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197화
백서휘는 목책으로 둘러싸인 진터를 무심히 바라봤다.
진터는 산적들의 산채로 위장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혼천회의 비밀 지부로 쓰고 있는 곳이었다.
‘여기에 본단으로 향하게 해줄 단서가 있을까?’
토벌이 계속될수록 백서휘의 의심은 점점 커졌다.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야.’
토벌하러 가는 혼천회의 비밀 지부마다 고수라고 부를 만한 존재가 없고, 마약에 취한 하수들만이 남아서 인간이 아닌 것처럼 싸웠다.
하수들은 팔이 잘리면 다리로, 다리까지 잘리면 이빨로 토벌하러 온 무인들을 공격했다.
거기다 그렇게 하수들을 죽이고 나서 지부를 뒤지면 단서가 될 만한 게 하나도 나오지를 않았다.
‘승천 의식 한 방으로 역전할 수 있다고 여겨서 이렇게 시간을 끄는 것 같은데…….’
백서휘는 아랫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세게 깨물었다.
시간은 흘러가고 있는데 주윤문은 꼬리조차 보이지 않는 상황.
‘이길 수 있을까?’
그때 청수한 인상의 노인이 목소리에 내공을 담아 외쳤다.
“무림맹의 칼이 무뎌지지 않았음을 증명합시다!”
무림맹 소속의 무인들이 무기를 하늘 높이 들어 올리며 소리를 질렀다.
“혼천회 놈들에게 사도련의 힘을 보여줘라!”
얼굴에 흉터가 가득한 사내가 기다렸다는 듯 사도련 소속 무인들의 사기를 끌어 올렸다.
사도련 소속 무인들은 소리를 지르면서 무서운 눈으로 전방에 있는 산채를 바라봤다.
‘지금 하는 일에 집중하자. 정보동맹에서 어떻게든 찾아낼 거야.’
백서휘가 위에서 아래로 손을 내리긋자 허공에서 날아다니는 검이 산채의 문을 향해 날아갔다.
콰아아앙!
산채의 문이 부서지자 무림맹, 사도련 가리지 않고 모든 무인들이 산채를 향해 뛰어갔다.
그들은 지난 며칠간의 경험으로 마약에 취한 하수들을 효과적으로 사냥했다.
백서휘는 검을 조종해 혼천회 놈들을 갈아 버리면서 위험한 아군들을 도와줬다.
‘누구지? 적은 아닌 것 같은데.’
한계까지 넓혀 놓은 기감을 통해 무인 하나가 이쪽으로 달려오는 게 느껴졌다.
기다리고 있으면 알아서 이쪽으로 오겠거니 생각하며 적들을 죽이는 데 집중했다.
“헉헉! 배, 백 관주님!”
오며 가며 몇 번 봤던 개방도가 다급한 목소리로 백서휘를 불렀다.
“무슨 일이지?”
“본단으로 추정되는 곳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뭐? 어디야?”
“강소성의 운태산(雲台山)으로 추정 중입니다.”
“전력은?”
“혼천회 본단의 전력이라면 아직 모릅니다.”
“아니, 우리 측.”
“발견했단 소식을 듣자마자 전력들을 모두 연운항(連雲港)으로 이동시키고 있습니다.”
“연운항?”
“운태산 근처에 있는 항구 도시입니다.”
“나도 그리로 빨리 이동해야겠네.”
“예, 지휘권을 무림맹 소속의 강호중 대협에게 넘기시고 연운항으로 이동하시면 됩니다.”
“알았다.”
백서휘는 무력을 전력으로 투사해 토벌을 순식간에 끝내고 무림맹 소속 무인에게 지휘권을 넘겼다.
“이제 가기만 하면 되는 건가?”
“연운항까지는 강호중 대협이 인솔할 예정이니 마음 놓으시고 가면 됩니다.”
마지막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던 백서휘는 가족들이 있는 장사에 들렀다가 연운항으로 갔다.
* * *
정파, 사파, 관인을 가리지 않고 연운항에 속속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이걸 의식한 것인지 혼천회에서도 대놓고 다른 지부의 무인들을 불러 모았다.
모두의 운명을 건 전투가 머지않았다는 것을 무인들 모두가 느꼈다.
‘술이 당기는군.’
백서휘는 천환역형공을 펼쳐 얼굴을 바꾸고 주루 안으로 들어갔다.
주루 안에는 손님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자리가…… 없군.’
백서휘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려는데 누군가가 어깨에 손을 걸치려 했다.
반 발자국을 움직여 피하니 황천익이 입을 열었다.
“연운항에 있는 주루란 주루는 술값이 모두 여기랑 똑같다네.”
