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168화
수호문의 문주로서 살면서 웬만하면 지켜온 원칙이 하나 있었다.
피를 보겠다고 결정했으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끝장을 봐야 한다는 것.
상대를 봐서 적당히 융통성 있게 넘어간 적이 몇 번 있긴 했지만, 대체로 백서휘는 원칙을 지켰다.
‘이번에도 적당히 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네.’
아무리 생각해도 상대가 너무 좋지 않았다.
금의위는 황제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조직이라 끝까지 가면 명령을 내린 황제까지 끌어내어 죽여야만 한다.
‘죽이는 건 어렵지 않아. 얼마든지 할 수 있어. 문제는 이후에 벌어질 일들인데…….’
황제가 죽게 되면 필연적으로 혼란이 찾아오게 된다.
그리고 그 혼란은 중원을 사는 양민 대다수에게 고통을 줄 것이다.
‘어쩔 수 없지. 금의위 몇 명을 혼내주고 황제 폐하께 경고하는 선에서 끝내자.’
행동 방향을 결정한 백서휘는 검을 뽑은 상태에서 문을 발로 걷어찼다.
콰앙!
문짝이 안으로 날아가며 집 내부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다섯 명의 금의위가 원형 탁자에 둘러앉아 있었다.
“누구냐!”
“얼굴을 보고도 누군지를 몰라?”
“정체를 밝혀라!”
“나 참! 내 얼굴도 모르면서 오룡단은 어떻게 조사했대?”
백서휘는 검을 어깨에 걸친 채 어이없다는 얼굴로 바라봤다.
“오룡단? 설마 백서휘? 아니, 백서휘는 저렇게 생기지 않았는데?”
가장 나이가 든 금의위가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이렇게 생기지 않았다니 그게 무슨……. 아!”
천환역형공으로 얼굴을 바꿨다는 걸 백서휘는 뒤늦게 깨달았다.
그가 천환역형공을 풀자 얼굴의 근육이 씰룩거리며 얼굴이 본래대로 돌아왔다.
“배, 백서휘?”
“이제 알아보네.”
백서휘가 피식 웃으며 말하자 금의위들은 하나같이 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무슨 일로 이곳에…….”
“진짜 몰라서 그런 건 아닐 테고……. 시간을 끌려는 속셈인가?”
가장 나이 든 금의위는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가 크게 소리쳤다.
“모두 공격!”
금의위들은 품속에서 다섯 치(약 15cm) 길이의 막대 같은 것을 꺼내 백서휘에게 겨누었다.
‘천왕침통?’
다른 면도 있지만, 전체적인 생김새가 비슷했다.
작동되는 원리가 비슷하면 그냥 가만히 서서 방어하는 것보다는 회피하는 편이 유리했다.
‘공격을 끝까지 보는 게 중요해.’
안력을 증폭시키는 한편,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호신강기를 끌어올렸다.
타타타타탕!
콩 볶는 소리와 함께 기다란 장침이 시차를 두고 날아들었다.
‘온다!’
백서휘는 안력이 증폭된 눈으로 장침을 쳐다보며 검을 빠르게 회전시켰다.
시간이 느려지는 듯한 감각과 함께 장침의 뾰족한 부분에 녹색 액체가 묻어 있는 게 보였다.
백서휘는 얼굴을 굳히며 검막으로 장침들을 튕겨냈다.
티티티티팅!
‘뭔가 이상해.’
금의위가 만든 거로 추정되는 암기에서 당가의 흔적이 진하게 묻어 나왔다.
그때 막대에 장침이 장전되는 미세한 소리가 귀에 들렸다.
딸깍!
‘생각은 나중에!’
금의위에게 반격하려면 지금 움직여야만 했다.
백서휘는 전력을 다해 구천현현보를 밟아나갔다.
“빨리 장전해!”
금의위들은 엄지손톱 모양의 막대를 미친 듯이 눌러 장침을 장전시켰다.
딸깍!
‘이렇게 빨리 장전이 된다고? 이러면 절정 경지 이하의 무사들은 무조건 죽을 것 같은데?’
그때 콩 볶는 소리가 다시 한번 들리며 장침이 백서휘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백서휘는 얼굴을 굳히며 경천신뢰 초식을 펼쳤다.
벼락처럼 빠르게 움직인 검이 장침 하나를 튕겨냈다.
팅!
