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138화
검집에서 검을 빼 든 현명이 점점 거리를 좁혀왔다.
가까워질수록 그가 사람이 아니라 한 자루의 검처럼 느껴졌다.
‘신검합일(身劍合一)?’
아직 검격을 나누지도 않았는데도 현명이 제법 검을 잘 쓰는 고수란 느낌이 왔다.
‘공격 범위에 들어오면 바로 경천신뢰부터 날린다.’
백서휘가 어떤 식으로 공격할지 결정하며 검신에 검강을 담았다.
현명 역시 지지 않겠다는 듯 검에 검강을 만들어냈다.
‘한 걸음만 더……!’
백서휘는 공격 범위에 현명이 들어오자마자 경천신뢰의 초식을 펼쳤다.
웬만한 무인은 ‘반응’조차 못 하는 초식을 현명은 어렵지 않게 ‘대응’했다.
쾅!
두 사람의 검이 맞부딪히는 순간, 빙기(氷氣)가 백서휘의 몸속으로 침투해 들어왔다.
‘빙기?’
백서휘는 미간을 찌푸리며 속으로 욕지거리를 지껄였다.
빙공 중에서도 상승 무공인 것들은 이렇게 빙기를 상대 몸에 침투하게 한다.
빙기가 쌓일수록 몸이 굳고 내공의 이동 속도를 늦춰지게 하므로 재빨리 제거해야 한다.
‘그게 쉽지 않아서 문제지. 제기랄! 빙기도 독령이 처리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처리할 수 있습니다. 대신, 그렇게 되면 주군의 내력을 기독으로 바꾸는 일을 멈춰야 합니다.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좋아, 그러면 일단은 빙기가 쌓이는 걸 막아.’
기독을 실전에 써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목숨이었다.
자신보다 명백하게 하수인 현명과 욕수에게서 승리를 가져오려면 최상의 상태로 몸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일단은 거리를 벌리면서 공략법을 생각해보자.’
그때 뒤에 있던 욕수가 비호처럼 달려들어 강기가 깃든 손톱을 휘둘렀다.
백서휘는 검으로 방어하는 한편, 돕기 위해 달려오는 현명에게 수강(手罡)을 흩뿌렸다.
기세 좋게 달려오던 현명이 가만히 멈춰서서 수강을 조각냈다.
“으아아악!”
“사람 살려!”
“피, 피해!”
파편화된 강기가 사방으로 비산하며 객잔을 부수고 명성교 잔당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제기랄! 이곳은 위험하니까 다들 다른 곳에 가 있어!”
현명이 날아오는 수강을 검으로 쪼개며 소리쳤다.
명성교의 잔당들은 황급히 반쯤 부서진 객잔을 빠져나갔다.
카가가강! 카캉!
욕수가 갈고리 모양의 손을 백서휘의 왼쪽 가슴을 향해 내뻗었다.
그와 동시에 현명이 우측에서 일직선으로 쭉 검을 찔러 들어갔다.
‘혼자서는 안 되니 양쪽에서 공격하겠다? 언제까지 그럴 수 있는지 한번 보자.’
백서휘는 구천현현보를 밟아 뒤로 물러나면서 명성교의 잔당들을 향해 장풍을 날렸다.
“끄아아악!”
“커억!”
명성교의 잔당들이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르며 죽어갔다.
혼천회 소속이 된 욕수는 외면했지만, 현명은 달랐다.
그에겐 아직 명성교에 대한 마음이 남아 있었다.
“제기랄!”
현명은 작게 욕지거리를 내뱉은 후 명성교의 잔당들을 구하러 갔다.
같이 공격을 가하던 욕수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현명!”
“잠깐 막고 있어.”
혼자 상대하는 건 힘들다고 여겼는지 욕수는 수세를 취하는 것으로 전략을 바꿨다.
백서휘는 간간이 명성교의 잔당들에게 장풍을 날리면서 매섭게 그를 공격했다.
“언제 올 거냐고!”
“완전히 퇴각시킨 후에 갈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캉캉캉캉캉캉! 카앙!
백서휘는 일정한 박자로 공격하다가 갑자기 엇박자로 욕수를 공격했다.
“젠장!”
욕수는 다급히 호신강기를 강화하면서 양팔을 교차해 방어 자세를 취했다.
‘일검관천!’
하늘을 꿰뚫는 듯한 찌르기가 욕수의 양팔에 생기는 교차점을 찔렀다.
콰아앙!
호신강기가 깨지면서 욕수가 피분수를 내뱉으며 저 멀리 날아갔다.
전투 불능 상태에 빠진 그를 죽이기 위해 백서휘가 빠르게 달려갔다.
한 박자 늦게 알아차린 현명이 굳은 얼굴로 보법을 계속 밟았다.
‘이걸로 끝을 낸다!’
