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137화
도화루 안에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손님이 많았다.
‘이 치들이 다 사라지고 주루까지 부서지면 손해가 만만치 않긴 할 거야.’
백서휘는 약속했던 대로 최대한 싸우지 않는 방향으로 일을 진행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낭왕이…….’
기감을 천천히 넓혀가면서 도화루 안에 있는 무림인들의 수준을 확인했다.
절대다수가 삼류 수준이었고 일류는 가물에 콩이 나듯 아주 드물게 보였다.
‘삼류, 이류, 삼류, 삼류…… 초절정! 찾았다!’
낭왕은 1층 구석에 홀로 앉아 고독한 분위기를 풍기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백서휘는 그에게로 걸어가 생글생글 웃으며 물었다.
“합석해도 되나?”
“빈자리는 아직 많소.”
“그건 나도 알아.”
“알면 다른 곳으로 가시오.”
낭왕은 백서휘를 보지도 않고 말하고는 입에 술을 털어 넣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그러는데, 진짜 합석 안 되나?”
낭왕은 고개를 치켜올려 처음으로 백서휘를 바라봤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지?”
“……난생처음 당신을 보는데 어떻게 많이 본 얼굴일 수 있겠소.”
하오문에서 용모파기를 산 덕에 백서휘란 걸 알아봤지만 낭왕은 일부러 모른 척했다.
“난생처음 보는 자의 정보는 왜 샀을까?”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구려.”
“다 알고 찾아온 거니까 모른 척은 적당히 해둬.”
백서휘는 말하면서 진득한 살기를 쏘아 보냈다.
낭왕이 벌떡 일어나 반사적으로 검집에서 검을 뽑으려 했다.
일반적인 무인보다 반응이 빨랐지만 그것도 초절정 경지 내에서 이야기였다.
백서휘는 그보다 훨씬 더 빠르게 움직여 검집에서 검을 뽑는 걸 막았다.
철컥!
깜짝 놀란 낭왕의 두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어, 어떻게…….”
“더 빠르게 움직여서.”
백서휘는 단 한 번 움직이는 것만으로 자기가 압도적인 강자라는 사실을 낭왕에게 알려주었다.
하오문의 정보와 들려오는 소문이 과장되었을 거라 생각했기에 낭왕으로서는 충격이 컸다.
‘이제 어쩔 거지?’
백서휘는 흥미롭다는 눈으로 낭왕을 바라봤다.
낭왕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어떤 식으로 행동해야 할지 계산했다.
그러다 무언가 결심이 섰는지 백서휘를 뚫어지라 노려봤다.
“물어보고 싶은 게 뭐요?”
“장사로 왜 왔는지, 내 정보를 산 이유가 무엇인지, 의뢰를 받았다면 어떤 의뢰인지, 이런 것들을 말해주면 돼.”
“그 세 개만 대답하면 되오?”
“일단은.”
칼자루를 쥔 게 자신 쪽이라 불합리한 요구임에도 낭왕은 불평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모든 걸 말해줄 수는 없소.”
“보니까 칼침 맞은 지 한참 된 것 같은데 나한테 한번 맞아볼래?”
대다수의 낭인은 몸이 재산이라 보신주의적으로 행동하는 편이 많았다.
낭왕 역시 자기 몸을 끔찍이 아꼈다.
그는 한참 고민한 끝에 몸 멀쩡히 사는 것을 택했다.
“……장소를 옮겼으면 하오.”
“그러지.”
두 사람은 도화루 최고층으로 올라가 자리를 잡았다.
낭왕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부탁이 있소.”
“무슨 부탁?”
“의뢰 내용에 대해 말하는 건 내 명성과 신뢰도가 깎이는 일인 만큼 그 손해를 어느 정도 보전해 줬으면 하오.”
“보전 안 해주면 말 안 할 건가?”
“질문에 대답할 때 교묘하게 거짓을 섞을 것이오.”
자신과 가족의 안전에 대한 정보는 천금을 주더라도 아깝지 않았다.
‘당가를 털며 가져온 돈에서 원보 몇 개를 낭왕에게 빼주면 되겠지.’
“얼마나 필요한지 말해봐.”
“금원보로 한 개를 주셨으면 하오.”
“그걸 주면 모든 질문에 진실하게 말해줘야 돼. 만약 거짓이 섞였거나 입을 다물면 그때는…… 알지?”
백서휘는 말을 마치며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알았소.”
“질문한다?”
낭왕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장사에는 왜 온 거지?”
“의뢰 때문이오.”
“의뢰 내용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말해봐.”
