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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무관-57화 (57/202)

귀환무관 57화

백서휘는 피풍의를 입고 삿갓을 푹 눌러 썼다.

누워 있던 우염상이 그의 뒷모습을 보며 물었다.

“어딜 가려고?”

“소림.”

깜짝 놀란 우염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때 했던 말이 진짜였구나.”

“그럼 괜히 하는 말일 줄 알았어?”

“솔직히 말하면 진짜로 숭산에 갈 줄은 몰랐다.”

“내가 한다면 한다는 사람인 거 우 노괴는 알고 있었잖아?”

“다른 문파도 아니고 소림이니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지.”

“참, 소림이 뭐라고 이러는지 모르겠네.”

태산북두이니 북숭소림(北崇少林)이니 하지만 백서휘의 입장에선 거기서 거기였다.

“더 할 말 있어?”

“없다.”

“그럼, 난 간다.”

“몸조심해라.”

“다칠 일 없어.”

객잔 밖으로 나온 백서휘는 천환역형공으로 역용한 후, 숭산을 향해 전력으로 응룡비천신법을 펼쳤다.

등봉과 가까이 있었기에 숭산에는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엄청 많군.’

셀 수 없이 많은 향화객이 숭산을 오르는 게 보였다.

대부분이 양민들이었지만 중간중간 무기를 찬 무림인도 섞여 있었다.

백서휘는 그들의 틈에 섞여 빠른 걸음으로 숭산을 올라갔다.

반 시진이 걸려 당도한 소림사의 산문(山門).

두 명의 무승이 그 앞을 지키고 서서 향화객들에게 소림사에서 지켜야 하는 규칙을 알려주었다.

백서휘는 무승들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시주, 안으로 들어가려면 제가 하는 이야기를 다 들으셔야 합니다.”

좌측에 있는 무숭이 정중하지만 힘이 있는 말투로 말했다.

“이야기?”

“소림사에서 지켜야 하는 규칙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규칙이라……. 좋아, 들어보도록 하지.”

“화재의 위험이 있어 허락 없이 불을 피우는 행위는 절대적으로 금지하고 있으며 다른 향화객들에게 시비를 걸거나…….”

백서휘는 무승들의 경고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경내에서 무기를 쓰려는 모습이 보이면 저희와 같은 무승들에게 제지를 당할 수 있으니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그러지.”

백서휘는 심드렁한 얼굴로 대답하고는 산문을 지나쳐 중앙에 있는 대웅보전(大雄寶殿)으로 향했다.

무승들은 매서운 눈으로 멀어져가는 그를 노려보고는 다른 향화객들에게 규칙을 이야기했다.

‘사람 더럽게 많군.’

활짝 열린 대웅보전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사람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백서휘는 그 줄을 무시하고 대웅보전 쪽으로 걸어갔다.

질서를 지키기 위해 나와 있던 네 명의 무승들이 눈빛을 교환했다.

두 명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백서휘를 향해 다가갔다.

“시주, 새치기는 옳지 않은 행위입니다. 향을 올리고 싶으시거든 저 뒤로 가서 줄을 서시지요.”

백서휘는 피식 웃고는 둘을 향해 입을 열었다.

“너희들 말고 각운 데려와.”

“각운님과 약속하셨다던 분입니까?”

“약속? 오늘 온다고 각운에게 서신을 전하긴 했다.”

무승들이 저희끼리 속닥거리며 얘기를 한참 동안 나누었다.

백서휘의 인내심에 한계가 달할 무렵, 처음에 말을 걸었던 무승이 입을 열었다.

“각운님을 데려오겠습니다. 잠깐 여기서 기다리시지요.”

“그러지.”

무승이 나한들이 있는 나한전(羅漢殿)으로 달려갔다.

조금 기다리고 있으니 각운이 다른 나한들과 함께 백서휘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시주의 이름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쪽이 각운?”

“저는 각운이 맞습니다. 시주의 이름을 말씀해주시지요.”

“백서휘.”

자신의 이름을 말하기 무섭게 각운이 소리쳤다.

“나한들은 향화객들을 보호하라!”

나한들은 양치기 개가 양을 몰 듯 향화객들을 안전한 곳으로 몰아갔다.

백서휘는 그들을 한번 쳐다봤다가 각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저들을 내보낼 기회를 주지.”

각운은 향화객의 안전과 소림의 위명을 떨치는 것을 두고 잠시 고민했다.

‘방장 사백께서 소림이 강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라고 했는데…….’

각운은 슬쩍 뒤를 돌아보니 나한들이 철통같이 향화객들을 지키고 있었다.

‘소림이 과거의 명성을 먹고 사는 곳이 아님을 보여준다.’

“시주의 배려는 감사하지만 소림은 싸움의 여파에서 향화객들을 지킬 힘이 충분히 있습니다.”

“난 이름을 지킬 기회를 줬어. 이 기회를 걷어찬 건 너야.”

“소림의 이름이 한낱 무관의 관주에게 떨어질 정도로 가볍지는 않습니다.”

