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85화
마음이 움직이면 기운이 함께 움직이는 심즉동(心卽動)의 경지.
자신이 그 경지에 오른 게 맞는지 당장에라도 시험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지금 자신에겐 그것보다 더 시급하고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가족의 안위.’
사합원을 알고 찾아왔다는 건 누나 부부와 조카들에 대한 정보를 암중단체 쪽에서 확보했다고 봐야 했다.
힘이든 정보든 가지고 있으면 쓰고 싶기 마련인데 암중단체들은 그 두 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자신만 노리는 게 아니라 누나 부부와 조카들까지 본격적으로 노릴 것이다.
최악의 경우, 납치를 당할 수도 있고, 살해당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이러한 일 일어나는 걸 방지하려면 가족들에게 온종일 붙어 있어야 하는데,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가족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알 수 있다면 좋……. 술법이 담긴 물건이라면 가능하지 않나?’
술법이 담긴 물건을 얻거나 구매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것 말고는 떨어져 있을 때 가족들의 상태에 대해 알 방법이 없었다.
‘술법이 담긴 물건을 만들어줄 주술사는……. 잠깐, 저건?’
백서휘의 눈에 괴력난신의 서가 들어왔다.
‘저 책에 천지회 회주의 혼이 봉인되어 있잖아. 그걸 어떻게 이용할 방법이 없을까?’
천지회 회주이자 귀영자(鬼靈子)란 별호를 가진 목인걸은 자신이 상대한 주술사 중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을 지닌 놈이었다.
‘일반적인 주술이랑 이족의 주술 모두에 정통한 놈이니 뭔가 수를 내주긴 하겠지.’
백서휘는 조심스럽게 괴력난신의 책장을 넘겼다.
“아무것도 안 적혀……. 어? 어? 어!”
백서휘가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 *
백서휘는 공중에서 바닥에 내리꽂히는 것처럼 착지했다.
어디인지 확인하기 위해 주위를 둘러봤지만, 보이는 건 남자의 인영과 휘황찬란한 옥좌뿐이었다.
백서휘는 목인걸과 옥좌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목인걸?”
“……네, 네가 여길 어떻게?”
“나랑 거래하자.”
“거래? 감히 내 아들을 죽여서 책을 탈취해놓고 거래를 하자고?”
“책은 네 아들이라기엔 너무 늙은 놈이 줬는데?”
“뭐? 잠깐! 그 늙은이가 혹시 얼굴에 사마귀가 있던가?”
“그래.”
“이 자라 같은 놈이 감히 내 아들을……!”
목인걸은 아들을 굉장히 아꼈던 사람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화를 낼 리가 없었다.
‘이 점을 이용해봐야겠어.’
백서휘는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당신 아들 무공이나 주술 배우지 않았어?”
“배웠다.”
“그럼 그 늙은이가 어떻게 당신 아들을 죽이겠어. 아무것도 아닌 노인네던데…….”
“그, 그러면 내 아들이 살아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냐?”
“충분히 가능성 있지.”
“혹시 내 아들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아봐 줄 수 있느냐?”
“거래하자는 거야?”
“그래.”
“좋아. 내가 당신 아들 생사여부를 알아봐 줄 테니까 당신은 나한테 필요한 물건을 제공하는 거야. 아! 근데 당신 아들이 은거하고 있으면 못 찾을 수도 있어.”
“내가 술법이 담긴 도구를 주겠다. 그걸로 위치를 추적하면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있게 될 거다.”
백서휘는 목인걸에게 술법이 담긴 나침반을 받고 사용 방법까지 들은 후에 다시 원래 세계로 돌아왔다.
“같은 성에 있을 때나 반응한다고 그랬는데?”
나침반 바늘이 한 방향을 고정적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백서휘는 바늘이 가리키는 곳으로 이동했다.
“포목점?”
은형잠종술로 숨어서 포목점을 살폈다.
나침반의 바늘이 포목점 주인을 가리켰다.
‘저놈이군.’
아들이 누구인지 알아낸 백서휘는 바로 책을 펴 목인걸과 접촉했다.
“아들을 찾았다.”
“거짓말을 하는 거라면…….”
“매부리코에 짙은 눈썹을 가진 놈 맞지? 날 죽이려고 하는 건지 사는 곳 근처 포목점에 주인으로 잠입해 있더군.”
“주, 죽일 건가?”
