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안 올 거야?”
백서휘는 일부러 오만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까딱거렸다.
“어린놈아, 격장지계(激將之計)도 상대를 봐가서 써야지. 너 같은 놈을 우리가 한둘 보는 줄 아느냐?”
흑노는 한심한 놈 보듯이 백서휘를 바라봤다.
“머리 굴릴 생각일랑 하지 말고 네가 오거라. 어차피 하수는 우리 아니냐.”
“그쪽이 하수라서 선공을 양보한 건데?”
“우리는 그런 배려를 원치 않는다.”
“내가 선공하라는 거야?”
“그래.”
지금 보여준 언행만으로도 흑백쌍노가 어떤 방식으로 지금의 전투를 풀어갈지 느낌이 왔다.
‘최대한 방어적으로 안전하게 싸우면서 빈틈이 나면 반격하는 식으로 싸우겠지.’
사실 이건 흑백쌍노로서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백서휘는 그들과 경지 차이가 확연히 나는 고수였다.
그런 고수를 상대로 공격적으로 싸움을 풀어나가기엔 걸리는 점이 많았다.
그래서 흑백쌍노는 고수를 상대할 때 쓰는 방식으로 싸우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들이 지금 같은 방식으로 싸우는 건 이십여 년 만의 일이었다.
“좋아, 내가 선공할게.”
백서휘는 흑노와 백노를 두고 번갈아 보며 누굴 먼저 공격할지 고민했다.
‘둘 중엔 백노 쪽이 그나마 만만해 보이네.’
백서휘는 백노에게 검강이 휘감긴 검을 던졌다.
그다음 곧바로 흑노가 있는 방향으로 구천현현보를 밟았다.
흑백쌍노는 경험이 많은 자들답게 침착하게 대응했다.
백노는 공중에 도약한 후 착(着)의 묘리를 섞어서 날아오는 검을 밟아버렸다.
그다음 천근추를 사용해 땅에 착지했다.
‘움직여라!’
백서휘가 의념을 계속 보냈지만 검은 백노의 발바닥에 붙어서 떨어지지를 않았다.
‘둘이서 나를 공격 못 하면 저쪽도 손해일 텐데?’
백서휘가 아는 흑백쌍노는 합격술로 이름을 드높인 자들이었다.
이렇게 일대일로 싸우면 불리한 건 저들이니 그의 입장에선 좋은 일이었다.
‘바보 같기는…….’
백서휘는 강점을 버리는 흑백쌍노를 속으로 비웃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흑노가 성난 황소처럼 달려와 묵빛 강기가 감긴 손을 내뻗었다.
‘독강?’
화경의 경지에 오른 자라 그런지 독강에 섞인 독기도 남달랐다.
당가의 독공보다 더 뛰어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기! 독기! 독기!』
오랜만에 질 좋은 독기를 발견하자 독령이 흥분했다.
‘저걸 네게 주려면 저 노인네의 공격을 허용해야 하잖아.’
『근육에서 뽑아낸 힘보다는 독기가 더 많이 섞인 공격이라 주군께는 별 타격이 없을 겁니다.』
‘좋아, 그럼 딱 한 번만 허용해 보겠어.’
흑노가 허초를 섞어가면서 백서휘의 왼쪽 가슴을 노렸다.
독령과 약속을 했지만 맞아주기엔 왼쪽 가슴은 너무 위험이 컸다.
백서휘는 공격을 피하면서 수투 형태의 갑옷을 낀 왼손을 내밀었다.
쾅!
충돌하는 소리는 컸으나 물리력으로 인한 충격은 거의 오지 않았다.
모두 묵룡갑 덕분이었다.
‘독기도 버틸 만하잖아?’
들어오는 족족 독령이 힘을 써서 흡수한 덕분에 피해가 조금도 오지 않았다.
‘계속 이런 식의 공격을 유도해서 독기를 흡수하려면 아픈 척하는 게 맞겠지.’
독기도 빨아먹고, 방심도 하게 만들려면 흑노로 하여금 공격이 통한다는 착각을 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백서휘가 계속 아픈 척했지만, 전투 경험이 많은 흑노는 그의 연기에 쉽게 속지 않았다.
‘너무 아픈 척을 해서 안 속는 것 같은데……. 좋아, 이제부터는 반격도 해서 싸움을 좀 치열하게 만들어야겠어.’
백서휘는 흑노와 밀고 당기기를 열심히 했다.
그렇게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니 흑노도 반신반의하게 되었다.
백서휘는 그가 확실하게 넘어오게 만들기 위해 입 안을 깨물어 상처를 내었다.
흐르는 피를 입 안에 머금고 있던 그는 때를 기다렸다.
