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159화
처음에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옷 색깔만 보였는데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생김새가 점점 더 자세히 보였다.
‘주황색 무복?’
최종 목적지에 있던 집단 중 주황색 무복을 입은 자들은 무림맹의 무사단 중 하나인 주작단이 유일했다.
주작단은 여류 무인으로만 이루어진 무력대이니 멀리 떨어져 있는 자는 무조건 여자라고 봐야 했다.
‘처음 봤을 때는 당연히 남자일 줄 알았는데…….’
가까워질수록 외형이 더 잘 눈에 들어왔다.
지금 와서 보니 체형에서 여자인 티가 확 났다.
백서휘는 조금 더 빠르게 걸어 여자와의 거리를 좁혔다.
이제는 여자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가 보였다.
여자는 중원 전역은 아니더라도 한 성에서 손에 꼽힐 만한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녀의 얼굴이 어딘지 모르게 익숙했다.
많이 봤으면 이름이 바로 떠올랐을 테지만, 그렇지 않은 걸 보면 지나가다 몇 번 본 게 분명했다.
그리고 이렇게 숨어서 접근하는 상황 자체도 익숙했다.
여러 조건이 겹쳐지니 여자의 정체가 뭔지 떠올랐다.
‘소검후! 한주희!’
유품을 얻고 난 이후로 ‘교류’라고 말할 만한 게 사도련에 갈 때 한 번뿐이었다.
그 이후로 만남도, 연락도 없다 보니 자연스럽게 잊게 되었다.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생각 못 했는데.’
잊을 만하면 이렇게 만나게 되는 걸 보면 한주희와 자신 사이에 어떠한 인연이 있긴 한 것 같았다.
‘아는 사이이니 그냥 모습을 드러내는 게 낫겠지.’
스르륵!
백서휘가 은형잠종술을 풀고 한주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으아아앗!”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소스라치게 놀라는 한주희.
백서휘는 그 모습이 우스워 피식 웃고 말았다.
“뭐, 뭐예요!”
“뭐긴, 사람이지.”
“가, 갑자기 이렇게 나타나시면 놀라잖아요. 기척 좀 내고 다니세요!”
“죽여야 하는 놈일 수도 있으니까 그런 거지.”
한주희는 백서휘의 말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섬뜩함을 느꼈다.
아는 사람이 아니라 적이었으면 목이 베이는 것조차 모르고 죽었을 것 아닌가.
한주희는 닭살이 돋은 팔뚝을 연신 쓸어내렸다.
“죽여야 하는 놈이라면 누구를 말하는 거예요?”
“많지. 마교 놈들이나 혈교 놈들.”
“그, 그런 사람들이 있었어요?”
“혈교야 그렇다 쳐도 마교는 바로 알아보지 않았어?”
“마기를 느끼긴 했는데 그들이 마교인 줄은 몰랐어요. 마교는 내분으로 망했다고 들었거든요.”
백서휘는 마교의 멸망 원인을 정정해주려다가 너무 자기자랑 같아서 그만두었다.
“아무튼 그런 놈들이면 바로 죽였지.”
“마교나 혈교도 아니고, 아는 사람도 아니었으면 어떻게 됐을까요?”
“아무런 인연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냥 지나쳐 갔겠지. 근데 이건 왜 물어보는 거야?”
“그냥 궁금해서요. 그보다 관주님은 여기가 어딘지 알고 계세요?”
“어딘지는 모르지만 어떤 공간인지는 알지.”
“뭔데요?”
한주희는 커다란 눈으로 백서휘를 빤히 바라봤다.
“이공간.”
“그게 뭐예요?”
“진짜 모르는 거야?”
“네, 태어나서 처음 들어요.”
백서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이공간에 대해 설명해 줬다.
“이 판을 짠 사람들한테는 유리하고 우리는 불리한, 그런 곳이란 소리예요? 비급이나 영약이 있는 곳이 아니라?”
“응.”
“어느 정도로 불리한 거예요? 그냥 죽음만 기다려야 할 정도면…….”
“그 정도는 아니야. 그랬으면 걔네가 진작 무림을 지배했겠지. 근데 많이 위험하기는 할 거야. 판을 짜놓은 놈들이 준비를 아주 단단히 했을 테니까.”
“살아나갈 수 있겠죠?”
“무사히 나갈 수 있을 거야.”
백서휘는 과장하지 않고 담담히 말했다.
그 모습이 한주희에게 강한 신뢰감을 주었다.
“가자.”
백서휘가 속보로 걷기 시작했다.
꽤 고강한 무인인 한주희도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빨랐다.
