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81화
황보정석이 시체들을 치우고 돌아왔다.
남궁민과 모용진은 그를 보자마자 서로 다투기 시작했다.
“봐봐요! 안 죽는다고 그랬죠? 어서 돈 주세요.”
“아직 오늘이 안 지났잖아. 그럼 모르는 거야. 침상에서 자다가 삼도천 건널 수 있는 거라고!”
“억지 부리지 말고 돈 주세요!”
“제기랄! 준다 줘!”
모용진이 품속에서 돈을 주섬주섬 꺼내 남궁민에게 건넸다.
“싸우러 간 사이에 내가 흑뢰문 놈들한테 죽나 안 죽나 내기라도 한 거야?”
황보정석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그, 그게요. 황보 형이 없는 사이에 내기를 하긴 했는데 악의를 가지고 한 게 아니라…….”
“저, 저는 그래도 황보 형이 살아온다는 쪽에 걸었는데…….”
보통 사람이라면야 자기 죽음을 두고 한 내기에 기분 나빠하겠지만 황보정석은 달랐다.
내기 중독자인 그는 자기의 현재 상황이 내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재밌어했다.
‘지금 내 상황이 내기가 된다고? 잘만 이용하면…….’
황보정석이 까끌까끌한 수염을 만지며 미소를 지었다.
“남궁민, 모용진.”
“네?”
남궁민과 모용진은 자기들이 한 짓이 기분 나쁘게 할 수 있는 일이란 걸 뒤늦게 깨달았다.
“자, 잘못했어요.”
“저, 저희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내기 때문에 혼내려는 거 아니니까 제갈선우랑 당기준 불러와.”
남궁민과 모용진은 후다닥 건물로 올라가 제갈선우와 당기준을 데려왔다.
“시답지 않은 이유로 부른 거면 널 죽일 거니까 설명 잘하는 게 좋을 거야.”
당기준은 황보정석을 향해 실제로 단검을 겨누었다.
제갈선우가 그 사이에 쓱 하고 끼어들어 싸움이 일어나는 걸 미연에 방지했다.
“황보 동생, 우릴 부른 이유가 뭐야?”
“날 좀 도와주십시오.”
“다짜고짜 도와달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알아듣기 쉽게 좀 말해봐.”
“제가 조금 전에 목숨 걸고 싸워서 받아온 권리에 대해서 잘 아시죠?”
“도박이나 내기를 할 수 있는 권리 아닌가?”
“맞습니다.”
“황보 동생 잠깐만, 설마 도박장을 털자거나 그런 건 아니지? 만약 맞다면 난 도울 수 없어.”
“그런 거 아닙니다.”
“그럼 뭐지?”
“관주에게 내기를 하자고 할 겁니다. 여러분과 제 자유를 걸고요.”
당기준 단검을 검집에 집어넣고 흥미롭다는 시선으로 황보정석을 바라봤다.
“어떤 걸로 내기를 할 셈이지?”
“내가 제일 잘하는 거로 해야겠지.”
“그게 뭔데?”
“주사위.”
고릿적부터 내려온 도구라 주사위를 이용한 도박 종목이 꽤 많이 있었다.
황보정석은 처음 보는 것만 빼면 그 종목들을 웬만큼 다 할 줄 알았다.
“주사위면 우리가 도울 수 있는 게 없는데?”
“아뇨, 있습니다. 제갈 형은 장인 하나를 수배해서 제가 설명하는 도구를 만드세요. 당기준 너는…….”
황보정석은 오룡단원들의 역할을 하나하나 다 분배해줬다.
* * *
흑뢰문과의 전투가 있고 일주일이란 시간이 흘렀다.
백서휘는 사합원에서 사흘 전부터 숙식을 해결했다.
무관을 놔두고 여기서 지내는 것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산파의 말에 따르면 백은하는 지금 출산이 머지않은 상태였다.
정하진은 일이 계속 생기는 바람에 바빠져서 집 지키기가 어려워졌다.
