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0화 (61/84)

제6장 불청객(不請客)

 청해성 파안객납산에서 발원하여 감숙성, 사천성, 산서성, 하남성을 지나

황토고원을 관통하여 산동성까지 장장 십오만 리 길을 횡단하는, 누런 유수

(流水)를 가진 황하(黃河). 고비사막의 바람에 의해 운반된 황토에다 황토

고원에서의 토사가 더해져 물 한 말에 진흙이 여섯 되라 할 정도로 황토가

많이 섞여 있다는, 그 황하강을 타고 백여 척의 배들이 달밤의 기러기처럼

줄을 잇고 있다. 흥얼거리는 노잡이들의 노랫가락 속에 아름다운 미인의 아

미처럼 잔뜩 구부러진 달님의 그림자를 안고 황하를 거스르는 배들에서, 조

용한 밤의 정경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긴장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찰마궁 궁주의 요청으로, 산서성을 완전하게 장악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

는 천마맹의 증원병력이었다. 천무맹을 거의 괴멸시켰다는 낭보를 접하고

산서성을 경유해 하남성으로 치고 들어가기 위해 혈마궁과 철마궁의 모든

정예가 새로이 출병하였다. 배편이 부족했기에 오백여 명의 인원은 수로를

타고 이동 중이고 나머지 병력은 육로를 통해서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달빛이 참으로 곱군요, 척 궁주!"

 "그러게 말입니다."

 육 척 장신의 귀궁 척단세와 그에 비해서 왜소해 보이지만 탄탄한 몸을 가

진 철권 고인엽이 선박의 갑판에 앉아 기울어가는 초승달을 쳐다보며 이야

기를 나누고 있었다. 섬서성을 장악하고 그곳에 대기하고 있던 두 사람이

이번에는 전 병력을 이끌고 산서성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전쟁은 너무 피해가 크오이다."

 귀궁 척단세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나찰마궁에서

온 소식이 대승을 거두었다는 낭보임에는 틀림없지만 부궁주인 환궁 무랍파

와 궁사대 오백여 명의 사망 소식은 그에게 있어서 커다란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천무맹 병력이었던 제막각과 산서분타원들은 용문산의 승천로

에서 대부분 목숨을 잃었다 했지만 그 승리가 부하들의 죽음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생각하니 썩 달가운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이었다.

 결국 자신의 기반을 승리와 바꾼 꼴이 되어버렸다는 생각이었다. 과연 전

쟁이 끝났을 때 부하들이 얼마나 남아 있을까 하는 것도 우려되는 일이 아

닐 수 없었다.

 "전쟁에는 어차피 피가 난무하게 마련이지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대가

라 생각하시는 게 편할 것입니다."

 철권(鐵拳) 고인엽(高寅葉).

 권에 있어서 일가를 이룬 자로 왜소한 체구에 독사 같은 심성을 지녔다고

한다. 또한 그의 독문무공인 전철권(戰鐵拳)은 잔인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

어 격중되는 상대는 제대로 된 시체를 보존하기 힘들다 한다. 이번에 종남

파를 공략할 때도 그 잔인성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주변사람들을 질리게 만

들었던 장본인이다. 종남파의 기둥뿌리 하나 남기지 않도록 전부 불을 질러

버린 것은 물론이고, 문주의 목을 잘라 종남산 입구에 걸어두었던 거였다.

그런 잔인한 심성 때문에 그가 궁주로 있는 철마궁에서조차 고인엽보다 묵

창 패웅이 더 존경을 받고 있는 실정이었다.

 "척 궁주, 달은 하나만 있어야 하오이다. 저 하늘에 두 개의 달이 있다고

생각해보시오. 그럼 소원을 비는 사람이 힘들어지는 것이외다. 어느 쪽에다

 빌어야 할지를 모르기 때문이지요. 그들을 편하게 해주어야지요. 힘을 내

시오, 부하들이야 또 양성하면 되는 겝니다."

 세상을 움켜지게 되면 사람은 저절로 따르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보다 더

유능하고 잘난 놈들이 써주기를 바라면서 줄을 서게 될 것이다. 그중에서

온 정성을 다하여 자신들을 떠받드는 자들만 골라도 철마궁이나 혈마궁은

차고 넘치게 될 것이다. 부하들의 죽음에 대해서 아무 걱정하지 말라는 뜻

이었다.

 "달빛도 좋은데 술이나 한잔합시다. 저 누런 황하가 붉은색으로 변하면 마

도천하가 이루어질 것이외다."

 그러나.

 술을 찾는 두 사람이 잊고 있는 사실, 황하를 붉게 물들일 피는 적과 부하

들의 피뿐만 아니라 자신의 피도 될 수 있다는 것을 묵과하고 있었다. 죽음

을 담보로 펼치는 전쟁에서는 누가 살고 누가 죽을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기

에.

*     *     *

 귀궁 척단세와 철권 고인엽이 승리를 장담하며 야망의 술잔을 기울이는 곳

이 황하라면, 그곳에서 멀리 떨어진 분하에서는 피 흘리는 강호를 쳐다보며

 애달파 하는 노기인의 한숨이 무심한 강물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천무맹의 무천각주인 제갈장령, 이미 황혼을 훌쩍 넘어버린 노구를 이끌고

 가문을 위해서 검을 뽑아들었지만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가슴앓이

를 하고 있다. 그의 앞에도 역시 술상이 놓여 있었다.

 손녀인 제갈수연의 말은 그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미 알고 있

었다지만 그 피해가 너무 컸다.

 제마각 전멸, 얼마나 살아남았는지 알 수 없지만 화인걸이 이끌던 제마각

이 대패했고 그 패잔병들이 퇴각하면서 용문산 근처에 있던 세 개의 마을을

 나찰마궁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초토화시켜버렸다고 하였다.

 결국 무인들의 세력싸움에 일반 양민들을 희생시키는 사건이 발생하고 말

았다. 민심(民心)을 잃어가고 있음이다. 이런 식으로 전쟁이 지속되면 어느

 쪽이 승자가 되더라도 강호인들의 신뢰를 얻지 못할 것임에 자명한 일이다

. 상처밖에 남지 않은 승리를 거머쥔다 한들 진정한 승리가 될 수 없지 않

겠는가. 그러나 그의 손녀딸은 그리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할아버님, 세상 사람들은 말입니다. 처음에는 나쁜 놈들이라고 욕을 하지

만 약간의 세월이 지나면 그냥 잊어버립니다. 거기다 조금 좋은 감정으로

대해주면 더 빨리 잊습니다. 어떤 방법으로 권력을 취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권력을 잡고 나서 어떻게 달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이곳으로 떠나기 전에 제갈수연이 했던 말이다. 어차피 민심이란 것은 승

자의 편에 서게 되어 있다는 말이었다. 우매한 자들은 누가 통치를 하는가

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고, 오직 먹고살기 편하게 해주는 통치자가 훌

륭한 자(者)이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란 것이다. 눈앞에 있는 몇 개의 달콤

한 음식 때문에 자신들의 등 뒤에서는 피가 새고 있음을 알지 못하는, 그런

 자들이 바로 민심을 가진 민초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손녀딸이 가지고 있는 그런 사상이 제갈장령을 한숨짓게 하고 있었다. 자

신은 이미 한 번 통치를 해본 경험이 있기에 그런 그녀의 사고가 얼마나 위

험한 것인 줄 알고 있다.

