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65화
백서휘의 검이 공기를 찢어발기며 날아갔다.
“온다!”
하백상의 외침에 호위무사들은 검병을 더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때 백서휘의 눈에 어벙하게 행동하는 호위무사가 들어왔다.
‘산뜻하게 시작하자고.’
백서휘의 검은 하백상을 향해 정직하게 날아갔다.
그러다 갑자기 방향을 바꿔 어벙한 호위무사의 가슴을 꿰뚫고 지나갔다.
푸욱!
호위무사는 가슴에 손을 얹으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동고동락했던 동료가 죽음에 이르자 다른 호위무사들의 눈에 살기가 감돌았다.
“눈싸움이라도 하자는 거야?”
백서휘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이놈!”
호위무사 하나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백서휘를 향해 달려들었다.
“경거망동하지 마라!”
하백상이 경고성 발언을 했지만, 너무 늦은 후였다.
백서휘는 검을 조종해 달려드는 호위무사 하나의 목을 베어버렸다.
스걱!
‘도발해서 재미 보는 건 여기까지겠군.’
하백상과 호위무사들은 진형을 갖추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백서휘는 여러 가지 수를 동원해 그들이 가까이 오는 것을 막았다.
“온다!”
“침착하게 행동해!”
하백상과 호위무사들은 검을 막아내며 이쪽으로 간간이 검기를 쏘아 보냈다.
백서휘는 손에 수강을 만든 후 난화만천수를 펼쳐 그 검기들을 일일이 쳐냈다.
‘난이도를 올려주지.’
인간은 손목 관절의 가동 범위 안에서만 검을 움직일 수 있지만, 이기어검은 달랐다.
허공에서 움직이는 검이라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을 공격하는 게 가능했다.
‘이렇게 말이지!’
백서휘의 검이 기괴한 각도로 움직여 호위무사 한 놈의 목을 또 베어냈다.
“이, 이런!”
“어, 어떻게……!”
백서휘는 상대에게 손해를 강요하는 싸움을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낭패를 보는 자들이 늘어났다.
하백상의 얼굴에 드리워진 패색은 점점 짙어졌다.
‘이대로는 위험하다. 무슨 수를 내긴 해야 해.’
지금은 백서휘에게 승리하는 것은커녕 생존조차 불안했다.
그때 하백상의 뇌리를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단어가 하나 있었다.
잠력촉발술(潛力促發術).
몸 안에 잠든 힘을 깨워 시전자를 강하게 만들어주는 술법이었다.
‘이걸 정말 써야 하나?’
안 좋은 상황으로 계속 흘러가고 있는 데도 사용하길 꺼리는 건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 번째는 술법의 효과가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나는 점이었다.
어떤 사람은 내공이 조금 늘어나는 게 전부인 반면, 어떤 사람은 본신의 경지가 불완전하게나마 상승하기도 한다.
두 번째는 진짜 치명적인 단점으로 술법을 쓰는 내내 선천진기가 소진된다는 점이었다.
최악의 경우엔 적을 이기고도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가 생긴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군.’
사실 답은 정해져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고민했던 건 위험 부담이 너무 크기 때문이었다.
‘빨리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하백상은 공격을 막아내다 백서휘의 얼굴을 보게 됐다.
백서휘의 얼굴에는 어느 정도 여유가 있었다.
화경의 무인을 상대하면서 여력이 남는다는 건 백서휘가 하백상 본인보다 강자라는 뜻이었다.
‘잠력촉발술을 쓸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군.’
지금처럼 고난이 닥쳤을 때는 나중 일을 고민하는 건 그만두고 생존부터 하고 봐야 했다.
‘술법을 발동시킬 시간을 벌어야 해.’
위기일발의 순간에서 쓰는 술법인 만큼 시전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문제는 고수들의 싸움은 ‘찰나’의 시간에서 벌어진다는 것이었다.