“날 공격 안 하면 안 죽이지.”
“제발 그러길 바라야겠군.”
“물건이나 내놔.”
“어떤 능력의 물건을 원하는 거지?”
“물건의 주인이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 현재 몸 상태가 좋은지 나쁜지, 위험에 처해 있는지 알려주면서, 위치추적도 되어야 하고, 물건의 주인한테 내가 단숨에 갈 수 있게 해주는 능력이 담겨 있으면 좋겠군.”
“네가 말한 모든 술법이 담긴 물건은 만들기 힘들다.”
“약속이 다른데? 네 아들이 죽어도 상관없나 봐?”
“끄, 끝까지 들어라. 모든 술법이 담긴 물건은 못 만들어도 따로는 가능하다.”
“좋아, 그럼 그렇게라도 해줘.”
“재료가 필요하다. 황금, 홍옥, 닭의 볏과 피…….”
백서휘는 만복상단을 통해 구한 모든 재료를 목인걸에게 건네주었다.
만드는 양이 꽤 돼서 2주일이란 시간을 소요하고 나서야 백서휘는 요청한 물건을 받을 수 있었다.
“……종종 찾아왔으면 좋겠군.”
“그럴 일 없을걸.”
목인걸에게 냉혹하게 말한 후 다시 원래 세계로 돌아온 백서휘는 학무관의 기숙사로 향했다.
사합원이 전소되는 바람에 가족들은 학무관의 기숙사에서 살고 있었다.
백서휘는 이 사실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제갈세가에 기관진식이 쫙 깔린 집을 설계해달라고 의뢰해야겠어.’
결의를 굳게 다지며 학무관의 기숙사 의 4층으로 올라가니 가족들이 머무는 곳이 나왔다.
“다들 모였으니 여길 찾아온 용건을 꺼내겠습니다.”
백서휘는 가방에 있던 장신구들을 꺼내 가족 한 명, 한 명에게 건넸다.
“이걸 주려고 오늘 다 모이라고 한 건가?”
“예.”
“유학을 배운 자로서 이걸 차고 다니는 건…….”
정하진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목숨을 지켜주는 술법이 담겨 있는 것이니 꼭 차고 다니셨으면 좋겠습니다.”
“술법?”
백서휘는 물건에 담긴 술법들에 관해 설명했다.
“꼭 차고 다녀야겠네.”
“꼭 차고 다녀. 진짜로. 그럼 난 잠깐 수련하러 다녀올게.”
“수련? 그 경지에?”
“그럴 이유가 있어서.”
백서휘가 장사를 빠져나와 멀찍이 떨어져 있는 악록산을 바라봤다.
오늘이 될 때까지 내력이 들어가는 일은 웬만해선 하지 않았다.
이유라면 여러 가지가 있었다.
일단, 내상이 회복되지 않아서 그런 것도 있었고, 약해진 모습을 보이면 덤비는 놈이 나오는지 궁금해서 그런 것도 있었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자신이 얼마나 강해졌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긴장은 다 풀렸다.’
이제 자체 시험을 치러도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백서휘는 응룡비천신법을 펼칠 생각으로 자세를 취했다.
달려가겠다는 마음을 먹자마자 육체와 기운이 움직였다.
백서휘의 바람을 가르며 앞으로 튀어 나갔다.
그냥 땅을 박차며 앞으로 도약하는데도 궁신탄영(弓身彈影)을 펼치는 것보다 움직이는 속도가 빨랐다.
풍경이 엄청나게 빠르게 뒤로 지나갔다.
웬만한 무인은 못 볼 정도로 뒤로 풍경이 지나가는 속도가 빨랐다.
‘이런 게 가능한 것이었나?’
본인의 몸으로 해내고 있음에도 백서휘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전력을 다해 달렸는데 내공이 왜 이렇게 많이 남아 있지?’
예전에 응룡비천신법을 펼칠 때 들었던 기운이 십 할이라고 하면 지금은 이 할밖에 들지 않았다.
기운의 움직임만 빨라진 게 아니라 효율마저 높아진 것이다.
한 줌의 진기로 천 리는 못가도 백 리는 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뭐 때문에 이렇게 효율이 높아진 건지를 모르겠네. 음…….’
기절하기 전에 했던 모든 것을 떠올리니 답이 나왔다.
‘극한까지 압축해서 그런 거구나!’
