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111화
당기준은 입에 남아 있는 약을 뱉어낸 후 물로 혀를 꼼꼼히 씻어냈다.
그러고도 모자란지 운기조식을 해 약 기운을 억지로 배출했다.
모든 일이 끝나고 지친 얼굴로 한숨을 내쉬는데 그의 눈에 단환이 보였다.
‘극악무도한 놈들. 빙독을 안에 넣다니……!’
살상력은 없지만 중독되면 인간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고 가 ‘빙독’이라 불렸다.
죽어가면서까지 빙독을 찾던 자들의 모습이 당기준의 눈에 선했다.
오죽했으면 다른 사람에게 쉽게 공감하지 못하는 그도 끔찍하다고 느낄 정도였을까.
‘도대체 누가 이렇게 고순도의 빙독을 유통하는 거지?’
중원 내에서는 사천당가, 귀독문(鬼毒門), 천독궁(天毒宮), 의선문(醫仙門), 의천약가(醫天藥家) 정도만이 가능했다.
그런데 이 다섯 곳 모두 빙독의 위험성에 대해 알고 있어 제작법과 제작 기술자를 엄중하게 관리하고 있었다.
‘설마 관리망에 구멍이 생긴 건가?’
빙독의 제조법이 유출되었거나 제작할 줄 아는 인원을 포섭했거나 둘 중 하나로 보였다.
‘작업반장을 잡으면 다섯 곳 중에 어디서 문제가 생긴 건지 알 수 있겠지.’
다음 날.
당기준은 얼굴을 굳힌 채 공사장으로 향했다.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공사장은 빙독 중독자들의 소굴로 변했다.
“약 있는 사람? 지금 약을 주면 오늘 품삯을 다 줄게!”
“저놈의 두 배를 줄 테니까 나를…….”
“세 배 줄 테니까 날 줘!”
“아니, 씨발 나랑 한판 하자는 거야?”
“씨발? 그거 지금 나한테 그런 거냐?”
“그래!”
당기준은 약 때문에 싸우는 일꾼들을 보며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을 중독시켜 놓고 이놈은 도대체 어딜 간 거지?’
한참을 기다렸는데도 작업반장은 나타나지를 않았다.
아파서 그런 거라면 홍선이 일꾼들에게 이유를 말해줬을 거다.
그런데 지금 홍선은 예상치 못한 작업반장의 부재에 무척 당황스러워하고 있었다.
‘작업반장의 신상에 이상이 생긴 건가? 아니면 중독자를 더 많이 만들기 위해 다른 곳으로 이동했나? 이것도 아니면 장사를 완전히 떴나? 음…….’
설령 추측했던 일과 완전히 다른 일이 일어났을지라도 빙독에 관해 물으려면 작업반장을 찾고 봐야 했다.
‘어디서 어떻게 이놈을 찾지?’
작업반장이 어디서 뭘 하고 있을지 조금도 짐작이 안 됐다.
되도록 혼자 일을 처리하고 싶지만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았다.
당기준은 단원 중에서 도움을 받을 만한 자가 있는지 떠올려 봤다.
제갈선우와 황보정석의 이름이 그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둘 중에는 황보정석이 더 나아’
현상금 사냥꾼 일을 할 때 사람을 상대하고 단서를 추적하는 건 황보정석이 도맡아했다.
그때가 생각나 도움을 요청하려는데 뭔가가 마음에 턱 하고 걸렸다.
그 뭔가의 정체는 당기준의 자존심이었다.
악록산에서 있던 비무가 그에겐 앙금으로 남아 있었다.
‘……관주님의 집과도 연관되어 있는 문제이니 대승적으로 판단을 내리는 게 맞다. 황보정석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당기준은 황보정석이 묵는 방을 찾았다.
문 옆에 달린 작은 종을 울리니 황보정석이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야?”
“네가 나를 도와줬으면 한다.”
“내가 너를……?”
“그래, 나를.”
“왜 그래야 하지?”
당기준의 사과를 아직 못 받은 황보정석은 날카롭게 반응했다.
“설명하겠다.”
“해봐.”
당기준은 숨기는 것 없이 황보정석에게 모든 것을 말했다.
황보정석은 심각한 얼굴로 한참을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도망쳤거나 칠 가능성이 있다면 도와줄 수밖에 없겠군. 혹시나 해서 말해두는데, 너와의 앙금이 풀려서 도와주는 게 아니라 상황이 심각하니까 도와주는 거다.”
“명심하지.”
“나 무장해야 하니까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
“나도 그래야 하니 이따 연무장에서 만나지.”
“알았어.”
황보정석이 무장을 끝내고 기다리는데 다른 단원들과 마주쳤다.
“황보 형! 무장은 왜 했어?”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서.”
“그 사정이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황보정석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당기준에게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들려줬다.
“황보 동생, 나도 갈게.”
“나도.”
