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49화
수업이 끝난 자하무관은 모두가 집으로 돌아간 탓에 조용했다.
백서휘는 실내 수련장의 중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 점검했다.
‘십팔반무예와 기마술을 가르칠 사람은 하오문을 통해 구하는 거로 하자. 이제 문제는 만년한철인데…….’
만년한철은 대장장이가 평생 쇠를 만져도 못 볼 수 있을 정도로 희귀한 재료였다.
제대로 다룰 수 있는 대장장이도 몇 없을뿐더러, 만년한철이 가진 힘을 극대화한 물건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다행히도 백서휘는 그 한 명이 누군지를 알고 있었다.
‘우 노괴…….’
우염상은 강호 십이 명검 중 두 자루를 만들어낸 불세출의 명장으로 다른 이들에겐 화령철장(火靈鐵匠)으로 불렸다.
‘문제는 우 노괴가 너무 도전 욕구가 넘친다는 거지.’
우염상은 팔순이 막 지난 나이에 더 큰물에서 놀겠다며 색목인들이 사는 곳으로 간다고 말했었다.
다시 중원으로 돌아왔는지 아니면 서역 너머에서 잘살고 있는지 모르지만, 찾으려면 고생을 좀 해야 할 것 같았다.
‘이것도 하오문의 힘을 빌려야겠다.’
백서휘는 무관을 나와 도화루로 향했다.
여느 때처럼 점소이를 찾아 밀실로 들어가니 화란 대신 유소화가 그를 맞았다.
“화란이랑 서열 정리는 다 끝났나?”
“네, 끝났어요.”
“그럼 의뢰 두 개만 맡기자.”
“어떤 의뢰인데요.”
“하나는 십팔반무예와 기마술을 가르칠 사범을 구하는 건데, 관직에서 물러난 자인 동시에 현직에 있는 자들에게 강력히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자를 구해줬으면 좋겠어.”
“다른 의뢰는요?”
“다른 하나는 사람을 찾는 의뢰야. 이름은 우염상이고, 별호는 화령철장, 마지막으로 본 시기와 장소는 3년 전 신강이야.”
“화령철장이라면 북경에 있을 거예요.”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항주에 있기 전에 북경에 있었으니까 알죠.”
“나한테 말하기로는 큰물에서 논다고 서역 너머로 간다고 그랬는데…….”
“서역 너머로 갈 준비를 하다가 신강에서 잡혀 왔어요.”
“잡혀 왔다고? 누구한테?”
“금의위한테요.”
금의위는 시위(侍衛), 집포(緝捕), 형옥(刑獄)의 일을 관장하는 조직으로 황제 직속의 친위대였다.
그런 금의위한테 잡혔다는 건 셋 중 하나였다.
황제가 우염상을 잡아야 한다는 신화들의 청을 윤허했거나, 황제가 직접 명령을 내렸거나, 북진무사가 황제 몰래 딴짓을 벌이려고 하거나.
‘가장 좋은 경우가 진무사 중 하나의 월권이고, 가장 안 좋은 경우가 황제가 직접 명령을 내렸을 경우인가. 제기랄! 뭐 하나 만만한 게 없네.’
스승은 자신을 가르치면서 지켜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여러 번 말했었다.
그 여러 번 했던 말 중엔 ‘황실과 엮이면 피곤해지는 일이 생기게 되니 되도록 피하라’는 말이 있었다.
처음에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천지회’를 처리하면서 알게 됐다.
‘천지회만큼이나 미친놈들 천지였지.’
크기만 다를 뿐이지 황제를 비롯한 문무백관 모두가 광기를 가지고 있었다.
“유 노괴 살아 있긴 한 거지?”
“몰라요.”
“고관대작들이 별말 안 해?”
“저희가 심어놓은 끈으로는 금의위가 하는 일에 대해서 알 수 없어요.”
“죽었을 수도 있다는 거네?”
“아마도요.”
백서휘는 눈을 감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유 노괴의 생사를 알아보고 살아 있다면 만년한철을 맡겨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좋아, 북경으로 간다.’
