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5화.
“소희야! 공소희!”
백은하가 목이 터지라 소리쳤지만 집에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나쁜 계집애. 얼굴만이라도 보고 가지.”
인사도 없이 떠난 공소희에게 섭섭해 눈물이 차올랐다.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자하무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장을 지나치는데 백은하의 귀에 이상한 이야기가 들렸다.
“내 동생이 포쾌(捕快)인 건 알지?”
“그럼 알지.”
“그놈이 아까 그러더라. 흑사방에 혈사가 일어났는데, 염왕채 놓는 놈들이 그 혈사에 휘말려 다 죽었다고.”
“그럼 그놈들이 놓던 염왕채는 어떻게 되는 거야?”
“그야 붕 떠버리니 안 갚아도 되는 거지.”
“이럴 줄 알았으면 그놈들한테 크게 빌릴 걸 그랬네.”
“예끼 이 사람아!”
“농담일세. 농담.”
이미 세력들 간에 힘 싸움이 끝난 지 한참 지난 탓에 장사(長沙) 내에서는 다툼이 벌어질 일이 없었다.
혈사가 일어났다면 외부인의 소행일 가능성이 컸다.
‘누가 그런 걸까? 정의의 사자? 아니, 그런 게 있을 리 없지. 다른 문파겠…….’
그때 염왕채를 놓는 놈들에게 험한 꼴을 당하는 걸 백서휘가 목격했던 게 떠올랐다.
‘설마 서휘가?’
집으로 향하는 백은하의 발걸음이 조금씩 빨라졌다.
무관 안으로 들어가니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백서휘가 보였다.
“너지?”
백서휘가 반개하던 눈을 완전히 떠서 백은하를 바라봤다.
“뭐가?”
“그놈들 죽인 거 말이야. 그거 네가 한 거잖아.”
“내가 누굴 죽였다니 갑자기 그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염왕채 놓았던 놈들 네가 죽인 거 아니야?”
“아니야.”
백은하가 걱정할까 싶어 백서휘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단호하게 부정했다.
“진짜 아니야?”
“그렇다니까.”
여자의 직감이란 게 있는 걸까?
백은하는 미심쩍은 눈으로 백서휘를 계속 바라봤다.
“그놈들 죽은 거면 누나가 진 빚은 어떻게 되는 거야?”
“확실하지는 않은데 안 갚아도 될 것 같아.”
“그러면 그 돈 다른 곳에 써도 되는 거 아니야?”
“그래도 되지.”
“특별히 돈을 써야 할 곳이 있는 게 아니면 무관을 수리하는 게 어때?”
이러다 무너지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무관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무관을 수리하는 것도 좋지만 네가 입을 옷이나 필요한 물건을 사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아니, 무관을 수리해야지.”
“……관원 하나 없는 무관을?”
“그게 무슨 말이야? 관원이 하나도 없다니?”
“말 그대로야. 우리 무관엔 등록된 관원이 없어.”
“그럼 지금까지 돈은 어떻게 벌었던 건데?”
“진랑은 학당에서 애들을 가르쳐서 벌었고, 나는 호남성과 그 근방을 오가는 의뢰가 표국에 들어오면 그때만 한 번씩 객원표사로 일해서 돈을 벌었어.”
“화산파로 보내는 돈은 어떻게 했어? 자격을 유지하려면 꽤 큰돈을 보냈어야 했을 텐데?”
“조금 전에 말했잖아.”
“그, 그러면 번 돈을 최소한의 생계비만 남기고 모두 화산파에 보냈다는 거야?”
“응.”
백서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렇게까지 해서 무관을 유지하는 이유가 있어? 그냥 지금이라도 현판을 내리고 다른 일을 하는 게…….”
“그럴 순 없어.”
“왜?”
“무관은 아버지가 남긴 유일한 유산이니까.”
‘유일한 유산’이란 말이 비수처럼 날아와 백서휘의 가슴에 꽂혔다.
‘아…….’
많은 재산을 물려받은 데다 커다란 무관까지 운영한 덕에 집안에 돈이 모자랄 일이 없었다.
그런 집안이 다 낡아빠진 무관 하나밖에 남지 않은 건 자신 때문 아닌가.