“저도요.”
“그럼 다들 무장하고 와.”
오룡단원이 무장을 하고 장사 전역에 있는 공사 현장을 찾아다녔다.
“저놈 아니야?”
일월안을 쓴 제갈선우가 손가락으로 한 사람을 가리켰다.
“작업반장 맞다.”
“다들 천천히 와. 내가 잡아놓고 있을 테니까.”
남궁혁이 뇌룡보를 신법으로 응용해 발휘했다.
파지지직!
“이게 잠자리 갖기 전에 먹어도 좋고, 지금처럼 일하기 전에 먹어도 좋아. 먹으면 힘이 비교 못 하게 달라지거든.”
“그럼 나도 하나 줘봐.”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오자 작업반장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작업반장이 목소리의 주인의 얼굴을 보기 위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표정이 왜 그래? 꼭 나쁜 짓 하다 들킨 사람 같잖아?”
남궁혁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여기 일단 하나…… 에잇!”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낀 작업반장은 다른 곳으로 도망갔다.
파지지직!
남궁혁이 전광과 함께 사라져서는 작업반장 앞에 나타났다.
“안녕!”
“히이익!”
질겁하며 반대로 도망가는 작업반장
파지지직!
“또 만났네.”
“으아아!”
파지지직!
“자, 잘못했습니다. 살려주세요.”
작업반장이 머리를 조아리고 파리처럼 손을 비볐다.
“누가 죽인대?”
“그, 그럼 왜 저를 쫓으시는 건지?”
“그건 저 사람한테 물어봐.”
남궁혁은 당기준을 가리켰다.
“저, 저놈은……!”
빠악!
남궁혁이 작업반장의 뒤통수를 강타했다.
“아아악!”
“상황 파악 잘 안 되지?”
“저, 저분이 누구시길래.”
“알 거 없다.”
당기준이 짧게 말하고는 작업반장의 아혈을 짚었다.
모용진이 눈치껏 작업반장을 둘러맸다.
“당 형, 이 근처에 폐가가 있어.”
“아니, 신문은 하지 않아.”
“어? 그럼 왜 잡은 거야?”
“관주님께 데려가려고.”
오룡단은 작업반장을 데리고 백서휘를 찾았다.
“무슨 일이야?”
“보고드릴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보고? 저놈이 자재를 몰래 빼돌려 팔아먹기라도 했어?”
백서휘는 턱으로 작업반장을 한번 가리켰다가 당기준을 바라봤다.“그런 쪽의 일이 아닙니다.”
“그럼?”
“심각한 사안입니다.”
당기준은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모두 백서휘에게 설명했다.
“네 말대로라면 빙독에 중독됐을 때는 일상생활이 아예 불가능해지겠네?”
“예.”
“그걸 공사장에 뿌렸다고?”
“조금 전에 얘기했던 그 작업반장이 뿌렸습니다.”
“다른 곳은?”
“아직 작업반장을 신문하지 않아서 모릅니다.”
“신문을 나한테 맡기려고 데려온 거야?”
“네.”
“일단 학무관 뒤편으로 가자.”
백서휘와 오룡단은 학무관 뒤편으로 작업반장을 끌고 갔다.
“앉혀봐.”
오룡단이 힘을 발휘해 작업반장을 강제로 무릎 꿇려 앉혔다.
“지금부터 아혈을 풀어주는데 소리를 지르거나 살려달라고 하면 그때는 네 신체 중 하나가 무작위로 잘리게 될 거야.”
백서휘가 냉혹한 눈으로 작업반장을 내려다봤다.
“읍읍읍읍!”
“알아들었을 거라 믿고 아혈을 해혈하겠다.”
점혈을 풀기 무섭게 작업반장이 크게 소리쳤다.
“사, 살려……!”
백서휘는 단검을 뽑아 그대로 작업반장의 귀를 베어버렸다.
왼쪽 귀가 있던 곳에서 흘러나온 피가 작업반장의 좌반신을 적셨다.
“끄악!”
또 소리를 지르자 백서휘는 망설임 없이 작업반장의 엄지손가락에 단검을 내리찍었다.
“아아아악!”
“그렇게 소리를 지르면 네 신체가 계속 잘려 나가게 될 거야.”
입을 다문 작업반장은 소리를 지르는 대신 눈물을 뚝뚝 흘리며 신음을 냈다.
“이제부터 내가 묻는 말에 어떤 대답이든 해. 거짓을 말하거나 숨기는 게 있거나 입을 다물면 그 즉시 죽게 될 거다.”
백서휘의 협박에 작업반장의 얼굴이 공포로 새하얗게 질렸다.
“뭐, 뭐든지 물어보십시오! 다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약에 대해 아는 걸 다 말해봐.”
“야, 약에 대한 정체는 모릅니다. 제가 아는 건 고용주가 아침마다 나눠준다는 거랑 할당량을 채우면 큰돈을 준다는 것뿐입니다.”