 손녀딸이 추구하는 것은 정(正)이 아니었다. 가문을 위해서라는 말로 자신

을 감추고 있지만 세상을 질타하고자 하는 욕망이었다. 자신의 욕망을 가문

의 부흥과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수천 년 중원의 역사 속에 수많은 왕조와 무림의 문파들이 명멸해갔지만,

패도(覇道)를 들고 나왔다가 그 끝이 좋았던 곳이 있었는지……. 전부 비참

한 종말을 맞이했다는 사실은 역사가 잘 증명해주고 있다. 말 없는 민심이,

 우매하다고 생각했던 민심이, 아랫것들이라 했던 민심이 그리한 것이었다.

 그러나 손녀딸은 모르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힘이 그 말 없

는 민심이라는 것을…….

 "용아! 어쩌면 좋으냐. 파국으로 달리고 있는 것 같은데도 막을 방법이 없

구나."

 잘못 가는 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막을 방법도, 힘도 없다. 자신은 가문

을 망친 죄인이고, 그 가문을 이 정도까지 일궈놓은 사람은 둘째 아들과 손

녀딸인 제갈수연이다. 그들이 일궈놓은 가문이고 앞으로도 그들이 꾸려나가

야 하기에 아무런 간섭도 할 수 없다. 부디 아무 일 없이 잘되기만을 바라

고 또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강호상에 우뚝 선 가문을 보고 싶기도 했다. 남궁

세가와 하북팽가를 극복하고 제갈세가만이 우뚝 서 있는 꿈, 자신의 이기심

이었다. 잘못 가는 길인지 알면서도 그 길의 끝에 있는 영광의 열매는 또

보고 싶은 것이다.

 황하에서는 세상을 지배하려는 야망자들이, 분하에서는 정도와 패도의 갈

림길에서 번민하는 노기인이, 타인의 영역을 빼앗기 위해 초리하를 향해 배

를 저어가는 그 순간, 백석산에서는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인물이 있었다.

*     *     *

 "헉헉헉!"

 백의에서 혈의로, 혈의에서 흑의로, 그 흑의가 다시 혈의가 되었다가 지금

은 자신의 땀으로 절어버린 의복을 걸친 인물. 천무맹에서 가장 깨끗한 인

물인 백의천룡 화인걸이 비지땀을 흘리며 정신없이 내달리고 있었다. 풀어

헤쳐진 머리는 사방으로 휘날리고 복부 근처에서는 끊임없이 피가 흘러내렸

다.

 얼추 오백에 달하던 제마각 인원들과 그를 보호하기 위해 다 잡아놓은 승

리까지 포기하던 냉무기는 어딜 가고, 그만 홀로 이 산중을 달리고 있는지.

 "빌어먹을, 흑기철기병……."

 화인걸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흘러나왔다. 적의 추격이 너무 빨랐다. 처음

 기습을 당했던 곳인 태변산을 지나고 두 번째 산인 삼교산의 초입에서였다

. 어떻게 따라왔는지 느닷없이 흑기철기병이 자신들을 덮쳐왔다. 제마각 무

사들이 속속들이 쓰러졌다.

 결코 흑기철기병이 강해서가 아니었다. 석산평에서는 제마각 무사 삼 인이

면 흑기철기병 한 명을 감당했었다. 더구나 남아 있는 무사들은 제마각 인

물 중에서 가장 강한 자들이다. 그럼에도 흑기철기병에 당했다 함은 그만큼

 약해졌다는 뜻인 게다.

 승천로에서 당했던 화약 공격에서부터 태변산에서의 늑대까지, 물을 제외

하고는 아무것도 먹지 못했기에 체력이 완전히 바닥나버렸다. 평소에 보이

던 실력을 절반도 발휘하지 못하고 흑기철기병의 장창에 꼬치 꿰듯 찔려죽

었다.

 결국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언제부터인지 자신의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삼교산을 지나고 세 개의 산 중에 마지막인 백석산으로 들어선 것 같았으나

 흩어진 제마각 인물들은 누구 하나 보이지 않았다.

 "화인걸아, 화인걸아. 어쩌다 네가 이렇게 되었냐."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뛰어난 능력은 타고나지 못했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살아온 인생이었다. 남들이야 아버지의 후광을 입어

 지금의 위치가 되었다 말하지만 자신도 모든 노력을 다했다. 다른 제자들

보다 자질이 부족한 것을 알았기에, 아버지의 이름에 먹칠하지 않기 위해서

 두 배 세 배 더 노력하며 살아온 인생이었다.

 아버지의 뜻을 좇아 최고가 되고 싶었다. 최고가 되기 위해서는 마음가짐

부터 그리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남보다 뛰어나다는 생각을 가지기 위해서

애썼고 그런 행동을 하면서 자신을 더욱 채찍질했었다. 그러나 인생은 원한

다고 다 되는 게 아니었다.

 복부에 입은 창상에서 계속 피가 흐르고 있는지 순간적으로 머리가 멍해졌

다.

 "그래도 움직여봐야지."

 지친 몸을 일으켜 움직이려던 화인걸의 몸이 흠칫 굳어졌다. 전면에서 인

기척이 느껴졌던 것이다.

 '이곳이 마지막인가…….'

 아마 흑기철기병일 것이다. 지독하게도 빨리 쫓아오는 놈들이다. 거의 길

도 없는 산길임에도 말을 타고 들어오는 그들의 모습은 역시 소문대로 지옥

의 사신이었다.

 "어이쿠, 나리. 여기 계셨군요."

 "아니, 너는 마달?"

 화인걸이 깜짝 놀란 얼굴로 막 나타난 인물을 쳐다보았다. 자신들의 안내

자였던 마달이었다. 승천로에서 사라졌던 자가 이곳 백석산에 제 발로 나타

난 것이다.

 "이런 죽일 놈, 이제 와서 나타난단 말이냐."

 화인걸의 몸에서 새파란 살기가 흘러나왔다. 이젠 살았다는 마음도 잠시,

격렬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이놈만 있었어도 제마각이 그리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놈이 길 안내만 해주었어도 흑기철기병의 기습

을 받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죄송합니다요, 나리. 그곳에 있는데 갑자기 동굴이 무너지는 바람에…….