백서휘는 한 식구가 된 이들에게 양해를 구한 후 북경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만년한철은 가져가는 게 좋을 것 같고, 자소단도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챙기는 게 낫겠다.’
챙겨야 할 것들을 다 챙겼으니 이제 출발해야만 했다.
백서휘는 북경으로 방향을 잡고 발걸음을 옮겼다.
* * *
백서휘는 세 개의 성을 가로 질러 북경에 도달했다.
엄청난 거리를 두 다리만으로 이동했음에도 그는 지친 기색이 없었다.
최상의 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노력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천지회의 잔당이 남아 있을 수도 있으니 천환역형공을 펼쳐서 역용하고 들어가야겠다.’
얼굴을 변화시킨 백서휘는 조용히 북경 안으로 들어왔다.
‘객잔에서 쉬면서 일의 우선순위를 나누고 어떤 식으로 처리할지 고민을 좀 해봐야겠다.’
객잔들이 모여 있는 거리로 가니 호객꾼들이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늘어졌다.
‘만만하게 보이면 잡히는군.’
살기를 살짝 피워 올리자 접근하려던 호객꾼들이 물러났다.
백서휘는 그들을 지나쳐 손님이 아주 많지는 않은 객잔에 들어갔다.
점소이가 탁자를 닦다 말고 달려와 그를 접객했다.
“숙박이랑 식사 어느 걸 하시겠어요?”
“둘 다 하면 할인되나?”
“정말 죄송하게도 할인은 되지 않아요. 대신 식사를 하시면 제가 다른 분 모르게 만두 하나를 더 넣어드릴게요.”
“그러면 숙박하고 식사를 같이할게. 얼마를 주면 되지?”
“식사는 어떤 거로 하실 건데요?”
“만두랑 소면.”
“그러면 다 합해서 일곱 문 주시면 돼요.”
백서휘는 점소이에게 돈을 지불하고는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점소이는 주방에 주문을 넣고 다시 탁자를 열심히 닦았다.
‘열심이군.’
점소이의 열정에 감탄하며 객잔 안을 둘러봤다.
손님이 아주 많지 않아 들어왔는데 어느새 사람이 꽉꽉 들어찼다.
잘못된 선택을 했나 싶었을 때 소면과 만두가 나왔다.
‘진짜 만두를 줬나 볼까.’
보통 객잔에서 만두를 시키면 세 개쯤 넣어주는 게 전부였다.
그런데 나무 찜통 안에는 만두가 네 개가 들어 있었다.
‘진짜 줬네.’
공짜 만두를 받았단 사실에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요즘 북경은 분위기가 어떻지?’
만두를 입에 넣으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내력을 써 청각을 증폭시켰다.
“이번에 금와전장 주인이 칠순 잔치 여는 거 알고 있지?”
“지나가다 듣긴 했는데 그게 중요한 일인가?”
“우리 같이 가진 거 없는 사람들한테는 중요하지.”
“잔치 참석은 어차피 못할 거 아니야.”
“아니, 육갑 때는 잔치에 참석 안 해도 장원 앞까지만 가면 음식이랑 선물을 나눠줬다니까.”
“그러면 이번 칠순에도 그럴 수 있겠네?”
“그렇지.”
백서휘는 시선을 거두었다.
‘노인네가 칠순이라고?’
손가락으로 셈을 해보니, 올해가 금와전장의 주인인 황일승이 칠순이 되는 해가 맞았다.
‘저 사람들이 아니었으면 모르고 지나갈 뻔했네.’
일반적인 생일이라면야 서로 바쁘니 그냥 넘어갈 수 있지만, 칠순이나 팔순은 달랐다.
이번에 그냥 넘어가면 황일승이 지독하게 삐질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마음 안 상하게 하려면 참석은 해야 돼.’
문제가 하나 있었다.
황일승에게 줄 선물이 없었다.
‘장비는 계속 써야 하니까 안 되고 만년한철이랑 자소단 중에서 골라야 돼.’
황일승의 사회적 지위와 가진 부를 생각하면 둘 중 하나는 무조건 선물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노인네가 큰 거로 되돌려 줄 텐데…….’
