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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무관-80화 (80/202)

귀환무관 80화

황보정석은 지난 한 달 동안 백서휘와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그와 백서휘는 악록산에 오두막을 지어놓고 흑뢰문의 눈을 피해 몰래 훈련했다.

‘정말 지옥 같았는데…….’

뇌기를 쓰는 무인들은 전반적으로 움직이는 속도가 다른 무인들에 비해 빨랐다.

그걸 대비하기 위해 백서휘는 황보정석의 동체 시력과 반응 속도를 올리는 훈련을 진행했다.

방식은 아주 간단했다.

백서휘가 빠르게 움직이면 황보정석은 그걸 끝까지 보다가 들어오는 공격을 피하기만 하면 됐다.

설명만 들으면 할 만해 보이지만 실제로 해보면 정말 어렵고 고통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공격이 들어오는 걸 알고 있으면 ‘마음의 준비’를 해서 고통의 강도를 떨어뜨리는 게 가능했다.

그런데 부지불식간에 사각지대에서 들어오는 공격을 맞는다?

그러면 황보정석은 공격에 담긴 힘을 온전히 다 고통으로 느끼게 된다.

‘아파서 눈물 흘린 게 몇 번이나 되는지 기억도 안 나는군.’

어린 애처럼 질질 짜지는 않았지만 매일 같이 눈물을 흘렸다.

‘그때 생각하면 조금 부끄럽네.’

사실 더 부끄러운 건 뇌기에 대한 저항력을 키우는 훈련이었다.

공격에 당하면 어쩔 수 없이 생기는 마비 현상 같은 것들을 이겨내고자 저녁마다 뇌기로 된 공격을 맞았었다.

그때 제대로 마비가 오는 바람에 화장실에 가지 못해 오줌을 지렸던 적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한테 말하지 않는다고 하긴 했는데 그걸 관주가 지킬지 모르겠어.’

제발 말하지 않길 기도하며 황보정석은 흑뢰문의 문주에게 대적할 자세를 취했다.

“준비는 다 끝났습니까?”

“모두 준비는 끝났나?”

“예!”

흑뢰문 문주의 말에 흑뢰문의 문도들이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백서휘가 뒤에서 지켜보다 말고 앞으로 걸어 나왔다.

“잠깐! 잠깐! 멈춰!”

“뭘 멈추라는 거지?”

“문도들 동원해서 이놈 죽이려는 거 멈추라고.”

“약속을 어길 셈인가?”

“지금 당신이 먼저 약속을 어기려고 하고 있잖아.”

“내가 약속을 어겼다고?”

“나는 그쪽에만 권리를 양도했는데 왜 다른 놈들까지 그러는 거야. 여럿이서 이럴 거였으면 권리를 1인용이 아니라 단체용을 샀어야지.”

“단체용은 얼마지?”

“당신이 준 것에 다섯 배.”

“미친놈!”

“둘 중 하나를 선택해. 당신 혼자서 저놈을 죽일 건지, 아니면 단체용 권리를 양도받아서 저놈을 죽일 건지.”

흑뢰문 문주는 잠시 고민하더니 무언가 결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 혼자서 저놈을 죽이겠다.”

“다른 놈들이 움직인다 싶으면 그때는 계약한 시간과 관계없이 나한테 다시 권리가 돌아온다는 거 알아둬.”

“환불은…….”

“해줄 리가 없잖아. 내가 잘못한 게 아니라 그쪽이 잘못한 건데.”

“좋아, 밑에 있는 놈들이 움직여서 네게 권리가 돌아가면 그때는 어떤 말도 하지 않겠다.”

“주의사항을 충분히 알게 된 것 같으니 나는 이만 물러나도록 하지.”

백서휘는 뒷걸음질해서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까맣게 태워 죽여주마.”

흑뢰문의 문주는 단전에서 끌어올린 뇌기를 주먹에 강하게 불어넣었다.

황보정석의 얼굴이 석상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제남에서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흑뢰문주는 훨씬 더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도 저놈이 두렵지는 않아.’

훈련만 열심히 한 게 아니라 상대하는 방법도 많이 연구했다.

흑뢰문의 문주가 황보정석보다 한 단계 위에 있는 고수여서 기물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그 힘을 빌린 기물은 다름 아닌 고무 옷으로 백서휘가 오래전 암중단체 중 하나인 소뇌음사(小雷音寺)와 싸울 때 입었던 것과 똑같이 만든 옷이었다.

‘언제 덤비려는 건지 모르겠군.’

그때 흑뢰문의 문주가 빠른 속도로 이쪽을 향해 달려왔다.