구천현현보의 다음 방위를 밟기 위해 발을 내미는데 장침이 날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경천신뢰의 초식으로는 모두 차단하지 못해.’
백서휘는 광풍번천의 초식을 펼쳐 일정 공간 안의 공격을 모두 튕겨냈다.
‘됐다!’
마지막으로 구천현현보의 방위를 밟으며 땅을 박찼다.
백서휘의 몸이 금의위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검은 장식인가?’
근접전을 펼칠 만한 거리가 만들어졌는데도 금위위는 검을 뽑지 않았다.
암기를 사용하는 게 더 위력적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철컥!
장침이 장전되는 소리가 들렸지만 백서휘는 무시했다.
이미 너무 가까워져 검날이 닿는 범위에 금의위 모두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백서휘는 몸을 회전하며 검강이 깃든 검을 횡으로 크게 휘둘렀다.
가까이 붙어 있던 금의위 둘이 상반신과 하반신으로 몸이 나눠지며 죽었다.
그다음 좌상단에서 우하단으로 휘둘러 하나를 죽이고, 우상단에서 좌하단으로 휘둘러 그 옆에 있는 놈을 죽였다.
남은 건 마지막 한 명.
가장 젊어 보이는 금의위였다.
“히이이익!”
마지막 생존자는 떨리는 눈동자로 자신을 보며 암기를 겨누었다.
백서휘는 일검관천의 초식으로 그의 목을 꿰뚫려다가 그만두었다.
‘정보가 필요해.’
그때였다.
마지막 생존자의 손에 들고 있던 암기에서 콩 볶는 소리가 났다.
탕!
이제껏 봤던 장침보다 더 긴 것이 백서휘를 향해 날아들었다.
쐐애애액!
‘마지막 공격인가?’
백서휘는 고개를 옆으로 젖혀 간단히 암기를 피하고는 마지막 생존자의 손목을 잘라 버렸다.
“으아아아아아악!”
마지막 생존자가 고통에 찬 비명을 목이 터져라 질렀다.
백서휘는 눈물을 뚝뚝 흘리는 그의 배를 발로 걷어찼다.
퍽!
마지막 생존자가 우당탕거리는 소리와 함께 집의 한구석으로 날아갔다.
백서휘는 그의 머리채를 잡아채며 물었다.
“이름.”
“우웨웩!”
“이름.”
“하, 한정복이오.”
“일이 이 지경이 됐는데도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건가?”
백서휘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리고는 한정복의 뺨을 손바닥으로 때렸다.
짝!
“이름.”
“하, 한정복이라고 말했잖소.”
백서휘가 이전보다 더한 강도로 뺨을 치자 뭐 때문에 그러는지를 한정복도 알아차렸다.
“이름.”
“하, 한정복입니다.”
“금의위 맞나?”
“마, 맞습니다.”
“우 노괴 아니, 우염상을 납치해서 만들려던 게 뭐지? 그냥 일반적인 무기는 아닌 것 같은데?”
“초, 초절정 경지 이상의 고수에게도 통할 만한 무기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초절정 경지 이상의 고수에게 통할 만한 암기? 그게 가능하긴 한 건가?”
백서휘가 미심쩍다는 얼굴로 한정복을 바라봤다.
“가, 가능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아, 암기의 작동 원리는 저도 알 수 없습니다.”
“원리는 모르는데 가능하다? 날 놀리는 거야?”
백서휘가 뺨을 치려는 동작을 취하자 한정복이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초, 초절정 경지 이상의 고수도 처음부터 암기가 있다는 걸 인지하지 않으면 쳐내기 힘들다고 들었습니다.”
“하! 이미 만들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네.”
“이, 이미 만들었습니다.”
“뭐? 진짜?”
“시, 실전에서 초절정 고수를 죽이는 데 성공했다고 들었습니다.”
한정복이 떨리는 목소리로 믿기 힘든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면 우염상은 왜 필요한 건데? 이미 암기는 만들었다며?”
“마, 만드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 큰 데다 한번 쓰면 망가져서 그렇습니다.”
“최대한 오래 쓸 수 있게 만들려면 우염상이 필요하다는 거지?”
“예, 그리고…….”
“그리고?”
“무, 무림맹주와 사도련주에게도 확실하게 통할 만한 무기를 설계했는데 그걸 제작하려면 화령철장의 실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들었습니다.”
