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29화
학무관을 짓기 위해 태극무관과 그 주변의 건물을 매입하는 와중에 문제가 발생했다.
본관이 들어설 곳에 집 한 채가 알을 아주 거하게 박은 것이다.
처음엔 시세만 맞춰주면 바로 집을 팔겠다고 해놓고 인제 와서는 억만금을 줘도 팔지 않겠다고 한다.
당하고도 너무 어이가 없어 집을 강환으로 날려 버릴까 고민하던 차에 금태풍이 호출하였다.
“무슨 일로 날 불렀지?”
“알려드릴 게 있어서 불렀습니다.”
“뭘 알려줄 건데?”
“본관 부지에 있는 집엔 배후가 있습니다.”
반쯤 감겨있던 백서휘의 두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
“어떤 놈이지?”
“금녹상단입니다.”
“그놈들이 날 노릴 이유가 있나? 사업 분야가 겹치는 것도 아니고 원한을 산 것도 아닌데?”
“……관주님에겐 원한이 없겠지만, 제겐 있습니다.”
“애먼 놈 옆에 있다가 날벼락 맞은 거라고 보면 되는 거지?”
“죄송합니다.”
“해결책이 있으니 불렀을 거야, 안 그래?”
“그쪽과 협상을 해볼 예정입니다.”
협상은 지고 들어갈 때나 하는 행위였다.
그런 패배주의적인 행동은 백서휘로서 절대 할 수 없었다.
“협상하지 마.”
“어쩌시려고 그러시는……. 설마, 금녹상단의 대방을 암살하시려는 겁니까?”
“왜? 안 되나?”
“금녹상단의 대방은 강서성 포정사의 사위입니다. 잘못하다가는 관군과 싸우게 될 겁니다.”
옛날이건 지금이건 상대의 신분을 보고 죽일지 말지를 결정하지는 않는다.
죽일 만한 놈은 누가 됐든 기를 쓰고 죽였고, 살릴 만한 놈은 어떻게든 살렸다.
‘어떡하지? 그냥 죽여?’
흔적이 남지 않게 죽일 수 있는 수십 가지의 방법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때 금태풍이 괜찮은 방법을 알려주었다.
“금녹상단에게 타격을 주고 싶다면 저는 다른 방법을 추천해드리고 싶습니다.”
“어떤 방법이 있지?”
“정기상행을 방해하는 방법과 창고에 불을 질러 미래를 대비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정기상행을 방해하는 건…….”
금태풍에게 각각의 방법에 관해 설명을 들으니 어떤 식으로 상단을 괴롭혀야 하는지 감이 왔다.
‘두 방법 모두 쓰는 게 좋을 것 같아.’
정기상행으로 옮기는 값어치 비싼 화물을 도적인 척학 계속 가로채면 자신의 재산은 늘어나는 반면, 금녹상단의 재산은 줄어든다.
거기다 상인의 힘이라고 할 수 있는 거래처의 신뢰를 저버리게 해 나중에 무너졌을 때 재기하기 힘들 게 만들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창고에 불까지 질러봐.’
금녹상단의 대방은 투자자들에게 살해당하거나 전 재산을 잃었다는 상실감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할 것이다.
‘좋았어.’
백서휘가 히죽 웃으며 물었다.
“정기상행으로 옮기는 것 중 가장 비싼 게 뭐지?”
“석 달에 한 번 항주로 옮기는 장신구와 귀금속일 겁니다.”
“기녀들이 쓰는 것들이겠군.”
“그렇습니다.”
“그놈들한테서 장신구와 귀금속을 빼앗아오면 현금화해줄 수 있나?”
“얼마든지 해드리겠습니다.”
호적수인 금녹상단에 타격을 줄 수 있다면 금태풍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었다.
그것이 설사 장물아비의 일일지라도.
“내가 알아야 할 정보가 더 있나?”
“화우검객(花雨劍客) 우근평을 주의하십시오. 가진 무공만큼이나 심계가 아주 깊은 인물입니다.”
백서휘는 금태풍에게 금녹상단과 우근평에 대한 정보를 더 듣고 상단을 나왔다.
‘이야기를 좀 해둬야겠군.’
빠른 걸음으로 무관으로 돌아오니, 식구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이야기 중에 미안한데 다들 모여봐.”
백은하와 정수련, 금태평, 방소유, 운학이 앉아서 백서휘를 뚫어지라 쳐다봤다.
“다들 알고 있겠지만, 내겐 진행 중인 사업이 있어. 그런데 지금 그 사업이 어떤 놈들의 수작질 때문에 강제로 멈춰버려서 그걸 해결하려면 자리를 좀 비워야 할 것 같아.”
