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134화
“어, 어떻게…….”
당천익은 무슨 귀신을 보듯 백서휘를 바라봤다.
만독불침의 무인에게도 통하는 용신독(熔身毒)과 설치 면적이 작을수록 효과가 커지는 태산중압진(泰山重壓陳).
이 두 가지를 분명 겪었을 텐데도 백서휘는 성한 몸으로 서 있었다.
“부, 분명 죽었어야 했는데…….”
“가주!”
수석 장로가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린 당천익이 명령을 내렸다.
“돌격!”
당가의 무인들이 백서휘를 향해 달려들었다.
수석 장로의 손에서 나온 수십 개의 장풍이 독기를 머금고 날아갔다.
백서휘는 검강이 담긴 검으로 광풍번천의 초식을 펼쳐 장풍들을 쳐내기 시작했다.
그의 검에 맞고 날아간 장풍들이 사방팔방으로 날아갔다.
당가의 무인 중 몇몇이 튕겨 나온 장풍에 빗맞아 큰 상처를 입었다.
“이놈!”
당천익이 허리에 감고 있던 연검(軟劍)을 풀어서 손에 들고 내저었다.
휘리리릭!
연검이 살아 있는 뱀처럼 움직이며 백서휘의 전신요혈을 노렸다.
백서휘는 태연한 얼굴로 딱 필요한 만큼만 검을 써서 공격을 방어해냈다.
챙! 챙! 챙!
수석 장로는 장풍을 날리는 게 좋은 방법이 아님을 깨달았는지 기사(氣絲)로 휘감긴 쌍장을 내질렀다.
소림과 무당에만 있을 줄 알았던 초절정의 무인이 당가에도 숨어 있단 사실에 백서휘는 조금 놀랐다.
수석 장로는 백서휘가 놀란 표정을 지은 것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다.
백서휘가 당황하고 있다고 여긴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쌍장에 진기를 더 불어넣었다.
‘판단력은 초절정의 경지가 아니야.’
당천익처럼 치고 빠져야지 이렇게 수석 장로처럼 무작정 달려들면 안 됐다.
수석 장로의 실패를 예감한 당천익은 품속에서 암기를 꺼내 백서휘를 겨누었다.
‘수석 장로를 구하려는 건가?’
백서휘는 구천현현보를 밟아 수석 장로의 쌍장을 피하면서 당천익에게 장풍을 날려 견제했다.
당천익은 당가의 자랑인 혈영보(血影步)를 밟아 장풍을 피했다.
그다음 다시 한번 백서휘를 향해 막대 모양의 암기를 겨누었다.
‘가주 쪽이 경지는 낮은데 어째 판단은 더 좋군.’
슬쩍 봤는데 암기의 모양이 어딘지 모르게 익숙했다.
어디서 봤는지 기억을 더듬으니 금방 생각이 났다.
당천익이 든 암기는 정하진에게 주었던 천왕침통과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당진우의 말에 의하면 저 천왕침통은 두 발이 한계였다.
아까 방에 있을 때는 너무 많은 공격이 쏟아져 신순을 써서 막았지만 지금은 그냥 막거나 피해도 될 것 같았다.
무력에 강력한 확신이 있던 백서휘는 신순 없이 그냥 한번 맞대응해 보기로 했다.
탕! 탕!
두 개의 바늘이 시간 차를 두고 백서휘를 향해 날아갔다.
‘쉽군.’
백서휘는 허리를 젖혀 공격을 피하는 철판교(鐵板橋)의 수법을 썼다.
바늘이 배 위에서부터 코끝을 지나가는 게 보였다.
‘하나 더!’
뒤이어 날아온 바늘을 백서휘는 재주넘기를 해서 회피했다.
그때 갑자기 콩 볶는 소리가 한 번 더 났다.
탕!
‘당진우 이 개자식이 날 속였군.’
천왕침통으로 쏠 수 있는 바늘의 개수는 두 발이 끝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거기다 세 번째 바늘은 날아오는 속도가 좀 전과는 비교도 안 되게 빨랐다.
피하려면 피할 수 있고 막으려면 막을 수 있었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만 바늘이 더 발사될 수 있으니 안전하게 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독령!’
노기가 살짝 섞인 백서휘의 부름에 독령은 불똥이 튈까 싶어 조용히 기시를 날렸다.
기시는 바늘을 흔적도 남기지 않고 소멸시켰다.