‘가지고 있는 걸 모든 걸 팔아서 날 찾는 데 썼다고 그랬지…….’
해당 기수에서 가장 뛰어난 속가제자에게만 주는 홍매검(紅梅劍)마저 아버지가 팔았다는 내용의 정보를 하오문에서 읽은 기억이 있었다.
‘매일 아침 닦으시던 그 검까지 팔고 남은 게 이 무관이라면 의미가 없을 수가 없지.’
백서휘는 무관을 흥성하게 만들어 아버지가 팔았던 가산들을 반드시 찾아오리라고 다짐했다.
“아무리 아버지 유산이라도 지금처럼 아무런 소득 없이 무관에 계속 돈을 쏟아부을 수는 없어.”
“그건 나도 알고 있어. 하지만 이렇게 무관을 유지하고 있는 것밖에 방법이 없는걸.”
“관원을 모집하면 되잖아.”
“나도 모집해봤어. 그런데 안 오는 걸 어떡해.”
“왜 안 오는 건데?”
“내 경지가 다른 무관의 관주에 비해 낮아서 그런 거겠지…….”
백은하가 금방이라도 울 듯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그 외에 다른 이유는 없고?”
“경쟁 무관이 나보다 더 잘 가르쳐서 그런 것도 같아.”
“경쟁 무관이라면 어디를 말하는 거야?”
“금강무관이랑 태극무관.”
“그럼 지금 누나의 경지가 높아지고 경쟁 무관보다 잘 가르치게 되면 문제가 사라진다는 거네?”
“아마도…….”
백서휘가 까끌까끌한 턱수염을 만지작거렸다.
“좋아. 그 두 문제 내가 해결해줄게.”
“해결해주겠다고? 어떻게?”
“누나랑 관원 둘 다 내가 가르치면 돼.”
“무공을 가르친다고? 네가?”
백은하는 백서휘를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봤다.
‘여기서 신뢰를 얻으려면 내 본신 무력을 아주 조금이라도 보여주는 게 낫겠지.’
백서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검을 뽑아 들었다.
갑작스러운 발검에 백은하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잘 봐.”
백서휘가 히죽 웃더니 검에 진기를 조금 불어넣었다.
그러자 검명이 나직하게 울리며 검신 위로 푸르스름한 검기가 일었다.
“거, 검기?”
“이 정도면 누나든, 관원이든 가르칠 만하지?”
백은하가 두 눈을 크게 뜬 채로 고개를 연식 끄덕였다.
“좋아, 그럼 수련은 내일 아침부터 하는 거로 하자.”
“미안한데 그건 좀 힘들 것 같아.”
“왜?”
“너 오기 며칠 전에 객원표사 의뢰를 받아서 호북성에 있는 의창(宜昌)에 갔다 와야 돼.”
장사에서 의창까지 그냥 갔다 오는 데만 3주의 시간이 걸리는데 지금 백은하는 표사로서 가는 것이었다.
표물을 옮기면서 어쩔 수 없이 생기는 변수들을 생각하면 백은하는 한 달을 넘긴 후에야 돌아온다고 봐야 했다.
‘그냥 확 금와전장에 있는 돈을 써버릴까? 돈을 써서 누나가 무공과 무관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면 지금보다 상황이 더 나아질 것 같은데…….’
막상 돈을 찾아 쓰려고 하니 걸리는 점이 있었다.
금와전장에 있는 돈은 수호문의 선대 장문인들이 중원을 지킬 때 쓰라고 맡긴 돈이었다.
그런 돈을 사사로운 곳에 쓰려고 하니 양심이 좀 많이 켕겼다.
“끄응.”
“걱정하지 마. 이번엔 제갈세가의 무사들과 함께 가니까 별로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제갈세가면 가문에서 운영하는 표국이랑 다른 무사단이 있지 않아? 그런 사람들 놔두고 왜 생판 남한테 의뢰를 한대?”
“다들 다른 일로 바쁜가 봐. 그래서 그들이 일하는 동안 의창까지만 같이 가기로 했어.”
“의창에서 헤어진다고?”
“응, 의창에서 제갈세가가 운영하는 표국에 인계하기로 했어.”
“뭐가 위험해서 의뢰를 한 거래? 그건 모르지?”