“조금만 느리게 가면 안 될까요?”
“음, 알겠어.”
장사로 돌아온 이후로 다른 사람들과 같이 다니는 일이 많아졌다.
그 탓에 움직임이 느린 사람과 속도를 맞추는 게 나름 익숙해졌다.
‘장사로 막 돌아왔을 때 만나서 이랬으면 진짜 시원하게 욕을 했을 텐데, 내 성격도 많이 좋아졌네.’
짧은 시간이 지난 것이지만 백서휘는 세월의 무상함을 느꼈다.
평보보다 조금 빠른 정도로 걷고 있는데 기감에 정체불명의 인물들이 싸우는 게 잡혔다.
‘한주희한테 앞에 무슨 일이 있는지 알려줘야겠어. 그래야 실수를 안 하지.’
백서휘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한주희가 왜 멈추었냐는 눈빛을 하고 그를 바라봤다.
“앞에 정체불명의 인물들이 싸우고 있어.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니까 인기척 숨기고 은밀하게 움직여. 알았어?”
“네.”
한주희는 은잠술을 기초만 배웠는지 은·엄폐 능력이 조금 미숙했다.
자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것이란 걸 알기에 백서휘는 그녀를 나무라지 않았다.
‘싸울 준비나 하자.’
왜 싸우는지도 모르고, 누구인지도 모르지만 칼부림하는 놈 중 마교나 혈교의 무인이 있다면 죽일 필요가 있었다.
“내가 갑자기 사라져도 놀라지 마.”
“네?”
백서휘는 은형잠종술을 펼쳐 한주희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한주희는 자기 입을 틀어막고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전방을 바라봤다.
백서휘는 기감으로 정체불명의 인물들을 계속 감지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거리가 가까워지니 기운이 품고 있는 속성이 어떤 건지 느껴졌다.
‘마기(魔氣)! 그것도 진가의 마기다!’
십대마가 시절이나 오대마가가 된 지금이나 수장인 이유가 있었다.
진가는 천마의 오른팔이었던 자를 시조로 모셨다.
진가의 시조는 천마의 가르침을 받아 강해졌고 그때 교육받은 모든 것을 낱낱이 기록해 문서로 만들었다.
그 문서에 담긴 모든 무의(武意)는 세월이 지나는 동안 진가의 무공에 완전히 체화되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진가의 무공은 천마의 무공과 닮은 면이 많이 있었다.
마공을 익힌 사람이면 진가의 사람이 내리는 명을 거역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나 상대하는 사람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을 보게 만든다는 점이 같았다.
물론 이것도 진가의 직계 중의 직계만 배울 수 있는 무공에만 적용되는 이야기였다.
진가의 방계는 다른 무가들의 방계처럼 약하고 형편없었다.
‘이 정도로 찐득한 마기면 직계인데…….’
다른 마가는 몰라도 진가의 인물들에 대해서는 빠삭했다.
백서휘가 아는 사람 중에 지금처럼 괴물 같은 마기를 뿜는 사람은 둘뿐이었다.
가주 진소운과 태상 가주 진백호.
둘의 무위가 비슷해서 누군지 감이 잘 안 왔다.
‘어느 쪽이든 할 만하지.’
독령이 가진 능력이라면 ‘마기’조차도 분해해서 흡수할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그래도 진백호가 상대하긴 편한데.’
늙어서 진백호의 전반적인 신체 능력이 좀 떨어져 있을 가능성이 컸다.
공을 모르는 양민처럼 눈에 띌 정도로 저하되지는 않았겠지만 이러한 요소들이 고수들의 싸움에선 승패와 생사를 가르게 된다.
‘진백호였으면 좋겠군.’
싸우는 자들을 확인한 순간, 백서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자신만 못해서 그렇지 모용중광도 무림에서 최강자 취급을 받는 자였다.
그런데 그 모용중광이 새파랗게 어린놈한테 밀리고 있었다.
‘저놈 도대체 정체가 뭐지? 진가 사람은 맞는 것 같은데……. 설마, 저놈 진무룡인가?’
진무룡은 진가의 소가주로 자신과 비교하면 두 살이 어렸다.
자신과 비교하면 많이 빛이 바래긴 하지만 28살에 화경의 경지에 오르는 건 무림 역사를 뒤져봐도 몇 없는 일이었다.
‘나보다는 못하지만, 저놈도 꽤 하잖아?’
사실 이렇게 가볍게 생각하면 안 되는 일이었다.
28살에 화경의 경지에 올랐다는 건 이른 나이에 현경의 경지에 도달할 가능성이 있단 뜻이었다.