백서휘는 화를 억누르며 당천익을 향해 달려들었다.
깜짝 놀란 당천익은 전력으로 무영혈독보를 밟았다.
백서휘가 당천익을 죽이려는데 수석 장로가 은밀히 뒤쪽으로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작전인가?’
한 명을 유인책으로 만들고 다른 한 명이 은밀히 공격하는 건 꽤 흔한 작전이었다.
‘감히 날 뭐로 보고 이러는 건지 모르겠네.’
수석 장로가 다시 한번 독기를 머금은 쌍장을 내뻗었다.
백서휘의 허리에 어떻게든 꽂아 넣겠다는 그의 의지가 진득하게 느껴졌다.
평범한 무인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크게 당황하겠지만, 자신은 비범한 무인이었다.
‘혼쭐을 내주지.’
그때였다.
넋 놓고 있던 당기준이 양손에 단검을 들고 달려왔다.
그는 지금의 상황이 백서휘에게 닥친 절체절명의 위기라고 느낀 것 같았다.
‘어이가 없네. 내가 싸우는 모습을 그렇게 많이 봐놓고 날 도우러 온다고? 충성심이 강한 거야? 내 실력을 못 믿는 거야?’
백서휘는 옆으로 반 바퀴 회전해 뒤에서 들어오는 공격을 피하면서 수석 장로의 뒤를 잡았다.
수석 장로의 쌍장이 아무도 없는 허공을 때리며 굉음을 냈다.
‘이놈을 미끼로 삼아야겠다.’
백서휘는 난화만천수의 묘리가 담긴 좌장을 쭉 내뻗었다.
쐐애애액!
바람을 가르며 날아간 좌장이 수석 장로의 허리에 꽂혔다.
일부러 죽일 정도로 강하게 공격하지 않았기에 그는 무사할 수 있었다.
대신 하체를 못 쓰게 되는 건 피할 수 없었다.
수석 장로가 땅바닥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수, 수석 장로님!”
“수석 장로님이 쓰러지셨다!”
백서휘는 주먹으로 수석 장로의 천령개를 부수려는 척했다.
그러자 당천익과 당가의 무인들이 수석 장로를 구하기 위해 동시에 달려왔다.
‘전음으로 무언가 이야기를 나눈 모양인 것 같은데…… 어떤 작전이든 압도적인 힘 앞에서는 무력해진다는 걸 알려주지.’
백서휘는 발끝에서부터 만들어낸 경(勁)을 검에 담고, 의념과 진기로 강기를 더 강화시켰다.
거기에 천강무극검법 중에서 유일하게 강검의 묘리가 담긴 초식인 회천만일을 펼칠 준비를 했다.
백서휘가 쥐고 있는 검이 소리를 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가장 대어인 당천익이 없어서 당가의 무인들이 공격 범위에 들어왔는데도 기다렸다.
‘됐다!’
불길한 예감을 직감한 당천익 뒤로 몸을 빼라는 명령을 내리려고 했다.
그 순간, 백서휘는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인 곳에 검을 내려찍었다.
콰아아앙!
다들 손운산 같은 괴물이 아니어서 검에 담긴 힘을 그대로 받았다.
당천익과 함께 공격 범위에 들어온 무인들은 시체도 남기지 못했다.
모두가 사이좋게 육편이 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 전장에서 살아 있는 자는 공격 범위 외곽에 있던 자와 애초에 백서휘에게 달려들지 않은 자들뿐이었다.
‘그래, 이거지. 압도적인 힘 앞에선 무력한 게 맞다니까.’
일격에 떼죽음을 당하자 살아남은 자들은 전의를 상실했다.
그들은 손에 쥐고 있던 암기와 무기를 땅에 버리고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항복하겠습니다!”
“저, 저도 항복입니다.”
‘은혜는 두 배로 갚고 원한은 열 배로 갚는다’를 외치던 당가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빠른 항복이었다.
“음…….”
백서휘는 방에서 나오면 보이는 모든 당가 사람을 죽이려고 했다.
그런데 막상 항복하는 자들이 나오니 고민을 하게 됐다.
“너무 많이 살려놨나.”
백서휘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살아남은 당가의 무인들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다 죽이는 게 어떻겠습니까.”
괜히 살성이 아닌지 당기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하고 진했다.
“관주님을 죽이려고 했던 놈들입니다. 모조리 죽이는 게 맞습니다.”
“고민 좀 해보고.”
