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20화
금강무관 소속의 사람들은 백서휘와 백은하, 금태평을 비웃었다.
“저것들 지금 뭐라고 그랬냐?”
“‘자하무관의 승리를 위하여’라고 소리치던데.”
“아주 꼴값들을 떠는구만.”
“그러게 말이야.”
열이 받은 금태평은 콧김을 씩씩거리며 몸을 풀기 시작했다.
옆에서 같이 몸을 푸는 백은하의 표정도 그리 좋지는 않았다.
백서휘가 둘을 보며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었다.
‘적당한 분노는 투쟁심을 일으키지.’
긴장하고 있던 두 사람의 몸이 부드러워진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지금 비무를 시작하면 이길 확률이 더 높아질 텐데 저쪽에서 응하질 않겠지. 몸도 덜 풀려고 아직 안 온 사람도 있으니…….’
어제 금강무관에 숨어들어 엿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저들은 지금 참관인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참관인은 이곳의 지현으로 공명정대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지현을 걸고넘어져서 일의 방향을 내가 유리한 쪽으로 유도해야겠다.’
이미 알고 있는 문제를 모른 척해서 금강무관의 관주가 약속을 이행할 수밖에 없도록 상황을 만들 생각이었다.
“비무는 언제 시작할 거지? 우리는 준비가 다 된 것 같은데…….”
백서휘가 금강무관의 관주를 보며 물었다.
“와야 할 사람이 도착하면 그때 비무를 시작하겠다.”
“와야 할 사람? 누굴 기다리고 있는 거지?”
백서휘는 ‘지현’이란 걸 빤히 알면서 뻔뻔하게 물어봤다.
“지현님을 기다리고 있다.”
“지현님을 왜 기다리는 거지?”
“참관인이 되어주시기로 하셨거든.”
“잠깐, 참관인을 왜 그쪽 멋대로 정한 거지.”
“승패를 확실히 하고 패자가 약속을 이행하게 만들려면 참관인이 필요했다. 그래서 급하게 지현님께 부탁한 거다.”
“그쪽이 준비한 인사를 어떻게 믿고 참관인을 맡겨. 그쪽에 유리한 판결을 내릴 수도 있잖아.”
“공명정대하신 분이라 절대 그런 일 없을 테니 조용히 지현님이나 기다려라.”
백서휘가 백은하 쪽을 쳐다봤다.
그녀는 금강무관의 관주가 하는 말이 맞다는 의미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좋아, 그쪽 제안에 응하는 대신 나는 조건을 추가하겠다.”
“조건?”
“이곳의 지현님이 그렇게 공명정대하다면 우리의 약속을 보증하게 했으면 한다.”
“어떤 식으로?”
“문서화.”
“저번에 약속했던 내가 지면 현판을 내리고 네놈이 지면 현판도 내리고, 은원보도 준다는 걸 문서로 남기자. 이 말인가?”
“그래.”
금강무관의 관주는 팔짱을 끼고 한참을 고민했다.
“좋다. 문서로 남기도록 하지.”
때마침 지현이 병사를 대동한 채 딸과 함께 공터에 도착했다.
딸은 금태평과 비슷한 또래로 보였다.
“늦어서 미안하네. 오는 길에 마차 바퀴에 이상이 생기는 바람에 그걸 교체하느라 늦고 말았네.”
“아이고! 괜찮습니다!”
조금 전까지 당당했던 금강무관의 관주가 허리를 굽실거렸다.
황궁에 잠입해서 황제의 얼굴까지 봐서 그런 걸까?
이상하게도 지현이 가진 권력이 백서휘의 피부에는 와닿지 않았다.
“이쪽이 자하무관의 관주인가?”
“그렇습니다.”
“만나서 반갑군. 나는 방효성이라고 하네.”
“백서휘입니다.”
꿇릴 게 없는 백서휘는 당당하게 포권을 했다.
“얼굴은 이쯤 익혔으면 된 것 같고 이제 비무를 시작했으면 하는데…….”
지현이 금강무관 쪽과 자하무관 쪽을 번갈아 가며 봤다.
“다들 준비는 끝났는가?”
“끝났습니다.”
“그럼 시작하지.”
“시작 전에 지현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백서휘가 어울리지 않게 공손한 어조로 말했다.
“부탁이라면…….”
“저희가 서로에게 했던 약속을 지현님께서 보증해주셨으면 합니다.”
“어떻게 하면 되겠나?”
“문서화 해서 수결을 하는 식으로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은원보가 탐났던 금강무관의 관주가 옆에서 거들었다.
“음…….”
