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189화
백서휘는 허공에 떠 있는 강환에 의념을 보냈다.
‘뭉쳐져라.’
주먹만 하던 강환이 포도알 크기로 변하더니 이내 겨자씨만큼 작아졌다.
단련을 처음 시작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빠른 속도.
실전에서 써도 크게 무리 없을 기술이 되었다.
‘고민이군.’
백서휘 앞에 놓인 길은 두 개였다.
여기서 멈추지 말고 질을 극한까지 높이느냐 아니면 질은 높일 만큼 높였으니 양을 늘리느냐.
백서휘는 한참 동안 고민하다 ‘후자’를 선택했다.
그가 생각할 때 이미 질은 한계 수준에 도달했다.
여기서 더 높이는 건 다음 경지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일단은 지금 경지에서 뽑아낼 수 있는 최대의 무력을 만들어야지.’
백서휘는 또 하나의 강환을 허공에 만들어냈다.
새로 만들어낸 강환을 포도알 크기로 뭉치는 건 쉬윘다.
문제는 일점집중(一點集中)하여 겨자씨만 한 크기로 압축하는 거였다.
‘아직 숙련되지 않아서 어려운 걸 수도 있어.’
이미 수도 없이 많이 실패했기에 마음을 다잡는 건 어렵지 않았다.
백서휘는 도전하고 깨지고, 도전하고 깨지고를 반복했다.
그러다 59번째 시도에서 두 번째로 만들어낸 강환을 겨자씨 크기로 압축하는 데 성공했다.
“됐다!”
백서휘는 멈추지 않고 강환 하나를 더 만들었다.
이로써 그의 주위를 부유하는 강환은 세 개가 되었다.
‘뭉쳐져라.’
지금껏 쌓은 경험이 있어서 주먹 크기의 강환을 포도알 크기로 만드는 건 숨 쉬듯 쉽게 되었다.
‘일점집중하는 것도 어렵지 않겠지.’
성공 경험이 있던 그조차도 41번째 시도가 되어서야 세 개째의 강환을 겨자씨만큼 압축할 수 있었다.
‘시도 횟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만족하지 않고 계속 도전하니 열일곱 번째부터는 겨자씨 크기로 압축된 강환이 그냥 허공에 만들어졌다.
‘완전히 능숙해졌으니 다음 경지에 오르는 일에 도전해도 되겠어.’
백서휘는 강환을 모두 없앤 후, ‘화두’를 찾기 위해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이번엔 어떤 화두일까.’
화두를 찾는 일은 대개 넋을 빼놓을 만큼 강렬한 느낌을 주는 질문을 찾아내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 질문을 계속 붙잡고 늘어지면서 의문을 키워가다 보면 어느 순간 정답에 이르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때가 다음 경지에 오르는 ‘순간’이었다.
백서휘는 그 순간이 빨리 찾아오기를 바라면서 자기 자신에게 무학(武學)에 대해 질문하기 시작했다.
‘기(氣)란 무엇인가’로 시작해서 수십 시간을 질문만 던졌는데도 그를 매료시키는 화두를 찾을 수 없었다.
‘지치는군.’
오늘은 이만하는 편이 좋겠다는 마음을 먹었을 때, 머릿속에 화두가 하나 떠올랐다.
[모든 것을 베는 검은 존재할 수 있는가?]
벼락이 몸을 통과하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과 동시에 현실 세계에 있는 백서휘의 몸이 발작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덜덜 떨렸다.
제갈선우의 말을 전하러 온 백은하는 우연히 그 광경을 보고는 어찌할 바를 몰라 발만 동동 굴렀다.
번쩍!
백서휘의 두 눈이 떠지면서 날카로운 안광이 번뜩였다.
“서, 서휘야! 괜찮아?”
“어? 괜찮지. 왜?”
“조, 조금 전에 네가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면서…….”
백은하는 횡설수설하면서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내가 그랬다고?”
“그렇다니까.”
백서휘는 팔짱을 낀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왜 그런 일이 있었던 거지? 예전에 화두를 찾았을 때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심상 세계에서 화두를 잡아서 그런 건가?’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지만 현실 세계의 몸이 심상 세계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 같았다.
“별일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진짜 별일 아니지?”
“그래. 그것보다 여긴 왜 온 거야? 내가 웬만하면 이리로 안 왔으면 좋겠다고 부탁했잖아.”