진기의 밀집도가 높아지면서 탁기들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순수한 기가 채우면서 효율이 좋아진 거로 보였다.
‘어? 벌써 악록산이라고?’
백서휘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이른 시간에 악록산에 도착했다.
전력으로 달렸으면 피로도 있고 땀도 송골송골 맺혀야만 하지만, 지금 백서휘는 그냥 동네 산책을 나온 것처럼 편했다.
‘효율이 높아진 것까지 감안하면 응룡비천신법이 세 배에서 다섯 배는 더 좋아졌어.’
백서휘는 기분 좋은 얼굴로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공터로 갔다.
공터에는 황보정석과 수련할 때 만들었던 오두막도 있었다.
‘일단은 구천현현보부터 점검하자.’
백서휘는 심호흡을 해 긴장된 몸을 이완시켰다.
이상할 정도로 몸이 빨리 풀려 최상의 상태가 되었다.
‘자, 이제 구천현현보를 시험해볼까.’
처음부터 전력으로 가지 않고 가볍게 구천현현보를 밟아봤다.
‘염천! 균……. 뭐, 뭐야!’
발을 못해도 세 번을 놀려야 나오는 거리를 한 번에 가버렸다.
진기의 효율이 높아진 게 여기서 또 강점이 되었다.
‘이번엔 내 능력이 좋아진 걸 염두에 두면서 한 번 더 해보자.’
초근접거리에서 조금 움직이는 것과 거리를 벌릴 때 크게 움직이는 것 모두를 실험했다.
‘염천! 주천! 염천! 양천 균천! 창천! 변천! 호천! 주천!’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움직이니 분신술을 쓰기라도 한 것처럼 잔상이 많이 남았다.
이형환위(移形換位)의 극의가 있다면 이것이 아닐까 싶었다.
‘자, 이제 크게 움직여볼까. 염천! 균천! 현천!’
남겨둔 발자국을 보기 위해 뒤를 돌아봤다.
정확하지 않지만, 발자국의 차이가 못해도 석 장 이상은 난 것 같았다.
‘확실히 난 성장했어. 전력을 다하지 않았는데도 보신경이 이 정도면 검법과 수법(手法)은…….’
생각하면 할수록 온몸이 부르르 떨리고 짜릿해졌다.
‘난화만천수부터.’
백서휘는 커다란 절벽을 올려다보며 심호흡했다.
그다음 양손을 들어 난화만천수의 기수식을 취했다.
처음에는 내력을 쓰지 않고 초식을 운용해봤지만, 이전과 큰 차이점을 찾을 수 없었다.
살짝 실망하는 와중에 난화만천수의 구결을 따라 진기를 운용해봤다.
손에 어린 보랏빛 수기(手氣)가 파괴력을 증대시켰다.
콰콰콰콰쾅!
절벽이 흔들리며 구멍이 나기 시작했다.
양손을 뻗을수록 구멍은 점점 더 커졌다.
백서휘는 손에 불어넣는 진기를 점점 늘려갔다.
수기에서 시작해서 수강에 이를 때까지 전진하며 절벽을 때리고 또 때렸다.
이제 그만해도 되겠다 싶어서 위를 올려다보니 천장이 높은 동굴 안이었다.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 그대로 뒤로 걸어 나갔다.
‘왜 이리 길어?’
밖으로 걸어 나오는데 한 식경이 조금 넘게 걸렸다.
너무 생각 없이 절벽을 때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서휘는 자기반성을 하며 검을 어검술로 조종하겠단 생각을 했다.
그 즉시 검집에서 검이 뽑혀 나오며 두둥실 위로 떠 올랐다.
‘얼 만큼 강해졌는지는 아직 긴가민가하군. 음……. 이번엔 처음부터 검강을 써볼까.’
과장하자면 신법을 펼칠 때만큼이나 검강을 만들 때도 효율이 상승했다.
‘실험을 한 번 해볼까? 얼마나 길게 뽑히는지?’
이전에 최상의 상태였을 때 두 장(약 6m)이 한계였다.
“지금은 어떨……. 와!”
그냥 있는 대로 진기를 다 불어넣으니 검강이 여섯 장(약 18m)까지 늘어났다.
딱 필요한 만큼만 만들기에 쓸 일은 안 나올 테지만 기록이 늘어나니 기분이 좋았다.
‘기념으로 위력도 한번 볼까?’
