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28화
“과, 관주님, 저기 나오시는데요.”
금태평은 다리를 덜덜 떨고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백서휘는 그를 슬쩍 한번 봤다가 다시 전방으로 시선을 옮겼다.
“나도 알아.”
“그, 그러면 이제 마보를 그만해도 되지 않을까요?”
“저 두 사람이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 그때 마보 자세를 풀어.”
“네…….”
금태평은 장난치며 느릿느릿 오는 정하진과 정수련을 원망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그때 정수련이 백서휘를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외삼촌!”
백서휘는 미소 띤 얼굴로 손을 흔들어주었다.
정수련이 후다닥 달려와 그에게 안겼다.
“오늘 공부는 열심히 했어?”
“아니요.”
정수련은 공부 이야기가 나오자 급속도로 쪼그라들었다.
백서휘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오늘은 무슨 일로 왔는가.”
“애들이 있어서 여기서 말씀드리긴 그렇고 조금 이따 말씀드리겠습니다.”
“알았네.”
금태평을 돌려보내고 세 사람은 사합원으로 왔다.
백은하는 아직 무관에서 관원들을 교육하는지 보이질 않았다.
“이제 얘기를 할 때가 된 것 같네.”
“시작하겠습니다?”
정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가 진행하려는 사업을 끝까지 진행하려면 거액의 돈이 필요하다는 거 알고 계실 겁니다. 저는 그 돈을 다른 사람에게 투자를 받았으면 합니다.”
“그건 자네가 알아서 해도 되는 문제 아닌가.”
“앞으로 같이 갈 동반자인 만큼 서로 상의를 하면서 일을 진행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왔습니다.”
“음…… 그러면 나랑 상의하고자 하는 게 정확히 어떤 건가?”
정하진이 백서휘의 눈을 보며 물었다.
“투자를 받을 방법과 투자를 받았을 때 어디에 어떤 식으로 좋을지 등을 상의하고 싶습니다.”
“어디서 받을지는 결정했나?”
“만복상단의 대방에게 투자를 요청하려고 합니다.”
“만복상단의 대방이면 우리와 보는 시각이 다르니 확실히 투자 방법에 대한 상의가 필요하겠군.”
매일 돈을 만지는 상인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확실하게 금태풍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는 전략을 잘 세워야만 했다.
“만복상단의 대방을 설득하려면 우리가 지금 하려는 사업의 미래를 보여줘야 그나마 가능할 것 같네.”
“솔직히 말하면 어떤 식으로 그 가능성을 보여줘야 할지 감이 전혀 안 잡힙니다.”
“최대한 가망 있게 포장을 해야지. 아니, 그냥 이건 내가 준비하는 게 낫겠군. 처남은 내가 어떤 식으로 말해야 할지 써주면 그걸 외워서 말하기만 하면 될 거야.”
“알겠습니다. 그러도록 하죠.”
“투자받는 것에 관해서는 이쯤에서 넘어가고……. 이제 투자를 받게 되면 어떤 식으로 쓰는 게 좋을지 상의하는 게 어떻겠나?”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저는 일단 시설과 학생들을 가르칠 사람을 최고로 뽑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시설을 어떻게 짓고, 가르칠 사람을 누굴 뽑는 게 좋을지 생각은 해뒀나?”
“건물은 무너진 태극무관과 그 주변 대지를 사서 홍 씨 부자를 통해 지으면 될 것 같고, 가르칠 사람은……. 딱히 생각나는 사람이 없습니다. 추천해줄 만한 인물이 있으십니까?”
정하진이 팔짱을 끼고 수염을 매만지며 고심하기 시작했다.
미래가 걸린 일이라 그런 건지 그의 고민은 쉽사리 끝나지 않았다.
백서휘는 재촉하지 않고 그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미안하네. 너무 오래 생각을 했군.”
“아닙니다. 오래 생각할 만한 일이라 이미 말을 했을 때부터 각오는 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인데……. 어쨌든, 학생들을 가르칠 사람을 뽑자면 나는 글과 시에 한해서는 악양에 있는 ‘장우량’이라는 학사를 기용했으면 하네.”
“그 분의 어떤 점이 좋은 겁니까?”
“가진 실력이 뛰어난 데다 친화력이 좋고 아이들을 좋아하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설득의 난이도가 조금 쉽네.”
“혹시 아는 분입니까?”
백서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랑 같은 스승 밑에서 수학한 동기라네.”
대나무처럼 올곧은 정하진이 하는 추천이라면 믿을 수 있었다.