백서휘가 땅을 완전히 박살 낼 기세로 회천만일 초식을 펼치는데, 욕수와 눈이 마주쳤다.
욕수는 죽기 직전인 상황인데도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현명이 그를 구하러 올 것을 굳게 믿고 있는 듯 보였다.
“잘 가라.”
쾅!
사람의 피육을 베는 느낌이 손에서 느껴지지 않았다.
‘검사 놈이 끼어들었군.’
아니나 다를까.
현명이 검을 위로 치켜든 상태로 백서휘를 노려보며 서 있었다.
백서휘가 재차 공격하려는데 욕수가 일어서서 싸울 자세를 취했다.
‘음?’
두 사람이 입 모양을 움직이는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전음으로 무슨 얘기를 나누는 거지?’
현명이 보법을 밟으면서 검을 아래에서 위로 올려 쳤다.
쩌저적!
공기 중의 수분이 얼어붙으면서 만들어진 날카로운 얼음이 백서휘를 향해 날아갔다.
쐐애애액!
백서휘는 검을 크게 휘둘러 검풍을 일으켰다.
날아오던 얼음이 그대로 되돌아갔지만 원래 있던 자리에 현명이 없었다.
기감을 통해 움직임을 다 읽는 백서휘는 당황하지 않고 그대로 바닥을 박차고 높이 뛰어올랐다.
쾅! 쩌저저적!
조금 전까지 그가 있던 곳에 커다란 구멍이 나며 얼음기둥이 이곳저곳에서 솟아났다.
기다렸다는 듯 욕수가 백서휘를 향해 도약해 갈고리처럼 쥔 손을 휘둘렀다.
공중에 뜬 백서휘는 그가 있는 쪽을 향해 장력을 내뻗어 그 반동으로 뒤로 물러났다.
“지금이다!”
우드득!
무언가 뒤틀리는 소리가 나더니 욕수의 골격 자체가 커지고 근밀도도 더욱 탄탄하게 변했다.
특히 팔의 길이가 늘어 더 먼 곳에서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무기라고 할 수 있는 손톱도 단검처럼 길어지고 날카롭게 바뀌었다.
‘뭐야.’
깜짝 놀라 얼떨떨한 얼굴로 백서휘가 서 있는데 현명의 변화가 시작되었다.
현명의 주위로 유형화된 빙기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둘을 상대하는 난도가 이전과 달라지리란 걸 백서휘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쩌저저적!
현명의 들고 있는 검이 차가운 얼음으로 뒤덮였다.
강철의 날카로움에 기대서는 자신을 못 죽인다는 걸 깨닫고 빙기를 더욱 잘 침투시키는 형태로 바꾼 것 같았다.
‘좀 전에 전음으로 나눈 대화가 이것 때문이었구나.’
뒤늦게 알아차렸지만, 욕수와 현명의 변신은 이미 끝난 후였다.
제기랄, 어떤 수를 써서든 기회가 찾아왔을 때 죽였어야만 했어.
백서휘는 조금 전의 일을 후회하며 싸울 자세를 취했다.
기도가 달라진 두 사람을 마주하게 되니 압박감이 들었다.
지금 당장은 검병을 움켜쥔 손에 힘을 강하게 불어넣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싸우다 보면 길이 보일 거라 믿으며 백서휘는 두 사람을 향해 달려갔다.
욕수가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빠르기로 움직였다.
백서휘는 그에게 경천신뢰 초식을 펼치려 했다.
그 순간, 욕수의 손이 번개 같은 속도로 휘둘러졌다.
캉!
‘이걸 막아낸다고?’
초식에 대응하는 수준에서 끝나지 않고 아예 원천 봉쇄해버렸다.
우연이라고 생각한 백서휘가 다시 한번 경천신뢰의 초식을 펼쳤지만, 결과는 조금 전과 같았다.
캉!
욕수는 아무렇지 않게 백서휘의 공격을 차단하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몸이 경천신뢰보다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도록 변한 거지 쾌의 묘리에 통달한 것 같지는 않아.’
욕수의 공격을 견뎌내며 원인 분석을 끝냈을 때, 현명이 바닥에 빙판을 만들고 그 위를 미끄러지듯 달려왔다.
마찰력이 줄어든 탓인지 그는 맨땅에서보다 훨씬 더 빠르게 움직였다.
쐐애애액!
달려오던 속도 그대로 얼음검이 백서휘를 향해 날아들었다.
백서휘는 하늘을 꿰뚫는 듯한 찌르기로 대응했다.
‘일검관천!’
찌르기는 점으로 이루어진 공격이라 공격 범위가 제한되지만, ‘한 점’에 힘이 모두 모이는 만큼 선의 공격인 베기보다 파괴력이 더 강했다.
쾅!
쩌저적!
얼음검에 금이 가는 소리가 들리며 현명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백서휘 역시 뒤쪽으로 몸을 날려 두 사람과의 거리를 벌렸다.