“어,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가문의 무사대와 표국을 놔두고 다른 표국을 이용한다는 게 영 꺼림칙했다.
이러한 생각이 표정을 통해 드러났는지 백은하가 안심하라는 듯 손을 맞잡는다.
“음……. 좋아, 그건 그렇다 치자고. 누나가 가면 수련이는 어떡해?”
“수련이? 진랑이 알아서 잘 돌볼 거야. 걱정하지 않아도 돼.”
“잠깐만, 누나가 표행하러 떠나면 나랑 수련이랑 매형이랑만 무관에 있어야 하는 거잖아.”
백서휘가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왜? 무슨 문제 있어?”
“문제라면 문제고 아니라면 또 아닌 그런 건데…….”
백은하랑도 어색한 느낌이 없지 않아 있는데 그녀 없이 정하진과 있다면?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고 숨이 막혀 왔다.
“어색할까 봐 그래?”
“……어.”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진랑이 그렇게 재미없는 사람이 아니라 너랑 금방 친해질 거야.”
“그래, 좋아. 그건 한 달 동안 친해지면 해결되는 일이라고 치고. 식사는 어떻게 하면 돼? 내가 요리를 하면 되는 건가?”
“요리? 아! 내 정신 좀 봐! 먹을 반찬 해놓는다고 해놓고 지금까지 아무것도 안 했네. 무관에 대해서는 나중에 시간 내서 따로 얘기하자.”
백은하가 허겁지겁 무관 밖으로 나갔다.
‘시간 내서 따로 얘기하는 것보다는 그냥 내가 후딱 해치우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자신에겐 무관을 되살릴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좋아, 내가 한번 살려보자.’
백서휘는 홀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무관 운영과 홍보를 어떻게 할지 끊임없이 생각했다.
* * *
백은하는 제갈세가의 사람들과 함께 의창으로 떠나고, 정하진과 정수련은 학당에 갔다.
아무도 없는 무관에서 백서휘는 열과 성을 다해 자하무관을 홍보할 광고지를 만들었다.
‘이 정도만 만들어도 되겠지.’
광고지들을 챙겨 밖으로 나오니 거지가 무관 앞에서 구걸하고 있었다.
백서휘는 반사적으로 거지의 전신을 위아래로 살폈다.
‘개방도군.’
거지는 태양혈이 움푹 솟아 있었고, 눈빛이 형형했다.
거기다 결정적으로 허리에 매듭이 묶여 있었다.
‘일결개가 여긴 왜 온 거지? 흑사방을 멸문시킨 범인이 나란 걸 눈치챈 건가?’
추측이 맞다면 어떻게 알아차린 건지 궁금했다.
흑사방을 멸문시켰던 날에 있었던 일을 몇 번이나 떠올려봐도 그날 자신은 단서를 줄 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생존자를 남겨두지 않았고 목격자도 없었다.
거기다 무공이 흔적이 드러나지 않도록 검기도 그냥 쏘아 보내기만 했고, 죽일 때도 단순한 동작으로 깔끔하게 썰어버렸다.
‘혈사의 범인이 나란 걸 눈치챈 게 아니라면 왜 날 찾아온 거지? 외부에서 온 무인이라 확인차 온 건가?’
머리 굴리며 답을 찾는 것보단 직접 물어보는 게 더 빠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백서휘는 일결개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자신이 이렇게 나올 줄 몰랐는지 일결개가 아주 잠시지만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한 푼만 주시면 복 받으실 겁니다.”
“죽고 싶지 않으면 같잖은 연기는 그만하고 무관을 감시하는 목적을 말해.”
“감시라니요? 그게 무슨 소리인지 소인은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냥 여기서 구걸만 했을 뿐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거지인 척을 할 거였으면 허리에 있는 매듭을 풀고 왔어야지.”
“매, 매듭이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하하!”
매듭이 한 개밖에 없는 일결개라 경험이 적어 뻔뻔스럽게 나오지 못했다.
“내가 우스운가 보군.”
“그게 아니라…….”
백서휘는 기세를 뿜어내 일결개를 압박했다.
“무관을 감시하는 목적이 뭐지?”
“끄으으윽! 모, 목적은 저도 모릅니다. 끄으윽! 그, 그냥 저는 분타주님이 시킨 대로만……. 그르르륵!”
