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무관-69화 (69/202)

귀환무관 69화

서강호는 불타는 지전을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바라봤다.

아버지가 오래 살지 못할 거란 걸 그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미리 마음의 준비도 했을 텐데도 이러는 걸 보면 그의 마음속에 아버지란 존재가 크긴 컸던 모양이었다.

‘아버지 노릇을 못 했다고 들었는데.’

잘나든 잘나지 않든 아버지는 아버지인 것 같았다.

‘아버지라…….’

자신을 찾기 위해 온갖 고생을 다 한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렸을 때 봤던 모습이 전부였기에 머릿속에 떠오른 아버지의 얼굴은 자신만큼이나 젊었다.

그 사실이 너무 슬펐다.

‘엄마도 보고 싶네.’

철이 들기 전에 헤어졌던 터라 어머니란 말보다는 엄마란 말이 백서휘에겐 더 익숙했다.

그때 저 멀리서 어머니와 똑같이 생긴 여자가 두리번거리는 게 보였다.

그녀는 백서휘를 발견하고는 볼록 튀어나온 배를 내민 채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아직 안 늦었지?”

“산모가 뭐하러 여길 와.”

“뭐하러 오긴. 조문하러 왔지.”

“내가 그런 뜻으로 말한 거 아니란 거 알잖아.”

“알지. 아는데 나랑 강호 사이에 정이 있잖아. 같이 있어 주지는 못해도 조문은 와야지.”

자신이 밖을 나돌아다니는 동안 서강호를 돌봐준 건 백은하였다.

두 사람 사이를 알기에 뭐라 말할 수 없었다.

“모르겠다.”

백서휘는 작게 한숨을 쉬고는 백은하의 조문을 도왔다.

백은하는 조문을 빠르게 마치고 다시 무관으로 돌아갔다.

이후로 하오문 쪽 인물들과 무관 쪽 인물들이 조문을 왔다.

그들을 보며 백서휘는 서강호의 인물 됨됨이가 나쁘지 않은 편이란 걸 다시금 깨달았다.

‘좀 더 진심을 다해 키워도 괜찮을 것 같네.’

사흘이란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백서휘는 서강호의 아버지가 묘지에 안장되는 것까지 보고 무관으로 돌아왔다.

‘그놈들 다 도망갔겠지.’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그나마 협조적이었던 모용진과 남궁민까지 도망을 가고 없었다.

백서휘의 한쪽 입꼬리가 승천할 듯 위로 올라갔다.

‘계획대로군.’

추종향을 은밀히 묻힐 때부터 내심 다섯 놈이 도망가길 바랐다.

그들을 더 폭력적으로 교정해도 된다는 명분이 서기 때문이었다.

‘잘못을 저질렀으니 가혹하게 대해도 할 말이 없을 거야.’

백서휘는 혁대를 허리에 차고, 피풍의를 위에 걸친 후, 삿갓을 푹 눌러썼다.

‘도망쳤다가 잡히면 큰일 난다는 걸 몸에 아주 깊게 새겨주지.’

추종향을 맡게 해주는 약물을 코밑에 묻히고는 약효가 돌 때까지 기다렸다.

조금 기다리니 다섯 방향에서 추종향 냄새가 났다.

다섯 중 넷은 가까운 곳에 있는지 냄새가 아주 진했다.

백서휘가 볼 때 이놈들은 이미 잡은 물고기나 다름없었다.

‘유독 냄새가 옅은 이놈이 당기준인 인가 보군.’

다섯 중 가장 무공이 고절한 만큼 전력으로 신법을 전개해 멀리 떠났을 가능성이 컸다.

‘당기준부터 잡아야겠다.’

더 멀리 도망치기 전에 잡으려는 것도 있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당기준의 몸에는 ‘사천당가’의 피가 흘렀다.

이 말은 살성을 타고난 놈이 용독술의 전문가이기까지 하다는 뜻이었다.

언제든지 대량학살을 저지를 수 있는 놈이기에 가장 먼저 붙잡아야만 했다.

백서휘는 당기준이 있는 방향을 향해 전력으로 응룡비천신법을 펼쳤다.

발을 한번 내디딜 때마다 추종향 냄새는 조금씩 진해졌다.

‘사고쳐서 피곤하게 만들지 마라.’

당기준의 뒤꽁무니를 쫓으면서 사람이 사는 곳을 여럿 지나쳤다.

도망치느라 바빴는지 그곳 모두에서 살인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정말이지 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상덕(常德)을 지날 무렵부터 당기준과의 거리가 확확 좁혀졌다.

그의 체력과 내공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증거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말을 타고 달리는 당기준을 발견했다.

‘승부처다.’

백서휘는 땅을 박차는 다리에 힘을 주고, 용천혈로 향하는 진기의 양을 더욱 늘렸다.

백서휘가 하늘 위로 도약한 순간, 당기준은 그 소리를 듣고 뒤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완전히 돌렸을 때 나찰 같은 얼굴로 자신을 쫓는 백서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으, 으아아앗!”