백서휘는 상황이 생각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는 걸 깨달았다.
‘화경의 경지를 가진 무인에게 통할 만한 무기가 설계까지 끝났다니, 어떻게 이게 가능한 거지?’
오랜 연구를 통해 기술이 발전했다기엔 만드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
자신이 모르는 다른 이유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번 일을 제대로 해결 못 하면 혼천회가 아니라 관에서 무림을 지배하게 될 수도 있겠어.’
무기의 양산이 시작되면 무공을 배우지 못한 일반 병사에게 쥐여줘도 고수들을 죽일 수 있게 된다.
세상의 판도가 완전히 바뀌게 되는 것이다.
‘어쩌지?’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이미 설계까지 끝난 마당이라 마땅한 해결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금의위 놈들을 다 죽여도 해결될 문제가……. 진짜 다 죽일까?’
설계자를 잡아 죽이고 도면을 없애 버리면 최소한 준비할 시간은 벌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무기를 설계한 사람에 대해 알고 있나?”
“어, 어떤 무기를 말씀하시는 건지?”
“무기의 종류가 여러 가지인가?”
“예.”
“그러면 그 종류별로 설계자를 다 말해 봐.”
“저, 절정 경지 이하의 고수를 죽이는 무기는 잡아 온 장인들이 함께 연구해서 만든 것이고……. 초, 초절정 경지 이상의 고수를 잡는 무기는 당가의 인물들과 다른…….”
“잠깐만 여기서 당가가 왜 나와?”
“예?”
“당가는 망했잖아?”
당가의 무인들이고 뭐고 다 죽인 게 자신 아니던가.
그런데 그 당가가 살아서 초절정 경지 이상의 고수를 잡는 무기를 만들었다니.
백서휘로서는 지금의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마, 망해서 저희 쪽에 합류한 거로 알고 있습니다.”
“망해서 합류했다? 음…….”
다시 생각해보니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당가는 적이 많았다.
예전에야 위세가 대단해 문제가 되지 않았겠지만 자신에게 망한 지금에 와서는 크게 문제가 됐을 거다.
복수와 생존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한 선택일 가능성이 컸다.
‘잠깐, 외부에 있는 필수 인원들도 불러들였다가 다 죽은 거 아니었나? 어떻게 지금 같은 일이 가능한 거지?’
백서휘는 궁금증을 풀기 위해 한정복에게 생각했던 걸 그대로 물어봤다.
“이, 일이 터지기 전에 외부에 피신시켰던 여자와 아이들과 불가피한 일로 외부에 있다가 살아남은 극소수의 남자가 합류했다고 들었습니다.”
확실히 여자와 아이들을 죽인 기억은 없었다.
백서휘는 입술을 비죽이며 심기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깔끔하게 끝장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네.’
원한을 열 배로 갚는다는 당가 사람들의 성격을 생각하면 늦었지만, 지금에라도 다 죽이는 게 맞았다.
“그, 그들이 당가의 기밀 자료들과 기술들을 제공한 덕분에 기술이 진일보했고 그래서 지금 같이 만들 수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네가 말한 인간들을 다 죽이면 무림을 통제할 무기는 못 만들겠네?”
“아, 아마도 그럴 겁니다.”
궁금증이 다 풀린 백서휘는 한정복의 목을 잘랐다.
“또 바빠지겠네.”
백서휘는 한숨을 쉬고는 집으로 돌아갔다.
이번엔 잠입이니 역용이니 하지 않았기에 당당히 대문을 이용했다.
수련하고 있던 백은하가 뛰어나와 백서휘를 반겼다.
“서휘야!”
“오랜만이네.”
있었던 일을 대충 설명하는데 우염상이 정수련을 들고 달려왔다.
“외삼촌!”
정수련이 백서휘에게 안겼다.
“하하하하.”
딱 붙어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둘의 모습을 본 우염상은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누군 아기 흉내를 내지 않아도 저렇게까지 해주는데…….”
“어? 뭐가?”
백서휘가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며 물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다.”
“무슨 흉내를 내야 한다며?”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백서휘에게 만은 들키고 싶지 않았던 우염상이 달아오른 얼굴로 소리쳤다.
“그 흉내가 혹시 아기 흉내라도 되는 거야?”
“네, 네가 그걸 어떻게…….”
“와! 진짜였어?”
백서휘의 한쪽 입꼬리가 부드럽게 말려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