조선이 조공을 바치면 명이 더 베푸는 것처럼, 자신이 선물을 바치면 황일승은 매번 그 값어치보다 더 베풀어줬다.
‘금와전장 호남성 지부장 말로는 노인네가 폐병을 앓고 있다고 했으니까 만년한철보다는 자소단을 주는 쪽이 낫겠다.’
생각지도 못한 일로 자소단을 선물하게 됐지만 이렇게 일이 풀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더 큰 걸 받을 수 있는 일이니 누나 배 속에 있는 조카도 이해해주리라 생각했다.
그때 객잔 안으로 검은색 무복을 입은 남자 둘이 들어왔다.
두 남자는 점소이에게 주문을 하고 자리를 잡고 앉았다.
“거사는 이틀 후인가?”
“그렇다.”
‘거사’란 말이 백서휘를 자극했다.
그는 티를 내지 않고 두 남자에게 집중했다.
“준비는?”
“완벽하다.”
“좋군.”
식사가 나오자 두 사람은 대화를 멈추었다.
‘뭐 하는 놈들이지?’
공교롭게도 이틀 후는 황일승이 칠순이 되는 날이었다.
그런 기쁜 날에 변고가 생기는 걸 백서휘는 원치 않았다.
‘잡아다가 고문이라도 해야 하나?’
고민하는 와중에 두 남자는 식사를 마치고 객실로 올라갔다.
‘연회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겠어.’
계속 경계하다가 무슨 일이 일어난다 싶으면 그때 처리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이틀 후.
백서휘는 운기조식을 하며 시간을 죽이고 있는데 옆방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나갈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두 남자보다 먼저 밖으로 나오는 편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어라?’
밖으로 나오니 화려하게 장식이 된 마차가 객잔 앞에 서 있었다.
아무리 봐도 이곳에 있을 만한 마차가 아니었다.
‘뭔가 이상해.’
사람들 틈에 숨어서 잠시 마차를 관찰했다.
어제 봤던 두 남자 중 하나가 화려한 옷차림을 하고 마차에 탑승했다.
다른 남자는 허름한 옷을 입고 마부석에 앉았다.
“으랴!”
마차가 떠난 방향은 황일승의 장원이 있는 곳이었다.
백서휘는 본능이 계속 경고했다.
‘혹시 모르니까 최대한 빨리 장원으로 간다.’
마차와 다른 방향으로 응룡비천신법을 펼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황일승의 장원에는 객잔에서 봤던 마차가 서 있었다.
“정지! 연회에 참석하고 싶으시면 배첩을 보여주십시오. 배첩이 없으면 들어가지 못합니다.”
마부가 품속에서 배첩을 꺼내 위사에게 건넸다.
“전가장 분이시군요. 마차는 여기 세워두시고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마차도 들어갈 수 있는 거로 압니다만.”
“이 배첩으로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도련님, 밖으로 나오십시오.”
화려한 차림을 한 남자가 마차에서 내렸다.
“안으로 들어가시면 하인들이 모여 있을 겁니다. 그들 중 하나에게 길을 안내해달라고 하십시오.”
장원의 문이 열리고 두 남자가 안으로 들어갔다.
백서휘는 위사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정지! 연회에 참석하고 싶으시면 배첩을 보여주십시오. 배첩이 없으면 들어가지 못합니다.”
“나도 배첩이 없으면 못 들어가나?”
백서휘가 삿갓을 검지로 밀어 올리며 잠깐 역용을 풀었다.
“어?!”
“배첩 없이는 그 누구도 들어갈 수 없…….”
“멍청아! 저분은 배첩이 없어도 되는 분이야.”
“예?”
“날 기억하는 모양이네.”
“기억을 못 할 리가 있겠습니까. 하하하.”
위사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들어가 봐도 되지?”
“네, 들어가십시오.”
백서휘가 다시 역용을 하고 장원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 경력이 짧은 위사가 고참 위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저분이 누구길래 배첩 없이도 들어가는 겁니까?”
“우리 순번이 끝나고 연회를 즐기러 가면 그때 얘기해줄게.”