진무룡에 진소운, 진백호, 다른 마가의 힘까지 합치면 모든 집단을 압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일을 진행한 게 틀림없었다.
‘무조건 저놈을 죽여야 돼.’
여기서 살려 보내면 중원에 악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너무 컸다.
‘암습한다.’
백서휘는 모용중광과 진무룡의 싸움을 관찰하며 공격하기 가장 좋은 시점을 기다렸다.
‘그래, 잘 싸운다. 그렇지! 거기서…….’
모용중광은 쌓인 경험이 어딜 가지 않는 건지 위기에서 벗어나서 진무룡과 다시 백중세에 돌입했다.
진무룡의 주먹과 모양중광의 검이 맞부딪힐 때마다 불꽃이 튀었다.
“늙다리! 검술이 제법이야!”
“이놈!”
“하하하! 할 줄 아는 말이 그거 말고는 없나?”
분노한 모용중광이 검에 내력을 가득 담아 크게 휘둘렀다.
그런데 그 동작이 너무 커 옆구리가 훤히 드러났다.
진무룡은 언제 도발했냐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옆구리에 발을 꽂아 넣으려 했다.
백서휘는 조금의 기척도 내지 않고 그의 뒤로 돌아갔다.
그때 한주희가 있는 쪽에서 귀청을 울리는 굉음이 들려왔다.
‘무슨 일이지? 전투라도 벌어진 건가? 도와주러 가야 하나?’
백서휘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지금 진무룡을 죽이지 않으면 기회가 없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백서휘는 들려오는 소리를 무시하고 진무룡의 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경천신뢰!’
알고 있는 초식 중 가장 빠른 초식을 펼쳤는데 진무룡은 막아냈다.
놀라운 건 모용중광의 공격까지 한 번에 방어해냈다는 점이었다.
‘젠장!’
진무룡을 암습할 기회가 너무 허무하게 날아갔다.
갑작스럽게 들려온 굉음이 진무룡을 잔뜩 경계하게 만든 것 같았다.
‘제기랄! 어쩔 수 없지.’
이제는 모습을 드러내고 싸울 수밖에 없었다.
“모용중광! 합공이다!”
백서휘는 은형잠종술을 풀면서 말했다.
“관주가 여긴 어떻게…….”
“궁금증은 나중에 풀어!”
“아, 알겠소.”
백서휘는 진무룡에게 달려들어 눈에 빠르게 사연격을 날렸다.
진무룡은 힘겹게 그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때 모용중광이 빈틈을 노리고 검을 찔러 들어왔다.
“비겁하다!”
“나는 너희 같은 개자식을 상대할 때면 얼마든지 비겁해질 수 있어.”
백서휘가 성난 맹수처럼 으르렁거렸다.
“수호문의 문주가 그래도 되는 건가?”
“뭘 모르는군. 수호문은 중원만 지킬 수 있으면 인륜이 허락하는 선에서 뭐든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이 대대로 내려오는 곳이다.”
“쓰레기 같은 곳이군.”
“너희들만 할까?”
정곡에 찔렸는지 진무룡은 더 말하지 않았다.
그때 한주희가 있는 쪽에서 고음의 비명이 들려왔다.
한주희가 내는 소리인지 다른 여자의 소리인지 구별하기가 쉽지 않았다.
‘어쩌지?’
백서휘는 한주희와 모용중광을 두고 저울질해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용중광이 더 중요했다.
모용중광은 무림맹의 맹주이자 최고 고수였다.
혹여라도 죽게 되면 정파의 전력이 크게 하락하게 된다.
중원에 사는 절대다수를 위해서는 한주희를 돕는 것보다는 모용중광을 돕는 게 맞았다.
‘소검후란 별호를 괜히 가진 게 아니니 잘 싸우겠지.’
백서휘는 마음을 다잡으며 다음 공격을 준비했다.
그는 아까의 실패를 만회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경천신뢰!’
다시 한번 시도했는데도 이번에도 진무룡의 주먹에 막히고 말았다.
눈빛과 움직임을 보면 쾌의 무리에 통달한 거로 보였다.
이런 놈에게는 어떠한 빠른 공격을 가져와도 통하지 않는다.
‘다른 무리로 상대하면 돼.’
백서휘의 전투 경험으로 볼 때 진무룡 같은 놈에겐 압력으로 짓누르는 중(重)의 무리나 모든 걸 깨부수는 강(强)의 무리에 약했다.
‘죽여주지.’
백서휘는 진무룡을 노려보면서 검병을 쥔 손에 힘을 불어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