“그래, 맞아. 어딜 가든 사람으로 가득하다고. 그러니 술이 고프면 여기서 우리랑 합석해서 술을 먹어.”
외눈의 젊은 무인이 백서휘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기감을 넓혀서 살펴보니 두 사람의 말에는 틀림이 없었다.
‘합석하는 게 낫긴 하겠군.’
백서휘는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외눈의 젊은 무인이 피식 웃으며 일행이 앉은 탁자를 가리켰다.
“저기가 우리 자리야.”
외눈의 젊은 무인이 가리킨 곳을 보자 세파에 찌든 중년 여인이 홀짝홀짝 술을 마시고 있었다.
‘저 여인에 황천익이랑 애송이면 진짜 어울리지 않는 조합인데…… 다른 자리도 큰 차이는 없군.’
앞으로 있을 전투가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진 이들을 하나로 묶어준 것 같았다.
“가자, 가자.”
외눈의 젊은 무인 손에 이끌려 세파에 찌든 중년 여인의 옆에 앉았다.
“누님이 좋아할 만한 남자를 데려왔어.”
“이쪽이?”
“왜? 아니야?”
“애송이라 뭘 모르는구나.”
“내가 뭘 모르는데?”
“하는 일이며 성격이 평범한 사람을 좋아한다고 했지. 얼굴이 평범한 걸 바란다고는 하지 않았어.”
“어렵네.”
외눈의 젊은 무인은 백서휘의 앞에 놓인 잔에 술을 따랐다.
지켜보고 있던 황천익이 수염을 매만지다 질문을 던졌다.
“어디 출신인지 물어도 되겠나?”
“사문? 아니면 고향?”
“둘 다 말해 주면 좋겠지만 숨기고 싶으면 숨겨도 되네.”
“사문은 밝힐 수 없고, 고향은 호남성 장사.”
“호남성 장사면 그자의 고향이구만. 내가 얼마 전까지 있던 곳이기도 하고.”
“그자? 누굴 말하는 거지?”
“백서휘 말일세.”
“아.”
“백서휘가 가진 무력에 대해 혹시 들은 얘기 있어?”
외눈의 젊은 무인이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그게 왜 궁금하지?”
“우리들의 유일한 희망이 혼천회의 회주보다 하수면 곤란하잖아.”
세파에 찌든 중년 여인이 육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끼어들었다.
“혼천회의 회주가 얼마나 강한지는 모르겠지만 백서휘가 지지는 않을 것 같은데.”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자가 싸우는 걸 직접 본 적 있어?”
외눈의 무인이 던진 질문에 주변에서 술을 마시던 모든 이들이 귀를 기울였다.
“몇 번 있지. 주작이라고 불린 여자랑 싸운 것도 보고, 장보도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이공간에서 싸웠던 것도 보고, 이번에 토벌하면서도 봤지.”
“잠깐, 장보도 사건이면 황 형도 있었던 곳 아니야? 조금 전까지 하던 이야기가 그거였잖아. 손자가 아픈 것까진 들었던 것 같은데…….”
“민망해서 밝히지 않으려 했지만, 자랑을 좀 하자면 그 백서휘와 일행으로 같이 다니기도 했다네.”
“워~ 진짜야?”
“진짜라네.”
“좋겠다.”
“그때의 경험이랑 백서휘 밑에서 일한다는 게 내 자랑 중 하나라네.”
“잠깐! 백서휘 밑에서 일한다고?”
“그렇다네.”
“백서휘까지는 아니더라도 황 형은 엄청난 고수잖아?”
“민망하지만 그대 말처럼 고수 맞네.”
“황 형 정도의 고수가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 거야?”
“처음엔 호위 임무를 맡았고, 지금은 그의 지시로 혼천회를 상대하는 전투원이 되었네.”
백서휘가 연운항으로 바로 이동하지 않고 장사에 들른 건 마지막으로 가족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때 그는 가족들이 안전하게 지낼 수 있으면서 오룡단과 황천익을 전투원으로 쓸 방법을 떠올렸다.
그 방법은 가족들을 책 속의 세계로 모두 이동시킨 후에 괴력난신의 서를 모처에 숨기는 것이었다.
이 방법을 떠올린 덕에 아군의 고수 전력을 증강시키면서 가족들을 안전하게 만들 수 있었다.
“백서휘 밑에서 일이라니 부럽네. 나는 사도련주 밑에서 일하느라 죽어나는데…….”
“그대는 아직 젊지 않은가. 곧 볕 들 날 있을 걸세.”
“진짜 그랬으면 좋겠다.”