“다른 조는 모르겠고 나와 내가 맡은 조는 당신 가족을 생포하거나 죽이는 역할을 맡았소.”
백서휘의 눈에 무시무시한 살기가 감돌았다.
공포에 질린 낭왕은 덜덜덜 떨며 내공을 끌어올려 심신을 보호했다.
“내 정보를 산 건 가족들을 노린 의뢰를 받았기 때문인 거네?”
“……그, 그것도 있고 소문의 주인공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었소.”
“몇 명이나 이 의뢰를 받았는지 아나?”
“의뢰를 받을 때 알려주지 않아서 확실하지 않지만 최소 여덟 조에서 최대 열 조는 되는 것 같소.”
낭인은 보통 다섯 명씩 조를 이룬다.
백서휘는 이 사실을 떠올리고 속으로 몇 명인지 계산했다.
‘최소 40명에서 최대 50명이란 건가.’
아무래도 낭인이다 보니 실력이 떨어져서 최대한 많은 인원을 고용한 것 같았다.
“혹시 의뢰한 자가 누군지 아나?”
“낭인천(浪人天)을 통해 의뢰가 들어온 거라 모르오.”
“음…….”
백서휘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가 얼마나 강한지 소문이 다 났는데 낭인들을 보내는 거로 끝낸다고?’
낭왕은 낭인 중에 가장 강한 자이긴 하지만 자신 앞에서는 삼류 무인과 다를 바 없는 처지였다.
‘이놈들 말고 날 막을 다른 놈들이 있어.’
“너희들 말고 다른 놈들은 어디 있어?”
“낭인들이라면 장사 전역에 흩어져 있잖소.”
“아니, 그놈들 말고 다른 놈들.”
“다른 놈들이라면 당신을 붙잡고 늘어질 자들을 말하는 거요?”
“그래, 그놈들 말이야.”
“그자들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오.”
“위치 말고 그놈들에 대해 아는 거 없어?”
“장사에 이미 들어와 있긴 할 거요. 결행일이 얼마 안 남았으니까.”
“결행일이 언제인데?”
“이틀 후 미시(未時, 오후 1시∼3시)로 알고 있소.”
“이틀 후?”
“그렇소.”
좀만 늦게 왔으면 아무것도 못 하고 가족들이 죽었을 수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몸이 절로 떨려왔다.
“내가 알아야 할 정보가 더 있나?”
“없소.”
“아는 게 이게 전부란 거야?”
“그렇소.”
“이 정도로 금원보 하나를 받는 건 너무 욕심이란 생각 안 들어?”
“아까도 말했지만 그건 내 명성과 신뢰도가 깎인 손해를 보전하기 위해 받는 것이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많아.”
“……돈을 안 줄 생각이오?”
“누가 안 주겠대? 추가로 일 하나만 더 하자는 거지.”
“약속과 다르잖소!”
낭왕은 자기 처지가 어떤지 잊고 언성을 높였다.
“우리가 한 약속은 정보와 돈을 교환한다는 것 말고는 없어.”
“그, 그런……!”
“그리고 추가로 일 하나를 더하자는 건 나만 좋자고 하는 일이 아니야.”
“내가 좋을 게 뭐가 있소?”
“그 머리가 목에 계속 붙어 있겠지.”
백서휘의 노골적인 협박에 낭왕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추가로 하자는 일이 어떤 일이오?”
“일이 완전히 마무리될 때까지 갇혀 있어 줘야겠어.”
“그게 무슨……!”
“네가 오늘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다 말하면 날 노리는 놈들한테 역공할 수가 없잖아.”
“절대 말하지 않겠소. 그러니…….”
“그건 선택지에 없어. 네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야. 이대로 죽을지 아니면 일이 완전히 마무리될 때까지 갇혀 있을지.”
“갇혀 있겠소.”
낭왕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래, 죽는 것보다는 그게 낫지.”
“어디에 있으면 되오?”
“그건 널 기절시킨 다음에 생각해보려고.”
“기절이라니 그게 무슨…….”
백서휘가 손을 질풍처럼 빠르게 움직여 낭왕의 훈혈을 짚었다.
탁탁탁!
무방비 상태로 있던 낭왕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기절하고 말았다.
백서휘는 그를 어깨에 걸쳐 멘 후 도화루를 빠져나갔다.
‘어디에 가둬야 하나.’
학무관에는 건물이 많지만, 사람을 가둬놓을 만한 시설은 없었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서는 고수가 낭왕을 지키고 있어야 하는데 그럴 만한 전력이 백서휘 측엔 없었다.