"

 사색이 된 마달이 쩔쩔매면서 울먹였다. 지금껏 제마각 무사들을 찾고 다

녔다는 것이다. 결국 일단의 무리를 만났고 냉무기의 부탁으로 자신을 찾아

다녔다 한다.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예, 나리. 거의 산을 벗어났습니다. 백석산의 끝에 있습니다요."

 "그래, 잘됐구나. 어서 앞장서거라."

 "네! 나리."

 '개자식, 온 백석산을 헤매다 죽어봐라!'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몸을 돌린 마달의 눈에서도 화인걸이 뿜어내던 것과

 똑같은 살기가 흘러나왔다.

 '으응?'

 마달의 뒤를 따르던 화인걸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지금껏 보아왔던 마달

의 움직임이 달리 보였던 거였다.

 어정거리는 행동은 전과 변화된 게 없는데 걸어가는 보폭이 문제였다. 보

통 일반인의 걸음걸이는 걸을 때마다 매번 조금씩 달라지지만 무인은 그렇

지가 않다. 무공을 익힌 무인들의 보폭은 언제나 일정하다. 언제 어디서 적

이 기습해올지도 모르고, 급박한 순간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내기를 원활하

게 사용할 수 있는 상태를 만들어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몸의 중심도 염두에

 두어야 하기 때문에 언제나 그런 상태를 유지하게 해주는 것이 일정한 보

폭이다. 즉, 무공을 익힌 무인은 자신도 모르게 보폭이 일정하게 바뀌어버

리는 것이다.

 '저자가 무공을 익히고 있었단 말인가? 어떻게…….'

 분명 전에 보았을 때는 무공이 없었던 자였다. 그랬던 자가 다시 나타났을

 때 무공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처음부터 속이고 접근했다는 뜻이다.

 '설마…….'

 화인걸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하며 그 자리에서 비틀거렸다. 복부에서 계속

되는 출혈과 갑작스런 충격에 중심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괜찮습니까, 나리."

 앞서가던 마달이 재빨리 화인걸을 부축했다. 그런데 부축하는 자세가 기묘

했다. 화인걸의 오른팔을 자신의 어깨 위로 돌리면서 의식적인지 무의식적

인지는 몰라도 정확하게 맥문을 쥐고 있다. 그리고 화인걸을 빤히 쳐다보는

 눈, 분명 경멸의 눈빛이었다.

 "괜찮다, 이제 견딜 만하다."

 오른팔을 내리기 위해 애를 썼으나 빠지지가 않았다.

 "아닙니다요, 나리. 제가 부축하겠습니다."

 맥문을 세게 거머쥐며 오히려 더욱 힘 있게 화인걸을 부축했다.

 '우욱!'

 "고맙다."

 완전히 당해버리고 말았다. 이제는 흑기철기병이 제마각을 그리 빨리 발견

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로 이놈 때문이었다. 이놈이 중간에서

조작한 것이 분명했다. 이놈이 천마맹의 첩자였다. 놈을 첩자로 생각하니까

 모든 것이 확연해졌다. 승천로에서도 동굴을 가르쳐준 것도 위에 묻었던

화약을 숨기기 위해서 취했던 행동이었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부축한다면서 맥문을 움켜쥐고 있다. 그러면서도 나

리라 부르는 것을 잊지 않는다. 희롱하고 있음이다. 자신이 알아차린 것을

눈치 챘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앞으로 하루 정도는 더 가야 하는데 견딜 수 있겠습니까, 나-리!"

 "가야지, 제마각 무사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죽는 한이 있

더라도……."

 "아이고, 안 되겠군요. 이곳에서 잠시 쉬었다 갑죠. 제가 약초라도 좀 뜯

어와야 되겠습니다."

 개울을 발견한 마달이 화인걸을 내려놓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큭큭! 약초라……. 독초겠지, 그러나 호락호락하게 당하지 않는다.'

 혼미해지는 정신 속에 화인걸이 이를 악물었다. 지금 상태로는 놈의 일초

지적도 되지 않는다. 정상적인 상태에 있을 때도 놈의 무공을 알아보지 못

했다 함은 자신보다 우위에 있거나 적어도 동수 정도는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지금 자신은 채 삼 할의 공력도 발휘하지 못한다. 완전히 독 안에

든 쥐일 뿐이다.

 '기다린다, 완전한 순간을……. 같이 죽는 거다, 놈!'

 혼미한 와중에도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바로 옆에 물이 있는데도 그곳까

지 갈 힘이 없었다. 놈은 이것까지 계산하여 자신을 이곳에 두고 간 것이리

라. 지금도 저 나무 뒤에서 자신을 관찰하고 있는 놈의 기척이 느껴졌다.

 "어이쿠, 오래 기다리셨습니다요. 나리."

 마달이 무엇인가 으깬 것을 나뭇잎 위에 가득 얹어서 다가왔다.

 "이걸 바르면 피가 멎고 좀 나아질 것입니다요, 나리."

 붉은색이 감도는 그것을 화인걸의 상처 부위에 대고 그대로 눌렀다.

 "크윽!"

 복부에서 밀려오는 엄청난 고통에 화인걸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마달이 상처 부위를 누르면서 막아두었던 혈도도 같이 풀어버렸는지 갑작스

런 출혈과 함께 혈액이 무서운 속도로 돌기 시작했다.

 '제발 부탁이다, 제발…….'

 화인걸이 자신의 몸에다 대고 간절히 빌었다. 노리고 있는 마지막 기회를

잡기 위해서였다. 지금 마달의 행동은 이미 예측했다. 다만 그가 바른 독이

 좀 강한 것이어서 자신의 잠력을 끌어내주기를 바랐다. 그런데 하늘이 도

왔는지 급격히 빨라진 혈류량과 함께 단전을 향해 내공이 급류처럼 밀려들

었다.

 "한 가지 물어봐도 되겠느냐?"

 조금 더 많은 내공이 모이려면 시간을 끌어야 했다. 아직은 한 방에 놈을

보낼 정도가 되지 않았다. 적어도 절반 이상의 내공을 회복해야 놈을 죽일

수 있을 것이다.

 "혹시 제마각 무사들 중에 한 팔이 잘린 친구가 아직 살아 있나 해서 말이

다."

 "아, 예! 그 사람! 장창에 찔려서 죽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요, 나리."

 "호, 그래. 그런데 자네는 누구인가?"

 "헉! 크억! 어떻게……."

 마달이 경악스런 표정을 지으며 화인걸을 쳐다보았다. 지금 옆구리를 뚫고

 들어와 내장을 휘저어버린 화인걸의 손보다, 어떻게 무공이 회복되었는지

그게 더 궁금했다. 분명 그가 알기로는 이런 힘을 발휘할 내공이 없었다.

조금 전 맥문을 움켜쥐었을 때 그것까지 전부 확인했고 나무 뒤에 숨어서

화인걸의 상태를 살펴보기까지 했다.