“그럼 그분만 뽑으면 되는 겁니까?”
“음악과 그림을 가르칠 사람도 뽑아야지.”
“음악과 그림이요?”
“아이들의 정서 발달과 공부에 대한 압박감을 완화하는데 그림과 음악만 한 게 없네.”
솔직한 심정으로 백서휘의 구미에 맞지는 않았다.
그때 정하진이 그를 자극시킬 만한 발언을 했다.
“그리고 우리가 만들어갈 교육기관이 ‘중원 최고의 교육기관’이 되려면 여러 가지 분야를 종합적으로 가르칠 필요가 있네.”
“음악과 그림은 너무 비활동적이지 않습니까. 글과 시까지 가르치는 걸 생각하면 무(武)보다는 문(文) 쪽에 너무 기우는 것 같아서 걱정이 됩니다.”
“무공이 아주 활동적인 것이니 괜찮을 걸세.”
백서휘는 입을 비죽거리며 잠시 고민했다.
“맘에 들지 않는 겐가?”
“균형을 맞출 만한 것이 뭐가 있는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럼 승마와 십팔반 무기 활용법을 가르치는 게 어떤가? 교육기관의 명성을 드높이려면 문과든, 무과든 합격해야 하는 사람이 많아야 하는데, 승마와 십팔반 무기 활용법을 가르치면 무과 급제에 도움이 될 것 아닌가?”
바로 괜찮은 발상을 해내는 걸 보면 역시 머리 좋은 사람은 달라도 뭐가 달랐다.
“아! 그거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음악과 그림, 승마와 십팔반 무기는 누구를 모셔와야 하는 겁니까?”
“음악과 그림을 동시에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을 뽑으려면 안휘성 합비에 사는 ‘남궁유운’이라는 자가 좋을 것 같네.”
‘남궁’이라는 성씨가 정하진의 입에서 나오자 백서휘의 눈이 화등잔 만해졌다.
“남궁유운이라면 남궁세가의 사람 아닙니까?”
“무공보다 그림과 음악을 잘하기로 유명한 사람이라네.”
“그리고 승마와 십팔반 무기 활용법은……. 나도 잘 모르겠네.”
“그러면 일단으로 우리가 모셔와야 할 사람이 장우량이라는 학사와 남궁유운이라는 자인 겁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될 걸세.”
“일단은 과목 선정은 이렇게 하고 사람들한테 의견을 받아서 추가하거나 빼면 될 것 같습니다.”
“이제 다 정해진 것 같으니 투자 요청을 하러 갈 날짜를 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매형이 생각할 때 언제 가는 게 가장 좋을 것 같습니까?”
“사업 가능성 제시를 위한 글을 쓰고 자네가 연습까지 하려면 못해도 사흘은 있어야 하네.”
“그럼 오늘은 이만 여기서 헤어지고 이틀 후에 만나서 연습하고 사흘 후에 만복상단을 찾아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도록 하지.”
백서휘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합원 밖으로 나왔다.
“어? 서휘야? 무슨 일이야?”
“매형이랑 이야기할 게 있어서.”
“무슨 이야기?”
“그냥 사는 이야기?”
백은하가 백서휘를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봤다.
“여기서 더 물어도 안 알려줄 거지?”
“나중에 얘기해줄게. 나중에.”
백서휘는 짧게 말하고는 바로 자리를 떴다.
* * *
온종일 연습한 끝에 준비를 완벽하게 끝낼 수 있었다.
이제 실전만 남은 상황.
백서휘와 정하진은 만복상단을 앞에 두고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들어가죠.”
“그러지.”
미리 금태평을 통해 시간 약속을 잡았기에 금태풍의 집무실로 직행하는 데 무리가 없었다.
“바빠서 오래는 대화할 수 없습니다. 양해 부탁드려요”
“우리도 오래 붙잡지는 않을 거야. 투자를 바라는 게 어떤 건지 설명만 하고 바로 갈 생각이었거든.”
“그 설명을 지금 바로 들어봤으면 하는데요.”
“그러지.”
백서휘가 커다란 두루마리 종이 앞에 서서 새로운 형태의 교육기관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학무관은 사람들의 사고를 변혁시킬 새로운 교육기관으로 단순히 학문과 무공을 같이 가르치는 게 아니라…….”
대박이라고 생각한 금태풍은 두 눈을 반짝이며 백서휘의 이야기를 집중해서 들었다.
“……호남성 최고 더 나아가, 중원 최고의 교육기관이 될 수 있을 거라 자신한다.”