다들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한 명, 한 명에게 부탁하는 말을 전하려고 하니까 집중해서 들어줘. 일단 태평이는 내가 가르쳐준 대로만 수련하고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을 때만 운학이에게 도움을 요청해. 소유 너는 백 사범한테 교육을 받아.”
“나는?”
“누나는 소유 가르칠 때 말로만 가르치고 몸 쓸 생각은 하지도 마. 그리고 운학아.”
“네.”
“나 없는 동안 무관을 부탁한다.”
“별일 없도록 만들겠습니다.”
“그래.”
“진랑한테는 아무 말도 안 남길 거야?”
“알 박은 놈들은 내가 알아서 해결할 거니까 건들지 말라고 해줘.”
“알았어.”
“자, 이제 해산.”
백서휘는 바쁘게 무관을 빠져나갔다.
* * *
응룡비천신법을 전력으로 펼친 덕에 계획보다 사흘 더 빠르게 남창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시간을 벌었으니 더 준비를 철저히 할 수 있겠어.’
주변 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객잔에 방을 잡고 짐을 풀었다.
창문을 활짝 열고 창틀에 앉아 금녹상단을 찾았다.
‘저기 있군.’
금녹상단이라고 수놓아진 깃발이 펄럭거리며 나부끼고 있었다.
백서휘는 안력을 증폭시켜 이제는 적이 되어버린 금녹상단의 동태를 살폈다.
주판을 들고 뛰어다니는 사환들과 짐을 옮기는 일꾼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에게서는 딱히 특이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백서휘는 무공을 익힌 자를 찾기 시작했다.
태양혈이 움푹 솟은 자들이 상단 곳곳에 있었다.
그러다 눈에 띄는 중년 남자를 발견했다.
정확히는 그가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이 백서휘의 시선을 끌었다.
‘홍매검?’
홍매검은 화산파 장문인이 그 기수에서 가장 뛰어난 속가제자에게만 주는 검이었다.
아주 귀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흔한 물건은 또 아니었다.
‘저놈이 화우검객인가 보군.’
금태풍이 직접 주의하라고 한 걸 보면 예사 인물은 아닐 것이다.
‘실제 경지가 달라.’
금태풍은 우근평의 경지를 절정 초입으로 알려주었다.
그런데 실제로 직접 보니 절정의 끄트머리에 서 있는 거로 추정되었다.
우근평은 장사로 돌아온 이래 백서휘가 본 사람 중 가장 고수였다.
‘실력을 숨겼군.’
도산검림의 강호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실력의 서 푼은 숨기라는 말이 있었다.
직접 보니 우근평은 서 푼 이상을 숨기고 있었다.
‘깨달음만 얻는다면 바로 벽을 뛰어넘어 초절정의 경지에 이를 놈이다.’
자신에게 위협이 되지는 않지만, 변수는 될 수 있었다.
‘원활하게 일을 진행하려면 작전에 돌입할 때 바로 저놈부터 죽이고 시작해야겠어.’
백서휘는 우근평의 얼굴을 잊을까 싶어 뚫어지라 바라봤다.
사흘이란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백서휘는 남창과 여강(余江) 사이의 관도를 나무로 막고 금녹상단 행렬을 기다렸다.
‘분명 여강을 지나쳐 간다고 했는데…….’
계속 기다려도 오지 않아 남창으로 다시 돌아갈까 고민하던 차에, 금녹상단의 깃발을 발견했다.
‘행렬의 책임자는……. 우근평이군.’
백서휘는 은형잠종술과 천환역형공을 쓴 채 풀숲 뒤에 숨어서 습격의 적기를 기다렸다.
우근평이 주먹을 쥔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행렬을 멈추라신다!”
“다들 멈춰!”
마부들이 마차의 움직임을 멈추었고, 짐꾼들은 마차에 실린 짐들을 챙겼다.
“너, 너 가서 나무를 살펴봐.”
우근평이 무인 중 검지로 둘 가리켰다.
“네!”
무인들이 조심스럽게 다가가 나무를 살폈다.
“밑이 매끈하게 잘려 있습니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길을…….”
갑자기 튀어나온 백서휘가 나무를 확인하던 둘의 목을 단칼에 잘랐다.
우근평은 당황하지 않고 같이 온 무인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원형진!”
무인들이 원 모양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들의 중심에는 싸움하고는 거리가 먼 인물들과 마차들이 있었다.
“마차를 이곳에 그대로 두고 가면 목숨은 살려주겠다.”
“미친놈이군.”
“다시 한번 말한다. 마차를 이곳에 그대로 두고 가라. 그러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흥!”
우근평이 코웃음치자 백서휘는 구천현현보를 차례대로 밟아나갔다.
‘염천! 균천! 현천!’