감정의 동요가 거의 없는 당기준도 놀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말에 미친 듯이 채찍질을 가했다.

쐐애애애액!

그때 뒤에서 온몸에 소름이 돋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소리지?’

소리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당기준이 뒤를 돌아봤다.

그 순간, 그가 타고 있던 말의 다리가 잘려 나갔다.

그는 당황하지 않고 냉철히 현 상황을 분석했다.

‘멈추면 죽는다.’

당기준은 땅에 착지하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쳤다.

‘염천! 균천! 현쳔!’

백서휘의 몸이 별안간 사라지더니 당기준의 바로 앞에 나타났다.

당기준은 반사적으로 오독추명조(五毒追命爪)를 펼쳤다.

하지만 백서휘는 당기준의 공격에도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당기준은 어리석게도 그가 너무 놀라 반응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공격을 성공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백서휘는 아무런 피해가 없었다.

‘뭐지?’

당기준이 연이어 공격을 가했지만 백서휘가 입은 무복만 찢어질 뿐, 피부에는 실금 하나 가지 않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지?’

그때 금강불괴란 단어가 당기준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설마 이자 전설로만 전해지는 금강불괴의 경지에 이르렀단 말인가!’

금강불괴를 이룩한 사람은 무림 역사상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그런 탓에 실재하는 경지인지 의견이 분분했다.

믿을 수 없지만 그런 경지에 오른 자가 지금 눈앞에 있었다.

‘왜 이런 자가 무관을……?’

의문을 가지기 무섭게 당기준은 목 아래가 마비되는 느낌을 받았다.

감각이 움직임을 인식하기도 전에 마혈을 점혈 당한 것이다.

“경지 차이 확실하게 느꼈지?”

“그래.”

“혀가 너무 짧네. 누가 보면 잘못이라고는 하나도 안 저지른 사람인 줄 알겠어.”

백서휘가 비꼬듯 말했다.

“내가 뭘 잘못했단 거지?”

“진짜 모르는 거야?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거야?”

“모른다.”

“집에만 갇혀있어서 네가 뭘 모르는 것 같은데, 자존심은 부릴 만한 상대한테만 부리는 거야.”

백서휘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당기준의 몸에 역의 기운을 흘려 넣었다.

죽이려는 게 아니라서 감각을 증폭시키는 약은 일부러 먹이지 않았다.

“내 몸에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무슨 짓인지는 금방 알 수 있을 거야.”

역의 기운이 혈맥을 돌아다니면서 전신의 혈도에 자리를 잡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진기가 반대 방향으로 바꿔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제야 당기준은 백서휘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아차렸다.

“이, 이건…….”

“늦었어.”

“끄아아아악!”

태어나서 처음 당하는 고통에 당기준은 비명을 내질렀다.

“내가 살성을 만난 적 있다고 얘기했던가? 처음 듣는 거면 그냥 들어. 만났던 살성 중에 귀한 집 자식들이 몇몇 있었는데 그놈들은 하나 같이 자기가 당하는 고통에는 약하더라고. 참 이상하지? 다른 사람이 겪는 고통에는 조금도 공감 못 하는 놈들이 말이야.”

“머, 멈춰…….”

“아직도 혀가 짧잖아.”

“사, 살려다오.”

“조금씩 혀가 길어지는 걸 보면 교육 성과가 있긴 한 것 같네.”

“사, 살려주십시오!”

“좀만 더 교육하면 지금보다 공손해질 것 같은데…….”

“사, 살려만 주시면 끄으윽! 뭐든 하겠습니다. 끄아아아악!”

“예의범절이 아직은 몸에 덜 새겨진 것 같으니까 조금만 더 교육받자.”

반 각 정도 더 분근착골한 후에 당기준에게서 역의 기운을 회수했다.

당기준은 기진맥진한 얼굴로 눈물과 콧물, 식은땀을 옷 소매로 닦았다.

“일어서.”

“예?”

“일어서라고. 장사로 돌아가야 할 거 아니야.”

“아직 그럴 체력이…….”

“학구열이 굉장히 뛰어나네. 시키지도 않았는데 재교육을 받으려고 하고.”

“이, 일어나겠습니다.”

재교육이란 말에 당기준은 덜덜 떨리는 사지에 억지로 힘을 주어 일어났다.

“가자.”

“네.”

* * *

“반성의 시간을 갖도록 하겠다. 자수한 남궁민을 제외한 모두는 마보를 실시하도록.”

네 남자는 분근착골의 후유증으로 후들거리는 팔다리 탓에 제대로 자세를 잡지 못했다.

백서휘는 절대 그들의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조금만 자세를 잘못 잡았다 싶으면 회초리로 때렸다.

그때 가장 무공이 약한 모용진이 엉엉 울며 무릎을 꿇었다.

“과, 관주님, 살려주세요!”

