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153화
백서휘가 도화루를 나서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조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도 이만 가보겠습니다.”
조서가 정중한 어조로 말했다.
“아니, 벌써요?”
“취한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취기는 내공으로 내보내면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 비싼 술들을 먹은 게 아까워지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다들 즐겁게 드시고 내일 학무관에서 봅시다.”
조서는 미소 띤 얼굴로 말하고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얼굴을 굳혔다.
“너무 늦게 나온 건가.”
주위를 둘러보는 데 백서휘가 보이지를 않았다.
의심받지 않기 위해 약간의 시차를 두고 나온 게 실수였던 것 같았다.
“그래도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골목 사이로 들어간 조서는 건물의 지붕 위로 올라갔다.
처음 하는 게 아닌 듯 그 동작이 무척 능숙하고 가벼웠다.
완전히 올라선 조서는 백서휘의 집 쪽으로 가는 길을 훑어봤다.
‘찾았다.’
점처럼 작게 보이지만 체형과 입은 옷이 좀 전에 떠난 백서휘와 닮았다.
조서는 품에서 은신(隱身)의 술과 원견(遠見)의 술이라고 경면주사로 적힌 부적을 하나씩 꺼내 양손에 하나씩 쥐었다.
그 상태에서 수인을 빠르게 맺고 진언을 외우니 부적이 손안에서 타들어 가며 사라졌다.
조서의 몸이 조금씩 투명해지면서 기척과 모습이 사라졌고, 눈에는 적광이 어리면서 한참 멀리 떨어진 백서휘를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가깝게 볼 수 있게 됐다.
“음?”
백서휘는 뒤에서 느껴진 시선에 뒤를 돌아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백날 찾아봐라. 찾아지나.”
인간의 눈으로는 뭔 짓을 해도 조서의 술법을 꿰뚫고 찾아낼 수 없었다.
백서휘는 일단은 아이들부터 먼저 살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집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의외의 광경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이놈들은 또 왜 이러는 거야?’
금태평과 진운이 맹렬한 기세로 싸우고 있던 것이다.
‘말려야 하나?’
둘 다 살초를 펼치고 있지는 않지만 검과 주먹에 담긴 힘이 너무 강했다.
계속 뒀다가는 누구 하나 크게 다칠 판이었다.
‘아직은 괜찮아. 그런데 강호랑 소유는 어딜 간 거지?’
그때 어디선가 들린 작은 흐느낌 소리에 백서휘는 그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서강호는 기절한 상태였고 방소유는 그 옆에 앉아서 훌쩍거리고 있었다.
‘두 아이를 떼어놓은 이후에 강호 상태를 확인해야겠어.’
백서휘는 구천현현보를 밟아 두 아이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주먹과 목검은 그의 손에 막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스, 스승님!”
“싸우지 말고 가만히 있어.”
백서휘는 금태평과 진운에게 경고의 의미를 담아 차갑게 말했다.
“네…….”
두 아이가 서로를 탓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동안, 백서휘는 서강호의 완맥에 손을 가져갔다.
소량의 진기를 불어넣어 서강호의 몸 전체를 샅샅이 살폈으나 큰 이상은 발견하지 못했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서강호에게서 손을 뗐다.
백서휘는 씩씩거리고 있는 두 아이에게로 갔다.
“스승님! 진운 형이 먼저 친 거예요. 저는 방어한 죄밖에 없어요. 그리고 강호 형을 저렇게 만든 것도 진운 형이에요.”
“네 공격에 반격하려다가 강호 형이 저렇게 된 거잖아! 그리고 애초에 싸움의 원인을 제공한 것도 너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 마! 질문이 맘에 안 들었으면 그만하라고 말하면 되는 거 아니야? 근데 형은 어떻게 했지? 주먹으로 내 턱을 쳤잖아!”
두 아이의 말이 뒤섞여 만들어낸 소음이 백서휘가 미간을 찌푸리도록 만들었다.
“조용!”
백서휘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하자 두 아이는 조용해졌다.
“둘 다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만 대답해. 내 허락 없이 입 열면 그때는 너희를 파문시킬 거야. 알았어?”
두 아이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먼저 태평이의 턱을 친 게 사실이야?”
“……네.”
“왜 쳤는데?”
“말하기 싫은 걸 태평이가 자꾸 캐물어서 그랬어요.”
“태평이 말대로 그만하라고 했으면 됐잖아. 턱은 왜 친 거야?”
“눈치를 줬는데도 계속 물어봐서 저도 모르게 그만…….”
진운이 입술을 질끈 깨물며 고개를 푹 숙였다.
“금태평.”
“네.”
“어떤 걸 캐물은 거야?”
“스승님이 있었던 자리에서 제가 진운 형한테 ‘복건성 복주에서 왔으면 유성권 진천 대협에 대해 알겠네’라고 했던 적이 있었잖아요.”
