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104화
백서휘는 독령을 연구하다 말고 슬쩍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은 주황빛 노을에 물들어가고 있었다.
곧 완전히 어두워지고 달이 걸리면 황보정석이 찾아온다.
백서휘는 그에게 가르쳐 줄 도법인 명왕폭류도법(明王爆流刀法)을 마지막으로 점검했다.
그가 가장 중점적으로 살핀 건 도법을 익힌 무인을 ‘광인(狂人)’으로 만드는 특성이 잘 제거됐느냐였다.
‘불가의 화엄법륜공에서 가져온 특성이 잘 적용돼서 황보정석이 전투광이 되는 일은 없을 것 같군. 이다음에 볼 건 초식인가?’
다행히도 초식은 공방 양면에서 균형이 잘 맞았고, 진기운용법 역시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폭류(爆流)의 힘과 관련된 무리(武理)도 그렇게 난해하지 않아서 황보정석으로서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듯싶었다.
‘이제 황보정석을 잘 가르치기만 하면 돼.’
어떤 식으로 수련시키면 좋을지 생각하는데 황보정석이 기감에 잡혔다.
황보정석은 긴장 따윈 안 하는 성격인지 이쪽으로 대범하게 걸어왔다.
이번엔 확실히 약속을 잡고 온 것이라 지난번과는 다른 것 같았다.
백서휘는 바위에 걸터앉은 채로 그를 맞이했다.
“시간 없으니까 왔으면 바로 몸부터 풀어.”
“시간이 없다니요?”
“최소한의 수면 시간을 확보하려면 오래 만날 수 없어.”
“운기조식으로 피로를 풀면 되지 않습니까.”
“혼자 수련해도 되는 수준까지 운기조식으로만 피로를 푸는 건 장삼봉이나 천마 할애비가 와도 불가능해.”
“아…….”
“거기다 우리 이제 해가 뜨면 정기적으로 다른 애들이랑 만나서 몸을 풀어야 하잖아. 그 시간까지 생각하면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시간은 하루에 한 시진 정도가 한계일 거야.”
“그 정도 시간으로는 장사로 돌아갈 때까지 새로 무공을 익히는 건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불가능하면 내가 이러고 있겠어? 가능하니까 몸부터 빨리 풀어.”
“네.”
황보정석은 의구심 넘치는 얼굴로 팔과 발을 쭉쭉 뻗고, 어깻죽지와 무릎을 돌렸다.
“몸 풀면서 들어. 오늘 네게 가르쳐줄 무공은 명왕폭류도법이다. 이름에 나와 있는 ‘폭류’라는 무리를 제대로 이해하는 게 굉장히 중요하기 때문에 만날 때마다 반복해서 설명할 거니까 양해를 좀 해줘.”
“예!”
“동의한 거로 알고 폭류에 대한 설명에 들어갈게. 폭류는 단순하게 말하면 ‘터지는 흐름’이라고 보면 돼. 이 터지는 흐름을 잘 조절해서 운용하는 게 초식의 완성도를 갖추는 것보다 더 중요해서…….”
백서휘는 몸 푸는 시간에 설명을 끝내기 위해 조금 빠른 속도로 말을 내뱉었다.
“……도에 충격이 가해질 때마다 발생하는 힘을 모아서 일발역전을 노리는 것도 가능하고, 아니면 그 힘이 모일 때마다 터뜨려 견제를 할 수도 있어. 이 폭류의 힘을 다룰 때 명심해야 할 점이 있는데, ‘감당하지 못할 만큼의 힘’은 다루지 말라는 거다. 주의할 점까지 설명했으니 이제……. 아! 몸을 다 푼 것 같으니까 무리에 대한 설명은 이쯤에서 끝내고 초식 설명에 들어갈게.”
백서휘는 주의사항을 강조해서 말했다.
“이해가 안 가는 점이 있습니다.”
“어떤 점이?”
“초식의 완성도를 갖춘 다음에 폭류를 연구하는 게 아니라 둘을 동시에 해야 하는 겁니까?”