백서휘는 악록산의 정상의 끄트머리 부분을 향해 검을 날려 보냈다.
빠르게 날아간 검이 사선으로 정상의 끄트머리 부분을 베어버렸다.
처음엔 아무렇지 않던 정상은 중력이 작용하면서 서서히 밑으로 내려갔다.
쿠구구구궁!
악록산 정상이었던 것이 산 밑으로 빠르게 굴러 내려갔다.
인명피해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뒤늦게 났다.
어검비행으로 악록산의 정상이었던 것을 따라 날아가 검을 휘둘러 완전히 파괴해버렸다.
“큰일 날 뻔했네.”
아주 아주 뒤늦게 악록산 정상에 ‘애만정(愛滿亭)’이란 이름의 정자가 하나 있다는 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뭐, 불상 같은 게 아니고 정자니 없어도 상관없겠지. 강환도 한번 시험을……. 아니다. 이건 너무 위험해.”
있는 진기, 없는 진기 다 때려 박으면 악록산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실제로 사라지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런 두려움이 백서휘에겐 있었다.
‘악록산에서 약초를 캐고 사냥하는 이들이 있으니까 천강무극은 참자.’
백서휘는 도망치듯 악록산을 떠나 다시 장사로 돌아왔다.
* * *
젊은 남자가 가부좌를 튼 채 외로이 앉아 있었다.
띠리링!
밖에 놓아둔 종이 울리자 남자의 두 눈이 떠지면서 신경질적인 표정을 지었다.
“누구냐!”
“현명님 휘하의 여토복입니다. 현명님의 명으로 상제님께 소식을 전해드리러 왔습니다.”
“소식? 음……. 들어오거라.”
여토복이 빠른 걸음으로 걸어와 상제 앞에 부복했다.
“좋은 소식이냐? 나쁜 소식이냐?”
“나쁜 소식입니다.”
“나쁜 소식이 들어올 일이 없을 텐데……. 어디 한번 그 나쁜 소식을 보고해보아라.”
“영물을 생포하라는 임무를 맡았던 축융과 그 휘하 6수(宿)가…….”
“7수가 아니라 6수라고?”
“얼마 전에 백서휘에게 죽어서 6수가 됐습니다.”
“음, 그렇구나. 마저 보고해보아라.”
“영물을 생포하라는 임무를 맡았던 축융님과 그 휘하 6수(宿)가 백서휘에게 전멸했습니다.”
“정말로 축융과 그 휘하 6수가 임무를 수행하다 죽었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영물도 죽어 있는 걸 보면 내단 역시 백서휘 쪽에서 취한 것 같습니다.”
“축융에겐 흑주작의 힘이 있을 텐데?”
“남아 있는 흔적을 보면 축융님께서는 흑주작의 힘을 쓰고도 패배한 것 같습니다.”
상제가 눈을 감고 신음을 흘렸다.
“보고는 그것이 끝인 것이냐?”
“그렇습니다.”
“그럼 나가 보아라.”
“예!”
여토복은 상제에게 절을 한번 하고는 종종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
“여봐라! 구망을 불러와라!”
일각의 시간이 흘렀을 때 허리 끝까지 백발을 기른 남자가 대전 안으로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사, 상제님 죄, 죄송……. 헉헉!”
구망은 여토복이 했던 것처럼 숨을 헐떡거리며 정중하게 부복했다.
“되었다. 내가 명령했던 것들을 행하느라 늦었던 거겠지. 숨이나 고르거라.”
“헉헉! 네.”
시간이 지나자 구망의 숨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내가 너를 부른 건, 네게 내릴 명령이 있기 때문이다.”
“명령이라시면…….”
“축융의 복수를 해다오.”
“축융의 복수 말입니까? 축융이 다치기라도 했습니까?”
구망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죽었다.”
“……정말로 죽었습니까?”
“그래.”
“흉수가 누군지 알려주십시오.”
“너도 잘 아는 자다.”
“설마, 백서휘?”
“그래. 그놈이다.”
“그놈을 어떻게 죽이면 되겠습니까?”
“네가 제일 잘하는 것으로 복수하면 된다.”
“알겠습니다.”
“가보거라.”
구망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상제에게 인사하고는 머무는 곳으로 돌아갔다.
“백서휘, 네가 용의 역린을 건드리고도 살아 있을 수 있나 보자.”
상제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