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132화
금속을 매입하고 외부에 나가 있는 무인들을 불러들인다는 건 전쟁을 치를 때나 보여주는 움직임이었다.
우연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공교로운 상황.
자신과 사천의 패권.
둘 중에 어느 쪽을 노리는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자신을 노리는 게 맞다면 뜨거운 맛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다 죽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그때 당진우가 독령에 대해 설명하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는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는 책이 두 권 있다고 했었다.
‘독경이랑 또 뭐였지?’
중간에 말을 끊어서 독경까지만 들었던 기억이 났다.
후회됐지만 이미 일어난 일이라 뭘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바보 같았던 자신을 탓하며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독과 관련된 모든 것이 적혀 있다고 했었지?’
독경에 대한 사실 두 가지가 머릿속에서 합쳐지며 흥미로운 추측을 만들어냈다.
‘당가의 역사와 함께하는 책에 독에 관련된 모든 것이 적혀 있다? 어쩌면 당가가 자랑하는 독공의 근원은 독경에 있을지도 모르겠군.’
백서휘는 당가가 자신을 공격하면 반드시 모든 이들을 죽이고 독경을 빼앗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이거 당기준에게도 말해둬야 하나?’
절대 그러지는 않겠지만 당기준이 아무것도 몰라서 어리바리하게 굴면 손해를 보는 건 자신 쪽이었다.
당가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일을 말해주는 편이 자신과 당기준 둘 모두를 위해서 좋으리라.
“정보 고맙다. 큰 도움이 됐어.”
“별말씀을요.”
백서휘는 유소화에게 정보료를 건넨 후 학무관의 기숙사로 향했다.
‘관원들이 들어올 걸 생각하면 이놈들 숙소도 옮기긴 해야 하는데…….’
오룡단의 숙소 문제는 되돌아왔을 때 결정하기로 마음먹었다.
걷는 일에 집중하니 발걸음이 절로 빨라져서 기숙사에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어? 관주님!”
남궁진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치자 뒤돌아서 있던 모용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백서휘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왜들 이렇게 나와 있어?”
“보조 사범으로 일할 걸 대비해서 미리 연습 중이었어요.”
“열심이네.”
남궁민과 모용진이 헤헤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안에 당기준 있지?”
“잘 모르겠어요.”
“나가는 걸 본 적 없긴 한데…….”
기감을 넓혀 확인해 보니 당기준은 숙소에 남아 있었다.
“열심히들 해.”
“네!”
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남궁민과 모용진을 뒤로하고 당기준의 숙소가 있는 층으로 올라갔다.
기다렸다는 듯 당기준이 문밖으로 나왔다.
“찾으셨습니까?”
“할 얘기가 있어서 왔다. 시간 되지?”
“됩니다.”
“그럼 잠깐 얘기 좀 하자.”
백서휘와 당기준은 숙소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하겠지만 혹시나 해서 말한다. 당가를 향해 떠난 날부터 장사로 돌아오는 날까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마음의 준비를 좀 단단히 해두는 게 좋을 거야.”
백서휘의 말에 당기준의 눈초리가 삽시간에 날카로워졌다.
“당가 쪽에서 여정 도중에 습격할 거란 정보를 듣기라도 하신 겁니까?”
“비슷하지만 다른 정보를 들었어. 외부로 나갔던 무인들도 불러들이면서 금속을 대량으로 매입하고 있다고 그러더군.”
“당가에서 저희를 노리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당기준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백서휘는 그에게 앉으라고 손짓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런데 하오문의 생각은 다르더군.”
“어떻게 다릅니까?”
“사천의 패권을 잡기 위해 칼을 빼 든 것 같다고 말하더라고.”
“하오문의 말대로 사천의 패권을 잡기 위해서라면 당가가 아미파와 청성파를 발밑에 둬야 하는데, 지금의 무림맹에서 제 살 깎아먹는 짓을 하는 걸 절대 두고 볼 리 없습니다.”
감정의 높낮이가 작은 당기준이 분노를 온몸으로 표출했다.
“그렇지. 사파에 가뜩이나 전력이 밀리는데 절대 그럴 리 없지.”
백서휘가 맞장구를 쳐주었다.
“당가도 그걸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런 데도 암기를 만들 금속을 계속 매입하고 외부의 무인들을 불러들인다는 건 다른 속셈이 있단 뜻 아니겠습니까.”
“우리를 노리고 있다고 생각하고 움직여야겠네.”
“밖으로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내부에서 은밀히 독극물도 만들고 있을 겁니다.”