“한낱 무관의 관주에게 한 방 먹게 되겠군.”

백서휘가 허리춤에 찬 검을 뽑아 들었다.

챙!

“시주에게 소림이 왜 소림인지를 보여주겠습니다.”

백서휘는 자세를 잡고 각운이 먼저 공격하기를 기다렸다.

‘어라?’

각운은 거리를 처음보다 훨씬 더 벌렸다.

‘이상하군.’

권각술을 쓰는 자라면 거리를 벌리는 게 아니라 좁히는 게 정상이었다.

아무리 수비적인 움직임을 보인다고 해도 이렇게 상대와 멀리 떨어지는 건 말이 안 됐다.

노림수가 있는 게 확실했다.

‘소림의 권각술을 쓰는 사람이 원거리에서 공격할 방법은…….’

각운의 움직임을 보니 어떤 수를 쓸지 보였다.

‘백보신권(百步神拳)밖에 없지.’

아니나 다를까.

각운은 양손을 정권으로 바꿔쥐며 진각을 밟았다.

쿵!

땅이 울리며 깨진 거울처럼 사방으로 갈라졌다.

각운의 호흡이 달라지며 양손을 빠른 속도로 여러 차례 내뻗었다.

금빛을 띤 권기(拳氣)가 소름 돋는 소리를 내며 백서휘를 향해 날아갔다.

백서휘는 느릿한 동작으로 검기가 일렁이는 검을 움직였다.

캉캉캉캉캉!

검에 맞고 튕긴 권기들이 사람이 많이 몰려 있는 쪽으로 날아갔다.

“향화객들을 보호해라!”

나한들이 복명복창하며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한번 튕겨 위력이 줄었음에도 그들은 쉽사리 막지 못했다.

“크윽!”

“으윽!”

각운의 얼굴이 석상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어, 어떻게 저럴 수 있는 거지?’

분명히 백서휘는 엄청나게 느리게 움직이는 중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건 그렇게 움직이는데도 불구하고 권기들을 모조리 튕겨낸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그는 그냥 움직이지도 않았다.

최소한의 동작으로 조금의 낭비도 없이 방어했다.

‘이 자 둔검(鈍劍)의 극의에 올랐다.’

후발선지의 묘리를 완벽히 깨우친 자만이 펼칠 수 있는 검이라 둔검을 쓰는 자는 강호에서 만나보기 힘들었다.

‘성준이는 분명 권각술의 달인이라고 했는데…….’

각운은 상대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주지 못한 동생을 속으로 원망했다.

‘무슨 방법이 없을……. 헉!’

그때 제자리에서 공격을 쳐내기만 하던 백서휘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각운은 그가 가까이 오는 걸 막기 위해 미친 듯이 권기를 쏘아 보냈다.

카캉카캉!

백서휘가 한 발자국을 내디딜 때마다 수십 개의 권기가 쏟아졌다.

그는 무심한 얼굴로 그 권기들을 일일이 다 쳐냈다.

날아가는 권기의 양이 늘어난 탓에 나한들의 부담도 커져만 갔다.

“마, 막아라! 막아!”

“대웅보전을 보호해야 돼!”

“각진!”

각진이라 불린 나한이 대웅보전에 있는 삼세불상을 보호하기 위해 몸을 날렸다.

“아, 안 된다! 안 돼!”

삼세불상이 귀하긴 하지만 사람 목숨보다 귀한 건 아니었다.

그런데 각진은 삼세불상을 보호하기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버렸다.

“크아아악!”

각진의 몸에 커다란 구멍이 나며 대웅보전 앞에 쓰러졌다.

다른 나한들이 그를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려갔다.

자신들을 보호하던 나한이 죽자 향화객들이 공황 상태에 빠졌다.

“도망쳐!”

“사, 산을 내려가야 돼!”

각운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렸다.

‘어쩔 수 없다. 붙어서 싸워야 돼.’

평생을 수련해오고 지금까지 싸워왔던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방식으로 백서휘와 맞붙어야 했다.

‘처음부터 그랬어야 했는데…….’

각운은 멍청한 짓을 한 자기를 원망했다.

견제를 멈춘 탓에 백서휘와의 거리가 훨씬 가까워졌다.

‘초근접전으로 들어가기 전에 육체의 능력을 상승시켜야 한다.’

각운은 보법을 전력으로 밟아서는 도망치듯 거리를 벌렸다.

그다음 역근경에 있는 수법을 응용해 근육과 힘줄을 강화했다.

우락부락했던 각운의 전신 근육이 부풀어 올랐다가 압축되었다.

백서휘는 무심한 얼굴로 그의 변화를 지켜봤다.

‘조금 신기하긴 하지만 잡기일 뿐이야.’

암중단체를 상대하며 더한 것도 봤었기에 심드렁했다.

육체가 강화된 각운이 백서휘와 거리를 좁혔다.

초근접전에 들어갈 만큼 서로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흐아앗!”

각운이 반룡이 거칠게 발톱을 내밀 듯 주먹을 내뻗었다.