까딱 잘못하면 목이 날아가고 가슴에 바람구멍이 나는 상황에서는 ‘촌각’의 시간도 길기 마련이었다.
‘촌각의 시간만 누가 벌어준다면!’
방법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눈알을 굴릴 때였다.
백서휘가 호위무사들의 공격에서 제갈중헌을 보호하는 걸 보게 됐다.
‘저거다!’
하백상의 머릿속에서 계획이 순식간에 만들어졌다.
호위무사들은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어떤 명령을 내리든 그대로 따랐다.
제갈중헌과 동귀어진하라고 한다면 생각하지 않고 그대로 덤벼들 것이다.
‘저놈이 호위무사들을 상대하는 사이에 나는 잠력촉발술을 쓰면 돼.’
호위무사들이 개죽음당하겠지만 지금은 하백상 본인부터 살고 봐야 했다.
‘호위무사라는 건 원래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존재니까 괜찮아.’
죄책감을 없애기 위해 하백상은 속으로 자기합리화를 여러 차례 했다.
‘지금이다!’
“모두 총군사를 노려라!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를 죽여야만 한다!”
“충!”
호위무사들은 고민도 하지 않고 제갈중헌을 향해 달려갔다.
갑자기 일어난 돌발 상황에 제갈중헌과 백서휘가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그때 눈치를 보던 하백상이 잠력촉발술을 발동했다.
‘크아아아악!’
촌각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하백상은 온몸이 불타오르는 고통을 느꼈다.
눈을 질끈 감고, 이를 악무는 것만으로도 견디기가 쉽지 않았다.
입에서 저도 모르게 신음이 계속 흘러나왔다.
‘조금만, 조금만 더 빨리……!’
하백상이 잠든 힘을 폭발시키는 동안, 백서휘는 검에 제갈중헌을 보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휘이이익!
바람을 가르며 날아온 검이 호위무사들을 공격했다.
푹푹푹! 서걱! 서걱!
경지가 워낙 차이가 나다 보니 호위무사들은 백서휘의 공격을 막아낼 수 없었다.
제갈중헌은 주인 없이 날아다니는 검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크르륵!”
마지막 호위무사의 목을 꿰뚫은 검이 백서휘의 손으로 다시 돌아왔다.
탁!
‘가라!’
백서휘는 검을 다시 잡은 후 하백상을 향해 쏘아 보냈다.
그때였다.
하백상이 감았던 두 눈을 뜨며 검강이 서린 검으로 백서휘의 검을 쳐냈다.
콰아아아앙!
굉음과 함께 백서휘의 검이 저 멀리로 날아갔다.
생각지도 못한 하백상의 강한 반격에 검과 연결된 심령이 요동쳤다.
상단전에 충격이 오며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져 왔다.
“크윽!”
백서휘는 찡그린 눈으로 갑작스레 강해진 하백상을 바라봤다.
하백상은 거칠게 호흡하며 다음 공격을 준비했다.
‘내가 호위무사들을 상대하는 동안 저놈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어떻게 강해진 건지 짐작이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잠력을 폭발시켜 한순간이지만 강해지는 종류의 술법 내지는 무공을 썼을 터.
만약 하백상의 경지가 불완전하게나마 상승해 잠시지만 ‘현경’이 되었다면 제갈중헌을 피신시켜야만 했다.
백서휘가 강하다고 하지만 뒤에 ‘짐’을 달고 비슷한 경지의 무인을 상대할 정도는 아니었다.
『조용히 이곳을 빠져나가서 안가로 바로 가.』
『알았소.』
제갈중헌이 눈치를 슬금슬금 보다가 다른 곳으로 도망갔다.
백서휘는 검이 떨어진 곳을 향해 팔을 뻗었다.
상당히 멀리 있는데도 불구하고 검은 두둥실 떠올라 그의 손안에 들어갔다.
‘이기어검은 웬만하면 쓰지 말아야겠다.’
