.
‘저기다.’
또 다른 만년한철 문을 만났지만, 이번엔 어렵지 않게 베어냈다.
안으로 들어가니 눈을 감은 채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주윤문이 보였다.
바로 그를 향해 달려가려는데 연무장의 바닥이 심상치 않았다.
바닥에 그려진 생전 처음 보는 문양과 글자들은 은은한 빛을 내뿜었다가 사그라들기를 반복했다.
‘이거 밟아도 괜찮은 건가?’
용안으로 살피니 특별히 위험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주윤문이 감고 있던 두 눈을 떠서 백서휘를 바라봤다.
“늦었구나.”
“꼭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는군.”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둘 사이에 있는 깊은 악연은 서로가 누군지를 알아보게 했다.
“기다리지는 않았지만, 반드시 올 거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다.”
“웃기지도 않은 소리는 집어치우고 승천 의식이나 중지해.”
“인간을 초월해 신이 될 기회를 걷어차라고? 말 같지도 않은 소리 그만하거라.”
“말이 안 통하는군. 이것 말고는 답이 없겠어.”
백서휘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더니 검집에서 검을 꺼내 들었다.
“그게 답이라고? 내 몸에 생채기조차 못 낼 무력으로 어쩌겠다는 것이지?”
“허세가 상당하네.”
“……허세?”
주윤문이 가부좌를 풀고 일어났다.
백서휘는 그와의 거리를 재는 척하면서 용안에 신경을 집중했다.
‘부정력이 강제로 저놈의 영혼의 격을 높이고 있네.’
그래도 괜찮았다.
주윤문이 실시간으로 강해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싸웠을 때 자신이 더 유리했다.
최대한 빨리 끝내겠단 마음을 먹은 백서휘는 구천현현보를 극성으로 전개했다.
잔상조차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른 그의 움직임에 주윤문이 살짝 당황했다.
“아난타!”
주윤문과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백서휘의 몸은 용에 가깝게 변해갔다.
피부를 덮다가 만 비늘이 빼곡하게 채워졌고, 관자놀이에 난 사슴뿔도 길고 단단해졌다.
평범한 인간과 다를 게 없었던 손도 용인의 것으로 변해갔다.
“완전한 용도 아니고 반쪽짜리에 불과한 네게 내가 질 것 같으냐!”
재빨리 강환을 뽑아낸 주윤문은 용인으로 변한 백서휘를 정조준했다.
“죽어라!”
열 발의 강환이 동시에 백서휘를 향해 날아갔다.
“독령! 온 힘을 다해서 기시를 쏴.”
『예!』
쌕쌕쌕쌕쌕!
기시가 빠른 속도로 날아가 주윤문이 날린 강환을 요격했다.
목표물인 백서휘에게 닿기 전에 강환이 터지면서 폭음과 함께 섬광이 번쩍였다.
콰콰콰콰쾅!
주윤문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전투 자세를 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