“약속은 지켜야지. 그날 상음(湘陰)에 있는 객잔에서 네가 그랬잖아. 살려주면 뭐든 하겠다며.”

“이, 이건 못하겠어요.”

“그럼 이거 말고 뭘 할 수 있는데?”

“그, 그게…….”

“말 못 하지? 그럼 가서 마보나 해.”

모용진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다시 마보 자세를 취했다.

한편 제갈선우는 백서휘가 무언갈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는 한참을 생각한 끝에 정답을 생각해냈다.

‘이게 정답이 맞아야 하는데…….’

제갈선우는 백서휘의 눈치를 살살 보다 마보를 그만두었다.

“누가 그만두래.”

“할 수 있는 다른 게 있습니다.”

“뭔데?”

“관주님의 지시가 있을 때만 술을 먹겠습니다.”

“죽어도 안 먹겠단 말은 안 하네?”

“그, 그건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좋아, 맘에 들었다. 너는 저기 남궁민 옆에 가서 쉬어.”

“감사합니다.”

제갈선우가 후다닥 달려와 남궁민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역시 제갈세가인가.’

백서휘가 감탄하는 사이, 나머지 세 남자는 제갈선우의 행동에서 실마리를 얻었다.

가장 먼저 모용진이 마보를 그만두고 손을 들었다.

“과, 관주님 저도 할 수 있는 다른 게 있어요.”

“뭔데?”

“관주님 지시 없이는 그 어떤 사람이랑도 안 싸우겠습니다.”

“태평이나 강호가 뺨을 쳐도?”

“절대 안 싸웁니다.”

“남궁민! 가서 태평이랑 강호 불러와!”

남궁민은 금태평과 서강호를 자하무관의 실내수련실로 데려왔다.

“태평아, 저놈 뺨 좀 때려봐라.”

“예?”

“어서.”

금태평이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백서휘는 작게 한숨을 쉬고 서강호에게 눈짓했다.

서강호는 뚜벅뚜벅 걸어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모용진의 뺨을 때렸다.

아주 잠시지만 모용진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안 되겠다.”

“예?”

“좀 전에 네 눈에 살기가 어렸어.”

“아, 아니에요. 저 참을 수 있어요. 절대 안 싸울 거예요. 강호라고 했던가? 너 빨리 와서 내 뺨 좀 쳐봐.”

서강호가 몸을 돌려 백서휘를 바라봤다.

“이번엔 손바닥 말고 주먹으로 쳐. 진각 밟는 거 잊지 말고.”

“네.”

서강호는 심호흡을 몇 차례 하더니 진각을 밟고 정권을 날렸다.

퍽!

살고 싶었던 모용진은 충격에 뒤로 밀려나는 와중에 억지 미소를 지었다.

“모용진 너도 여기 와서 쉬어.”

“가, 감사합니다.”

황보정석도 다른 두 사람처럼 행동한 덕에 마보를 그만둘 수 있었다.

홀로 남은 당기준이 이를 악물고 마보 자세를 취했다.

“독하다, 독해. 저렇게 해봤자 얻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제갈선우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얼마나 갈지 내기를……. 하면 안 되겠지. 관주님이 허락하지 않았으니까.”

백서휘가 노려보자 황보정석이 바로 꼬리를 말았다.

그때 모용진이 백서후의 눈치를 보며 남궁민을 툭툭쳤다.

“야, 너 왜 혼자 자수했냐? 의리없게.”

“금방 잡힐 것 같아서요.”

“그럼 나한테도 귀띔해줄 수도 있잖아.”

“했어요.”

“언제?”

“객잔에 처음 도착했을 때 자수하자고 말하니까 죽어도 안 한다고 그랬잖아요.”

“그래도 네가 강권했어야지.”

“했어요.”

“더 해야지.”

모용진은 억지를 부리며 폭력까지 행사하려고 했다.

“관주님이 너 보고 있다.”

제갈선우가 근처에 있는 사람만 들을 수 있게 속삭였다.

깜짝 놀란 모용진은 황급히 주먹에 힘을 풀었다.

“모용진.”

“네?”

“속으로 참을 인 세 번을 쓰면 살인을 면한다는 말 알지?”

“아, 알아요.”

“지금 두 번 썼다.”

백서휘는 살기를 진득하게 내뿜으며 말했다.

모용진이 오줌을 지리며 손에 지문이 사라지도록 빌었다.

“세, 세 번을 쓰시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백서휘가 다시 시선을 옮겨 당기준을 바라봤다.

“당기준.”

“……네.”

“자존심은 부릴 만한 상대한테만 부려야 한다는 말을 잊은 것 같아서 그러는데, 우리 복습 한 번 할까?”

당기준은 악몽 같은 그 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감정을 거의 느끼지 못하는 그의 얼굴에 지독한 공포가 어렸다.

“……과, 관주님 허락 없이는 사람을 죽이지 않겠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백서휘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