“지금 얘기해주시면 안 됩니까?”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장주님의 또 다른 아들 같은 분이시다.”
장원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백서휘에게 중년의 하인이 붙었다.
“연회장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할아범부터 보면 안 될까?”
“할아범이라는 게 설마 장주님을 말하는 겁니까?”
하인이 크게 화를 내려 하자 백서휘는 역용을 푼 얼굴을 잠깐 보여주었다.
“어, 어? 서휘님? 어, 어떻게 얼굴을…….”
“이제 할아범한테 안내해줄 수 있지?”
“아,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빠른 걸음으로 가자.”
“네.”
백서휘는 두 남자를 지나치며 슬쩍 훑어봤다.
‘가까이서 봐도 뭐 하는 놈들인지 모르겠군. 일단은 거사란 걸 진행할 때까지 내버려 둬야겠어.’
하인은 백서휘를 황일승이 있는 곳까지 안내했다.
“주인님, 손님을 모셔 왔습니다.”
“나를 개인적으로 찾아오는 손님들은 누가 됐건 모두 연회장으로 안내하라고 말했을 텐데?”
“거기에 나도 포함이야?”
백서휘가 역용을 풀고 말하자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나면서 미닫이문이 열렸다.
안에서 나온 건 무인이라고 오해할법한 근육질의 노인이었다.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백서휘를 바라봤다.
“오랜만이야!”
“너……!”
“뭐야, 왜 말을 못 해. 폐병이 아니라 매병(呆病, 치매)에 걸린 거였어?”
“이놈아! 얼굴 잊어버릴 뻔했잖아! 콜록콜록!”
“그래서 안 잊어버리게 하려고 지금 왔잖아.”
“콜록! 한 마디를 안 지려고 하는 건 여전하구나.”
“그러는 할아범도 기침만 좀 안 하면 석준이 동생 만들어도 되겠는걸.”
“동생은 무슨……. 요즘은 숨 쉬는 것도 힘들어. 콜록!”
말과는 다르게 기분이 좋은지 황일승의 입꼬리는 씰룩거렸다.
“그나저나 오늘은 무슨 일로 콜록콜록! 온 거냐?”
백서휘는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었다.
‘다 알고 있으면서 괜히 묻는다는 건 생일 축하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다는 건데…….’
백서휘는 속에서 청개구리 심보가 올라오려는 걸 꾹 눌렀다.
황일승은 무공으로 노화를 늦추는 무림인이 아니었다.
일반 양민이 칠순에 이르렀으면 확실히 축하할 만했다.
“할아범 칠순이라고 여기저기 소문이 났더라고. 그래서 선물 주려고 이렇게 왔지.”
“선물? 무슨 선물? 설마, 이렇게 오랜만에 찾아왔다는 게 선물은 아니지? 콜록콜록! 뭐, 반갑지 않은 건 아니지만 선물이라기엔 너무 성의가 없지 않으냐.”
“내가 그 정도로 염치가 없지는 않아.”
“그럼 뭘 갖고 왔는데? 콜록! 뭐 보나 마나 쓸데없는 거겠지만.”
황일승의 어깨 너머로 슬쩍 들여다보이는 방 안에는 백서휘가 가져다준 물건이 꽤 있었다.
그 물건들은 어찌나 잘 관리했는지 선물해 줬을 때보다 더 상태가 좋았다.
“자소단이라고 들어는 봤나 몰라.”
“자소단? 그 화산파의 자소단?”
황일승이 깜짝 놀라 숨을 들이켰다.
갑자기 공기가 확 유입돼서 그런 건지 그는 더 심하게 기침을 했다.
백서휘가 안쓰럽게 쳐다보다가 자소단에 대해 설명했다.
“정식으로 만든 게 아니라 약식으로 만든 거지만 그 자소단 맞아.”
“그렇게 귀한 걸 네가 가져왔다고?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겠구나.”
“조카 주려다가 할아범 폐병 걸린 게 생각나서 가져왔어.”
“조카? 아!”
“역시, 호남성 지부에서 올린 보고를 받았구나.”