“잠깐, 독극물? 조심해야 할 게 뭐 뭐 있지? 음식이랑 식수 말고?”
백서휘를 안심시켜야겠단 생각에 당기준은 머리끝까지 치솟았던 분노를 억눌렀다.
“……중독될 걱정은 당가타(唐家陀)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안 하셔도 됩니다. 다른 곳은 몰라도 그곳부터는 온전히 당가의 영역이라 뭐든 당가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거든요.”
“아니, 그건 나도 알고 있어. 내가 알고 싶은 건 왜 다른 곳은 조심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야?”
“관주님이 당가의 모든 힘을 한점에 집중해서 싸워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대라서 그렇습니다.”
당기준의 칭찬 아닌 칭찬에 백서휘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사도련에서 당했던 것처럼 개별로는 아무런 효과가 없는데 몸에 들어가서 합쳐지는 독이면?”
“그 부분 역시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도련에서는 제가 아는 것과 다른 독을 써서 당한 거지, 당가의 방식을 쓰면 제가 다 알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 당가타에서만 조심하면 아무 문제 없다는 거네?”
“네.”
당가와 관련된 문제는 더 고민 안 해도 되겠다고 백서휘는 생각했다.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나 물어볼 거 있어?”
“있긴 한데 해도 될지…….”
“내가 이렇게 꾸물거리는 거 별로 안 좋아하는 거 알면서 이러는 거야?”
“죄송합니다. 말하겠습니다. 공격할 걸 알면서도 당가로 가시려는 이유가 뭡니까?”
“책을 빼앗아도 될 명분이 생기니까.”
“책이요?”
“당진우가 그러더군. 당가에 대대로 내려오는 책이 두 권 있다고…….”
“독경과 암경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경서의 경(經) 자가 괜히 이름에 들어갈 리 없으니 암경 역시 독경에 비견되는 책일 게 분명했다.
“그래, 그 독경과 암경을 빼앗을 거야.”
“관주님의 무공은 이미 천하제일 아닙니까.”
“요즘 들어 더 하게 되는 생각인데 난 천하제일에 근접했을 뿐, 천하제일은 아닌 것 같아.”
“지금도 충분히 강하신 건 맞지 않습니까?”
“내가 모르는 무리나 지식이 두 책에 적혀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래.”
“그렇군요.”
“이 정도면 대답은 충분한 것 같은데…….”
“충분합니다.”
“할 말은 더 없지?”
“네.”
“그럼 일어나야겠다.”
백서휘가 자리에서 일어나니 당기준도 따라 일어났다.
“당가로 출발하는 전날까지 열심히 수련해둬.”
“네!”
백서휘는 학무관의 건물들이 제대로 수리됐는지 확인한 후 집으로 돌아갔다.
* * *
학사 일정을 모두 다 짜고 개방을 통해 중원 전역에 홍보물을 돌렸다.
그리고 자신이 없더라도 제대로 운영될 수 있도록 매형인 정하진에게 어떤 식으로 일을 처리하면 될지 일러두었다.
묵룡갑을 포함한 짐까지 모두 다 챙겼으니 이제 당가로 떠나기만 하면 됐다.
“마차를 제공해 주겠다고?”
백서휘가 미심쩍은 눈으로 당진우를 쳐다봤다.
“그냥 마차가 아니라 최신식 마차입니다.”
당진우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무슨 장치를 했을지 모를 마차를 탈 수는 없지.’
백서휘가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자 마차의 장점을 열거했다.
“산길을 달리는 데도 침상에 누워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너나 타.”
“예?”
“그건 너나 타라고. 나는 내가 타던 거 마음 편히 탈 테니까.”
“이건 귀빈용이라 제가 탈 수 없습니다.”
“그럼 다른 귀빈 구해다가 태우던가 해. 나는 안 탈 거야.”
백서휘는 예전부터 타고 다니던 마차에 몸을 실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당기준이 마부석 위에 자리를 잡았다.
당진우는 원하는 대로 일이 돌아가지 않자 속으로 욕을 했다.
“계속 그러고 있을 건가?”
당기준이 비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당진우에게 물었다.
당진우는 대답하지 않고 그대로 자기 마차로 돌아갔다.
“출발!”
마차들이 사천당가를 향해 빠르게 달려갔다.
* * *
당가의 심처에 무사단장급 이상의 인사들이 모두 모였다.
몇몇 장로들은 노기가 서린 얼굴을 한 채 앉아 있었다.
“도대체 언제 오려고 이렇게 늦는 건지…….”
수석 장로의 말에 다른 장로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위가 지위인지라 무사단장들은 모르는 척하며 헛기침을 했다.