지현이 팔짱을 끼고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내가 보증하지. 그러려면 지필묵이…….”
“제가 가져왔습니다.”
백서휘는 준비했던 문방사우를 건넸다.
“조건이 어떻게 되는가?”
“제가 지면 현판을 내리고, 이쪽이 지면 현판을 내리고 추가로 은원보 6개를 제게 줘야 합니다.”
지현은 세 장의 종이에 조건과 날짜, 수결할 곳을 일필휘지로 써냈다.
“자, 여기 수결하게나.”
백서휘, 금강무관의 관주, 지현 순으로 수결한 후 종이를 한 장씩 나눠 가졌다.
“시작하지.”
백서휘와 금강무관의 관주가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필승법을 알려줄 테니까 잘 들어.”
백서휘는 금태평의 어떤 식으로 싸워야 할지 조언해주었다.
“상대는 동체시력이 안 좋은 편이야. 네가 빠르게 움직여서 움직임을 쫓지 못하게 하면 쉽게 이길 수 있어.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
“네, 이해했어요.”
“그러면 나가 봐.”
금태평이 공터의 중앙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금강무관 쪽에서도 머리를 빡빡 밀고 봉을 어깨에 걸친 아이가 걸어 나왔다.
‘이름만 들어서 몰랐는데 태평이보다 키가 머리 하나는 더 크잖아?’
심지어 팔도 길어서 봉의 이점을 더 잘 살릴 것으로 보였다.
‘그래도 결국엔 이기겠지.’
수련할 때 긴 무기를 가진 자들과 어떤 식으로 싸워야 하는지 알려줬기에 크게 걱정되지는 않았다.
“서로 인사한 후 네 보 뒤로 물러나.”
금태평과 빡빡이가 서로를 향해 허리를 숙이고는 거리를 벌렸다.
“이 손수건이 땅에 완전히 떨어지면 비무를 시작하는 거다. 그전에는 절대 서로를 공격해서는 안 돼.”
“네.”
“그럼 관원전을 시작하겠다.”
지현은 하얀 손수건을 하늘 높이 던졌다.
바람에 이리저리 위태롭게 나부끼던 손수건이 땅에 떨어졌다.
그 순간, 공터 중앙에 있는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달려갔다.
“흐아앗!”
“히얏!”
빡빡이는 일직선으로 앞을 찌르는 찰창(扎槍)을 꽤 정확한 자세로 펼쳤다.
금태평은 내공을 돌려 몸을 가볍게 만들고 전력으로 칠성보를 밟았다.
휙!
금태평이 일순간 빡빡이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빡빡이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들어오는 공격을 거두어서 빗겨내는 동작인 란창(欗槍)을 펼쳤다.
금태평의 발등과 봉이 맞부딪히며 귀청을 울리는 소리를 냈다.
‘아깝다. 아까워. 더 빨랐으면 맞출 수 있었는데…….’
진기의 수발이 빠르고 부드러웠다면 단 한 수로 비무를 끝낼 수도 있었다.
‘몇 번이나 더 시도할 수 있을까.’
금태평은 빡빡이의 공격을 경계하며 단전을 관조했다.
딘전에 남은 진기의 양으로 보건대, 시도할 수 있는 횟수는 앞으로 두 번뿐이었다.
‘두 번 안에 비무를 끝내겠어.’
금태평이 공격 범위 밖에서 계속 빙글빙글 돌며 빈틈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한 번 깜짝 놀란 경험이 있는 빡빡이는 더욱 단단하게 방어했다.
근접해지면 란창을 써서 아예 접근하지 못하게 만들고, 들어가려고 시늉을 하면 위에서 아래로 내려치는 벽창(劈槍)을 섞어서 견제했다.
‘계속 이렇게 싸울 수는 없는데…….’
빡빡이가 빈틈을 보여주지 않으니 금태평으로서는 미칠 노릇이었다.
“하앗!”
일직선으로 바람을 가르며 날아온 봉을 피했다.
금태평은 다시 한번 전력으로 칠성보를 밟았다.
이러한 상황이 여러 번 있으니 내공이 거의 다 소모되었다.
이제 돌발 공격을 시도할 수 있는 횟수가 한 번밖에 남지 않았다.
‘마지막 기회를 노리는 수밖에 없잖아.’
그때 우연히 빡빡이의 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거 보게 됐다.
눈을 억지로 크게 뜨는 바람에 생긴 증상 같았다.
‘저렇게 눈을 크게 뜨면 어쩔 수 없이 빨리 감게 되어 있어. 그때를 노리자.’
금태평은 빡빡이의 얼굴을 유심히 관찰했다.