그의 주먹에는 금빛 권기(拳氣)가 일렁거렸다.

백서휘는 각운의 주먹이 날아오는 경로에 검을 가져다 댔다.

각운의 공격은 중간에 차단되어 충분한 힘을 모으지 못했다.

그래서 검을 때렸음에도 가벼운 소리가 냈다.

캉!

각운은 굴하지 않고 금빛의 아지랑이가 일렁이는 다리를 채찍처럼 휘둘렀다.

백서휘는 다리를 검면으로 막아낸 후 왼손으로 난화만천수를 펼쳤다.

각운이 급하게 숨을 들이켜며 유룡퇴보(遊龍退步)의 수법으로 뒤로 물러났다.

백서휘의 손은 끈기 있는 사냥꾼처럼 그를 계속해서 쫓아갔다.

‘팔괘사형(八卦蛇形)!’

각운은 팔괘의 방위를 따라 뱀처럼 몸을 움직여 난화만천수를 피했다.

‘이제 반격에 나서면 된다.’

각운은 소림오권 중에서 가장 자신 있는 호권(虎拳)을 펼쳤다.

“백호추산(白虎推山)!”

“백호가 산을 밀어낸다? 좋은 초식이야. 하지만…….”

백서휘는 똑같이 초식으로 대응하기 위해 오랜만에 천강무극겁법의 초식 중 경천신뢰(驚天迅雷)를 펼쳤다.

“번개 앞에서는 호랑이도 무력할 뿐이지.”

검사가 감긴 검을 번개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이제껏 본 적 없는 ‘극쾌’의 초식이 날아들자 각운이 당황했다.

스각!

결국 백서휘의 검에 각운의 내뻗은 양쪽 손목이 잘렸다.

“크아아아악!”

“대형을 도와라!”

나한들이 백서휘를 치기 위해 무기를 들고 달려왔다.

‘저놈들을 죽여? 말아?’

백서휘는 개인 대 개인으로 끝낼 생각을 하고 왔다.

그런데 지금 단체로 그를 공격하려 하고 있었다.

‘사형이 다쳤다는 사실에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것이니, 제압하는 선에서 끝낸다.’

백서휘는 검이 아닌 ‘검집’으로 광풍번천(狂風飜天)의 초식을 펼쳐 달려드는 나한들을 단숨에 제압했다.

각운은 넋을 놓은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평생을 수련해온 무공이 한순간에 무너졌다는 사실을 그는 견딜 수가 없었다.

“하하하.”

“뭐가 그렇게 우습지?”

“모든 것이 우습습니다.”

“마지막으로 할 말 있나?”

“나와 동생의 잘못으로 끝내고 소림에겐 죄를 묻지 말아 주십시오.”

“그들이 더 이상 덤비지 않는다면 그렇게 하겠다.”

“고맙소.”

백서휘가 검을 휘둘러 각운의 목을 베어냈다.

그때 혜공과 다른 무승들, 당주들, 전주들이 소란을 듣고 뒤늦게 나타났다.

“이, 이게 어떻게…….”

“저자가 범인 같습니다.”

무승 하나가 피 묻은 검을 들고 있는 백서휘를 가리켰다.

다른 중들의 시선이 그가 있는 쪽으로 옮겨갔다.

“시주가 이 소란을 만든 범인이오?”

“그렇다면?”

“왜 그런 건지 말할 수 있소?”

“각운은 날 노렸기에 죽였고, 다른 나한들은 이성을 잃고 나한테 덤벼들어서 제압했을 뿐이다.”

혜공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백서휘를 바라보았다.

‘저자의 무력이 얼마나 강한지 짐작도 할 수 없다…….’

화경의 벽에 거의 다다른 혜공 조차 짐작할 수 없다는 건 백서휘의 경지가 훨씬 높다는 뜻이었다.

“뭐, 원하면 똑같이 만들어줄 수는 있긴 해.”

“이놈! 감히 소림사 경내에서 이런 짓을 벌이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계율원주가 백서휘에게 덤벼들려고 했다.

혜공이 재빨리 그의 가슴 쪽으로 손을 뻗으며 제지했다.

“멈춰라.”

“방장 사형! 어찌…….”

“뒤로 물러나.”

“제가 왜 뒤로…….”

“어서 물러나라니까!”

혜공의 호통에 계율원주가 뒤로 물러났다.

“이쯤에서 마무리 하시는 것이 어떻겠소.”

소림은 암중단체를 막을 때 힘이 될 존재인 만큼 너무 궁지로 몰아서 좋을 게 없었다.

“좋아, 이쯤에서 끝내도록 하지.”

“고맙소.”

백서휘는 여유로운 걸음으로 소림사를 떠났다.

“방장 사형, 도대체 왜 말리신 겁니까. 그자는 혼자였습니다. 우리가 힘을 합했다면…….”

“이쯤에서 끝낸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 한다. 만약, 그자가 살심(殺心)을 가졌다면 우리는 모두 죽었다.”

혜공이 허튼 말을 하지 않는다는 걸 아는 다른 자들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저, 정말입니까?”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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