일결개가 게거품을 물려고 하자 백서휘는 바로 기세를 풀었다.
“분타주가 명령했다?”
“……네.”
“안내해.”
“예?”
“분타로 안내하라고.”
“그건 좀 힘들…….”
“그렇다면 할 수 없지.”
백서휘는 허리춤에 손을 가져가는 동작을 취했다.
칼 맞아 죽기 싫었던 일결개가 화들짝 놀라며 입을 열었다.
“아, 안내하겠습니다.”
일결개를 뒤따라 호남성 분타가 있는 취죽교(翠竹橋)로 향했다.
“이 다리 밑이 개방의 호남성 분타입니다. 그럼 저는 이만…….”
“분타주를 불러와라.”
“예?”
“자꾸 못 들은 척 할 건가?”
“그, 그게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진짜 못 들어서 그런 겁니다.”
“마지막으로 말하지. 이리로 분타주를 데려와.”
“분타주님이 못 오겠다고 하면…….”
“그때는 장사에 있는 모든 거지가 죽겠지.”
백서휘의 살기 섞인 말에 일결개가 기겁하며 다리 밑으로 내려가 분타주를 찾았다.
“분타주님! 분타주님!”
“왜?”
개방의 호남성 분타주 나겁개(懦怯丐)가 배를 긁으며 일결개를 반겼다.
“그놈이 분타주를 찾아요.”
“그놈이 누군데?”
“감시 대상자요.”
“뭐? 자하무관의 그놈?”
“네!”
“나, 나 없다고 해라.”
나겁개는 움막으로 들어가 짐을 챙겼다.
“분타주님 안 오면 장사에 있는 모든 거지를 죽이겠대요!”
“진짜?”
“네.”
나겁개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렸다.
그가 생각할 때 백서휘는 허튼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건 어제, 오늘 보고 들은 게 있어서였다.
그는 혈사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흑사방도들이 어떤 식으로 죽었는지 두 눈으로 확인했다.
그리고 하오문과의 정보 교환을 통해 백서휘가 흑사방 혈사의 범인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까지 들었다.
이렇다 보니 백서휘의 말이 나겁개에겐 마냥 협박처럼 들리지 않았다.
“가실 거죠?”
“가야지. 어쩌겠냐. 장사에 있는 모든 거지를 다 죽이겠다는데.”
“그럼 저는 그분의 말을 전했으니 이만 원래 제 구역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일결개가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다른 곳으로 떠나려 했다.
“아니, 넌 그리로 못 가.”
“예? 왜요?”
“3급 비상령 발동할 거니까.”
“3급이면 분타 내에 대기하는 모든 인원이 전투 준비를 해야 하는…….”
“그래.”
일결개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나겁개를 바라봤다.
“얼른 준비해.”
나겁개는 분타에 있는 모든 거지를 이끌고 다리 위로 올라갔다.
심상치 않다는 걸 느낀 다른 사람들은 황급히 다리에서 멀어졌다.
“날 찾은 이유가 뭐요?”
나겁개가 다리 끄트머리에서 개미 기어가는 것보다 작은 소리로 말했다.
‘뭐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분타주가 겁을 먹은 것 같은데…….’
겁많은 분타주와 무관이 감시당한 일이 머릿속에서 뒤섞이며 괜찮은 발상이 떠올랐다.
‘감시당한 걸 명분으로 삼은 후에 무력으로 찍어누르면 재밌는 그림이 그려지겠는걸.’
백서휘가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었다.
“나, 날 찾은 이유가 없다면 이만 물러나겠…….”
“무관을 감시한 이유를 들으려고 이곳에 왔다.”
“가, 감시라니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구려. 나는 이만 가보겠…….”
“무관을 감시하던 일결개와 삼자대면을 해야 인정할 생각인가?”
백서휘는 거지 무리 속에서 일결개를 찾았다.
자신과 눈이 마주친 일결개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
“개, 개방은 공명정대한 일을 하는 곳이오. 누군가를 감시하는 일 따윈 하지 않소이다.”
“감시도 안 했고 잘못도 없다?”
“그, 그렇소.”
“너의 그 대답이 이곳에 있는 거지들의 운명을 결정했다.”
백서휘가 소매를 걷어붙이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