“너는 아직 기어 다니지도 못하는 상황이라 초식의 완성도를 높여서 폭류에 대한 감을 잡아야 해. 그리고 감을 잡게 되면 초식의 완성도를 높이는 수련을 하면서 머릿속으로는 폭류를 연구하는 거지. 참고로 폭류를 제대로 이해하면 네가 원래 알고 있던 다른 무공에도 응용할 수 있을 거야.”
“제가 원래 배웠던 도법 말입니까?”
“나는 무공이라고 했어.”
“그, 그 말은…….”
“다른 무공에 모두 적용 가능하단 거지. 이를테면 보신경 같은. 아, 그냥 내가 시범을 보여줄게. 잘 봐. 평범한 칠성보(七星步)가 어떻게 바뀌는지를…….”
시범을 보여주는 것이기에 백서휘는 느릿느릿 칠성보를 펼치면서 발과 땅이 맞닿을 때 생기는 힘을 모았다.
“그냥 칠성보인데…….”
황보정석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였다.
북두칠성 중 파군성의 위치에 있던 백서휘가 폭발적으로 도약하며 순식간에 황보정석이 있는 탐랑성의 위치로 이동했다.
“봤지?”
황보정석이 놀란 얼굴로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평범한 속도에 익숙해졌던 적에게 폭발적으로 돌진해서 멱을 따는 수법이다. 너를 처음 보는 상대면 무조건 통할 수밖에 없어.”
“다, 다른 수법도 볼 수 있겠습니까?”
“아니, 못 보여줘.”
“예? 왜 못 보여주시는 건지…….”
“네 발상력이 저하될 수도 있어서.”
“아…….”
“아쉬워 말고 초식 가르쳐 줄 테니까 자세나 얼른 잡아.”
“네.”
백서휘의 지도 아래 황보정석은 초식과 그에 맞는 진기운용법을 익혔다.
그것도 날이 밝아올 때까지.
* * *
“밤마다 어딜 가는 거지?”
당기준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황보정석을 바라봤다.
황보정석은 허리를 좌우로 젖히며 눈동자를 굴렸다.
‘바로 대답하지 않고 눈동자를 굴린다고?’
거짓말을 생각하기 위해 머리를 쓸 때면 사람들은 지금의 황보정석과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어딜 가긴 갔던 모양이군.’
그때 백서휘가 몸을 다 풀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의 기척 아예 느껴지지 않은 걸 보면 멀리 간 모양이었다.
당기준은 그가 사라진 방향을 잠시 바라봤다가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바로 조금 전과 다르게 황보정석의 얼굴에는 감정이 사라진 상태였다.
‘도박장에서나 먹힐 만한 연기를 나한테 쓰다니…….’
골패 만지는 놈들 사이에서는 먹혔을지 몰라도 당기준에겐 아니었다.
“밤마다 어딜 간다니?”
“모르는 척할 속셈인가?”
“헛소리하지 말고 몸이나 풀어.”
“골패 만질 때나 써먹던 허접한 연기로 날 속일 수 있을 것 같아?”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네.”
황보정석의 목소리가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당기준의 발달된 청각은 그 떨림을 놓치지 않게 해주었다.
‘확실해. 황보정석은 정기적으로 어딘가를 가고 있다.’
당기준이 뱀처럼 냉혹한 눈으로 황보정석을 바라봤다.
“목소리가 떨리더군.”
“내 목소리가 어때서?”
“어딜 갔지? 말해.”
“안 갔다니까.”
당기준은 황보정석가 출발했던 곳부터 사라진 방향까지를 살폈다.
“이쪽에서 저쪽은 산 밑으로 내려가는 방향인데……. 근처에 있는 마을에 가서 골패를 돌렸나? 아니면…….”
“골패라니!”
황보정석이 억울하다는 듯 펄쩍 뛰었다.
“그럼 뭘 했지?”
“아무것도 안 했어. 어딜 가지도 않았고.”
“네가 밤중에 정기적으로 이동한 걸 본 사람만 여기 세 명이나 있다.”