“아니, 부연 설명 말고 어떤 질문을 했는지만 말해.”
“왜 아들인 걸 밝히지 않고 거짓말한 거냐고 물어봤어요.”
“몇 번이나?”
“……그, 그건 안 세어봐서.”
“많이 물어본 건 맞아?”
“네.”
백서휘는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진운이 겪은 일을 모두 알지는 못하지만, 대강은 알았다.
그랬기에 진운이 왜 그런 건지는 이해가 됐다.
물론, 이해가 된다고 해서 사제의 턱을 친 게 정당화되는 건 아니었다.
금태평의 말대로 그만하라고 말로 했으면 끝났을 문제니까.
‘악의로 그런 거면 태평이한테 벌을 주겠지만 그건 또 아닌 것 같네.’
금태평이 일부러 놀리려고 그런 거였다면 진운이 바로 알아차렸을 거다.
‘눈치 없다는 이유로 아직 어린 태평이에게 벌을 줄 수도 없고……. 잠깐, 이거 내가 꼭 답을 찾을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한번 물꼬가 터지니 좋은 생각이 계속 떠올랐다.
‘다들 부족한 점이 있으니까 그걸 보완할 만한 과제를 줘서 스스로 답을 찾게 하자!’
무인의 관점으로 보면 싸운 둘 말고도 넷 모두에게 치명적인 문제가 존재했다.
일단 가장 큰 문제를 가진 건 진운이었다.
실력이 있든 없든 감정이 상했을 때 주먹부터 나가는 건 절대 해서는 안 될 짓이었다.
지금 진운이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강호로 나가게 되면 분명 큰 화를 당하게 될 테니까.
두 번째로 큰 문제를 가진 건 금태평이었다.
눈치가 없는 놈은 강자를 알아보지 못해 죽거나, 나서야 할 때와 나서지 말아야 할 때를 구분하지 못해 죽게 된다.
처음 진운이 대답을 피했을 때 어련히 눈치 있는 사람이었다면 굳이 여러 번 묻지 않았을 테니까.
세 번째로 큰 문제를 가진 건 방소유였다.
방소유는 어린 나이이기도 하니 당황스러운 일을 마주했을 때 저런 반응이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무인으로서는 그래선 안 되었다. 적을 만났을 때 그 적이 울음을 그칠 때까지 기다려 줄 리는 없으니까.
그리고 울기만 해서는 사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을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네 번째로 큰 문제를 가진 건 서강호였다.
말리다가 기절했다는 건 시야 밖에서 들어오는 공격을 포착하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이러면 암습을 당해 죽거나 눈 먼 칼에 죽을 가능성이 굉장히 컸다.
‘이제 과제를 내줘야 하는데…….’
때마침 시의적절하게 서강호가 정신을 차렸다.
“여긴…….”
“우리 집이다.”
“끄윽!”
서강호가 머리가 아픈지 관자놀이로 손을 가져갔다.
“몸 상태 괜찮으면 앉고, 별로면 그냥 누워서 내가 하는 말 들어.”
“네.”
서강호는 낑낑거리며 자리를 잡고 앉았다.
“너희들에게 과제를 내줄 거다.”
“……과제요?”
“너희들이 서로에게 저지른 잘못을 따지고 혼내고 이럴 생각 없어. 나는 스승님한테 그런 교육을 안 받았거든. 대신, 스승님에게 하나는 배웠어. 부족한 점을 알게 하고 그것을 깨닫게 하는 거. 지금 나는 너희들에게 부족한 점을 알게 하고, 그걸 어떻게 하면 나아지게 할 수 있는지 알려줄 거야. 진운!”
“네.”
“네게 불편한 감정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태평이한테 주먹부터 날리고 봤지?”
“네.”
“너는 그 버릇을 고쳐야 돼.”
“……그러면 옛날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러고 싶지 않아요.”
“뭐?”
“언제나 바보처럼 계속 참아왔어요. 무슨 말을 듣든, 무슨 짓을 당하든. 근데 그걸 여기서 또 하라고요? 저는 그렇게는 못 하겠어요.”
진운이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울분을 터뜨렸다.
“누가 바보처럼 계속 참으래? 말로 해보고 그래서 안 되면 그때 손이든 검이든 쓰라고. 강호에 나가서도 피만 보고 살 거야? 장래에 살광이라는 별호라도 얻고 싶어?”
“……무조건 참으라는 말은 아니시죠?”
“세 번 경고해보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은 상대에게 주먹을 쓰든, 창을 쓰든 그건 네 맘이야.”
“그게 과제인가요?”
“아니, 이건 강호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나 알려주는 지침이고, 과제는 다른 거야.”
“뭔데요?”
“도화루에서 점소이 일을 해라.”
“예?”