‘몸에 침투하는 빙기가 이전보다 얼마나 더 많아졌는지 보고해봐.’
『최소 네 배 이상입니다. 제가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는 양보다 많으니, 접촉을 최대한 줄이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진퇴양난의 처지까지는 아니더라도 꽤 난감한 상황에 놓였다.
한 놈은 괴물 같은 육체 능력으로, 다른 한 놈은 빙기로 능력을 저하시켜 싸움의 주도권을 가져가려 하고 있었다.
‘젠장, 만만한 놈이 없군.’
처음으로 두 사람을 상대로 패배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지금 이곳이 다른 곳도 아닌 ‘장사’라는 것에 있었다.
다른 곳에서 패배할 것 같으면 그대로 작전상 후퇴한 후, 정비를 끝내고 다시 공격하면 되지만 장사에서는 그러지 못했다.
가족과 부하들 모두 장사에 살고 기반도 다 장사에 있는 만큼 패배하게 되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
‘무슨 수를 쓰긴 해야 하는데…….’
『아까 변환시키려다가 말았던 기독을 쓰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기독을?’
『지금 상황에서 변수를 만들려면 그러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만…….』
‘좋아, 한번 써보자.’
백서휘는 왼손에 수강을 만들면서 처음에 바꿔놓았던 기독을 섞었다.
‘어느 쪽에 쓰는 게 좋으려나.’
까다로운 상대에게 쓸지, 쉬운 상대에게 써서 기회를 잡아 끝내버릴지 고민이 되었다.
‘쉬운 놈에게 쓰자.’
욕수는 육체적 능력이 뛰어나지만, 기술이 완성도 있지는 않아 무섭지 않았다.
그에 반해 현명은 빙기가 계속 쌓일수록 능력이 끝없이 저하되는 만큼 상대하면서 주의할 필요가 있었다.
그때 두 사람이 백서휘를 향해 달려들었다.
백서휘는 수강을 앞서 달려오던 욕수에게 날렸다.
욕수는 가만히 멈춰 서서 날아오는 장강을 할퀴었다.
그 순간, 장강 속에 숨어 있던 기독이 뿜어져 나오면서 그를 중독시켰다.
“뭐지?”
욕수는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지만 바로 알아차리지는 못했다.
채채채챙! 카카카캉!
중간 지점에서 만난 두 사람과 백서휘는 한참 동안 공방전을 펼쳤다.
‘기독이 빨리 작용해야 할 텐데…….’
그때였다.
잘 싸우고 있던 욕수가 갑자기 뒤로 물러났다.
“욕수! 어딜 가는 거야?”
“제기랄! 진기가 흩어지고 있어!”
“뭐? 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진기가 흩어져서 신수화(神獸化)가 풀리려고 한다고!”
“뭐?”
“젠장!”
커다랬던 욕수의 덩치가 점점 줄어들었다.
팔의 길이도 원래대로 변했고 손톱 역시 이전처럼 조금 긴 수준으로 돌아왔다.
지금이 기회라는 걸 직감한 백서휘는 욕수를 향해 검을 쏘아 보냈다.
쐐애애애액!
검이 공기를 찢어발기며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현명이 욕수를 향해 달려가며 검에 장풍을 날렸다.
백서휘는 검을 회피 기동시켜 장풍을 피한 후 욕수를 노렸다.
욕수는 보법을 열심히 밟아 검을 피하면서 현명이 다가올 시간을 벌었다.
콰콰콰콰쾅!
현명이 얼음검을 미친 듯이 휘둘러 욕수를 보호했다.
백서휘는 끈질기게 욕수를 노리면서 현명을 향해 수강을 날렸다.
본인 목숨이 위험해지자 현명은 눈물을 삼키며 욕수를 보호하는 걸 포기했다.
서걱거리는 절삭음과 함께 욕수의 머리가 땅에 떨어져 굴러다녔다.
“제기랄! 크윽!”
현명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백서휘가 날린 수강을 쳐냈다.
‘둘이어서 난감했던 거지 하나라면 압도적으로 이길 수 있어.’
백서휘는 현명을 끝낼 생각으로 거리를 좁혔다.
그때였다.
갑자기 현명이 알 수 없는 진언을 빠르게 중얼거렸다.
쿠오오오!
현명의 주위에 있는 기운들이 미친 듯이 날뛰더니 북해에서나 볼 법한 눈보라가 만들어졌다.
‘미친놈! 그냥 얌전히 죽을 것이지 선천진기에 영혼까지 연료로 태워?’
백서휘는 생각과 다르게 일이 꼬여가고 있다는 걸 느꼈다.
카가가가가각!
눈에 강기라도 담겨 있는지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이 소멸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너를, 죽이고, 네가,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을, 죽이겠다!”
눈보라 속에 있는 현명이 살기가 뚝뚝 떨어지는 말투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