“아! 소식을 전하러 왔어.”
“소식?”
“새외무림이 준동했대.”
“새외무림 어디? 북해빙궁? 남만야수궁(南蠻野獸宮)? 아니면 대막의 광풍사(狂風沙)?”
“전부.”
“뭐? 그놈들이 전부 준동했다고?”
백은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소식 누가 전해 준 거야?”
“오룡단에서 너 일어나는 대로 소식을 전해달라고 그랬어.”
백서휘는 벌떡 일어나서 오룡단이 머무는 휴게실로 향했다.
휴게실에는 오룡단만이 아니라 유소화와 나겁개가 같이 있었다.
“새외무림에서 준동했다는 게 사실이야?”
백서휘는 인사도 하지 않고 질문부터 먼저 던지고 봤다.
“네, 사실이에요. 북해빙궁, 남만야수궁, 광풍사가 동시에 중원을 침공했어요.”
유소화가 백서휘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거리가 있어서 서로 연락하기도 힘들 텐데, 어떻게 동시에 침공을 시작한 거지?”
“저도 그게 의문이라서 한참을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혼천회가 개입한 일 같아요.”
“개자식들! 진짜 한시도 가만히 있지를 않네.”
백서휘가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욕지거리를 연신 내뱉었다.
“혼천회에서 위기감을 느껴서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지켜보고 있던 제갈선우가 조용한 목소리로 생각한 바를 말했다.
“네 말대로 위기감을 느낀 게 분명해. 작전은 계속 실패하지. 말뚝이 사라지면서 부정력 수급에 이상이 생기지. 어쩌면 이게 마지막 발악일지도 몰라.”
“부정력이 뭐예요?”
충왕문이나 혼천회에 관해서는 설명했지만 부정력에 관한 건 아직 무림맹과 사도련에 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기억났다.
“부정력이 뭐냐면…….”
백서휘는 하나하나 찬찬히 나겁개와 유소화에게 설명해 줬다.
설명이 진행될수록 두 사람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질려갔다.
“그, 그 주윤문이란 자가 부정력을 원하는 만큼 모으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요?”
“도대체 지금까지 뭘 들은 거야. 신적 존재가 돼서 세상을 자기 뜻대로 주무르게 된다니까?”
“맙소사.”
나겁개는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지금 관주님이 말씀해 주신 정보 다른 곳에 전해도 되나요? 상황의 심각성을 다들 알아야 할 것 같은데…….”
유소화가 아주 간절한 눈빛으로 백서휘를 바라봤다.
“그건 맘대로 해도 되는데 지금 전하러 가는 건 안 돼.”
“예? 왜요?”
“새외무림에 대한 정보를 다 알려주고 가야지.”
“여기 있는 호남성 분타주께서 제가 아는 것만큼 알고 계실 거예요.”
“아니야. 교차 검증할 정보들도 있을 수 있으니까 일단은…….”
나겁개와 유소화는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니, 좀 여유를 가져봐.”
“쉽지 않겠지만 시도는 해볼게요.”
“나도 그러겠소.”
나겁개와 유소화는 정보를 늦게 전달하는 게 불안한 건지 있는 복, 없는 복 다 달아날 정도로 다리를 떨었다.
백서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후 입을 열었다.
“이제 말해 봐. 새외 무림에 대해서 내가 꼭 알아야 할 게 있는지.
”가장 먼저 알려드릴 건 북해빙궁의 궁주가…….”
“바뀐 건 이미 알고 있으니까 그거 말고 다른 정보를 알려줘.”
“궁주가 새로 바뀐 건 어떻게 아신 거예요?”
“옛날에 북해빙궁의 준동했던 걸 막은 게 나니까 알지. 그때 내가 이전 궁주의 단전을 부숴놨거든.”
“그, 그러면 내, 내분이 생겨서 다시 북해로 돌아간 게 아니라…….”
“그래, 내가 막았어.”
백서휘가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면 그 정보는 건너뛰고 다른 정보를 알려드릴게요.”
“그래.”
“제일 중요한 건 북해빙궁주가 화경의 경지에 이른 고수라는 거랑 최정예 전력인 빙혼대(氷魂隊)의 숫자인데…….”
유소화와 나겁개는 새외무림에 관한 정보를 하나씩 풀었다.