백서휘는 시체 위에 걸터앉은 채 한참을 고민했다.
당기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무림에 출도한 이래 자신에게 살의를 가지고 무기를 겨눈 놈들은 누가 됐든 다 죽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들을 살려주면 자신의 손에 죽은 이들이 너무 억울하지 않겠는가.
“그래, 죽이는 게 맞는 것 같다.”
백서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 꿇은 당가의 무인들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사, 살려주십시오! 살려만 주시면 뭐든 하겠습니다!”
“뭐든 하겠다고?”
“예!”
“다른 놈들 생각은 다른 것 같은데?”
“아, 아닙니다! 다들 같은 생각일 겁니다. 그렇지?”
“그렇습니다. 다 같은 생각입니다.”
“살려만 주시면 진짜 뭐든 하겠습니다. 개가 되라고 하면 개가 되겠고, 말이 되라고 하면 말이 되겠습니다.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할 테니 제발 목숨만은…….”
이들을 학무관에 무급으로 일하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때 당기준이 백서휘를 향해 오체투지 자세를 취했다.
“관주님! 저놈들은 원한을 열 배로 갚는 녀석들입니다! 지금의 항복은 복수를 위해서 잠깐 몸을 낮추는 것일 게 분명합니다.”
확실히 이상하긴 했다.
가문의 수장이 죽었는데 이렇게 아무런 저항 없이 항복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위험하기도 해.’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가족들을 독이나 암기로 암살하려고 들면 막기가 힘들었다.
‘죽여야겠다.’
백서휘는 검환을 만들어 항복한 당가의 무인들을 향해 날렸다.
당가의 무인들은 육편조차 남기지도 못하고 죽었다.
“일어나.”
당기준이 먼지를 털고 일어나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고마우면 독경이랑 암경이나 찾아서 가져와.”
“예!”
“당진우 찾아내면 그놈도 데려오고.”
“당진우는 제 손에 죽었습니다.”
“그래? 그러면 독경이랑 암경만 가져와.”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당기준이 두 권의 비급을 백서휘에게 가져왔다.
“읽어도 되지?”
“관주님이 읽으시는 동안 귀중품이나 돈 같은 것들을 마차에 옮겨놓겠습니다.”
“비급도 옮길 거야?”
“원하신다면 옮겨놓겠습니다.”
“그러면 네가 익히고 싶은 것들만 따로 챙겨놔.”
“알겠습니다.”
백서휘는 당기준에게 귀찮은 일들을 맡기고 독경과 암경을 빠르게 읽어나갔다.
독경에는 채취하는 법과 만드는 법, 조합하는 법, 효과적으로 중독시키는 법, 해독하는 법 등이 적혀 있었다.
“독령에 대한 부분이…… 여기 있군.”
독령은 마지막 장에 아주 짧게 소개되어 있었다.
쓱 훑어보니 독경을 만든 자도 개념적으로만 알고 있을 뿐 실제로 독령을 만들어낸 적은 없었다.
‘천하의 모든 기운을 기독(氣毒)으로 바꾸는 능력이라…… 그런데, 이거 꼭 기독으로만 바꿀 수 있는 건가?’
무색, 무취, 무미, 무형의 독에 누구든 중독시킬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훌륭한 장점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더 나아가서 ‘독’만이 아니라 다른 속성의 기운, 이를테면 오행의 기운으로만 바꿀 수 있어도 독령의 가치는 엄청나게 올라가게 된다.
‘기독으로 바꾸는 것도 시도해 보지 않아서 될지 안 될지 확신이 안 서네. 한번 시도해 볼까?’
당가는 독으로 온갖 실험을 하는 자들이 사는 곳인 만큼 사람 대신 쓸 동물이 어딘가에 있을 거라 생각했다.
백서휘는 돈을 옮기고 있는 당기준에게 찾아가 물었다.
“실험할 때 쓰는 동물들 어디 있는 지 알아?”
“실험 말입니까?”
당기준의 얼굴이 석상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지금은 독령의 힘을 더 발전시키는 게 급했다.
“……저기로 계속 쭉 간 후에 아니,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백서휘는 당기준의 안내를 받아 실험실로 향했다.
“이곳입니다.”
“좀 전부터 표정이 좋지 않은데, 왜 그런 거야?”
“……그건 말씀 못 드릴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다시 옮기러 가보겠습니다.”
뭔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에 백서휘는 굳이 당기준을 붙잡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