제갈선우와 남궁민 역시 황보정석이 어딘가로 사라지는 것을 목격했다.
그래서 더욱 확신하던 차였는데 지금의 반응을 보면 제대로 찌른 게 맞았다.
“이쯤에서 인정하고 어딜 갔는지 말하면 관주님께는 찌르지 않겠어.”
“생사람 잡는 짓은 이쯤에서 끝내. 자꾸 이러면 나도 화를 낼 수밖에 없어.”
당기준은 백서휘의 도움으로 최근에 순수한 독기를 대량으로 흡수했다.
그는 그 일로 황보정석과의 격차가 훨씬 더 벌어졌다고 생각 중이었다.
‘붙으면 아무것도 못 할 텐데 무슨 자신감으로 이러는 거지?’
당기준은 황보정석을 은근히 밑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꼭 이길 수 있을 것처럼 말하는군.”
“왜? 내가 널 못 이길 것 같아?”
“때론 결과를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 있지.”
황보정석의 얼굴이 석상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다른 이보다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당기준은 그가 상처받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렇게 자신 있으면 나랑 한판 붙어보던가.”
“결과가 확실한 일을 굳이 해야 하는 이유가 있나?”
“계속 딴말하네. 나랑 싸워서 이길 자신이 없어?”
이렇게까지 도발하면 당기준도 싸움을 피할 수가 없었다.
“좋아, 한판 붙도록 하지. 대신, 내가 이기면 밤중에 간 곳이 어디인지 솔직하게 말해.”
“내가 이기면 조금 전에 했던 날 무시한 말을 사과해. 생사람 잡는 일도 그만두고.”
“그러지.”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제갈선우가 손을 들었다.
“뭐지?”
“제갈 형은 왜?”
“참관인은 내가 볼게.”
비무 당사자들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시작할 거야? 아니면 마저 몸을 풀래?”
“바로 시작하겠다.”
“황보 동생은?”
“바로 시작할게요.”
황보정석이 대답을 끝내고는 좌측 끝으로 갔고, 당기준은 기다렸다는 듯 우측 끝으로 갔다.
“갑자기 일이 왜 이렇게…….”
남궁민은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에 어안이 벙벙했다.
그때 모용진이 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톡톡 치면서 물었다.
“누가 이길 것 같아?”
남궁민은 비무 당사자들을 번갈아 보더니 이내 결정했단 표정을 지었다.
“저는 황보 형이 이길 것 같아요.”
“진짜?”
“네.”
“너 완전 눈이 삐었구나? 여기선 당연히 당 형을 골라야지.”
“그건 둘이 싸워봐야 아는 거 아닌가요?”
“하! 자신 있나 보네?”
“아니요. 자신은 없어요…….”
“자신 있으면 내기를 하려고 했는데 아쉽네.”
남궁민은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백서휘와의 지도 대련으로 예민해진 그의 감은 황보정석이 7할의 확률로 이길 거라고 말했다.
“……내기해요. 그런데 뭘 걸고 하는 거예요?”
“지는 사람이 악록산 내려갈 때까지 수발들어 주는 거 어때?”
“패배했을 때 군말 없이 한다고 맹세하면 그 조건으로 할게요.”
“좋아, 맹세하지. 패배했을 때면 나는 군말 없이 남궁민의 시중을 들겠다. 자, 됐지? 내기 성립된 거다?”
남궁민이 고개를 끄덕인 후 비무 당사자들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황보정석이 대도를 꺼내 들었다.
‘어떤 암기인지 알려져서 파훼법을 생각해 내면 내 손해다.’
당기준은 일부러 무기를 꺼내지 않고 품속에 손을 넣기만 했다.
제갈선우는 비무 당사자들을 번갈아 보더니 크게 소리쳤다.
“시작!”
황보정석은 기다렸다는 듯 당기준을 향해 달려들었다.
‘시작은 투골정(透骨釘)!’
당기준이 쇠못처럼 생긴 암기를 전방에 흩뿌렸다.