학무관에 도착했을 때쯤 기가 막힌 생각이 떠올랐다.
‘목인걸에게 맡겨야겠다.’
최고 수준의 주술사이니 안전하게 낭왕을 구속하는 방법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아들과 만나게 해주는 조건으로 또 거래하면 되겠지.’
그렇게 목인걸을 찾아가니, 아들과 유대 관계를 더 쌓아가고 싶었던 목인걸은 흔쾌히 낭왕을 맡아주겠다고 했다.
‘참 대단해. 괴력난신의 서에 묶여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들을 이렇게 살뜰히 챙기네. 이게 부성애인가…….’
아버지의 얼굴이 흐리멍덩하게 떠올랐다.
너무 오래전에 헤어져서 또렷하게 얼굴을 기억해낼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 슬펐다.
‘상황이 안정되면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알아봐야겠어.’
학무관을 빠져나가려던 와중에 가장 중요한 일을 처리 안 했다는 게 떠올랐다.
백서휘는 부랴부랴 오룡단과 사범들을 찾아가 가족들의 경호와 학무관의 시설을 보호해 달라고 부탁했다.
십년감수했네.
백서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학무관을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기감을 최대한으로 넓힌 채 장사 전역을 돌아다녔다.
‘처음부터 나를 노리고 짠 작전이니 착실하게 준비했을 거야.’
최악의 경우를 가정하고 어떻게 싸움이 이뤄질지 생각해봤다.
둘이 자신을 물고 늘어지는 동안 나머지 하나가 가족들이 있는 곳으로 향한다면?
‘끔찍하군.’
제발 그러지 않길 기도하며 기감을 한계까지 넓혔다.
그 순간, 기감의 끄트머리에 화경의 경지에 오른 자들이 두 명이나 잡혔다.
‘이놈들이 날 붙잡는 역할을 맡은 놈들 맞겠지?’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을 죽일 수는 없었다.
백서휘는 화경의 고수가 갑자기 장사를 찾을 일이 뭐가 있을지 떠올려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을 노리는 일 말고는 생각나는 게 없었다.
‘숨어서 지켜보다가 맞다는 판단이 들면 암습을 해야겠어.’
백서휘는 은형잠종술을 펼쳐 몸과 기운 모두를 숨기고 화경의 고수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객잔에 있었군.’
안으로 들어가니 모든 인원이 식사하는 중이었다.
‘다들 똑같은 옷을 입고 있잖아?’
어디서 많이 본 옷이란 생각이 들었을 때, 화경의 고수들이 있는 곳에서 자신의 이름이 들려왔다.
“나랑 교인들이 백서휘를 물고 늘어질 테니까 네가 그놈의 가족들을 죽여.”
“그건 낭왕이 알아서 할 거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확실하게 죽이려면 네가 가야 돼.”
“내가 가면 너랑 교인들은…….”
죽는다고 말하면 진짜로 죽을 것 같아서 욕수는 끝까지 말하지 못했다.
“그놈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게 할 수 있다면 난 얼마든지 죽을 수 있어.”
“현명…….”
지켜보던 백서휘로서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대화였다.
‘더는 못 들어주겠군.’
백서휘는 강기가 휘감긴 검으로 경천신뢰의 초식을 펼쳐 현명을 공격했다.
심즉동의 깨달음을 얻었거나 후발선지의 묘리에 정통한 게 아니라면 막기 힘든 공격이었다.
검을 뽑을 시간도 없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낀 현명이 검집째로 검을 휘둘렀다.
쾅!
“누구냐!”
옆에 있던 욕수가 호랑이처럼 포효하며 강기가 깃든 손톱으로 백서휘를 할퀴려 했다.
카카카캉!
백서휘는 구천현현보를 바쁘게 밟으며 뒤로 물러났다.
“백서휘!”
현명이 객잔이 떠나가라 고래고래 악을 썼다.
“그렇게 소리 안 질러도 다 들려.”
“네놈의 목을 잘라 상제님의 영전에 바치겠다!”
“네가 상제 곁으로 가는 게 더 빠를걸.”
“크아아아!”
현명이 눈이 뒤집혀 백서휘에게 달려들었다.
욕수는 잠시 고민하다 그의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독령! 기독(氣毒)을 만들어!’
『내력을 얼마나 쓸까요?』
‘가진 내력의 칠 할.’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위험하게 된 건 내가 아니라 저놈들이야.’
백서휘는 웃는 얼굴로 검을 잡은 손에 힘을 강하게 불어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