“설명은 그걸로 끝입니까?”
백서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몇 가지 궁금한 게 있었는데 질문해도 됩니까?”
“얼마든지 하셔도 됩니다.”
문 앞에 서 있던 정하진이 나섰다.
금태풍은 단박에 그가 실무자란 걸 알아차렸다.
“학무관의 조감도 같은 걸 볼 수 있겠습니까.”
“아쉽게도 조감도는 없습니다. 투자받는 금액에 따라 어떻게 지을지를 달리할 생각이었거든요.”
“그러면 그쪽이 생각하는 투자금액의 최소한도를 넘었을 경우, 어디에 어떻게 지을지를 설명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기본적으로 학관만 있는 게 아니라 무관이 합쳐졌기 때문에 연무장이나 실내수련장의 비중이 있어 좁은 대지에 지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최소한도를 넘을 경우…….”
정하진은 백서휘와 미리 합의한 내용을 잘 풀어서 대답했다.
금태풍은 정하진의 대답을 들을수록 대박의 기운이 점점 진해지는 걸 느꼈다.
‘이 학무관이라는 걸 호남성만이 아니라 중원의 성마다 하나씩 깔아버리면……!’
백서휘는 먼 미래의 일까지 생각하는 금태풍의 속내를 몰랐다.
그러다 보니 금태풍의 질문이 많아질수록 걱정과 근심이 점점 늘어났다.
‘너무 많이 따지는데? 이러다 투자 못 받는 거 아니야?’
일을 진행할 수 있는 최소한도의 금액은 금원보로 50개.
솔직한 심정으로 금원보로 50개만 받아도 발상을 현실화하는 데 무리는 없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50개만 받아도…….’
그때 기다리고 기다리던 금태풍의 대답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투자하도록 하겠습니다.”
“얼마를?”
“일단은 금원보 65개를 투자하고 일의 진행 상황과 이쪽 분이 말씀하셨던 강사들의 섭외 상황을 보고 투자를 더 하든가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하진이 허리를 꾸벅 숙여 금태풍에게 인사했다.
“돈은 그럼 어디서 받아가면 되는 거지?”
“전장을 통해 입금해드리죠. 어느 전장을 통해 거래하십니까?”
“금와전장.”
“나가자마자 보이는 아무 직원한테 금와전장의 계좌를 말씀해놓으시면 제가 그쪽으로 금원보를 입금하도록 하죠.”
“그러지.”
“그럼 저는 이제 하던 일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금태풍은 축객령을 자연스럽게 내렸다.
백서휘와 정하진은 집무실 나와 바로 보이는 직원에게 개인적으로 쓰는 금와전장의 계좌를 알려주었다.
“자, 이제 축배를 들러 가볼까요?”
“헉헉! 마음이야 주루에 들어가 술을 마시고 싶지만 몸이…….”
정하진은 기진맥진한 모습을 보였다.
“업히시죠.”
백서휘는 정하진 쪽으로 등을 내밀었다.
정하진은 진심으로 힘든 건지 거절하지 않고 바로 업혔다.
“그럼 이제 주루로 가보겠습니다.”
“아, 아니…….”
“하하, 농담입니다.”
백서휘는 정하진을 업고 사합원으로 향했다.
어느 순간부터인지는 몰라도 정하진이 코를 드르렁드르렁 골았다.
백서휘는 그를 깨우지 않으려 노력했다.
“음?”
백은하가 집 밖에 나와 있는 게 멀리서부터 보였다.
‘매형을 깨워야 하나?’
정하진에게 말을 수차례 걸었지만 깊이 잠들었는지 대답하지 못했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백서휘는 그대로 백은하에게로 갔다.
“설마 저 업힌 게 진랑?!”
백은하가 후다닥 달려와 정하진을 받았다.
“어떻게 된 일이야? 설마 진랑이랑 술을 먹었어?”
“아니, 긴장이 풀려서 저런 거야.”
“긴장?”
백서휘는 백은하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자세하게 풀어서 이야기했다.
“그럼 저번에 말했던 그 학무관 사업이란 걸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진행한다는 거야?”
“응.”
백은하가 입술을 비죽거렸다.
“왜?”
“걱정이 돼서.”
“무슨 걱정? 잘못될 걱정이라면 안 해도 돼. 무려 만복상단의 대방이 직접 투자했으니까 실패할 일은 없을 거야.”
“그래도…….”
“날 믿고 매형을 믿어. 반드시 성공시킬 테니까.”
백서휘가 의지를 담아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