이기어검은 허를 찌르는 공격이라 위협적인 거지 위력 자체는 그렇게 강하지 않았다.
오히려 손에 검을 들고 싸우는 게 파괴력 면에서는 더 좋았다.
‘어떤 식으로 나올지 한번 지켜볼까.’
하백상의 검에 둘린 검강이 점점 굵어지고 길어졌다.
길이를 늘여 거리상의 우위를 점하고, 굵기를 키워 파괴력을 높이려는 것 같았다.
잠력을 폭발시켜 내공이 많아진 이점을 확실하게 살리겠다는 하백상의 생각을 엿 볼 수 있었다.
‘나도 발맞춰 가야겠지.’
백서휘는 쥐고 있는 검에 진기를 강하게 불어넣었다.
그가 만들어낸 검강이 하백상의 것과 비슷한 체급을 가지게 되었다.
하백상이 백서휘를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려갔다.
그의 뒤로 잔상이 흐릿하게 계속 남았다.
백서휘는 내력을 눈에 불어넣어 안력을 상승시켰다.
때마침 가까이 온 하백상이 일도양단할 기세로 검을 힘껏 내리그었다.
증폭된 동체시력 덕분에 그의 검속은 그렇게 빠르게 느껴지지 않았다.
콰아앙!
철과 철이 맞부딪히는데 벽력탄이 터질 때 날 법한 소리가 났다.
무공을 모르는 양민이라면 놀라 자빠질 일이겠지만 두 사람에게는 별로 신기한 일이 아니었다.
‘계속 공세를 이어나가야 해!’
한 번 기회를 놓치면 힘들다고 느낀 건지 하백상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콰콰쾅!
삼연격에서 사연격으로 넘어갈 때쯤, 하백상이 가슴께를 살짝 열어 보였다.
빈틈이라기엔 너무 노골적이고, 빈틈이 아니라기엔 말도 안 되게 무방비했다.
백서휘는 반격당할 것을 감안하고 빈틈에 검을 찔러넣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하백상이 몸을 틀며 검을 든 팔을 쭉 내 뻗었다.
백서휘는 구천현현보를 뒤로 밟으며 그의 검을 쳐냈다.
쾅!
위력이 상당해 더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오른손에서 느껴지는 찌릿함이 어색했다.
‘이 느낌도 진짜 오랜만이네.’
중원 무림의 인물에게선 절대 느껴보지 못했던 감각이었다.
‘진짜 진심으로 싸워야겠다.’
백서휘의 표정이 한층 더 진지해졌다.
맞수까지는 아니어도 상대가 강자란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이제부터 ‘진심’으로 간다.”
“……지금까지는 그러면 진심이 아니었단 건가?”
“반쯤 진심이었다고 해두지.”
하백상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자, 놀아보자.”
하백상의 공격을 기다리고 자신이 반격하는 형태로 여태껏 진행됐다면 이제부터는 아니었다.
백서휘는 전력으로 구천현현보를 밟아나갔다.
‘염천! 균천! 현천!’
하백상과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공격하는 척하면서 이화접목의 묘리로 두 검을 붙여버렸다.
“뭐, 뭐야.”
실전에서 보기 힘든 기예에 당한 탓에 하백상은 당황하고 말았다.
백서휘는 그의 품속으로 들어가며 난화만천수를 펼쳤다.
파바바박!
무복의 소맷자락이 바람 앞에 깃발처럼 펄럭이고, 수많은 손그림자가 하백상을 덮쳤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하백상이 전력으로 호신강기를 펼쳤다.
퍽퍽퍽!
때리는 소리가 계속 들렸지만 하백상은 전혀 타격을 입지 않았다.
대신 그의 새까맣던 머리는 하얗게 변했고, 어린아이 같던 피부에는 검버섯과 주름이 하나씩 생겼다.
‘이, 이대로면 모든 진기가 소진되어 죽는다.’