 결국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다는 것을 확신했고 어떻게 놈을 괴롭힐까 하

는 생각을 하며 독버섯을 따러 갔었다. 그곳에서 양이를 만나 잠시 동안 이

야기까지 나누고 돌아왔기에 자신을 다시 보지도 못하고 죽어 있으면 어쩌

나 하고 걱정하며 왔었다.

 그런데.

 "나의 마지막 수야."

 오른손을 거칠게 뽑아내자 마달의 몸속에 고이 모셔져 있던 내용물들이 한

꺼번에 쏟아져나왔다.

 "너도 살지 못해."

 화인걸을 노려보던 마달의 몸이 서서히 기울어졌다. 너무 시간을 끌었던

게 화근이었고, 그를 너무 무시했다. 아무리 아버지의 후광이 컸다고는 하

지만 암투가 난무하는 곳에서 각주자리까지 올랐던 자가 화인걸이다. 다 배

우지는 못해도 보는 눈은 누구보다 높았던 것이다. 또한 암수를 사용하는

것도…….

 "죽기 전까지는 움직여야겠지?"

 독 기운이 퍼져나가는지 제대로 설 수가 없었다. 그러나 움직여야만 한다.

 살기 위한 몸부림이기보다는 자신의 무덤자리를 고르고 싶었다. 죽는 자리

만큼은 아버지가 아닌, 자신의 의사대로 하고 싶었다.

 죽을 자리를 찾기 위해서 화인걸이 길을 떠나던 그 시간, 그곳과 멀지 않

은 곳에서도 또 하나의 죽음이 있었다.

 "자네는 너무 어설펐어."

 철창을 상대의 가슴 깊숙이 찔러 넣고 있는 인물, 흑기철기병의 단주인 묵

창 패웅이었다. 그도 화인걸의 상태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살아남은 제마

각 무사들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다시 상처가 벌어졌으나, 적장인 화인걸을

잡겠다는 욕심에 무리하게 양이를 따라나섰다가 독버섯에 당한 것이었다.

 양이를 의심하고 있었지만 설마 독버섯을 사용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부상도 그리 심하지 않았고 양이의 내공이 전혀 감지되

지 않았기에 거의 무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봐라

 하는 자만심도 있었다. 독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어버렸다.

 양이의 가슴으로부터 거칠게 창을 뽑아낸 패웅이 몸을 돌렸다. 빠른 시간

에 부하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야 할 일이 생겨버렸다.

*     *     *

 "거기! 이사, 제대로 하지 못해?"

 새롭게 만들어진 대통진을 익히기 위한 광풍대원들의 노력은 밤이라 해서

멈추질 않았다. 모든 객잔을 환상미로진으로 가린 상태의 진 내부에서 대통

진의 연습을 하고 있었다.

 "서로의 기를 제대로 인식해야 할 것 아닌가, 언제나 같은 거리를 고수하

란 말이다."

 날이 선 듯한 백산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곳은 죽엽객잔의 지붕 위였다.

뭐가 불만인 듯 백산의 목소리가 잔뜩 흥분되어 있었다. 광풍대원들의 움직

임이 못마땅해서가 아니었다. 조금 전, 광풍대원들의 움직임을 관찰하기 위

해 지붕으로 올라온 백산의 눈에 황당한 사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진과 같은 높이에서는 전혀 감지되지 않던 광풍대원들이 지붕 위에서는 선

명하게 드러나 보인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드러난 약점이었다. 대통진이

완성되어서 이곳에서 하고자 하는 일이 훨씬 수월해질 것이라 생각했는데

허점이 너무 많았다. 십 장 정도가 떨어져 있어야 기척이 숨겨지고, 적에

대한 공격도 거의 불가능하다.

 단지 보이지 않게 이동하는 것밖에는 아무런 효과가 없는 것이질 않는가.

결국 대통진의 성패는 진을 풀고 적을 공격하고 난 후 얼마나 빠른 시간 안

에, 얼마나 정확하게 다시 구축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정말로 귀신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많이 좋아졌구나!"

 백산이 앉아 있는 지붕 위로 세 명의 신형이 솟아오르며 말을 건넸다.

 장한수와 강구두, 그리고 오구였다. 낮에 주변의 상황을 정탐하러 갔다가

이제야 돌아온 것이었다.

 "어느 정도 와 있습니까?"

 "아마 내일 정도면 도착할 게다."

 수양산에서부터 뒤따르던 자들이 위치를 확인하고 온 모양이었다. 그들도

이미 백산 일행이 이곳 초리하로 이동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기에 서둘

러서 환상미로진을 설치했다. 단순히 그들의 이목을 피하고자 하는 이유가

아니라 혼란스럽게 하여 약간의 시간을 벌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배로 오는 놈들은요?"

 "늦어도 삼 일 정도."

 "가능하리라 보느냐?"

 장한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백산을 쳐다보았다. 처음에는 은밀하게 빠져

나갈 것처럼 보이더니 이제는 양 맹과 한바탕 혈전을 치르려 하고 있다.

 "되도록 해야지요, 더 이상 쫓아오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백산의 몸에서 스산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지금 오고 있는 자들은 양 맹의

 최정예일 것이고 그들이 사라진다 함은 두 맹 전력 삼 할의 손실을 의미하

는 것이라 하였다.

남아 있는 전력으로는 자신들의 영역을 지키는 것도 버거울 것이라는 게 서

문천이 내린 결론이었다.

 이곳에서 양 맹을 잡아야만 더 이상 쫓기지 않을 것이다. 한 번만, 마지막

으로 한 번만 더 적을 처단해야 한다.

 "좀더 빨리!"

 백산이 진안으로 뛰어들면서 거칠게 소리를 내질렀다. 열네 명이 동시에

흩어졌다, 다시 모이는 동작을 반복해서 행하는 것이었다.

 "좋다!"

 백산과 광견조원들의 움직임을 쳐다보고 있던 장한수의 입에서 감탄사가

절로 흘렀다. 무서운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 광견조원들이 순식간에 사라졌

다 나타나는 모습은 경이로울 정도였다.

 물론 가운데서 지휘하는 백산의 역할이 가장 크다고 볼 수 있지만 서로 간

의 호흡이 흐트러지면 금방 드러나는 진식이 아니던가. 공격은 불가능하다

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절대의 진이 거의 완성되어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형님! 저게 뭐죠?"

 백산과 광견조를 쳐다보던 오구가 저 멀리 언뜻언뜻 보이는 검은 그림자를

 가리키며 강구두를 불렀다.

 "글쎄다, 사람 같은데……. 이 시간에 웬 사람들이지?"

 "산아, 저쪽에 사람들이 보이는 구나. 진을 유지한 채로 한 번 다녀와라."

 장한수가 백산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잠시 후 백산과 광견조원들이 데리고 온 사람들은 뜻밖의 인물들이었다.

백석산에서 마달과 양이의 독에 당했던 화인걸과 패웅 두 사람이었던 것이

다.

 "대단한 집념들이구나."