그래서 시간적 여유가 있는 백서휘가 백은하의 곁을 지키기로 결정됐다.
‘별일 없겠지?’
산실(産室)도 미리 만들어놨고 뜨거운 물이나 깨끗한 천 같은 것도 다 갖춰놓았다.
쿵쿵쿵!
사합원의 대문을 누군가 두드렸다.
백은하가 힘겹게 일어나 누군지 확인하려 했다.
“가만히 누워 있으라니까!”
“알았어.”
백서휘는 원자를 가로질러 걸어가서는 대문을 활짝 열었다.
밖엔 오룡단의 모든 인원이 무게를 잔뜩 잡은 채 서 있었다.
“너희들이 여긴 웬일이야?”
“잠깐 이야기 좀 하실 수 있겠습니까?”
“무슨 이야긴데? 여기서는 할 수 없는 이야기야?”
“아! 그건 아닙니다. 여기서도 할 수 있어요.”
“그러면 딴 데 가지 말고 여기서 말해.”
“용건을 말씀드리기 전에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저한테 도박이랑 내기할 수 있는 권리 있는 거 확실합니까?”
황보정석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
“그러면 저희가 온 용건을 전하겠습니다. 저랑 내기하시지 않겠습니까?”
“내기? 너랑?”
“예.”
“종목이 뭔데?”
“주사위입니다.”
“주사위라……. 뭘 걸고 하는 거지? 내기면 뭔가를 걸고 하긴 해야되잖아.”
“제가 승리하면 오룡단 전원에게 자유를 주시면 됩니다.”
백서휘는 피식 웃으며 다섯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봤다.
“응하실 겁니까?”
“이거 내가 안 하면 판이 만들어지지도 않는다는 건 알고 하는 말이지?”
“네, 알고 하는 말입니다.”
백서휘는 팔짱을 끼고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딱히 할 일이라고 할 만한 게 없어서 심심해하던 차였다.
그런 시기에 황보정석의 제안은 무척 달콤하게 느껴졌다.
“내가 승리하면 얻게 되는 건 뭐지?”
“원하는 걸 말씀해주십시오.”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고. 내가 이기면 너희가 속했던 가문이랑 연을 영영 끊고 내 밑으로 들어와라.”
“연을 영영 끊는다는 건…….”
“은원이 사라지고 그냥 생판 모르는 남이 되는 거야.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
“고마운 사람일지라도 은혜를 갚아선 안 되고, 죽이고 싶은 놈이어도 원한을 가져선 안 된다는 거 아닙니까.”
“잘 이해했군.”
“솔직히 그것뿐이라면 지금과 다를 게 없습니다만…….”
“다른 게 있지. 내 밑으로 들어오면 명령을 무조건적으로 따라야 하거든. 죽으라면 죽은 척하는 게 아니라 진짜 죽어야 돼.”
“음……. 잠깐 다른 사람들이랑 상의 좀 해도 되겠습니까?”
“그래.”
오룡단원들은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나는 여기서 더 일을 진행하지 않았으면 해.”
“제갈 형이 짠 작전대로라면 우리가 무조건 이길 텐데 그래도 빠지겠다는 거야?”
“내가 짠 작전이 괜찮긴 하지. 그런데 누군가 실수를 하거나 관주가 운이 좋아서 지면? 그때는 어떡할 건데? 지금도 관주 명령 따르느라 힘들어 죽을 것 같은데 여기서 더 나간다? 아마 우리는 반년 안에 명령을 견디지 못해 자살하거나, 명령을 듣다가 죽거나 할 거야.”
황보정석이 제갈선우의 말에 반박하지 못하고 입술만 잘근잘근 깨 물었다.
“나는 찬성.”
“이유는?”
“아무것도 못 하고 관주의 개가 되느니 한번 물어는 봤으면 좋을 것 같아서 찬성했다.”
“너희 둘은 생각이 어때?”
“저는 당 형이 한 말이 맞다고 생각해요.”
“민이 너는?”
