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91화
백서휘가 장사에 도착했을 무렵, 현무의 좌를 맡은 현명과 백호의 좌를 맡은 욕수가 서안으로 돌아왔다.
“욕수? 욕수 맞지?”
“어? 현명? 네가 여긴 어떻게……? 아! 상제님께서 맡긴 임무가 다 끝난 건가?”
“임무는 진작에 끝났지.”
“돌아오는 데 시간이 걸린 걸 보면 꽤 멀리 갔던 모양이군.”
“그건 밝힐 수 없어.”
현명이 바늘과 실로 입을 꿰매는 듯한 몸짓을 취했다.
“굳이 물을 생각은 나도 없다.”
“절대 묻지 마. 안 알려줄 거니까.”
“그보다 주작이 죽은 건 알고 있나?”
“축융이?”
“몰랐나 보군.”
“어디서 어떻게 죽은 건데?”
“그건…….”
욕수가 주위를 둘러보고는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장사로 들어오는 문이 근처에 있어 지나다니는 사람이 많았다.
보안과 편의를 생각한다면 이곳보다는 다른 곳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나을 터였다.
“여기 말고 본단에 가서 얘기하자.”
두 남자는 부하들과 함께 천극문 밖에서 본단으로 들어가는 다른 비밀통로로 들어갔다.
“왜 이렇게 어둡지?”
“유등의 기름을 안 갈았나 봐.”
“본단의 형편이 유등의 기름을 아낄 정도로 안 좋았나?”
“그렇지는 않을 텐데…….”
두 남자는 본능적으로 본단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명성교도들의 시체를 발견했다.
처음에는 한두 구였던 것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많이 나왔다.
“모두 생존자를 찾아!”
열다섯 명이 한마음이 되어 찾았지만, 생존자는 발견할 수 없었다.
현명은 잠시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기더니 다시 시체들을 확인했다.
“……뭐하는 거야?”
“여토복을 찾는 중이다. 그놈이라면 내게 무언가를 남겨놨을 거야.”
“여토복의 시체라면 여기 있습니다.”
현명의 부하 중 하나가 여토복이 죽어 있는 곳을 알려줬다.
현명은 빠르게 걸어가 여토복의 품을 뒤지기 시작했다.
시체의 품을 뒤지는 게 찝찝하지만 지금은 달리 어쩔 도리가 없었다.
가진 주머니가 워낙 많아 쪽지를 찾는데 오래 걸렸다.
쪽지에는 이 지경을 만든 자의 이름이 피로 적혀 있었다.
현명은 그 이름을 보고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백서휘.”
“백서휘라면 수호문의 문주 아니야?”
“수호문의 문주 맞다.”
현명은 착잡한 얼굴로 여토복의 주위를 둘러봤다.
그의 주머니에서 꺼낸 암기들이 산을 이루었다.
백서휘가 감히 덤비지도 못할 만큼 강해 암기를 쓰지도 못하고 죽은 것 같았다.
현명은 여토복의 두 눈을 부드럽게 감겨주었다.
“어쩔 셈이야?”
“아직 상제님을 발견하지 못했으니 상제님을 찾는다.”
“그럴 필요 없다.”
꺼진 유등이 만들어낸 어둠 속에서 하얀 반가면을 쓴 자가 뚜벅뚜벅 걸어나왔다.
“누구냐!”
현명이 양손에 단검을 들고 싸울 자세를 취했고, 욕수는 두 주먹을 눈높이까지 올렸다.
“정체를 밝혀라!”
“혼천회의 백면(白面)이라고 한다.”
“혼천회라면…….”
“그대들이 소속되었었던 명성교와 동맹을 맺은 곳이지.”
“그럴 필요 없다고 한 건 왜지?”
“상제는 백서휘에게 죽었기 때문에 찾을 필요가 없다고 말한 것이다.”
“뭐?”
“거짓말 같으면 위로 올라가 봐라.”
믿을 수 없었던 현명과 욕수는 천극문으로 갔다.
건물들은 무너지기 직전이었고 여기저기에 문도들의 부패한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그리고 그 시체 틈에 상제가 목에 바람구멍이 난 채 죽어 있는 걸 발견했다.
상체는 두 눈을 부릅뜬 채 죽어 있었고, 두 눈엔 분노와 불신, 원통함이 담겨 있었다.
욕수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으며 상제의 눈을 감겨주었다.
“‘복수’를 원한다면 우리 밑으로 돌아와라.”
“당신들 밑으로?”
“그래.”
“나는 그 제안에 응하지 않겠다.”
현명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쪽은 어떻지?”
백면의 말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욕수에게로 향했다.
“나는…….”
* * *
백서휘가 장사로 돌아온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사합원에서 잘 쉬고 있는데 제갈선우가 나머지 오룡단을 데리고 그를 찾아왔다.
“무슨 일이야?”
“본가와 이야기가 잘 됐는지 궁금해서 찾아왔습니다.”
“이야기? 아! 그 무공 회수와 관련된 이야기 말이지?”
“네.”
“그거 아직 얘기도 안 꺼내 봤는데?”