 두 사람의 상태를 진맥한 갈태독이 감탄의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둘 다 강

한 내공을 소유하고 있기는 했지만 거의 정신이 없는 상태이고 몸도 가누기

 힘들었을 터인데, 그 몸으로 이곳 초리하까지 왔다는 것은 삶에 대한 집착

이 그만큼 강하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저 아이보다 이 친구가 더 놀라워."

 갈태독을 더욱 놀라게 한 사람은 무공이 약한 화인걸보다 묵창 패웅이었다

. 화인걸은 몸속에 상당한 양의 영약기운이 잠재해 있었기에 그 기운으로

인하여 목숨이 부지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패웅은 아니었다.

오직 자신의 의지만으로 죽음을 뚫고 온 것이었다.

 "살우야, 약!"

 "무슨 소리요, 영감. 보약은 다 써버리지 않았소."

 느닷없는 갈태독의 말에 소살우가 펄쩍 뛰었다. 수양산에서 다 써버린 약

을 갈태독이 원하기에 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이놈들은 우리를 해치려 했던 놈들이라며?"

 있어도 못 주겠다는 것이었다. 살려줄 놈들이 따로 있지, 지금껏 자신들을

 괴롭혔고 지금도 쫓고 있는 자들이 그들인데 언감생심 말도 안 된다는 표

정이었다.

 "살우 말이 맞소, 영감! 그들을 살려서 뭘 어찌할 거요."

 처음에는 이들이 누구인지 몰랐다. 서문천 때문에 이들의 정체를 알게 되

었다. 두 놈이 다 자신들을 노리는 놈들이었다.

 그러나 갈태독의 생각은 달랐다.

 "이놈들아! 죽일 땐 죽이더라도 일단은 살려야 되는 게야, 그게 인간의 도

리고."

 의원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비록 광견조원들을 해치려 했던 자들과

같은 일당이지만 지금은 죽어가는 환자일 뿐이다. 죽음이 임박한 환자를 모

른 척한다는 것은 양심상 용납되지 않았던 것이다.

 "정 죽이고 싶으면 지금 죽여라, 아니면 다시 버리고 오든지."

 알아서 하라는 듯 광풍대원 일행을 쳐다보던 갈태독이 뒤로 물러났다. 그

러나 백산이나 소살우, 누구도 움직이지 못했다. 지금껏 수많은 살인을 저

질렀고 적을 유인하기 위해서 시체마저도 토막 내는 잔인한 짓도 서슴지 않

았던 그들이, 두 사람의 환자에 대해서는 아무 짓도 못했다.

 "살우야, 약 줘라!"

 결국 백산이 먼저 항복하고 말았다. 차마 못할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을 쳐다보던 갈태독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보통 이런 경우의 살

인은 자신만 힘들게 한다. 자신들이 생존의 위협에 처했을 경우 저지르는

살인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저항하지도 못하고 의식도 없는 사람을 죽

여서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불구대천의 원수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인 것

이다. 복수도 살아 있는 자에게 하는 것이지, 죽어 있는 자에게 하는 복수

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에이, 씨팔! 이거 하나 남은 건데 늙은 영감이 웬 귀는 그리 밝아 가지고

."

 소살우가 주섬주섬하더니 아랫도리 깊숙한 곳에서 종이 뭉치 하나를 꺼냈

다. 안휘성에서 받았던 이름이 써진 종이, 반으로 찢어졌지만 깨끗하게 접

어진 그 속에서 환약 하나를 꺼내는 것이었다.

 소환단이었다.

 수양산에서 다 써버린 줄 알았던 소환단이 그의 아랫도리 속에서 하나가

더 나왔다. 아마 팔이 잘린 상태에 있었기에 누구도 이야기를 하지 못했고,

 소살우 본인도 그럴 경황이 없었던 고로 그에게 있던 것만 남아 있는 모양

이었다.

 "이것 말고, 이놈아. 네놈의 피, 붉은 피가 필요하단 말이다. 한 대접만

뽑아라."

 소살우의 손에 있던 소환단을 낚아채가면서 갈태독이 소리를 질렀다. 그도

 소살우가 대환단을 복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아직 완전하

게 흡수하지 못했다는 것도. 더군다나 독령곡에서 먹었던 독물까지 합치면

지금 소살우의 피는 영약덩어리라 할 수 있었다.

 "이 영감이 미쳤나, 팔도 없는 병신더러 이제는 피를 뽑으란 말이요? 불쌍

한 놈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뭐! 피를 달라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하쇼."

 "이놈아! 대환단까지 처먹은 놈이 뭐가 불쌍해."

 갈태독이 소리를 버럭 지르는 순간, 주위가 조용해지면서 모든 대원들이

소살우를 주시했다. 이미 소림에서 있었던 백산의 기행을 들었기에 대환단

이 무엇인지를 모두 알고 있다. 그 엄청나다는 대환단을 소살우가 꿀꺽했다

는 말인 게다.

 "영감!"

 "이런, 썅!"

 급기야 갈태독의 입에서 욕설이 터져나오고 말았다. 이번에는 일휘까지 자

신에게 영감이라 부르고 있다. 사람이야 과거에 비해서 많이 진중해졌지만

말투는 영락없는 뇌룡현 시절의 일휘 그대로였다.

 "영감! 그놈이 그놈이요, 원래는 저놈이 제일 심했던 놈이니 오래 살고 싶

으면 신경 끄시오."

 인상을 쓰며 상소리를 뱉어내는 갈태독의 반응에 고소하다는 듯 쳐다보던

백산이 더욱더 약을 올려댄다.

 그러나 백산의 말이 결코 허언은 아니다. 과거 뇌룡현에 있을 때 철목승에

게도 개후레자식이라 했던 일휘였기에. 지금 영감이라 부르는 것은 백산이

부르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 보면 된다는 것이다. 그나마 인정해주는 사람들

에게만 부르는 호칭.

 "뭐 좀 물어보려는데 왜 흥분하고 그러쇼, 나이 생각도 좀 하시지."

 백산, 소살우, 그리고 일휘.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이다. 상대를 약 올리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은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갈태독이 무엇 때문에 인상을 쓰고 있는지 전혀 모르

겠다는 표정으로 꿋꿋하게 제 할 말을 다하고 있다.

 "물어봐라, 뭐든지……."

 결국 갈태독이 고개를 흔들며 포기하고 말았다.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들은

 보통 두 부류로 나뉜다. 말로 해서 알아듣는 인간이 그 한 부류이고, 말로

 해도 안 되는 인간들이 또 한 부류를 이룬다. 보통 후자 쪽을 우리는 말종

이란 말로 부르는데 그 말종들을 인간으로 개조하기 위해서는 몽둥이란 기

구를 사용한다. 그러나 나이 때문에 그리할 수도 없고 그나마 노망났다는

소리라도 안 듣기 위해서는 자신이 참는 수밖에 방법이 없는 것이다.

