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152화
보름 후.
백서휘는 아이들을 가르치러 가기 전에 정하진의 집무실부터 먼저 들렀다.
새로 오게 될 사범들과 관련해서 할 이야기가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무슨 이야기일까 추측하며 걷다 보니 금방 집무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문 위에 달린 종을 울렸다.
따르릉!
“처남인가?”
“예.”
“들어오게.”
문을 옆으로 밀고 안으로 들어가니, 몸집이 작은 남자와 정하진이 백서휘를 반겨주었다.
백서휘는 정하진에게 눈빛으로 옆에 있는 자가 누구냐고 물었다.
“이번에 새로 오게 된 사범 중 하나네.”
“만나서 반갑습니다. 권각술과 보법을 가르치게 될 ‘조서’라고 합니다.”
조서가 얼굴에 미소를 띤 채 백서휘에게 포권을 했다.
“백서휘라고 한다.”
“듣던 대로 호방한 분이시군요.”
“누구한테 들었는데?”
“여기저기서 많이 들었습니다. 하하.”
백서휘는 에둘러 말하는 조서를 보며 이상야릇한 기분을 느꼈다.
“이런, 제가 맘에 안 드시나 보군요.”
“맘에 들고 안 들고를 따지기엔 우리의 만남이 너무 짧지.”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다행입니다. 관계란 건 시간과 정성을 들이면 좋아지니까요.”
“안 좋아지기도 하지.”
백서휘가 말을 하면서 조서에게 기파를 은밀히 날렸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고?’
조서는 강호에 잘 알려지지 않은 특수한 무공을 익힌 사람 같았다.
미심쩍은 마음이 들어 정보를 캐물어 보려고 한 순간, 그가 정하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도화루로 가는 것 잊지 마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럼…….”
조서가 정중하게 포권을 한 후 정하진의 집무실을 나갔다.
“저 사람 뭐 하는 사람인지 아십니까?”
“강호에 그리 명성이 있는 무인은 아니지만, 이 바닥에서는 권각술을 잘 가르치기로 유명하다더군.”
“신원 확인은 다 끝났습니까?”
“하오문과 개방의 정보를 교차 검증했는데도 특별하게 뭐가 나오지 않은 걸 보면 평범한 무인임이 틀림없네.”
백서휘의 본능은 조서를 믿어서는 안 될 놈이라고 경고했다.
‘감을 믿어서 손해 본 적이 거의 없는데…….’
조서를 예의주시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궁금했던 점 중 하나를 물었다.
“도화루로 가라고 한 건 뭐 때문에 그러신 겁니까?”
“저자들 말고도 새로운 사범이 둘이나 더 있네. 서로 얼굴은 알아봐야 하지 않겠나 싶어서 술자리를 마련했네.”
“술을 잘 안 드시는 분이 술자리를요?”
“나를 대신해서 자네가 참석해야 하는 자리라 이리로 부른 거네.”
“언제까지 가면 되죠?”
“시간은 유시(酉時, 오후 5시∼7시)니까 잊지 말고 가게.”
“네.”
백서휘는 집을 향해 응룡비천신법을 빠르게 펼쳤다.
최대한 시간을 짜내서 가르쳐야 하기에 전력으로 달렸고, 그 덕에 굉장히 일찍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느새 온 건지 집엔 아이들이 수련할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슬쩍 보니 서강호는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참선을 했고, 진운은 목창으로 허공을 찔렀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걸 반복했다.
금태평은 준비할 거라고는 몸밖에 없는 터라 진짜 열심히 몸만 풀었다.
방소유는 그들이 하는 행동을 구경했는데 진운에게 가장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진운은 무공에 빠져 그녀의 시선이 얼굴의 옆모습과 탄탄한 몸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자자, 주목!”
준비를 하던 아이들이 백서휘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오늘도 이전에 했던 것과 다른 게 하나도 없으니까 똑같이 하면 된다.”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로 간의 거리를 벌렸다.
서강호는 추와 연결된 쇠사슬을 집어 들더니 대검의 검신에 칭칭 감기 시작했다.
묵묵히 수련 준비를 하는 그를 보니 제자로 들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강호는 크게 숨을 내뱉으며 손에 묻은 땀을 바짓자락에 닦아냈다.
그다음 대검을 곧추세우고 이쪽을 바라봤다.
‘처음보다 무게가 꽤 많이 증가했을 텐데 손이나 팔에서 떨림이 보이지 않네.’
서강호가 근육을 단련하기 위해 많은 정성을 쏟고 있다는 증거였다.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몇 단계로 할 거지?”
백서휘가 흥미롭다는 눈으로 서강호를 바라봤다.
“다섯 단계로 속도를 조절해 볼 생각입니다.”
“바로 그렇게 다음 단계로 넘어가도 되겠어?”