진운은 황당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백서휘를 바라봤다.
“점소이는 강호에서 가장 부당한 일을 많이 당하는 직업이야. 일하면서 감정을 죽이는 법을 배워. 다음은 금태평.”
“네.”
“너는 눈치를 좀 키워야겠다.”
“저는 눈치가 없지 않은데요?”
“봐봐. 지금 너의 대답이 눈치가 없다는 증거야.”
백서휘가 어이가 없다는 시선으로 금태평과 눈을 마주쳤다.
“상대와 싸울 때든, 싸우지 않을 때든 항상 상대를 살펴봐. 평소에 이렇게 눈치를 억지로라도 늘려놓지 않으면 강자를 알아보지 못하고 죽거나 나서야 할 때와 나서지 말아야 할 때를 구분 못 해서 죽게 될 거야.”
“……명심할게요.”
“과제는 진운과 같다. 점소이로 일하면서 계속 시험을 해봐.”
“시험이요?”
“가게로 들어온 손님을 보고 어떤 요리나 술을 시킬 것 같은지, 무인인지, 양민인지, 어떤 지역에서 왔는지 등을 혼자 속으로 생각해보는 거야.”
“그렇게 생각을 하고 주문을 받을 때 맞춰보면 되겠네요?”
“그래. 근데 이렇게 말했다고 가게로 들어온 손님만 그러지 말고 탁자 앞에 앉은 손님의 감정이 어떤지, 돈이 나올 것 같은지 이런 것도 시험해. 알았어?”
“네.”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도화루 가서도 둘이 싸우면 파문이란 거 명심해.”
“네!”
금태평과 진운이 한목소리로 외쳤다.
“다음은 소유. 너는 다른 거 없어. 울어도 좋으니까 상황이 벌어지면 가만히 있지 말고 행동할 생각을 해.”
“……그게 과제예요?”
“아니, 과제는 우리 누나를 따라다니면서 행동 양식, 생각 같은 걸 배우는 거야. 우리 누나가 눈물이 많지만 할 건 또 하는 사람이거든.”
“언제부터 하면 돼요?”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그럼 내일부터 할게요.”
“그러든가.”
백서휘의 시선이 서강호에게로 향했다.
“강호 너는 과제가 간단해. 시야 밖에서 들어오는 공격을 포착할 수 있게 나랑 수련을 하는 거야.”
다들 서강호를 불쌍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어, 얼마나 오래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지금처럼 온종일이지, 뭐. 아! 생각해 보니까 밤이랑 새벽에도 하는 게 좋겠네.”
“밤이랑 새벽요?”
“부지불식간에 들어온 공격을 막는 훈련을 하려면 밤이랑 새벽에도 하는 게 맞지. 적의를 가진 공격이 어디 낮밤을 가리고 들어오겠어?”
“끄응.”
서강호가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그, 그러면 저는 잠을 어디서…….”
“어느 정도 단련이 될 때가지는 여기서 자야지, 뭐.”
“백 사범님이 허락 안 할 것 같습니다.”
“아, 그래. 누나한테 허락을 맡아야겠네. 다들 잠깐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소유랑 강호 건에 대해서 물어보고 올 테니까.”
바로 신법을 펼쳐 이동한 백서휘는 백은하에게 허락을 구했고, 그녀는 흔쾌히 승낙했다.
“누나가 얼마든지 있어도 좋다는데?”
“과, 관주님, 아니, 스승님의 조카도 있고 한데…….”
“괜찮으니까 마음 편안히 먹고 수련해.”
백서휘도 서강호의 마음을 모르는 게 아니었다.
‘수련이 싫긴 하겠지만 어쩌겠냐. 약하면 죄인이 되는 세상에서 죄인이 되지는 말아야지.’
백서휘가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었다.
“너희들은 이런 내가 고맙지 않아? 사형제가 싸웠는데 몽둥이 대신 이렇게 과제를 내주는 스승이 중원 어디에 있어? 거기다 부족한 점도 지적해서 보완하게 해주고 말이야.”
세 제자와 방소유는 합리화하는 백서휘를 보며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고맙지? 고마우면 잘해! 알았어?”
“네!”
“자, 그러면 오늘은 이만 해산!”
서강호를 제외한 모두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오늘은 보고할 만한 정보가 없군.”
연무장에서 있었던 일을 모두 지켜본 조서는 속에서 나무로 된 조각상을 꺼냈다.
그가 진언을 외우며 허공에 던지니 나무로 된 조각상이 매로 바뀌었다.
“아직까진 특이사항도 없고 ‘작전이 진행되는 곳’으로 떠날 생각도 없어 보인다고 군사에게 전해.”
끼룩!
매가 날개를 펄럭거리며 저 멀리 날아갔다.
조서는 백서휘가 머무는 집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어딘가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