“가족들한테 돌아갔다는 얘기는 들었다. 무관을 키우려고 한다는 것도 들었고.”
“뭐, 다 아는 것 같으니 내 근황에 관해서는 말 안 해도 될 것 같네.”
“그래도 말로 직접 듣는 거랑 보고를 듣는 거랑은 다르지. 이리 안으로 들어와라.”
“연회는 어쩌고?”
“아, 연회가 있었지. 음……. 연회가 끝나고 꼭 장원에 남아 있거라.”
“그럴 거야.”
황일승은 그대로 밖으로 나와 백서휘와 함께 연회장을 향해 걸었다.
“석준이는 잘 지내?”
“그건 본인한테 물어봐라.”
연회장에 거의 다 왔을 무렵, 기감에 누군가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누군가 해서 보니 황석준이 바쁘게 걷고 있었다.
“어이!”
황석준이 고개를 이쪽으로 돌리더니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너……!”
부전자전이라더니 황일승과 황석준은 놀라서 외치는 말까지 똑같았다.
백서휘는 피식 웃으며 황석준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툭 하고 쳤다.
“오랜만이다.”
“이 자식아! 왔으면 친구인 나부터 봐야지. 왜 아버지부터 봐!”
“폐병 걸려서 아프다는데 어떻게 먼저 안 볼 수가 있어. 봐야지.”
“아, 그건 또 그렇네.”
스승에게 납치된 이후로 사귄 친구는 몇 없었다.
그 몇 안 되는 친구 중에 제일 꾸준히 만난 사람이 눈앞에 있는 황석준이었다.
그래서 그에게 들을 이야기도 많았고 해줄 이야기도 많았다.
“잘 지냈냐?”
“나야 잘 지냈지. 너는 어떤데?”
“나도 잘 지냈어. 보고를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착도 했고.”
“뭐? 정착을 했다고? 그건 또 무슨 이야기야.”
황석준은 말을 하고는 백서휘와 황일승을 번갈아 가며 봤다.
“뭐야, 나만 몰랐던 거야?”
“할아범한테만 보고가 갔나 보네.”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 보고는 나한테만 하게 했다.”
“아니, 아버지! 보고 받는 거랑 상관없이 개인적으로 따로 말을 해줬어도 되잖아요!”
“자꾸 까먹는 일이 많아지는 거 나도 알지 않느냐.”
“끄응.”
황일승의 몸 상태에 아는 황석준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그때 총관이 세 사람을 향해 후다닥 뛰어왔다.
“손님들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백서휘는 다시 역용을 하고 두 사람과 함께 연회장으로 걸어갔다.
“너, 자리 어떻게 할 거야? 같이 온 사람이 있거나 따로 자리가 있는 게 아니면 우리 쪽에 앉는 게 어때?”
금와전장의 주인이자 중원 십대 부자 중 하나인 황일승이 칠순을 맞이해서 열은 연회였다.
그런 자리에 가족도 아닌 자가 황 씨 부자와 같이 앉아 있으면 사람들이 조사를 안 할 리가 없었다.
귀찮은 일이 일어나는 걸 막으려면 거절해야만 했지만, 두 남자가 말한 ‘거사’가 계속 턱하고 마음에 걸렸다.
“그럴게.”
백서휘는 황일승과 황석준이 있는 곳 바로 지근거리에 자리를 잡았다.
“만나서 반갑소! 다들 알고 있겠지만 나는 금와전장의 주인인 황일승이라고 하오! 부족하고 보잘것없는 날 위해 이렇게 찾아와준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씀 전하고 싶소.”
황일승이 촉촉한 눈으로 군중들을 바라봤다.
그가 지금 한 말은 모두 진심이었다.
상계는 도산검림(刀山劍林)이라고 하는 강호만큼이나 험악한 곳이라, 지금 황일승처럼 명예롭게 칠순 잔치를 여는 자는 드물었다.
“그럼, 이제 연회를 시작하겠소! 모두 즐겁게 즐겨주시오! 음식과 술을 대령하고 풍악을 울려라!”
손님들 틈에 섞여 있던 화려한 차림의 남자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천지개벽(天地開闢)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