축지법을 쓰는 것처럼 백서휘와의 거리가 한순간에 확 가까워지자 무인들이 당황했다.
백서휘는 진기를 몸에 두른 채 달려오던 속도 그대로 몸을 날렸다.
콰아앙!
굉음과 함께 앞을 가로막고 있던 이들이 온몸이 걸레짝이 되어 날아갔다.
‘이, 이런! 고수다!’
우근평의 얼굴이 조금 전과 다르게 딱딱하게 굳었다.
백서휘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구천현현보를 밟았다.
달라진 게 있다면 땅을 디디고 떼는 속도를 조금 올렸다는 점이었다.
‘나를 노리는구나!’
우근평은 검을 더 강하게 움켜쥐며 백서휘를 노려봤다.
백서휘의 입가엔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날 상대로 저런 표정을 짓는다고?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화산파가 인정한 기재 중의 기재였고 금녹상단의 대방조차 함부로 하지 않는 존재.
그게 우근평이었다.
‘가만두지 않겠다!’
정면으로 상대할 마음을 먹은 우근평은 검기가 일렁이는 검으로 상단세를 취했다.
얼마든지 일도양단해낼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걸 본 백서휘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머리 위로 검을 들었다.
‘심계? 압도적인 힘과 속도 앞에선 무력할 뿐이야!’
백서휘는 모든 걸 베어버릴 생각으로 있는 힘껏 검을 휘둘렀다.
그의 검에 별 무리를 닮은 검강이 어렸다.
“자, 잠깐 이건 검ㄱ……?!”
스각!
깔끔한 절삭음이 들리며 우근평의 육체와 검을 한 번에 베어졌다.
백서휘는 검에 담긴 진기를 빠르게 회수해 검강을 없앴다.
직접 상대한 우근평 말고는 그의 검에 검강이 어렸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진기의 수발이 자유로운 데다 검을 휘두르는 속도가 이루 말할 수 없이 빠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대, 대장이 죽었다!”
“어, 어떻게 일 수에 대장을……!”
백서휘는 우근평을 뒤로 하고 다시 구천현현보를 밟았다.
‘염천! 호천! 유천!’
눈만 끔뻑거리던 놈들이 허둥지둥 방어하려 했지만, 이미 검기가 감도는 칼날이 심장에 들어갔다가 나온 후였다.
그들은 가슴을 부여잡으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짐꾼과 사환들이 사방팔방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여기서 기다릴 테니 다음에 올 때는 돈 되는 화물을 더 많이 가져와라!”
백서휘는 여력이 충분히 있음에도 그들을 뒤쫓지 않았다.
‘진짜로 더 가지고 왔으면 좋겠네.’
몇 번 더 털어먹은 이후에 창고에 불을 질러 심대한 타격을 입힐 계획이었다.
“죽어!”
“요괴 같은 놈!”
남은 무인들이 괴성을 지르며 백서휘를 향해 달려들었다.
백서휘는 작게 한숨을 쉬고는 검기가 일렁이는 검을 사방팔방으로 흩뿌렸다.
적들은 방어해내려고 갖은 애를 썼지만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푹푹푹!
백서휘의 검은 한 번의 실수도 없이 정확히 적들의 미간 사이를 꿰뚫었다.
뇌가 곤죽이 된 적들이 달려오던 그대로 앞으로 쓰러졌다.
‘이제 마차를 털어볼까.’
짐칸에 있는 짐이 뭐가 있는지 확인했다.
“이야!”
감탄이 나올 정도로 귀금속과 장신구들이 많았다.
거기다 하나같이 값이 만만치 않아 보였다.
“이거 다 팔면 꽤 큰돈을 벌겠어.”
백서휘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다른 것도 확인해볼까?”
맨 처음에 찾은 것 말고는 모두 쌀이 든 마차였다.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쌀 포대를 이리저리 뒤적거렸다.
그러다 꽃 모양이 새겨진 목갑을 발견했다.
“이건?”
조심스럽게 목갑을 열어보니 화려하게 생긴 비녀가 들어 있었다.
보자마자 조금 전에 본 귀금속들을 다 합해도 비녀의 값어치만 못할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이것만으로 전각 한 채가 그냥 나오겠는데?”
백서휘는 목갑을 품에 넣고 귀금속과 장신구가 실린 마차를 한쪽으로 빼놓았다.
그다음 나머지 쌀만 실린 마차에 불을 질렀다.
‘마차는 어디에다 숨기는 게 좋을까.’
꼭꼭 숨겨둬야 마음 편하게 싸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관도를 벗어나 한참을 찾은 끝에 꽤 깊은 동굴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백서휘는 말과 마차를 동굴에 숨기고는 무기한 야숙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