황보정석은 도를 뽑아 들고 정면을 겨누었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흑뢰문의 문주는 보법을 밟아가며 빈틈을 노렸다.

황보정석은 반쯤 감긴 눈을 크게 떠 그의 움직임을 좇았다.

‘보인다!’

흑뢰문의 문주가 빠르긴 하지만 눈으로 못 쫓을 정도는 아니었다.

관주랑 비교하면 압도적으로 흑뢰문 문주 쪽이 느렸다.

‘이게 이놈의 최고 속도라면 이 대결의 승자는 나다.’

황보정석이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짓자 흑뢰문의 문주의 눈썹이 역팔자를 그렸다.

“이놈! 감히 누구 앞에서 여유를 부리느냐!”

자존심이 극도로 상한 흑뢰문의 문주는 뇌기가 담긴 주먹을 내질렀다.

황보정석은 끝까지 주먹을 지켜보다 이동 경로에 도를 가져다 댔다.

캉!

흑뢰문 문주의 주먹은 도신을 때리고 왔던 방향으로 튕겨 나갔다.

완벽하다고는 못해도 이정도면 훌륭한 대처였다.

뒤이어 뇌기가 도를 타고 황보정석의 몸까지 들어왔지만, 고무 옷이 막아줬다.

‘관주 도움 없이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세월이 있고 경지가 차이나 흑뢰문의 문주를 못 이길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백서휘가 시키는 대로 훈련을 했더니, 흑뢰문의 문주가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지 다 보였다.

황보정석의 입꼬리가 승천할 듯 높이 올라갔다.

“이놈이!”

흑뢰문의 문주가 빠른 속도로 주먹을 연속해서 내뻗고 휘둘렀다.

황보정석은 그에게 정타를 한 번도 허용하지 않았다.

“쉽지 않습니다. 그렇죠?”

황보정석이 웃으며 도발했지만 흑뢰문의 문주에겐 먹히지 않았다.

지금 그는 ‘도발’한 것보다 어떻게 이렇게 ‘성장’했는지를 추측하는 게 더 중요했다.

‘일단 작전상 후퇴다.’

흑뢰문의 문주는 전광석화처럼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그는 조금 전에 있었던 공방을 복기하며 어떤 식으로 이 난관을 헤쳐나갈지 생각했다.

‘지금보다 훨씬 더 빨라져야 한다.’

황보정석의 경지는 확실히 자신보다 아래.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신의 움직임을 그에게 모두 읽히고 있었다.

이건 명백한 위험 신호였다.

황보정석을 죽이려면 지금보다 더 빠르게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흑뢰문의 문주는 움직이는 속도를 올리기 위해 후유증을 각오하고 뇌기를 전신에 퍼뜨렸다.

파지직!

전신에서 검은색 번갯불이 일며 그의 움직임이 한결 더 빨라졌다.

상대가 더 빨라졌음에도 황보정석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아직까진 할 만해.’

갑자기 흑뢰문의 문주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경험이 없는 무인이라면 지금 같은 상황에서 당황하겠지만 황보정석은 아니었다.

그에겐 지금과 비슷한 일을 수도 없이 연습했던 경험이 있었다.

‘근처에 나타난다고 가정하고 있는 힘껏 도를 휘두른다!’

황보정석은 인기척이 느껴지는 곳에 바로 도부터 휘두르고 봤다.

쾅!

흑뢰문의 문주는 반격이 있을 거라 예상하지 못했는지 뒤로 물러나며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그걸……?”

황보정석은 ‘후발선지의 묘리’도 몰랐고, 배운 무공에도 ‘쾌’라는 속성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가 주먹을 막아낼 수 있었던 건 우직하게 했던 연습 덕분이었다.

그걸 모르는 흑뢰문의 문주는 특별한 방법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를테면 흑뢰문 무공의 파훼법 같은 것 말이다.

“그건 알아서 뭐 하시려고 그럽니까.”

“그래, 우리 사이에 그건 중요치 않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흑뢰문 문주의 몸에서 번갯불이 계속해서 일었다.

황보정석은 은근슬쩍 도와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지켜보던 백서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흑뢰문 문주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내 말이 어떻든 따라야 돼. 생각하고 판단을 내리는 순간, 넌 내가 아니라 저놈한테 죽게 된다. 알아들었으면 자세 바로잡아.』

황보정석은 다시 한번 흑뢰문 문주를 대적하는 자세를 취했다.

일순간 흑뢰문의 문주가 다량의 번갯불을 만들어내더니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뇌기 조심하면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횡소천군!』

황보정석은 백서휘가 보낸 전음 그대로 움직였다.

카강!

아까보다 더 강력해진 뇌기가 몸으로 흘러 들어왔다.