“저는 제갈 형 말이 맞다고 생각해서…….”
남궁민이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내가 여기서 작전을 진행하겠다고 하면 두 사람은 빠질 건가?”
“……솔직히 말하면 그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은데 의리 때문에 빼지는 못하겠군.”
“저, 저도요.”
“그럼 작전은 계속 진행한다. 관주한테…….”
“관주한테는 나중에 가. 우리가 생각해야 할 문제가 더 있어.”
“또 있다고?”
“세가와 연을 끊으면, 무공이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 남이 됐다고 회수해가면 우리는 막을 수가 없어.”
거의 대다수의 문파가 무공을 도둑질하며 혀와 사지근맥을 자르고 단전을 부순다.
“관주가 해결해준다고 하면?”
“그럼 어쩔 수 없이 내기해야지.”
“‘어쩔 수 없이’라면 그냥 빠지는 게 어때? 제갈 형이나 남궁 동생이 빠져도 뭐라고 할 사람 없어.”
“내가 그런 걸 잘 못 해. 그러니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자고.”
제갈선우가 씁쓸함이 느껴지는 말투로 말했다.
“안 죽어. 내기에 이겨서 다 같이 살 거야. 그러니까 다들 희망을 가져.”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자 황보정석이 백서휘 앞으로 걸어갔다.
“세가와 연을 끊을 때 무공을 회수당하는 것만 막아주신다면 관주님이 내건 조건에 응하도록 하겠습니다.”
“진짜?”
“네.”
“좋아, 무공 회수는 내가 나서서 막아줄 테니까 승부에서 지면 무조건 내 명령에 따라야 한다?”
“네!”
“무르기 없기다?”
백서휘는 오룡단 모두의 눈을 마주 보며 말했다.
“내기는 어디서 할 거지?”
“어디서 하든 상관없습니다.”
“그럼 여기서 하자.”
백서휘와 황보정석이 심리전을 하는 사이, 다른 오룡단원들은 주사위 도박을 할 준비를 마쳤다.
“주사위 도박의 이름은 ‘자정’입니다.”
이름을 듣자마자 어떤 도박인지 바로 알아차렸지만, 백서휘는 티를 내지 않았다.
“어떻게 하는 건데?”
“주사위 6개를 잔에 넣고 흔들어서 탁자에 내리칩니다. 그러면 탁자에 주사위가 쏟아지겠죠?”
“그렇겠지.”
“그때 주사위가 포개어져 있으면 다시 흔들어야 합니다.”
“포개어 있지 않으면?”
“탁자에 내리쳤을 때 무조건 한 개 이상의 주사위를 밖으로 빼내야 됩니다.”
“다 빼면 끝인가?”
“끝은 맞는데 주의할 점이 남아 있습니다. 최종적으로 모든 주사위를 뺏을 때 탁자에 ‘1’과 ‘4’가 없으면 무조건 패배하게 됩니다.”
“1과 4가 있을 경우에 점수 계산은 어떻게 하지?”
“1과 4를 제외한 나머지 네 개의 주사위의 합계가 점수입니다.”
“그럼 아무리 잘해도 점수는 24를 못 넘겠군. 아! 이래서 도박 이름이 ‘자정’인가?”
“예, 그렇습니다.”
“좋아, 시작하자고. 근데 이거 몇 번이나 해야 하는 거지?”
오래 진행하다 보면 백서휘에게 들킬 수 있어 일부러 단판으로 승부를 보는 게 작전의 핵심이었다.
그걸 계속 염두에 두고 있던 황보정석이 덤덤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단판 승부로 진행할 예정입니다.”
“초심자한테 너무 한 거 아닌가?”
“맘에 들지 않으시면 3판 2선승제로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니, 단판으로 간다. 그 대신 첫판은 네가 먼저 해. 나는 네가 하는 거 보고 따라 할게.”
“알겠습니다. 제가 먼저 하도록 하죠.”
제갈선우가 짰던 작전과 다르게 진행되고 있지만 황보정석은 당황하지 않았다.