여러 차례 공격을 교환한 후, 연기하기 딱 좋은 적기가 오자 백서휘는 내상을 입은 것처럼 피를 내뿜었다.
확실히 공격이 통한다는 걸 알게 된 흑노가 이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어린놈이라 역시 경험이 없구나. 어떤 싸움이든 방심은 절대 하면 안 되는 법이다.”
“흑노! 뒤로 물러나! 저놈 다른 속셈이 있는 것 같다.”
뒤에서 조용히 검을 밟고 있던 백노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놈 독에 중독돼서 정신 못 차리는 거 안 보여? 조금만 있으면 끝나니까 검 잘 잡고 있어.”
흑노가 바보라서 속는 게 아니었다.
그는 독기가 확실하게 백서휘의 몸에 주입되는 걸 느끼고 있었다.
거기다 중독되는 자들처럼 안색까지 시커멓게 변하니 경험 많은 고수인 그로서도 속을 수밖에 없었다.
“흑노!”
백노가 목이 터져라 소리치며 계속 만류했다.
흑노와 달리 그가 속지 않는 건 냉정해서라기보단 의심스러운 성격을 지녀서였다.
백서휘를 직접 상대하고 있지 않은 것도 한몫했다.
“백노! 너도 그 검을 놓고 와서 이놈을 공격해!”
“흑노! 영악한 그놈에게 속지 말고 이리 와서…….”
“속고 있다니? 네가 이놈 몸에 주입된 독기가 얼마나 되는지 몰라서 그래.”
“흑노!”
백노의 계속된 만류에도 흑노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그가 이상하단 걸 눈치챈 건 단전이 뻐근해 올 정도로 내력을 소진했을 때였다.
지금까지 주입된 독기를 생각하면 백서휘는 진작 죽었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 백서휘는 멀쩡히 살아서 급소 공격만 기계적으로 차단하고 있었다.
“제, 제기랄! 속았구나!”
‘호구’가 알아차렸으니 더 속이는 건 의미가 없었다.
제대로 싸우기 시작하니 백서휘는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움직임을 보였다.
그의 움직임이 변하니 흑노의 공격은 제대로 꽂히지 않고 헛손질만 하게 됐다.
멈추면 죽는다는 걸 알기에 흑노는 공격을 멈출 수 없었다.
그의 단전에 있는 내력이 빠르게 사라졌다.
백노가 발로 누르고 있던 검을 풀어주고는 흑노를 향해 빠르게 달려갔다.
백서휘는 그걸 보자마자 떨어진 검을 향해 손을 내뻗었다.
쐐애애액!
검이 날아가는 속도가 백노가 달려오는 것보다 빨랐다.
탁!
백서휘는 검을 손에 쥐자마자 경천신뢰의 초식을 펼쳤다.
검날이 공기를 가르며 흑노의 목을 향해 빠르게 나아갔다.
그때 백서휘의 머리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놈들 혼천회 소속이 아니잖아?’
현장 지휘관의 말에 따르면 흑백쌍노는 혼천회의 소속이 아니라 계약 관계였다.
‘화경의 고수인데다 즉시전력감이니 혼천회 쪽에서도 막 대접하지는 않았겠지.’
어쩌면 혼천회의 본단에 가봤을지도 몰랐다.
‘이 늙은이들을 사로잡아야겠다.’
백서휘와 비교하면 손색이 있어서 그렇지 흑노 역시 고수였다.
검이 그리는 궤도를 보면 어디로 향하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목을 베려고 한다는 사실을 흑노는 단번에 알아차렸지만 피하는 건 불가능했다.
지금 그의 단전에는 지금 겨자씨만큼의 내공도 없었다.
“아…….”
태어나면서 지금까지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흑노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흑노!”
백노의 외침을 듣고 흑노의 정신이 되돌아왔다.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 이렇게 죽을 수는…….”
백서휘는 흑노의 목 바로 옆에서 검을 멈추었다.
“삶에 미련이 많아 보이는군.”
실제로 미련이 많은 흑노는 입을 다물었다.
“이놈!”
백노가 흑노를 구원하기 위해 백서휘를 공격하려 했다.
“그쯤 해둬. 거기서 더 가까이 오면 이 검이 어떻게 움직일지 몰라.”
백서휘는 흑노의 목과 검 사이에 있는 거리를 더 가깝게 만들었다.
날카롭고 예리한 검날이 흑노의 목에 살짝 닿자 상처가 나며 피가 흘러내렸다.
“흑노를 놔줘!”
“이놈을 살리고 싶으면 저놈들을 한 놈도 빠짐없이 다 죽이도록 해.”