“얼마 전에 말없이 떠나신 게 저희가 소속된 가문들과 이야기를 하러 가신 게 아니라…….”
“죽일 놈들이 있어서 죽이러 갔지.”
백서휘의 몸에서 유형화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오룡단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렸다.
“아직도 화가 안 풀리네. 더 잔인하게 그놈들을 죽였어야 했나?”
“과, 관주님, 살기를…….”
“아, 미안! 너무 화가 나서 너희들이 찾아왔단 걸 깜빡했다.”
백서휘는 황급히 살기를 거두었다.
오룡단은 크게 숨을 쉬었다가 내쉬며 심신의 안정을 꾀했다.
다시 분위기가 처음 찾아왔을 때처럼 돌아오자 제갈선우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언제 이야기를 할지는 기약이 없다고 보면 되겠습니까?”
“아니, 꼭 그런 건 아니야. 조만간 제갈세가를 찾아갈 생각이었거든.”
새로 지어질 집의 설계도를 받을 겸 해서 제갈세가에 가는 거였지만 백서휘는 굳이 그걸 밝히지는 않았다.
“제갈세가에 가면서 오대세가 모두와 만날 생각이니까 다들 짐 싸두고 있어.”
“언제쯤 간다고 알고 있으면 될까요?”
남궁민이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언제쯤이라……. 알차게 잘 쉬었으니까 다른 데 가도 괜찮겠지. 제갈세가엔 내일 가도록 하자.”
“네!”
백서휘와 오룡단은 다음 날, 날이 밝자마자 융중산으로 향했다.
* * *
“소속된 곳과 방문하신 목적을…….”
제갈세가의 대문을 지키는 위사가 제갈선우를 보고는 말을 멈추었다.
“소속은 자하무관, 목적은 제갈진천과의 대화다.”
“어떤 문제 때문에 소가주님을 찾으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저자와 함께라면 불가능할 겁니다.”
“그건 네 판단이지 제갈진천의 판단이 아니잖아.”
“그럼,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백서휘를 기억하는 위사는 잠시 고민하더니 제갈진천을 데려왔다.
“은인께서 무슨 일로 저희 가문 일을 찾으셨는지는 모르지만, 저놈과는 같은 공간에 있을 수 없습니다.”
제갈진천이 검지로 제갈선우를 가리키며 말했다.
제갈선우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할 이야기가 많다. 저놈과 관련된 문제로 이야기할 것도 있고.”
“……좋습니다. 은인이시니 특별히 허락하도록 하죠. 대신, 저놈은 다른 공간에 머물러야 할 겁니다.”
백서휘는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오시죠.”
백서휘와 오룡단은 제갈진천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반각이 조금 안 되게 지났을 때 그들은 귀빈실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저놈은…….”
“저기서 기다리도록 하면 되지?”
“예.”
백서휘가 선수를 먼저 쳐서 제갈선우를 귀빈실 근처에 머물게 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다들 귀빈실 안으로 들어갔다.
방이 그리 넓지 않아 여섯 명이 들어가니 꽉 찼다.
“무슨 일로 저희 가문을 찾으셨는지 알려주십시오.”
제갈진천은 백서휘가 의자에 앉자마자 콧김을 씩씩거리며 방문 목적을 물었다.
감정의 고저를 잘 보이지 않는 놈이 이렇게 흥분하는 걸 보면 제갈선우가 뭔 짓을 하긴 한 모양이었다.
‘뭐, 바로 본론에 들어가면 나도 좋으니까.’
백서휘는 오면서 생각해뒀던 이야기를 꺼내놨다.
“나는 제갈선우를 비롯한 다섯 명이 가문과 인연을 완전히 끊길 바라고 있어. 은(恩)도 없고, 원(怨)도 없는.”
“……그게 그렇게 단번에 자를 수 있지 않다는 건 은인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알아서 이런 말을 하는 거야.”
“진짜 연을 끊는다고 하면 밖에 있는 놈의 단전을 부수고, 사지근맥을 모두 잘라야 합니다.”
“정말 그래야 할까?”
백서휘에게서 흘러나오는 기도가 날카롭게 바뀌었다.
제갈진천은 죽음에 대한 공포로 덜덜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으, 은인이 날 죽이려고 이러는 건가?’
제갈진천이 오줌을 지리기 직전, 백서휘는 다시 기도를 처음 귀빈실에 왔을 때처럼 부드럽게 바꾸었다.
“으, 으, 은인이 원하시는 게 뭔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난 이놈들이 내 밑에 있길 원해. 가문에 묶여 있는 게 아니라.”
“저, 저, 저희가 허락한다고 해도 다른 가문이 허락하지 않으면…….”
“그래서 하는 말인데, 다른 가문에 서신 좀 돌려주라. 이번 건과 관련해서 전권을 가진 놈을 이곳으로 파견해달라고.”
“……아, 아, 알겠습니다.”
“양양에 있는 객잔에 머물고 있을 테니까 다 모이면 사람을 보내.”
제갈진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로 밖으로 달려 나갔다.
가문 어른들에게 소식을 빨리 알리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백서휘와 같이 있기 두려워서 그런 것 같았다.