‘관주가 나온 숫자에 맞춰서 내 점수를 조작하는 게 불가능해졌지만 그래도 할 만해. 관주는 지금 처음으로 이 도박을 하는 거잖아. 이길 수 있어!’
황보정석이 당기준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괴물 같은 감각의 소유자라 백서휘는 이런 걸 놓치지 않았다.
그는 일단은 모르는 척하기로 마음먹고 도박에 집중했다.
잠시 후, 당기준이 상자에서 나무로 깎은 잔과 주사위 6개를 꺼내 황보정석에게 건넸다.
“시작하겠습니다.”
황보정석이 주사위가 담긴 잔을 흔들어 탁자에 내리쳤다.
나온 숫자는 1, 2, 3, 4, 5, 6.
패배를 막기 위해 1과 4를 우선 빼고, 최대 한계인 6을 빼 안전하게 6점을 확보했다.
“더 흔들겠습니다.”
“그런 건 나한테 말하지 말고 네 맘대로 해.”
황보정석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사위를 넣고 ‘특수한 기술’을 쓰며 잔을 흔들었다.
그렇게 섞어서 탁자에 내리치니 6, 5, 6이 만들어졌다.
“이대로 다 빼겠습니다.”
“그럼 네 점수는…….”
“제 최종 점수는 23입니다.”
“내가 23보다 크게 만들면 이기는 거 맞지?”
“쉽지 않을 겁니다.”
“그건 두고 봐야지.”
백서휘는 잔을 잡는 것과 동시에 안으로 기를 투과시켰다.
투박한 겉모양과 다르게 안이 굉장히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이거랑 조금 전에 했던 손기술을 합치면 원하는 눈이 나오게 되는 건가.’
백서휘는 장난질하고 있다는 걸 이미 다 눈치채고 있었다.
‘여기서 화를 내야 하나? 아니야. 아예 내가 내기에서 승리를 하자. 그래서 저놈들을 완전히 노예로 만들어버리는 거야.’
황보정석이 흔들리는 눈빛으로 백서휘를 바라봤다.
“왜 그렇게 봐?”
“무슨 문제가 있으신가 해서 쳐다봤습니다.”
“다시 한번 규칙 떠올리고 있었어.”
“그, 그렇군요.”
“해도 되지?”
“예, 얼마든지 하셔도 됩니다.”
백서휘는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으며 잔에 주사위들을 넣었다.
“자, 시작한다.”
잔을 든 손을 좌우로 흔들다가 탁자에 내리쳤다.
그 순간, 장심에서 은밀히 빠져나간 기운이 어검술의 묘리를 이용해 주사위의 눈을 바꿨다.
“이제 잔을 떼면 되는 거지?”
“네.”
백서휘가 잔에서 손을 뗐다.
나온 숫자는 1, 4, 6, 6, 6, 6이었다.
“이건 뭐, 더 할 필요가 없겠네. 내가 이겼지?”
“어, 어, 어…….”
모두가 넋이 나간 얼굴로 6개의 주사위를 바라봤다.
“조, 조작한 거 아닙니까?”
“무슨 조작?”
“주사위 말입니다!”
“여기에 탁자며 주사위며 잔 가져온 사람이 누군데? 너희들 아니야? 근데 조작이라고?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백서휘는 상황을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 일부러 더 길길이 날뛰었다.
“그, 그게……. 죄송합니다.”
“너희들은 사과 안 해?”
“죄송합니다.”
모두가 허리를 꾸벅 숙이면서 한목소리로 외쳤다.
“그럼 이제 내가 승자로서 권리를 행사해도 되는 거지?”
“……네.”
“확 다 죽으라고 할까?”
오룡단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니다. 그냥 여기에 설치한 탁자며 주사위 이런 것들이나 치워.”
오룡단원이 침울한 얼굴로 준비했던 것들을 치웠다.
그들은 간간이 황보정석에게 원망 어린 눈빛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