백서휘가 턱으로 혼천회의 무인들을 가리켰다.
백노가 고민하는 듯 보이자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현장 지휘관이 소리쳤다.
“모두 산개해서 퇴각해라! 산개해!”
혼천회의 무인들이 자기 살길을 찾기 위해 장원을 빠져나갔다.
그걸 본 백노는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혼천호의 무인들을 죽여나갔다.
“오룡단! 너희들은 도망가는 놈을 추적해서 죽여.”
“예!”
현장 지휘관이든, 다른 무인이든 주술에 걸려 있을 게 뻔했다.
어차피 정보도 못 얻는 놈들을 사로잡느니 혼천회와 계약 관계인 흑백쌍노에게서 정보를 얻는 게 더 나아 보였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백노와 오룡단이 백서휘 앞에 섰다.
“네 말대로 다 죽였으니 흑노를 놓아줘.”
“에이~ 저놈들 아니었으면 다 못 잡았잖아.”
“그래, 인정한다. 인정하는데, 흑노를 놓아줘.”
“싫어.”
“어린놈아! 약속을 지켜라!”
그때 가족들이 있는 곳에서 둘째 조카가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애가 울잖아.”
“흑노를 놓아달라고!”
백노는 핏발 선 눈으로 백서휘를 노려봤다.
“그쯤 해둬. 계속 나한테 강요를 하면 진짜로 이 노인네를 죽일지도 몰라.”
“죽일 수 있으면 죽여라!”
굴욕감을 느낀 흑노가 악에 받쳐서 소리쳤다.
“두 사람이 죽으면 그 구한다는 제자가 어떻게 될까?”
백서휘의 말에 흑백쌍노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을 뒤집어쓴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뭘 어쩌자는 거지?”
백노가 끊임없이 흑노와 백서휘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궁금한 걸 좀 풀어줬으면 해.”
“궁금한 것?”
“살리고 싶다는 제자의 상태라든가. 필요한 약재라든가……. 뭐, 이런 것들.”
“그걸 네가 알아서 뭐 하게.”
“얘기를 들어보고 도울 수 있으면 도와주려고.”
“도와줄 의향이 있다고? 거짓말 하지마라!”
흑노가 상처 입은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거짓말 아니야.”
“거짓말이 아니더라도 네깟놈이 도울 수 있는 수준의 일이 아니다. 괜히 오지랖 부리지 말고 흑노나 풀어주거라.”
“어떤 수준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꽤 부자야. 여기 오면서 학무관 건물들 봤지? 그거 다 내 거야.”
백서휘는 만복상단의 금태풍에게도 지분이 있다는 사실은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그것 말고도 금와전장에 많은 돈이 있어서 당신 돕는 건 진짜 일도 아니야.”
흑백쌍노에게 백서휘의 제안은 아주 달콤하게 들렸다.
사려고 했던 영약은 정체불명의 인간이 먼저 구매했고, 설상가상으로 암상은 구양절맥에 효과가 있는 영약의 값을 두 배로 올렸다.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양기가 너무 커지는 바람에 제자는 오늘내일했다.
빨리 영약을 먹이지 않으면 제자는 죽을 수도 있었다.
“어떻게 할 거야? 내 도움 받을래? 아니면 그냥 여기서 둘 다 생을 마감할래?”
한참을 고민하던 흑백쌍노가 눈빛을 교환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도움을 받겠다.”
“좋아. 제자의 상태를 말해봐.”
“지금 제자의 상태는 매우 좋지 않아. 영약이 없으면 가까운 시일 내에 죽는다고 봐야 해.”
“영약? 어떤 영약?”
“강력한 음기가 담긴 것들이면 뭐든 좋다.”
“솔직히 말할게. 영약을 구하는 건 힘들어.”
“……너, 우리를 가지고 논 거냐?”
“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영약을 구해주는 건 힘든데, 필요한 만큼의 돈을 내어줄 수는 있어. 참고로 저기 저 방에서 내 가족들을 지키고 있는 사람도 그렇게 도움을 받아서 손자를 고쳤어. 안 그래? 황천익?”
“백 대협의 말에는 틀림이 없소! 거짓말 같다면 내 손자와 내가 거래했던 암상 쪽 상인과 만나게 해줄 수도 있소.”
귀를 기울이고 있던 황천익이 백서휘를 도왔다.
“……만약에 네게 도움을 받는다면 나는 뭘 해야 하는 거지?”
백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혼천회의 정보를 주는 일을 할 수 있어?”
“……할 수 있다.”
“그래? 그러면 조금 전에 말한 조건을 기반으로 협의를 좀 해보는 게 어때?”
백서휘는 속내를 완전히 감추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