하백상은 지금 당장 죽고 싶지 않았다.
골골거리더라도 내일을 사는 것이 그의 소원이었다.
그리고 살아야만 부모님의 복수도 하고 백서휘에게도 복수할 수 있었다.
‘잠력촉발술을 한 번 더 쓴다.’
어차피 모 아니면 도였다.
선천진기를 소진하는 속도가 두 배 이상 빨라지겠지만 그만큼 무력도 강해질 터였다.
‘간다!’
하백상은 호신강기로 백서휘의 난타를 이 악물고 버텨내면서 잠력촉발술을 펼쳤다.
‘제발……!’
그렇게 촌각의 시간이 흐르고 시뻘겋던 하백상의 몸이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변했다.
‘됐다!’
하백상이 이화접목으로 붙여놓은 검을 떼어내 백서휘를 공격했다.
그의 공격 속도는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되게 빨라져 있었다.
‘뭐, 뭐야!’
쾅!
백서휘는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허공으로 날아갔다.
‘내가 날고 있다고?’
언제나 적들이 날아다녔지 자신이 허공을 비행한 적은 없었다.
생전 처음 당하는 일에 충격을 받았다.
주르륵!
속에서 나온 피가 입술과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니, 내상까지 입을 줄이야…….’
백서휘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짓는데 하백상의 검첨에 둥그렇다 만 것이 맺혔다.
‘저건 또 뭐……. 검환? 불완전한 경지인데 검환을 만들어낸다고?’
잠력을 폭발시켜 상승한 경지라 불완전했다.
그러다 보니 검환은 압축이 덜 되고 괴상한 모양을 띠었다.
백서휘는 황급히 검에 진기를 빠르게 불어넣었다.
그의 검첨에 포도알 크기의 검환이 만들어졌다.
“죽어라!”
하백상의 검에서 발사된 검환이 백서휘를 향해 날아왔다.
백서휘는 그걸 보자마자 지체하지 않고 검환을 쏘아 보냈다.
두 사람이 만들어낸 검환은 서로를 향해 날아갔다.
그러다 중앙에서 맞부딪히며 커다란 폭발을 만들어냈다.
콰아아앙!
검환이 만들어낸 충격파가 주변의 전각에 있던 창틀과 기와를 부쉈다.
이윽고 일어난 먼지구름은 두 사람의 시야를 가리게 했다.
‘어디 있지?’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먼지구름을 돌아다니며 하백상을 찾아다녔다.
‘찾았다.’
백서휘는 은밀히 접근해 한백상을 죽이려 했다.
‘제기랄! 이놈을 죽이면 간자 색출을 못 하잖아? 생포하는 수밖에 없겠네.’
그때 하백상이 마지막 발악을 하기 시작했다.
채채채챙!
미친 듯이 휘둘렀지만, 힘이 처음에 맞부딪혔을 때만큼 강하지 않았다.
‘술법이 끝날 시간이 다 되어 가는가 보군. 응? 뭐야? 폭삭 늙었잖아?’
중년의 남자는 어느새 인생의 끝을 바라보는 노인이 되어 있었다.
‘내가 안 죽여도 저절로 수명이 다해서 죽겠는걸.’
백서휘는 검집에 검을 집어넣고 하백상에게 다가갔다.
“항복하지, 그래?”
“그러면 살려줄 건가?”
“아니.”
“그럼 끝까지 해보는 수밖에…….”
하백상이 검을 휘둘렀지만, 근육이 다 빠져 느린 속도로밖에 움직일 수 없었다.
백서휘는 한숨을 내쉰 후 그의 훈혈을 짚었다.
털썩!
백서휘는 기절한 하백상을 챙겨 제갈세가가 마련한 안가로 향했다.
안가에는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인물들이 초조한 표정으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왔소? 응? 그 노인은 누구요?”
“하백상.”
제갈중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