“그럴 만한 실력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호오! 좋아, 한번 보여 줘봐.”
서강호는 대검을 머리 위까지 치켜올렸다가 아래로 내리쳤다.
회전에 실린 힘에 끌려갈 법도 한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땅에 단단히 뿌리를 내린 거목처럼 굳건하게 서 있었다.
“됐어. 그만.”
지적을 받을 거라고 생각한 서강호는 긴장한 표정으로 백서휘를 바라봤다.
“강호 너는 이쯤 하고, 저기 좀 떨어진 곳에 가서 혼자 수련해.”
“알겠습니다.”
통과했단 사실이 못내 기뻤지만 서강호는 마음속에 있는 환희를 겉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그는 표현하는 것보다는 숨기는 것에 익숙한 쪽이었다.
“자, 다음은 금태평.”
금태평은 백서휘 앞으로 와 호왕무를 펼치기 위해 자세를 잡았다.
일찍부터 배웠던 터라 그는 호왕무에 어느 정도 숙련이 된 상태였다.
“시작하겠…….”
“잠깐만.”
“예?”
“호왕무은 많이 봤으니까 맹호은림보 수련할 준비를 해봐.”
“……네.”
금태평은 굳은 얼굴로 대답하고 자세를 잡았다.
무공에 대한 재능이 세 사람 중 가장 떨어지는 편이란 걸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끽해야 보름 동안 배운 무공을 펼치는 게 그는 부끄러웠다.
잠시 미적거리자 백서휘가 재촉했다.
“안 할 거야?”
“하, 할게요.”
금태평은 머릿속으로 어떤 식으로 발을 내디디고 떼는지를 떠올린 후 맹호은림보를 펼치기 시작했다.
휘리릭! 휘릭!
바람을 가르며 움직이지만 어설픈 면이 많이 보였다.
한계까지 밀어붙이지 않고 다른 이들처럼 평범하게 연습한 티가 많이 났다.
백서휘의 표정이 썩 좋지 않지만 금태평은 그래도 끝까지 맹호은림보를 멈추지 않았다.
“그만.”
백서휘는 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면서 오른쪽 눈썹 위를 긁적거렸다.
“태평아.”
“예.”
“내가 널 왜 제자로 받아들인 건지는 너도 잘 알고 있지?”
금태평이 습막 어린 눈동자로 백서휘를 보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수련할 때도 그런 모습을 보였으면 좋겠어. 더 독하게! 더 열심히! 이거 아니면 죽는다는 마음으로! 알았어?”
“……네.”
“목소리가 너무 작다. 기운차게 대답해 봐. 지금부터는 수련할 때 더 독하게 하는 거야. 알았어?”
“예!”
“가서 혼자 수련하는데 호왕무는 당분간 잊지 않을 정도로만 수련하고, 나머지 모든 시간은 맹호은림보에 할애해.”
“예!”
“가보고 다음은…… 진운 나와.”
진운은 백서휘 앞에 자리를 잡고 목창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네 실력도 제법 물이 오른 것 같으니 이번엔 천뢰신창과 뇌룡보의 연계를 보겠다.”
“어떤 식으로요?”
“2장 정도 거리를 벌린 후에 뇌룡보로 빠르게 달려와서 천뢰신창의 일초식을 펼쳐봐.”
진운이 거리를 벌리고 서서 심호흡을 세 차례 했다.
자기만의 신호라도 있는 걸까?
마지막 호흡을 내뱉은 순간, 전광이 일면서 진운의 신형이 길게 늘어졌다.
파지지직!
잠시 후, 진운이 제대로 된 모습으로 나타나서는 백서휘의 울대 쪽으로 목창을 찔렀다.
백서휘는 최단거리로 날아오는 목창을 고개를 젖혀 피했다.
연이어 공격이 이어질 법도 한데 창은 그대로 진운의 손에 있었다.
왜 그런가 싶어 보니 그의 호흡은 고르지 않았다.
전력을 다한 탓에 딱 한 번의 공격으로 지친 것 같았다.
“진운 너는 천뢰신창이랑 뇌룡보 수련보다 마보나 달리기를 열심히 하고, 아침저녁으로 천의일기공 수련하는 시간을 늘려.”
백서휘는 말하면서 걸어놓은 정신 방벽을 다 풀었다.
그냥 쉽게 쉽게 가르치려고 이러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체력이 필요하단 걸 진운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진심이란 걸 알게 된 진운은 침울해하지 않고 오히려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운이는 저리 가서 수련하고 다음 사람 나와.”
반장들을 가르친다는 명목으로 따로 시간을 마련한 것이기에 방소유의 무공 수련도 도와야만 했다.
“오늘도 저번처럼 이십사수매화검법의 초식을 처음부터 끝까지 펼쳐.”
“네…….”