 "어느 정도 피를 뽑아내면 사람이 죽는 거요?"

 갈태독에게 묻고는 있으나 일휘의 눈은 소살우의 팔목을 향해 있었다. 더

군다나 무엇인가를 먹고 싶다는 간절한 열망을 나타내듯이 입맛마저 다시고

 있는 것이었다.

 '호! 이놈 봐라.'

 일휘가 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를 알아차린 듯 일순 감탄의 표정을 짓던 갈

태독이 곧바로 소살우를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냈다. 네놈도 한 번 당

해보라는 표정이었다.

 "오! 그래. 그것 참 좋은 질문이다. 사람이 안 죽을 정도로 피를 뽑기 위

해서는 말이다, 하루에……."

 "알았다고, 알았어. 지금 뽑으면 될 것 아뇨. 섯다! 뭐해, 새끼야! 대접

안 가져오고. 한 대접이오, 그 이상 뽑아내면 사생결단이오?"

 그래도 자신의 피가 아까운 듯 한 대접이란 말을 강조하며 섯다를 찾는다.

 "알았습니다, 형님."

 재빨리 주방으로 뛰어 들어간 섯다가 한참 동안 이리저리 뒤지는 것 같더

니 주저주저하며 갈태독의 곁으로 다가섰다.

 "어르신, 많이 받아주시오."

 "크! 하하하! 푸하하하!"

 순식간에 객잔 안이 웃음바다로 변했다. 주방에 다녀온 섯다가 갈태독에게

 내밀고 있는 대접이란 물건 때문이었다. 갈태독이 원했던 대접이 적어도

스무 개 정도는 들어갈 수 있을 법한 커다란 바가지를 들이밀었던 거였다.

 "형님, 이게 제일 작은 겁니다."

 소살우의 눈치를 흘끗흘끗 보고 있지만 그의 표정도 일휘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붉은 혀를 내밀어 입술을 축이면서 입맛을 다시는 것이었다.

 "이런 개자식!"

 "빨리 해, 이놈아! 시간 없어."

 섯다를 향해 뛰어가려는 소살우에게 소리를 팩 질러 그의 행동을 제지시킨

 갈태독의 얼굴에는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씨팔놈!"

 섯다를 죽일 듯이 노려보던 소살우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갈태

독에게 손을 내밀었다. 광견조원들의 탐욕스러운 눈길 속에 영약이 바가지

안으로 쏟아졌다.

 "형님, 그거 한 입만 하면 안 되겠소?"

 "나도! 나도!"

 피를 뽑아내기 위해 베었던 곳을 지혈하고 있는 소살우에게 섯다가 심지를

 건드리는 발언을 하고야 말았다.

 "썅!"

 마침내 눈동자가 돌아버린 소살우가 자신의 영약이 날리든지 말든지 광견

조원들을 정신없이 두드리기 시작했다.

 "외팔아, 피는 자꾸 만들어지는데 한 입씩 주지 그러냐?"

 바가지 속에 소환단을 던져 넣은 갈태독이 기회를 잡았다는 듯 계속해서

소살우의 염장을 질러대며 즐거워했고, 갈태독이 화를 돋울수록 소살우의

주먹은 섯다와 광견조를 향해 무차별하게 날아갔다. 그러나 한 번 발동한

광견조의 영약을 먹기 위한 노력은 얻어맞으면서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한쪽 구석에 처박혀 있던 광견조원들이 자기네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무엇

인가 의논을 하고 있었다. 두 번째 머리를 맞대는 것이다. 양자강에서 광천

뢰를 처음 받았을 때, 죽지 않기 위해서 머리를 모았던 때 이후 처음으로

다시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그래, 바로 그거다."

 소살우에게 몇 방 얻어맞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모사가 무릎을 탁 치

며 소리를 질렀다.

 "뭐냐, 모사. 좋은 생각이라도 떠올랐냐?"

 잔뜩 기대 어린 표정으로 일휘가 모사를 향해 다가왔다.

 "가까이, 가까이……. 살우 형님 들으면 안 되니까……."

 지금까지도 전음을 배우지 않았는지 소살우가 못 듣게 한다고 하는 짓이

귀엣말이다. 그런 광견조원을 노려보고 있는 소살우의 표정은 불안해질 수

밖에 없었다. 광견조원들이야 힘으로 눌러버리면 되는데, 문제는 형님인 일

휘였다. 대장이라는 인간이 애들보다 더 설치고 있으니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그의 귓가에 드디어 모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제의식 한 번 더 합시다."

 모사가 아예 죽으려고 작정을 했는지 서로 간에 피를 나누어 마시는 형제

의식을 한 번 더 치르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에라, 이 도둑놈 새끼야. 피를 훔쳐 마시는 게 형제냐? 이 새끼야!"

 적을 칠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소살우를 쳐다본 광견조원들이

순식간에 몸을 날려 자리를 피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 아니던가. 소살

우는 박투술의 최고수임을…….

 그러나 단 한 사람.

 "어어! 몸이, 몸이 안 움직여! 아이고, 형님!"

 같이 도망을 치려 했던 모사가 갑자기 몸이 움직이질 않자 사색이 된 얼굴

로 소살우를 불렀으나 이미 돌아버린 소살우에게 모사의 그런 모습이 보일

리가 없었다.

 퍼억! 퍽!

 "으악! 아이고, 모사! 아니, 전영이 죽네."

 소살우의 손과 발에 구타당해 온 바닥을 뒹굴고 있지만 누구 하나 나서서

말리는 사람이 없다. 오히려 소살우의 눈에 띌까봐 전부 한쪽 구석으로 숨

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사를 걸레로 만들어버린 소살우가 그 자리에 바로 주저앉으며 운공을 시

작했다. 피를 지키는 유일한 길이 하루 빨리 대환단의 약효를 자신의 것으

로 만드는 길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우욱! 이…휘… 저 나쁘… 시…끼."

 그때까지도 모사는 자리에서 일어서질 못하고 신음소리만 내지르고 있었다

. 그러나 그의 신음소리를 귀 기울여보면 누군가에게 원한 가득한 저주를

퍼붓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형님, 모사 저 새끼 너무 심하게 맞은 것 아뇨? 지금까지도 못 일어나고

있는데."

 걱정이 되는 듯 모사에게 다가서던 섯다가 물에 빠진 놈처럼 퉁퉁 불어가

는 모사의 얼굴을 살짝 튕기면서 일휘를 쳐다보았다.

 "아, 맞다. 아까 살우가 달려올 때 잘못해서 모사의 혈도를 짚어버렸나 보

다."

 "그래서 이 새끼가 못 일어나는 거요? 나는 또 어디 고장이라도 난 줄 알

았네. 잘했소, 형님."

 "개새…끼…드……."

 모사가 눈물을 찔끔거리며 욕을 해댔다. 지들만 살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

양으로 선택한 형제들에 원한 서린 얼굴이었다.