황천익이 외눈의 젊은 무인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외눈의 젊은 무인은 그 술을 마심으로써 약간 있던 우울한 감정을 다 떨쳐 버렸다.
“그나저나 이렇게 많이 싸움을 구경한 사람이 호기롭게 백서휘가 세다고 말한 걸 보면 진짜 강하긴 한가 보네.”
“그래, 진짜 강하다.”
자신의 얼굴에 금칠하는 것 같아 민망하지만 사기를 끌어 올리려면 어쩔 수 없었다.
백서휘는 달아오른 얼굴의 열기를 식히기 위해 잔에 담긴 술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싸구려 화주이다 보니 식도를 타고 내려갈 때 아릿한 느낌을 받았다.
“진짜 백서휘가 그렇게 강하다면 이번 전투의 승리는 걱정할 일 없겠어.”
젊은 무인의 남아 있는 한쪽 눈에는 희망이 강하게 어렸다.
세파에 찌든 중년 여인이 뜨겁게 달아오른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우리가 패배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는 사람 있어?”
“당연한 거잖아. 모든 인간이 작살나는 결말을 맞겠지.”
“진짜 그럴까?”
“진짜 그러니까 그 미친놈들이 별별 짓을 다 한 것 아니겠어? 나야 운이 좋아서 그 별별 짓을 피해갔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니…… 아! 미안!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나도 모르게 그만…….”
외눈의 젊은 무인이 세파에 찌든 중년 여인에게 황급히 사과했다.
중년 여인은 혼천회가 저지른 짓에 피해를 크게 본 것 같았다.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혼천회 놈들은 내 손에 다 죽을 테니까.”
지켜보고 있던 황천익이 술병을 들어 모두의 잔에 술을 따랐다.
다들 말없이 그 술을 마시고 또 마시기를 반복했다.
“나는 이만 일어나겠어.”
백서휘가 떠나려고 하자 황천익이 다른 이들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이쯤에서 그냥 자리를 파하는 게 어떻겠나?”
“완전한 몸 상태로 출전하려면 그러는 게 낫긴 하지.”
“그래.”
다들 경지에 오른 자들이라 그런지 항아리 단위로 술을 마셨는데도 취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모든 전투가 끝나면 여기서 다시 한번 술을 마시는 게 어떻겠나?”
“나는 좋아.”
“나도 찬성.”
황천익이 입을 다물고 있는 백서휘를 보며 물었다.
“그쪽은 어떤가?”
“가능하다면 그러도록 하지.”
백서휘는 짤막하게 말하고는 수뇌부가 모여 있는 본진으로 걸어갔다.
그때 황천익에게서 전음이 날아왔다.
『그대의 무운을 빌겠네. 백 관주.』
백서휘가 살짝 놀란 얼굴로 돌아보니 황천익이 껄껄 웃으며 허리춤에 있는 검을 가리켰다.
“아!”
그때나 지금이나 쓰던 검이 같아서 알아본 모양이었다.
백서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다시 이동했다.
수뇌부들이 있는 본진으로 돌아오니 참모진들이 머리를 쥐어 짜내고 있었다.
“뭐가 안 풀리나 보지?”
“회주의 전력을 얼마로 상정해야 하는지 몰라 헤매는 것 같습니다.”
제갈진천이 천천히 다가와 말했다.
“주윤문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놈의 전력은 상정하지 않아도 돼.”
“대비책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관주님의 전력을 뛰어넘기라도 하면…….”
“뛰어넘었다면 진작 수호문이고 뭐고 진작 다 끝장냈겠지. 근데 지금 하는 게 부정력 모으는 일 말고는 없잖아.”
“그렇긴 하지만…….”
“날 믿어. 솔직히 난 그놈이 전장에도 나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
“마지막 일전이나 다름없는데 참전을 안 한다는 건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혼천회에 소속된 모든 이의 운명이…….”
“잘 생각해 봐. 그 자식이 혼천회에 속한 무인들을 아낀 적이 있는지를…… 지금껏 있었던 일을 다 따져봐도 그런 일은 없을걸.”
제갈진천을 비롯한 참모진 모두가 백서휘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작전을 짠다면…… 회주가 없다고 가정하고 짜.”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회주는 도대체 뭘 할까요?”
“모은 부정력으로 뭔가를 해보려고 하겠지.”
“최악의 경우, 혼천회 소속 무인들이 시간을 끄는 동안 승천 의식을 진행하겠군요.”
“그렇게 되면 나는 그놈을 막으러 가야 하니, 나 없이 혼천회와 일전을 치러야 할 거야.”
필승패나 다름없는 존재가 사라진다는 말에 모두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