황보정석은 작고 짧은 동작으로 대도를 휘둘러 그의 공격을 쳐냈다.
카카카카강!
투골정은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하고 무력하게 날아갔다.
‘마지막에 봤을 때보다 반사 신경이 훨씬 더 좋아졌다.’
당기준은 이 싸움이 쉽지 않을 거라는 걸 직감했다.
황보정석이 다시 그를 향해 지반을 강하게 밟으며 달려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발이 빠르지 않았었는데?’
악록산에서 했던 수련이 황보정석에게 큰 진보를 가져다 준 것 같았다.
황보정석은 몇 번 다리를 움직이지 않았는데 바로 당기준의 코앞까지 왔다.
‘붙으면 끝이야.’
황보정석은 처음 만나서 시험할 때만 해도 커다란 바위를 들고 10보를 걸었던 놈이다.
처음 봤을 때보다 성장한 지금 얼마나 더 근력이 강해졌을지 상상이 안 갔다.
‘당할 황보정석에겐 미안하지만, 독기를 좀 써야겠어.’
당기준은 너무 강해 쓰지 않으려던 독기를 우모침에 불어넣어 던졌다.
“성가시게!”
너무 자잘해서 대도로 일일이 쳐내기 애매하자 황보정석이 뒤로 물러나며 도풍을 일으켰다.
강한 바람에 휘말린 우모침이 힘을 잃고 땅에 떨어졌다.
‘경지가 올라간 건가? 아니면 단순히 기술의 숙련도가 좋아진 거야?’
당기준은 이전보다 더 강해진 황보정석이 적응이 안 됐다.
‘어쩔 수 없군. 추혼전(追魂箭)을 써봐야겠어.’
당기준의 직감은 더 위험한 암기를 추천했다.
그러나 자기보다 황보정석이 약하다는 선입견에 사로잡힌 그는 직감이 권한 것보다 더 약한 암기를 선택했다.
촤르르륵!
추혼전의 옆에 달린 손잡이를 돌리자 톱니바퀴 돌아가는 소리가 나며 독기가 담긴 화살들이 황보정석을 향해 발사됐다.
황보정석은 당기준을 독한 놈이라고 욕하며 필사적으로 천왕보(天王步)를 밟아나갔다.
“제기랄.”
황보정석의 바람과는 다르게 추혼전에서는 끝없이 독기가 담긴 화살이 나왔다.
‘조금 있으면 화살이 다 떨어져.’
근접전에 들어갈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
당기준은 추혼전을 버릴 준비를 하였다.
탁탁탁!
추혼전에서 화살이 나오지 않았다.
당기준은 바로 추혼전을 옆에 버렸다.
그때였다.
황보정석이 기다렸다는 듯 천왕보를 앞으로 밟아나갔다.
그러다 갑자기 궁신탄영을 쓴 것처럼 빠르게 당기준에게 날아왔다.
‘어, 어떻게?’
감정의 폭이 크지 않은 당기준조차 놀란 얼굴을 하였다.
순식간에 좁혀진 거리.
당기준은 단검 두 개를 양손으로 꺼내 독기를 불어넣으며 앞으로 내밀었다.
그사이 다가온 황보정석이 대도를 횡으로 휘두르며 씨익 미소 짓고 있었다.
“걸려들었어.”
‘뭘’이라고 반문하려는데 황보정석의 대도에 갑자기 거력이 감도는 게 느껴졌다.
‘이건……?’
생각할 시간도 없었다.
단검에 황보정석의 대검이 닿자마자 거력이 폭발하며 굉음이 울렸다.
콰아아앙!
당기준은 피분수를 내뿜으며 저 멀리로 날아갔다.
‘이게 무슨…….’
“화, 황보정석 승!”
결과를 외친 제갈선우가 황급히 그가 있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
당기준은 비틀거리며 일어나려고 했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다시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오늘부터죠?”
“응?”
“수발드는 거요.”
남궁민이 배시시 웃으며 말하자 모용진의 얼굴이 무너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