 "영감, 이 짓을 얼마나 해야 되는 거요?"

 소살우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일휘가 갈태독을 향해 물었다. 언제 소살우의

 피를 원했냐 싶게 진지한 표정이었다. 나머지 광견조원 또한 행동이 이상

했다. 방해할 사람이 누구 하나 없을 터인데도 소살우가 운공을 시작하자마

자 그의 주위에 둘러앉아 호법을 서는 것이었다.

 "한 달에서 두 달."

 별일 없이 계속해서 운공에만 매달리면 한 달이면 될 것이고, 아니면 두

달은 잡아야 한다는 소리였다.

 갈태독의 말에 그제야 광견조원들이 한 행동의 의미를 알았다는 듯 남궁세

우와 서문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중에 있던 소환단조차도 거들떠보지도

않던 이들이 왜 갑자기 약 타령인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했었는데 이제야 광

견조원들의 사고방식이 조금씩 이해가 가기 시작한 거였다. 피를 마시고 싶

어서가 아니라 소살우가 자연스럽게 운공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행위였

다. 혼자만 대환단을 복용했던 게 미안해서 운공을 하지 못하고 있는 소살

우를 협박하여 운기행공을 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정(情)이었다.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아도 오가는 행동에 정

(情)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단지 그 정(情)에도 가끔씩은 예외가 있기

마련인데 오늘은 그 대상이 모사가 되었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었다.

 "으으으, 개새…끼…드……."

 "으음!"

 일행 전부가 소살우를 주시하고 있을 때 나직한 신음을 흘리며 패웅이 먼

저 깨어났다. 소살우의 몸에서 나온 영약의 효과가 더 좋았는지 그가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이다.

 '여기는?'

 조금씩 정신이 돌아오자 자신이 처했던 상황이 생각났다. 양이라는 놈의

독에 당했고 그를 제거했던 것까지는 생생하게 떠오르는데 그 다음부터가

가물가물했다. 단지 살기 위해서 움직였다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억이 없었

다.

 '일단 몸은……. 헉!'

 비명이 새어나오는 것을 억지로 삼켰다. 가만히 몸 상태를 점검해보니 독

상의 기운은 전부 사라졌는데 내공을 일으킬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전보다 더욱 깊어진 내공이었다. 자신의 내공과

는 이질적인 기운이 몸속에서 감지되었다. 누군가가 영약을 이용해서 자신

을 구했고 혈도를 봉해 내공을 금제시켜놓은 것 같았다.

 '누가! 왜?'

 의문이 아닐 수 없었다. 영약을 이용해 목숨을 구해놓고 다시 혈도를 짚어

서 힘을 쓰지 못하게 해둔 저의를 짐작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눈을 떠도 상관없네. 해칠 생각은 없으니."

 갑자기 들려오는 말에 움찔 놀란 패웅이 천천히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눈

에 들어온 사람은 백발에 백염 노인이었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창피함이다. 이 사람들이 누구건 간에 생명을 구해주지 않았는가. 아무리

목숨이 중요하다지만 육십이 넘은 나이에 구차한 모습을 보인 것이다. 어차

피 죽었다 생각했던 목숨이고 구해준 저들이 다시 가져간다 한들 미련이 남

을 것도 없다. 그런 생각을 하자 마음이 편해지고 주변을 살펴볼 겨를이 생

겼다.

 주위를 둘러본 패웅의 얼굴에 다시 한 번 놀람의 빛이 어렸다.

 남궁세가의 전대 가주와 독안랑 서문천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천마맹의 무

욕십대고수인 서문천과 정파의 최고 세가라 할 수 있는 남궁세가, 그리고

바로 옆에 누워 있는 화인걸. 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상황

이었다.

 절대 어울리는 사람들이 아닌 것이다.

 오직 무(武)라는 것에 모든 것을 바쳤기에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몰

랐고 지금 그의 앞에 있는 자들이 누구라는 것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패 대협."

 "그렇군요, 오 년 만인가요?"

 서문천과 패웅은 서로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소속이 달랐을 뿐 서로가 무

도를 추구한다는 공통적인 이상을 가지고 있었기에 뜻이 통했던 사람들이었

다.

 "그런데 이 친구는……."

 "그자도 곧 깨어날 걸세."

 "도대체……."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들의 정체가 무엇이기에 자신을 구하고 화인

걸도 구했단 말인가. 남궁지우나 서문천이 있는 것을 보면 결코 평범한 인

물들이 아닌 것은 분명할진대 그 정체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우리가 누구인지 궁금한가? 자네 옆에 누워 있는 젊은이는 잘 알고 있다

네,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를 제거하려 했던 자이니까."

 "영감!"

 "괜찮다, 이 녀석아. 보내줄 것도 아니질 않느냐."

 백산의 신경질적인 반응을 가볍게 일축한 갈태독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갈

태독의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패웅은 할 말을 잃었다.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

 양 맹이 이들을 공격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서로의 동료를 제거하기 위해

서 움직였다니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서문천이 이곳에 있다 함

은 냉추렴의 보호 때문이 아니겠는가. 냉추렴에 관한 일이 아니라면 결코

천마맹에서 움직일 인간이 아니라는 것도 그 역시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어떻게 그런 짓을……."

 설마 그런 저급한 짓을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마도천하를 위한 전쟁인

 줄로만 알았다. 마도를 위해서 전쟁에 참여했고 거의 모든 부하들을 잃었

다. 지금도 그들이 살아 있는지, 아니면 죽었는지 생사도 모르고 있다.

 그런데 지금 치르고 있는 전쟁은 마도를 위한 것도, 정도를 위한 것도 아

니었다. 몇몇 권력자들이 벌이는 추악한 암투일 뿐이었다. 그런 자들을 위

하여 흑기철기병이 희생되었다고 생각하니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찰싹!

 "아, 자식은 깨어났으면 눈을 떠야지, 왜 눈동자는 굴리고 지랄이야! 새끼

야!"

 패웅을 쳐다보고 있던 백산이 화인걸의 귀싸대기를 날리며 소리를 질렀다.

 이미 깨어나 있던 놈이 여전히 눈을 감고 정신을 잃은 척하고 있었던 터였

다.

 '헉!'

 안면에 느껴지는 충격에 자신도 모르게 눈을 뜬 화인걸의 표정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이건 운이 없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었다. 겨우 목숨을 건졌

다고 여겼는데 하필이면 자신이 제거하려 한, 지금도 천무맹에서 쫓고 있는

 자들이 있는 곳이었다. 완전히 호굴(虎窟)로 걸어 들어온 꼴이다.

 차라리 산중에서 죽느니만 못한 입장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누구도 자신에

게 신경을 쓰고 있지 않는 것 같아 혈도를 풀어보려다 들켜버렸다. 게다가

더더욱 기분 나쁜 사실은 바로 자신의 눈을 노려보고 있는 실낱같은 작은

눈이었다.