방소유가 구슬땀을 흘리며 이십사수매화검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용봉(龍鳳)이라고 불리는 후기지수들보다 얘가 더 재능은 뛰어난 것 같은데…….’
아버지가 무림인에 대한 편견은 없지만 유림(儒林)이라는 사회가 가지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방소유가 여류 고수가 되는 일은 힘들어 보였다.
‘나이 차면 정략결혼을 하겠지.’
방소유처럼 재능을 꽃피우지 못하는 이들이 많으리라 생각하니 괜히 가슴이 답답해졌다.
“자, 이제 그만.”
방소유가 똘망똘망한 눈으로 백서휘를 바라봤다.
그래도 제법 익숙해졌는지 이제는 시선을 피하거나 자신을 어색해하지 않았다.
“초식의 완성도가 점점 좋아지네. 열심히 수련하는 모양이야.”
“……집에서도 계속 수련해요.”
“그래, 다행이네. 근데 아버지가 뭐라고 안 하시니?”
“아무 말씀 안 하셔요.”
“그러면 다행이긴 한데…….”
“왜요?”
“아니야. 너는 저기 가서 수련해.”
“네.”
백서휘는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때까지 아이들의 수련을 지켜봤다.
그러다 지금쯤 가야 할 곳이 있단 걸 퍼뜩 깨달았다.
“잠깐 갔다 올 때가 있으니까 내가 올 때까지 계속 수련하고 있어.”
“네!”
백서휘는 전력으로 응룡비천신법을 펼쳐 도화루로 향했다.
그래도 일찍 출발한 탓에 약속 시간에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다.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안으로 들어가니, 조서를 제외한 다른 사범들이 각을 잡고 앉아 있었다.
백서휘는 사범들이 앉은 곳으로 갔다.
“다들 만나서 반갑다. 난 백서휘라고 한다.”
“반갑습니다. 이번에 학무관에서 창 부문을 가르치게 된 손정이라고 합니다.”
“저는 도 부문을 가르치는…….”
“저는 활을 가르칩…….”
백서휘는 자기소개를 들으며 머릿속에 사범들의 특징과 이름을 입력했다.
‘이 사람들 임금이며 일하는 시간은 매형이 다 합의를 봤겠지.’
친분이 조금도 없으니 진솔한 이야기를 할 수도 없었고, 그들의 업무에 대해서도 잘 몰라 대화 주제를 잡기 힘들었다.
‘저치들이나 날 위해서는 그냥 이쯤에서 빠져주는 게 낫겠군.’
백서휘는 사범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이! 이리 좀 와봐!”
점소이가 부리나케 달려와 고개를 조아렸다.
“나 누군지 알지?”
“학무관의 관주님이시고 저희 지부장님이랑 막역한 사이이신 백서휘 대협 아니십니까.”
“잘 알고 있네.”
“모를 리가 없죠.”
“알고 있으니 말할게. 이제까지 저 자리에서 먹은 거랑 앞으로 먹을 것 다 내 이름으로 달아놔. 다음에 올 때 계산할 거니까.”
“알겠습니다. 그런데 다른 용건은 없으시죠?”
“없어.”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백서휘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출구로 걸어가는데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흥미로운 이야기가 들려왔다.
백서휘는 가던 길을 잠시 멈추고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자네 그 이야기 들었나?”
머리가 다 까진 중년 남자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조용히 얘기했다.
“어떤 이야기 말인가?”
“천마의 보물을 얻으면 세상을 얻게 된다는.”
“천마?”
“상고시대에 있었던 그 천마 모르나?”
“이 친구 취했나. 상고시대 사람 물건이 지금까지 어떻게 남아 있겠어. 아마 도굴꾼들이 싹 다 쓸어갔을걸. 그리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몇 년이 지났는데 보물이 남아 있겠냐고. 영약은 다 썩어 없어졌을 테고, 도검도 녹슬었겠고, 무공이 적힌 비급도 삭았을 것 같은데…….”
염소처럼 수염이 난 남자는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생각해 보니 그렇구먼. 당장 100년만 지나도 땅에 묻으면 사라지는 것들이 그렇게 많은데 그때부터 지금이면…… 자네 생각보다 똑똑했군!”
“날 뭐로 본 거야. 그럼.”
“하하하.”
두 사람의 이야기를 계속 더 엿들어봤지만, 천마의 보물에 관한 건 나오지 않았다.
‘지남침이랑 장보도에 술법을 걸어놓은 걸 보면 보물에도 술법을 걸어서 잘 보존되어 있을 가능성이 커. 그리고 그곳으로 안내해줄 장보도랑 지남침은 나한테만 있으니 나중에 찾으러 가도 문제없을 거야.’
백서휘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도화루를 나섰다.
조서는 밖으로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슬쩍 보며 히죽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