빡빡이의 눈꺼풀이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지금이다!’
금태평이 전력을 다해 달려갔다.
감기는 두 눈으로 공격하러 오는 게 보이자 빡빡이는 이전처럼 똑같이 란창을 펼쳤다.
‘언제까지 당할 거라 생각한 거야!’
금태평은 칠성보를 밟아 봉의 바깥쪽으로 피한 후 다시 빡빡이를 향해 달려갔다.
그의 다리에서 시작된 경이 어느새 등을 타고 올라가 주먹에까지 이르렀다.
‘금강추(金剛鎚)!’
금태평은 내공과 경이 뒤섞인 주먹으로 빡빡이를 때렸다.
그 모습이 꼭 금강역사가 무거운 추를 휘두르는 것 같았다.
당황한 빡빡이는 봉을 떨어뜨린 후 내공을 담은 양손을 교차시켜 방어했다.
팔뼈가 분쇄되는 소리가 공터에 울려 퍼졌다.
“으아아아악!”
빡빡이가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예전에 팔을 부러뜨렸을 때는 그래도 깨끗하게 골절시켜 상대가 불구가 될 확률이 낮았다.
그에 반해 이번 상대는 뼈가 열 조각 이상으로 분쇄됐다.
아이가 불구 될 확률이 말도 안 되게 높아졌다.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알아차린 부모가 울먹이는 얼굴로 빡빡이에게 달려갔다.
“이번 비무의 승자는 자하무관이네.”
지현이 빡빡이를 보지 못하도록 딸의 눈을 가렸다.
“그,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닌데…….”
이 정도로 위력이 강할 줄 몰랐던 금태평은 어쩔 줄 몰라 했다.
“금태평! 빨리 안 들어오고 뭐해!”
백서휘의 외침에 금태평이 자하무관의 진영 쪽으로 터덜터덜 걸어왔다.
“잘했다.”
“……정말 잘한 거 맞을까요?”
“상대 사정 봐가면서 싸우는 놈은 금방 저승으로 가. 그러니까 일단 싸우기로 했으면 마음 독하게 먹고 싸워. 알아들었어?”
금태평이 조금은 편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
“응?”
앞에서 금태평이 이겼기 때문일까?
백은하는 생각보다 담담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가 볼 때 저쪽에 있는 대머리를 누나의 상대로 내놓을 가능성이 커.”
“만약 아니면?”
“아니면 아닌 거지. 그땐 다시 전략을 짜면 돼.”
“음…….”
“저 대머리는 주먹을 주로 사용하는 권사에 가까운 무인이야. 그러니까 팔이 닿지 않는 범위 내에서 누나가 견제만 잘하면 싸우기 어렵지 않을 거야.”
“알았어.”
기다리고 있던 지현이 큰소리로 외쳤다.
“다음 비무 상대 나오게나.”
백은하가 공터 중앙을 향해 굳은 얼굴로 걸어 나갔다.
슬쩍 금강무관 쪽을 봤다.
대머리가 걸어 나오다 말고 백서휘와 같은 또래로 보이는 자와 대화를 나누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지?’
궁금했던 백서휘는 내공으로 청력을 증폭시켰다.
“사범전은 내가 나가겠다.”
“도련님이요?”
“내가 볼 때 네 실력이면 저 여자랑 백중세일 거야. 확실하게 이기려면 내가 나가야 돼.”
“그래도 될까요?”
“사범이면 누구든 되는 거 아니었나?”
“그렇긴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규칙을 어기지는 않았으니까.”
백은하와 비슷한 키의 남자가 저벅저벅 공터의 중심으로 걸어 나왔다.
백은하가 몸을 돌려 백서휘를 바라봤다.
『불리해지거나 위험하면 조언해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비무에 임해.』
『알았어.』
백은하가 다시 앞을 바라봤다.
“서로 인사하게나.”
“주철룡이라고 하오.”
“백은하라고 해요.”
“이제 다섯 보 뒤로.”
주철룡과 백은하가 거리를 벌렸다.
“조금 전에 들어서 알겠지만, 이 손수건이 땅에 완전히 떨어진 후에 비무를 시작해야 한다네. 그전에는 절대 서로를 공격해선 아니 된단 소리야. 잘 알아들었나?”
“네!”
두 사람이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사범전을 시작하겠네.”
지현이 이번엔 회색 손수건을 높이 던졌다.
회색 손수건이 빙그르르 회전하다 땅에 떨어졌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달려들지 않고 제 위치를 고수했다.
‘누나가 이기기 힘들겠는데…….’
백서휘가 심각한 얼굴로 두 사람의 비무를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