 얼굴을 가로질러 일자로 나 있는 흉터를 가진 놈이, 눈 같지도 않은 것을

가지고 무지한 살기를 쏟아내고 있다. 그리고 묘하게 비웃고 있는 듯한 입

매라니…….

 "좀 치워주겠나."

 고난은 사람을 성장시킨다는 것이 맞는 말인지, 아니면 지금까지 죽음을

놓고 싸웠던 패웅이 곁에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소심하던 화인걸이 가라앉

은 음성으로 백산에게 얼굴을 치워달라 하고 있다.

 "후! 화인걸이라 했지? 네놈의 아비가 천무맹주고."

 그러나 백산은 그 작은 눈을 화인걸의 얼굴에서 떼지 않은 채 계속해서 노

려보며 주절거렸다.

 얼굴을 직접 보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그런데 이런 겁쟁이 같은 놈들이

 힘 꽤나 있다고 자신들을 공격했다는 게다. 혼자 있으면 지금처럼 벌벌 떨

고 있는 그런 놈들이 여럿이 함께 있으니까 세상의 주인인 줄 착각하면서.

 "왜 떨리나? 아니면 다시 살아났는데 죽일까봐 무섭냐?"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지만 자신의 처지가 불안하여 미세하게 떨고 있는

모습이 백산의 눈에 보였던 것이다.

 "날 잡았다고 모욕을 주는 건가?"

 침착한 모습을 보이고자 나지막하게 소리를 질렀으나 굴욕감과 두려움으로

 인해 얼굴이 붉어지는 것은 막을 수가 없었다.

 "아니? 모욕은 사람이 느끼는 거야, 나 같은 사람이! 알아들어?"

 억지로 참고 있는 것이다. 갈태독이 죽여보라 했을 때는 차마 손을 내치지

 못했는데, 놈이 깨어난 것을 보니 다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이놈의 동

료였던 설검후 때문에 살우의 팔이 잘리고 소령이와 아이들이 죽을 뻔했다.

 자신을 따뜻하게 맞아주었던 화전민 마을 사람들과 그들의 자식들이 죽었

다. 이곳에서 피를 뿌리기 싫었기에, 소령이와 같이 있는 공간이었기에 참

고 있을 뿐이었다. 과거 같았으면 갈태독이 무슨 소리를 했었어도 벌써 죽

여버렸을 것이다.

 "혹시 네가 사람이라 착각하고 있는 것이냐?"

 "건방진 놈, 혈도를 집어놓았다고 우습게 보이더냐?"

백산의 그런 심정을 알 리 없는 화인걸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손을 뻗었다

. 감히 버러지 같은 놈이, 내공만 금제되지 않았다면 상대도 안 되는 그런

놈이 자신에게 인간이 어쩌고저쩌고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갑작스런

분노에, 자신이 포로가 되었다는 입장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무의식중에 손

이 나가고 말았다.

 턱!

 "산아!"

 오른손으로 화인걸의 주먹을 잡음과 동시에 왼손 정권을 날리려는 순간,

갈태독의 외침이 들려왔다. 자신도 모르게 왼손에 붉은 강기막을 형성시켰

던 것이다. 갈태독의 외침이 없었다면 화인걸의 얼굴은 이미 떨어져나갔을

것이다.

 "쿡! 혈도가 풀리면 한 번 해보겠다, 이거냐?"

 화인걸의 눈앞까지 가 있던 왼쪽 주먹으로 그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차갑게

 속삭였다.

 "저기 있는 자들만 없다면 네놈 정도는 우습지."

 도발이었다. 보통, 무사라면 이렇게 자존심을 자극하게 될 때 혈도를 풀어

주고 비무를 하자고 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특히 이놈처럼 혼자만의 피해의

식에 젖어 있는 놈들, 저들 못난 게 잘사는 사람 탓이라 여기며 자신들이

더 낫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놈들은 백이면 백 응하게 마련이다. 없는 자들

의 특성인 것이다. 그럼 기회가 온다. 승패를 가리는 것도 아니고 도망을

치기 위한 방법일 뿐이다.

 "호! 그래? 혈도라……."

 '걸렸다, 이놈!'

 자신의 도발에 혹하는 표정을 보이자 화인걸이 쾌재를 불렀다. 강호 경험

도 별로 없는 초짜라는 말이다. 자신의 도발에 바로 걸려든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놈의 뒤쪽에 창문이 보였다. 삼 장, 한 번의 움직임이면 도망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나……. 나는 혈도를 풀어주기가 싫어, 이 새끼야."

 퍽! 파악!

 "커억! 으윽!"

 "지금 이 상태로 패는 게 더욱 맘에 든다고, 개자식아."

 오른손으로 쥐고 있던 화인걸의 왼손을 끌어당기며 얼굴을 향해 정통으로

정권을 박아 넣었다. 뒤쪽으로 넘어가면 다시 끌어당기고 앞으로 꼬꾸라지

면 무릎으로 차올리며 처음 쥐고 있던 화인걸의 왼손을 끝까지 놓지 않은

채 무자비한 구타를 시작했다. 내공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있지만 육 척의

거구에서 쏟아져나오는 괴력이 화인걸에게는 엄청난 고통으로 다가올 수밖

에 없었다.

 퍽!

 '뚫렸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고통 속에 화인걸이 내심으로 희열에 찬 소리를 질렀다

. 놈의 발길질에 금제되었던 기해혈이 풀린 것이었다.

 '침착해라, 화인걸. 침착해야 한다.'

 얻어맞는 와중에도 들뜬 마음을 진정시키며 사방을 예리하게 살폈다. 누구

도 자신들 두 사람에게 신경을 쓰는 사람이 없었다.

 사실 갈태독이나 다른 이들은 고개를 돌려버렸다는 게 옳은 말이었다. 처

음 죽이고자 했을 땐 말렸지만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은 차마 말릴 수 없었다

. 화풀이를 하도록 두어야 함이다. 모두들 고개를 돌려 외면하고 있는 가운

데 묵창 패웅만은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화인걸의 몸에 백산의 정권

이 작렬할 때마다 몸을 움찔거리며 말이다.

 '기회다!'

 얼마나 맞았는지 온몸에서 감각이 사라진 것 같았지만 단 한 번의 기회를

잡기 위해 백산의 행동을 감시하고 있던 화인걸의 눈이 빛났다. 이빨마저

전부 부서졌는데 놈은 또다시 자신의 안면을 향해 주먹을 내뻗고 있는 것이

었다.

 거의 무방비상태로 맞고 있었기에 이번에도 놈은 아무 생각 없이 주먹을

뻗고 있다. 순식간에 내공을 끌어올린 화인걸이 오른손을 쾌속하게 내뻗었

다.

 '이거 한 방이면 탈출하는 거다, 놈!'

 "커억!"

8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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