백서휘는 북해빙궁의 정보만이 아니라 남만야수궁과 광풍사에 관한 정보까지 모두 들은 이후에 결정을 내렸다.
“내가 몸이 셋이 아니라 그놈들 전부를 막을 수는 없어.”
“저희도 그걸 알고 있어요. 그래서 관주님이 상대할 곳을 알려주시면 나머지 두 곳을 무림맹과 협의하에 상대하려고 해요.”
“그게 사도련 측 입장이야?”
“무림맹 측 입장이기도 하오.”
“음…… 좋아, 그러면 북해빙궁을 내가 맡을게.”
나겁개와 유소화가 백서휘가 내린 결정과 부정력에 관한 정보를 상부에 전하기 위해 각자의 근거지로 돌아갔다.
전서응으로 그들에게서 정보를 전해 받은 무림맹과 사도련은 빠르게 결정을 내렸다.
무림맹은 광풍사를, 사도련은 남만야수궁을 맡기로 했다.
백서휘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북해빙궁의 진격하리라 예상되는 경로로 달려갔다.
* * *
백서휘는 커다란 바위에 걸터앉아서 북해빙궁의 무인들을 기다렸다.
‘이놈들 도대체 언제 오려고 이러는 거지?’
한참을 기다렸는데도 북해빙궁 소속의 무인들은 나타나지를 않았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찾으러 가야 하나?’
백서휘는 고개를 좌우로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칫 잘못하면 길이 엇갈리는 일이 생길 수 있었다.
대형참사가 일어나는 걸 방지하려면 계속 여기서 기다리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지루하군.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며 그냥 시간을 버리는 것보다는 화두를 참오(參悟)하는 게 낫겠어.’
백서휘는 뇌에 각인되어 버린 화두를 떠올린 후 참오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베는 검은 존재할 수 있는가?’
바로 얼마 전에 검강을 견뎌내는 거대전갈을 봐서 그런 걸까?
모든 걸 베어 버리는 건 ‘불가능’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 거대전갈 진짜 대단했지. 내가중수법이 아니었…….’
외갑의 단단함에 놀라 자신의 가진 무기 중 하나인 용안을 쓰지 못했던 기억이 났다.
‘용안으로 흐름을 꿰뚫어 봤다면 찌르기나 베기가 그 거대전갈한테 통했을지도 몰라.’
‘만약’을 가정하기 시작하니, 이론적으로 가능할지도 모르는 것들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오행을 쓰던 주술사의 융합체를 베어 버렸을 때를 생각하면 술법만이 아니라 다른 비물질적인 것도 베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때였다.
갑자기 주변의 기운이 미친년 널뛰기하듯 요동치기 시작했다.
백서휘가 바로 가부좌를 풀고 일어나서 전방을 바라봤다.
한참 떨어진 곳에서 기의 폭풍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 정도면 현경에 오른 무인이 만들법한 기의 폭풍인데?’
경지에 이른 자들의 극적인 감정에 세상의 기운이 반응할 때가 있었다.
지금 생긴 기의 폭풍은 그때 종종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뭔가 이상한데? 그렇게 강자가 이곳에 있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북해빙궁의 무인이 한참을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설마 북해빙궁의 궁주가 현경의 경지인 건가? 그렇다면 큰일인데…….’
경지가 한 단계라도 차이 나면 다른 방법 쓸 것 없이 그냥 찍어누르면 됐다.
그런데 지금 북해빙궁의 궁주가 현경이라면 그게 불가능해졌다.
‘아니야. 아직 완전히 경지에 오른 게 아니니 기회는 있어.’
백서휘는 기의 폭풍이 일어나는 곳을 향해 응룡비천신법을 펼쳤다.
전력으로 달려가니 북해빙궁의 무인들이 진을 친 곳에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백서휘다! 백서휘가 나타났다!”
“수호문주다!”
북해빙궁의 무인 중 몇몇이 자신의 얼굴을 알아보고 출현 사실을 사방팔방으로 알렸다.
‘중심에 있네.’
북해빙궁주는 무인들의 중심에서 유형화된 살기를 내뿜으며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를 보며 백서휘는 혓바닥으로 마른 입술을 적셨다.
“모두 전투 준비!”
“충!”
북해빙궁의 무인들의 손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속전속결로 간다.’
백서휘는 허공에 겨자씨 크기의 강환을 수십 개 만들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