그때 당가의 가주가 안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다.
“늦었구려.”
“죄송합니다. 진우가 보낸 서신이 와서 그걸 확인하느라 늦었습니다.”
당가의 가주는 모인 이들에게 고개 숙여 사과했다.
“그 서신에 대계와 관련이 있는 내용이라도 있었던 거요?”
“대계와 관련된 내용이지만 좋은 소식은 아닙니다.”
당가의 가주가 침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떤 내용이길래…….”
“관주 쪽에서 저희가 준비한 마차를 타지 않았다고 합니다.”
“기관이 설치된 마차란 걸 눈치채고 그런 거요?”
수석 장로가 화들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관주 쪽에서 익숙한 마차를 타는 게 마음에 더 편하다고 했답니다.”
“그러면 대계는 어떻게 되는 거요?”
“일부를 변경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일부가 아니라 대대적으로 변경하는 건 어떻소?”
“어떻게 말입니까?”
“암기를 지금보다 더 많이 만들고 외부에 있는 자들 중 필수인원이라 남은 자들까지 모두 불러들이는 쪽으로…….”
“불가합니다. 독령이 본가의 숙원이긴 하지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얻을 정도는 아니라 봅니다.”
“가주, 잘 생각해보시오. 모든 걸 포기하겠단 게 아니오. 그가 호의적으로 나와서 독령을 쉽게 얻게 된다면 준비한 모든 것들은 전력을 증강한 것과 같은 결과를 낼 거요.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을 다 잃어도 증강된 전력이면 금방 되찾을 수 있단 말이오.”
수석 장로는 한 박자 쉬며 당가의 가주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살폈다.
당가의 가주는 조금의 흥미도 없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절대 바라지 않는 일이지만, 그자가 적대적으로 나온다면 증강된 전력은 작전에 참여한 자들을 지금보다 더 안전하게 만들어줄 거요.”
“불가합니다. 이유는 조금 전에 말한 것과 같습니다.”
“모용중광에게서 얻은 정보 역시 근원을 따져 올라가면 그자의 입에서 나온 말 아니요. 그런데 그자의 말만 믿고 준비하는 건…….”
“관주가 기진맥진할 때 상대할 고수가 모자라서 그렇지, 극독과 기진(奇陣)과 암기를 그가 말한 것보다 열 배는 더 많이 준비했습니다. 절대 실패할 일 없으니 계획을 변경하는 것에 집중해 주시길 바랍니다.”
당가의 가주는 더는 반론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게 본인 뜻대로 할 거면 뭐 하러 우리를 여기에 부른 거요.”
당가의 가주는 한숨을 작게 내쉰 후 입을 열었다.
“……수석 장로님 의견대로, 외부에 나가 있는 인원 중 필수 인원이라 남았던 자들을 모두 불러들이도록 하겠습니다.”
“암기도 더 많이……!”
“암기는 불가합니다. 유효한 타격을 입히려면 8대 암기 수준은 되어야 할 텐데, 그걸 만들 장인의 수도 부족하고, 자금도 없습니다.”
당가의 가주가 한 발짝 양보한 상황에서 수석 장로도 더는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그때 눈치를 보고 있던 청녹단주가 손을 들며 말했다.
“저…….”
“뭔가?”
“지금 잘못된 부분에 집중하고 있는 것 같아서 손을 들었습니다.”
“잘못된 부분?”
수석 장로와 당가의 가주가 동시에 의견을 말한 청녹단주를 무서운 눈으로 바라봤다.
청녹단주는 그들의 눈빛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의견을 제시했다.
“독령을 가진 건 백서휘 그자가 아니라 당기준 아닙니까? 그러면 백서휘를 신경 쓸 게 아니라 당기준을 신경 써야 하는 게 맞습니다.”
“당기준을?”
“예, 그놈만 따로 빼돌려서 독령을 빼내고 제어법만 들으면 끝인 일인데, 왜 복잡하게 일을 하는 것인지…….”
“그놈을 유혹할 수 있는 게 없는데 어떻게 따로 빼돌릴 수 있겠나?”
“유혹을 왜 해야 합니까? 책임자끼리 자리를 이동해서 따로 대화하자고 하면 당기준은 혼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문에 현답이로구나!”
수석 장로가 무릎을 탁 하고 치며 말했다.
“……그럼 우리가 한 준비들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건가?”
당가의 가주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물었다.
“아! 그것들은 제대로 준비하신 거 맞습니다. 일이 잘못될 걸 대비해야 하니까요.”
청녹단주의 대답에 모여 있는 모두가 가슴을 쓸어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