“그 전권을 가진 사람들이 허락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때는 내가 얼마나 무서운 놈인지 그놈들이 더 잘 알게 되겠지.”
백서휘가 한쪽 입꼬리를 부드럽게 말아 올리며 말했다.
* * *
한 달이 조금 안 지났을 때, 제갈진천이 객잔으로 가장 충직한 수하인 우보를 보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우보가 정중히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소가주가 뭐래?”
“내일 신시 이후에 편하실 때 방문해주시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신시 이후면 같이 모여서 저녁 식사라도 할 건가 보지?”
“그,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우보가 이렇게 어렵게 대하는 사람을 제갈선우는 처음 봤기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내일 신시가 지나자마자 제갈세가에 도착할 거니까 미리 준비들 해놔.”
“준비라면…….”
“식사 자리가 됐든, 회의 자리가 됐든 뭐든 준비해놓으란 거야.”
“아, 알겠습니다.”
“가봐.”
“네.”
백서휘와 오룡단은 신시가 지나자마자 제갈세가에 당도했다.
대문에 선 위사들은 제갈선우를 보며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얼굴 구길 시간에 안내나 하는 게 어때?”
“안내는 제가 하겠습니다.”
어느새 나타난 제갈진천이 백서휘와 오룡단을 회의실로 안내했다.
회의실에 도착해서 사람들의 얼굴을 살펴보니 다들 젊었다.
‘소가주나 그에 준하는 인물들인가 보군.’
자신을 이용해서 이들의 자질을 시험하겠다는 오대세가 가주들의 의도가 훤히 보였다.
백서휘는 뜻대로 안 된다는 걸 보여주겠다고 생각하며 가장 상석에 앉았다.
‘뭐야, 반발하는 놈이 없잖아?’
생각 없는 놈이 나오면 두들겨 패서 이곳에 모인 이들의 기선을 제압할 생각이었는데 아쉽게 됐다.
아무래도 여기 모인 이들은 자신이란 존재가 얼마나 대단한지 아주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백서휘는 혀를 차며 다리를 꼬았다.
“시작해.”
제갈진천은 백서휘의 말에 담긴 뜻을 귀신같이 알아들었다.
“원하는 조건들을 좌측에서 우측 순으로 말씀하시길 바랍니다.”
“저부터 말입니까?”
“예.”
“좌측에서 우측 순이라면 그쪽에서 먼저 말하는 게 맞지 않습니까?”
“정말 제가 먼저 말씀하셔도 괜찮겠습니까?”
제갈진천과 모용세가의 소가주는 서로의 눈을 노려보며 신경전을 벌였다.
‘왜 이딴 병신 같은 거로 싸우는 거지?’
한 달이나 기다린 백서휘의 입장에선 몹시 짜증이 나는 상황이었다.
그는 그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발언을 하였다.
“어차피 조건은 각자의 가문에서 회의를 통해 정해진 거 아니었나?”
장내에 있는 모든 이들이 침묵으로 긍정을 표했다.
“그럼 순서가 중요할 이유가 없잖아. 안 그래?”
“그, 그렇습니다.”
“근데 왜 이런 병신 같은 거로 신경전을 벌이는 거지?”
“죄, 죄송합니다.”
“아무나 빨리 시작해.”
“제갈세가에서 은인께 부탁하고 싶은 건 없습니다.”
“정말인가?”
“예.”
다들 제갈진천을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그러다 가문에서 요구하는 조건이 생각났는지 고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좋아, 다음.”
“저희 가문에서 귀인께 요구하는 건…….”
모용세가의 소가주의 눈동자가 좌우로 흔들렸다.
제갈세가에서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을지 몰랐던 모양이다.
“빨리 말 안 하면 다음 순서로 넘어간다? 셋, 둘…….”
“요구하는 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뭐지?”
“모용진이 과거와 쳤던 사고와 미래에 칠 사고들을 모두 귀인께서 책임지셨으면 합니다.”
모용세가의 소가주가 눈을 질끈 감고 말하고는 살짝 후회하는 표정을 지었다.
“다음.”
남궁세가에서만 부탁을 하나만 들어달라는 요구를 했을 뿐, 나머지 다른 세가는 모용세가와 같은 조건을 얘기했다.
‘당가의 소가주가 보낸 눈빛이 수상한데…….’
잡아다가 고문을 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다들 궁금한지 회의실 밖으로 나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했다.
한 남자가 피투성이인 채로 누워 있었다.
‘제갈’이라고 가슴에 수놓아진 무복을 입은 걸 보면 제갈세가의 무사로 보였다.
“우보! 무슨 일이냐!”
“수주(隨州)에 괴질이 돌고 있다고 합니다.”
“괴질?”
“잠깐 기절한 이후에 일어나면 짐승처럼 변해서 사람을 습격하는 무시무시한 괴질이라고 합니다.”
그때 누워있던 제갈세가의 무사가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몸을 떨던 그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백서휘를 향해 달려들었다.
“크아아악!”
“이것처럼 말이지?”
백서휘는 달려드는 제갈세가 무사의 사지를 분질러버렸다.
우보가 넋이 나간 얼굴로 고개를 연방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