“할당량이란 게 설마 중독자를 늘리면 받는 건가?”
“그, 그냥 약을 다 뿌리면 줍니다.”
“몰래 버린 다음에 받는 놈들이 있을 것 같은데?”
“그런 애들은 전부 고용주 손에 죽어서 이제 없습니다.”
“그럼 약을 만드는 건 네가 아니라 고용주란 건가?”
“예.”
“그 고용주는 어딨는데?”
“아침마다 지정된 장소에 가면 만날 수 있습니다.”
“지정된 장소는 어디지?”
“다른 놈들은 모르겠는데 저는 시장 근처의 어두운 암(暗) 자가 그려진 집에서 고용주를 만납니다.”
“그곳에서 기다리면 고용주가 나타나나?”
“네, 나타나서 할당량이 들어 있는 주머니랑 이전에 일한 것의 임금을 줍니다.”
“다른 놈들은 어디서 받는지 모른다 이거지?”
“그놈들도 아마 ‘어두운 암’ 자가 그려진 집에서 받는 것 같습니다.”
“그거 말고 또 아는 게 있나?”
“혀, 혈견파 두목의 비밀을 압니다.”
“그런 쓸데없는 것들 말고 약에 대한 것들만 말해.”
“그게……. 그게…….”
“없군.”
푸욱!
백서휘는 단검을 그대로 작업반장의 목에 꽂아 넣었다.
작업반장의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백서휘의 얼굴에 피가 잔뜩 묻었다.
황보정석이 슬쩍 보고는 품속에서 천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고맙다.”
백서휘가 얼굴을 닦은 후 황보정석에게 천을 돌려주고는 폐가 밖으로 나왔다.
“한 명씩 구역을 나눠서 ‘암’ 자가 그려진 집의 위치를 은밀히 알아와.”
“그다음엔 어떡합니까?”
“그건 적당한 곳 하나 골라서 고용주란 놈 잡은 후에 생각하자고.”
백서휘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알겠습니다.”
“조사 끝나면 이리로 와. 알았어?”
“네!”
“가봐.”
오룡단은 구역을 나눠서 ‘암’ 자가 새겨진 건물을 하나하나 찾아다녔다.
백서휘는 높은 곳에 올라가 그들의 움직임을 지켜봤다.
“어떤 놈들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구역을 침범한 대가를 치르게 해주겠어.”
오룡단은 ‘암’이란 글자가 적힌 집이 있는 곳을 모두 알아냈다.
백서휘는 장사 전역이 그려진 지도에 오룡단원이 조사한 곳을 하나하나 표시했다.
“생각보다는 적네.”
광범위하게 퍼져 있을 줄 알았는데 막상 보니 여덟 방위에 하나씩 있는 게 전부였다.
백서휘가 턱에 난 까끌까끌한 수염을 매만졌다.
‘혼자서 여덟 곳을 계속 감시하지는 못할 거야.’
최소 여덟 명이 빙독을 공급하는 놈의 부하이거나 협력자라고 봐야 했다.
한 번에 들이닥쳐서 다 잡아내고 싶지만 오룡단만으로는 수가 부족했다.
‘한 놈을 확실하게 잡아서 고문을…… 잠깐, 이거 한 번에 싹 다 잡는 거 가능하겠는데?’
학무관의 입관 일정이 차일피일 미뤄지면서 사범들은 개인 정비만 계속하고 있었다.
그들 중 둘의 도움을 받으면 동시에 들이닥쳐서 잡는 것도 가능하겠다 싶었다.
‘임철우와 남궁유운, 운학에게 도움을 청하면 되겠지.’
운학과 임철우가 흔쾌히 수락한 반면, 남궁유운은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고민하는 이유를 알려준다면 그걸 해결해 보도록 노력해보겠다.”
“남궁민 때문에 고민하고 있습니다.”
“걔가 왜?”
“아무래도 껄끄러운 관계라서요.”
“껄끄러울 이유가 있나? 같은 가문 사람이잖아?”
“‘같은 가문’이라서 껄끄러운 겁니다.”
백서휘가 이해를 못 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직계와 방계 사이에 있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도 있고, 그놈이 가문 내에서 사고를 치는 걸 너무 많이 봐서 웬만하면 떨어져 지내고 싶습니다.”
“과거야 어찌 됐든 이제는 내 밑에서 한 식구가 된 거잖아. 평생 안 보고 살 거 아니면 그 감정들을 적당히 흘려보내는 게 좋지 않겠어?”
남궁유운은 말이 없었다.
“내일 인시(寅時, 오전 3시~5시)까지 무장한 채로 학무관의 연무장에 오든가 말든가 맘대로 해.”
백서휘는 자기 할 말만 남기고 사라졌다.
남궁유운은 홀로 방구석에 앉아 번민하고 또 번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