고무 옷이 막아줬지만 따끔함이 남아 있었다.

『뒤로 몸 돌린 다음, 일도양단할 기세로 내력 주입해서 태산압정!』

쾅!

큰 거 한 방을 맞자 흑뢰문의 문주가 입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는 신음을 내며 다시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후로 비슷한 공방을 여러 차례 반복했다.

계속 손해만 보자 흑뢰문 문주는 급박해졌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공격해보고 통하지 않으면 문도들을 이용한다.’

흑뢰문 문주는 거리를 두고 서서 오른손에 뇌기를 꾹꾹 눌러 담았다.

그다음 전심전력을 다해 보법을 밟아 황보정석에게 다가갔다.

『조심해! 큰 거 온다!』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흑뢰문 문주의 손엔 뇌기가 많이 담겨 있었다.

그때 황보정석에게 흑뢰문 문주의 빈틈이 보였다.

딱 그의 자리에서 유심히 볼 때만 보이는 빈틈이었다.

『정면으로 절대 붙지 마! 무조건 피해! 공격할 생각은 절대 하지 말고!』

백서휘의 전음은 왼쪽 귀에서 오른쪽 귀로 흘러나갔다.

황보정석은 빈틈에 공격을 가할까 말까를 두고 잠시 동안 고민했다.

‘도박이다!’

지금 같은 상황은 승부사로서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끝낼 수 있을 때 확실하게 목숨을 끊어놓는 게 맞았다.

“흐아아앗!”

황보정석은 기합 소리를 크게 내며 사선으로 도를 내리그었다.

흑뢰문의 문주의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골반이 사선으로 갈라졌다.

쩌저적!

흑뢰문 문주의 몸이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땅에 떨어졌다.

“무, 문주님!”

“저놈을 죽여라!”

지켜보고 있던 흑뢰문 문도들이 단체로 번갯불을 일며 황보정석을 향해 달려왔다.

쐐애애애액!

뒤쪽에서 소름 돋는 소리가 들려왔다.

황보정석은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봤지만, 소리의 정체를 알아내지 못했다.

‘뭐지?’

묵빛을 띤 무언가는 흑뢰문 문주보다 훨씬 더 빠르게 움직였다.

갑자기 흑뢰문 문도들이 픽픽 쓰러지며 죽어 나갔다.

‘도대체 저거 정체가 뭐야!’

흑뢰문의 마지막 문도를 죽이면서 의문이 풀렸다.

묵빛을 띤 무언가는 백서휘의 검이었다.

“바, 방금 그건 뭡니까?”

“어검술.”

손을 뻗으니 검이 스스로 날아와 백서휘의 손에 안겼다.

‘저, 절대 맹세를 어기지 말아야겠어.’

황보정석은 닭살 돋은 팔을 미친 듯이 문질렀다.

“도박장 가고 싶으면 여기 치운 다음에 가라.”

“네!”

“난 간다.”

“펴, 편히 쉬십시오!”

“그래.”

황보정석은 혼내지 않았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시체들을 치웠다.

* * *

축융은 널따란 연무장에 홀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그녀가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몸에 불꽃이 일었다가 사라졌다.

화르륵!

공기가 데워지면서 폐가 익는 거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주변이 뜨겁게 변했다.

무복을 입은 사내가 저 멀리서부터 축융이 있는 곳을 향해 걸어왔다.

지금의 상황이 익숙한지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축융님, 자미원(紫微垣)에서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무복을 입은 사내가 긴장된 얼굴로 축융 앞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말을 올렸다.

자미원이란 말에 축융의 눈이 떠지면서 안광이 번쩍였다.

“드디어 상제님께서 수호문주를 치기로 마음먹으신 거냐?”

“……아닙니다.”

“그럼?”

“남곤산(南昆山)으로 가서 작전을 진행하라 하셨습니다.”

“광동성에 있는 남곤산을 말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무슨 작전이지?”

“어떤 작전인지는 명령서 안에 나와 있습니다.”

“명령서를 줘봐라.”

장발의 남자는 품속에서 밀랍으로 봉인된 서신을 꺼내 축융에게 건네주었다.

축융은 심각한 표정으로 서신을 찬찬히 읽어나갔다.

명령서에는 마음을 위로하는 짤막한 말과 함께 어떤 식으로 움직여야 하는지 자세히 적혀 있었다.

‘남곤산에서 목격된 영물을 포획해 본교로 데려오라고? 음……. 광동성이면 호남성과 가까우니 잠깐 장사 쪽으로 외유해도 상제께서 용서해주시겠지.’

축융이 장사가 있는 쪽을 원독 어린 눈빛으로 보며 손에 든 서신을 삼매진화로 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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